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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과 나다나엘
요 1:43-51
43 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44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벳새다 사람이라
45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46 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이르되 와서 보라 하니라
47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이르시되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48 나다나엘이 이르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49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5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51 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요 1:43-51 / [빌립과 나다나엘을 부르시다] 다음날 예수께서는 갈릴리로 가려던 참에 빌립을 만나자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다. 44)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의 고향인 벳새다 사람이었다. 45)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가서 말하였다. `우리는 모세와 예언자들이 말한 바로 그분을 만났소. 그분의 이름은 예수인데 나사렛 사람 요셉의 아들이오.' 46) `나사렛이라고요! 거기서 무슨 선한 사람이 나올 수 있겠소.' 나다나엘이 소리쳤다. 그러자 빌립이 `직접 만나 보시오' 하고 대답하였다. 47) 예수께서는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고 말씀하셨다. `참 이스라엘 자손이 오는구나. 이 사람에게는 거짓이 조금도 없다.' 48) 나다나엘이 `저를 어떻게 아십니까?' 하고 묻자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빌립이 너를 찾아가기 전에 이미 나는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는 것을 보았다. 49) 나다나엘이 말하였다. `선생님, 선생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이스라엘의 왕이십니다.' 50)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는 너를 보았다 해서 나를 믿느냐? 너는 이보다 더 큰일을 보게 될 것이다. 51) ㄱ)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인자 위에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ㄱ. 창28:12)
예수께서 어둠의 땅 갈릴리로 가서 빌립과 나다나엘을 제자로 삼으셨습니다.
빌립의 전도(43-46) 갈릴리는 이방 나라들의 침략으로 인해 어둡고 혼돈한 지역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곳에 가신 것은 선지자의 예언대로 가장 어두운 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생명의 빛을 비추어주기 위함이었습니다(사 9:1-2). 먼저 빌립이 그곳에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빌립은 안드레와 같이 벳새다 사람이었습니다. 벳새다는 어부의 집이란 뜻으로 갈릴리 바다 북쪽 해변에 있습니다. 빌립은 같은 벳새다 출신인 나다나엘에게 자신이 율법과 선지서에 기록된 메시야를 만났다고 증언하였습니다. 나다나엘이 의심하자 빌립은 “와서 보라”는 아주 단순한 방법으로 전도하였습니다(39). 빌립이 내세운 것은 예수님의 집안, 출신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 자신이었습니다. 나사렛은 작은 시골 마을이었고, 요셉은 가난한 목수였습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예수님께 와서 그의 삶과 능력과 인격을 본다면, 그가 메시야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47-49) 예수님에게 와서 본 나다나엘은 과연 그가 메시야이심을 단번에 알아차렸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전지적(全知的)인 능력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나다나엘의 간사하지 않은 성품과 기도의 습관을 꿰뚫고 계셨습니다. 간사함은 야곱의 천성이었으나 오랜 역경을 통해 그는 변화되었고, 이스라엘이란 명예로운 이름을 얻었습니다. 나다나엘은 이미 이스라엘의 성숙함을 갖춘 상태였고, 자신의 이익보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소원하고 무화과나무 아래서 묵상하며 기도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의 이런 성품과 습관을 말씀하시자 그는 랍비, 하나님의 아들, 이스라엘의 임금이란 호칭을 사용하며 예수님의 메시야되심을 고백하였습니다.
하늘이 열리고(50-51) 나다나엘의 고백을 기뻐하신 예수님께서는 야곱이 받은 은혜보다 더 큰 은혜를 약속하셨습니다. 그 은혜를 체험하는 자는 예수님을 믿는 모든 자입니다. ‘너희’는 복수형으로서 모든 신자들을 지칭합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야곱의 거룩한 체험을 상기시키셨습니다. 곧 야곱이 길에서 돌베개를 베고 자다가 꿈속에서 사다리를 본 체험입니다(창 28:11-12). 이 이야기를 통해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더 큰 은혜는 다음과 같은 것들입니다. 야곱이 체험했던 것처럼 믿는 자들에게는 예수님 안에서 하늘 문이 열릴 것이며(낙심하지 말고 기도해야 할 이유), 그들이 천사들의 보호를 받을 것이며(담대해야 할 이유), 하나님의 복을 받을 것입니다(창 28:17-19).
적용: 참 이스라엘 사람으로 이 세상을 잘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자신의 생각을 말해 보세요. 기독교 신앙은 설명으로 부족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대면입니다. 매일 경건의 시간(QT)을 갖는 것은 하나님과 대면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참조 습 3:13-17).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을 위한 삶과 일은 각자 다를지라도 공통적으로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야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이 받으실 고난을 피하지 않으시고 스스로 자신의 몸에 채우는 결단과 용기를 우리는 배우고 따를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라고 격려하셨습니다.
< 설 교 >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신앙, 빌립
요한복음 1:43-46, 사도행전 1:12-14 / 박찬길 목사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신앙을 배우고 있는데, 오늘은 다섯 번째 시간입니다. 빌립을 보겠습니다. 신약성경에는 빌립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여럿 나옵니다. 헤롯 왕의 동생인 빌립이 있습니다. 헤롯 왕이 자기 동생 빌립의 아내인 헤로디아에게 장가를 가지요. 세례 요한이 옳지 않다고 말하니까 헤롯 왕이 세례 요한을 옥에 가두었다가 나중에 죽입니다. 마가복음 6장에 나옵니다.
전도자 빌립도 있습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일곱 일꾼 중에 한 사람입니다. 빌립은 구제 사역도 담당하지만 전도자의 사역을 탁월하게 감당합니다. 이방 지역인 사마리아에 가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병든 자들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면서 복음을 증거 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세례를 받습니다. 빌립은 성령의 인도를 따라서 에디오피아의 고위 관리에게 성경을 가르쳐주고 세례를 줍니다.
예수님의 제자인 빌립도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배우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빌립은 안드레, 베드로와 한 동네에서 살았습니다. 벳새다 사람입니다. 벳새다는 갈릴리 호수 근방이기 때문에 빌립이 어부로 살았을 것이리라 추정합니다.
빌립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이전에는 세례 요한의 제자로 있었습니다. 안드레와 마찬가지로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보고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는 말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빌립은 안드레에 이어서 예수님의 두 번째 제자가 됩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 이후에는 열정적인 전도자 중에 한 사람이 됩니다. 이제 빌립을 통해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신앙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이 주시는 영적인 능력으로 저와 여러분의 신앙이 새로워지는 귀한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자마자 따랐다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1:43, “…빌립을 만나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이것은 생각을 결단하는 신앙을 말합니다.
요한복음 1장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시는 모습을 보면 제자들의 성격에 따라서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안드레의 경우에는 세례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쫓아왔을 때에 부드러운 대화를 통해서 제자로 부르십니다. 예수님이 안드레에게 ‘무엇을 구하느냐’고 물으셨어요. 안드레는 ‘선생님, 어디에 사세요?’ 다시 묻습니다. 예수님은 거하시는 숙소를 알려주시고, 안드레가 예수님의 숙소를 찾아가면서 교제가 시작됩니다.
베드로는 조금 다릅니다. 베드로의 원래 이름은 시몬입니다. 안드레가 예수님의 제자가 된 후에 자기 형제인 시몬을 전도하잖아요. 시몬이 예수님께 오니까 이름부터 바꾸어 주십니다. 42절,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게바는 베드로라는 말인데, 반석이라는 뜻입니다.
빌립은 전혀 다릅니다. 예수님이 빌립을 만나자마자 “나를 따르라”고 하셨어요. ‘따르라’는 원어는 다른 관계들을 끊는다는 뜻이 있어요. 모든 것을 버리고 일평생 제자로 따르라는 의미입니다.
또한 ‘나를 따르라’의 헬라어 원문은 현재 명령형으로 표기되어 있어요. 예수님은 빌립에게 선택권을 주지 않으셨어요. 그냥 명령하셨어요. “나를 따르라” 상당히 강경한 어조이지요. 그런데 빌립이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했다는 것입니다.
사실 빌립이 쉽게 예수님을 따라갈 사람이 아닙니다. 빌립은 이성적인 계산, 수학적인 계산이 빠른 사람입니다. 요한복음 6장에 오병이어 기적의 현장을 상기해 보세요. 남자만 5천명이 모였다고 했으니까, 여자와 아이들을 합하면 최소한 1만 명 이상이 모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빌립의 신앙이 어느 정도인지 알아보시려고 묻지요. 이 사람들을 어떻게 먹일 방도는 없느냐? 빌립이 어떠한 반응을 보이나요? 조금씩 먹게 해도 200데나리온 가지고도 모자랄 것입니다.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 하루의 품값이니까, 7개월 정도의 수입을 가지고도 부족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여선교회장님에게 질문을 하겠습니다. 오늘 저녁에 1만 명을 먹이려면 어느 정도의 쌀이 필요하겠어요? 정확하게 빨리 계산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빌립은 즉각적으로 계산이 나왔다는 거예요. 조금씩 먹게 해도 200데나리온 가지고도 모자랄 것입니다. 얼마나 정확하고 치밀한 계산인가요? 빌립은 수학적인 계산이 빠른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다짜고짜 나를 따르라는 말 한 마디에 선뜻 따라 나섭니다. 보통 사람들은 따라가면서 계산하지만, 계산이 빠른 사람들은 계산을 하고 따라갑니다. 내가 지금 예수님을 따라가서 제자가 되면 그 다음에는 이렇게 될 것이고, 그 다음 스텝은 저렇게 될 것이고..., 나에게 유익한 점은 무엇이고, 손해는 이러이러한 것이 있을 것이다. 순간적으로 계산이 나옵니다.
그런데 빌립은 예수님의 한 마디에 따라나섰다는 것입니다.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빌립은 이성적이고 계산적인 사람이었지만, 생각만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빌립은 생각을 결단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빌립에게서 배워야 하는 신앙자세인 줄로 믿습니다.
성경을 가만히 읽어보세요. 예수님은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생각만 하는 사람을 사용하지 않으셨어요. 누가복음 9장에 예수님이 제자를 부르실 때에 “나를 따르라”고 하시니까,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예수님이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지금 따라오라는 얘기입니다.
이스라엘의 장례는 사람이 죽으면 해가 떨어지기 전에 시신을 굴에 갔다가 넣습니다. 1년 뒤에 와서 뼈를 추려서 장례를 치릅니다. 예수님이 나를 따라오라는 이야기는 한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 시급한데 1년을 어떻게 기다리느냐는 말씀입니다. 영혼이 죽은 자들로 장례를 치르게 하고, 너는 영혼을 구원하는 제자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생각을 잘 해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를 영혼 살리는 일에 도구로 사용하시기 위하여 따라오라고 하시면 생각을 잘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생각만 하면 안 됩니다. 생각만 하면 제자리입니다. 생각이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생각나는 것이 생각이기 때문에 생각만 하면 생각으로 그칩니다.
독일의 철학자 중에 임마누엘 칸트라는 분이 있어요. 이 분의 성격이 매우 논리적이고 신중합니다. 한번은 한 여인과 사귀게 되었는데, 사랑하면서도 도무지 사랑한다는 말을 못하는 거예요. 이런 사람일수록 겨울이 춥습니다. 그러니까 교제하는 여인이 견디다 못해서 청혼했어요. “내가 당신을 사랑합니다. 저와 결혼을 해 주세요.” 이 말을 들은 칸트가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칸트는 그 때부터 결혼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도서관에 가서 결혼에 대한 자료를 수집했어요. 결혼에 대한 찬성과 반대의 글을 읽으면서 연구에 몰입했어요. 그러다가 그 여인과 결혼하기로 결론을 내리고 그 여인의 집에 찾아가 문을 두드립니다. “나와 결혼해 주십시오. 내가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 때에 여인의 아버지가 나와서 말했습니다. “너무 늦었소. 내 딸은 이미 세 아이의 어머니가 되었소.”
예수 믿는 사람들은 주님이 주신 생각을 곧바로 결단해야 합니다. 주님이 주신 생각을 결단할 때에 열매가 맺어지는 겁니다. 주님이 생각을 넣어주셨으면 주님이 책임지시겠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주신 의지로 결단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결단하고 주님을 따라가면 주님이 완벽하게 책임지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나를 따라오라고 말씀하시면 “조금 있다가 하지요.” “차차 하지요.” “다음 달에 하지요.” “내년에 하지요.” 미루지 마시기 바랍니다. 마루다가 그 좋은 기회를 다 놓치면 남는 것은 후회 밖에 없습니다.
오늘 예배드리는 성도들은 주님이 부르시면 곧바로 결단하세요. 주님이 쓰시겠다고 하면 ‘아멘! 주님, 쓰세요.’ 결단하고 따라가시기 바랍니다. 걱정할 것 없어요. 주님이 부르셨으면 주님이 하게 하실 것입니다.
출애굽기 35장에 하나님이 브살렐과 오홀리압을 부르셔서 성막을 짓게 하시잖아요. 하나님이 지혜와 총명과 지식으로 여러 가지 일을 하게 하시되, 금과 은과 놋으로 제작하는 기술을 고안하게 하시며, 보석을 깎아 물리는 일을 하게 하시며, 나무를 새기는 여러 가지 정교한 일을 하게 하셨고, 조각하는 일을 하게 하시고, 세공하는 일을 하게 하시고,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는 베실로 수 놓는 일을 하게 하시고, 정교한 일을 고안하게 하셨느니라.
예수님이 우리를 부르실 때는 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결단하고 따라가기만 하면 주님이 일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빌립이 주님의 음성을 듣고 결단하고 예수님을 따라간 것과 같은 신앙을 소유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빌립은 와서 보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1:46, “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이르되 와서 보라 하니라.” 이것은 확신 있게 전도하는 신앙을 말합니다.
빌립이 예수님을 만나고 너무나 좋아서 나다나엘에게 찾아갑니다. 나다나엘은 ‘바돌로매’로도 기록하는데, 빌립의 가까운 친구입니다. 나중에 예수님의 12제자가 됩니다.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가서 말합니다. 모세의 율법에 기록되었고, 누구를 가리킵니까? 예수님이지요.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 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누구입니까? 예수님입니다. 빌립은 나의 죄를 구원해 주실 구세주를 만났다고 전하는 겁니다.
