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뭐? 오피스텔?"
오피스텔이란 말을 들은 정 회장의 눈썹이 험상궂게 치켜올라갔다. 왠만해선 자신의 감정을 표내지않는 정 회장이었지만 딸 하연이 사내와 오피스텔로 들어갔다는 말을 들었을땐 무척이나 놀란듯 하다. 정 회장만큼이나 말을 전하는 윤 비서 역시 곤역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여지껏 한번도 없었던 일이기에 처음 말을 전해들었을때 윤 비서 역시 당혹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택시를 탄 두 사람이 오피스텔로 들어갔다는 말을 들었을때도 놀라웠는데 결국 건물 입구에서 그들을 놓쳐버렸다는 말을 들었을땐 눈 앞이 캄캄해지는 듯 했다. 무슨 일을 그따위로 하는냐고 화를 내 보긴 했지만 잠깐 사이 그들이 들어간 오피스텔의 호수를 찾지못했다는 말이 왠지 이해가 됐다. 다급하게 몇몇집의 벨을 눌려봤지만 늦은시간 수상한 방문객을 달가와하는 사람들은 없었을테고, 결국 관리원에 의해 쫓겨난던 그들은 힘없이 발길을 돌릴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정 회장의 이마에 불편한 힘줄이 나타나며 목소리가 잠긴다.
"어떤 놈인지는 알아봤어?"
"아직 확실히는 알수가 없습니다. 이름이 찬혁이라는 것 밖에....."
"찬혁?"
"아가씨께서 그분을 그렇게 불렀다고 합니다."
"그럼 그전부터 알고 있던 사이라는 건데......."
"아마도.......르네상스에 차를 놔두시고는 무작정 걸으시다 우연히 만나신것 같습니다. 아가씨께서 먼저 그분께 술을 사달라고 하셨답니다."
"하연이가 먼저? 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라면 왜 보고가 없었지?"
"그건 저도 아직 보고받은게 없습니다. 아가씨께서는 한달전쯤 재료를 구입하려 외출하신것 외에 없었다고 합니다. 그전까지 아가씨가 만나신 분들 중에는 찬혁이라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정 회장은 하연이 찬혁이라는 사내를 어떻게 만나게 됐는지가 궁금했다. 더구나 함께 술을 마시고 그 사내의 오피스텔로 들어갔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곤역스럽게 느껴졌다. 여지껏 하연과 관련된 사람은 모조리 알고 있다고 생각했었던 정 회장이기에 찬혁의 출현은 뜻밖이기만 하다.
"그 놈, 느낌이 어땠어?"
"겉 모습만 봤을땐 여자들이 꽤 호감을 가질만한 인상이였습니다. 얘들 말로는 술자리 매너도 괜찮아 보였다고 하구요."
"그 놈에 대해 자세히 알아봐. 하연이와 어떻게 만난건지도 알아보고."
"네."
정 회장은 그간 자신에게 반항이라도 하듯 연애 한번을 안하던 하연이 남자와 술을 마셨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 여지껏 대학을 다니면서도 쉽사리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았던 하연이다. 피치못하게 술자리를 하더라도 금세 자리를 털고 나오곤 했었다. 항상 하연의 주변으로 사람을 붙였던 정 회장이었기에 딸 아이 주변의 모든 사람에 대해 보고를 받고 알고있다고 생각했었다. 헌데 뜻밖의 사내와 술을 마셨다니, 더구나 그 사내의 오피스텔까지 갔다는 사실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다. 윤 비서가 나간 뒤, 의자 깊숙히 몸을 묻은 정 회장은 깊은 한숨을 몰아쉰다.
"찬혁이라.......대체 뭐 하는 놈이지?"
"아이고 머리야........."
혜진은 베개에 얼굴을 뭉기적 대며 끙끙거리다 겨우 눈을 떴다. 머리를 부여잡고 겨우 몸을 일으키고 앉은 혜진의 옆에서 누군가가 술냄새를 풍기며 잠들어있는게 보였지만 별로 게의치않는듯 하다. 아직 잠에서 덜 깨어난 자신을 찰싹 찰싹 때리다 문득 아무것도 입지 않은 자신의 알몸을 보았다.
"아이고, 술이 웬수다. 술이....헉!!!!!! 이게 뭐야?"
