제작 노트
About Movie
숫자로 읽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그리고 <환상의 빛>
1 ‘고레에다 히로카즈 클래식’의 첫 출발점
<환상의 빛>은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첫 장편영화이다. 이후 <원더풀 라이프>(1998), <아무도 모른다>(2004) 등을 거쳐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2013), <바닷마을 다이어리>(2015)까지 ‘고레에다 히로카즈 표’ 영화 세계는 마음을 울리는 섬세하고 따뜻한 이야기로 작품성과 흥행성을 동시에 인정받았다.
2 소설과 실존 인물, <환상의 빛>이 탄생하기까지
<환상의 빛>은 익히 알려진 대로 일본 순 문학을 대표하는 소설가 미야모토 테루의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했다. 아내가 죽은 남편에게 보내는 편지를 담은 서간 문학으로 마음에 깊은 울림을 전해주는 소설이다. 하지만 이외에도 또 하나의 모티브가 존재한다. 다큐멘터리 연출가였던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보건복지부 고위관리의 자살을 파헤친 <그러나… 복지를 버리는 시대로>(1991)를 찍으며, 홀로 남겨진 미망인으로부터 <환상의 빛>의 영감을 얻고 죽음과 상실의 테마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4 죽음 가까이의 삶
<환상의 빛>은 갑작스럽게 생을 떠난 남편 ‘이쿠오’의 그림자를 지고 살아가는 ‘유미코’의 이야기를 그린다. 갓난아기와 함께 남겨진 ‘유미코’는 몇 번의 사계절을 흘려 보내고 재혼도 하지만, 불현듯 일상을 파고드는 ‘이쿠오’의 기억을 떨칠 수가 없다. 이처럼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에는 늘 죽음의 그림자가 존재한다. 감독은 말한다. "죽음이라는 것은 살아있다는 것을 생각하기 위한 도구가 아닐까" 그는 죽음 그 자체보다, 상실의 아픔을 안고 그럼에도 살아가는 남겨진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7 7년의 시간도 메울 수 없는 ‘상실’의 아픔
어린 시절, 치매에 걸린 할머니가 행방불명 됐다. 성인이 된 이후에도 할머니에 대한 기억은 종종 ’유미코’의 일상을 파고들고, ‘유미코’는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라온 친구 ‘이쿠오’와의 결혼 후 조금씩 안정감을 찾아간다. 하지만 느닷없이 찾아온 두 번째 이별. ‘이쿠오’가 세상을 떠난 그날 밤, ‘유미코’는 다시금 상실의 아픔 속에 내던져진다. ‘이쿠오’의 죽음에도 계절은 흐르고, 7년의 시간이 흘러 ‘유미코’는 다시금 행복한 일상을 찾는다. 하지만 여전히 ‘이쿠오’의 기억은 불현듯 찾아오고, 상처는 아물지 않은 채이다. 우리는 누구나 ‘유미코’와 같이 무수한 상실을 경험한다. 가족, 연인, 친구, 혹은 교문 앞에서 만난 노란 병아리까지. 상실의 시간은 평범한 일상 속으로 물드는 듯 보이지만 기억은 불현듯 찾아오고 슬픔과 그리움의 감정들은 다시금 생생하게 살아난다. 이렇듯 ‘유미코’의 이야기는 모두가 경험한, 바로 우리의 이야기이다.
10 전율의 클라이맥스 10분에 주목하라
관객들이 만장일치로 꼽는 최고의 명장면은 클라이맥스 10분이다. 롱샷, 롱테이크 기법으로 인물의 감정에 깊이 개입하지 않은 채, 담담하고 관조적인 시선으로 일관하던 영화가 엔딩에 이르러 참아왔던 감정을 쏟아낸다. 아무에게도 속내를 말하지 못한 채 혼자 아픔을 삭여왔던 ‘유미코’의 감정이 폭발하는 순간, 영화는 억눌러왔던 눈물을 터뜨리며 관객들의 가슴에 진한 파동을 불러일으킨다.
11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시작과 현재
7월 7일 개봉을 앞둔 데뷔작 <환상의 빛>, 뒤이어 28일 찾아오는 11번째 신작 <태풍이 지나가고>. 이로써 올 여름 관객들은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시작과 현재를 동시에 만나볼 수 있게 되었다. 특히, <환상의 빛>은 지금의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을 있게 한 작품이기에 관객들에게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가는 뜻 깊은 시간을 선물할 것이다.
