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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3년 전 다녀왔던 인도를 또 다시 가게 되었다.
이번엔 남인도와 스리랑카다.
인도를 다녀온 후 심한 가슴앓이를 했었고 그리움의 대상이 되었기에 인도는 나에게 꼭 다시 가야할 곳이 되어버렸다.
인도는 중독성이 강하다.
있을 때는 밉고 싸우고 안보고 싶은데, 못 보면 보고 싶어 병나는 애인 같다.
그리고 스리랑카는 어느 날 텔레비전에서 본 후 바로 필이 꽂혀 버렸는데, 2009년 긴 내전을 끝내고 막 세상에 얼굴을 드러낸 순수한 땅이라 상업화되고 오염되기 전에 빨리 가보고 싶은 마음이 컸다. 남인도와 스리랑카는 한 시간 거리이기에 여행기간이 좀 길긴 했지만 묶어서 가기로 했다.
1월 2일(1일째)
부산 출발, 뭄바이로!
이번 여행은 총 일곱명이 참여했는데, 이미 스리랑카를 다녀오신 두 분은 남인도만 18일 일정으로, 나머지 다섯 사람은 남인도, 스리랑카 27일 일정으로 길을 떠났다.
우리나라는 겨울인데 남인도와 스리랑카는 적도에 가까운 더운 지역이라 얇은 경량 거위 털 점퍼 하나 걸치고 새벽의 찬 공기를 가르며 공항으로 향했다.
홍콩을 경유하여 뭄바이에 도착하니 밤 열시가 이미 훌쩍 넘어 있었다.
도착 비자를 신청한 터라 귀찮은 입국 수속을 밟을 후에 밤 12시 다 되어 낡고 좁아터진 숙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새벽에 일어나 숙소 도착까지, 꼬박 하루가 걸린 이동이었다.
우리 팀 일곱 명에 울산에서 혼자 여행 온 미라 선생님이 합류하여 여덟명이 한 팀이 되어 여행 첫날밤을 맞이하게 되었다.
더럽고 좁은 숙소였지만 이동에 지친 나는 피곤에 절어 바로 잠에 떨어졌다.
1월 3일(2일째)
뭄바이 시내 둘러보기
뭄바이를 3년 만에 다시 찾았다.
인도 오기 전 인도 최고급 호텔이자 인도의 자존심인 타지마할 호텔에서 잠은 못 자 봐도 식사는 해봐야겠다고 생각했기에 일어나자마자 릭샤를 타고 조식을 먹으로 갔다.
들어가는데 검문검색을 받았다.
예전 타지마할 폭탄 테러 사태도 있는데다 인도가 분쟁지역이기 때문인 듯하다.
고급스런 인테리어와 분위기, 그리고 맛있는 음식에 비싼 가격임에도 무지 만족했다.
우리는 여행의 시작을 매우 럭셔리하게 했는데, 힘든 여행을 앞 둔 충전의 의미도 있었고, 또한 인도에서 가난한 배낭여행자가 겪을 앞으로의 가난을 염두 해 두어 인도 최고의 상류 문화도 접해보고 싶기도 해서이다.
우리 여덟명과 다섯 손가락으로 꼽을만한 수의 인도인을 제외하고는 손님 대부분이 백인이었으니, 결국 인도의 럭셔리한 호텔과 레스토랑은 부자 나라 사람들의 차지였다.
타지마할 호텔은 맛있는 레스토랑의 음식도 좋았지만 호텔 내부에 볼거리가 풍부했고 화장실도 최고였다.
일을 보고 손을 씻으면 예쁜 아가씨가 손을 닦으라고 하얀 면 손수건을 건네준다.
화장실에서 여행 온 고모와 조카를 만났는데 우리는 여행 정보를 주고받으며 동족의 정을 나누었고 서로의 여행을 축복 해 주며 화장실 배경 기념촬영까지 했다.
그날 우리는 뭄바이 시내를 돌아다니며 몇 번이나 타지마할 호텔의 화장실을 이용했는데 들어갈 때 마다 검문을 받았지만 호텔 이용객이 아닌 인도 일반인들은 호텔 출입을 금한다는 것을 알고는 외국인이기에 받는 혜택이라 생각되어 귀찮다는 생각을 할 수 없었다.
화장실이 거의 없는 인도에서, 그것도 사람들이 바글바글한 인디아게이트에 위치한 타지마할 호텔이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회장실을 개방할 경우를 생각해보니 인도인들에게는 미안했지만 호텔 입장에서는 수긍이 갔다.
타지마할 호텔을 나와서 정애샘, 정화샘, 미라샘, 주영샘은 엘리펀트섬으로 가고, 3년 전 엘리펀트섬을 이미 가 봤던 나와 순애샘, 영순샘, 경남샘은 걸어서 프린스 오브 웨일즈 박물관에 갔다.
프린스 오브 웨일즈 박물관은 인도 사라센 풍의 건물로 무굴 제국의 세밀화 컬렉션으로 유명한 곳인데, 16세기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힌두, 이슬람, 티베트의 탱화, 세밀화 등이 전시되어 있어 볼거리가 제법 풍부했다.
프린스 오브 웨일즈 박물관을 나와서 우리가 간 곳은 국립현대박물관이었는데 입장료 150루피가 아까울 정도로 별 볼 것이 없었다.
그 다음 간 곳이 제항기르 아트 갤러리였는데 입장료도 공짜인데다 현대 인도 미술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으며, 무엇보다도 인도 특유의 아름답고 강렬한 색감에 감동을 받았다.
그리고 만났다.
제항기르 아트 갤러리 옥상에 위치한 테라스 갤러리에서 전시회를 하고 있는 한 젊은 인도 작가를.
그의 포토 그래픽전을 보며 나는 한 남자의 치열한 자신과 신에 대한 탐구와 고뇌를 느꼈는데, 그는 이 과정을 통해 나이 들어 세상을 더 이해하고 사랑하는 따뜻한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이다.
그때 그가 세상은 살만한 것이라고 생각하길 바라며 전시장을 빠져 나왔다.
계속 걸으며 뭄바이 도보 여행을 했는데 고등법원은 비록 입장이 금지되어 밖에서 외관만 보았지만 건축물이 주는 아름다움과 위용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그 나라에 가면 대학을 봐야 그 나라의 지성과 미래를 볼 수 있을 것 같아 뭄바이 대학을 찾았지만 그 역시 외부인의 입장을 허락하지 않아 성토마스 성당을 본 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차뜨라빠띠 시바지역(일명 빅토리아 터미너스)에 갔다.
차뜨라빠띠 시바지역은 빅토리아 시대 영국풍의 양식에 힌두, 이슬람 양식이 뒤섞인 기차역 같지 않은 건축물로 19세기 말 인도 최초로 기차가 운행된 역사적인 곳이다.
차뜨라빠띠 시바지역의 겉모습을 보면 마치 화려한 궁전을 연상시킬 만큼 아름답지만 내부로 들어가 보면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혼잡한 일반 기차역이다.
날씨가 더워 걸어가는 걸 포기하고 택시를 타고 꼴라바 거리로 갔다.
3년 전처럼 여전히 꼴라바는 혼잡했고 매연도 심했지만 그 거리를 걷는 나의 시선은 상당히 바뀌어 있었다.
예전의 가난과 더러움, 혼잡함, 매연 등의 부정적인 이미지에서 그들만의 문화, 예술, 여유, 자부심, 역동감 등을 느낄 수 있었는데 뭄바이는 3년 동안 상당히 변모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고, 그 변화는 나에게 매우 긍정적으로 다가왔다.
한 도시를 두고 3년 전에는 부정적인 면을 보았다면 이번엔 긍정적인 면을 본 뜻 깊은 시간이었다.
맥도날드에서 햄버거로 간단한 점심을 대신하고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쐬며 쉬다가 뜨거운 햇살이 누그러지는 시간에 인디아게이트로 향했다.
아라비아해를 바라보며 한없이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고 싶었지만 이는 우리의 바람일 뿐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주말을 맞아 수많은 현지인들이 나들이를 나왔는데 동양인이 신기한 듯 뜨거운 관심을 받았을 뿐 아니라 함께 사진을 찍자는 사람들로 인해 잠시를 쉴 수 가 없었다.
아이돌 인기 못지않은 뜨거운 관심과 카메라 세례로 우리는 서서히 지쳐갔지만 누군가에게 특별한 추억을 선사한다는 생각에 기쁜 마음으로 사진 촬영에 임해 주었다.
얼마나 오래 웃고 있었던지 입 주변이 마비될 지경이었으니 연예인의 고충을 체험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시원한 밤바람을 가르며 마린 드라이브의 밤 풍경을 즐기며 택시를 타고 숙소로 돌아왔다.
숙소의 옥상 화장실에서 대충 씻고 고아를 향해 밤기차에 몸을 실었다.
예전 북인도에서의 기차에 대한 기억들이 떠올랐다..
연착, 그냥 연착이 아닌 지나친 연착으로 인해 역에서 밤새 추위와 졸음에 괴로워하던 기억, 침낭 안으로 공격에 들어오던 다섯 마리의 바퀴벌레들, 얼굴 표정까지 보였던 어마 어마하게 큰 쥐, 공포스럽던 더러운 화장실.
근데 남인도의 기차는 이래도 된단 말인가.
정각에 들어올 뿐 아니라 바퀴벌레도, 쥐도 없을 뿐 아니라 화장실까지도 깨끗하다.
화장실에 대한 공포로 밤새 생리 현상을 참다 새벽에 화장실을 간 나는 그 청결함에 그만 감격을 하고 말았다.
3년 동안 도대체 인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단 말인가?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남인도는 북인도와 다르게 기차가 깨끗했고 연착하는 경우도 거의 없다 한다.
거리도 북인도에 비해 대체로 깨끗했는데 수백 년 동안 유럽의 식민지를 겪으면서 유럽 문화가 들어와서인 것 같다.
3년 만에 인도의 기차에서 긴 밤을 보내게 되었다. 고아 해변을 꿈꾸며...
1월 4일(3일째)
아름다운 고아 베나울림 해변에서 멍 때리기
새벽에 눈을 떠 보니 창밖의 풍경이 과히 환상적이다.
아름다운 남국의 풍경이 계속 펼쳐진다.
야자수 숲과 호수가 이국적인 정취를 자아내어 여행자의 마음을 두드린다.
나랑 맞은편 3층 침대에 누운 스위스 청년은 밤새 기침을 해 대더니 이제서 곤히 잠들었다.
집집마다 산타클로스가 매달려 있고 다윗의 별도 수시로 보이는 걸 보아 고아에 가까이 왔다는 걸 알겠다.
고아는 포르투갈의 식민 지배를 오래 받아 주민의 40%가 가톨릭 신자라고 한다.
마드가온 역에 내려 마르가오에 있는 숙소에 짐을 풀어 놓고 샤워와 빨래를 한 후 릭샤를 타고 베나울림 해변으로 향했다.
베나울림은 남고아의 조용한 해변으로 사람들이 별로 없고 깨끗해 명상을 하거나 쉬기에 딱 좋은 곳이다.
여기서 우리는 해변의 선베드를 하나씩 차지하고 바다를 바라보며 왼 종일 혼자 놀기에 몰입했다.
책 읽다, 자다, 명상하다, 음악을 듣다, 바다를 바라보다를 반복하며...
아라비아해.
깨끗한 모래사장과 잔잔한 물결. 그리고 몇 안 되는 사람들.
천천히 평화롭게 흐르는 시간.
파도소리와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자장가가 되어 몇 번이나 자다 깨다를 계속했다.
아라비아의 감미로운 미풍에 온 몸과 마음, 영혼까지도 맡겨버린다.
눈이 시리도록 맑은 물빛도 아니건만 아라비아해는 사람을 끄는 이상한 마력이 있다.
계속 빠.져.든.다. 빠.져.든.다. 빠.져.든.다.
히피들의 낙원이었던 고아해변.
이런 곳이라면 히피가 되어 살아보는 것도 좋아.
내 평생 이렇게 오랫동안 한곳에서 바다를 바라본 적이 있었던가.(난 평생 바닷가 마을 해운대에서 살았다.)
바쁘게 살아온 삶으로부터의 쉼표.
너무 많은 일을 해 온 나.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나.
햇살에 반짝이는 파도와 아라비아해에 어울리는 검은 피부의 아이들.
잠시 젊은 현지 청년에게 발 마사지도 받아보았다. 민망할 정도로 허연 다리를 내 놓고.
바다를 바라보며 맥주 마시기.
어느새 오르는 취기. 온 몸에 퍼지는 히피 바이러스.
고아해변에서 만나는 어린 왕자. 그래서 더 특별한 어린 왕자.
어느새 해가 지기 시작한다.
오렌지 빛으로 물드는 바다.
어슬렁거리며 해변을 누비는 소.
하늘도 바다도 붉게 물든다. 황홀하다.
내가 정신없이 바쁘고 힘들 때...이 날을 잊지 않을 것이다.
석양빛을 받으며 천천히 걸어 콜바 해변으로 갔다.
오렌지와 다크 블루가 만나는 하늘. 달과 야자수.
콜바 해변의 레스토랑에서 처음 먹어보는 인도양의 물고기, 바라쿠다 요리를 맛있게 먹고 택시를 타고 숙소로 돌아왔다.
1월 5일(4일째)
빤짐시와 올드 고아 돌아 다니기
숙소 앞 버스 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고 빤짐시를 갔다.
포루투칼 냄새를 물씬 풍기는 빤짐에서 박물관과 구도시를 둘러보았는데 예전에 갔던 마카오의 꼴로안 빌리지와 분위기가 비슷하였다.
그날 빤짐시에는 시위가 있었는데 시위대들의 주장은 강력했지만, 시위자들도, 경찰도 평화로워 보였다.
꼴로안을 가 본 사람이라면 궂이 이곳은 안 와 봐도 될 것도 같다.
빤짐에서 버스를 타고 올드 고아로 향했다.
버스 터미널에 내리니 배가 고파 근처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아주 맛이 있었다.
이 때 한 한국 청년이 엄마와 여행을 왔는데 엄마가 아프다며 약을 좀 달라고 해서 내가 가지고 온 약을 주었다.
아들이 엄마와 함께 남인도까지 배낭여행을 왔다는 것만으로도 나에겐 이미 기특한 청년이었다.
문득 여러해 전 딸과 40일 동안 둘이서 서유럽 배낭여행 갔던 추억이 떠올랐다.
바로 지척이 봄지저스 교회이다.
봄지저스 교회는 인도 최초의 대성당으로 유네스코 유적으로 지정되었으며, 400년 동안 프란시스 사비에르 신부의 시신이 부패되지 않은 것으로 유명한 곳이다.
오래 된 성당답게 기품이 있고 아름다웠는데 10년에 한번 열리는 행사가 막 끝난 후라 주변이 그 흔적으로 어수선하기도 했다.
바로 근처에 있는 캐더린 성당까지 본 후 더위에 지친 우리는 점심을 먹던 식당에 다시 들러 라씨 한잔씩을 마시고 숙소로 돌아가기 위해 버스를 탔다.