혜진은 화들짝 놀란 펄쩍 떨어질 듯 침대에서 뛰어내려 주위에 흩어져 있는 자신의 옷들을 주워 끌어안았다. 뭐지? 술김에 더워서 옷을 벗어던졌나? 하지만 평소에 없던 술버릇이라 상황이 이해가 되질 않는다. 그러다 방금까지 자신이 누워있던 침대 옆자리에 그녀와 마찬가지로 맨살을 드러낸채 엎드려 잠든 사람을 보았다. 애써 하연일거라 마음을 다독였지만 떡 벌어진 넓은 어깨를 그대로 들어낸채 잠든 모습은 아무리 잠이 덜 깼다고 하더라도 하연이라기엔 너무나 덩치가 크다. 조심스럽게 잠들어 있는 사람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기절할듯이 놀라 비명이라도 지를 것 같은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혜진은 자신과 한 침대에서 알몸으로 자던 사람이 다름아닌 도현이라는 사실에 놀라움과 경악을 금치 못했다. 혜진은 엉금엉금 기다시피 자신의 방을 빠져나와 후다닥 하연의 방으로 뛰어들어갔다. 혜진은 서둘러 옷을 챙겨입고는 하연의 침대에 털썩 주저앉아 이내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었다.
"도대체 뭐야? 저 인간이 왜 여기있는거지? 내가.....그러니깐 저 사람이랑 그런거야? 아니 왜? 어째서?"
혜진은 어제 밤의 일을 떠올려보려 머리를 쥐어뜯으며 아무리 애를 써봐도 딱히 기억나는게 없다. 그때 드르륵 문을 여는 소리가 들리자 혜진은 얼른 하연의 침대속으로 뛰어들어 이불을 뒤집어썼다. 잔뜩 잠긴 듯 흠흠거리는 인기척 소리가 들리더니 이어 조심스럽게 미닫이 문을 여는 소리가 들리며 도현이 얼굴을 쑥 들이민다.
"혜진아~"
후다닥거리는 인기척에 눈을 뜬 도현은 자신이 누워있던 낯선방에 잠깐 어리둥절했지만 이내 혜진의 방이란 걸 기억해 냈다.주섬주섬 옷을 챙겨입고는 밖으로 나온 도현은 혜진을 찾아 하연의 방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새벽까지 하연이 돌아오지않은걸 알고는 있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생각에 조심스럽게 방문을 연 도현의 눈에 머리끝까지 이불을 뒤집어쓴채 누워있는 누군가가 보였다. 낮게 혜진의 이름을 몇번 불러보지만 대답이 없자 이내 방문을 닫아주고 나간다. 도현은 숙취가 밀려오는 머리를 통통 때리며 부엌으로 가 커피를 찾았다.
"아이고~ 하나만 마셔야지 짬뽕으로 마셨더니 진짜 머리아파 죽겠네."
뜨거운 커피를 한잔 만든 도현은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렇게 커피 한모음을 마신 도현은 혜진과 함께 마신 술병과 안주거리들이 아직도 거실 바닥에 뒹굴고 있는것을 보고있자니 어젯밤의 일이 떠올라 피식 웃음이 났다.
"결혼 안 할거야?"
"글쎄? 굳이 해야하나? 연애만 해도 충분할 거 같은데...."
빙글빙글 장난스럽게 술잔을 돌리던 혜진은 결혼 얘기를 꺼내는 도현을 배시시 흘겨보았다. 그 눈길에 도현은 흠짓 가슴이 내려앉는것만 같았다. 장난스럽게 배시시 웃는 혜진의 모습이 너무도 요염하게 느껴졌기에 술이 확 깨는 기분이었다. 그녀가 많이 취해있다는 걸 알고 있고, 또 그녀의 행동이 이런 취기에서 나온 장난임을 알고 있었지만 슬금슬금 유혹하듯 그에게 얼굴을 들이미는 그녀를 보며 도현은 얼굴이 확 달아올라 당황스럽기만 했다.
"어....어.....야! 왜 그래!"
"나랑 연애 할 생각 있어?"
"연애? 연애는 무슨~ 결혼을 해야지. 내 나이가 지금 서른이다."