나다나엘이 빌립의 말을 듣더니 빈정거립니다. ‘야, 빌립아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이것은 당시 유대인의 관념이기도 하였습니다. 나다나엘이 답답하게 말하니까 빌립이 “와서 보라”고 말합니다. 헬라어 원어의 ‘보라’는 ‘경험해 보라’는 뜻이 있어요. 빌립은 구경 오라는 것이 아닙니다. 네가 직접 예수님을 만나서 경험해 봐. 구세주를 만나 보라는 뜻입니다. 빌립의 확신 있게 전도하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여기에서 중요한 것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확신 있게 전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말하면 전도는 누가 잘하게 되나요? 예수님을 만난 확신이 있는 사람이 잘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에 보세요. 베드로, 요한, 사도 바울, 빌립, 스데반... 어쩌면 그렇게 전도를 잘하나요? 그 사람들은 예전에 전도를 잘하던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얼마나 확신있게 전도하는지 모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에 주님을 모른다고 도망갔던 사람인데, 성령이 강림한 후에 주님을 다시 한 번 만나고 전도하는데,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베드로의 설교를 보세요.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는다.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베드로가 얼마나 강력하게 복음을 선포하는지 모릅니다.
사도행전 5장에도 가보세요. 베드로와 요한이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라고 전도합니다. 이 말을 하면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인데 두렵지 않은 겁니다. 주님을 만난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28장에 바울이 아그립바 왕 앞에서 전도하는 모습을 보세요. 바울의 말을 듣던 베스도가 뭐라고 하나요? 바울아. 네가 미쳤어. 네 학문이 너를 미치게 했어. 바울이 어떻게 대답하나요?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온전한 말을 하는 것입니다. 당신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나와 같이 되는 것을 하나님께서 원하고 계시다는 겁니다. 얼마나 담대합니까? 이런 용기가 어디에서 나와요? 예수님을 만나서 확신 있는 신앙을 소유했을 때에 이러한 능력이 나타나는 줄로 믿습니다.
19th Ave에 보면 중앙에 알로에 같은 선인장을 심어 놓았어요. 지금은 많이 자랐어요. 꽃도 피고 예쁘게 자랐어요. 번식력이 얼마나 빠른지 지금은 많이 커졌어요. 어떤 사람이 선인장을 안다고 할 때에 몇 가지가 있을 수가 있어요. 하나는 배워서 알 수가 있어요. 인터넷이나 책을 통해서 선인장의 특성과 종류 등을 알 수가 있어요. 또 들어서 알 수가 있어요. 선인장을 키우는 사람을 통해서 들어서 선인장은 그런 효능이 있구나 알 수가 있어요. 또 하나의 방법은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 알 수가 있어요. 자신이 직접 심어보고 키워보면서 알 수가 있어요.
여러분, 이 세 부류 중에 어떤 것이 확실하게 안 다고 말할 수가 있을까요? 경험을 통해서 아는 것입니다. 배워서 아는 것은 힘이 없어요. 내가 책을 통해서 배웠는데 그렇대. 인터넷에 보면 다 나와. 들어서 아는 것도 힘이 없어요. 내가 누구에게 들었는데, 들어보니까 맞는 것 같아. 그런데 경험을 통해서 아는 것은 확신 있게 이야기하지요. 내가 해 봤는데 정확해. 자신이 경험했기 때문에 담대하게 말할 수가 있는 것이지요.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내 안에 주님이 계시기 때문에 확신 있게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예배를 드리는데 마음이 뜨거워졌어요. 찬양하는데 입술이 저절로 열려지는 거예요. 집에 갔는데 찬양대가 부른 찬양이 악보도 모르고 가사도 잘 모르겠는데, 입에서 흥얼흥얼하는 거예요. 오늘 부른 찬양이 내 심령에 꽂혀서 일주일 동안 고장 난 레코드처럼 머리에서 계속 맴도는 거예요. 예배드리러 왔다가 기도하고 싶어지고, 말씀이 내 심령을 흔드는 것 같고...,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이지요.
이런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 전도할 때에 내가 성경공부해서 알게 됐는데 예수님 믿어야 돼. 내가 어떤 사람에게 들었는데 교회 다녀야 구원 받는데. 이렇게 말하겠어요. 예수님을 만난 확신이 있는 사람은 말이 다르고 톤이 다르고 음색이 다릅니다. 내 안에 예수님의 생명이 있기 때문에 ‘와 보라’고 확신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예배드리는 여러분, 예배를 통해서 말씀 듣다가, 찬양하다가, 기도하다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서 성령의 음성을 듣고 여러분의 영혼을 살리고 나아가서 담대하게 복음을 증거 하는 빌립과 같은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오로지 기도했다고 했습니다.
사도행전 1:14,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 이것은 기도하여 능력 받는 신앙을 말합니다.
빌립은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는 말씀에 순종해서 사도들과 함께 모여서 기도합니다. 120명과 함께 기도하다가 능력을 받고 복음을 증거 하다가 순교하게 됩니다.
사실 빌립은 순교할만한 믿음도 되지 못하고, 와서 보라고 담대하게 전도할 사람도 되지 못합니다. 처음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빌립은 수학적인 계산이 빠른 사람이고, 성격적으로도 대범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때로는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는 사람입니다.
요한복음 14장에 예수님이 고별설교를 하십니다. 내가 아버지 집에 갈 것인데 근심하지 말아라. 너희를 위하서 거처를 예비하면 다시 와서 너희도 데리고 갈 것이다.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을 것이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그때에 빌립이 질문합니다.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예수님이 어떻게 대답하세요?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었는데, 아직도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빌립은 오랫동안 예수님을 따라 다니면서 많은 것을 배우고, 많은 기적을 목격하였지만 영적인 눈이 열리지 않았어요. 예수님의 신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외적인 모습만 봤지, 내적인 모습은 보지 못한 겁니다. 우리의 모습 같지요.
그뿐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12장에 보면 명절에 예배드리러 예루살렘에 올라온 사람들 가운데 헬라 사람들이 몇 명 있었어요. 그들이 빌립을 찾아가서 말하지요. “선생님! 예수님을 뵙고 싶습니다.” 빌립이 예수님의 제자이니까 당연히 그들을 예수님께 인도해야 되잖아요. 그런데 빌립이 어떻게 해야 될지 몰라서 안드레에게 말합니다.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려고 하는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 안드레가 답답하니까 빌립하고 같이 가서 예수님께 말씀드리잖아요.
빌립은 성격이 대범하지 못해요. 수학적인 계산이 탁월한 사람이지만 우유부단한 성경을 가지고 있어요. 그런데 어떻게 와서 보라고 전도하고 순교까지 하게 되었느냐는 말씀입니다. 이유는 기도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 떠나지 말고 기도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붙잡고 기도했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다가 능력을 받으니까 완전히 변화되어서 영적인 탄력이 받게 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얼마나 똑똑합니까? 에베소서 3장에 보면 자신은 할례를 받았다고 말합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말입니다. 베냐민 지파라고 말합니다. 왕족이라는 말입니다.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라고 하잖아요. 순수혈통이라는 말입니다. 바리새인이다.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은 당대 최고의 선생인 가말리엘에게 배워서 최고의 학문을 갖춘 사람입니다. 가정적으로나 지식적으로나 성품으로나 학문적으로 모든 부분에서 부족함이 없는 사람입니다. 정말 탁월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어떻게 고백하나요? 학문적으로 배운 지식으로 예수님을 전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기도하여 능력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사도행전 16장에 보세요. 복음을 증거 하다가 기도하는 시간이 되니까 기도하는 곳을 찾잖아요. 그러다가 귀신 들린 아이를 만나서 고쳐주고 누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가잖아요.
사도 바울은 자기의 머리를 의지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학문적인 것, 철학적인 것, 신학적인 것을 가지고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기도해서 능력 받아서 하나님이 주시는 힘으로 했다는 것입니다.
빌립은 계산이 맞지 않으면 나서지 않는 사람입니다. 계산이 맞지 않으면 말하지 않는 성격의 사람입니다. 그런데 기도해서 능력을 받으니까 자신의 계산을 앞세우지 않는 것입니다. 자신의 생각을 말하지 않는 거예요. 하나님이 주신 생각을 앞세우고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대체적으로 머리가 좋은 명석한 사람들, 수학적인 계산이 빠른 사람들, 이성적인 사고방식을 앞세우는 사람들은 어떠한 일을 할 때에 먼저 대차대조표부터 만듭니다. 자신이 먼저 이해를 해야 그 다음 단계로 넘어갑니다. 수학적인 계산이 빠른 사람들은 자신의 수학적인 계산을 먼저 해 놓고 괜찮으면 신앙생활의 첫발을 내딛습니다. 이성적인 사고를 앞세우는 사람은 신앙도 이성으로 이해를 해야 그 다음에 신앙생활을 시작합니다.
여러분, 인간적인 사고방식으로는 신앙생활을 한 걸음도 나갈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영적인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기도할 때에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하면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는 것입니다. 그 능력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기도의 능력을 받아서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주님의 말씀을 증거하고, 공부하고 일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 믿는 모든 사람들은 기도해서 능력을 받아야 되는 줄로 믿습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호라의 기도 시간을 강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어요. 저는 교우들이 기도의 능력을 받아서 살았으면 좋겠어요. 여러분이 지니고 있는 실력보다도 기도하여 하나님의 능력이 여러분의 심령에 가득 채워져서 하나님이 여러분을 엄청나게 쓰셨으면 좋겠어요. 그 유일한 비결은 기도입니다. 기도 밖에 없습니다. 베드로처럼, 요한처럼, 사도 바울처럼, 빌립처럼... 호라의 기도 시간을 만들어 놓고 눈물 흘려가면서 기도할 때에 하나님이 능력을 주시는 것이잖아요. 그 영적인 파워를 가지고 사시기 바랍니다. 얼마나 황홀한 이야기입니까? 내 실력을 뛰어 넘는 어머어마한 사건이지 않습니까?
종교적인 형식에서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목사이기 때문에 당연히 기도하라는 의무감으로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호라의 기도 시간을 만들어 놓고 하나님께 나와서 기도하니까 성경에 기록된 것들이 나에게도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 성도들도 그대로 누렸으면 좋으니까,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서 마음껏 사용하시고, 탁월한 삶을 사는 축복을 누리게 해 드리고 싶으니까 강조하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5:14,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요한계시록 8장에 천사가 금향로에다가 향을 담아오는데, 모든 성도들의 기도가 들어 있다고 했어요. 우리가 열심히 기도하면 천사가 금향로에 담아서 하나님께 갖다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하느라고 바쁘면 천사는 우리의 기도를 담아 나르느냐고 바쁘고, 마귀는 방해하느라고 바쁘고, 하나님은 응답하시느라고 바쁘신 것입니다. 어떻게 하시겠어요? 빌립처럼 기도하여 능력을 소유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가 빌립과 같은 신앙을 소유하기를 원하세요. 예수님이 나를 따르라고 부르니까 빌립은 하나님이 주신 생각을 결단하고 바로 따라갑니다. 이런 사람들이 빌립처럼 ‘와서 보라’고 하면서 확신 있게 전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기도하여 능력 받아서 주님의 일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이 주시는 음성에 마음의 문을 열고 빌립과 같은 신앙으로 쓰임 받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빌립처럼 주님이 주신 생각을 결단하는 결단력 있는 사람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와서 보라고 담대하게 전할 수 있는 능력의 사람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기도하여 능력을 받아 복음을 증거 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나의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
The Lord Knows Everything About Me.
요한복음 1:43-51 / 김태환 목사
예수님의 첫 번 제자가 된 안드레와 요한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이제 이들은 예수님과 함께 먹고, 자고, 예수님의 말씀 듣고, 예수님 곁에서 예수님께서 하시는 사역을 봅니다. 모두가 처음 경험하는 새로운 일들이어서 보는 일마다 마음이 흥분됩니다. 교회에 처음 나오기 시작한 사람들이 찬양하는 모임에도 나가보고, 성경공부 모임에도 나가보고, 기도 모임에도 나가 봅니다. 모든 것이 처음 경험하는 것이고 재미있습니다. 성가대 찬양도 신기하고, 목사가 설교하는 것도 신기하고, 헌금 시간이 있는 것도 신기합니다. 성경은 이런 마음 상태를 “첫 사랑 (first love, 에베소서 2:4)”의 마음 상태와 같다고 비유적으로 말합니다. 처음 사랑을 나눌 때 만나면 좋고, 헤어지기 싫고, 가슴이 두근거리고, 다음 만날 약속이 기다려지는 것처럼, 예수님과 첫 사랑에 빠진 사람들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첫 사랑을 나누는 이 시기의 특징은 사람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온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요한의 이야기는 나오지 않지만, 요한도 분명 자기 동생 야고보를 데리고 예수님께 왔을 것입니다. 안드레와 베드로는 같은 고향 벳새다 (Bethsaida) 사람 빌립을 예수님께 데리고 옵니다. 예수님은 빌립에게 “나를 따르라 (Come, follow me)!”고 단 한마디 말씀을 하셨습니다. 성경에는 빌립이라는 사람의 배경에 대하여 아무 것도 나와 있지 않습니다. 빌립이 벳새다 사람이라는 것 밖에는 아무 것도 나와 있지 않습니다. 벳새다라는 지명에는 “house of fishing”이라는 뜻이 있다고 합니다. 갈릴리 호수 북쪽 연안에 있는 전형적인 어부들의 마을입니다. 당연히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처럼 고기를 잡아 생계를 유지했던 어부였을 것입니다.
도대체 빌립이 지금까지 어떤 삶을 살았길래 “나를 따르라!”는 말씀 한마디에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는지 참 궁금합니다. “follow”라는 말에는 단순히 “따른다”라는 뜻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전에 보면 “to accept as a guide or leader; accept the authority of or give allegiance to (그 사람을 인도자 혹은 지도자로 받아 들인다, 그 사람의 권위를 인정하고 그에게 충성을 바친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크리스천이라는 말이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는 사람들”이라는 뜻이잖아요? 요즘에 제자도 (disciple-ship)이라는 말을 많이 쓰고 있습니다. 제자도의 핵심은 예수님의 말씀과 교훈과 예수님의 권위를 따르고, 예수님께 충성을 드리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참 엄청난 일입니다.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자기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분으로 인정하고 그분을 중심으로 살아야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이잖아요? 지금까지 자기 중심적인 (self-centered) 삶을 살던 사람이, 예수님 중심의 (Jesus-centered) 삶을 살아야 되는 것이잖아요? 삶의 중심이 바뀌는 것이잖아요? 삶의 중심이 그렇게 쉽게 바뀔 수 있는 것이 아니잖아요?