인도 여행 중 가장 지친 날이 이날이 아니었나 싶다.
이날은 아무 느낌도, 감동도 없는 날이라 더위가 더 크게 느껴져 여행이 시들해져 버렸다.
버스는 3인석인데 난 두 인도 여인 사이에 앉게 되었다.
한 여인은 나에게 별 관심을 보이지 않는데 창가 쪽의 여인은 짧은 영어로 계속 나에게 대화를 시도한다.
생선을 팔다 왔는지 생선 비린내를 풍기는 왼쪽 여자는 어느새 졸고 있고, 창가 쪽 여인은 너 나이 몇 살이냐, 결혼을 했느냐, 얼마동안 인도를 여행하느냐, 그렇게 오래 여행하는데도 남편이 안 뭐라 하냐...등을 한참 묻다 어느새 자기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남편이 자기를 때리며 친정으로 가라고 쫓아냈다며, 그래서 남편은 감옥에 갔다며 눈물을 흘리기 시작한다.
여인의 눈물에 당황스러워져 나도 모르게 그녀의 손을 꼭 잡아 준다.
창밖엔 어느새 해가 지기 시작한다.
야자수 숲과 아름다운 강과 그 위로 떨어지는 붉은 해.
창밖의 아름다운 풍경과 우는 여인을 한꺼번에 바라본다.
숙소로 돌아와 간단하게 씻고 슬리핑 버스에 몸을 실었다.
좁지만 누울 수 있어 고마운데 에어컨이 너무 빵빵하다.
침낭을 가지고 오지 않았다면 아마 동태가 되었을 것이다.
처음 타는 슬리핑 버스는 그렇게 밤을 가로질러 함피로 향했다.
1월 6일(5일째)
함피에서의 첫째 날(빗딸라 사원과 로터스 마할 둘러보기, 그리고 마탕가 힐에서의 일몰보기)
호스펫에 위치한 숙소에 아침에 도착해 샤워와 빨래를 하고 릭샤를 타고 함피로 향했다.
날씨가 더운데다 이동이 불편한 관계로 오늘 릭샤는 하루 종일 전세를 내어 사용하기로 했다.
빗딸라 사원은 아름다운 구조물을 많이 남겨 예술적인 왕조라고 손꼽히는 비자야나가르왕조가 남긴 것 중 최고 걸 작품으로 손꼽히며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이 지역의 단단한 화강암을 떡 주무르듯 주물러 놓은 듯한 당대의 장인들의 놀라운 솜씨에 감탄을 하며 섬세하고 화려한 건축물에 눈을 떼지 못했다.
특히 사원 안뜰에 돌로 만들어진 전차는 너무도 당당하고 아름다워 몇 번이나 주변을 서성이며 보고 또 본 건축물이다.
햇살은 따갑지만 그늘은 시원하여 건물에 걸터앉아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건물의 아름다움을 음미했다.
일행과 잠시 떨어져 혼자만의 시간에 심취했는데, 그것도 잠시.
또 다시 사진 찍기이다.
수많은 인도인들이 몰려와 함께 사진을 찍자는데 문제는 끝이 없이 몰려든다는 것이다.
결국 나만의 시간을 포기하고 기꺼이 웃으며 그들 속에 스며든다.
북인도 여행 갔을 때도 사진 같이 찍자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남인도만큼은 아니었다.
북인도 사람들은 비쩍 마르고 초라한 행색으로 끊임없이 구걸을 했었는데 남인도 사람들은 하나같이 웃으며 적극적으로 다가올 뿐 아니라 길을 물으면 친절하게 가르쳐준다.
입성도 북인도에 비해 깨끗했고 구걸하는 사람도 별로 없었을 뿐 아니라 남자들은 하나같이 배가 나왔을 정도로 몸이 퉁퉁했다.
빗딸라 사원을 나와 전망이 좋은 야외 식당에서 맛있는 남인도식 탈리를 먹었다.
그리고 향한 곳이 로터스 마할.
조용하고 아름다운 곳.
빗딸라 사원에서 수많은 사람들에 둘러 싸여 있다 보니 이런 고요하다 못해 적막한 분위기가 좋다.
일행들과 떨어져 잔디밭에 앉아 글을 쓴다.
나만의 이 시간이 참 좋다.
일몰을 보기 위해 마탕가힐로 올라갔다.
등산을 모르고 사는 인도인들은 벌벌 떨며 가는 길을 동네 뒷산에서 숙련된 몸인 대한민국 아줌마들은 힘 든 내색 한번 않고 잘도 올라간다.
정상에 오르니 360도 전망이 다 보인다.
기암괴석과 야자수 숲과 푸른 강과 유적지가 어울러져 멋진 조화를 보여주고 있다.
커피를 마시며 그 아름다움에 취해 한참을 바라본다.
그 경치는 정말 장관이었지만 그날의 일몰은 기대만큼 아름답진 못했다.
어두워지기 전에 서둘러 내려와 숙소로 향했다.
그날 밤 나는 태어나 가장 많은 모기에게 물렸는데 양심도 없는 모기는 내 얼굴도 물어 얼굴형까지 변형시켜버렸다.
그날 밤 여행 와서 처음으로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는데 여행 다니며 집 생각 난 건 이때가 처음이었다.
새벽에 모기를 잡으니 완전 피범벅.
복수혈전으로 그 밤은 잠을 거의 자지 못했다.
우울하다 못해 짜증나는 밤이었다.
1월 7일(6일째)
함피에서의 둘째 날(하누만 사원과 비루팍샤 사원 둘러보기)
원숭이 신을 모시는 하누만 사원으로 가기 위해 릭샤를 타고 보트 선착장에 갔다.
하누만 사원으로 가기 위해선 강을 건너야 하는데, 강을 바로 가로질러 가는 배를 타면 시간도 절약되고 운임도 아주 싸다.
그런데 우리는 시간도 많이 걸리고 운임도 무지 비싼 바나나 껍질로 만든 작은 보트를 타기로 했다.
돌이켜 보면 이 바나나 보트 여행이야 말로 이번 나의 남인도 여행의 백미라 생각한다.
한참의 가격 흥정 끝에 보트 두 대를 빌려 한 대에 네 명씩 나누어 탔다.
배를 젓는 소년 윌리는 이제 막 스무살이 되었는데 영어를 제법 할 뿐 아니라 유머감각도 있어 우리를 자주 웃게 해 주었다.
강을 거슬러 올라가며 천천히 흐르는 시간들.
조용히 흐르는 강과 한 폭의 그림 같은 경치와 강 양쪽으로 펼쳐진 유적들.
지금껏 여행하며 배를 몇 번이나 탔었지만 이렇게 유적과 자연이 아름답게 어우러진 강가를 유유하게 떠다닌 건 처음이다.
어느새 느린 것이 편하게 느껴지는 나이.
느리게 가니 사물이, 풍경이 자세하게 보인다.
한 시간 거의 넘게 배를 탄 것 같다.
남인도 여행 중 가장 아름다운 시간이었다.
보트에서 내려 하누만 사원을 향해 걸었다.
하누만 사원 바로 아래에 위치한 작은 가게에서 바나나 라시를 시켜 먹었는데 인도 여행 중 가장 맛있는 라시였다.
몸이 안 좋은 주영샘은 가게에서 쉬기로 하고 우리는 15분 정도 계단을 밟아 하누만 사원에 도착했다.
이렇게 멋진 풍경이 존재하다니.
곳곳에 바위가 흩어진 넓은 평야, 폐허가 되어버린 쓸쓸한 궁전 터, 울창한 야자수 숲, 그리고 아름다운 강.
아름다운 색채와 풍경에 도취되어 한없이 빠져든다.
고요 속으로, 평화 속으로...
하누만 사원에서 내려와 가게에 가 보니 가게에 딸린 시원한 동굴로 된 방에서 주영샘이 잠들어 있다.
가게 주인 아주머니의 배려로 몸이 아픈 주영은 그렇게 시원하고 조용한 곳에서 안정을 취할 수 있었다.
고마운 마음에 사례를 하니 답례로 바나나를 우리 일행의 수만큼 주신다.
돌아가기 위해 다시 바나나보트를 탔다.
작열하는 햇빛을 피할 틈도 없는 윌리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노를 젓고 있다.
이번엔 아름다운 풍경 대신 가난한 소년의 노동이 보인다.
우리 마음 편해지려고 넉넉하게 팁을 주었다.
배에서 내리니 여인들이 강가에서 빨래를 하고 있다.
널찍한 바위 위에 펼쳐져 햇살에 마르고 있는 형형색색의 빨래들.
여행자들 사이에서 유명한 망고트리를 찾아갔다.
함피의 여행자 거리에 있는 망고트리는 이미 여행자들로 만원이었는데 문제는 우리가 기대하던 전망이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여행 블로그를 통해 망고트리의 분위기와 전망에 대한 찬사를 익히 들어서 내심 기대를 하고 왔건만 그 어디에서도 전망을 볼 수 있는 데가 없었다.
다행히 음식은 맛있었는데, 우리 배가 고파서 요동치는 걸 알았는지 주문을 하기 무섭게 요리가 나왔다.
여기서 우린 올드 고아에서 만났던 모자 여행자들을 만났는데 이 후 우리는 스리랑카로 가기 전에 여러 번 이들과 조우를 하게 되었고, 심지어는 같은 숙소에도 머물게 되어 편두통에 시달리는 아들을 위해 내가 병원에서 처방해 온 편두통 약봉지를 주기도 했다.
밀려드는 손님에 우리는 식사가 끝나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 릭샤를 타고 비루팍샤 사원으로 향했다.
비루팍샤 사원은 56m의 고뿌람이 인상적인 남인도 사원으로, 인도의 많은 신 가운데 시바신을 모시는데 이미 빗딸라 사원을 본 때문인지 큰 감흥이 없었다.
그 다음 들린 하라자 라마찬드라 사원은 왕가와 그에 관련된 구조물들이 몰려 있었던 곳으로, 그 옛날 함피의 황금부위였던 왕정구역에 있던 사원이다.
사원을 둘러 싼 벽의 바깥쪽은 말, 코끼리, 무희, 무장보명들의 행진 등 1000여개의 조각들로 이루어져 있고, 안쪽에는 유명한 힌두의 대서사시 Ramayana의 이야기를 조각해 두었는데 이것이 가장 볼만했다.
사실 너무 지쳐 릭샤를 타고 바로 숙소로 돌아가려고 했다.
그런데 우리의 눈길을 끄는 곳이 있었으니 이름하여 왕궁 구역.
폐허가 된 쓸쓸한 왕궁 터를 천천히 걷는 맛이 최고다.
쓸쓸하고 고적하고 아름다워 가슴이 젖어든다.
공허한 아름다움에 한참을 머물고 싶은 곳, 가장 함피 다운 곳이 이곳이 아닐까 생각했다.
함피에서 호스펫 가는 길에 보는 풍경들.
야자수, 바나나 나무, 사탕수수, 밭과 논, 가난한 사람들.
왕궁 터에서 넋을 놓은 바람에 릭샤 기사를 기다리게 한 게 미안해 팁을 넉넉하게 주니 무척 좋아한다.
이틀 동안 우리의 발이 되어 준 감사의 표시로 한국에서 준비해 간 볼펜을 주니 “땡큐”를 연발한다.
1월 8일(7일째)
화려한 마하라자 궁전 둘러보기
밤새 기차를 달려 아침 아홉시쯤 마이소르에 도착했다.
숙소에 도착해 늦은 아침을 먹고 씻고 빨래하고 쉬다가 오후 1시쯤 릭샤를 타고 마하라자 궁전으로 출발했다.
마하라자 궁전은 외부도 멋있지만 내부로 들어가면 그 아름다움에 입을 다물 수가 없는데 나 개인적으로는 베르사이유 궁전보다 훨씬 아름답고 정교한 궁전이라 생각한다.
이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궁전 관람을 위해 왔는지 거의 사람에 떠밀려 다닐 지경이었다.
한번 보고 나오니 아쉬워 다시 입장해 궁전 안을 보려 했지만 관리인의 강력한 제지에 물러 나 밖으로 나오고 말았다.
대신 우리를 기다리는 건 끊임없는 사람들의 관심과 그들의 사진 찍기에 동참하는 것.
학생들은 하나같이 똑 같은 질문을 한다.
“ What's your name?"
“아그야! 도대체 너한테 내 이름이 뭐시 그리 궁금하다냐???”
내가 보기엔 그 아이들은 내 이름이 궁금한 게 아니고 아는 영어가 그것 밖에 없어서 인 것 같은데, 나는 ‘심’이라고 대답했다가 ‘란’이라고 대답했다가, 나중에는 지쳐서 영혼 없는 대답을 계속하게 되었다.
자간모한 궁전으로 향했다.
자간모한 궁전은 지금은 박물관으로 쓰이는데 관리가 허술한데다 너무 낡아 궁전으로 보기에 민망했지만 볼거리가 제법 많았다.
그런데 점심 식사 때가 한참을 지나서인지 허기가 밀려와 갑자기 피곤이 엄습해 왔다.
급한 대로 매점에서 오렌지 주스를 마시고 원기를 회복했다.
여기서 우리 일행은 군산에서 12년간 일하다 휴가 차 고향에 온 인도 남자를 만났는데 그는 우리가 하는 한국말을 듣고 반가워 다가온 것이란다.
좋은 차를 몰고 온 걸 보니 한국에서 번 돈으로 인도에서 꽤나 잘 사는 것 같아 기뻤다.
내일 일정을 문의하다 결국 매점 청년의 친척과 전화 연결이 되었는데 덕분에 우리는 저렴한 가격으로 그 다음날 마이소르 외곽지역을 둘러 볼 수 있었다.
마이소르 외곽지역은 교통이 불편해 투어를 신청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다.
아침 8시에 호텔로 픽업을 하러 오기로 했고 1인당 550루피를 내기로 했으니 꽤나 성공적인 거래였다.
그런데 예약금으로 1000루피를 내란다.
인도 관련 책에서 무수히 인도인에게 사기를 당한 이야기를 많이 읽어 순간 고민에 빠지기도 했지만, 믿어보기로 하고 1000루피를 건넸다.
데워라자 마켓으로 갔다.
이곳은 지금껏 봐 온 시장보다 특별히 나은 것은 없지만 신에게 바칠 꽃들이 넘쳐 나는 향기로운 시장이었다.
먹고 살 것이 걱정인 가난한 사람들이 신에게 바칠 꽃을 사기 위해 시장으로 몰려든다.
버스를 타고 차문디 언덕으로 갔다.
마지막 버스 시각을 알아본 뒤 시바신을 모시는 신전에 들렀다가 저녁을 먹었다.
이 때 우리는 밥을 먹다가 원숭이의 습격을 받았는데 새끼를 안은 어미 원숭이의 빛과 같이 빠른 공격을 피할 수 가 없었다.