"누가 결혼하지 말래? 긴장하지마, 오빠 하연이 보러 온거 다 아니깐."
혜진의 입에서 하연의 이름이 나올때마다 도현의 표정은 눈에 띄게 굳어졌다. 왜 자신이 하연을 보려왔다고 저렇게 확신을 하는건지. 도현은 조금전까지 혜진의 입을 통해 들어온 과거사를 되새기며 분명 그녀가 하연에게 주눅이 들어있거나, 기죽어있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은듯 배시시 웃고는 있지만, 항상 움추려 살아온게 분명하다. 둘을 놓고 본다면 분명 하연쪽이 가녀리고 여성스러운 면이 뭇 남성들에게 보호본능을 자극하고 있지만, 혜진 역시 그에못지않게 매력적이다. 털털한듯 보이시한 매력이 그로 하여금 붉은 와인을 떠올리게 한 여인이다. 하지만 부모님조차 계시지 않는 혜진은 김 여사의 기준으로 볼 때 무엇하나 충족시킬만한 조건이 없다는 걸 잘 알고있다. 아무리 자신이 죽는다 난리를 쳐봐도 김 여사는 결코 용납하지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한숨이 절로 나온다. 도현은 갑자기 화가 치밀어 오른다. 아직 연애는 시작도 하지않았는데 왜 벌써부터 이런 걱정을 해야하는건지, 더구나 상대는 자신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딴 소리만 지껄여대고 있는데, 가만 생각해 보니 혼자 안달복달하는게 아닌가 싶다. 아~ 잘 나가던 이 도현이 왜 이곳에만 오면 이렇게 초라해지는거진 모르겠다.
"하연씨 얘기 하지마!! 너와 나! 둘 얘기만 해!!"
갑작스럽게 화가 난듯 목소리를 높이는 도현을 보며 혜진은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너무 정곡을 찔렀나? 그렇다고 저렇게 화를 낼 필요는 없는데, 깐깐해 보이는 찬혁과는 다르게 서글서글 매력적인 웃음을 짓는 도현이 나타났을때 그는 분명 하연을 보고 있는 듯 했다. 흘깃흘깃 훔쳐 본 그의 옆모습은 사람좋은 웃음으로 하연을 향해 웃고 있었다. 굳이 핑계를 만들어서까지 이곳을 찾아온게 하연때문인걸 아는데, 그걸 그리 섭섭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어차피 여지껏 만나온 많은 남자들이 하연에게 호감을 가졌던것처럼 도현 역시 하연에게 호감을 느꼈다는 걸 잘 아는데 말이다.
"너는!!! 너는 누구에게 호감을 느꼈는데?"
시무룩하니 고개를 돌리는 혜진의 어깨를 낚아채며 도현이 목소리를 높였다. 진지한 그의 눈을 보며 혜진은 머리가 핑핑 돌아가는 것만 같아 생각을 할수가 없었다. 누구에게 호감을 느꼈냐고? 누구에게 느꼈건 상관없이 모두들 하연이를.......
하지만 도현의 눈속엔 자신의 모습이 들어있다는 걸 알아차린 혜진은 더 이상 말을 이을 수 없었다. 그의 눈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본 혜진은 심장이 터질듯 세차게 뛰는걸 느꼈다. 도현이 하연이 아닌 자신을 찾아 이곳까지 왔다는 사실 하나로도 가슴이 벅차오르는걸 느꼈다. 하지만 그녀는 알게모르게 내쉬는 도현의 한숨소리를 들었다. 자신의 처지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있는 그녀였기에 도현의 고민을 미뤄 짐작하는건 그리 힘든일이 아니었다. 혜진은 머리를 흔들었다. 그리고는 반짝 얼굴을 들어 그를 향해 웃어보였다.
"내가 누구한테 호감을 가졌느냐가 그렇게 중요한거야?"
"말 돌리지.....어!"
