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9월 유낙준신부 작성
Better Life를 위한 Better Society를 생각함-아름다운 생명을 위한 보다 나은 둔산한방병원을 생각하며-
걸을 수 없기에 119 차량에 실려와 병실에서 치료받으면서 생각 한 것을 모은 것이다.(2007년 8월 26일- 9월 27일간 대전한방병원 618호실서 치료 받음).
1. 한의학도인 당신은 이미 철학자이다.
BC 6 세기경에 대 수학자로 알려진 피타고라스에게 왕자 레온이 질문 했다.
“피타고라스여, 당신은 스스로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 하십니까?”
이 질문에 피타고라스는 “나는 철학자입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레온 왕자는 “그러면 철학자는 무엇입니까?”라고 재차 질문 했다. 이 질문에 대한 피타고라스의 답변이다.
“ 레온 왕자여, 인생이란 지금 당신이 보고 있는 운동경기와 비슷합니다. 이렇게 많은 군중들이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어떤 이는 재물을 구하는 일에 몰두하고, 또 어떤 이는 명예와 영광을 얻으려는 야망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들 중에는 지금 눈앞에 벌어지고 있는 모든 것을 주의 깊게 바라보면서 이해하려고 애쓰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생입니다. 어떤 이는 재물을 탐하고, 또 어떤 이는 권력과 권세를 향한 맹목적인 정열에 휩싸여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 중 가장 현명한 이는 삶 자체의 의미와 목적을 탐구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자연의 숨겨진 비밀을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완전무결한 현자란 있을 수 없겠지만, 이들이 바로 철학자입니다. 그들은 지혜를 사랑하고, 자연을 탐구하는 열정을 귀하게 여기는 사람입니다.”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 사이먼 싱 지음 영림 카디널 출판사 p29 발췌; 비엔나로 떠나기 전날에 병실을 방문한 한 지인이 건네 준 책을 읽다가 기억한 곳임)
매일 사람의 피를 보는 사람의 심정은 어떨까? 매일 피를 보는 수술실의 모습에서 자신을 참담하게 여겨 술로 찌들어 가는 양방의사를 만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런데 한의학도들은 이런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는다. 뭔가 다름이 있다. 우리 속에 있으면서도 그 다름을 잘 알지 못한 나는 나의 정체성을 잘 모르고 사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나의 정체성을 잘 찾는 것이 철학자의 길이다. 이미 자신의 길을 정밀하게 가고 있는 사람이 한의학도이다. 철학은 자신이 누구이고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그리고 자신이 할 일이 무엇인가를 아는 사람이다. 혼란한 이 시대에 자신을 안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지만 그래도 자신을 알고자 하는 한의학도는 이 시대의 좋은 리더이다.
“신이 주신 당신 안에 있는 영적 선물을 소홀히 하지 마시오.”
Do not neglect the spiritual gift that in you. (1 Timothy 4:15)
(참된 삶을 사는 티머시에게 바우로가 보낸 편지 중에서)
제대로 사는 사람인데도 자신 안에 있는 보물을 보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성인 바우로는 제대로 사는 티머시에게 자신 안에 있는 신이 주신 영적 선물을 기억하라 하셨다. 제대로 사는데도 뭔가 허전함을 느끼고 허무를 느끼는 사람에게 영적으로 자신을 보라 하는 것이다. 아무리 바빠도 자신을 영적으로 보는 시간을 확보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한의학도에게 이미 신은 좋은 품성을 주신 것이다(성경의 집회서 에서). 나는 아침에 만나는 청년한의학도에게 마음 깊은 곳에서 나오는 이러한 인사를 했다. “You are a good doctor, aren't you? 당신은 좋은 의사지요?” 참으로 좋은 한의학도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런 질문을 했다. 내가 그렇게 바라고 또 다른 사람이 그렇게 바라면 그 청년은 좋은 한의학도가 될 것이라 믿는다. 그것이 바로 신이 자신에게 주신 좋은 품성인 영적 선물을 잘 키워 가는 것이리라. 난 한의학도에게 인류의 건강과 인류의 평화를 위해 신이 좋은 영적 선물을 주셨다고 확신한다. 신은 그래서 한의학도가 철학함을 이미 내재하게 하셨다. 한의학도인 당신은 이미 철학자이다.
2. 인간화는 자꾸 새롭게 되어지는 것이다. -Renewing.
최근에 충남대학교 병원이 독립법인이 되면서 한 의사가 병원에 수입을 얼마큼 올리는가를 평가하게 했다. 이제는 충남대학교 병원 의사가 국가공무원이 아니라 한 개의 법인 직원일 뿐이다. 이 변화가 무엇을 의미 하는가? 일찍이 양방에서 환자를 대상화시킨 결과로 결국 의사 자신이 법인을 통해 대상화됨을 정확하게 보는 것 같다. 이렇게 인간을 대상화 하면 자신도 대상화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대상화 하는 것이 진보일까? 물론 환우를 고객으로 보는 단순한 말장난이 아니라, 자신의 옷만 바꾸는 차원의 진보나 혁신이 아니어야 한다. 인간을 대상화 하는 것이 아닌 인간화의 진보를 인간은 진정 할 수 없다는 믿음으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을까? 인간화 한다면서 결과적으로 인간을 대상화하는 우리들 속을 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그렇다고 절망만 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 빛은 어둠으로부터 온다는 명제를 자기에게 적용한다면 희망의 싹이 나올 것이다. 이것이 청년 한의학도의 존재이유이다.
신이 주신 아주 좋은 품성을 지녔음에도 악마가 와서 그것을 빼앗아 가도록 한다면(Luke 8:12) 비참한 삶이 될 것이다. 신은 분명 인간에게 아주 좋은 품성을 주셨다. 신은 분명 한의학도에게 아주 좋은 품성을 주셨다. 그 좋은 품성을 자본화된 세상에서 얼마만큼의 가격으로 시장에 내놓을 것인가? 이 결정은 청년한의학도가 비전을 확보했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지 혼자인 자신이 하는 것이 아니다. 한의학도의 비전 그룹이 한의학의 방향을 세우는 것이다. 신과 진리와 연결된 한의학도인 내가 어떤 결정을 내리는가 하는 것은 내 길을 선택함과 같다. 그래서 선택은 지혜를 요구한다. 지혜 없이 하는 선택은 금수와 같다고 성현들께서 말씀하셨다. 한의학도가 철학자라면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지혜는 진리와 함께 산다.
진리를 수로 나타내고자 연구한 피타고라스는 x2+y2=z2 을 정리한 후 소 100마리를 희생 제물로 바치면서 신에게 감사예식을 올렸다. 이스라엘의 한 작은 무리를 이끌었던 Jesus는 인간을 사랑한다는 이유로 자신을 희생 제물로 바치면서 신에게 자신을 올렸다. 12년 전에 복지간병인제도를 만들면서 만난 간병인 여사들이 병실을 방문하여 침상에 누워있는 나를 보고 매우 기뻐하는 모습을 보았다. 내가 자신들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의 희생 제물이 되었다는 것으로 기뻐하였으리라 난 생각했다. 내가 그들의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의 희생 제물이 되는 것과 같다는 깨달음으로 인해 신이 인간을 만든 후에 왜 기뻐하셨는지를 어렴풋하게나마 느낄 수가 있었다. 자신이 주인임에도 자신이 종으로 사는 것을 기뻐하는 것이다. “God gives life to all things. (1 Timothy 6: 13). 만물에게 생명을 주시는 신”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을 극진히 사랑하는 그래서 희생 제물로 자신을 바치는 삶으로 외아들을 인간에게 보내신 그 마음이 조금이나마 경험하게 된 것이 내가 병실에서 얻은 기쁨이다. 한의학도는 자신을 희생 제물로 신께 바쳐지는 사람이다. 진리는 우리를 제대로 살게 하는 표적이다. 한의학도인 자신이 진리의 표적을 지니지 않는다면 이 세상은 악마가 지배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난 한의학도의 진리를 향한 기운을 믿는다. 그들로 하여금 종교집단이 어지럽힌 이 세상이 보다 나은 인간을 위한 세상이 될 것이다.