식탁은 완전 난장판이 되었지만 어미 원숭이의 모성애가 모든 것을 용서하게 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화장실에 갔다 구운 옥수수를 사 들고 오다 또 다시 원숭이의 공격을 받게 되었는데, 이 녀석들이 내 치마를 붙잡고 늘어지는 통에 난감한 상황에 놓이게 된 걸 지나가는 남자들이 달려들어 사태를 수습할 수 있었다.
치마 안 찢어진 게 진짜 다행이다. ㅋ
차문디 언덕은 크게 볼 것이 없어 바쁜 사람들은 안가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다.
1월 9일(8일째)
마이소르 근교 투어
오늘은 마이소르 근교 답사이다.
8시에 로비로 나가보니 벌써 우리를 기다리는 차가 와 있다.
인도에서 신용 거래가 성공한 모양이다.
운전사는 말쑥한 차림의 젊은 미남 청년이다.
여덟 명이 불편하게 끼어 앉아 두 시간 이상을 달려 스라바나벨라골라에 도착했다.
이곳은 자인교의 최고 성지로 불리는 곳인데 유명한 거대한 나신상이 있다.
인도를 두 번 오며 수많은 힌두 사원과 절과 이슬람 사원을 봐 왔지만 자인 사원은 처음이라 호기심이 앞섰다.
그러나 크게 볼거리도, 건축적인 아름다움도 느껴지지 않았다.
스라바나벨라골라를 나와 할레비드에 있는 호이살레스와라 사원으로 향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우리는 사원 앞 허름한 식당에서 간단하게 점심을 먹었다.
호이살레스와라 사원은 호이살라 양식 최고의 걸작품인데 그 섬세함과 아름다움은 카주라호의 조각들을 능가하면 능가했지 못할 게 없어 보였다.
호이살라 양식은 11세기에서 13세기에 걸쳐 남인도의 데칸고원 일대를 지배했던 호이살라 왕조의 건축 및 조각법으로 화려함과 정교함, 독창성 등이 돋보여 많은 주목을 받고 있다. 할레비드의 원래 이름은 도라 사무드라였으나 1311년 이슬람의 침입으로 폐허로 변한 뒤 술탄에 의해 ‘죽음의 도시’라는 뜻의 할레비드로 불리게 된다.
이 멋진 사원을 보기 위해 힘들게 여기까지 왔나보다.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로 대단한 조각들을 보며 몇 번이나 걸음을 멈추고 감동하고 숙연해졌다.
이 시대 사람들은 무얼 그리 기원할 것이 많아 돌에다 이리도 섬세하게 조각을 했단 말인가!
남인도의 살을 태울 듯 작열하는 태양 아래서 육체의 고통도 잊고, 영원으로 이어지는 내세를 위해 돌 위에 자신들의 염원을 새겨 넣었겠지.
그들의 간절한 기원은 이루어졌을까?
호이살레스와라 사원을 나와 한참을 달려 벨루르의 첸나께사와 사원을 갔는데 이미 지나치게 멋진 사원을 봐 서인지 나에게는 별 감흥이 느껴지지 않았다.
대충 보고 마이소르를 향했는데 운전기사가 길을 몰라 헤맨데다가 거리도 상당해 숙소에 오니 거의 9시가 다 되었다.
그런데 숙소 근처 식당이 문을 다 닫았다.
배고프고 지친 우리는 침대에 모두 널부러졌다.
오늘은 밤 12시에 출발하여 침대버스가 아닌 좌석 버스를 타고 12시간 걸리는 코친으로 간다.
뭔가를 먹어야했다.
나라도 정신을 차려야겠다.
다행이 배달 음식점이 있어 펜을 들고 8명의 식사와 라씨를 주문받아 적고 전화로 주문을 했다.
우리 8명이 씻고 잠시 쉴 수 있도록 방 하나를 얻었는데 8명이 오글오글 모여 저녁 식사를 하니 완전 난민 숙소 같다.
늦은 밤 숙소를 빠져 나온 우리는 나에게 이번 여행 최고의 위기인 지옥 좌석 버스에 오르게 된다.
운전기사가 수시로 브레이크를 잡을 때마다 몸은 미끄러져 내려 잠에 빠져들 수 없고, 깜깜해서 경치 하나 볼 수 없는데다 12시간을 화장실 한번 세워주지 않아 불편한 자세로 몸 한번 일으키지 못하고 고문에 가까운 시간들을 견뎌냈으니...
그 밤은 내 여행 평생 최고로 힘든 시간이었다.
좁고 추웠지만 며칠 전 탔던 슬리핑 버스가 천국이었다.
1월 10일(9일째)
마탄체리와 포트코친 둘러보기
새벽에 눈을 떠 보니 창밖은 인도가 아닌 듯 유럽풍 건물과 깨끗한 거리가 이국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열두시간이 넘는 고된 야간이동으로 심신이 지칠 무렵 짜안하고 나타나는 멋진 풍경과 저 멀리 강에서 펼쳐진 야자수와 중국식 어망...
이래서 또 난 여행을 하나보다.
어제 마이소르 근교 여행으로 하루 종일 차에서 시달리고, 또 바로 야간 버스에 시달린 불쌍한 내 엉덩이는 12시간 동안 단 한 번도 좌석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고행 중이다.
태어나 이렇게 한자리에 오래 앉아 있어 보긴 처음이다.
12시가 넘어 에라꿀람(코친의 신도시)에 있는 BTH에 짐을 풀고 빨래와 샤워를 한 후 릭샤를 타고 보트 선착장인 메인제티로 향했다.
걸어서 20분 거리였으나 햇살이 너무도 따가운데다 몸이 지쳐 릭샤를 타 버렸는데, 그래봤자 1인당 200원이면 되는데다 이렇게 여행객들이 돈을 써 줘야 가난한 나라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예전 ‘기쁨의 도시’란 책에서 가뭄으로 농촌에서 살 수 없어 도시로 나와 빈민이 되어 버린 주인공이 릭샤를 끌게 되는데, 손님이 없는 날에는 가족들이 굶주리는 걸 보고 릭샤를 이용하는 것이 인도보다는 부자인 나라에서 온 여행객의 미덕임을 알게 되었다.
메인제티에 가니 남녀 줄이 따로 있다.
마탄체리로 가는 배 안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아름다워 우울했던 기분도 사라지고 여행 슬럼프에서 빠져 나올 수 있었다.
마탄체리항에서 내리면 바로 마탄체리 궁전이 나온다,
마탄체리 궁전은 1555년 코친에서 무역허가를 받으려는 포르투갈 상인들이 코친의 지배자에게 일종의 뇌물로 바친 건물로 아름다운 벽화로 유명하다.
네덜란드 장인의 손길로 보수한 궁전은 섬세하고도 아름다운 색감의 벽화로 우리의 눈길을 끌었으며, 작지만 볼거리가 풍부하여 여행자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한다.
마탄체리 궁전을 빠져나와 걸어서 몇 분 거리에 있는 유대인 마을로 향했다.
BC 587년경 바빌론이 예루살렘을 침공했을 때 살기 위해 걷고 또 걸어 머나 먼 이곳까지 흘러들어 왔으니, 목숨을 이어 가기 위한 인간의 생존 의지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다.
한 때 번성했던 유대인 마을은 이스라엘 건국 후 10가구로 줄어들어 이젠 골동품 가게와 선물 가게로 그 명맥을 이어 가고 있다.
골목 곳곳에서 볼 수 있는 유다의 별이 눈길을 끈다.
유대인 성당은 토요일이라 문이 닫혀 있어 내부를 보지 못했으나 외부가 아름다워 사진을 찍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장인들의 솜씨를 느낄 수 있는 가게를 기웃거리며 여행 중 입을 편한 바지를 구입하기도 했는데 시간에 쫓겨 더 구경하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해가 지기 전에 중국식 어망을 봐야 하는데다 수산시장에서 해산물을 구입하여 저녁도 먹어야 하기 때문이다.
시간이 없어 릭샤를 타고 바스코 다가마가 묻혔었던 성프란시스코 성당으로 갔다.
성당이 문을 닫아 들어갈 수는 없었지만 외관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가 있는 아름다운 건물이었다.
조금 걸으니 중국식 어망이다.
관광객에게 보여주려는 듯 쇼맨십을 발휘하는 어부들의 모습에 우리도 흥겨워져서 그들을 사진에 담고 우리를 기쁘게 해 준 대가로 기꺼이 팁을 건넸다.
그들의 고된 노동이 그렇게 즐거운 신바람이 되길 바라며.
배에서 잡은 물고기를 바로 길거리 난장에서 파는데 일명 피쉬 마켓이다.
여러 번의 흥정을 한 끝에 우리는 새우와 생선을 사서 분위기 좋은 길거리 카페에 자리를 잡았다.
주로 유럽인인 듯 보이는 사람들 속에 우리도 끼어 어둠이 내리는 멋진 포트코친의 저녁을 즐긴다.
맛있는 냄새가 진동하고 우리는 곧 맛있고 신선한 해산물 요리에 푹 빠지는데 나 태어나고 만난 제일 크고 맛있는 새우였다.
그러나 온 몸이 모기 밥이 되는 비극은 피할 수가 없었다.
포트코친에서 배를 타고 걸어서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숙소 근처 큰 현대식 마트에서 장을 보았다
1월 11일(10일째)
빌리지투어와 카타칼리 공연 보기
코친은 켈라라주의 한 도시이다.
켈라라주는 공산당이 집권하고 있는데 거리가 깨끗한데다, 문맹률이 높은 인도에서 문맹자가 거의 없는 곳으로 유명하다.
예전 북인도를 여행하면서 그곳에서 만난 충격적인 가난과 무질서와 더러움을 보며 만약 공산당이 인도를 집권했다면 인도도 중국과 같은 변화가 가능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던 터라 켈라라주의 공산당 집권에 관심이 많이 갔다.
숙소에서 버스로 한참을 달려 도착한 작은 강가 마을에서 바나나로 엮은 작은 배를 타고 떠다니는 수로 여행을 시작했다.
원래 내가 상상한 수로 여행은 이런 것이었다.
편안한 선베드에 드러누워 책을 읽고, 경치를 보고, 명상에 빠지고, 음악을 듣고, 달콤한 졸음에 빠지는...
그러나 현실은 작고 딱딱한 플라스틱 의자.
거기다 중심까지 잡으려 신경을 써야 하는데다 배가 흔들려 전복 당할까봐 몇 시간을 꼼짝없이 움직이지도 못하고 앉아 있으려니 행복감이 감소된다.
책을 읽으려고 들고 온 게 에러다.
어쩔 수 없이 풍경을 바라본다.
그리고 풍경 속으로 서서히 빠져든다.
조용하고 평화롭게 흘러가는 시간들.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주는 여유로운 시간들.
배에서 잠시 내려 소박하고 예쁜 마을을 구경했다.
직접 만든 감자칩을 사서 먹었는데 담백하고 맛있다.
점심시간이 되어 현지인의 집에서 남인도식 밀즈를 먹었는데 우리 음식과 비슷해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다시 배를 타니 식곤증이 몰려온다.
영순샘은 행복이 충만한 얼굴로 계속해서 카메라 셔트를 누르고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사색에 빠져 있다.
잔잔한 호수에 물결치는 햇살.
그러나 그 평화로운 공기를 깨고 계속 떠드는 몇몇 여자들.
지루하고 불편하다고 불평질이더니 뱃사공에게 계속 내려 달라고 말한다.
정해진 루트가 있고 목적지까지 가야 우리를 숙소로 데려다 줄 버스가 있는데, 무슨 어린애도 아니고. 쯧 쯧.
그녀들의 불평 따윈 아랑곳 하지 않고 나는 다시 평화 속에 빠진다.
삶이 잠시 정지 된 듯한 느낌.
바쁘게 살다보면 오늘을 그리워하는 날도 있으리라.
여행을 많이 다녔다고 해서 마음이 열리는 건 아닌 것 같다.
버스에서부터 배 타는 내내 자기 여행 많이 다닌 거 자랑질 하는 여자.
거의 여섯 시간을 태양 한번 못 피하고 노를 젓는 삐쩍 마른 뱃사공이 안쓰러워 배에 탄 분 중 가장 연장자이신 분이 팁을 좀 주는 것이 어떻겠냐고 모두에게 의견을 내니 이 여자 바로 그 어른 무안할 정도로 단 칼에 거절한다.
그러면서 자기는 여행 다니면서 단 한 번도 팁을 줘 본적이 없다고 말한다.
배안은 순식간에 분위기가 싸늘해졌고, 그래서 각자 알아서 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내가 조심스럽게 의견을 냈다.
우리 팀은 뱃사공 두 분에게 백루피 씩을 드렸고, 다른 분들도 알아서 팁을 챙기는 모습이었다.
우리가 드린 팁으로 집으로 돌아갈 때 닭 한 마리라도 사 간다면 우리 역시 행복할 것이다.
나중에 그 여자, 자기는 여행지에서 물건도 안 산다고 자랑하듯 말하는 걸 듣고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 그 돈 아껴 너 여행 많이 다녀라.”
그러나 이것도 나의 주관적인 생각일 뿐, 사람마다 생각이 다를 것이므로 그녀를 비방해서는 안 될 일이다.
카타칼리 공연.
인간의 감정과 사물을 얼굴 표정과 몸짓으로 표현하는 남인도 전통 연극으로 중국의 경극에 영향을 받았다 하는데, 연극이 공연되기 전 한 시간 전부터 시작되는 분장부터 지켜보는 게 흥미롭다.
배우들의 연기도 멋졌지만 난 처음부터 끝까지 극을 이끌어 가는 가수의 혼신을 다한 노래에 감동 하였다.
에어컨이 지나치게 빵빵하여 추위에 고통을 받다가 결국 편도선이 부어오르고 감기 기운이 시작된 밤이었다.
공연장과 붙어 있는 타지마할 레스토랑에서 늦은 저녁을 먹었는데 시키는 음식들 마다 맛이 있어 모두 흡족한 식사를 하였다.
저녁 주문 후 식사가 나오는 동안 나는 잠시 종업원을 찾아가 마지막 버스 시각과 버스 타는 장소를 알아두었다.
저녁 먹은 후 우리는 급히 걸어 에라꿀람으로 가는 버스를 가까스로 탈 수 있었다.
1월 12일(11일째)
바르깔라 해변 즐기기
새벽 다섯시에 숙소를 나와 바르깔라로 가기 위해 릭샤를 타고 역으로 향했다.
차가운 바닥에 누워 잠을 자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
아! 여기가 인도였지!
좌석표를 구하지 못해 입석으로 가게 되었는데 친절한 인도인들 덕분에 앉아 갈 수 있었다.
우리 때문에 4시간 동안 불편하게 끼어 앉은 인도분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한다.
경남샘은 1인석 자리에 앉았는데 외국인 여자에게 자기 자리라고 비켜 달란 말도 못하고 다른 자리에 끼어 앉아 갔을 인도인을 생각하니 고마움을 넘어 미안한 마음도 든다.