'어'하는 외마디 소리와 함께 도현은 자신의 멱살을 잡아당긴 혜진에게로 그대로 끌려갔다. 그리고 그대로 그의 입술에 입을 맞추는 혜진으로 인해 더이상 말을 잇지못하였다. 갑작스럽게 덮친 그녀의 입술은 도현의 모든 생각들을 멈추어버렸다. 예기치 못한 그녀의 돌발적인 행동에 당황했던 도현은 이내 그녀의 어깨를 움켜쥐고는 혜진의 입속을 파고들었다. 가지런한 치아를 하나하나 훓으며 말캉하고 부드러운 그녀의 혀를 휘어감았다. 움찔하는 혜진이 도망이라도 갈까봐 그녀의 목덜미를 힘껏 감싸안았다. 집어삼켜버릴듯한 그의 키스에 혜진은 정신이 아찔해졌다. 커다란 그의 손가락이 머리카락을 파고들며 따뜻한 그의 체온이 그대로 전해져왔다. 지금 이순간 그가 원하는게 무엇인지 잘 알고 있는 그녀였다. 또한 그녀 원하고 있었던 것일거다.
'헉!!!! 미쳤어, 미쳤어, 내가 정말 정신이 나갔나봐.'
하연의 침대에 머리를 박고 누워있던 혜진은 하나둘 떠오르는 어젯밤의 기억들로 인해 기절하기 일보직적이 되었다. 도현의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혜진은 자신의 머리를 쥐어박고 또 쥐어박았다. 아무리 술에 취했다고는 하지만 대놓고 남자를 유혹해선 방까지 끌어들이다니, 도현이 도대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까하는 걱정과 함께 민망함이 밀려들어 얼굴을 들수가 없다.
"찬혁이 자식이 말한게 진짜네. 이 집 아가씨들 기상시간이 10시가 넘는다더니..........그나저나 하연씨는 안들어온건가? "
도현은 커피를 마시며 마당을 내려다보았다. 정적에 쌓인 주위가 쉽게 적응이 되지 않는다. 참 이상한 곳이다. 시골 별장을 가도 이런느낌은 없었는데, 이곳에 있으면 왠지 세상과 동떨어진 무인도에라도 와 있는 기분이 든다. 일을 하다가도 문득 문득 이곳이 생각났고, 일을 하는 도중에도 마치 길 잃은 아이처럼 목적을 상실하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었다.
"확실히........이상하고 기분좋은 곳이야."
중얼대던 도현은 문득 만약 어제 일로 인해 집에서 쫓겨나는 일이 생긴다면 이곳에 눌러붙어도 괜찮을거 같다는 생각이 든다. 설마 문전박대는 하지않겠지. 그래도 만리장성을 쌓은 사인데.
도현의 이런 생각과는 무관하게 방안의 혜진은 고민에 휩싸여 안절부절하고 있었다. 계속 이렇게 하연이 방에 숨어있을수도 없고 그렇다고 도현의 얼굴을 바로보자니 민망하기 그지없고, 혜진은 결심을 한듯 번쩍 고개를 들었다.
"그래 지도 술때문에 자세히 기억 못하긴 마찬가지일텐데, 생까는거지 뭐. 모른채 하는 거야. 그럼 되는거잖아."
혜진은 마음을 다잡고 문을 열고 나가 금방 일어난거처럼 기지개를 켰다. 소파에 느긋하게 앉아 커피를 마시던 도현은 아무일도 없었다는듯 기지개를 켜며 나오는 혜진을 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혜진은 그런 도현의 반응이 사뭇 당황스럽기만해 괜히 허둥거리게 된다.
"......잘 잤어?"
"아직 10시도 안됐는데 벌써 일어났네?"
"뭐?"
"찬혁이 자식이 그러던데 이 집에서 기상시간은 10시가 넘어야 된다고......."
"아! ..........근데 회....회사 안가? 왜 여기서 자고 그래."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 이제 갈거야."
도현이 혜진의 말에 마시던 커피를 한입에 털어넣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챙겼다.
"어? 지금 가게? 밥도 안먹고?"
"밥? 속이 좀 쓰리긴 한데.........해장국 있어?"
"해장국은 무슨........기다려봐. 아침 챙겨줄테니깐 먹고 가."
도현은 혜진의 말에 피식 웃음을 지어보였다.
"근데 너.......언제 이 방으로 간거야?"
"에?"