20 20년의 시간을 넘어 극장 최초개봉
<환상의 빛>은 그간 몇 차례의 특별전으로만 국내 상영되었고,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팬들은 번번이 이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해왔다. 때문에 2016년 7월 7일 <환상의 빛> 정식 개봉 소식은 연일 뜨거운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개봉을 기념하기 위해 특별 상영된 CGV아트하우스 ‘스크린문학전2016’, 제 4회 무주산골영화제에서는 전회 매진을 기록, 관객들의 뜨거운 관심을 입증했다.
33 33세 청년, 그렇게 거장이 된다
지금은 명실상부 일본의 거장이 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출발점부터 날랐다. 본래 소설가 지망생이었던 감독은 이미지의 매력에 사로잡혀 다큐멘터리 제작소로 들어가게 되고, 다수의 작품을 통해 가지각색의 사연을 지닌 인터뷰이를 만나며 그들의 삶을 담은 극 영화를 꿈꾸게 된다. 33세라는 적지 않은 나이, 그가 내놓은 첫 장편영화가 바로 <환상의 빛>이다.
1995 영화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데뷔작
<환상의 빛>은 1995 베니스 국제영화제에서 촬영상(황금오셀리오니상)을 비롯해, 가톨릭협회상, 이탈리아 영화산업협회상을 수상하며 3관왕의 쾌거를 거머쥐었다. 또한 아시아 신인감독의 등용문인 1995 벤쿠버 국제영화제 용호상을 수상해 세계 영화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이외에도 로테르담, 샌프란시스코, 시카고 국제영화제 등 유수의 영화제에 잇따라 초청돼 ‘영화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데뷔작’이라는 호평을 받았다.
씨네21 리뷰
<환상의 빛>
제작된 지 20여년 만에 처음으로 국내 개봉하는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장편 극영화 데뷔작이다. 유미코(에스미 마키코)에게 남편 이쿠오(아사노 다다노부)의 부고가 전해진다. 경찰은 이쿠오가 선로 위를 걷고 있었고, 달려오는 기차를 피하지 않았다고 전한다. 사실상 자살이다. 전조는 없었다. 둘은 어릴 때부터 한동네에서 자란 친구였다. 서로에 대해 잘 알았고, 여전히 사랑했다. 최근에는 3개월이 된 아들 유이치를 맡겨두고 단둘이 데이트도 했다. 그녀는 시신을 확인하려 했지만, 경찰은 알아볼 수 없을 것이라며 만류한다. 남편이 남긴 것은 그녀가 남편에게 줬던 방울 모양의 열쇠고리다. 그로부터 몇년의 시간이 흐른다. 유미코는 이웃의 소개로 만난 타미오(나이토 다카시)와 재혼을 결심하고 집을 떠난다.
영화의 도입부, 치매에 걸린 할머니가 가방을 들고 큰 도로를 향해 걸어가는 뒷모습이 보인다. 할머니가 코너를 돌아 시야에서 사라진 뒤 굉음이 들려온다. 혹시 사고를 당한 걸까. 다행히도 다음 컷에서 할머니는 뒤따라간 어린 손녀 유미코와 마주한다. 손녀의 만류에도 할머니는 떠난다. 암전 속에서 목소리로만 진행되는 다음 컷에서, 유미코는 이쿠오에게 꿈을 꿨노라고 말한다. 환한 꿈과 검은 현실의 대비는 관객에게 삶과 죽음의 자리를 뒤바꾸어볼 것을 제안하는 듯하다. 남편의 죽음을 눈으로 확인할 수 없었던 유미코에게 죽음이란 사라지는 것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도착한 것(열쇠고리)에 가깝다. 이는 감독이 왜 줄곧 죽음을 그려왔는지, 그러면서도 그것이 죽음으로 읽히는 것을 부정해왔는지를 보여준다.
공들인 흔적이 여실히 묻어나는 미장센과 사운드는 그것이 인물의 사연, 감정과 조응하는 방식으로 기능하기에 결코 공허하지 않다. 다큐멘터리스트에서 출발한 감독은 취재 중 알게 된 어느 미망인의 이야기와 미야모토 데루의 동명 소설을 바탕으로 이 작품을 만들었다. 영화의 이야기는 서사에서 동떨어진 것으로 보이는 인물을 품을 때 빛을 발한다. 이를테면 자신의 라디오 소리를 참아준 유미코 가족에게 작은 사탕을 작별 선물로 준 옆집 노인의 이야기 등이 마음에 박힌다. 외로움의 연대를 직조해온 감독의 작품 세계의 뿌리가 또렷이 느껴지는 영화다. 글 김소희(영화평론가) 2016-07-06
출처: 씨네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