역사상 많은 훌륭한 설교자들이 있었습니다. 뉴잉글랜드 출신 조나단 에드워드 (Jonathan Edwards, 1703-1758) 목사님이 있습니다. 커네티컷 E. Windsor에서 목회자 가정에서 태어나서 13살에 예일대학에 입학할 정도로 천재였습니다. 명설교가이고, 탁월한 신학자입니다. 조지 휫필드 (George Whitefield, 1714-1770) 등과 함께 1700년도 중반에 뉴잉글랜드에서 일어난 제 1차 대각성 운동 (The Great Awakening Movement)의 주역이 됩니다.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죄인"(Sinners in the Hands of an Angry God)”이라는 조나단 에드워드의 설교가 대각성 운동의 출발점이 되었다고 합니다. 신명기 32:35 “내가 악한 사람에게 벌을 내리고 죄인에게 죄를 물을 것이다. 언젠가 그들은 미끄러질 것이다. 그들의 재앙의 날이 가까웠다. 심판의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이 말씀을 가지고 설교했는데, 이 말씀이 얼마나 강력했는지, 듣는 사람들은 지옥에 떨어지지 않으려고 자기가 앉은 의자를 꼭 붙들고 있었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그의 설교를 들으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그의 설교를 듣고 많은 회심자들이 나왔습니다.
베드로와 안드레의 소개로 예수님께 왔던 빌립은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거부할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앞에서 그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로 일생 일대의 결단을 내립니다. 조나단 에드워드 목사의 설교를 들으면서 많은 사람들이 회심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왔던 것처럼,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던 빌립은 즉시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빌립이 한 순간에 그렇게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로 결심한 데에는 적어도 세가지 중요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의 권위입니다. 예수님은 빌립을 많은 말로 설득하지 않았습니다. “나를 따르라!”는 단 한마디 말씀 밖에 하시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말씀 속에 거부할 수 없는 신적인 권위 (divine authority)가 있었습니다.
둘째로, 빌립은 같은 고향 사람 베드로와 안드레의 영향을 많이 받았을 것입니다. 베드로와 안드레가 특별한 사람은 아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특별하게 착하고 선한 사람들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사람들에게 욕을 먹는 나쁜 사람들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베드로와 안드레 형제는 그냥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같은 동네에 고기를 잡아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보통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소개하는 그들의 눈빛과 음성은 진실을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냥 무턱대고 흥분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뭔가 그들 속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형제가 “같이 가 보자!”고 말했을 때, 빌립은 예수님을 향해서 이미 상당 부분 마음이 열려 있었습니다.
셋째로, 빌립은 자기의 생에 대해 불만이 있었습니다. 자기 생에 대하여 불만이 있었다는 말은 그가 감사를 몰랐고 늘 불평 불만투성이였다는 말이 아닙니다. 빌립이 자기 생에 대해 불만이 있었다는 말은 그가 현실에 안주 (安住)하는 사람이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그의 마음 한 구석에 늘 지금보다 더 나은 삶에 대한 열망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말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여러분의 삶에 대해서 만족하고 있습니까? 저는 여러분에게 지금의 여러분의 삶이 최선의 삶이라고 생각하고 있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누가 그런 말을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우리 인생의 최대의 적은 차선의 것에 만족하는 것이라고요. 차선은 최선의 적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차선의 삶에 만족하는 사람에게는 더 나은 삶을 추구하는 열망이 없습니다. 빌립이 그렇게 간단하게 자신의 삶을 정리할만한 시간도 없이 예수님의 제자가 된 데에는 빌립의 마음 속에 최선의 삶을 추구하는 열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열망이 그에게 한 순간에 결단할 수 있는 용기를 주었습니다. 이 말씀을 한번 찬찬히 생각해 보세요. 그리고 자신의 삶을 한번 돌아 보세요. 지금의 내 삶은 과연 최선인가 하고 말입니다.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또 한 사람은 나다나엘 (Nathanael)이라는 사람입니다. 공관복음 성경에는 바돌로매 (Bartholomew, 마태복음 10:3, 마가복음 3:18, 누가복음 6:14)라는 이름으로 나오는 사람입니다. 나다나엘은 갈릴리 가나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요한복음 21:2). 가나는 갈릴리 호수 서쪽으로 한 6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마을입니다.
오늘 말씀에 빌립이 나다나엘을 만났다고 나오는 것으로 보아서 나다나엘은 빌립의 친구였던 것이 분명합니다. 가나는 어촌은 아니지만, 베드로와 함께 고기를 잡는 장면에 나다나엘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요한복음 21:2-3) 어부였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빌립은 나다나엘에게 예수님을 이렇게 소개했습니다. “모세가 율법 책에 썼고, 예언자들이 기록한 그분을 우리가 찾았다네. 나사렛 사람 요셉의 아들 예수라는 분이야!” 빌립의 말을 주의해서 들어 보십시오. “We have found the very person Moses and the prophets wrote about.” “the very person”이라는 말은 “바로 그 사람”이라는 뜻 아닙니까? 모세의 율법 책에 나오고, 예언자들의 글에 나오는 바로 그 사람을 우리가 찾았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아주 익숙한 표현으로 메시아를 찾았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나다나엘의 반응은 회의적이었습니다. “뭐? 그 사람이 나사렛 사람이라고? 나사렛에서 무슨 인물이 나올 수 있나?” New Living Translation에 보면 "Nazareth!” exclaimed Nathanael. "Can anything good come from Nazareth?” “exclaim”이라는 말이 큰 소리를 지른다는 “cry out”과 같은 뜻이잖아요? 빌립은 더 이상 나다나엘과 논쟁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나와 함께 그 분께 가 보자!”라고 말합니다. 빌립은 자기가 설명하는 대신 친구 나다나엘이 직접 예수님을 대면하도록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나다나엘도 예수님께로 가게 되었습니다. 잘 보세요. 안드레는 자기 형 베드로에게 예수님을 소개했고, 베드로와 안드레는 고향 친구 빌립에게 예수님을 소개했고, 빌립은 자기 친구 나다나엘을 예수님께 데리고 갔습니다. 여러분은 누구를 예수님께 데리고 왔나요?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과 첫 사랑을 나누던 그 시기에 여러분은 누구를 예수님과 만나도록 했나요? 한 사람의 인생의 주인이 바뀌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 한 사람 한 사람을 만나 주시는 케이스가 모두 다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처음 만난 이야기들도 다 같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나다나엘을 보면서 처음 하신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보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Now here is a genuine son of Israel- a man of complete integrity." 우리 말로 직역하면 “여기 이스라엘의 참 이스라엘의 아들이 있구나. 이 사람은 정말 온전한 사람이다. 어디 하나 흠 잡을 데가 없는 사람이다!” 이런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에게 듣기 좋으라고 립 서비스 (lip service)를 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성경 어디에도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립 서비스를 하셨다는 말씀이 없습니다. 오히려 성경에는 예수님께서 듣는 사람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신 말씀들이 많이 나와 있습니다. 이 말씀이 NIV 성경에는 “in whom there is nothing false”라고 나와 있고, 또 다른 성경에는 false라는 말 대신 deceit라는 말로 나와 있습니다. 나다나엘이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길래 도덕적으로나 윤리적으로나 인격적으로나 어느 곳 하나 흠 잡을 데 없는 온전한 사람이라고, 예수님께서 이런 찬사를 하셨는지 매우 궁금합니다.
나다나엘 누구이고, 나다나엘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궁금하기는 하지만, 정작 이보다 더 놀라운 것은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나다나엘의 반응입니다. “어떻게 저를 아십니까 (How do you know about me)?” 그 다음에 이어지는 말씀은 무슨 선문답 같습니다.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 (48절).” “선생님,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이스라엘의 왕이십니다 (49절).”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고 말해서 나를 믿느냐? 그러나 너는 그것보다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다.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인자 위에서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50-51절).” 특히 마지막 구절은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You will see heaven open and the angels of God going up and down on the Son of Man, the one who is the stairway between heaven and earth (너는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내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볼 것이다. 나는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계단이다.” 꼭 창세기 28:10-17에 나오는 야곱의 사닥다리에 대한 말씀을 연상하게 하는 말씀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너는 앞으로 내 제자가 되어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성취하는 것을 목격하게 될 것이다!”
주님은 나다나엘의 모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이 말씀이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생명은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계획하신 것입니다. 시편 139편에서 다윗이 이렇게 고백하지 않습니까? “주의 눈이 아직 형태를 갖추지 않은 내 몸을 보셨습니다. 내게 정해진 모든 날들이 주의 책 속에 기록되었습니다. 이 날들의 하루가 시작되기 전에 이미 기록되었습니다. 오 하나님, 주의 생각들이 내게 얼마나 소중한지요! 그것들이 얼마나 크고 많은지요 (16-17절)!”
나다나엘의 생명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나다나엘의 모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동일하신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생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나다나엘은 이것을 알고 주님 앞에 무릎을 꿇은 것입니다. “선생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You are the Son of God)!” 나다나엘의 고백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인생도 하나님의 계획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여러분의 삶에서 일어나는 기쁨의 시간들, 그리고 힘들고 아픈 시간들, 고통의 시간들, 여러분의 꿈, 여러분의 미래가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그렇게 말했잖아요? “나의 모든 날들이 이미 당신의 책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라고요.
이 사실을 발견한 나다나엘은 그의 인생을 주님께 드렸습니다. “나의 인생은 나의 것이 아니고 주님의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께 드렸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의 인생을 받아 주셨습니다. 조금씩 버전은 다르지만, 요한을, 안드레를, 베드로를, 빌립을 주님은 받아 주셨습니다. 그들의 삶의 중심은 더 이상 자기 자신들에게 있지 않았습니다. 주님께로 삶의 중심이 바뀌었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의 제자들인가요? 그렇다면, 예외가 없습니다. 여러분의 삶의 중심이 예수님께로 바뀌어야 합니다. 지금 이 결단을 하지 않으면 여러분은 평생 차선의 삶에 머물고 말 것입니다. 최선의 삶은 내 삶의 중심이 그리스도에게로 옮겨진 제자의 삶입니다.
하나님의 선물 나다나엘처럼
송기성 목사
“아 하나님의 은혜로”
J. S. Steward는 “복음은 선포되는 것이지 토론되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것이지 토론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그의 설교를 들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아들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인 것 때문에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인 사람 안에서 역사하신다고 했습니다 (살전2:13).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이 시간 함께 나누고자 하는 말씀 요한복음 1:43~51은 예수님께서 복음을 선포로 받아들인 사람 빌립과 나다나엘을 제자로 부르신 내용입니다. 빌립의 전도를 받고 예수님의 제자가 된 나다나엘, 그의 이름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뜻입니다. 그는 자기 이름의 뜻을 생각만 해도 기뻤을 것입니다. 은혜(카리스)는 선물이고 축복이며, 기쁨이고 감사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나다나엘이 하나님의 선물이었듯이 비록 우리들의 이름은 각각 다를지라도 우리들도 하나님의 선물 곧 하나님의 은혜로써 기쁨과 감사의 복된 삶을 살게 된 줄 믿습니다.
1. 잘못된 편견과 판단을 버려야 올바른 이해와 관계를 갖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로 가시려던 참에 빌립을 만나 “나를 따르라”(Come with me!) 하셨습니다. 빌립은 안드레와 그의 형 베드로와 한 동네 벳새다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예수님을 따라 나선 빌립은 나다나엘을 찾아 가서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 분을 만났다고 하면서 그분은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말이 나다나엘에게 먹혀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나다나엘은 율법을 깊이 묵상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율법에 충실한 그는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라며 빌립의 전도를 반박하고 불신했습니다.
나다나엘은 율법을 연구하는 자였으므로 메시야가 유대 베들레헴에서 탄생할 것이라는 예언을 알고 있었습니다(미5:2). 그리고 나사렛은 당시 갈릴리의 한 마을이므로 유대인들이 멸시하고 천대하는 지역이었습니다. 또한 요셉의 아들이라고 한 말도 달갑게 들리지 않았습니다. 갈릴리 가나 사람인 나다나엘은 거의 같은 고향인 나사렛 사람 요셉의 직업과 그의 자녀들까지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빌립은 예수님의 가문과 가족관계, 고향과 직업 등에 대하여 별로 좋지 않은 편견과 판단을 가지고 있었던 나다나엘에게 “와서 보라”(Come and see. 에르쿠 카이 이데)라며 강권하였습니다.
나다나엘은 분명히 나사렛에서는 메시야는 커녕 무슨 신통한 것이나 선한 것도 날 수 없다고 단정하였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빌립의 확신에 넘치는 강권을 끝까지 거부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결국 그의 잘못된 편견과 판단을 버렸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와서 보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만약에 그가 그의 잘못된 편견과 판단을 버리지 않았더라면 예수님께 대한 올바른 이해와 관계도 갖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생활이나 사회생활에 있어서도 잘못된 편견과 판단을 버려야 올바른 이해와 관계를 갖는 하나님의 선물이 될 줄 믿습니다.
■ 한 유럽인 탐험가가 남미로 탐험을 떠났습니다. 탐험 도중, 그는 험난한 열대우림을 통과하기 위해 인디언 두 명을 짐꾼 겸 가이드로 고용했습니다. 일정은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되었습니다. 그런데 나흘째 되던 날, 조금만 더 가면 열대우림을 벗어날 수 있는 상황에서 갑자기 그동안 잘 가이드를 하던 인디언들이 모두 걸음을 멈추더니 더 이상 움직이기를 거부했습니다.
탐험가는 그들이 돈을 더 받기 위해 수를 쓰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불쾌했지만 어쩔 수 없이 돈을 더 줄 테니 어서 가자고 독촉했습니다. 그러나 인디언들은 듣는 둥 마는 둥, 그저 한자리에 꼼짝하지 않고 서 있기만 했습니다. 아주 답답해진 탐험가는 따지듯 물었습니다. “대체 왜 안 가는 거요?” 인디언들이 이구동성으로 대답했습니다. “기다리는 중입니다.” “기다리다니, 누굴 말이요?” “영혼이요. 여기까지 너무 빠르게 걸어오느라 우리의 영혼이 뒤처지고 말았습니다. 영혼이 우리를 따라잡을 때까지 적어도 하루는 기다려야 합니다.”