모든 걸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우리나라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새벽 다섯시에 숙소를 나와 잠이 부족했으나 3인석에 6인이 끼어 앉으니 불편해서 잠을 잘 수 가 없어 아이패드로 영화를 보며 지겨운 시간을 보냈다.
아리비아해가 보이는 절벽 위에 위치한 작고 예쁜 리조트에 짐을 풀었다.
티베트 음식점 라사에서 해물이 들어간 티베트 식 국수를 점심으로 먹고 카페에 들러 커피를 마셨다.
햇살이 작열하는 한낮엔 여기서 할 수 있는 게 낮잠 밖에 없다.
숙소로 돌아와 샤워와 빨래를 한 후 감기약을 먹고 낮잠에 빠졌다.
그리고 우리는 햇살이 누그러질 무렵 해변으로 내려와 선베드를 빌려 아라비아해를 바라보며 휴식 시간을 가졌다.
음식이나 간단한 음료수를 시키면 선베드를 공짜로 내어 주던 베나울림과는 달리 여기선 선베드와 파라솔에 엄청난 돈을 지불하는데다 분위기도 베나울림 보다 못하여 실망스럽기도 했다.
약간 졸리고 나른한 오후.
고아의 바다보다는 높은 파도.
고아보다 맑고 아름다운 물빛.
그럼에도 왜 난 고아의 바다가 더 그리울까?
물 색깔이 그리 맑지 않음에도 가슴 저리도록 평화롭고 행복하게 흘렀던 베나울림에서의 시간들.
저절로 명상이 되었던 바다. 내가 충만해졌던 바다.
절벽 위로 올라가 경치를 내려다보며 걷는다.
비로소 바르깔라가 왜 아름다운가를 이해하게 된다.
바르깔라는 절벽으로 인해 아름다운 곳이다.
해산물을 흥정하며 계속 걷는다.
중심지에서 멀어지니 가격이 싸진다.
The Green Bisrto.
새우와 코코넛게와 생선 두 마리.
갈릭 버터 그릴.
우와! 맛있다!!
1인당 칠천원도 안되는 가격에 맛있고 신선한 해산물 요리를 배 부르게 먹을 수 있다니...그만 바르깔라와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꼭 경치나 대단한 유적이 아니라도, 이렇게 여행지 음식 때문에 그 도시와 사랑에 빠지기도 한다,
1월 13일 (12일째)
바르깔라에서의 휴식
새벽 해변 산책이 나섰다.
바르깔라는 남인도의 성지답게 새벽부터 많은 사람들이 열심히 기도하고 아라비아해의 성수에 몸을 적시고 있었다.
새벽 바다에서 수영을 하는 사람들.
싱그럽고 선명한 색상의 싱싱한 바다.
왼쪽 바다 끝에서 걷기 시작하여 오른 쪽 바다 끝까지 가 보기로 한다.
Fisherman Village.
여유롭게 노동을 즐기는 사람들.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에 비해서 턱도 없이 적게 잡히는 물고기들.
그들의 가난을 목격한 것 같아 가슴이 아파온다.
그들의 노동가를 들으며 그들의 풍경 속에 빠져 있는데 나에게 “핼프!”라고 하며 손짓을 한다.
나도 그들과 함께 줄을 당겨 보는데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해 미안하다.
피셔맨들은 몇 분 간격으로 계속 무리를 지어 바다 먼 곳에 던져진 줄을 끌며 물고기를 잡고 있었는데, 그 생산량을 보니 이 풍경도 지구상에서 사라질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아 애잔한 마음이 들었다.
나이 드니 이제는 사라지는 것들에 대해 자꾸 정이 가고 마음이 쓰인다.
거의 마을 끝까지 걸어갔다 돌아온다.
여긴 인도가 아닌 몰디브와 같은 인도양의 어떤 휴양지 같다.
하긴 맞다. 여기가 인도양의 휴양지이긴 하다. ㅋ
절벽 위의 그림 같은 레스토랑에서 많은 사람들이 바다를 바라보며 아침식사를 즐기고 있다.
어제 저녁을 먹은 ‘The Green Bisrto’에 아침을 먹기 위해 자리를 잡았다.
어제 만났던 종업원이 우리를 너무도 반기기에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기에.
아라비아의 멋진 바다를 바라보며 먹는 블랙퍼스트가 맛있다.
바싹 구워진 토스트와 달달한 과일잼과 달걀 후라이와 커피 한잔.
소박하지만 영혼까지도 충만해질 것 같은 식사.
여행 오길 참 잘했다.
간사한 내 마음.
한국에서는 상상 할 수 없는 호사.
감미로운 인도 발라드.
인도인 같지 않은 외모의 종업원에게 조심스럽게 물어보니 네팔인이란다.
말을 걸어주니 아주 반가워하며 아예 네 옆자리에 앉아 한참을 이야기 한다.
네팔인인 라훌은 인도의 다이즐링에서 살고 있고 돈을 벌기 위해 겨울 성수기 석 달 만 바르깔라에서 일을 한다고 한다,
원래 피부가 하얀 편이었는데 태양이 내리 쬐는 곳에서 서 서 손님 끄는 걸 하다 보니 새까맣게 탔단다.
그러면서 네팔인과 한국인과 일본인은 닮았다며 아주 좋아한다.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는 대부분이 백인들이고 우리 같은 동양인도 가끔 보인다.
여행을 하며 느낀 것인데 여행지 대부분 지역에서 즐기는 이는 백인과 중국, 일본, 한국 등의 동양인들이고 흑인이나 동남아계는 거의 없다는 것이다.
부자나라에서 온 여행객들에게 말도 안 되는 대가를 받고 노동과 서비스를 제공하는 가난한 나라의 사람들.
그러면서도 동남아나 인도 같은 나라의 여행이 저렴해서 좋다고 생각하는 나.
그래서 여행 오면 늘 마음이 불편하다.
숙소로 돌아와 빈둥대다 잠시 낮잠을 자고 일어나 바깥 발코니 의자에 앉아 영화 ‘Soul Suffer'를 보았다.
한국에서 바쁘다고 못 본 영화를 여행 와서 본다.
감동적인 실화에 눈물을 흘리며 봤다.
점심을 먹으러 나서 경남 언니와 적당한 레스토랑을 찾아 기웃거리는데 누군가가 나에게 손짓을 한다.
아는 누군가가 여행하다 나를 발견했나?
무시하고 그냥 지나쳤다가 만약 아는 사람이라면 후에 욕 폭탄을 피하기 어려울 것 같아 그녀에게 다가간다.
근데 모르는 사람이다.
지니라는 아가씨가 사람을 착각해서 우리를 부른 것이다.
호주에서 장기 휴가 온 삼십대 한인 아가씨와 의정부에서 혼자 여행 왔다는 사십대 여성과 초면임에도 같이 점심을 먹었다.
그냥 가버릴까 생각했지만 이 역시도 인연인 것 같아 합석을 하여 지니가 추천한 티베트 만두 모모를 시켜 먹었다.
지니는 청소년기에 혼자 호주에 유학을 가서 직장을 구해 지금껏 살고 있는데, 연차까지 합쳐 무려 5주 일정으로 여행 와서는 바르깔라에서만 3주째 머무르고 있는 중이라 했다.
매일 요가를 배우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업무에 지친 몸과 마음을 충전 중인데 한국말이 너무 하고 싶어 한국인만 보면 말을 거는데, 자기 또래의 젊은 여행객들은 까칠한 표정으로 외면하는데 비해 우리 같은 사오십대 아줌마들은 기꺼이 말동무가 되어 준단다.(이것이 진정한 한국 아줌마들의 오지랖 ㅋ)
여행지에서 마음을 열고 만나는 사람들.
수심에 가득한 사십대 여인은 작은 아들도 지금 북인도에서 여행 중인데 중학교에 적응을 못하여 학교를 그만 두었다 한다.
제도권에는 비록 적응을 못 하였지만 여행의 힘으로 건강한 청년으로 성장하길 빌어 주었다.
지니의 제안으로 저녁에 네명이 만나 해산물 요리를 먹기로 하고 헤어졌다.
돌아오는 길에 수영복을 대신할 반바지를 샀다.
숙소로 돌아와 쉬다가 해질 무렵 수영할 준비를 하고 바다에 나갔다,
바위 옆 그늘에 자리를 깔고 명상에 잠기려는데 웬 백인 남자가 다가와 말을 건다.
노르웨이에서 온 아룬.
그는 몇 해 전에 프랑스에서 스페인까지 이어지는 산티아고 순례 길을 한 달 넘게 걸었는데 그 때 만난 한국인들이 너무 좋아 한국 사람들을 좋아하게 되었다고 한다.
대체로 한국인들은 열려 있고 인정스러운 반면, 일본인들은 마음을 잘 안 열어 친해지기 어려웠다고.
아룬과 거의 삼십분 동안 대화를 나눈 것 같다.
그를 내내 세워놓고 이야기를 나눈 게 미안했는데 혹시 본격적으로 앉아서 이야기를 하다보면 수영할 시간도 놓치고, 또한 지니 등과의 저녁 식사 약속 시간을 지키기 힘들까 하는 염려 때문이었다.
그런 내 조급함을 눈치 챘는지, 아룬이 조용히 쉬고 싶은데 방해한 게 아니냐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 나는 아니라고, 당신 때문에 즐거웠다고 열심히 이야기 해 주었다,
아룬은 어느새 자리를 깔고 명상에 잠겨있다.
깡마른 백인 남자.
명상에 빠진 그 남자에게서 영적인 기운이 느껴진다.
나도 아룬처럼 명상에 빠져보려 몇 번 시도해보다 시간에 쫓겨서인지 집중하지 못하고 결국 자리를 털고 일어나 바닷물 속으로 들어간다.
석양으로 붉게 물든 아라비아해에 몸을 담그니 내 몸도 붉은 색으로 물들 것 같다.
따뜻한 아라비아의 물과 아름답게 물든 바다 빛에 취해 물속에서 나오기 싫었다.
지니와 저녁 식사 약속한 게 후회스러울 정도였다.
급히 숙소로 돌아와 간단하게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고 약속 장소로 찾아갔다.
종업원에게 지니의 친구라니 예약이 되었다면 이층으로 올라가란다.
한참을 기다리니 지니는 오지 않고 사십대의 의정부에서 온 여성만 나타난다.
지니가 감기가 심하게 걸려서 오지 못한다고 하며.
주문한 요리가 나왔는데 우리가 어제 먹은 요리에 비해 가격도 비싸고 요리의 맛과 질도 한참 떨어진다.
지니 말로는 자기 단골집이라 자기가 주문하면 아주 싼 가격에 맛있는 해산물을 푸지게 먹을 수 있다했는데, 작은 새우 달랑 두 마리에 오징어랑 생선만 가득 나온다.
결국 먹다가 맛이 없어 경남샘과 나, 둘 다 포크를 놓는다.
그래도 의정부 아주머니는 맛있다며 열심히 드신다.
도대체 이 많은 요리를 언제 다 먹는단 말인가!
갑자기 할 말도 없고 피곤하기도 해서 먼저 일어서겠다고 양해를 구하니 자기는 천천히 다 먹고 가겠다고 먼저 가란다.
한국인의 정에 이끌려 계획에도 없는 점심을 모모로 먹고, 저녁까지 가격 대비 형편없이 먹게 되어 잠시 짜증도 났지만 이 역시도 여행이 주는 인연인지라, 우리로 인해 지니가 잠시 행복했기를, 의정부에서 온 아주머니가 저녁을 거하게 드셨길 바라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한국 돌아가면 언제 싼 가격에 큰 새우를 실컷 먹어보겠냐는 생각이 들어 ‘The Green Bisrto’에 갔다.
라훌이 반갑게 우리를 맞아주었는데, 거기엔 나머지 우리 일행들이 편안하게 앉아 해산물 요리를 맥주와 함께 즐기고 있었다.
새우를 흥정해서 주문하고 우리도 자리를 잡고 앉았다.
비록 이미 저녁을 먹어 기대한 만큼의 맛있는 새우를 먹진 못했지만 라홀의 착한 미소를 본 것만으로도 좋았다.
나중에 계산을 하고 자리를 뜰 때 라홀에게 다가와 진심이 담긴 팁을 건넸다.
한사코 받지 않겠다는 라홀에게 당신이 나를 행복하게 해 준 보답이라고 말하니 고맙다며 나의 성의를 받아들인다.
그러면서 내일도 자기 집에 식사를 하러 오란다.
내일이면 이곳을 떠나기에 올 수 없지만 그에게 그러마하며 인사를 하고 떠난다.
미소가 아름다운 청년, 라훌, 친절한 사람, 라훌, 부디 건강하기를...
1월 14일 (13일째)
바르깔라를 떠나며
오늘은 바라깔라를 떠나는 날이다,
짐을 얼른 챙기고 커피를 한잔 타서 테라스 의자에 앉아 정원을 바라보며 아침을 맞는다.
해변 산책을 나섰다.
이곳과도 이제 이별이라 생각하니 아쉬움에 열심히 눈에, 마음에 이곳의 풍경을 담는다.
모레 사장에는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요가나 명상을 즐기고 있다.
인천에서 코친까지 직항이 있는데 항공료가 왕복 육십만원대인데다 여기 숙박료가 혼자 방을 쓰는데 팔천원 정도이니 하루 이만원이면 충분히 생활할 수 있을 것 같다.
보름이면 항공료 포함 백십만원 정도로 푹 쉬다 올 수 있으니 충분히 매력적인 휴양지인 샘이다,
절벽 위로 올라가 예쁜 여행자 거리를 걷는다.
부지런한 사람들이 오늘도 아라비아해를 바라보며 블랙퍼스트를 즐기고 있다.
이곳은 거의 대부분 유럽의 장기 여행자들이 머무는데 살인적인 유럽 물가를 생각하면 이곳에서 휴가를 보내는 것이 자기 나라에서 보내는 것보다 훨씬 저렴할 것이다.
이곳의 매력은 아름다운 경치와 서양인의 입맛에 맞는 음식, 특히 아라비아 해에서 건져 올린 싱싱하고 값 싼 맛있는 해산물 요리, 그리고 친절한 서비스와 예쁘고 깨끗한 절벽위의 여행자 거리일 것이다.
내가 다시 이곳에 오게 될까?
그때도 라홀은 여기서 일을 하고 있을까?
기차를 타고 깐나꾸마리로 향했다.
적도가 가까워지고 있다는 걸 뜨거운 공기의 열기로 느낀다.
네시간 정도 가니 깐나꾸마리다.
릭샤를 타고 비치로 갔다.
배는 고픈데 식당이 없어 옥수수와 과일로 대충 허기를 때웠다.
그런데 우리가 굶주림을 다스리던 그 지저분한 장소가 알고 보니 간디 기념관인 간디 만다뺨이란다.
인도의 최남단, 아라비아해와 인도양과 뱅골만이 만난다는 성스러운 바다에는 수많은 인도인들이 바닷물에 목욕 가트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인도인에게는 특별한 장소인지 몰라도 나에게 그저 그런 바다로만 보였다.