지구 전체를 자본화된 세상으로 만들어 집중화된 자본을 만들고자 하는 세상에서 인간을 위한 세상을 펼치고자 하는 삶은 구도자의 모습과 같다. 조금씩 나이가 들면서부터 뭔가를 성취한 것조차 헛됨을 깨닫기 시작했다. 세상의 헛됨을 이미 아는 사람이 철학자인 한의학도이기에 세상의 좋은 리더인 것이다. 이 세상의 좋은 리더는 신실함, 경험, 신중함 그리고 열정을 그 덕목으로 고급 품성을 지닌 사람이다. 고급 품성으로 자신을 늘 새롭게 해야 하는 자리에 한의학도가 있다는 것이다.
3. 더 깊은 생각에 잠기라.
우주의 원리를 연구하는 물리학은 생각에 잠기는 것으로부터 나온다고 한다. 그렇다면 인간의 생명을 연구하는 한의학은 더 깊이 생각에 잠기는 것으로부터 나와야 할 것이다. 자전거로 이 땅을 여행하는 것으로부터, 두 발로 대지를 밟는 것으로부터, 나무와 공기, 냇물이 나에게 친근하게 말하는 것을 듣는 것으로부터, 식구들의 돌봄을 깊이 받는 것으로부터, 당신 속에서 나를 보는 것으로부터 나는 더 깊이 생각에 잠기게 되고 이를 축으로 한의학이 존재하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현실에 존재하는 것부터 죄를 짓는 나를 본다. 먹이에 길들여지는 것은 독재에 길들여지는 것과 같다. 독재는 생각에 깊게 머물지 못하게 하기에 나를 자유롭게 인도하지 못한다. 먹이에 길들여지는 것은 인간의 창조성을 약하게 한다. 먹이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자신의 정체성을 갖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그렇다면 사람은 무엇으로부터 사는가? 인간에 대해 깊이 생각에 잠기고 조건을 마련해 주는 것으로부터 사람이 사는 것이다. 한의학도 이와 같은 선상에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아인슈타인은 빛을 타고 놀았다고 말한 것을 상기해 보자. 인간을 세우는 기운과 노는 사람이 한의학도라 할 수 있겠다. 잘 노는 사람이 사람들을 기쁘게 할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가지고 놀 것인가? 인간의 기운을 가지고 노는 것이다. 그것이 한의학도가 깊이 생각에 잠길 수 있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생각과 놀이를 분리했을 때 우리는 기계의 부속품이 되지만 생각과 놀이가 하나가 되었을 때에는 완전한 인간 (Perfect Person)이 되는 것이다. 한의학도는 완전함을 지극한 성찰과정의 연속으로 가득한 내적순결을 유지할 때 빛이 나는 것이다. 이 빛과 노는 아인슈타인과 같은 한의학도를 나는 병실에서 보았다.
상담학을 공부한 젊은 학생이 나이 드신 분을 상담할 때 어려움을 느낀다. 왜, 그럴까? 나이 드신 분이 삶에 대한 깊은 생각을 갖고 계시기 때문이다. 나이 드신 분이 이미 상담 너머에서 계시기 때문이다. 이는 나이 드신 분이 갖고 계신 사람에 대한 배려를 하시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들이 우리들의 경험보다 더 깊은 궤적의 삶을 사신 깊은 생각을 가지신 부모님 앞에서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는 처지와 같은 이유일 것이다. 나는 한의학을 생각하면 항상 이러한 생각이 내 깊은 곳에 숨어 있는 것을 보곤 한다.
식구들과 이웃, 자연과 우주에 대한 경외감이 드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 이미 인간생명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생각에 깊이 잠긴다는 것은 바로 인간 본성인 인간생명을 기억하는 것이다. 인간의 본래 처지를 잊지 말고 기억하라는 것이다. 이 기억으로부터 당신 속에 있는 나를 보기에 바로 배려를 갖게 하는 것이다. 당신을 내 식구로 여기게 되기에 배려를 갖게 하는 한의학도는 배려가 넘치는 사람이다.
이렇게 한의학도의 담론을 끄집어내는 이유는 어쩌면 원론적인 한의학도의 담론이 중요하게 여기지 않게 될 때 우리는 깊은 생각에 잠기는 배려의 길에서 벗어날 수 있겠다는 우려의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이것은 이 병실에서 느낀 것이 아니라 내 생각을 더 깊이 하는 과정에서 나온 말이다.) 한의학도의 담론이 어느 순간 멈췄을 때, 자신의 생의 목표를 지녔어도 기운이 안날 때, 생의 목표는 있어도 그 접근 방법이 떠오르지 않을 때가 왜, 자신에게
나타나는가? 그것은 당신 속에서 나를 발견하지 못했을 때 나타난다. 당신 속에서 나를 발견하지 못했을 때 나는 항상 가치 없는 나를 느끼기 때문이다. 가치 있는 자신을 느낀다면 분명 나와 아무 연고 없는 이를 내 식구로 여기는 배려가 나오기 때문에 나를 살게 한다. 바로 내가 만나는 사람뿐만이 아니라 저 언덕 너머의 내가 알지 못하는 사람인 당신은 나를 살게 하는 분으로 맞이하게 된다. 이것이 한의학도가 지니는 가치인 것이다.
내가 아닌 당신 속에서 나를 발견해 가는 도정을 통해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 시대의 지적인 중심지대에 한의학도가 살게 되는 것이다. 한의학도가 바로 우리 시대의 바른 리더로 우리시대의 지적 중심지에 서기를 기대한다.
4.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온대성기후인 우리나라가 아열대 기후로 기온이 상승되는 기후 변화로 인한 인간의 부적응이 수많은 죽음의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한다. 최근에 이런 이상한 이야기들이 메스컴에서까지 다루고 있다. 7년 안에 대재앙이 인간에게 오고, 지진이 일어나고 전염병이 창궐하여 유렵인구의 1/3, 서울 인구의 1/3만 생존한다는 도사들의 이야기 소리가 들린다. 항상 있어왔던 일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너무도 가까이 이런 정황이 눈에 자주 뜨인다. 이런 상황에서 우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암 세포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 칼을 들이 대고 독약을 주고 이상한 빛인 방사선 까지 조사하여 암 세포인 자신을 죽이려고 할 때 암 세포 스스로는 살려고 자꾸만 자신을 방어 하려고 숨게 된다. 사람 눈에는 보이지 않을 곳을 찾아 암세포는 스스로 숨는다.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암 세포가 크게 드러나 생명을 장악한다. 암 세포를 적으로 몰면서 암 세포를 더욱 더 강하게 만드는 양방의 암세포와의 관계 방식보다 암 세포랑 같이 놀면서 결국 암세포가 지쳐 우리의 몸으로부터 사라지게 하는 방법을 사용하는 한의학의 방식이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양방과는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는 한의학의 접근 방법이 이 세상의 생명을 살리는 방도일 것이다. 이는 우리들이 기존의 익숙한 방법으로부터 우리식의 새로운 방법을 찾아가는 것이다. 이 역사적인 시대적인 사명을 한의학도가 져야 할 것이다.