3일 동안 열심히 걷던 인디언들이 그 총총 걸음을 멈춘 이유는 자신들의 영혼을 기다리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유럽의 탐험가는 인디언들이 돈을 더 받기 위해 허튼 수작을 부리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것은 물론 그의 잘못된 편견과 판단, 고정관념과 선입감으로 인한 어리석은 판단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잘못된 편견과 판단을 깨닫고 부끄러움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영혼을 뒤로 둔 채 정신없이 육신적인 삶에 집착하고 있는 자신을 뒤돌아보았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자기 영혼을 기다리는 사람은 결코 다른 사람을 잘못된 편견과 판단으로 대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잘못된 편견과 판단을 버린 사람은 올바른 이해와 관계를 갖게 되는 줄 믿습니다.
사무엘상 16;6,7에 사무엘이 이새의 아들 엘리압을 보고 “여호와의 기름 부으실 자가 과연 주님 앞에 있도다”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에게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라며 말씀하셨습니다. 맞습니다. 사람은 외모를 보고 판단합니다. 그래서 잘못된 편견과 판단으로 사람을 대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용모나 키, 학력이나 재력, 출신 가문이나 지역 등을 보지 않으시고 그 중심을 보고 판단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을 외모로 보지 말고 중심을 봄으로써 잘못된 편견과 판단을 버리고 올바른 이해와 관계를 갖는 하나님의 선물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는 믿음의 사람이어야 더 큰 일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이 당신에게 가까이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참으로’(알레도스)라는 말은 ‘겉과 속이 일치하는’ 이라는 뜻이며, ‘간사한’(돌로스, false)이란 ‘거짓된’, ‘날조된’, ‘위조된’, ‘가짜의’, ‘믿지 못할’ 이라는 뜻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선물인 나다나엘은 결코 거짓됨과 위선됨이 없는 사람으로서 그 언행심사에 있어서 진실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빌립에게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라고 했던 나다나엘은 예수님의 말씀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하고 여쭈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너를 보았노라”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이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다 꿰뚫어 보고 아셨다는 것입니다.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었다는 것은 그가 잎이 넓고 큰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말씀을 묵상하며 기도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나다나엘은 빌립이 “와서 보라”라고 했던 말을 절감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전지전능 하심에 크게 놀란 나다나엘은 예수님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요1:49)라며 그의 신앙을 고백하였습니다.
율법을 연구하는 나다나엘이 나사렛 예수님을 ‘랍비여’라고 호칭한 것은 놀라운 통찰력을 보여 주신 예수님의 예언자 되심에 대한 고백이며, ‘하나님의 아들’ 이시라고 한 것은 예수님의 신성에 대한 고백이고, ‘이스라엘의 왕’ 이시라고 한 것은 예수님의 메시야 되심에 대한 고백입니다. 예수님은 나다나엘에게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보았다 하므로 나를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또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는 믿음의 사람은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예수님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신 말씀처럼 예수님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더 큰 일을 보는 하나님의 선물이 될 줄 믿습니다.
나다나엘을 보시고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말씀하신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들의 언행심사를 보시고 무슨 말씀을 하실지요. ‘보라 이는 참 크리스천이요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는 자’로다 라는 말씀을 듣는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우리들도 거짓이 판을 치는 세상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법무부장관과 국가정보원장을 역임한 김승규 장로님은 “법무장관 시절에 조사해보니 3대 거짓말 범죄(위증, 무고, 사기)가 검찰 업무의 70%를 차지하고 있더라. 거짓말 때문에 다른 업무를 못하고 있다.”라고 개탄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당시(2003년) 일본과 우리나라의 거짓말 범죄 건수를 비교해봤더니 우리나라가 위증은 16배, 무고는 9배, 사기는 26배나 더 많았다.”면서 “일본 인구가 한국보다 3배 가까이 되는 점을 감안하면 한국인들은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는 일반인이나 크리스천이나 마찬가지”라고 지적하였습니다.
소위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가 처음 언론에 보도되었을 때 실망과 분노를 느끼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언론과 국회, 검찰과 특검에 대한 불신이 고조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거짓되고 조작된 것이 드러나고 있으며, 공의롭지도 않고 공정하지도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위증과 무고와 사기 등의 거짓말과 거짓말 범죄가 횡행하는 한 불신과 불안, 갈등과 혼란을 해소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라도 우리 기독교인들부터 ‘거짓이 없는 믿음’(딤후1:5)으로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는 참 크리스천이 된다면 진실과 정의, 공법과 공의가 통하는 세상을 보게 될 줄 믿습니다.
시편 32:2에 다윗은 “마음에 간사함이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했습니다. 맞습니다. 마음에 간사함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께 정죄를 당하지도 않으며 사람들로부터 불신을 당하지도 않습니다. 그런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는 믿음으로써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그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더 큰 일을 보는 하나님의 선물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나다나엘을 예수님의 제자로 삼으셨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 제자의 명단에는 나다나엘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빌립과 나란히 기록되어 있는 바돌로매가 바로 나다나엘을 가리킨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바돌로매’는 ‘톨마이의 아들’을 뜻하며 고유명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나다나엘이 마태와 동일인이라고 추정합니다. ‘마태’는 ‘하나님의 선물’을 뜻하므로 나다나엘의 다른 명칭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태가 그의 복음서에서 구약 율법의 성취를 강조한 것이 나다나엘의 율법 연구와 유사한 면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물 나다나엘, 그가 바돌로매 인지 아니면 마태 인지는 확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주 분명한 것은 그는 편견과 판단을 버림으로써 올바른 이해와 관계를 갖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는 믿음의 사람으로서 더 큰 일을 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선물 나다나엘처럼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예수님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보다 더 큰 일을 보는 주님의 신실한 제자가 되시기를 지금도 우리의 언행심사를 정확하게 꿰뚫어 보고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내가 메시야를 만났다
조용기 목사
<서 론>
'내가 메시아를 만났다' 이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만남은 크고 작은 변화를 가져옵니다. 지나가다가 옷깃만 스쳐도 우연이 아니라고 하는데 서로 얼굴과 얼굴을 마주대고 대화를 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우리는 부모를 만나서 인생을 알게 되고 선생님을 만나서 지식을 알게 되고 부부를 만나서 사랑과 공동체의 삶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 무엇보다도 예수님을 만나고 천국인으로 변화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유대인 철학자 마틴 부버는 「나와 너」라는 자신의 책에서 인생을 '만남'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바른 만남은 인생을 올바르게 인도하지만, 잘못된 만남은 인생을 무의미하게 만들 수 있다고 충고하고 있습니다. 사울은 다메섹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변화되어 위대한 바울사도가 되었습니다. 일본의 성자 가가와 도요히코는 열다섯 살 때 폐병으로 죽어가다가 예수님을 만난 후 그의 삶이 완전히 바뀌어
고베의 빈민굴에서 전도활동을 하면서 예수님처럼 생활하고 예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만남은 크고 작은 변화를 우리에게 가져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삶 가운데 최고의 만남은 바로 예수님을 만나고 천국인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전도하시고 가르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를 고치시고 결국에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가 부활승천하신 것입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삶을 우리가 면면히 만나고 한번만 만나는 것이 아니라 매일같이 마음속에서 그 그리스도의 삶을 관조하면서 만나봐야 되는 것입니다.
1. 복음을 증거하시는 예수님
우리는 복음을 증거하시는 예수님을 만나봐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전도하시는 예수님이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 하시고 이 물질세계만 있다고 생각한 사람들의 마음을 바꿔 먹게 하고 영적인 영원한 천국을 받아들이도록 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타락한 이후로 영이 죽어서 영적인 눈도 어둡고 영적 귀도 멀어졌고 영적 마음도 깨달음이 없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영의 세계와는 전혀 관계가 없어요. 물질적인 세계만 보고, 듣고, 만지고, 소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질적인 세계가 사라질 때는 아무것도 없이 무가 되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이러한 절망적인 인간, 이 인간들에게 예수님은 육신의 물질적인 세계 저 건너편에 영원한 영적인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려 주시기를 원했고 바로 그 길이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려 주신 것입니다. 이러므로 예수님을 만나면 우리가 전도를 받고 마음속에 하늘나라를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 나라만 가지고 있던 우리들이 예수님을 만나야 하늘나라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한평생 왔다 갔다 하면서 예수님을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종교는 만나 보았지만 예수님을 만나보지 못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천국을 소유하지 못합니다. 왔다 갔다 하면서 그저 마음에 세상이 가득할 따름인 것입니다. 결정적으로 예수그리스도의 전도를 받고나서 예수님을 마음속에 만나야만 하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장 14절로 15절에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하나님의 나라를 마음속에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전도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유명한 러시아의 작가 톨스토이는 원래 귀족 출신으로 온갖 부귀와 영화를 누리며 살았으나 늘 죄에 대한 공포와 불안이 마음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부귀, 영화, 공명을 다가지고 있었어도 마음속에 죄책으로 몸부림치고 있었기 때문에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시골길을 가다가 농부를 만났는데, 그의 얼굴은 유난히 평화가 깃들어 있었습니다. 그는 농부에게 가서 그처럼 얼굴에 평안을 가지고 마음에 평안과 기쁨을 가지고서 사는 비결이 뭐냐고 물었습니다. 그 농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기 때문에 마음에 늘 기쁨이 넘칩니다." 그날부터 톨스토이는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았고 전심으로 찾는 톨스토이를 만나주신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시므로 그는 불안과 공포에서 벗어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책에서 해방될 수 있는 체험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하나님을 아는 것이 곧, 사는 길이다." 여러분 하나님을 모르는 길은 죽음의 길인 것입니다. 마음에 기쁨과 행복을 찾지 못하고 살았다 하나 죽은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참 삶의 길인 것입니다. 삶을 성공적으로 살아가려면 나 자신의 노력만으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예수님을 만나 진리의 빛을 받아 우주와 인생을 깨닫고 변화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항상 우리를 가르치시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전도하는 예수님뿐 아니라 전도받은 우리들에게는 또 가르치는 예수님으로써 항상 우리를 만나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서 배우므로 성장하는 하늘나라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처음 만나는 천국을 소유하게 되지만은 그다음 예수님을 만나서 배우므로 하늘나라 사람으로 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린이가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날 때는 인간으로 태어나지만 성장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자라나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이 예수 믿고 천국을 마음에 소유 했을지라도 그 다음 계속해서 배워서 하늘나라 사람으로 장성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장성하지 못하고 늘 어린아이의 전도 상태로 놓여 있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천국에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이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대속의 은혜의 길을 알아서 예수님을 믿음으로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는 삶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고 천국인이 되면 믿지 않는 자는 멸망하는 것을 알고 어찌하든지 그들을 구원하려고 애쓸 수 있는 마음의 지식을 얻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이 종말이 오고 반드시 심판이 오고 새로운 세상이 다가오며 그리스도가 강림하실 때 부활 승천한다는 지식을 얻어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배워야 되는 것입니다. 그냥 믿고 천국만 소유하고 왔다 갔다 하다가 이단과 사설에 떨어질 때가 많습니다. 확실히 깨달아 알고 믿고 확신을 가지고 살기 위해서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는 배워야만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4장 14절에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이 세상은 반드시 끝 날이 오는 것입니다. 현재 우리가 사는 이대로 계속되지 않습니다. 매일매일 이 세상은 종말을 향해서 강물이 흐르는 것처럼 줄달음쳐 흘러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날에는 하늘이 큰소리로 떠나가고 이세상은 열렬한 불에 녹아지려니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새 하늘과 새 땅과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2. 치료하시는 예수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전도하는 그리스도를 만나고, 가르쳐주는 예수님만 만날 뿐 아니라 치료하시는 예수님도 만나야 되는 것입니다.
교회 와서 전도를 받고 예수를 통해서 여러 가지 천국의 진리를 배우는 것 참으로 행복하고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전도만 하고 가르치시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고 해방시킨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회당이나 장터나 귀신이란 귀신은 다 쫓아내었습니다. 주님은 그대로 사람들을 내버려 놓지 않았습니다. 전도 받고 천국에 대해서 교육을 받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귀신에 묶인 자는 해방시키기 위해서 귀신이란 귀신은 가는 곳마다 다 쫓아낸 것입니다.
누가복음 4장 33절로 35절에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아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예수께서 꾸짖어 이르시되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귀신이 그 사람을 무리 중에 넘어뜨리고 나오되 그 사람은 상하지 아니한지라"
예수님께서는 귀신과 사람들이 함께 사는 것을 절대로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이후로 사람들은 하도 오래 귀신과 같이 살았기 때문에 귀신이 형제와 같고, 친척과 같고, 친구와 같이 되어서 아무 허물없이 귀신과 같이 지냅니다. 거짓말하는 귀신, 음란한 귀신, 방탕한 귀신, 속이는 귀신, 더러운 귀신, 악한 귀신, 귀신과 친척과 친구와 같이 살면서 귀신과 같이 사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들어오면 귀신이 불안하고 고통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복음만 전도하여 천국만 주시고 가르쳐서 천국 인이 되게 장성하도록 만들뿐 아니라 사람들이 귀신과 접촉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귀신에게 묶여 있기를 원치 않기 때문에 주님은 귀신을 쫓아내는 것입니다. 귀신이란 귀신은 다 쫓겨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을 떠나실 때 마지막 부탁한 것도 너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라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는 매일같이 너무 친숙하여 귀신인지, 친구인지 분별하지 못하는 처지에 있는 그런 장소에서 떠나 귀신을 쫓아내고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병이란 병은 다 고치셨습니다. 사람의 마음의 병, 육체의 병을 주님 원치 않았습니다. 전도만 하고 말씀만 가르친 것이 아니라 귀신을 쫓아내고 모든 병을 고치므로 치유를 허락하여 주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4장 23절로 24절에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각종 병에 걸려서 고통 당하는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그들을 고치시더라"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병든 자들이 떼로 지어 왔습니다.
오늘날 교회는 병든 자가 오는 곳입니다. 마음에 병든 자, 육체에 병든 자들이 예수님을 만나러 오는 곳입니다. 예수님을 만나서 천국만 얻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만나서 교육만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만나면 귀신에서 자유를 얻고 온갖 병에서 고침을 받기 때문에 주님을 찾아 오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심지어 죽은 자도 살리신 것입니다. 가버나움에서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나인성에서 과부의 아들을 관속에서 일으키시고 베다니에서 죽은 지 나흘 된 나사로를 살려 일으킨 것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12제자, 70인의 제자들에게도 복음을 전할 때는 반드시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라고 말한 것입니다.