혜진은 도현의 말에 확 달아오르는 얼굴을 돌리며 당황해 어쩔줄을 모른다.벌겋게 달아오르는 그녀의 얼굴을 보던 도현이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린다. 굳이 민망하게 만들 생각은 없다. 하지만 어제일을 아예 없었던 일로 만들고 싶은 혜진의 의도를 그대로 묵인 할수는 없다. 아무튼 오늘은 빨리 이곳을 나가는게 좋을것 같다. 하연도 없는데 이렇게 오래있다가는 좁은 시골마을에서 소문이라도 나면 큰일이다. 옆집에서 사람이 죽어나도 모르는 도시와는 달리 시골에선 말이 빨리 퍼진다는것 쯤은 도현도 잘 아는 사실이다. 괜히 혜진이 자신으로 인해 마을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건 싫은 도현이다. 두말않고 겉옷을 챙겨들고 나가는 도현을 보며 혜진은 아무말도 할수 없었다.
"나중에 찬혁이랑 다시 올께."
문을 열고 나서던 도현이 무슨 생각에선지 혜진에게로 다가왔다. 이제 가나부다하고 한숨을 몰아쉬던 혜진이 갑자기 몸을 돌리는 도현을 보며 흠칫 놀랐다. 도현은 그런 혜진의 입술에 살짝 입맞춤을 하고는 특유의 사람좋은 웃음을 웃어보이고는 차에 올랐다. 도현의 차가 빠져나가는걸 확인한 혜진은 그제서야 다리에 힘이 풀린듯 털석 의자에 주저앉아버렸다.
"다 알고 있어. 다 기억하나봐. 미쳤어. 내가 제 정신이 아니야. 아우~ 하연이는 왜 하필이면 이럴때 안들어오는거야."
그렇게 주저앉은 혜진은 도현의 차가 공방을 빠져나가는 걸 멍하니 보고있다 자신의 머리통을 쥐어박기 시작했다. 그렇게 자신의 머리통을 쥐어박던 혜진은 애꿎은 하연에게로 원망을 돌리고 있었다.
그 시각 찬혁의 오피스텔 침대에서 눈을 뜬 하연은 자신이 어디에 와 있는지를 몰라 한참을 어리둥절했다. 호텔이라하기엔 인테리어가 너무 심플하고, 그렇다고 모텔이거나 여관에 들어왔을리는 없다. 사진 한장 걸려있지 않은 깨끗한 방을 두리번 거리며 둘러보던 하연은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왔다. 그리 크지않은 평수의 오피스텔은 혼자살기에 적당한듯 하다. 주인을 찾으려고 이곳 저곳을 기웃거렸지만 사람은 커녕 주인을 확인할만한 그 어떤 단서도 눈에 띄지 않았다.
"도대체 여기가 어디지? 윤 비서님이 데려왔나?"
하지만 그도 이해가 안되는것이 평소의 윤 비서님이라면 자신이 있는곳은 별장이나 호텔이여야 한다. 그런데 집도 아니고 그렇다고 호텔도, 별장도 아닌 이런 낯선곳에서 눈을 뜨다니 하연으로써는 익숙치 않은 일이었다. 전화 벨이 울린건 그때였다. 요란하지도 크지도 않은 벨소리를 들으며 전화기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망설이던 하연이 수화기를 들었다. 분명 아버지나 윤 비서일거라 생각했던 하연의 귀에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일어났어요?>
".........누구세요?"
<후후훗........집 주인인데요.>
"집....주인?"
<어제 같이 술 마셨는데 기억 안나요?>
"아!!! 그럼 여기가......."
하연은 그제서야 어젯밤 일이 떠올랐다. 그리곤 지금 자신이 찬혁의 집에서 하루밤을 보냈다는 사실에 무척이나 놀라고 있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다. 보이는건 아니지만 서울에 있는 한, 항상 그림자처럼 자신에게 사람을 붙이고 있다는걸 잘 아는 하연이기에 윤 비서님이 어째서 자신이 이곳까지 오도록 내버려뒀는지 이해가 되지않았다. 뜻밖의 상황에 하연은 놀라기도 했지만 또 한편으론 재밌다. 그가 어떻게한건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을 집으로 데려온걸 보면 그들을 따돌렸다는 얘기인데, 난감해하고 있을 윤 비서와 보고를 받은 아버지 역시 난감해하고 있을걸 생각하니 지금 이 상황이 무척 신기하고 재밌기만 하다.
