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원 성당에서 횡성 방면으로 느릅나무가 많다고 해서 ‘느르게’라고 불리는 고개를 넘어 약 2.5km를 가면 오른 쪽에 골프장 옥스필드CC 입구 도로가 나온다. 이 입구 길 건너 버스 정류장 쪽 산속으로 약 100m 올라가면 왼쪽 숲속에 최경환 성인의 후손 가족 묘지가 있다. 최양업 신부의 첫째, 셋째, 넷째 동생들 내외와 후손들의 묘가 있다.
최경환(崔京煥, 1805~1839, 프란치스코)은 충청도 홍주(洪州) 지방 다랫골에서 6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는데 그의 집안은 한국 교회의 창설 시대 때부터 천주교를 믿어 온 집안이었다. 어려서부터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고, 성장해서는 신앙생활에 도움이 되는 곳을 찾아다니다가 과천(果川)의 수리산에 정착하여 교우촌을 건설하였다.

1836년 아들 최양업(崔良業)을 모방 신부에게 보내어 마카오에서 신학 공부를 하게 했다. 1839년 초에 회장으로 임명되었고, 이어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7월 31일 서울에서 내려온 포졸들에게 동리 교우와 가족 등 40여 명과 함께 체포되었다.
수리산에서 서울의 포청까지 끌려간 최경환은 2개월 동안 하루걸러 형벌과 고문을 당하여 태장 340대, 곤장 110대를 맞았다. 9월 11일 최후로 곤장 25대를 맞고는 그 이튿날 옥사, 35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하느님의 종 순교자 이성례(李聖禮, 1801~1840, 마리아)는 성인 최경환의 아내이며, 최양업(崔良業, 鼎九, 1821~1861, 토마스) 신부의 어머니시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7월 31일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포청에서 300대 이상의 곤장을 맞고 형조에서도 매우 혹독한 형벌을 당하였으나 끝까지 신앙을 고수, 1840년 1월 31일(음 1839년 12월 27일) 당고개[堂峴]에서 6명의 교우와 함께 참수되어 순교하였다. 여섯 아들을 두었는데 큰 아들 정구(鼎九, 최양업 신부), 희정(羲鼎 당시 15세), 선정(善鼎 당시 12세), 우정(禹鼎 당시 9세), 신정(信鼎 당시 6세), 그리고 젖먹이였던 세 살짜리 스테파노였다.