별 감흥 없이 지켜보다 꾸마리 암만 사원으로 향했다.
햇살이 미치도록 뜨겁다.
살이 아플 정도이다.
그렇게 찾아간 사원은 오후 네시가 되어야 문을 연단다.
기차 시간 때문에 포기하고 적당한 식당을 찾아 음식과 라씨, 아이스크림까지 먹으며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
마두라이 가는 기차를 탔다.
이제 인도의 가장 남단을 찍고 동쪽을 향해 달려간다.
기차 밖으로 펼쳐진 풍경이 아름다워 눈을 떼지 못한다.
광활한 평원에 끝없이 펼쳐진 풍요롭고 너른 논과 밭, 야자수 숲, 그리고 지금까지 인도에서 잘 볼 수 없었던 겹겹이 늘어선 기묘한 모양의 산들.
무엇보다도 아름다운 풍경 속에 멋지게 어울린 풍력 발전소.
독특한 아름다움을 자아내는 풍경을 주영샘은 열심히 카메라로 담는다.
기차 여행의 절정이다.
생각지도 못한 멋진 풍경에 충만한 기쁨이 밀려온다.
이런 독특한 풍경은 처음이라 한순간도 놓치기가 아까워 창에 바짝 붙어 앉아 바라본다.
오늘 하루는 이 풍경만으로도 충분하다,
저녁으로 간단한 요깃거리를 샀으니 도저히 입맛이 없어 그냥 버리고 말았다.
밤 열시쯤 마두라이 역에 도착했다.
우와!
역에 에스컬레이트가 설치 되어 있다,
인도 와서 처음 보는 에스컬레이트이다.
하루에 기차를 두 번이나 탄 게 힘들었던지 결국 저녁도 굶고 잠에 빠졌다,
1월 15일 (14일째)
미낙시 사원과 티루말라이 나약 궁전
Pongal day.
이는 인도의 ‘Thanks giving day’에 해당하는 축제로, 5일 연휴로 정해졌을 만큼 큰 명절이라 거리가 축제 분위기로 넘쳐난다.
숙소에서 걸어서 스리미낙시 사원으로 걸어가는 내내 형형색색의 옷을 입은 많은 사람들에게서 “Happy pongal"이란 축하 인사를 들었다.
스리미낙시 사원은 웅장하고 화려한 힌두 사원으로 남인도 힌두교도들의 신앙 중심지이자 남인도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드라비다 양식의 절정이라 할 수 있다.
2500년 전에 지어졌으며, 1660년 티루말라이 나약 왕이 중축하여 오늘에 이르는데 규모도 규모려니와 그 화려함과 섬세함에 입이 딱 벌어진다.
수많은 인도인들이 사원에 몰려들어 정성껏 꽃을 바치고 향을 피우고 기도를 한다
바닥에 온몸을 바쳐 기도를 하는 사람들
섬세한 조각과 화려한 채색.
도대체 그 시대 사람들은 무슨 생각으로 이런 대단한 사원을 지어 신에게 바쳤단 말인가?
사원에서도 끊임없이 관심을 보이며 사진을 찍어달라는 사람들, 찍고 나면 보여 달라하는 순진한 사람들.
밀려드는 사람들의 행렬과 사원 가득한 독특한 향냄새에 질려 야외로 나갔다.
섬세한 조각과 화려한 색상으로 눈을 끄는 멋진 고푸람.
연못이 보이는 회랑 앞 계단에 앉아 고푸람들을 바라보며 한참을 즐겼다.
숙소로 돌아와 좀 쉬다 점심 먹고 버스를 타고 타루말라이 나약궁전으로 갔다.
티루말라이 나약궁전은 1636년에 티루말라이 나약 왕에 의해 건축되었으며 이슬람양식과 중국양식까지 가미하여 지은 인도 사라센 양식의 아름다운 건축물이다.
이 궁전은 바깥에서 보면 아주 초라하지만 안에 들어가 보면 엄청난 반전을 주는 건축물이다.
연꽃무늬의 천장 그림과 섬세하고도 화려한 조각, 그리고 은은한 색상의 스테인 글라스의 조화.
정말 아름답고 대단한 궁전이라 할 수 있는데 너무도 허술한 관리에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완전 비둘기들의 화장실이 되어 있었음.ㅠㅠ)
궁전의 뜰에서 쉬다가 놀러온 가족들을 만나 사진을 찍었다.
남인도 어디를 가든 신기하게 생긴 동양인인 우리를 보면 사진을 같이 찍자고 한다.
눈이 예쁜 아이들.
그중 말괄량이 여섯살짜리 소녀와 한참을 놀아주었다.
내가 가져 온 볼펜을 선물을 주니 당장 그리고 싶다고 해서 여행 자료를 꺼내 비어 있는 면을 내어주니 피카소도 울고 갈 정도의 난해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내가 손을 내주어 내 손 윤곽을 따라 그리게 했더니 아주 좋아한다.
이 녀석 시간이 제법 지났는데도 자기 엄마 아빠한테 갈 생각을 안 한다.
결국 아빠가 데리러 왔는데, 이들은 첸나이에서 살며 가족 여행을 왔다한다
걸어서 숙소로 돌아오며 길거리 축제 행렬을 즐겼다.
순애샘, 영순샘이 사 주신 맛있는 과일 주스를 마시고 원기를 회복하고 가게 주인아저씨에게 숙소 가는 길을 물어 보았다.
그리고 길거리 구경하느라 아무 생각 없이 한참을 걸어가다 정혜샘과 정화샘이 목이 터져라 부르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두 분 말씀이 가게 주인아저씨가 막 소리 쳐 부르며 쫓아와서 처음엔 돈 계산이 잘 못 된 걸로 알았단다.
그런데 잘못된 방향으로 가는 여행객들을 그냥 볼 수 없어 길을 가르쳐 주러 뛰어왔다는 가게 아저씨.
얼마나 급했던지 손에는 과일 주스컵을 세 개나 든채.ㅋ
참 친절한 남인도 사람들,
친밀하게 다가오고 적극적으로 호감을 나타내는 사람들.
이 사람들 때문에 남인도가 무지 무지 좋아져버렸다.
여행 다니며 남인도만큼 지대한 관심과 환대를 받은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시장에서 간단한 저녁거리를 사서 숙소에서 먹은 후 우리는 또 밤기차를 타고 폰티체리로 향했다.
1월 16일 (15일째)
이름만 예쁜 폰티체리
새벽에 폰티체리 근교의 역에 도착해서 택시를 타고 폰티체리 호텔에 도착했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과 바람이 좋아 빨래가 잘 마를 것 같다.
여행 와서 집에서 생활할 때의 깨끗함과 쾌적함을 바란다면 여행이 복잡해지고 여행 자체에 집중을 못해 놓치는 것이 많은 것 같다.
더러움과 불편함을 참을 수 있어야 장기 배낭여행을 즐길 수 있을 것 같다.
릭샤를 전세 내어 오르빌에 갔다.
오르빌은 인도의 사상가 스리 오르빈도(Sri Aurobindo)의 이상향을 현실에서 이루기 위해 세워진 세계 최대의 공동체 마을이다.
산책길을 한참 걸었는데 멋진 반얀트리 나무에 반해 한참을 그늘에서 쉬며 그 멋진 자태를 감상하였다.
오르빌에 관한 비디오 시청 후 오르빌의 외관을 바라보았는데 나에게 도무지 아무 감흥이 생기지 않아 솔직히 사진도 거의 찍지 않았다.
오르빌에 있는 카페에서 향긋한 커피와 샌드위치와 쿠키로 맛있는 점심 식사를 한 후 락샤로 제법 달려 스리 오스빈도로 갔다.
1926년에 세운 스리 오로빈도 힌두교 아쉬람은 요가와 현대과학을 결합한 힌두교 수양지로, 인도는 물론 해외에서도 유명하다.
열심히 꽃을 바치고 기도하는 사람들을 지켜보고, 내부를 휙 둘러보고는 나와 버렸는데 이곳 역시도 나에게 별 감흥이 일지 않았기 때문이다.
뱅골만의 거친 파도를 바라보았다. 과연 ‘파이 이야기’ 란 소설의 무대가 되었을 법한 야성적인 바다이다. 뱅골만을 바라보며 걷는데 한 백인 남자가 말을 걸어온다. 현재 서울에 살며 아내가 한국인이라는 남자는 오로빈도 아쉬람에 와 있는 중이란다.자기 아내 사진도 보여주는 이 남자, 아내와 비슷한 용모에 같은 언어를 쓰는 여자들을 먼 이국땅에서 만나니 무척이나 반가웠을테지.
길을 걷다 우연히 암베드카르 박사 기념관을 발견하고 반가운 마음에 안으로 들어가 기념사진도 찍고 그의 동상에 머리를 조아리고 묵념을 하였다.
수년 전 ‘신도 버린 사람들’이란 책을 읽고 암베드카르 박사를 알게 된 이후부터 그는 나에게 간디 이상으로 존경하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인도에서는 마하트마 간디와 더불어 탄신일이 국경일이 된 위대한 사람.
불가촉천민으로 태어났지만 독립 인도의 초대 법무장관이자 제헌의회의 헌법기초위원장으로서 카스트 제도 철폐와 노동자, 여성의 인권 보장을 명시한 인도헌법을 기초했으며, 민중교육협회를 결성하고 싯다르타 대학 등 여러 학교를 설립한 민중교육자.
그는 나시크 대회에서 “불행하게도 힌두교인으로 태어났으나 힌두교인으로 죽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라고 천명한 대로 1956년 10월14일, 나그푸르에서 그를 따르는 50만명의 군중과 함께 저 유명한 ‘불교 집단 개종의식’을 실행했다.
‘신도 버린 사람들’에도 나오는 감동적인 이 의식은 나에게 신념과 실천이라는 큰 교훈을 주었다.
프랜치코트를 걷다가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에 들어가서 꼬꼬벵과 해산물 누들을 먹었는데 기대했던 꼬꼬벵은 그저 먹을 만 했고, 해산물 누들이 맛이 있었다.
폰티체리는 예쁜 이름 때문에 프랑스풍의 멋진 마을로 상상하고 왔는데 너무도 실망을 안겨 준 곳으로, 바르깔라 일정을 하루 더 늘이고 이곳을 생략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드는 곳이었다.
8월 15일 (16일째)
마말라뿌람의 파이브 라타스와 해변사원
아침 일찍 버스터미널로 걸어가서 낡은 버스를 타고 마말라푸람으로 향했다.
창밖 경치가 좋아서 경치 구경하다, 깜빡 졸기를 반복하다 어느새 작은 어촌 마을인 마말라푸람에 도착했다.
여행자거리에 있는 낡은 게스트하우스는 시설은 별로였으나 방 앞 발코니에 빨랫줄이 있고 환기도 잘 되어 마음에 들었다.
빨랫줄에 빨래를 너니 바람과 햇살에 잘도 마른다.
딱 배낭 여행자에 어울리는 숙소라 할 만 했는데 여행자거리에 위치하고 있는데다 주변에 맛있는 요리를 하는 레스토랑과 커피숍, 편의점, 옷가게 등이 즐비해서 더욱 마음에 들었다.
숙소 옆 레스토랑에서 맛있게 점심을 먹은 후 걸어서 아리조나의 고행을 보러 갔는데, 커다란 바위에 새겨진 고행상은 비장함이 느껴질 만큼 인상적인 조각이었다.
절벽 위 둥그런 바위인 버터볼은 시시하다는 생각까지 들었는데, 설악산 흔들바위 정도는 되어야지 한국인들을 만족시킬 수 있을 것 같지만, 인도 신화 속의 영웅 크리쉬나와 관련된 전설속의 바위라고 생각하니 인도인들에게는 대단한 바위일 수도 있겠다.
제 20분 정도 걸리는 파이브 라타스로 가면 된다.
근데! 앗!!
여행 도중 선글라스가 고장 나 작열하는 남국의 햇살 아래서 제대로 눈도 뜰 수 없었던 순애샘이 길거리 리어카에서 파는 선글라스라도 임시방편으로 써 볼 요량으로 적당한 거 하나 사서 금방 따라가겠다는 말을 믿고 먼저 간 게 문제였다.
파이브 라타스 가는 길은 단순했으므로 우리는 순애샘을 놓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을 못했었다.
근데 파이브 라타스 가는 길을 인도인이 잘 못 가르쳐 주어 처음부터 길을 잘못 들어 선 대다가, 더운 날씨에 한참을 헤매던 순애샘은 해변사원 길로 들어서버렸는데, 그날은 뽕갈축제로 해변사원 일대가 인산인해여서 인파 속에 묻혀 꼼짝달싹도 못하고 갇히는 처지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폰도 잘 안터지고 문자도 잘 안가고...
파이브 라타스는 위풍 당당 한 다섯 개의 전차가 멋진 석조 사원이었으나 찾고 기다린다고 정신없어 제대로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다 겨우 연락이 되어 해변사원을 향해 떠나려는데 이번엔 또 정혜샘을 놓쳐버렸다.
정화샘과 주영샘이 정혜샘을 찾기로 하고 우리는 순애샘을 찾아 해변사원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사람들이 많단 말인가?
예전 리장고성의 야경을 보러 고성 입구에 갔다 엄청난 인파에 혼이 빠져 그만 야경을 포기하고 숙소로 돌아오고 만 적이 있는데 완전 그때의 악몽을 되살리게 하는 엄청난 인파였다.
순애샘이 인파에 갇혀 꼼짝달싹할 수 없는 상황임이 바로 이해가 되었다.
해변사원에서 꼼짝 않고 순애샘을 기다리기로 했다.
한곳에 붙박이처럼 서 있는데 계속 사진 찍자고 몰려드는 사람들.
피곤한데도 그들의 순박한 마음을 알기에 그 착한 사람들을 기쁘게 해주기 위해 기꺼이 그들의 사진 모델이 되어 준다.
그러다가 드디어 이산가족상봉.
얼마나 반가웠던지 불과 몇 시간 만에 만나는데도 몇 년 만에 만난 것처럼 반가워 얼싸 안고 폴짝 폴짝 뛰었다.
그제야 해변사원을 둘러본다.
해변사원은 남인도 최초의 석조 사원으로 시바와 비슈누 신을 모시고 있으며, 고대 석굴 사원에서 중세 석굴 사원으로 양식이 바뀌던 시기에 조성되어 두 양식이 혼재 되어 있는 사원으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멋진 건축물이다.
그런데 너무도 많은 인파에 제대로 감상을 할 수가 없어 건축물과의 교감을 할 수 없음이 아쉬웠다.
조용하게 둘러봤더라면 해변사원은 내 가슴에 사무칠 만큼 멋진 건축물이었을 것이다.
사람들 속에 빠져 나오고 싶은 생각에 얼른 혼잡한 곳을 벗어나 천천히 여행자거리를 구경한 후 숙소로 돌아왔다.