금슬이 좋았던 한 부부가 있었는데 남편이 오랜 지병으로 죽고, 수년이 지났음에도 남편을 잊지 못한 한 여성이 있다. 최근에 이 여성은 깊은 우울증으로 인해 사경을 헤매게 되었다. 그때 나에게 꼭 만나고 싶다고 전화를 했다. 이 후 만났는데 나에게 요청한 내용은 아래와 같다. “자신과 아무 연고 없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시간과 자신의 능력을 드리고 싶은 곳을 마련해 주시기를. 그래야 자신이 깊은 우울증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에.”
나는 마침 외국인 출입국 관리소가 생각이 났다. 한국에 사는 외국인들이 비자 신청을 하는 곳에서 외국인들이 한국어를 몰라 힘들어 하는 것을 목격한 적이 있었는데 그 외국인들에게 말이 되어주고 때로는 벗이 되어주는 그런 일을 하길 원한다고 알려주었다. 그 여성은 내 말을 듣고 너무 기뻐 그 일을 하겠노라고 답했다. 자신의 고통을 선함을 쌓음으로 치유 받는다는 우리의 전통적인 생각이 하늘이 이치임을 한의학도의 관점으로 기억하자는 것이다.
올 8월 중순 동광원 여름수련회에서 공중 앞에서 고백하는 73세인 한 노인을 보았다. 자신이 초등학교 다닐 때 어느 날, 아버지가 이웃마을 입구에서 깡통을 주면서 밥을 빌어오라 하셨다. 거지가 아닌 자신이 밥을 빌어오는 것이 너무 창피하여 아버지로부터 도망쳤다. 초등학교 다닐 때 자신이 아버지의 깊을 뜻을 알지 못해서 어리석은 행동을 한 자신의 죄를 이제야 처음 고백한다고 73세 된 아들은 눈물을 흘렸다. “사람의 관용을 믿어라, 사람의 선함을 믿어라.” 불신부터 작용하는 현대인들의 사람관계 속에서 선을 믿고 관용을 믿는 사람관계방식을 그래도 지켜가는 삶의 자세가 현대인을 살리는 새로운 방도가 아닐까? 한의학도가 바로 이 새로운 방도로 이 세상을 살려야 할 것이다.
예전에 구로지역서 노동운동을 하던 사람이 북으로 갔다. 보통 사람이면 상상도 못하는 행동을 한 것이다. 이런 사람을 물론 지금도 국법을 위반한 큰 죄인 취급을 하고 옥방에 가게 된다. 북측에서 그가 남측 상황을 정확하게 알게 하는 역할을 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그래서 북측은 남측을, 남측은 북측을 더 정밀하게 이해한다면 그는 큰 죄인이지만 한반도의 통일사업에 큰 역할을 하는 사람이 될 수도 있는 것이 아닌가? 미래의 통일 한반도를 세우기 위해 서로를 깊이 이해하는 작업을 하는 것은 대단한 위험을 감수하는 것이다. 만일 그렇게 그 사람이 그런 역할을 하고 있다면 그는 미래를 일구는 비전을 소유한 사람일 것이다. 이렇게 극단적인 예가 아니더라도 비전을 일구는 사람에게는 항상 위험을 감수하는 용기가 대단히 필요한 것이다. 미래의 비전은 용기를 필요로 한다. 창조성을 지닌 불굴의 의지인 용기가 미래를 현재화하는 리더의 내용인 것이다. 미래를 현재화하는 사람은 현재를 현재화하는 곳에만 집중하는 사람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다. 미래를 현재화 하는 한의학도는 창조적인 용기로 미래를 일구는 사람이다.
5. Go in peace 평화 안으로 들어가라.
우리 시대에 잘나간다는 사람을 생각해 보자. 겉은 매우 화려한데 속은 첨단을 걷는 경쟁심만 가득한 사람인 경우가 많다. 조용히 걷는 것 같지만 걷는 모습도 실제로는 거만하기 끝이 없는 사람을 정밀하게 볼 필요가 있다. 경쟁적인 삶의 방법에 익숙한 학교와 학원교육만 받아온 사람에게는 관용과는 거리가 먼 거만으로 꽉 차 있거나 자학으로 꽉 차 있는 것을 본다. 이들은 쉽게 거침없이 세상 속으로 들어가 경쟁사회의 한 축으로 자리를 잡는다. 곧 자신도 경쟁사회에서 패배한 또 하나의 사람이 되는 것을 경험하면서 자신이 가지 않은 선한 길을 그리기만 하는 생을 살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사회는 탐욕으로부터 벗어난 다른 길이 있음을 확신하고 사는 사람들이 있다. 한의학도는 이미 그 공동체나 그 집단에서 그러한 길을 가는 사람이다. 지극한 순결함으로 인간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갖는 사람으로 사는 한의학도는 분명 이 세상을 구하는 존재들이다. 그가 바로 당신이다.
“천신과 주님이 그대 당신에게 자비와 평화를 주시기를 비나이다.”
May God our Father and our Lord Jesus Christ give you grace and peace. (Philemon 1:3)
예수 믿고 구원받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예수 믿고 구원받은 이 후 무엇을 하느냐가 중요하다. 세상을 평화롭게 하는 삶이 될 것이냐. 세상을 살리는 일을 할 것이냐. 바로 자비심으로 살고 평화가 넘쳐 평화를 주는 사람으로 사는 것이다. Go in peace. 평화 안으로 들어가라.
자비심과 평화로 사는 것이다. 바로 우리들의 시대는 불신과 탐욕을 넘어 자비심과 평화가 넘치는 마음으로 살고 그렇게 사람을 만나는 것이다.
한의학도가 환자를 대상으로 여길 때 스스로가 대상화 되는 것이다. 인간을 대상화 하면 망가진 한의학도가 된다. 내가 누군가를 대상화 할 때 바로 나도 누군가의 대상화되는 것을 잊지 말라. 대상화 안 되는 지름길은 섬기는 데 있다. 그 길은 낮은자가 되는데 있다. 의사가 환자를 돈으로 계산할 때 법인은 의사를 수입도구로 본다. 결국 의사 스스로가 대상화 되는 것이다. 이렇게 인간을 대상화로 만날 때 이 세상은 불신과 탐욕이라는 경쟁심이 가득한 세상이 되는 것이다. 이런 관계로는 어려운 시절을 극복하지 못하고 망하게 되는 것이다. 한의학도는 이 세상이 망하는 것을 보는 사람이 아니라 이 세상을 망하지 않게 하는 사람이다. 더 나아가 한의학도는 이 세상에 빛을 주는 사람인 것이다.
나는 평화가 넘치는 사람을 이 병실에서 만났다. 몸과 정신이 평화로운 상황인 경우에는 누구나 평화를 지닐 수 있다. 그러나 몸이 아프면 자신 안에 지닌 평화에 균열이 가게 마련이다. 그런데도 평화를 지니고 그 평화가 자신에게서 넘쳐 나 이웃 동료들에게 그 평화를 주는 사람을 보았다. 난 이런 사람을 계속 찾았는지도 모른다.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도 평화가 넘치는 사람은 참으로 신이 주신 고급 품성을 지닌 사람이다. 고급 품성을 지닌 사람은 이미 신이 선택한 사람이다. 고급 품성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신이 주신 것을 속에서 밖으로 드러내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것이다. 평화가 넘치는 이 사람이 가는 곳에는 아픈 와중에도 웃음이 끊이지를 않았다. 이런 고급 품성을 지닌 사람과 함께 지낸 환우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아픔을 잘 이겨 내는 모습으로 느껴졌다. 한의학도는 평화가 넘치는 사람이다.