■ 최양업 신부의 네 동생들 이야기
당고개에서 이성례 마리아가 순교한 후 최양업 신부의 네 동생(희정, 선정, 우정, 신정)의 후일담을 셋째 동생인 최우정 바시리오의 큰아들 최상종이 1939년에 기록한 내용과 넷째 동생인 최신정 델레신포로의 아내 송 아가타(1838~1930)의 구술을 바탕으로 정리하였다. 최양업 신부의 증조부 최한일은 이존창의 전교로 천주교인이 되었는데 아들 최인주 하나를 두고 일찍 세상을 떠났다.
1791년 신해박해 때 과부가 된 부인 이씨(이존창의 누이)는 아들 최인주를 데리고 서울을 떠나 청양 다락골에 정착하였다. 그 후 최인주가 결혼하여 아들 셋을 두었는데 최영렬, 최영겸, 최영눌이다. 최영눌이 최양업 신부의 부친 최경환 프란치스코다. 삼 형제는 나중에 서울에 와 살다가 박해로 도피하게 되는데, 첫째인 최영렬은 목천 서덕골, 둘째 최영겸은 용인 한덕골에 와서 살다가 골배마실로, 최경환은 여러 지방을 거쳐 과천 수리산에 있는 교우촌으로 각각 피신하였다. 1836년 15살의 최양업은 신학생으로 발탁되어 마카오로 떠났고 3년 후인 1839년 기해박해 때 담뱃골의 최경환, 이성례 부부는 체포되어 순교하였다.
최희정 야고보는 어린 동생들을 목천 서덕골 큰아버지(최영렬) 댁과 한덕골 작은아버지(최영겸) 댁에 나누어 의탁하였다. 그리고 둘째 동생 최우정 바시리오는 진천 동골에 있는 친척집에 부탁하였다. 1849년 큰형 최양업이 신부가 되어 돌아왔다. 최 신부는 용인 한덕골 작은아버지 최영겸 집에서 동생 사 형제를 만났다.
그때 페레올 주교가 최 신부의 거처를 진천 동골 공소로 배정하여 그곳으로 떠났다. 몇 년 후(1853년경 추정) 최 신부는 열심한 교우 송구현 도미니코(1866년 병인박해 때 순교)의 장녀 송 막달레나, 차녀 송 아가타가 정숙함을 알고 두 동생과 결혼을 시켰다.
첫째 동생 최희정 야고보는 박해 기간 세 어린 동생을 데리고 많은 고초를 겪었으나 그에 대한 행적은 별로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말년에 충북 진천군 바라산 교우촌에서 선종하였다는 기록만이 전해지고 있다. 최희정은 아들 셋을 두었는데 막내아들 최유종의 손자가 원주교구 최기식 신부다.
둘째 동생 최선정 안드레아는 사람됨이 비범하고 성정이 걸걸하여 모친 이성례 마리아의 성품을 많이 닮았던 듯하다. 슬하에 딸만 둘 두었다. 후에 경기도 광주군 시어골 교우촌에서 선종하였다고 한다.
셋째 동생 최우정 바시리오는 송 막달레나와 결혼한 후 수년을 진천 동골에서 살다가 박해로 피해 다니며 묵주와 상본을 만들어 팔고 송 막달레나는 바느질로 어렵게 생활하였다. 그 후 집신 장수가 된 두 내외는 무사히 박해 시대를 넘겼다. 위로 딸 둘과 아들 둘을 두었는데 큰딸(아나타시아)에게서 박우철 신부를 배출하였고, 장남 최상종이 수기의 주인공 빈첸시오다. 병인박해 이후 10년 가까이 신발 장수를 하던 최우정은 블랑 신부(후에 제7대 교구장)의 복사가 되어 가정은 돌보지 않고 전국을 순회하다가 1886년 56세 정도에 당시 유행하던 악질로 7월 7일 고백의 기도 속에 숨을 거두었다.
막내 동생 최신정 델레신포로는 송 아가타와 결혼 후 최 신부를 모시고 광주 소리울에서 살다가 몇 해 후 최 신부의 권유로 다시 안양의 담뱃골 옛 고향으로 이사하였다. 종종 최 신부가 그곳에 들르면 부친 묘에 올라가 묵주 기도를 바치고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나중에 심해지는 박해를 피해 광주군 함박동에서 살다가 포졸들이 들이닥쳐 피신하고 구걸을 하면서 유랑 생활을 하였다. 장사를 시작하려고 빚을 내었지만 실패하고, 어느날 읍내 저자에 다녀오겠다고 나간 후 소식이 끊겼다.
갓 30세를 넘은 젊은 송 아가다가 3남매를 데리고 객지에서 갖은 고초와 봉욕을 피하며 살아야했던 남은 삶은 차라리 수도의 고행이었다. 노년의 송 아가다는 강원도 횡성군의 풍수원 성당 아랫 마을로 이주하여 여생을 보냈다.
박해의 풍파를 피할 때 산중의 눈 속에서 강보로 싸서 길렀던 작은 딸이 김씨 집안에 출가해서 낳은 아들(김휘중 요셉 신부)이 사제로 서품되는 기쁨을 얻게 되었다. 송 아가다는 1930년 4월 24일에 병자성사를 받고 향년 92세로 선종하였다. 송 아가다 할머니는 횡성 '느루개 마을' 양지바른 언덕에 홀로 잠들어 계시며 바로 곁에는 형부와 친언니인 최우정(바시리오), 송 막달레나 합장 묘가 함께 있어 외로움을 덜어드리고 있다. 이곳이 바로 최경화 성인의 후손 가족 묘역이다.
■ 찾아 가는 길

■ 순례 정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