마태복음 10장 1절에 "예수께서 그의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누가복음 10장 1절로 9절에 "그 후에 주께서 따로 칠십 인을 세우사 친히 가시려는 각 동네와 각 지역으로 둘씩 앞서 보내시며" "거기 있는 병자들을 고치고 또 말하기를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가까이 왔다 하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복음을 전하는데 반드시 귀신 쫓아내는 역사와 병 고치는 역사가 따르도록 하신 것입니다. 기독교 복음은 귀신을 쫓아내고 치료하는 복음인 것입니다. 전도하는 것 반드시 해야지요. 가르치는 것 반드시 해야지요. 그러나 그것만 하고 두 손을 털어 버리는 성도들과 주의 종과 교회가 많습니다. 교회는 그냥 전도하고 가르치는 곳이다. 귀신을 쫓아내고 병 고치는 것은 옛날 초대교회나 있었지 지금은 없다. 그런 말을 합니다. 초대교회 예수님 다르고 지금 교회 예수님 다릅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다고 히브리서 13장 8절에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 두세사람이 함께 모였을 때 함께 계신다고 하는데 예수님은 오늘날도 전도하시고 오늘날도 가르치는데 왜 그 예수님이 오늘날은 귀신 안 쫓아내고 병 안 고친다고 말하면 언어 부단인 것입니다. 그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병을 고치시는 것입니다. 이 예수님을 만나야 되는 것입니다. 전도하는 예수님도 만나고 가르치는 예수님도 만나지만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는 예수님을 만나서 귀신과 병에서 자유와 해방을 얻는 여러분이 되셔야만 하는 것입니다.
3. 고난당하시는 예수님
그 다음 우리는 고난 당하시는 예수님을 만나야 되는 것입니다. 고난당하는 예수님을 만나야 우리 가슴이 찡하게 얼마나 주님이 우리를 사랑해 주셨는가를 잘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냥 가르치시고 전도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고 병고치는 예수님을 만나면 기적을 받고 은혜를 받고 감사하지만 고난의 예수님을 만나면 우리 마음속이 무너지고 깨어지고 주님의 그 감격적인 사랑에 흐느껴 울게 되고 헌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대제사장의 뜰에서 얻어맞고 모욕을 당하신 것을 생각하십시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대제사장의 뜰에 끌려가서 수염이 뽑히고 침 뱉음을 받고 얻어맞을 필요가 있습니까? 주님이 여러분과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당신 자신을 희생 제물로 내어 놓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예수 모욕당하는 것은 나 때문에 모욕당하는 것입니다. 침 뱉음을 받고 매를 맞은 것은 나 때문에 그렇게 된 것 입니다.
마가복음 14장 63절로 65절에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이르되 우리가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그 신성 모독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도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니 그들이 다 예수를 사형에 해당한 자로 정죄하고 어떤 사람은 그에게 침을 뱉으며 그의 얼굴을 가리고 주먹으로 치며 이르되 선지자 노릇을 하라 하고 하인들은 손바닥으로 치더라"
이런 모욕을 당한 것은 바로 나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날 위하여 십자가 짊어지기 위해서 자신의 몸을 대제사장들에게 맡긴 것입니다. 그들이 십자가에 못 박도록 맡겨 놓으니 온갖 희롱을 당한 것입니다. 이 예수님을 우리가 바라보고 만나 보므로 예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더구나 빌라도의 뜰에서 채찍에 맞으신 예수님을 바라 보십시오. 인간의 질병을 지시고 그 아픔을 당하셨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오늘날도 병상을 찾아가서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암을 앓는 사람에게 얘야~ 네 암을 내가 대신 앓았다. 채찍에 맞을 때 내가 앓는 암을 내가 다 앓았으니 나를 믿고 암에서 일어나라!" 관절염으로 절뚝거리고 못걷는 사람에게 "얘야~ 네 관절염으로 고통하는 그 병을 내가 채찍에 맞음으로 다 짊어졌다. 너 아픔을 내가 다 담당했으니 아프지 마라. 일어나라!" 온갖 병든 사람마다 침상에 주님이 같이 계십니다. "내가 너를 위해서 앓았다. 그 고통을 내가 안다. 내가 앓았으니까 내가 짊어졌으니까 너는 짊어지지 말기를 바란다. 나를 바라보고 나를 만나고 믿고 그 병상에서 일어나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가 나음을 입었다고 말하고 있으며, 성경은 저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했다고 말했으며, 성경은 야훼께서 저로 상함 받기를 원하사 우리의 질고를 당케 했다고 말했으며 성경은 저가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늘날도 손을 내밀고 우리를 보고 "너 아프냐? 내가 너 대신 앓았다. 너 고통 내가 다 당했으니 너는 당하지 말라. 나를 만나고 나를 의지하고 그 병에서 일어나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5장 14절로 15절에 빌라도가 이르되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하니 더욱 소리 지르되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는지라 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바라바는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라고 한 것입니다.
주님이 그 모진 채찍에 맞은 것은 그 채찍 하나 때릴 때마다 여러분의 병으로써 아픈 고통이 다 주님께 전가된 것입니다. 주님의 채찍을 헛되게 돌아가지 말게 하십시오. 예수님이 우리 대신 앓았는데 우리가 또 앓으면 예수님 앓은 그 고통이 헛되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고통당한 것을 무로 돌리게 되지 않습니까? 주의 대가를 우리가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물건에 돈을 안주고 사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돈 줬으면 물건 가지고 와야지요. 주님이 채찍에 맞았으므로 치료를 가져와야 되는 것입니다. 대가를 반드시 요구해야 되는 것입니다. 원수 마귀를 대적하십시오. "원수 귀신아 예수님이 채찍에 맞았으므로 나는 고침을 받았다. 너희 마귀의 산물인 질병은 물러 갈찌어다. 떠나가라. 나는 너에게 묶여 있을 수 없다. 네게 눌려 있을 수가 없다. 나는 자유와 해방을 얻은 사람이다. 나는 나은 사람이다. 주님의 은혜와 그 믿음으로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물러갈 찌어다." 우리는 진리를 알면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하는 것입니다. 모르고 헛된 소리 하면은 협박 공갈이라고 생각합니다만 명명 백백히 알고 명하는데 마귀가 안 떠나갈 수 없는 것입니다. 알아야 돼요. 모르면 안돼요. 주님이 어떠한 일을 하신 것을 깨달아 알고 그 대가를 우리가 소유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갈보리 산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악인이 의인을, 죽을 인생이 영생하는 하나님을 못 박는 그런 우스꽝스러운 일이 일어날 수가 있습니까? 어떻게 자기를 지은 하나님을 사람이 못박습니까? 어떻게 의로운 하나님을 죄 덩어리인 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습니까? 어떻게 죽을 인생이 영생하는 하나님을 못 박습니까? 그것은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그 자신을 내어 놓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의롭게 해주시기 위해서 스스로 죄인 짐을 짊어 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해서 스스로 죽음을 자초한 것입니다. 십지가를 바라보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 되는 것입니다. 찌그러진 얼굴 가시관을 쓰시고 피를 흘리는 그 모습 양손과 양발이 대못에 박혀서 늘어진 그 모습, 온 전신이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그 모습을 우리는 바라보고 예수님을 만나야 되는 것입니다. 날 위하여 십자가에 크신 고통을 당하신 예수님을 만나 보아야 내가 마음이 깨뜨려 지고 얼마나 큰 죄인이며, 불의하고 추악하고 흉악한 나인가를 깨닫게 되고 나를 위해서 주님께서 얼마나 크신 사랑을 베풀었다는 것을 만남을 통하여 우리는 깨달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만나야 돼요. 그냥 이야기만 듣고 지나가면 안돼요. 그림 구경하듯이 구경하고 그냥 지나가면 안돼요. 나와 일대일로 만나야 돼요. 십자가 밑에 엎드려 예수님을 바라 보아야 돼요. 날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을 바라봐야 돼요. 우리가 아닌 것입니다. 인류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나 한사람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혀 고난당한 예수님을 바라보고 만나야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이사야 53장 4절로 6절에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야훼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덤에서 부활하신 예수님도 만나야 되는 것입니다. 무덤마다 죽은 시체나 뼈가 있으나 예수님의 무덤은 텅 빈 무덤인 것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무덤 속에 들어가지 않습니까? 얼마있지 아니하여 시간이 지나면 관도 썩어 버리고 육체도 다 흙으로 돌아가고 하얀 뼈만 남습니다. 오래된 묘를 이장하려고 파보면 뼈만 남아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무덤에 들어가서 없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무덤에 가면 뼈도 없고 살점도 없고 아무것도 없습니다.
누가복음 24장 1절로 3절에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이 여자들이 그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
돌이 무덤에서 굴려 옮겨진 것을 보고 들어가니 주 예수의 시체가 보이지 아니하더라"
어떠한 사람이 성지순례를 가는 모슬렘 성도와 함께 비행기를 같이 탔습니다. 모슬렘 성도는 자랑스럽게 "나는 성지에 가서 모슬렘 창시자의 무덤에 가서 경배하고 은혜를 받고 돌아올려고 한다. 당신네 예수 믿는 사람은 예수의 무덤도 없지 않느냐. 그러나 우리 마호메트는 무덤이 있어서 거기 가서 경배할 수 있다." 그러니 예수 믿는 사람이 말했습니다. "당신은 마호메트의 무덤을 보러 가지만 나는 텅 빈 무덤을 경배하러 간다. 예수님은 무덤에 계시지 않고 살아나서 부활해서 천국 보좌 아버지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다. 예수님은 우리 위해서 죽고 우리 위해서 무덤에 들어가고 우리 위해서 부활해서 우리 위해서 부활 승천하셨다."고 그렇게 증거했다는 글을 읽어본 적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무덤에 들어가신 것은 당신 스스로가 들어간 것이 아니라 나의 무덤에 들어간 것입니다. 주님의 무덤은 바로 내 무덤인 것입니다. 십자가에 죽은 예수님이 들어간 무덤은 여러분과 내가 들어갈 무덤인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서 파놓은 무덤인 것입니다. 우리 무덤에 들어가서 주님이 사흘 만에 나오셨기 때문에 이제 우리가 들어갈 무덤은 없어져 버리고 만 것 입니다. 사망아 너희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희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 바울이 말한 것처럼 사망은 여러분에게 없습니다. 여러분이 들어갈 무덤에 예수님이 들어가셔서 비워 버리고 만 것입니다. 청소하고 만 것입니다. 청산해 버리고 만 것입니다. 여러분의 무덤은 비었습니다. 이미 여러분의 무덤은 들어갈 장소가 없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는 죽지 않고 영원히 살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망을 멸하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은 당신을 통해서 무덤을 없애 버리고 부활 영생을 우리에게 허락해 주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28장 6절로 7절에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 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그러므로 우리의 무덤에 우리를 찾아 들어가니 우리가 없습니다. 먼 훗날에 여러분 모두다 관속에 들어갈 것 아닙니까? 그것을 미리 바라본다고 합시다. 여러분이 여러분 무덤을 찾아 들어가서 여러분 시체를 찾으니까 여러분 시체가 없습니다. "어? 내 무덤에 왜 내 시체가 없냐?" 천사가 말할 것입니다. "허허허. 이미 2천년 전에 예수님이 너 대신 너를 끌어안고 부활해서 떠나 버렸네. 너 시체는 여기에서 찾을수 없네." 예수 죽음 내 죽음, 예수 무덤 내 무덤, 예수 부활 내 부활, 예수 승천 내 승천, 예수 보좌 내 보좌가 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인 것입니까? 그리스도와 만나고 난 다음 내 마음과 생각이 변화 안 된다면 그것이 기적인 것입니다. 변화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내 무덤을 비워 버린 것입니다. 나에게 영원한 부활을 주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1:25-26에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무덤은 다시 없습니다. 여러분의 무덤은 다시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다 철폐되고 만 것 입니다. 그리스도와 개인적으로 만날 때 이런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전도하는 예수님을 만나서 천국을 얻고, 가르치는 예수님을 만나서 신앙이 성장하는 천국인이 되고, 치료하는 예수님을 만나서 귀신과 마귀에서 해방되고 병에서 고침을 받고 죽었다가 부활한 예수님을 만나므로 십자가 고통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고 죽었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므로 영원한 소망과 기쁨과 희망을 마음속에 받아들이게 된 것입니다.
4. 예수님을 만남과 변화
그러므로 예수님을 만나면 변화를 받게 되어 있어요. 진리의 빛을 받아 우주와 인생을 안 깨달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땅만 바라보고 살았습니다. 굼벵이처럼 흙만 파고 살았었습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 세상 자랑만 따라 살았습니다. 죽고 난 후에 어떻게 될 것은 생각하기를 싫어했습니다. 생각하기 조차 귀찮았습니다. 죽는 것은 저 혼자 죽지 나 혼자 죽느냐. 그렇게 생각하고 자기는 영원히 안 죽을 줄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때가 오면 다 죽지요. 혼자서 외롭게 죽어가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 처절한 절망에 처한 것이 인생인 것입니다. 인간은 절망을 가슴에 안고 사는 존재인 것입니다. 죄책과 절망, 허무와 무의미, 죽음과 무라는 절망을 가슴에 안고 사는 인생입니다. 아무리 절망이 없다고 고개를 돌려버리고 눈을 감아도 절망을 달려오는 기차와 같이 속도를 내서 내 가슴을 향해서 돌진해 오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게 되자 진리를 알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는 죄에서 용서를 받고 의로운 사람이 되고 우리는 허무와 무의미한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믿고 영생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죽는데서 부활 영생 천국을 얻게 되는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것은 새 인생, 새 세계, 새 미래를 우리가 얻게 되는 것이니 얼마나 좋습니까? 육신의 인생이 신령한 인생으로 변화되고 마귀의 종이 그리스도의 자녀가 되고 죽을 사람이 영생한 사람으로 변화되니 생각이 달라지고 말이 달라지고 행위가 달라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변화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변화 안 받는 것이 희안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만나면 중단 없는 삶의 발전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죽어서 끝이라고 생각하면 큰일인 것입니다. 이 세상 살면서 천국 영원의 삶으로 죽음의 종지부가 없습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삶의 계속인 것입니다. 육신의 몸에 살다가 육신의 몸을 떠나서 영원한 신령한 몸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으로써 끝이 나는 인생이 아닙니다. 죽으면 그뿐이니까 먹고 마시고 살자, 놀자 놀자 젊어서 놀자 늙고 병들면 못 노리로다. 이와 같이 되어서 완전히 파탄된 퇴폐한 마음을 가지고 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생명은 계속하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로써 소년으로써 청년으로써 장년으로써 노년으로써 영생으로써 계속 되는 삶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계속 하나님을 바라보고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의와 진리와 거룩함으로 지음을 받은 새사람을 입고 살아야만 되는 것입니다. 중단 없는 삶입니다. 죽음으로 종결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세상 사람은 이 세상에서 죄를 짓고 살다가 죽어 버리면 그뿐이다. 나그네 생활 죽음으로 끝나니까 그뿐이다. 굉장히 답답하고 괴로운 일 있으면 에라 죽음으로 청산하자. 목을 메고 청산가리를 마시고 높은 아파트에서 뛰어 내립니다. 그래서 죽음으로 종말 될 줄 아는데 인생에는 종말이 없습니다. 사람은 죽어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받지 못하면 영원히 불과 타는 못에 참여하게 될 것이요.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받은 사람은 영원한 극락과 천국에 들어가서 살 것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이 인생의 종말이 아니라는 것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는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3절로 4절에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여러분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함께 죽고 장사지내고 함께 부활하사 함께 승천하사 함께 하늘에 앉아 있는 여러분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의 신분이 얼마나 변화 되었습니까?