<지금쯤 일어날것같아서 전화한겁니다. 남자 혼자 사는 집이라 먹을게 없어요. 냉장고에 우유있으니 그거라도 마셔요.>
"아~"
하연은 쉽게 대답을 하지못했다. 지금의 상황이 무척이나 흥미롭기는 하지만, 어제의 자신이 잘 기억이 나지않았기에 뭐라 딱히 대답할 말이 없다. 이런 하연의 생각과는 달리 하연의 애매한 대답을 들은 찬혁은 슬며시 걱정이 앞선다. 혹 어제 술로 인해 숙취에 시달리는건지, 약이라도 사다줘야하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의 말에 하연은 손사래까지 치며 아니라 대답을 했다.
"아.....아뇨. 그런게 아니라 그냥 제가 뭐 실수한거 없나 해서...........근데 제가 어떻게 여기서 잠은 잔건지.........."
소리가 들려오는건 아니지만 수화기 넘어의 그가 웃고 있는것 같다.
<실수한거 없어요. 실은 호텔을 잡아주려고 했는데 이상한 남자들이 계속 하연씨를 따라다니는거 같아서 제 오피스텔로 데려간겁니다.>
"이상한 남자요?"
<거짓말하는거 아닙니다. 혹시 이상한짓이라도 했을까봐 그러는 겁니까?>
"아...아니 그렇다는 말이 아니라........아무튼 신세를 졌네요."
<뭐 그정도 가지고........수건 새로 꺼내놨으니깐 세수를 하든 샤워를 하든 그건 알아서 해요. 그리고...........으~흠.......>
무슨 말을 하려는건지 그가 한껏 목소리를 낮추고 있다.
"..........?........"
<그렇게 바쁜게 아니면 점심 같이 할래요? 아니........시간이.......좀 있으면 점심시간이거든요. 나도 아직 해장도 못했고...........정 바쁘면.............>
"아...아뇨. 먹어요 점심...........같이 먹어요."
<그럼 조금만 기다려요. 내가 그쪽으로 갈테니깐.>
점심을 같이 하자며 어색하게 말을 내뱉은 찬혁은 긍정의 답을 해주는 하연이 무척이나 고맙다. 단박에 거절하면 어쩌나 긴장했던것도 사실이다. 찬혁은 한번도 본적이 없는 자신의 어색한 모습이 한편으로는 낯설고 당혹스럽지만 또 한편으로 설레이고 있다는게 즐겁다. 내심 혹시 자신을 집으로 데려간 것에 대해 화를 내거나 하면 어쩌나 걱정했었는데 그래도 신세를 졌다는 말을 하는걸 보니 다행이다.
반색의 기가 역력한 그의 전화를 끊는 하연 역시, 괜시리 웃음이 났다. 많은 시간을 함께한건 아니지만 그래도 지금껏 보아왔던 찬혁은 무척이나 딱딱하고 재미없는 사람처럼 보였었다. 융통성 없이 곧이곧대로 해야하는 뭐 그런류의 사람처럼보였는데 그런 단정한 이미지의 그에게서 왠지 빈틈을 찾아낸 것 같아 재미있다. 더구나 윤 비서님까지 물리쳐 줬으니 오늘 아침처럼 흥미진진했었던 하루의 시작이 있었나 싶다. 과연 윤 비서님이나 아버지는 이런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실까? 상상만으로도 왠지 오늘 하루 그야말로 스팩터클하게 보낼것만 같다.
"뭐야? 너 제정신이야? 남자집에서........아~휴 아무래도 제 정신이 아니야."
하연은 왠지 즐겁다. 기지개를 켜며 욕실로 들어서자 세면대위에 포장도 안뜯은 새 칫솔이 놓여있었다.
"이 아저씨 되게 꼼꼼하네. 후훗..........근데 윤 비서님이 보낸 사람들을 어떻게 따돌린거지? 아무튼 갑자기 윤 비서님이 고맙게 느껴진단 말야."
양치를 하는 하연의 입에선 저절로 콧노래가 흥얼거린다.
첫댓글 ㅎㅎ 드디어 도현과혜진 찬혁과 하연 두쌍의연인이
탄생하는순간이네요 ^^~~
앞으로 하연아버지와 하연의
줄다리기와 두쌍의 달달한 사랑이야기가 기다려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