6. 낮은 자리를 찾아라.
병원은 어떤 곳인가. 내가 병원에 들어와 보니 합리적인 생각보다는 비합리적인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다. 이는 내속에 잠재돼 있는 무의식이 드러나는 곳으로서의 병원임을 깨닫게 되었다. 내 의식이 내 몸을 조절할 때는 몰랐지만 내 의식이 내 몸을 조절하지 못할 때는 무의식이 발동되어 나를 조절하는 것을 경험했다. 그래서 예기치 않은 행동이 나타나게 된다. 바로 이런 곳이 병원이다. 그래서 병원은 예기치 않은 말과 행동을 받아줄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하는 공간이다. 자신의 합리적인 판단으로 수 없이 동료들이나 환우들을 재단하는 사람이 있을 곳이 못 되는 곳이 바로 병원인 것이다. 병원은 이렇게 포용과 관용을 기저로 하는 공간으로 지어져야 하고 그런 사람이 존재해야 한다. 초월이 아닌 포월로서의 한의학도이다.
일반사람이 보면 비합리적일 수 있겠지만 신이 보면 그 비합리성으로 인해 제대로 된 사람을 만들려는 의도로 볼 수 있겠다. 즉 신이 자신에게 준 인생 숙제를 풀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병원에서 맞이하게 되고 그것을 푸는 병원이 되는 것이다. 의타심이 많은 자신이었음도 발견하게 되고, 외로움을 많이 타는 사람이 자신이었음을 인정하게 되고, 뭔가 인정받고 싶은 마음을 부인하고 있었다는 것을 시인하게 되고, 사랑을 충만히 받지 못해 안달거리며 살았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게 되고, 신을 겸허히 찾는 사람으로 변하게 되는 것을 경험하는 곳으로 신이 주신 인생숙제를 많이 푸는 곳 병원임을 깨닫게 되었다.
걸을 수 없었고 움직일 수 없었기에 침상생활만 한 경험이 자신을 제대로 보게 했다. 움직이는 것이 고통으로 다가오기에 움직임 그 자체는 현실성이 없는 꿈이었다. 그래서 움직이고 활동한 다는 것은 생각 뿐 이었다. 고통 없이 움직이고, 고통 없이 걷는 다는 것이 바로 신이 인간에게 선물하신 나라라면 그곳이 바로 움직이고 걷는 곳이라는 고백이 저절로 내 입에서 나왔다. 신이 주신 나라를 찾으려면 나는 항상 하늘 만 쳐다봤는데, 신이 주신 나라는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 속에 있는 것을 깨달았다. 신이 나에게 주신 나라인데 나는 그것을 느끼지 못하고 산 것이다. “오! 어리석은 내 인생이여.” 자신의 어리석음을 보려면 침상에서의 열흘만 생활하라.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가 이렇게 어렵단 말인가?
침상에 누워서 방문한 사람을 보니 나는 아래에서 위를 쳐다보게 된다. 나는 누워있어 움직이지 못하고 그는 움직였고 걸었다. 나와 그의 구별은 움직임 자체뿐이었다. 움직임 그것이 이렇게 큰 차이인 줄 난 걸어 다닐 때가 아닌 걷지 못하고 누워 있을 때 깨달은 것이다. 침상에 누워 아래서 위를 쳐다보니 그 얼굴이 크게 보였다. 얼마나 교만했으면 이제야 사람이 크게 보인다는 것을 깨닫는가? 사람이 거대한 존재인 것을 깨달으면서 깊은 반성을 하게 됐다.
조금씩 걷기 시작하면서 누워있을 때의 겸손함을 잊어버리기 시작했다. 내 속에 잠재해 있던 교만이 활동하기 시작한 건 내가 걷기 시작할 때부터이다. 내 의식이 내 몸 전체를 조절하게 되면서부터는 나는 겸손한 나이고 싶은 데 교만한 나로 되는 것을 충분히 감지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 자신이 경계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파악하게 되었다. 내 의식과 내 몸이 함께 가는 것이 하늘이 이치임을 다시 한 번 더 깨닫게 된 것이다. 특히 활동을 생각보다 많이 하는 사람은 대개 교만한 사람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7. 인간의 온전한 의무는 무엇인가?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을 분명 신은 나에게 보내 주신다. 그래서 나는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도움이 되기 위한 나 자신의 영혼의 상태를 항상 점검해야만 한다. 바로 그것이 나의 의무인 것이다. 지나치게 권태롭거나 마음속에 너무 많은 문제들 때문에 비틀거리는 삶의 모습일 때 이들의 부러진 영혼을 접합시키는 외과의사의 역할을 한의학도는 수행하는 것이 한의학도의 온전한 의무이행이라 할 수 있다. WHO에서는 육체적 건강뿐만 아니라 영혼의 건강을 포함시켰다.
인생은 고통스럽고 신비한 작업이다. 인생의 목적지가 뚜렷하게 보이는데도 그곳으로 가는데도 온통 안개에 휩싸여 도중에 길을 잃는 경우가 허다하다. 인간은 이렇게 길 잃어버릴 절망의 경우가 있다는 것을 항상 잊지 말아야 한다. 물론, 길이 없는 최악의 경우도 우리 인생 앞에 드러나기도 한다. 자신의 길을 잃어버렸다고 알아차리는 곳이 병원이란 공간이다. 이런 점에서는 감옥과도 같은 특질을 갖고 있기도 하다.
세상에서 살 때에는 줄기차게 제 길을 간다고 여겼는데 병원에 와서 생각해 보니 신이 주신 자신의 길도 아닌 길을 자신의 길이라고 우겨대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이렇게 병원은 자신이 잃어버린 길을 되찾는 곳이다.
병원에 근무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길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길을 찾도록 안내해 주는 역할을 맡은 이들이다. 특히 한의학도는 안내하는 사람으로 철학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한의학도는 사람을 깊이 보는 사람이여야 하기 때문이다. 사람을 제대로 알아야 인생길을 찾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한의학도는 철학자다.
길을 잃어버린 사람이 한의학도인 철학자를 만나 길을 잃어버린 이유와, 그래서 고통스러움을 맛보는 지금과, 앞으로 가야할 그 길을 말하는 곳 이어야 한다. 이러한 점에서 한의학도는 존재와 비존재사이를 넘나드는, 눈에 보이는 존재와 눈이 보이지 않는 존재를 오가는 신성한 역할을 맡은 신과 인간과의 중재자인 사제(신께 제사를 올리는 제사장 역할)와 같은 특질을 지닌다.
자신의 갈 길을 잃어버렸을 때 인간은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래서 기독교의 경전에서는 "두려워하지 말라 Don't be afraid of it."라는 말이 365번이나 나온다 한다. 두려움 속에 갇힌 사람이 한의학도를 만나 치유를 받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한의학도는 신이 주신 사명을 이행하는 거룩한 존재이다.
인간은 신비스런 거룩한 존재이다. 그래서 자신이 거룩한 삶을 사는가에 대한 거룩한 시간을 함의하고 사는가를 파악해야 한다. 하루 종일 일을 한다 해도 거룩한 마음으로 거룩한 존재로 임한다면 자신의 삶이 거룩해진다. 거룩한 존재로의 삶이 바로 온전한 삶이다. 한의학도로의 거룩한 시간을 얼 만큼 가지는가?