옛날에는 죽어서 흙으로 돌아가고 영혼은 지옥으로 떨어질 수 밖에 없었는데 이제는 내 혼자가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덕분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죽고 장사지내고 부활하고 승천하고 함께 하늘에 앉아 있는 것입니다. 오늘 인류가 발달 되어서 항공술이 발달되므로 비행기를 타면 비행기와 함께 서울에서 미국도 순식간에 가고 파리로 런던으로 아프리카로 어디든지 함께 갑니다. 내가 못날라 갑니다. 비행기와 함께 가는 것입니다. 비행기와 함께 하면은 이 지구 끝까지 20시간 이내에 다 갈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혼자는 못가지요. 그러나 비행기와 함께 하면 갈 수 있는 것입니다. 내 혼자는 예수 없이는 죽으면 무덤에 들어가서 백골이 진토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 넋은 영원한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입니다. 예수와 함께 하면 죽어도 살고 살아도 살고 무덤에서도 부활하고 하늘로 영생 부활 승천해서 그리스도와 함께 보좌에 앉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인생은 여러분의 신분을 완전히 변화시켜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오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 품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먹고 자고 깨고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살고 부활하고 영생 천국에 올라가는 것이니 여러분의 신분이 변화되지 아니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삶의 목적과 의미와 가치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사는 생활은 사는 목적이 천국 가서 하나님을 섬기고 영원이 사는 것이 삶의 목적이지 이 세상에 살다가 죽어 없어지는 것이 삶의 목적이 아닌 것입니다. 삶에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매일 매일 사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고 예수님을 섬기고 찬미하며 영광 돌리고 사는 것이요 우리 삶의 가치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삶의 가치인 것입니다. 돈 많이 버는 것이 가치가 아닌 것입니다. 지위나 명예나 권세가 높아지는 것이 가치가 아닌 것입니다. 세상에 부귀 영화 공명을 얻는 것이 가치가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사는 것이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뜻을 쫓아 한 사람이라도 전도하는 것이 가치 있는 것이요, 기도하는 것이 가치 있는 것이요, 십일조 드리는 것이 가치 있는 것이요, 주의 사업을 위해서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하는 봉사생활을 하는 것이 가치 있는 것이요. 가치관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가치가 나 중심의 가치가 아니라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고 사는 것이 가치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이 삶의 목적이요,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기쁘게 하는 것이 삶의 의미요,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 삶의 가치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은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서 살 것 입니다.
요한복음 14장 2절로 3절에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얼마나 놀랍습니까? 하나님과 예수님을 섬기고 예수님을 기쁘게 하고 사는 사람은 정말로 즐거운 것 아닙니까?
마태복음 22장 37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마태복음 6장 33절에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우리는 완전히 예수님과 함께 사는 인생인 것입니다. 복음을 증거하고 천국에서 상 받는 삶이 얼마나 좋습니까?
디모데후서 4장 2절에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8절에는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 니라"
이처럼 그리스도를 위해서 사는 것이 우리 삶의 전부가 되어 되는 것입니다. 아침에도 예수로 잠을 깨게 하시고 저녁에도 예수로 잠을 자게 하시네. 예수님 내주여 내 중심에 오셔서 예수님 한분만으로 만족하나이다. 그리스도만이 우리에게 영원히 변치 않는 가치가 되는 것입니다. 지위도 떠나갑니다. 명예도 떠나갑니다. 권세도 떠나갑니다. 부귀도 떠나갑니다. 영화도 썩어 버리는 것입니다. 청춘도 사라집니다. 형제도 사라집니다. 사람이 세월이 지나고 나이를 먹어 가면 점점 잃어버립니다. 젊을 때 어린 아이로 태어나면 자꾸 얻습니다. 유치원에 가서 얻고 초등학교에 가서 지식을 얻고 중등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그 다음에는 사회에서 취직을 하여 얻고 그 다음에는 아내를 얻고, 자식을 얻고 지위를 얻고, 명예를 얻으나 사람이 50이 넘으면 그 다음에는 잃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명예도 지위도 권세도 부귀도 영화도 점점 나를 떠나가고 나중에 자식들도 쌍쌍이 짝을 지어 떠나가 버리고 부부도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떠나가 버리고 인생은 결국 혼자만 되는 것입니다. 종국적인 인생은 지극히 외로운 존재인 것입니다. 아무도 함께 하지 못하는 나홀로 황막한 저 세상으로 걸어가야 될 것인데 예수 믿는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이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젊을 때만 같이 하는 것이 아니라 나이 늙어 백수가 되었을 때 더 주님이 같이 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즐겁게 손잡고 인생을 살다가 우리 낡은 집 벗어 버리면 그리스도와 함께 아프지 않고 슬프지 않고 고통당하는 아니하고 훨훨 천국으로 올라가서 영원한 낙원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살게 될 것입니다. 이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사는 우리는 행복한 사람인 것입니다.
<결 론>
한 대학교에서 시험을 치루고 있었습니다.
시험 문제에는 '물이 포도주로 변한 사건에 대하여 설명하라.'했습니다. 두 시간동안 학생들은 머리를 짜내어 답안을 작성하느라 열심을 내었습니다. 그런데 감독관이 보니까 한 학생은 글 한줄 써놓고 두 시간 동안 혼자 가만히 앉아 있거든 이상하게 여겨서 다가가서 답안지를 보니 딱 한 줄이 짤막하게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물이 그 창조주 예수님을 바라보고 부끄러워서 얼굴이 빨가졌네." 그렇게 써놓았습니다. 놀라운 답안 아닙니까? 물이 왜 포도주가 되었느냐. 창조주 예수님을 만나고 부끄러워서 얼굴이 빨개져 버렸다. 그 한 줄을 써놓고 기다렸습니다. 그 글을 쓴 사람이 누구냐. 저 유명한 시인 바이론이었습니다. 나중에 그는 위대한 시인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 물이 예수님을 보니까 얼굴이 빨개진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을 보니까 달라져야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달라져야만 되는 것입니다. 종교를 만나서 달라지지 않습니다. 교회를 왔다갔다 한다고 달라지지 않습니다. 전통적으로 예수님을 믿었다고 달라지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예수님을 만나면 달라지는 것입니다. 전도하는 예수님을 만나면 천국을 얻게 되고, 가르치는 예수님을 만나면 천국인으로 성장하게 되고 치료하는 예수님을 만나면 귀신에서 놓여 나고 병고침 받게 되고, 고통 당하는 예수님을 만나면 사랑을 받게 되고 사랑으로 가슴이 무너지고 변화받고 복종하고 순종하게 되고 죽었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면 영원천국 영광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변화되는 사람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삶 속에 예수님이 빛으로 들어오시고 천국이 가슴 속에 임하시고 말씀이 삶의 지혜와 지식이 되시고 영원한 소망과 기쁨과 평안을 갖게 되는 것이 예수님을 만나므로 체험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난다는 것은 지식이 아닙니다. 의식이 아닙니다. 종교가 아닙니다. 변화 받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내가 보기에도 새것이 되고 이웃이 보기에도 새것이 되고 하나님 보시기에도 새것이 된 변화 받는 사람이 되어야 크리스천이 되는 것입니다.
<기도> 사랑이 많으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여!
오늘날 가장 큰 문제가 교회 왔다가 가면 하면서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들 때문인 것입니다.
예수 믿고 변화 받는 사람이 된 것이 아니라 예수쟁이가 되어 버리고 만 것 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고 지탄을 당합니다. 우리 아버지여 우리는 진지하게 내 자신을 그리스도 앞에 갖고 와서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리스도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십자가를 바라보고 만나서 변화 받게 도와 주시 옵시고 새사람이 되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주님의 제자들
이수영 목사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의 제자 중 두 사람을 처음으로 당신의 제자로 받아들이셨고 그 두 사람 중 하나인 안드레가 데려온 그의 형제 시몬을 또한 제자로 삼으시며 그에게 게바 즉 베드로라는 새 이름을 주신 일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계속해서 제자를 만드시는 예수님의 행적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을 만난 안드레, 베드로 형제와 한 동네사람인 빌립이 그 다음으로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빌립을 보시고는 그에게 “나를 따르라” 말씀하셨고 그는 두말없이 예수님을 따르게 되었습니다(본문 43-44절). 그리고 그 빌립이 나다나엘을 또 예수님의 제자가 되도록 인도해온 것입니다.
빌립은 나다나엘을 찾아가서 말하기를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했습니다(본문 45절). 그의 이 말 속에서 우리는 그가 예수님을 만나 예수님은 바로 구약성경의 성취이심을 확신하게 되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율법과 선지자라는 말은 함께 구약성경 전체를 지칭하는 데 사용되는 말들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구약성경 전체를 통해서 가리키시는 그 분이심을 빌립은 단번에 알아본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것을 그대로 나다나엘에게 증언한 것입니다. 빌립이 어떻게 그렇게 단번에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를 확신할 수 있었는지 설명은 없습니다. 어쩌면 빌립 자신도 자기가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는지를 설명할 길이 없었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나다나엘이 그의 말을 선뜻 믿지 못하여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반문하자 다른 말 하지 않고 그저 “와서 보라” 했는지 모릅니다(본문 46절).
어쨌든 나다나엘은 예수님께 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가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말씀하시기를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하셨습니다(본문 47절). 그러자 나다나엘이 예수님께 여쭈었습니다: “어떻게 저를 아십니까?” 이에 예수께서는 대답하시기를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하셨습니다(본문 48절). 예수님께서는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가서 당신과 만난 사실을 전하기 전에 무화과나무 아래 있던 나다나엘을 벌써 보셨고 그때 이미 그가 참으로 속에 간사함이 없는 이스라엘 사람인 것을 알아보셨다는 것입니다. 옛 이스라엘에서 무화과나무 그늘 아래는 기도와 명상과 공부를 위해 사용되던 장소였습니다. 사람들이 랍비들과 함께 무화과나무 그늘에서 성경을 공부하는 것은 예수님 당시에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거기서 성경을 배우기만 할 뿐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에게 약속된 메시야의 오심을 기다리는 그들의 믿음과 소망을 확인하곤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신 무화과나무 아래 있던 나다나엘은 그저 더위를 식히며 쉬고 있던 나다나엘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익히며 그 속에서 약속된 메시야의 오심에 대한 간절한 소망을 품고 있던 나다나엘이었을 것입니다. 그 나다나엘을 가리키시며 예수님께서는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얍복 나루에 홀로 남은 야곱이 하나님의 사람과 밤이 새도록 씨름하여 이기고 새로 얻은 이름입니다. 하나님에 의해 새로워진 사람의 이름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다”고 하신 것은 형의 약점을 이용하여 장자권을 차지하고 아버지를 속여 형이 받을 아버지의 축복을 훔친 옛 조상 야곱의 그 간사한 성품을 물려받지 않은 사람으로 나다나엘을 판단하셨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자기를 평가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에 나다나엘은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라는 말로 응답했습니다(본문 49절).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과 아버지 하나님 사이의 친근함과 하나이심의 관계를 묘사하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의 임금”이라는 호칭은 팔레시타인의 유대인들이 메시야를 가리키는 데 쓰던 말입니다. 나다나엘은 그보다 먼저 예수님을 만난 안드레처럼 예수님을 메시야로 보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나다나엘의 말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한 말씀 더 보태셨습니다. 본문 50-51절을 다시 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무화과나무 아래 있던 자기를 보실 때 곧바로 자기 속을 알아보신 예수님의 신적 능력에 감탄하고 승복한 나다나엘에게 주님께서는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며 앞으로 당신께서 행하시는 더 크고 놀라운 일들을 보게 되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들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입니다.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시며 주신 약속의 말씀입니다. 즉 확실한 일임을 예수님께서 친히 강조하신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그 약속이 이루어졌는지를 한 번 확인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실제로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예수님 위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았다는 기록은 신약성경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그 약속은 헛된 약속이 아니었는가 하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예수님께서 헛된 약속을 하셨다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그 약속은 분명 이루어졌고 또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는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먼저 분명히 해야 할 것입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자기 자신을 가리키시며 “인자”라고 부르신 뜻을 생각해봅니다. “인자”는 문자 그대로 “사람의 아들”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인자”는 분명 사람의 아들이란 뜻이지만 막상 사람에게는 붙여 부르지 않는 말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 자연스럽게 사람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에 굳이 사람의 아들이라고 부를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인자”란 아무리 사람의 몸을 통해 참 사람으로 태어나셨어도 본래 사람이 아니시고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붙여 부를 수 있는 호칭인 것입니다. 신약성경에서 인자는 오직 예수님을 지칭하기 위해서 쓰인 말입니다. 또 거의 언제나 예수님 자신의 입으로 사용하신 호칭입니다. “인자”라는 말의 첫 기원은 다니엘서 7장 13-14절에서 찾곤 합니다: “내가 또 밤 환상 중에 보니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가 그 앞으로 인도되매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다른 언어를 말하는 모든 자들이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의 권세는 소멸되지 아니하는 영원한 권세요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예수님께서 자기 자신에게 이 “인자”란 호칭을 사용하심으로써 다니엘서에서 예언된 인자가 바로 당신이심을 알리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자신에게 이 “인자”란 호칭을 사용하신 것은 또한 그 호칭이 흔하지 않은 호칭이고 “하나님의 아들”이란 말이나 “이스라엘의 왕” 이란 말같이 민족주의적이고 정치적인 의미가 실리지 않은 말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들이 당신을 정치적 메시야로 오해하지 않도록 하시기 위해서였다는 것입니다. 또 “인자”란 호칭은 인간의 약함을 자신에게 담당시키신 이라는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상 예수님의 인성보다는 오히려 그의 신성을 더 가리키는 말입니다. “인자”란 말은 예수님께서 메시야이심을 감추면서도 동시에 그것을 가리키는 호칭이었던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열세 번 나타나는 이 호칭은 주로 예수님의 십자가에 달리심과 계시와 종말론적 권위에 관련하여 나타나곤 합니다.