8월 9일 (17일째)
첸나이의 성토마스 성당에서
버스를 타고 첸나이로 갔다
휴일이라 교통 체증이 없어 일찍 도착했다
릭샤를 타고 처음 간 곳은 성토마스 성당.
이천년 전 로마에서 인도의 남단까지 수만리 길을 복음을 전하러 걸어온 사람.
예수의 열두 제자 중 한분.
복음을 전파하다 결국 창에 맞아 순교한 분.
무덤에 앉아 고개를 숙이고 있는데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눈물이 쏟아졌다.
사람 때문에 감동하여 운다.
한 사나이의 숭고한 믿음에 눈물이 쏟아진다.
40일간의 유럽 여행 중 수많은 성당을 다녔지만 한 번도 울어 본 적이 없었는데 이 그치지 않는 눈물은 무어라 말인가?
진심을 다해 기도하고 마음을 다해 헌금을 했다.
예전 인도 여행 때 티베트의 독립을 염원하며 티베트 절에 헌금한 적이 있었을 뿐, 여행 중 성당에 헌금을 한건 처음 있는 일이다.
성당에서 행해지는 미사를 엿보았다. 신도가 무지 많다
참으로 듣기 좋은 찬송가.
잠시 미사 끝 무렵에 나도 살며시 들어가 참가해본다.
천정을 나무로 처리한 게 특별이 시선을 끄는 참으로 아름다운 성당이었다.
미사를 마치고 난 후 결혼식 준비가 한창이었는데, 시간 적 여유만 된다면 결혼식을 지켜보고 싶었지만 배도 고프고 해서 성당을 빠져 나왔다.
드디어 작정하고 쇼핑에 나섰다.
예전 북인도 갔을 때 아노키의 면제품을 사서 지금껏 만족해하며 사용하고 있는지라 아노키 매장에서 선물을 사기로 마음먹었다.
며칠 전 폰티체리 아노키점을 찾아갔을 때 Pongal day 연휴로 문을 닫아 아쉬운 발길을 돌린 적이 있어 첸나이의 아노키점을 들어서는 순간 기쁨이 매우 컸다.
여기서 딸아이, 여동생, 조카의 머플러와 질 좋고 값싼 손수건을 몇 개 샀다.
그러나 델리의 아노키 매장 보다는 규모가 작아 상품의 종류와 수량이 적어 몇 개를 고르고 나니 더 이상 살 것이 없었다.
인도 와서 처음으로 한식을 먹기로 했다.
그러나 더운 날씨에 땀을 뻘뻘 흘려가며 찾은 한식당은 일요일이라 휴점이었다.
일본식 라면집도 있었으나 너무 비싸 포기하고 커피와 페스트 푸드로 점심을 대신하였다.
점심 식사 후 크리스찬이신 순애샘, 정화샘, 주영샘 등 세분은 성도마의 언덕으로 가고 나머지 사람들은 성 조지성으로 갔다.
1654년 영국이 완성시킨 성채인 성 조지성은 교회 건물이 운치 있고 멋져 보였으나 문이 닫혀 있어 외관만 둘러보고 밖으로 나왔다.
눈이 띄게 멋진 건물이 있어 한참을 걸어가 보니 첸나이가 속해 있는 마이소르주의 법원이었다.
얼마나 웅장하고 규모도 크던지 건물에서 뿜어져 나오는 분위기가 대단하였는데 휴일이라 들어갈 수 없어 까치발로 건물 지붕만 실컷 구경하다 아쉬운 발길을 돌렸다.
오늘밤은 일행 중 정혜샘, 정화샘, 미라샘이 귀국길에 오른다.
이별을 아쉬워하며 숙소 근처 식당에서 저녁을 먹으며 정겨운 시간을 나누었다.
밤늦은 시간 로비에서 세분을 배웅하며 아쉬움에 서로를 끌어안았다.
부디 건강하게 집에 잘 도착하시길...
1월 19일 (18일째)
남인도를 떠나 스리랑카의 아누라다푸라로
새벽에 일어나 릭샤를 타고 첸나이 공항에 갔다.
원래 택시를 타고 갈 예정이었으나 택시 기사들이 펑크를 내는 바람에 새벽의 찬 공기를 온 몸으로 맞으며 바람에 머리카락 휘날리며 한참을 달려 공항에 도착했다.
도시의 매연으로 목이 아픈데다 얼마나 춥던지 공항 건물이 보이자 무지 반가웠다.
첸나이 공항을 출발하여 한 시간 조금 넘게 가니 스리랑카의 콜롬보 공항에 도착한다.
스리랑카부터는 전용차량에 기사와 가이드까지 있어 배낭여행인지 페키지 여행인지 구분이 잘 안 간다.
가이드인 존과 그의 조수인 인디와 만나 첫 인사를 나누고 버스에 올라탔다.
콜롬보에서 아누라다푸라 가는 길은 늪지대로 이어져 있었고, 푸르고 싱그러운 초록으로 눈이 부셨다.
잠시 차를 세워 점심을 먹었는데 인도와는 달리 음식이 매콤한 것이 제법 우리 입맛에 맞았다.
슈퍼마켓에 들렀는데 다양한 상품에 살거리가 많았지만 인도에 비해 과일이 무지 비싸 계산을 하고 난 뒤 깜짝 놀라고 말았다.
인도에서 늘 투어리스트급 호텔이나 게스트하우스 수준의 숙소에서 지내다가 갑자기 스리랑카에 오니 호텔이 별 세 개 이상은 되는 것 같다.
호텔 서비스와 시설에 만족해하며 스리랑카에서의 첫날밤을 보냈다.
1월 20일 (19일째)
아누라다푸라 둘러보기
아침에 일어나 커튼을 여니 놀랍게도 눈앞에 온통 숲이 펼쳐져 있다.
한참을 서 있으니 어느새 숲의 바다 위로 아침 해 가 떠오른다.
너무도 아름다운 장면에 혼자 보기가 아까워 계속 카메라 셔트를 눌렀다.
밥 짓는 연기가 목가적인 풍경을 연출한다.
아침 산책에 나섰다.
마을을 천천히 둘러보며 걷고 있는데 아이들이 단정하게 하얀 교복을 입고 일곱 시도 안 된 이른 시간에 등교를 하고 있다.
남인도는 열시가 등교시각이었는데 스리랑카는 일곱 시가 등교시각임을 나중에 알았다.
맛있는 호텔의 조식을 먹고 아누라다푸라 구경에 나섰다.
처음 들른 곳은 이수르무니아라는 이름을 가진 아름다운 사원이었는데 스리랑카 최초의 사원이라 한다.
계단을 오르면 아름다운 전망이 펼쳐지는데 그 멋진 풍경에 한참이나 넋을 놓고 쉬고 싶었다.
강과 숲 새, 그리고 이토록 풍성한 초록이라니...
사원 안에서 가장 눈길을 끈 것은 'Lovers'란 한쌍의 연인을 조각해둔 것이었는데 신에 대한 사랑보다도 인간의 사랑이 더 절절하게 느껴졌다.
사원에는 하얀 옷을 차려 입은 신도들이 부처님을 향해 온 정성을 다해 기도를 드리고 있다.
두 번째로 스리마하 보리수를 보러 갔는데 이는 2300년의 역사를 가진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보리수이다.
아소카왕의 아들이 스리랑카에 전했다는 이 보리수는 실제로 가보면 상상했던 것보다 너무도 작아 찾는데 한참이 걸린다.
보리수를 보고 난 뒤 문을 나오니 예전에 승려들이 살았던 건물의 흔적이 있는데 기둥만 남아 있었다.
그 기둥위에 삼층집 지었으며 당시에 천개 정도의 집이 있었다는데 도력이 높을수록 높은 층에 지냈다고 한다.
세 번째로 간 곳은 루반 벨리시아 다고바.
입장료 3250루피로 어마 어마하게 비싼 곳이다.
스리랑카 와서 깜짝 놀란 건 입장료가 지나치게 비싸다는 것이었는데 우리 돈으로 삼만원이 훨씬 넘는 돈이니 스리랑카 물가로 계산하면 이건 말도 안 되게 비싼 입장료였다.
이렇게 비싼 입장료를 예상하지 못하고 온 바람에 이후 우리는 궁핍한 생활에 찌들게 되는데 바나나와 삶은 계란으로 저녁을 대충 때우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원래 인도의 장거리 기차 여행을 위해 큰마음 먹고 챙겨온 여행용 커피포트가 스리랑카 와서는 계란 삶는 용도로 변해 버렸다.
루반 벨리시아 다고바는 스리랑카에서 가장 큰 다고바로 위대한 탑이라 불리는 새하얀 탑이 울창한 숲과 어우러져 멋진 풍경을 연출한다,
BC 2세기경 스리랑카를 통일한 뉴뜨게므느왕에 의해 건립되기 시작한 이 아름다운 스투파는 왕이 죽고 난 뒤 동생이 형의 유지를 이어 지었다 한다.
파란 하늘과 뜨거운 햇살과 하얀 구름, 맑고 싱그런 공기와 짙푸른 숲, 그리고 높고 거대한 하얀 스투파.
근처에 작은 스투파 하나가 있는데 스리랑카에서 가장 오래된 스투파라 한다.
푸론나루와로 가기 위해 버스를 탔다.
창밖으로 펼쳐진 싱그런 초록 풍경에 마음이 뺏긴다.
더위와 모기, 그리고 잦은 장거리 야간 이동으로 몸과 마음이 지치는 여행이었는데 스리랑카에서 또 다시 여행자로서의 에너지를 얻는다.
칠십년 대, 내 어릴 때 살던 마을 같은 길을 버스가 달린다.
편두통으로 머리가 아파 약을 먹으려다 한 봉지밖에 안 남아 아껴보기로 한다.
고통도 이제 즐겨 보기로 한다.
소박하지만 풍부한 색감으로 아름다운 땅.
아름다운 강이 흐르고 새와 원숭이가 평화롭게 인간과 공존하며 사는 땅.
강과 숲과 호수의 나라.
시원한 그늘에 누워 멍 때리거나 낮잠을 자고 싶은 곳.
도로 양쪽 거대한 늪지대를 가로 지르는 도로 위를 버스는 달린다.
작은 연꽃과 목욕하는 여인들과 아이들.
국립공원 근처에 가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진다.
저 풍경 속에 빠져 걸어보고 싶다.
오염이 없는데다 공기가 맑아 더 싱그럽고 짙은 Green.
벼가 자라는 논 곳곳에 있는 큰 나무들.
우리나라 같으면 베어져 버렸을 나무들.
너무도 멋진 풍경을 놓칠 수가 없어 단 1초도 졸 수 없다.
귀 양쪽에 눈을 한 개 씩 더 달고 싶을 정도의 멋진 풍경에 지금 이 순간 내 삶을 축복이라 여긴다.
풍경 구경 실컷 하고 난 뒤 수영장이 딸린 멋진 호텔에 도착했다.
호텔의 석식을 먹으려다 돈 좀 아껴보려고 허름한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다음날 먹을 점심거리를 산 후 별을 보고 개울 물 소리 들으며 숙소로 돌아왔다.
1월 21일 (20일째)
아름다운 호반의 도시 푸론나루와에서
새벽 산책에 나섰다.
푸론나루와는 아름다운 호수의 도시이다.
우거진 숲과 아름다운 호수와 물안개와 작은 고기잡이 배가 한 폭의 그림이다.
새벽의 어슴푸레한 느낌이 몽환적이다.
그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아름다운 전통복장을 한 사람들이 웨딩촬영을 하고 있다.
신랑 신부도 아름답지만 역시 전통복장을 한 아이들이 더 예쁘고 깜찍하다.
호텔에서 맛있는 조식을 먹고 본격적인 도시 탐험에 나섰다.
993년에 아누라다푸라가 파괴된 이후부터 건설된 폴로나루와 고대 도시는 스리랑카의 두 번째 수도로 촐라 왕조(Cholas)가 세운 브라만교의 기념물뿐 아니라, 12세기에 파라크라마바후 1세가 만든 전원도시의 놀라운 기념물 폐허가 남아 있으며 그 가치를 인정받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첫 번째로 간 곳은 뮤지엄.
지난 여름 실크로드 여행 때 간 신장 위구르 박물관은 알타이 문명이라는 북방계 민족의 동질성이 느껴졌는데 여기는 남방계 문화라 이질감이 많이 느껴진다.
두 번째로 간 곳은 왕궁터.
폐허가 주는 아름다움에 싱그러운 숲의 조화가 어우러져 멋진 풍경을 연출한다.
세번째로 간 곳은 포트굴 비하라(비하라는 사원이란 뜻)
네 개의 작은 파고다와 시를 낭송하던 곳과 불전을 보관하는 곳도 있다.
여기서 처음으로 이구아나를 보았다.
우아하고 도도하게 포즈를 취하는 녀석.
이 녀석을 찍다가 주영 샘이 안경을 잃어버렸는데 주영이 못 찾고 포기하고 돌아온 것을, 우리가 로열플레이스를 볼 동안 조수인 인디가 찾아와 감동을 주었다.
스리랑카도 아름답지만 사람 역시 아름답고 착하다.
네 번째로 간 곳은 로열플레이스.
파라크라마 바후의 궁전이 있던 곳으로 니산카 말라 왕의 목욕장과 벽돌로 지은 집회소 등이 있으며, 동쪽 구성벽 내부에 파라크라마 바후 1세의 궁전 유적이 있다.
궁전은 한 변이 각각 45.7m인 정사각형의 8층 건물이었는데, 지금은 3층 벽까지만 남아 있다.
36개의 돌기둥은 당시의 홀 지붕을 받치고 있었던 것이며, 방이 50개나 되었다한다.
파라크라마바후1세는 우리나라 세종대왕 같은 분이라 한다.
연회장에는 싱할리 왕조의 상징인 라이언이 세월의 흔적을 이겨 내고 그곳을 당당하게 지키고 있다.
싱할리 왕조의 상징인 라이언은 오늘날 스리랑카의 상징으로 스리랑카 국기에도 자신의 위상을 뽐내고 있다.
다섯 번째로 간 곳은 쿼터랭글.
쿼터랭글은 스리랑카의 대표적 불교유적으로 파라크라마 바후의 궁전 북쪽 일대에 펼쳐져 있으며, 싱하리 왕조 때는 불치사가 있던 지역이다.
거의 원형을 보존하고 있는 투파라마는 불당으로 사용되던 곳으로 옛 싱하리 양식으로 지어졌는데 벽돌 건물은 힌두교의 영향을 받았으며, 내부에는 석가모니의 여러 모습이 그려져 있다. 투파라마 북동쪽에는 둥근 바타다게 불당이 서 있다.
도로에서 2m 정도 높은 곳에 서 있는 아름다운 건물은 폴로나루와에서 가장 예술적인 건물로 꼽힌다.
네 군데 위치한 입구 계단 앞에는 반월석과 가드 스톤이 있고, 계단을 올라가면 네 군데에 모두 좌불상이 있다.
불당 건너편에 불치사의 유적인 하타다게가 있고 하타다게 서쪽에는 비자야 바후 1세가 세운 불치사 유적 하타다게가 있다.