8. 나의 관심이란 항아리에 선함만 채워라.
인간은 누구나 성취하면서 자기의 존재를 확인한다. 실제로 성취했을 때 어떠했는가. 성취했다는 자유로운 맛을 보면서 동시에 무언가 허전한 상실감을 느낀다. 이러한 인간에 대한 이해로부터 한의학도의 사고는 출발해야한다. 생각을 깊게 하는 것으로 인해 관심을 크게 한다.
사람은 어느 것에 관심을 가지냐에 따라 삶의 내용이 달라진다. 선한 것에 관심을 가지면 선한사람이 되고 악한 것에 관심을 가지면 악한 사람이 된다. 그렇다면 나는 어디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가. 나의 몸이라는 항아리에 어떤 가치의 관심으로 채워져 있는가?
가만히 생각해 보자. 난 병원에서 사람을 밝게 해주고 사람을 넓게 이해해 주고 긍정적인 생각을 가진 분을 만났다. 몸이 아픔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의지를 향상시키는데 집중하는 분이었다. 그는 참 좋은 사람이었다. 기운이 넘치고 유머가 넘치는 사람이다. 그가 곁에 있을 때 나는 힘을 받는 것 같았다. 그가 다른 병원에 갔을 때부터 나는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나 자신이 이해심이 적고 판단력이 부족하여 실수가 자주 발생하고 포용력이 적고 진중함이 적은 것을 이미 알기 때문에 나는 포용력이 큰 사람을 만나기를 고대하면서 그런 사람을 어디서든지 찾기를 좋아한다. 이것은 어쩌면 내가 사랑을 적게 받고 자란 것에 기인할 수도 있겠지만 그 보다도 인간이 기본적으로 느끼는 외로움의 특질 때문이라 본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인간을 필요로 한다. 문제는 어떤 인간을 필요로 하는가에 따라 자신의 관심의 내용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결국 관심의 내용에 따라 삶의 가치가 달라지고 사람이 달라지는 것이다. 이렇게 나의 관심이 관용에 있다면 나의 항아리에 관용이 담아지는 것이다. 그렇게 포용력도, 이해력도 결국 큰 사랑도 내 몸이라는 항아리에 담아지게 되는 것이다. 소인이 대인이 되는 방법을 성현들은 대다수 이런 방도에 따랐다. 성현들의 큰 영역에서 시대를 초월하여 함께 하는 한의학도는 삶의 관심을 이미 그런 관용, 포용, 이해, 자비, 큰 사랑을 담고 있는 것이다. 나는 한의학도가 그것을 확대하고 심화하는 것이 현재의 과제라고 여긴다.
병원에서 누구를 만나는가가 중요하다. 어떤 사람을 하루 만났는데 그날 하루 종일 기분이 좋았다. 때론 어떤 사람을 만나서 한 시간 얘기를 들었는데 내 평생 지켜 나갈 목표를 지니게 되었다. 어떤 사람을 만나면 그 날 하루 전체를 기분 좋게 지내기도 하고, 어떤 이와 하루를 지내면서 사는 얘기를 나눈 것으로 인해 나의 사는 방식을 하루아침에 고친 경우도 있다. 누구나 좋은 사람을 만나는 것이 중요하다. 환자는 좋은 한의학도를 만나는 것이 좋다.
한의학도는 좋은 환자를 만나는 것이 중요하다. “왜, 나에게는 좋은 사람이 나타나지 않지?”라고 자문할 수도 있다. 그것 때문에 절망할 이유는 전혀 없다. 그 좋은 사람은 제 때에 나에게 나타나기 때문에 나는 그동안 숙성하는 시간이라고 보면 좋다. 그래서 한의학도는 기다림에 익숙한 사람일수 있다. 급한 성질은 역시 화를 부르고 제 시간을 놓치는 경우가 허다하다. 내가 준비되어 있으면 좋은 사람은 수시로 나에게 다가와 나를 만나게 한다. 한의학도에게 신이 주신 아주 귀한 선물이 기다림이다.
제대로 산다는 확신은 있었지만 그것이 반드시 성공한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는 상황을 맞았을 때 당신은 어떻게 하는가? 또한 제대로 길을 가고 있다고 해도 때를 잘 못 선택했을 수도 있다. 이때 자신에 대해 너무 좌절하지 않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인생에는 “제 때”가 있음을 명심하라는 것이다. 그러니 자신을 탓하지 말고, 자신을 죽이려고 하지 마라. 제 때가 아직 도래하지 않았을 때 당황하지 않고 제대로 가려면 특히 두 가지 기질을 가져야한다. 인간에 대한 경외감을 향한 끊임없는 상상력과 불굴의 의지가 그것이다. 이것은 나 자신에 대한, 그리고 동료에 대한 창조성과 의식성을 가진 존재로 보는 것이고 이에 대한 신뢰를 주는 것이다.
9. 기쁨이 넘치는 삶으로 해학으로 살라.
퇴원하는 환우가 있어서 닭튀김, 어묵, 음료수, 과자, 과일을 놓고 6인용 병실안의 간병인, 보호자와 함께 때로는 간호사와 함께 노래도 부르고 축하의 말도 해주고 카드도 주고 덕담도 주고받았다. 한영애의 ‘거기 누구 없소’ 란 CD를 틀어놓고 함께 춤도 추었다.
3주간 수고한 간병인에게 꽃다발과 작은 상품권을 주면서 수육에다 보쌈을 싸 먹으면서 환송식도 갖고, 병원 밖까지 정중하게 배웅도 해 주었다.
재활 병실과 암 환우 병실과 함께 과일도 나눠먹고 공동으로 잔치도 벌였다. 6개월 만에 복도를 사이에 두고 구분하였는데 처음 앞 병실에 들어 왔다고 기뻐하셨다. 어두운 병실에서 웃음소리가 나오고 서로 권면하는 모습이 나오고 서로 챙겨주는 모습이 드러났다.
두 병실과 관계가 좋아지니 퇴원하는 사람이 오면 카드에다가 좋은 말들을 써 주는 습관도 생기게 되었다. 아픈 몸이면서도 밝은 얼굴이 되는 시간이 많아졌다. 난화분을 갖고 싶어 하여 난화분을 주기도 했다. 그것이 자신을 위한 욕심이 아니기를 바랐다. 물욕이 아닌 진심으로 난이 좋아서이기를 바랐다. 아픈 몸인데 탐심을 채워주는 줌은 좋은 것 같지 않았다.
병실에서의 작은 잔치를 하면서 밝은 얼굴을 하게 되는 삶을 보게 되었다. 때로는 힘겹게 고통 속에 있는 이를 위해 기도를 영어로도 해 주고 우리말로 기도를 해 주기도 하였다. 나는 이들 환우들을 만나면서 고통 속에서의 소통의 기쁨의 맛을 얼마나 고대하고 있는가를 알게 되었다. 통증 속에서 웃을 수 있는 기회를 갖는 것이 귀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혼자 있고 싶을 때가 누구나 있다. 개인시간을 적절히 존중하는 것은 깊은 사람에 대한 이해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사람에 대한 깊은 존중으로부터 개인시간을 마련해 주는 배려가 있을 때 함께 공유하는 즐거움이 배가 된다. 통증이 심할 때는 조용히 하는 것이 매우 좋다.
통증이 심할 때는 TV가 없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TV 시청으로 인해 내 운동시간을 빼앗기기도 했고 나의 깊은 생각에 잠기는 것에 방해 받기도 했다. 혹시 TV없는 병실이면 좋겠다. 병실에서조차 너무나 많이 TV에 빠져있다.