하늘이 열린 것을 보는 것은 모든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종말론적 꿈이었습니다. 그것은 저 세상의 현실을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늘나라의 비밀과 진리를 깨닫고 소유하게 하실 분이심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가 가르치시는 모든 말씀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 한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본래 하늘의 영광 가운데 계시던 분이시고 하늘로부터 이 땅에 구원을 가져오신 분이시며 우리로 하여금 하늘에 오를 수 있게 하는 유일한 통로이심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당신이 비록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당하실 것이지만 부활하시고 하늘로 올려지셔서 영광을 받으실 뿐이심을 예시하신 말씀입니다. 그것은 또한 예수님께서 하늘로부터 천군천사를 거느리고 심판주로 이 세상에 다시 오실 것을 알리시는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본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신적 존재 곧 하나님이심을 목도하고 확신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일들이 다 하나님의 구원사역임을 알게 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늘과 땅 사이의 교통의 매개가 되심을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우리 인간 사이에 막혔던 담이 무너지고 화해의 관계가 회복되는 역사가 이루어짐을 보게 되리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늘의 비밀과 진리를 이 세상에 전하시는 계시자이시고 하나님의 모든 예언의 성취이심을 알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권능이 명백히 나타나리라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으로 그 절정을 이루게 될 예수님의 모든 사역과 삶 속에서 하나님의 주권이 온 천하에 드러나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보는 예수님의 새 두 제자를 통해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 됨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 나아온 사람들을 그저 제자로 삼으시기만 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어떻게 될 것인지를 말씀하셨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입니다. 요한복음의 저자는 그의 복음서의 첫 두 장을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를 서술하는 데 온통 할애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첫 제자들을 두시는 과정에서도 초점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고백하느냐에 맞춰져 있습니다. 예수님은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시고 곧 하나님이신 말씀이십니다(요1:1-2). 예수님은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고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는 그런 분이십니다(요1:3, 10). 예수님은 모든 사람에게 생명이시고 참빛이십니다(요1:4, 9). 예수님은 당신의 이름을 믿고 당신을 영접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가지신 분입니다(요1:12).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로서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분이십니다(요1:14, 18, 34, 49). 예수님은 모든 사람과 우주만물보다 먼저 계신 하나님이십니다(요1:15).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시도록 하나님께서 택정하신 어린 양이십니다(요1:29, 36). 예수님은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는 이십니다(요1:33). 예수님은 이스라엘이 기다리던 바로 그 메시야이시고 온 인류가 기다려야 할 그리스도이십니다(요1:41). 예수님은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바로 그이십니다(본문 45절). 예수님은 참 이스라엘의 임금이시고(본문 49절) 우리의 영원한 왕이십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이해하는 것이 주님의 제자들에게 요구되는 첫 번째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며 그리스도의 오심을 갈망하고 있던 나다나엘을 보시고 참으로 그가 마음에 간사함이 없는 이스라엘 사람임을 알아보셨으며 그가 당신께 나아올 때 그를 제자로 맞으셨습니다. 우리도 마음에 간사함을 다 내던져버리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주님의 오심과 그와 함께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소망 가운데 살아가는 주님의 제자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끝으로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빌립에게서도 배울 줄 알아야 합니다. 빌립은 자기가 만난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는 몰랐지만 나다나엘에게 그저 “와서 보라”고 말할 줄 알았던 제자입니다. 우리 또한 우리의 믿는 바를 잘 설명할 줄 몰라도 주님의 훌륭한 제자들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빌립에게서 배워야 할 것입니다.
사다리 타고 하늘까지
이정선 목사
마운트 정상에 올라가면 패러글라이딩 하는 사람들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시원한 창공을 자유자재로 날아다니는 것은 참 멋진 일입니다. 인간은 땅에 발을 딛고 살기 때문에 하늘을 동경합니다. 인간이 높이 뛰어봐야 1미터나 뛸까요? 장대높이뛰기 세계기록은 5미터쯤 됩니다만, 그래봐야 공중을 날아다니는 새에 비하면 새 발의 피입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이카루스는 밀랍으로 붙인 날개를 달고 하늘을 날다가, 너무 높이 올라가는 바람에 햇볕에 밀랍이 녹아 바다에 추락하고 맙니다. 이카루스의 이야기는 다른 여러 교훈과 상징을 내포하고 있겠지만, 인간의 하늘에 대한 동경이 그 바탕에 깔려 있습니다. 현대에 들어와서 과학기술의 발달로 인간은 어떤 새보다도 더 높이 또 더 멀리 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심지어는 우주까지 날아가서 몇 개월씩 머물다 오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인간의 하늘에 대한 동경이 충족된 것 같지는 않습니다. 하늘에 대한 동경은 단지 하늘이라는 공간에 대한 동경이 아니라, 더 나아가 영적 차원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땅에 발을 딛고 사는 인간에게 있어서 하늘은 신의 영역을 의미합니다. 하늘과 땅의 대비는 전능하신 신과 유한한 인간의 대비를 상징합니다.
여러 종교들에서는 물론 땅에 기반을 둔 신들도 등장합니다. 가령 그리스 신화에는 바다의 신 포세이돈도 있고 대지의 여신 데메테르도 있습니다. 그러나 최고의 신은 하늘의 신인 제우스입니다. 또 하늘에 있는 것들은 신적 존재로 숭배를 받게 됩니다. 그래서 태양도 신이 되고, 달과 별을 향해 소원을 빌기도 합니다. 중국에서는 황제를 천자, 즉 하늘의 아들이라고 불렀습니다.
유대인들 역시 하나님을 공간적 차원에서 접근할 때 하늘이라는 개념을 사용했습니다. 하늘은 하나님이 계시는 곳이고, 그래서 하나님나라와 하늘나라는 동의어로 사용되었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천국, 즉 하늘나라라는 단어가 사용되었고, 누가복음에는 천국 대신 하나님나라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물론 공간으로서의 하늘은 하나님이 계시는 장소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는데, 물리적 공간으로서의 하늘은 신적 거소로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물리적 공간이 영이신 하나님의 거소가 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이 하늘에 계시는 것으로 묘사합니다. 전도서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그런즉 마땅히 말을 적게 할 것이라”(전 5:2). 예수님께서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천사가 나타난다면 하늘에서 내려오지 땅에서 올라오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부활하신 후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러니까 신적 영역으로서의 하늘은 물리적 공간으로서의 하늘이 아니라 하나님의 높으심, 뛰어나심, 전능하심 등을 잘 대변할 수 있는 상징적 개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벨탑을 아무리 높이 쌓아도 하나님이 계신 하늘에 닿을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용납하지 않으신 것은 사람들이 하나님 계신 곳까지 오는 것이 염려되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하셨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예수께서 나다나엘을 제자로 부르시는 장면입니다. 구약성경에서 예언되었던 메시야를 만났는데 바로 나사렛 사람 예수라는 빌립의 말을 듣고, 나다나엘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고 믿지 않으려 합니다. 그렇지만 빌립에게 억지로 끌려가서 예수를 만나러 갔더니, 그분이 자기를 아는 척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자기를 아느냐고 물었더니, 예수님 대답이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 너를 보았다”는 것입니다.
이 말에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던 나다나엘의 태도가 180도 달라집니다. 그가 지금까지 알고 믿던 모든 것을 뒤집어버릴 만큼 강력한 포스를 느낀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이스라엘의 왕이십니다.”라고 무릎을 꿇습니다.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 너를 보았다’고 한 말씀이 뭐가 그렇게 대단해서 나다나엘의 태도가 그렇게 바뀌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나다나엘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엄청난 사건이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나다나엘만 아는 무슨 비밀이 있겠지요. 즉 그것은 메시야로서의 신적 능력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던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 하시는 말씀이,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 봤다는 것 때문에 그렇게 놀라느냐? 그건 별 것 아니야. 네가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야.” 그런데 더 큰 일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늘이 열리고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 한 것은 야곱이 꿈에서 본 광경이었습니다. 형 에서의 복수의 칼을 피해 집을 떠나 멀리 피난을 가던 야곱은 얼마나 힘들고 외롭고 또 지쳤던지, 돌을 베개 삼아 베고 곯아 떨어졌습니다. 그날 밤에 그 이상한 꿈을 꾸었습니다.
사다리가 땅에서부터 하늘까지 닿아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역인 하늘과 인간의 영역인 땅이 연결되었다는 뜻입니다.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이래 인간의 비극은 하늘의 하나님과 분리되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지혜나 선행으로는 결코 하늘에 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야곱의 꿈에서 하늘과 땅이 사다리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비록 지금은 초라하고 불쌍한 도망자의 신세지만,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 그리고 이삭에게 이어진 언약이 이제 야곱에게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신 꿈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은 그가 복의 근원이 되어 땅의 모든 백성이 그를 인하여 복을 얻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것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오실 메시야를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메시야가 오셔서 하실 일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식도 못 낳는 아브라함에게 그 약속을 하신 것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기 위한 것이었고, 이삭이 태어남으로써 그 언약이 성취되어가는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이어지는 하나님의 축복을 사모해서 형으로부터 그것을 빼앗은 야곱에게 그 언약이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그 꿈으로 보여주셨단 말이지요.
그런데 지금 예수께서 그 옛날이야기를 하시면서 야곱이 꿈에서 보았던 사다리가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하늘과 땅을 잇고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화해하게 하는 것이 바로 메시야로서 자기가 하게 될 일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나다나엘을 비롯한 제자들이 보게 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닿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늘을 동경하고 사모하던 인간의 본능적인 갈망 상태를 벗어나서 하늘까지 닿는 사다리를 타고 올라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비록 두 발을 땅에 딛고 살지만, 우리는 하늘에 속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고 했습니다(빌 3:20).
그러므로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가 하늘에 속한 자로서 위엣 것을 찾고 위엣 것에 관심을 가지며 살아야 합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골 3:1-2). 예수님께서도 먹고 사는 것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물론 우리가 다 잘 아는 말씀입니다. 그렇지만 오늘 하루도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며 정신없이 살다 보면, 우리가 하늘에 속해 있다는 것과 하나님의 의를 먼저 구해야 한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살게 된단 말입니다. 삶이 어렵고 고달플 때 꼭 기억하십시오. 우리에게는 하늘에 닿는 사다리가 있습니다. 세상 사는 재미가 너무 좋아서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때 꼭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는 이 땅에 속한 것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사람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늘까지 닿은 사다리 위로 천사들이 바쁘게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습니다. 그 천사들 틈에 끼어 부지런히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는 여러분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무리 바빠도, 아무리 다른 재미있는 일이 많아도,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다리를 타고 우리는 하늘에 오르락내리락 해야 합니다. 그렇게 자주 하늘에 올라가서 하나님을 만나고 내가 하늘에 속해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또 땅에 내려와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도록 하나님이 나에게 맡기신 사명 감당하고, 그렇게 사다리 위로 부지런히 오르락내리락 하는 여러분의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크리스챤의 상표
요 1:45-50 / 김진호 목사
이 세상에 모든 물건에는 그 물건 나름대로 상표가 있습니다. 상표는 그 물건에 상징이요, 보증이기도 합니다. 세계 시장에는 세계 사람들이 살 수 있는 제품들이 있는데 그 제품에 상표가 모두 있습니다. 우리 한국 사회에서 보증 될 수 있는 상표에는 KS마크가 반드시 있기에 KS마크의 상표는 누구든지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사람들은 그 물건을 믿고 사는 것입니다. 잘 알려진 상표는 언제 어느 곳에서나 사람들이 맘 놓고 사게 되는 것입니다.
때때로 머리 좋은 나쁜 사람들이 믿을만한 상표를 도용해서 가짜 물건을 만들어 팔다가 법망에 걸려서 그 상표의 신용도를 떨어뜨리는 일들이 종종 신문에 날 때가 많이 있습니다.
퍽 오래 전에 TV뉴스에서 불란서 파리에는 가짜 상표를 만들어서 진짜 물건처럼 파는 상품들을 전시해 놓았는데 부끄럽게도 우리 나라 사람들이 가짜 상품을 가장 많이 도용하고 있는 전시장이 있어서 국제적으로 퍽 창피한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 세상에서 예수 믿는 성도에겐 두가지의 상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이것을 크리스챤의 상표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크리스챤의 두가지 상표가 무엇인줄 아십니까? 첫째, 상표는 사랑이란 상표요, 또 하나는 정직이란 상표가 붙어 있다는 것을 알고 계셔야 합니다. 저는 오늘 아침에 크리스챤의 두번째 상표인 "정직" "진실" "솔직함"에 대해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리가 시장에서나 백화점에서 그 상표만 믿고 물건을 샀는데 와서 끌러보니 가짜 상표요 가짜 물건인 줄 알면 얼마나 불쾌하고 기분이 상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지금 이 세상에서의 크리스챤의 영성에 위기를 맞고 있는 것을 성도들이 예배가 부족하거나 기도가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이 이 땅의 크리스챤을 보고 실망하는 것은 한국교회와 한국의 크리스챤의 정직성을 잃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들이 정직할 줄 알았는데 정직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진실하고 솔직할 줄 알았는데 진실치 못하고 솔직하지 못하는데서 세상은 교회와 신자들에게 실망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이 나다나엘을 만난 사건의 내용입니다. 나다나엘은 친구 빌립을 통해 예수님을 소개 받았지만 그의 잘못된 선입관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야 임을 받아드리지 아니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래도 빌립은 나다나엘을 데리고 예수님 계신 곳으로 다가가자 예수님은 나다나엘을 보자마자 본문 47절에서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가라사대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나다나엘은 너무 놀랐습니다. 자기의 진실함과 정직함을 알고 계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 그는 드디어 무릎을 꿇고 그때부터 주님을 따르는 제자가 된 것입니다. 할렐루야!