하타다게 동쪽에 있는 스리랑카 최대 석비인 갈포다는 니산카 말라 왕이 미힌탈레에서 가져오게 한 것인데, 장식에서 힌두 문화의 영향을 발견할 수 있다.
사트마할 프라사다 7층 석탑은 세월이 고스란히 묻어있는 흔적이 좋아 천천히 두 번이나 돌아보았다.
숲속에서 간소한 점심을 나누어 먹었다.
비록 삶은 계란과 오렌지와 바나나와 포도 밖에 없었지만 배가 고픈 탓인지 맛이 있었다.
점심을 먹고 간 곳은 랑콧비하라.
우와 이건 뭐지? 멋지다!!
스리랑카 사원의 대표적 전축 형식인 버블쉐이프로 벽돌엔 세월의 흔적이 묻어났다.
갈비하라 입구에 도착했다.
멋진 호수를 끼고 좀 걸으니 갈비하라가 보인다.
갈비하라는 오랜 전쟁으로 적들을 물리치고 평화를 가져온 파라크라마 바후왕이 자신의 수도인 폴로나루와를 풍요롭게 만드는 일에 전력하다 만든 수도원이다.
벽돌과 목재로 지어진 담은 오래 전에 사라져 버렸지만, 51m 길이의 단일한 화강암 바위의 남쪽 면을 조각해 만들어 낸 아름다운 불상은 남아 있다.
화강암 안을 파내어 만든 포치 같은 모양의 사당 안에 가장 자그마한 부처가 모셔져 있으며, 사당 왼쪽에는 탄트라의 상징물들과 함께 앉아 있는 모습의 커다란 좌불이 있다. 그러나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7m 높이로 서 있는 엄숙한 모습의 불상인데, 팔짱을 끼고 있는 독특한 자세로 미루어 고고학자들은 이 조각상을 붓다의 가장 가까운 제자였던 아난다 테라라고 여겼으나, 지금은 갈 비하라에 있는 모든 조각들이 일생의 서로 다른 시기에 도달한 붓다의 모습을 나타낸 것이라 여겨진다.
맨 오른쪽에 있는, 최후의 모습이자 가장 거대한 불상의 길이는 14m인데, 이는 열반에 들어 가장 평온하게 누워 있는 붓다를 나타낸다.서 있는 부처 옆에 새겨져 있는 긴 비문에는 서로 다른 불교 교파들을 통합하기 위해 파라크라마 바후가 기울였던 노력과, 그가 종교적인 관례를 행할 때 지키도록 선포했던 행동 규범들이 기록되어 있다.
그의 통치 밑에서 폴로나루와는 번영을 누렸으나, 이후 더 남쪽에 있는 안전한 땅을 찾아가게 되면서 이 도시는 버려지게 되었다.
19세기 후반 영국 고고학 위원회의 H. C. P. 벨이 스리랑카의 잊힌 왕국들을 재발견하기 시작하기 전까지 폴로나루와는 정글 속에 묻혀 있었다한다.
화강암의 질감, 물결모양, 아름다운 조각들..
너무도 아름다운데다 아난다의 표정에 가슴이 저려 나무 그늘에 아예 자리를 잡고 앉아 한참을 바라보았다.
지금도 그 표정을 뭐라 정확하게 표현을 못하겠다.
체념, 슬픔, 우수...
시골길 같은 소박한 길을 계속 걸어 로터스 폰즈를 본 후 네시에 티반카 피라마게에 도착했다.
티반카 피라마게는 벽화가 아름다웠는데 사원을 지키는 이가 사진 찍을 때 후레쉬를 못 켜게 하다가 백 루피를 기부하자 부탁을 하지도 않았는데 후레쉬를 켜서 벽화를 밝혀 주었으니, 위대한 돈의 힘이여!
버스를 타고 오늘 묵을 숙소가 있는 하바라나로 이동했다.
경치가 좋아 버스 이동도 즐겁다.
호수에서 멱을 감는 사람들을 보니 땀에 절은 나도 물에 풍덩 빠져 보고 싶다.
쉴 새 없이 펼쳐지는 아름다운 호수.
세상에나! 이렇게나 아름다운 나라가 있었다니!
이런 아름다운 곳에서 사는 사람들이라면 당연 심성도 고울 것이다.
숙소에 도착하여 우리는 그만 입이 쩍 벌어졌는데, 인도에서 가난한 배낭 여행자의 격에 맞는 투어리스트급 숙소에만 머물다가 특급 시설과 전망을 자랑하는 호텔을 만나 깜짝 놀랐기 때문이다.
거기다 우리 방은 복층으로 침대가 아래에 두 개, 위층에 하나가 있어 가족들이 다 와서 지내기에도 충분해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이곳에 가족들과 함께 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호수와 산과 멋진 나무들이 보이는 전망 좋은 방.
발코니에서 일몰을 보고 있다.
호수를 붉게 물들이는 일몰.
호수 위로 지나가는 작은배.
붉게 물든 물속에서 목욕하는 사람들의 붉게 물든 몸.
석양 속을 여유자적하게 걸어가는 코끼리.
조금씩 어둠이 내리고 하늘이, 호수가 변하는 색깔을 지켜보았다.
검붉은 하늘, 검붉은 호수. 그 위로 떠있는 작은 별 하나.
내 일생 가장 아름다운 일몰 중 하나였다.
이 순간을 잊지 않으리.
이런 절정의 순간이 여행 끝 무렵에 기다리고 있었다니...아름답고 황홀한 밤이었다.
1월 22일 (21일째)
시기리아와 담불라
새벽에 발코니에 서서 검은 호수 위에 떠 있는 별을 바라보았다.
도시에서는 볼 수 없는 수많은 별들.
물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별이 점점 희미해지면서 여명이 시작되었다.
혼자 새벽의 호젓함을 독차지하러 호수 산책을 나섰다.
물안개와 늪과 호수의 조화.
호수에 뿌리를 내리고 자라는 수초들과 나무들, 온갖 새들...
돌아오는 길에 순애샘과 영순샘을 만났다.
함께 호수를 산책하는데 손짓하며 부르는 사람이 있다.
우리보고 나무 위의 집에 올라가 보란다.
아래 쪽 경사로를 조심스럽게 타고 내려가니 부부가 살고 있었고 아내가 한참 아침밥을 짓고 있었다.
사다리를 타고 나무 위에 지어진 그들의 집에 올라가본다.
일하다 쉬는 방 같은데 전망이 참 좋다.
아무 욕심 없이 이런 집에서 책이나 읽고 낮잠 자고 멍 때리며 사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내려오니 손 씻을 물을 떠 주고 수건까지 내 주는 고마운 사람들.
바나나가 보여 사겠다고 하니 코끼리에게 줄 밥이란다.
그래도 고마움을 표시하고 싶어 바나나 여섯 개를 들고 정성이 담긴 사례를 하고 그 자리를 떠났다.
계속 우리에게 손을 흔드는 사람들.
호텔로 돌아오니 아주 다양하고 맛있는 조식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여덟시에 시기리아로 출발했다.
‘사자의 암석’이라는 시기리야는 화산의 폭발로 생성된 바위로 스리랑카 중부의 정글에 수직의 요새처럼 우뚝 솟은 화강암 덩어리인데 언덕의 높이는 370m이며, 네 면이 다 깎아지른 듯한 수직이다.
꼭대기 부분의 평평한 표면 넓이는 1.4헥타르에 이르며, 싱할라족의 오랜 성지로 세계의 8대 불가사의라고 한다.
주변의 울창한 삼림 한가운데 솟아 주변을 내려다보는 시기리야는 주위를 압도할 뿐만 아니라 드넓은 스리랑카 평원 저 멀리에서도 잘 보이는 지형물이다.
5세기 말 아버지를 산 채로 묻어버리고 왕위를 찬탈한 피해망상증의 왕이 있었는데, 형제까지 죽이려 했지만 실패하자 앞으로 있을지 모르는 형제들의 반역에 대비해 시기리야에 몸을 숨겼다.
그는 자신의 위세를 드높이고자 새로운 바위 성의 아랫부분을 깎아 사자 모양으로 만들었다.고대 도시는 지금은 폐허가 되었고 지금은 복잡하게 연결된 좁은 계단과 거울의 방이라는 갤러리에는 1,000년도 더 전에 그려졌다고 하는 벽화들만이 남아 있는데 그 아름다움에 압도되어 한참을 서 있었다.
사진을 찍기 위해 몰려드는 사람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자리를 비켜줘야 했지만 하루 종일 서서 봐도 질리지 않을 만큼 아름다운 미인들의 그림에 황홀하였다.
벽화 속의 여인들은 모두 왕의 연인이었다고 하는데 이렇게 아름다운 여인들을 옆에 두고도 불안에 떨었을 왕을 생각하니 권력의 허무함이 느껴졌다.
정상에 올라가 전망을 보니, 정글과 호수가 시원하게 펼쳐진 경치가 멋있다.
이 아름다운 전망을 보면서도 고독하고 불안했던 왕을 생각했다.
혼자서 성터 위를 이리 저리 걷는데 런던에서 온 커플이 내 바지 색깔이 예쁘다며 같이 사진을 찍자고 한다.
나무 그늘에 앉아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전망을 바라보았다.
하루 종일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한참을 머물고 싶은 곳이 시기리아다.
점심을 먹고 담불라로 향했다.
담불라 석굴 사원은 B.C 1세기경 약 180m의 바위산 중턱에 건축한 사원으로 다양한 불교 설화가 그려져 있는 벽화와 조각 등이 있는 5개의 석굴로 구성되어 있다.
제1석굴부터 제4 석굴까지 찬찬히 둘러보았으나 나에겐 별 감흥이 오지 않았는데 다만 제 2석굴에 있는 벽화가 좋아 한 번 더 둘러봤을 뿐이다.
숙소로 돌아 와 붉게 물드는 호수를 산책했다. 호수에 풍덩 빠지면 내 몸도 붉게 염색 될 것 같다.
장엄하고 아름다운 일몰.
나는 더 행복해지려 애 쓰지 않을 것이다.
지금 이 정도로도 충분히 행복하고 감사하니까.
짙푸르게 변하는 하늘과 별과 눈썹달을 보며 하루를 마감했다.
1월 23일 (22일째)
부처님의 도시 캔디
어슴푸레한 새벽 호수를 혼자 산책하고 있다
이름 모를 온갖 새소리가 나를 유혹한다.
물안개와 숲속에서 나는 달콤한 향기에 빠져든다.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고고한 자태의 새를 보았다.
비콕.
지나가는 현지인이 나를 부르더니 묻지도 않았는데 새 이름을 가르쳐 준다.
사람 흔적 하나 없는데도 무섭지 않다. 오히려 이 고요함을 즐긴다.
동쪽 하늘의 일출을 본다.
우리 동네 대천공원도 이런 자연 그대로의 호수라면 좋겠다.
적도 가까운 땅에서 뜨거운 열정의 겨울을 보내는 나.
가장 고독한 여행. 나를 찾아가는 여행.
이제 아름다운 하바라나를 떠나 캔디로 향한다.
버스를 타고 캔디로 향했다.
캔디는 싱할라 왕조의 마지막 수도로서, 1815년에 영국이 스리랑카를 점령할 때까지 싱할라 왕조의 후원을 받아 2,500년 이상 디나할라(Dinahala) 문명을 꽃피웠으며, 유명한 성지 순례 유적인 불치사(佛齒寺, Temple of the Tooth Relic, 석가모니의 진신 치아가 보관된 사원)가 이곳에 있으며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불치사에는 하얀 옷을 단정하게 입은 사람들이 부처님을 향해 꽃을 바치고 향을 피우며 간절하게 무언가를 기원하고 있었는데, 그들의 절절한 신심과 대비되는 나의 관광객 같은 태도가 어색하게 느껴져 오래 머물 수 가 없었다.
부처님의 치아는 아누라다푸라에서 플론나루와, 그리고 캔디로 수도를 옮길 때마다 함께 옮겨 모셨다한다.
불치사 앞에서 가격 대비 가장 만족할만한 점심을 먹고 로얄 보타닉 가든으로 향했다.
더운데 물어물어 로얄 보타닉 가든행 버스를 겨우 탔는데 매연도 심한데다 교통 체증 또한 심해 도 닦는 기분으로 버스를 타고 갔다.
버스 옆자리에 앉은 아주머니는 자기 친척이 한국에 돈 벌러 갔다며 주소를 보여주는데 ‘가야로’란 글이 선명하게 들어온다.
창밖을 보니 한국어 시험을 공부하는 학원도 보이는데, 요즘 한국에는 스리랑카에서 오는 외국인 근로자가 많다고 한다.
숲이 울창하고 나무가 멋진 로얄 보타닉 가든.
불과 몇 백 미터의 거리를 두고 매연을 벗어난 이런 싱그러운 공원이 있다.
데이트하는 연인들과 결혼 촬영을 하는 예비부부들.
천천히 공원을 걸으며 초록에 온 몸과 마음을 맡기고 휴식을 취했다.
이제 캔디를 떠나 피나왈라로 간다.
피나왈라로 가는 버스에서 붉게 물드는 서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적도의 해는 너무도 붉어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
어느새 여행자는 우수에 젖어 그리운 얼굴들을 떠올린다.
돌아갈 곳이 있어 다행이다.
1월 24일 (23일째)
피나왈라에서 갈레로
새벽에 발코니로 나가보니 계곡물이 우렁차게 흐르고 있다
나중에 여기서 코끼리들이 목욕을 한단다.
강가 산책을 하고 싶었지만 산책로가 없어 하염없이 강물만 바라보았다.
아침을 먹고 코끼리를 기다리니 처음엔 여섯 마리가 목욕을 해서 좀 실망을 했는데 어느새 수많은 코끼리 출동하여 물놀이를 하고 있다.
장엄하고 어여쁜 생명들.
코끼리의 물놀이를 한참동안 지켜보는데 어느새 떠날 시각이 되었다.
버스는 피나왈라를 떠나 스리랑카의 최남단에 가까운 갈레로 향하고 있다.
적도에 가까워지니 공기가 다르다.
너무 더우니 점심을 시켜놓고 입맛을 잃어 조금 밖에 먹지 못했다.
아침을 든든히 먹길 잘했다
일 년 중 가장 시원한 겨울이 이렇게 덥다니...
사계절이 있는 내 나라가 고맙다.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것이 축복으로 느껴진다.
스리랑카의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다.
고속도로 주변에 야자수가 많은걸 보며 이곳이 남국임을 새삼스레 느낀다.
창밖을 계속 내다 봐도 높은 산이 안 보인다. 끝없이 펼쳐진 초록의 숲이 싱그럽다.
우리 땅에 있을 땐 탁 트인 광야가 보고 싶었는데 이제 겹겹이 둘러싸여 있는 내 나라의 산이 그립다.
아니, 돌아가면 그 산에 올라가 내 땅의 정기를 받고 싶다.
날씨가 흐리다
비가 왔으면 좋겠다.