디스크의 이상으로 병실에 있는 환우는 베개를 낮은 것으로 하든지 베개를 베지 않고 수건을 말아 목 뒤에만 놓고 잔다든지, 누워서 일어 날 때 옆으로 일어나고, 바닥은 딱딱하게 하기 위해 보드를 대고, 높은 베개를 사용하여 TV를 보면 허리가 더 아프고, 계단 오르는 것은 쉽지만 계단을 내려오는 것을 아예 하지 않는 것이 좋고, 갑작스런 통증이 왔을 때는 뜨거운 물을 대는 것 보다는 얼음찜질이 48시간 이내에는 더 좋다는 것들을 허리 디스크로 인한 고통을 받는 환우들끼리 전달되는 대화에서 얻기도 했다. 디스크 이상이 있는 사람끼리의 자조모임을 만드는 것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디스크 하면 ‘우리들 병원’하는 것처럼 디스크 하면 ‘수술하지 않고 낫는 둔산 한방병원’이란 말들이 회자되기를 바란다. 이처럼 자조모임을 활성화하고 이를 지원한다면 한방병원이 더 활성화될 것이다. 한방으로 암 치료를 하는 환우들의 자조 모임은 둔산 한방병원의 특성을 최대로 살리는 것이 될 것이다. 때로는 “간경화는 둔산 한방병원” 이렇게 이미 선전화 되어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이를 이루기 위해 자조모임을 활성화 하고 당뇨병 학교, 디스크 교실 등을 열어 소책자를 만들어 선전한다면 좋은 병원이 될 것이다.
병실에 누워 있을 때 환우가 가장 많이 보는 것이 천장이다. 그 천장이 쥐오줌 놓은 문양이 있다면 어떤 느낌이 들까? 백색 공포증이라든지 백색기피증이 심한 사람에게는 백색 천장이 어떤 느낌으로 다가올까? 버스우드라는 영국의 쉼이 있는 정원이 무척 큰 병실의 천장은 밤하늘의 수많은 별들을 연상하게 그런 그림으로 되어 있다. 평안한 병실에서 큰 쉼이 있다면 자꾸만 둔산 한방병원만 올려 할 것이다.
기후이변으로 인해 전염병이 창궐할 예정이라면 한방병원에서 이에 대한 적극적인 대처 방법을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 아열대 지역의 전염병 대책을 미리 연구한다면 이 또한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 아열대 전염병균 연구소를 한의학 연구로 할 수 있는 방안은 없는가? 혹여 베트남의 전통적인 치료방법을 이미 우리나라에서 연구한다면 어떨까? 이 연구 프로젝트를 세워 나간다면 국가기금으로 할 수 있을 것이다.
부분만이라도 양. 한방 협진 프로젝트를 자주 하여 한방의 치료범위를 광역화하면 좋겠다. 전신마취를 침으로 하여 수술을 하는 북경대학교 장면을 본 적이 있는데 그것을 우리나라에서는 지식기반이 취약하여 어려운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그 취약기반을 강화할 방안은 없는가? 그 방안이 있다면 왜, 지금 그것을 시도하지 않는가? 용기가 없어서? 인생에서 어려움은 항상 존재한다. 문제는 그 어려움을 극복하려 하는가에 따라 인간은 진보한다. 한의학도는 진보의 첨병이다.
내가 먹고 싶은 것을 간병인이 집에서 만들어서 해 왔다. 간병인 가운을 대전 대학교 둔산 한방병원이라 하면 이미지가 더 높아졌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간병인에게 한방의 간단한 처치 방법을 알게 하여 둔산 한방병원의 간병인은 특특하다는 것을 알게 하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다.
대전 둔산 한방병원은 따뜻한 직원으로 가득한 곳이다. 직원이 많이 웃으면 환우들도 많이 웃게 된다. 직원이 무뚝뚝하면 환우는 답답해한다. 환우는 자신에게 기쁜 인생이길 바란다는 것을 잊지 말자. 아침 6시 경에 혈압을 재러 오는 하루 시작에 만나는 간호사의 웃음이 환우의 하루를 기쁘게 한다.
거실과 휴게실에 동양 차향이 그윽하면 좋겠다. 둔산 한방병원 전체에 한방차향이 그득한 것은 양방병원 냄새에 질린 환우들에게 너무나도 좋은 이미지가 된다. 간단히 차의 성분과 차의 효과를 병기해 놓는다면 더욱 더 좋을 것이다.
우리나라 고전 음악(가야금의 침향무, 해금, 양금 병주 등)을 주로 해서 서양고전음악을 섞어서 틀어줬으면 좋겠다. 항상 은은하게 들리게 한다든지 점심시간에 들리게 한다든지 하면 좋겠다. 특히 물리치료실과 뜸실에 그런 우리 음악소리가 배어 나오면 좋을 것이다.
먹는 것의 문제이다. 고단백질을 주로 하는 식단은 암환우를 위한 것이고 보통식단은 보통식인 것으로 이원화 혹 다원화 시키고 그것의 선택을 환우가 미리 하게 하는 것이다. 먹는 것에 대한 불만이 이상하게 많았다. 걸을 수 있는 이들(환우들과 보호자)은 식당에서 먹는 방법도 한가지의 방법일 수도 있겠다.
따스한 방바닥에서 뜸을 맞은 기억이 나에게는 있는데(이것이 한의학적으로 맞는지 틀리는지는 난 잘 모른다) 둔산 한방병원의 바람은 차가웠다. 일정정도는 온돌방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필요에 따라 침상의 높이도 다르게 하는 것도 많은 사람들의 요구였고, 연기 나가는 통이 아래까지 내려오도록 하는 것의 요구도 많았다.
손끝의 마지막 처리 작업이 중요하다. 초기만남의 작업은 잘하는데 마지막 손끝 작업으로 인해 초기 성과가 무너지는 것을 많이 경험하였다. 예를 들자면 마지막 손으로 지그시 환우의 어깨 혹은 등을 터치하는 것이다. 이 터치가 두려움에 사로잡힌 환우에게 대단한 신뢰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터치 없이 내팽개친다는 인상을 주는 경우를 경험했다는 말이 많았다.
병원에 처음 오는 이는 자신이 매우 두려움에 빠져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이 때 자신의 치유과정과 일정 등을 수시로 말해 주는 것이 좋다. 또한 치유계획이 수정되면 수정된 이유와 처치방법의 다양함도 함께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해 준다면 좋겠다.
입원과정은 신속해서 좋다는 말이 많지만 외출과정과 퇴원과정은 많은 시간이 든다고 불만이 많았다. 혹시 퇴원 이후 병원비를 받는 방식은 없을까?
환우들과의 대화과정-초기 중기-후기와 아침 점심 저녁으로 구분하여 대화매뉴얼을 100가지씩 문답식으로 만든다면 환우들과의 소통이 매우 매끄러워질 것이다.
아침 8시 반에 인사하는 말을 녹음 된 것으로 틀어 주는 것보다 간호사와 환우들이 함께 방송한다면 대단히 인상적일 것이다. 인사말을 때로는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함경도, 평안도, 제주도의 버전으로 하고 환우들의 나은 소식과 직원들의 뉴스를 알린다면 직원과 환우들의 참여 속에 운영되는 병원으로 인식될 것이다.
세계화 되면서 외국의 종합병원이 한반도에 진입할 예정이다. 그들이 오면 현재 종합병원은 5개만 살아남는다고 한다. 나머지 큰 종합병원들은 동네 병원화 된다하고, 삼성병원, 아산병원, 세브란스병원, 강남성모병원, 경희의료원 만 살아남는다 한다. 대전 둔산 한방병원이 살아남을 수 있는 전략은 무엇인가. 뉴 패러다임센터 02 776 9123 www.npc.re.kr의 자문을 받는 것도 좋은 일이다. (경희의료원, 평택 씨티병원이 이곳의 자문을 받아 성장했다.)
한방 암 센터에 오는 외지인들은 대개가 인터넷을 통해 알았다고 한다. 인터넷 선전효과를 높이기 위해 ‘daum’, 'naver' 등과 연계할 수 있겠다. 인터넷 매체를 활용하고 자조모임을 활용하고 소책자를 활용하는 것이다. 더욱이 충청지역의 한의원의 정보를 갖고 있는 것도 중요하다. 둔산 한방병원에서 퇴원하면 충청권 지역의 한의원을 이용하게 되는데 그의 정보가 준비되어 있지 않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한의사의 나이가 얼마고 특별한 전공은 무엇이고 잘하는 전문기술이 있는 특징을 기술하고 주소와 연락전화가 기재된 정도의 지도를 갖고 있다면 동네의 한의원과 둔산 한방병원과의 연결망으로 되어 환우의 건강함을 유지할 수 있는 체계가 어느 정도 설립될 것이다.
우리나라가 아파트 공동주택이 많은 이유는 전후 베이비 붐 세대를 겨냥한 것이었다. 그래서 아파트공화국, 토건공화국, 건설공화국 이란 호칭을 얻게 된 근저가 여기 있는 것이다. 이 세대의 인구가 가장 많다는 것이다.(1958년생부터 1965년생까지). 자동차 산업과 보험회사 등이 바로 이 베이붐 세대의 특성을 파악하여 우리나라에서 성장한 기업군들 속에 속하게 된 것이다. 이미 삼성병원이 베이붐 세대라는 완전정복세대들의 특성을 이미 파악하여 공략에 성공을 거둔 것이다. 어쩌면 대전 둔산 한방병원도 전후 베이비 붐 세대를 겨냥하여 전문치료의 내용을 집중 공략하는 방법이 있겠다. 이를테면 휴가기간 혹은 연휴기간의 3박 4일 혹은 2박 3일을 상정하여 예방차원의 진료기간을 상정하는 것이 그 좋은 예일 것이다. 금,토,.일,월요일을 연결하여 몸이 좀 이상이 있으면 미리 예방하는 완전정복 세대들의 지적용구를 충족시킬만한 것이다. 특화되고 전문화된 예방 팀을 만들어 선전이 된다면 이 또한 좋은 공략이 될 것이다.
전후세대들의 인구수가 많기 때문에 가난한 이들도 많다. 현재 비정규직 노동자가 일천만여 명이 된다. 7,80년대는 독재-반독재의 구도로 반독재의 사람들의 저항운동으로 국민적 호응을 얻었다. 2000년대에 들어서는 세계화로 인한 비정규직의 확대로 인한 노동의 불안정이 가속화되고 빈부의 격차가 심화되고 있는 현실이다. 정규직-비정규직의 구도가 강화되고 있기에 이에 대한 국민적 예방의학 내지 가난한 이들의 치료접근을 대중화할 방도를 연구하는 것도 진보사회를 향한 하나의 방식이 될 것이다. CMC(가톨릭병원)는 자비와 구제의 병원인데 그 본래 취지를 살려 내지 못한다고 자성의 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자신 스스로 반성을 꾸준히 하지 않으면 CMC 스스로 망가진다는 경계의 소리를 하고 있다. 이처럼 둔산 한방병원은 대중적인 치료와 예방을 병행하는 접근을 통한 길에 선다면 보다 나은 사회에서 자신의 역할을 앞당기게 할 것이라 본다.
북측의 고려 의학과 대전 둔산 한방병원과 어떻게 관계를 맺을 수 있을까? 북측의 고려의학과 결합하여 암센터를 강화할 방안을 통일부랑 적극적으로 모색하는 것도 중요한 하나의 방법이라 할 수 있겠다. 고려의학의 둔산 한방병원과 공동으로 설립한 “암 치유센터”를 세울 수 있겠다. 이로 인해 북측의 발전된 고려의학이 남측에 소개되는 창구가 될 수 있고 이로 인해 둔산 한방병원의 선전이 극대화될 수 있겠다. 이것이 잘 되면 이후 전국적으로 공동 암치유센터를 세울 수 있고 미주지역과 유럽에도 진출할 수 있을 것이다.
줄기세포를 이용하여 한약제제를 만드는 방법은 없을까? 아직도 한의학도 중에 역분화 줄기세포와 연계된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는 개척자가 나오지 않은 것인지? 최근 성형외과 의사 1000여명이 역분화 줄기세포와 연결하여 성형에 필요한 부분을 만들 것이라 한다. 동국대학은 역분화 줄기세포 연구동을 주어 의학에 연계하고자 후발주자인 동국대 병원의 적극적인 작업을 보고 있다. 한의학도가 첨단 분야와의 접촉을 적극적으로 모색하는 중에 있다면 우리나라를 살게 하는 동력이 한의학도에서 나오게 될 것이다.
암센터의 위치는 장기적으로 공기가 좋은 곳으로 이동해야 할 것이다. 현재 위치는 암센터로는 공기의 문제에서는 적합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암센터를 새롭게 만들 공간을 장기적 전망 하에서 준비해야 할 것이다.
연구단지와의 적절한 연결망을 형성하여 연구 분야는 한의학 분야에서, 연구자들과 그들의 식구는 둔산 한방병원에서 치유할 수 있게 만드는 일이다. 대다수의 연구자들이 한국전쟁 이후 베이비 붐 세대들이다. 이들의 부모님들이 연로하신 분들이다. 또한 이들 베이비붐 세대들이 아프기 시작한 세대들이기도 하다.
둔산 한방병원은 인간적이다. 한의사들이 환우의 얘기를 잘 들어 주는 곳이다. 병원이 아늑하다. 간호사들이 매우 친절하다. 이런 말들이 많았다.
10. 몸과 영혼이 쉬는 평화세상을 만드는 한의학도
자신의 스승이 없는 사람은 참으로 불행한 사람이다. 자신이 사람을 존중할 줄 모를 때 자신에게는 스승이 나타나지 않게 된다. 자신의 스승을 가까운 데에서 찾는 것이다. 완벽한 스승은 없다. 그러나 나를 나 되게 하는 스승은 많이 존재한다. 이상하게도 스승을 많이 가진 이는 스승을 많이 가지지 못한 이 보다 훨씬 행복하다. 지금 만나는 사람이 바로 나의 스승이다. 이런 마음이 없다면 나는 지금 행복하다 할지라도 곧 그 행복이 떠나간다. 지금만나는 사람이 나의 길을 안내해 주는 분임을 꼭 명심하기 바란다. 그가 배웠던 배우지 않았던 그것과는 상관없다. 또한 그가 힘이 세든, 세지 않던 상관없다. 그가 내 혈족이든 혈족이 아니든 상관없다. 스승은 나에게 비전을 주는 분이다. 그렇기 때문에 스승은 나의 영적 안내자이면서 영적 친구이다. 그래서 나는 스승과 깊은 우정을 나누고 산다.