실크로드 여행 때 사막에서 비를 만났듯 남국에서도 시원한 비를 맞아 보고 싶다.
간절한 바람 때문일까?
비가 온다.
남국의 소나기다.
고속도로를 벗어나니 예쁜 해변이 나타난다. 갈레다
GYM.
남인도와 스리랑카에 와서 처음으로 핼스장을 보았다.
예전 북 인도에서는 삐쩍 마른 사람들을 봤는데 남인도와 스리랑카엔 남자들이 하나같이 배가 나와 있다.
호수에서 운동하는 사람들도 제법 있었다.
공통점이 있다면 인도와 마찬가지로 피부병에 걸린 개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창밖을 때리는 빗줄기.
야자수와 바다와 파도.
세상에서 제일 깊은 인도양.
그래서일까?
그 바다를 보면 심연에 빠진다.
잠시 버스에서 내려 스리랑카 전통 어업인 스틸트 피싱을 보았다.
한때는 생업 수단이었지만 이제는 관광객에게 돈을 받고 연출하는데 감동은 없지만 뭔가 찍어야만 될 것 같아서 카메라 셔트를 몇 번 눌렀다.(비록 작위적이었지만 나중에 사진으로 보니 제법 멋있다.)
숙소에 도착하여 한참동안 숙소 앞 바다에 서 있었다.
짙은 구름과 노을 속에서 수영을 즐기는 사람들.
미치도록 젖어드는 바다.
파도가 크게 밀려와 내 바지를 적신다.
검은 먹구름이 밀려오더니 어느새 검푸른 바다가 내 눈 앞에 펼쳐져 있다.
배가 고프다.
난 가난한 여행자.
룸메이트인 주영과 민생고를 해결하기 길을 나섰는데 비가 내려 우산을 가지고 다시 나갔다.
한참을 걸어 만두와 맥주 한 병을 사서 삶은 계란 남은 걸로 저녁을 때웠다.
이번 여행엔 식사 경비를 아끼려고 계란을 참 여러 번도 삶았다.
비 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오랜만에 여유로운 시간이다.
1월 25일 (24일째)
갈레에서 뜨거운 시간을 보내다.
며칠 전 구입한 오렌지색 원피스를 입고 아침 산책에 나섰다.
싱그러운 아침 바다에는 순애샘과 영순샘이 수영을 하고 있었다.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멋진 몸매를 뽐내며 수영하는 두 분의 모습을 내 카메라에 담았다.
경보하는 사람들, 출근하는 사람들, 산책하는 사람들.
신선한 인도양의 아침.
갯바위의 엄청나게 큰 게와 고동, 그리고 처음 보는 커다란 열매를 보며 잠시 생각했다.
‘이곳에서 이것들 잡아먹으며 살까?’
딸에게 내 생각을 문자로 전하니 엄마는 돈을 벌어야 되기 때문에 안된단다. ㅋ
아누라다푸라에서 여행 온 아빠와 세 딸을 만났는데 셋 다 무지 예쁘다.
호텔 수영장을 둘러보았는데 운치 있게 잘 꾸며져 있다.
나무가 크게 흔들려 새 인줄 알았는데 특이하게 생긴 큰 원숭이다.
원숭이 두 마리가 나타나 빨간 열매를 따서 먹고 있다
숙소에 침입하려고 발코니에 붙어 염탐하는 녀석들도 있다.
아침을 먹고 버스 타고 갈레포트로 갔다.
갈레는 16세기 초에는 포르투갈의 지배를 받았고 17세기 중반에는 네덜란드에 넘어가게 되었으며, 포르투갈인 들에게 의해 처음 건설되기 시작했다가 네덜란드인들이 본격적으로 도시를 요새화된 곳으로 유럽 건축양식과 남아시아 전통양식이 조화를 이룬 독특함을 인정받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정된 아름다운 곳이다.
성벽 위를 걸으며 멋진 갈레의 풍경에 푹 빠졌다.
멋진 시계탑과 바다와 예쁜 건물들이 조화를 이뤄 사진을 찍으면 모두 작품이 되는 곳.
근데 미치도록 덥다.
더위를 피해 볼 작정으로 쇼핑에 나서서 베어풋에서 빨간색 원피스를 샀다.
베어풋(barefoot)은 스리랑카의 색채 예술가이자 건축가인 “바바라 산소리‘가 1970년 가톨릭 교단과 함께 설립한 수공예품 회사인데, 100% 수작업으로 이루어지며 의류와 봉제 인형, 패브릭 제품으로 유명하다.
점심을 먹기 위해 길을 나섰다.
골목길이 진짜 예쁘다.
유럽과 스리랑카를 섞어 놓은 마을.
골목길 사이사이에서 발견할 수 있는 아기자기하고도 이색적이고도 소박한 풍경들이 눈길을 끈다.
유럽풍 레스토랑에서 해물파스타와 바나나 라시를 시켜 먹은 후 와이파이가 시원하게 터져 주는 바람에 폰으로 한참을 놀며 한낮의 뜨거운 시간을 피했다.
다시 골목길과 성벽 돌기를 하며 아름다운 노을을 보기 위해 해가 지기를 기다렸다.
근데 경남 언니를 보니 더위를 먹어 영 상태가 안 좋은 것 같아 나머지 분들은 남고 둘이서 먼저 숙소로 돌아오기로 했다.
버스 타러 가는데 소나기가 내렸다. 버스 타는 곳이 이렇게 멀었나?
해가 지기 전에 도착해서 바다 수영을 해 보고 싶은데, 이 버스가 도대체 출발할 생각을 안 한다.
우리의 타는 속은 아랑곳하지 않고 결국 사람을 가득 태운 후에야 버스는 얌전히 출발했다.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우리는 바로 바다에 가서 물에 풍덩 빠졌다.
파도가 무서웠지만 아무도 없는 바다를 둘이 독차지하는 그 맛이 최고였다.
수영을 할 줄 아는 언니, 부러워하는 나.
먹구름이 몰려오는 짙푸른 인도양.
몸이 안 좋은 언니에게 설탕물을 타서 가 보니 이미 잠을 청하고 있다.
내일은 콜롬보로 간다.
1월 26일 (25일째)
콜롬보 시내 구경
갈레를 떠나 콜롬보로 가는 아침이다.
새벽에 짐을 마저 꾸리고 바다를 바라보았다.
인도양!
살면서 이 바다를 많이 그리워 할 것이다.
떠나기 전 갈레포트에 잠시 들렸다.
눈부신 햇살과 아름다운 바다를 배경으로 웨딩 촬영을 하는 사람들.
콜롬보 가는 길은 교통 체증이 아주 심했다.
콜롬보에서는 뭘 해야 하지?
우선 스리랑카 출신의 세계적인 건축가인 제프리 바와가의 작품인 파라다이스 로드 카페 앤드 갤러리에 가기로 했다.
기대를 하고 갔던 건물의 첫 인상은 좀 실망스러웠다.
그러나 천만의 말씀!
바깥에서 안을 기웃거리다 우리는 뭐에 홀린 듯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심플하고도 세련된 내부 공간의 멋에 매혹되어 그만 자리를 잡고 앉아 버렸다.
마침 배도 고프고 이런 멋진 분위기를 마음껏 즐겨 보고 싶어 우리는 여기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이번 여행의 시작을 인도 타지마할 호텔의 최고급 레스토랑에서 시작했듯 스리랑카의 마지막은 스리랑카 최고의 멋진 레스토랑에서 마무리하게 되었다.
카드와 가지고 있던 달러까지 총 동원하여 비싸지만 맛있는 음식으로.
독립기념건물에서는 웨딩 촬영이 한창이다.
일 년 중 가장 시원한 시즌인 만큼 스리랑카 전 지역이 결혼 열풍이다.
그러다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가 보니 아름다운 남녀 무용수들이 타밀 전통음악에 맞춰 전통춤을 추고 있고 이 장면을 영상 제작팀이 열심히 촬영하고 있다.
타밀 전통춤, 진짜 멋지다. 나도 한참을 따라 한다.
돈 주고 본 캄보디아 압살라 댄스보다 더 낫다.
햇살이 너무 강해 돌아다니기를 포기하고 시원한 카페를 찾아가기로 했다.
지금 콜롬보는 호텔 건설이 한창이다.
몇 년 후 다시 여기를 찾는다면 해운대와 비슷한 모습으로 변해있지 않을까?
카페에서 과일 음료를 마시며 쉬다가 화장실을 가기 위해 옆 건물인 웨딩홀에 갔는데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다.
콜롬보 최고 상류층의 예식 장소인 듯, 그 화려함과 고급스러움이 우리나라 못지않았기 때문이다.
콜롬보의 석양을 감상하며 천천히 걸었다.
지금까지 봐 왔던 것과는 또 다른 석양.
붉음과 짙푸름과 검은색의 조화.
이제 스리랑카를 떠난다.
공항에서 대기하는 시간이 너무 길다.
피곤하고 졸리고 춥다.
1월 27일 (26일째)
마카오 세계문화 유산 도보 답사
아침 일찍 홍콩에 도착했다.
홍콩 공항에서 출발하여 마카오 가는 페리 시각을 간신히 맞췄다.
마카오의 타이파 섬으로 가는 배 안에서 와이파이가 터져 한 시간이 금방 지나가 버렸다.
간단하게 마카오 입국 절차를 밟고 베네시안 호텔 셔틀 버스를 타고 베네시안 호텔로 향했다.
베네시안 호텔은 이번이 두 번째이다.
화려한 호텔의 내부를 둘러보다 티와 모자를 구입하였는데 세일 기간이라 큰 부담이 없었다.
베네시안 호텔은 3000개의 객실이 모두 스위트룸인데 세계 최고의 카지노 호텔답게 규모와 시설이 대단하다.
택시를 타고 베네시안 호텔 근처에 있는 포루투칼 요리 전문점 Cafe Litoral에 갔다.
외관도 아름다울 뿐 아니라 분위기가 좋고 음식도 맛있었는데 특히 조개 요리가 맛있었다.
점심을 먹은 후 택시를 타고 세나도 광장으로 가서 마카오 세계문화유산 도보여행을 시작했다.
예쁘고 운치 있는 골목길과 건물, 그리고 포르투갈 특유의 문양이 그려진 바닥.
지도를 가지고 성 바울 성당을 시작으로 몬테 요새 등을 찾아다니는 숨은 그림 찾기 같은 재미있는 문화유산 찾기에 푹 빠져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특히 릴 세나도 빌딩과 로보트 호 퉁 경의 도서관 내부에 들어가 보고는 그 아름다움과 격조 있는 내부 분위기에 감동을 하고 말았다.
몇 년 전 마카오에 왔을 때 문화유산을 돌아보며 내부에 들어갈 생각을 못하고 겉만 훑고 왔는데 이번엔 어쩌다 들어가게 되어 생각지도 않은 호강을 누리게 된 것이다.
다음에 마카오에 온다면 천천히 내부까지 들여 다 보며 건물의 진짜 가치를 느껴 보고 싶다.
특히 김대건 신부가 16세 어린 나이에 마카오에 도착해서 4년 동안 공부를 했던 성 안토니오 성당과 까사 가든에 꼭 들러 신부님의 생애를 더듬어 보고 싶다.
마카오의 30개 세계문화유산 중 17개 정도를 둘러보고 나니 어느새 어둠이 내리기 시작한다.
어두워지니 은은한 조명으로 거리는 더 운치가 넘친다.
페리선착장으로 가기 위한 택시를 잡기 위해 리스보아 호텔로 갔다.
화려한 조명의 카지노 호텔은 마카오의 낮과는 또 다른 밤의 모습이다.
하루 동안의 알찬 여행으로 모두 만족해 하니 마카오를 추천하여 가이드 한 나로서는 무척이나 보람되고 기쁜 하루였다.
긴 여행의 마무리로 마카오를 선택한건 잘한 일이다.
에필로그
여행 와서 나를 보았다.
나의 바닥을 보았다.
참을성 없고 조급하며 걱정 많은 나 자신을 보았다.
그리고...나와 다름을 인정하고 내버려두는 법을 배웠다.
이번 여행을 통해 성장하는 나 자신을 지켜보며.
거울을 보니 새까맣고 말랐지만 단단해진 여자가 있다.
여행 중 이런 모습의 내가 참 좋다.
배낭여행이라 집에서 안 입는, 버려도 좋을 낡은 티셔츠와 예전 라오스 야시장에서 산 오천원짜리 몸빼바지와 만원짜리 머플러로 싸구려 패션을 하고 다녔지만 여행이 주는 행복으로 얼굴이 빛나서인지 오히려 당당해 보인다.
내 생애 가장 뜨거웠던 겨울을 보내고 다시 돌아와 봄을 기다리고 있다.
다가오는 여름은 몽골 고비사막과 바이칼 호수, 시베리아 횡단 열차 여행을 계획 중이다.
누군가가 나에게 왜 그렇게 자주 여행을 떠나느냐고 묻는다면 내가 좋아하는 정혜윤의 글로 그 답을 대신하고 싶다.
- 매번 여행이 끝날 때마다 우리는 조금씩 다른 영혼이 되어 돌아오기를 꿈꾼다.
내 사랑하는 사람은 더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내 기억도 조금씩 다른 기억이 되고,
나도 조금씩 다른 사람이 되고,
할 수만 있다면 더 좋은 사람이 되고,
그런 식으로 세상의 일부가 되고,
하지만 세상 끝 허름한 기차역 나무 한 그루라도 사랑해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자기 자신 또한 아무리 보잘것없이 여겨져도 사랑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니. -
첫댓글 사진도 중간 중간 좀 넣지요. 이런 긴글 누가 잘 읽남....쯔쯔
다 읽어니 눈이 아파요. 시원 바다그림이라도 하나 쭘 ...ㅎㅎㅎㅎ 잘 보고 갑니다.
게으른 백성이라 그래요.ㅎㅎ
사진 넣으니 파일이 커서 여행기를 몇번으로 나누어 올려야 되더라구요.
그래서 한번만에 올리려고 하다보니 ㅋ
긴 글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촌장님!
사모님께 안부 전해주세요.^^
여행을 통한 일상탈출과 새로운 앎의 행복 그래서 좋은 경험 나쁜 경험 모두 필요한 것이겠지요. 러시아 생각보다 기분 좋은 여행였습니다.
여름도 좋을꺼에요 .
러시아 여행 좋았다니 저도 기쁩니다.
올 여름 기대되는걸요.
여행에 대한 기대로 또 일상을 열심히 살 수 있을것 같아요.ㅎ
드디어 오늘밤 사막별님의 여행기를 읽었습니다. 정말 멋져요. 대단하고요.
열정과 끊이지 않은 기억과 작가적 기질이 참 조화롭네요.
언제라도 함께하고 싶은 여행가!!!!사막별님!!!!!행복만땅으로 지내시길....
과분한 칭찬에 부끄럽습니다.
함께 윈난 여행 했을 때의 추억이 떠오르는군요.
다시 여행지에서 만나 뵙게 되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