자신이 전문가 일뿐이지 스승의 가치를 지니지 못한다면 어처구니없는 삶이 될 가능성이 매우 많다. 전문가로 나서는 자리에서 절대 손해를 보지 않으려는 사람을 나는 너무나도 많이 보았다. 전문가는 스승의 내용이 없으면 자신의 자리에서 벗어날 때 쉽게 망가지는 삶이 대다수이다. 그런데 대다수의 전문가들은 이것을 놓치고 있다. 좀 손해를 보면 안 될까? 그 손해는 인간을 위한 것이라면 진실한 희생제물이 될 것이다. 그로인해 인간을 위하여 열정적으로 가치를 세워 나가게 된다. 그래서 그는 스승으로 칭호를 받는다. 그 스승이 가난할지라도. 이름난 제자들이 없을지라도.
"I will look for those that are lost, bring back those that wander off, bandage those that are hurt, and heal those that are fat and strong I will destroy, because I am a shepherd who does what is right (Ezekiel 34:16).
헤매는 것은 찾아내고 길 잃은 것은 도로 데려 오리라. 상처 입은 것은 싸매주고 아픈 것은 힘나도록 잘 먹여 주고 기름지고 튼튼한 것은 지켜 주겠다. 이렇게 나 야훼는 목자의 구실을 다 하리라(에제키엘34:16)."
에제키엘서에 나온 사제가 지켜야 할 5가지 규칙을 한의학도가 지킬 5가지 규칙으로 상정해 본다. 헤매는 사람, 길 잃어버린 사람, 상처 난 사람, 아픈 사람, 온전한 사람을 잘 지켜 주는 것이 그것이다. 한의학도 곁에는 바로 이러한 사람이 벗으로 있어야 한다. 그 때 한의학도는 이 세상의 빛이 되어 등경위에 있는 사람이 될 것이다.
자꾸만 나이가 들면서 느끼는 것은 몸만 사는 것이 아니라 영혼도 함께 산다는 생각이 더 많아 진다. 우리는 이제 영혼의 운명이 곧 사회적 질서의 운명이라는 것; 만약 우리 안의 영이 말라비틀어지면 우리 주변에 세워 놓은 온 세계 역시 말라비틀어지고 말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데오로도 로작). 영혼의 친구가 없는 사람은 머리가 없는 몸이라는 영국의 켈틱의 격언을 기억하면서 우리의 영혼을 맑게 하기 위한 T.S.Eliot 엘리오트 Four Quartets 중에서 이스트 코커 시를 하나 그린다.
여러분이 잘 모르는 곳에 도달하기 위하여 여러분은 무지의 길을 통과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소유하지 못한 것을 소유하기 위하여 여러분은 무소유의 길을 통과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아닌 존재에 도달하기 위하여 여러분은 자기가 속하지 않은 길을 통과해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잘 모른다는 것만이 여러분이 아는 유일한 사실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소유하고 있는 것은 여러분이 소유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있는 곳은 여러분이 없는 곳입니다.
한의학도가 이 세상의 스승으로 자리하기를 기도한다. 이 기도로 인해 이 세상이 평화의 삶이 될 것임을 확신한다. 신은 바로 그러하기를 한의학도들에게 기대한다.
오늘은 9월 24일로 추석 전날이다. 어제 비엔나 IAEA유엔기구서 회의를 다녀 온 지우가 센트륨 한 병을 더 건강 하라며 사다 주었다. 내가 병실에 있는 동안 지우는 유엔회의를 다녀온 것이다. 나는 오늘 일상대로 병실에서 오전 침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다. 계단 내려가는 것의 두려움이 사라질 것을 기대하면서 말이다.
병실과 화장실을 청소하는 파견된 여성의 노동을 통한 사랑과 족욕실 물을 받아주는 여성의 노동을 통한 사랑과 똥오줌을 받아 준 간병인의 노동을 통한 사랑과 영화가 끝난 후 틀어주는 대중가요가 들리는 뜸선생의 뜨거움을 통한 사랑과 온 몸으로 다가오는 물리치료사의 몸노동을 통한 사랑과 ‘오늘 대변 몇 번 했어요?’ 라고 크게 말하는 간호사들의 수고를 통한 사랑과 ‘어제의 통증이 열이라면 오늘은 몇이예요?’ 라는 한의학도들의 진중하신 질문과 따끔한 침의 정성을 통한 사랑과 한 몸을 치유해 달라고 방문한 신의 백성들의 기도를 통한 사랑과 신의 은총과 평화를 통한 사랑으로 추석이 지난 후 정든 병실을 떠날 것이다. 이 모든 일들이 그리움으로 남을 것이다.
11. 인간에 대한 세계의 생각- 부록.
자주 술에 취해 살거나 사는 것에 별 의미 없이 지내거나 생의 목적이 흐릿하다고 느낄 때 아래와 같은 수많은 인간의 죽음으로 만든 선언서의 일부나마 숙독한다면 뭔가 느낌이 올 것이다.
Universal Declaration of Human Rights 세계 인권선언
(UN 총회에서 1948년 12월 10일 제정)
전문 첫 문장;
우리는 인류 가족 모두에게, 그들이 원래부터 존엄성과, 남들과 똑같은 권리와, 남에게 빼앗길 수 없는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 주는 것이, 자유롭고 정의로우며 평화적인 세상의 밑바탕이 된다는 점을 인정한다.
제 1조 : 모든 사람은 태어 날 때부터 자유로운 존재로 태어났고, 한 사람과 한 사람의 존엄과 권리는 모두 똑 같다. 사람은 이성과 양심을 가지고 있으므로 서로 상대방을 형제애의 정신으로 대해야 할 것이다.
제 3조 : 모든 사람은 자기 생명을 지킬 권리, 자유를 누릴 권리, 그리고 자기 자신의 안전을 지킬 권리가 있다.
제 25조 : 1항; 모든 사람은 자신과 가족의 건강과 안위에 적합한 생활수준을 누릴 권리를 가진다. 이러한 권리에는 먹을거리, 입을 옷, 주거, 의료, 그리고 생활에 필요한 사회서비스 등을 누릴 권리가 포함된다. 또한 직업을 잃었거나, 질병에 걸렸거나, 장애를 당했거나, 배우자와 사별했거나, 나이가 많이 들었거나, 그 밖의 자신의 힘으로 구제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하여 살길이 막막해진 모든 사람은 사회나 국가로부터 생계보장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
제 29조 : 1항; 모든 사람은 자기가 속한 공동체에 대하여 한 인간으로서 의무를 진다. 따지고 보면 누구든지 공동체를 통하지 않고서는 자신의 인격을 자유롭고 온전하게 발전시킬 수 없지 않겠는가?
(책 ‘인권의 문법’ 조효제 지음. 후마니타스출판사. p345, 346, 350에서 발췌).
Service가 봉사라는 뜻도 있지만 예배라는 뜻도 있다. 인간에 대한 봉사는 인간이 신께 드리는 예배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한의학도는 이런 점에서 인간과 신의 중간에서 자신의 역할을 맡은 사제 역할과 같다고 본다.
사회체계는 정치와 관련한 세상 사람들의 과제라 본다면 생명은 사제의 과제이다. 이런 점에서 한의학도는 인간세상과 생명 사이의 일들을 맡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기저로 하여 Better Life를 사제와 한의학도의 일로 본 것이고 Better Society는 정치가의 일로 보았다.
혼자로는 70%의 일을 할 때 그러나 누군가 함께 하는 벗이 있다면 좋은 뜻을 훨씬 많이 하게 된다. 인간은 신을 통하여 보다 나은 사회로 보다 나은 생명에로 도달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