예수님은 나다나엘에게서 "간사함이 없는" 그의 정직함을 아시고 그를 칭찬하신 것입니다.
간사함이 없다는 말씀을 그가 이중적이거나 거짓된 사람이 아니란 말씀입니다. 나다나엘에게도 부족함이 있을 수 있으나 우리 주님은 그의 진실하고 정직함을 알아 주시고 칭찬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의 연약함도 아시고 부족함도 아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인생들이 정직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잠15:8에 "악인의 제사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나 정직한 자의 기도는 그가 기뻐하시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복음서에 보면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기도가 있고 세리와 창기의 기도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누구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셨습니까? 비록 지탄 받는 세리요 창기지만 그들의 정직한 기도를 더 귀하게 여기시고 응답하셨습니다. 도리어 겉으로만 번지르한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위선적인 기도는 듣지 아니 하셨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내 중심을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고 솔직한 기도를 하셔야 합니다.(골방기도) 사람들 귀에 듣기 좋게 하기 위한 진실이 없는 기도는 그 기도가 아무리 근사해도 그런 형식적이고 거짓된 기도는 우리 주님이 듣지 아니하심을 깨닫기 바랍니다.
시 84:11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히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 일본이 기독교 국가가 아닌데도 그들이 복받는 이유
시 36:10 "주를 아는 자에게 주의 인자하심을 계속하시며 마음이 정직한 자에게 주의 의를 베푸소서"라고 말씀하고 있으며 시 7:10 "나의 방패는 마음이 정직한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있도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가 베풀어지고 하나님의 구원이 임하려면 정직해야 합니다.
이런 얘기를 들어 본적이 있지요. 한국의 성도들은 새벽기도 열심히 나왔다가 가면서 집에 갈땐 남의 밭에서 호박을 따가지고 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지나친 표현이긴 하지만 한국교회 성도들의 이중적 신앙 생활을 잘 꼬집어 말한 말씀입니다. 그래서 교회서 믿음 좋다고 생각한 장로나 집사 중에서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사기 사건에 관련되어 대문짝 만하게 그의 비리가 매스컴에 폭로될 때마다 부끄러움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몇 년 전에 우리 사회를 떠들석 하게 한 옷 로비사건이 있었지요. 그때 사건의 주인들이 소위 한국 교회서 기도 많이 하고 성경 공부 많이 한다는 여자 권사님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성경 앞에서 손을 얹고 맹세한다고 하면서 모두가 거짓말로 말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기자는 한국 교회를 3개의 성경책이 있다고 꼬집어 말하기도 했습니다. 각자 성경앞에 놓고 세 여자들의 증언이 모두 다 다르고 거짓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온통 거짓투성 입니다. 그래도 사람들의 맘 속 깊이는 정직을 바라고 있습니다. 진실을 찾고 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인 마저 정직하지 못하고 진실하지 못할 때 세상은 우리를 향해 실망 할 뿐만 아니라 분노마저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애비는 도둑놈이라도 자식만은 도둑놈을 만들고 싶지 않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더러워도 크리스찬 만은 깨끗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우리는 거짓투성이라도 교회는 진실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물론 모순된 소망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교회와 크리스찬에 대해서 기대하는 바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기대를 오늘의 크리스찬들이 기대에 부응하지 못함에 대해 우리는 부끄럽게 여기고 회개해야 합니다.
어느 기독교 단체에서 구약에 있는 요셉의 사건을 드라마로 꾸며서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드라마를 보면서 아주 신선한 장면을 보게 된 것입니다. 요셉이 애굽에 팔려 보디발 시위대장 집에서 노예 생활할 때 요셉 이가 얼마나 성실했던지 보디발 대장이 이스라엘 청년 요셉을 가정총무로 발탁하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보디발 아내의 유혹을 받아 요셉이 그 유혹을 뿌리침으로 보디발 아내는 자신의 자존심이 상한 것을 괘씸하게 여기고 자기 남편 보디발에게 다음과 같이 소리칩니다. "당신이 데려다 놓은 이스라엘 노예 녀석이 당신이 없는 사이에 날 겁탈하려 했다."고 말하면서 "저놈을 죽여라!"고 남편에게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디발 대장은 아내의 죽이라는 말을 듣지 않고 그를 애굽의 파라오란 감옥으로 보냅니다. 여기까지는 성경 내용을 그대로 드라마로 전개하였다. 그런데, 이 드라마는 여기서 이렇게 내용을 다시 비난해서 전개합니다. 보디발 아내가 분이 나서 집에 돌아 와서는 남편에게 거세게 항의합니다. "왜 내가 저 노예 놈을 죽이라"고 했는데, 살려주고 그냥 감옥에 가게 했느냐고 남편 보디발에게 항의합니다. 이때 보디발 대장이 그의 아내의 거친 항의를 받고 무슨 말을 한 줄 압니까?
그 드라마는 이렇게 보디발이 자기 아내에게 발하게 합니다. "나는 요셉을 믿는다. 요셉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하는 그의 말을 나는 다 진실로 믿는다"고 그리고는 보디발이 자기 아내에게 호통을 칩니다. "이 요망한 계집년아! 요셉이가 널 겁탈한 것이 아니라 네가 요셉을 꼬셨지?"하고 자기 아내의 뺨따귀를 때리는 내용이 나옵니다. 나는 그 드라마를 보는 순간 얼마나 통쾌하고 기분이 좋은지 - 참 보디발이 요셉을 믿어주고 잘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비록 드라마의 이 내용을 꾸며서 했으나 대단히 의미있는 내용의 드라마라고 생각합니다.
보디발 대장이 요셉을 향해 "저가 말하는 말 모두 다 정직하고 진실하다고 나는 믿는다"고 말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요셉은 하나님을 믿는 자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나는 이 말이 오늘날 이 세상의 사람들이 오늘의 기독교인들을 가리켜 "예수를 믿는 저들의 말은 모두 진실이야. 크리스찬들은 모두 정직하다고 믿는다"는 말을 들을 수 있다면 얼마나 떳떳하고 감사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이런 말을 들을 때가 있습니다. "저 아무개는 열심있는 크리스찬이요. 그러나, 사람은 믿을 만하다"고 소개합니다. 심지어 목사님에게도 "저 분이 목사님인데 아주 진실한 분이란 말을 덧붙이는 말이 있습니다." 어찌해서 열심있는 크리스찬인데, 거기에 다른 말을 덧붙여야 합니까? 목사님이면 됐지 거기에 진실하다는 말을 구태여 붙이는 뜻이 무엇입니까?.
크리스찬이 된다는 것 교회에 열심히 다닌다는 것과 진실하고 정직하다는 것은 별개의 것입니까?
여러분 앞에 서있는 김목사도 부족한 것이 많은 목사입니다. 이것은 그저 말로 해보는 겉치레 표현이 아닙니다. 저는 정말 부족합니다. 그러나, 저에게 한가지 신조가 있습니다. 목회자가 진실이 무너지면 그 목회는 끝장이라는 사실입니다. 진실과 정직함이 없는데, 제가 아무리 멋진 설교를 한들 어찌 그 설교가 은혜가 될 수 있습니까? 천사의 말을 한들 정직함이 없는 그 일이 어찌 권위가 있고 감동이 있을 수가 있습니까?
얼마전에 어느 교회 목사님에 대해서 그 교회 교인에게 안부를 묻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성도에게 담임 목사님 훌륭하시지요? 라고 묻자 그 성도는 저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목사님 열심도 있으시고, 부지런 하신 데도 좀 뻥이 많으세요" 너무나 뜻밖의 말을 듣고 나도 우리 도봉교회 성도에게 이런 말을 듣지 않을까 하는 조심스런 생각으로 내 자신을 돌아보게 된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 정직하지 못하고 거짓된 것은 영적으로 마귀에게 사로 잡힌 것입니다. 베드로와 가롯유다는 예수님 앞에 비슷한 잘못을 범했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이 차이가 있다는 것을 베드로는 믿음이 약해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하고 나서 즉시 자신의 비겁함과 무력함을 깨닫고 정직하게 회개함으로 다시 주님으로부터 인정받고 쓰임 받았습니다. 그런데, 가롯유다는 그 속에 마귀가 들어갔습니다. 요13:27에 가롯 유다가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예수님에게 떡조각을 받으면서 "곧 사탄이 가롯 유다 맘속에 들어갔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깐 가롯 유다는 계속 자기를 속이로 예수님을 속이고 회개할 기회를 버리고 사탄의 조정을 받다가 드디어 멸망하고 만 것입니다. 마귀는 그 자체가 거짓의 영입니다.
내가 정직하지 못한 것은 벌써 내 속에 사탄의 지배 아래 있다는 증거입니다. 사탄의 지배속에 있는 사람은 망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거짓말 하면 참으로 피곤 합니다. 왜 그런고 하니 거짓말은 꾸미자니 자꾸 머리를 굴려야 합니다. 진실도 기억해야 되고 또 다른 거짓말도 꾸며야 하기 때문입니다. 보통 머리가 좋지 않으면 거짓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거짓말 하는 사람은 항상 피곤합니다. 항상 힘이 딸려서 쉴 틈이 없는 것입니다. 정직하게 사는 것이 최선의 방책입니다. 정직한 것이 최선의 능력입니다. 정직하고 솔직하게 사는 것이 아주 편한 것입니다. 자신을 위장하며 산다는 것이 얼마나 피곤하고 힘이 드는 줄 아십니까? 지금 여러분이 몹시 피로에 지쳐 있습니까? 그 원인이 너무 위선과 거짓으로 자신을 위장하느라고 지쳐서 피곤 한 것은 아닙니까?
요 4장에 사마리아 여인은 남편 다섯이나 갈아치면서 자기를 위장하고 살아왔기에 그 여인은 너무 지쳐 있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을 만나서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을 주신다고 하니까 그는 그 물을 달라고 요청하지 않습니까? 그는 거짓과 위선속에서 그의 심령이 너무 피곤하고 목말랐기에 예수님이 주시는 목마름이 없는 생명수를 갈망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정직하려고 할 때 용기와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때로 내가 정직하면 어떤 손해나 어떤 어려움이 올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에 자꾸 거짓을 꾸밀려고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정직한 후에 어떻게 될 것인가를 계산하지 말고 하나님께 맡기면 하나님은 정직한 자를 구원하시고 정직한 자의 기도를 들으시고 정직한 자의 방패가 되어 주심을 믿고 이제라도 정직하기를 결단하시기 바랍니다.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큰 죄를 범했습니다. 간음 죄와 간접 살인 죄까지 범했습니다. 이때 나단 선지자가 나타나 그의 불의한 죄를 책망하였습니다 이때 만일, 다윗이 내가 정직하게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면, 임금의 위신이나 체면이 어찌 될 것인가를 계산했다면 그는 정직한 회개를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정직한 후의 일은 하나님께 맡기고 그는 자신의 잘못에 대해 부끄럽지만 솔직하게 인정하고 회개하므로 그는 하나님의 용서를 받고 다시 축복을 받게 되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회개하는 자는 정직한 자입니다. 회개치 않는 자가 거짓말 하는 자입니다.
요일1:10에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나다나엘처럼 "보라 저가 참 그리스도인이라 저에게서 간사한 거짓이 없는 정직한 자"라고 우리 주님으로부터 인정 받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출세하지 못하고 똑똑하다는 말을 듣지 못해도 저 사람이야 말로 정직한 자라고 보디발 대장이 요셉을 가리켜 말했듯이 이 땅에 모든 불신자들이 교회 다니는 여러분을 보고 저들은 참으로 정직한 사람이라고 여러분을 보고 저들은 참으로 정직한 사람이라고 인정할 수 있다면 그것 자체가 능력이요 그것 자체가 축복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나는 이 땅에 있는 모든 크리스챤의 상표가 사랑과 정직한 상표를 갖고 살아가기를 간절히 또 간절히 바라고 싶고 기도하고 싶습니다.
저 유명한 마더 테레사 수녀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습니다. "우리는 성공하기 위해 이 땅에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진실해지기 위해서 부름 받은 존재들입니다." 아주 의미 깊은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참이스라엘 사람
손상률 목사
인간은 예외 없이 본성의 한계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고 거듭난 사람이라도 태생적인 한계 때문에 그침 없는 자기와의 싸움을 싸웁니다(롬 7:22-24). 그렇지만 성도가 자기의 한계를 알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투쟁을 시도하면 성령께서 힘을 실어주는 것입니다. 여기 빌립의 친구 나다나엘은 지금까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는 식의 주관적인 장벽에 갇혀 있어 예수님께 접근할 수 없었던 사람입니다. 그가 친구의 권유에 못 이겨 예수님께 나왔을 때 한순간 자기의 벽을 허물고 ‘참 이스라엘 사람’으로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1. 인간 세계의 한계가 있습니다.
인간은 자기의 머리털 하나도 희고 검게 할 수 없는 무능한 존재입니다(마 5:36). 세상을 사는 사람은 다 자기 힘으로 어찌 할 수 없는 한계점에 부딪치고 있습니다.
1. 외부적인 한계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최상의 행복을 누릴 수 있는 특권을 부여 받았습니다(창 1:26-28). 그렇지만 자기의 의사와 상관없이 여의치 못한 외부적인 사정 때문에 기본적인 생존권도 포기하고 살아가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오늘날 지구상에는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 같은 국가 간의 분쟁이나, 또는 오랜 기간 그침 없는 내전으로 포화 속에서 목숨을 지키기 힘든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곳에서는 전쟁보다 더 무서운 독재권력의 횡포로 자유와 권리를 유린당한 채 짐승보다 못한 삶을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똑같은 지구상에서도 자연적인 악조건 때문에 극심한 가난과 목마름에 허덕이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온갖 불합리한 요소를 안고 있으면서도 자기 힘으로 어찌 할 수 없는 한계에 좌절할 뿐입니다.
2. 신체적인 한계가 있습니다.
현대를 사는 사람들은 인간이 만들어 내는 첨단 문화의 이기를 누리면서 인간의 가능성이 끝이 없다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세계 올림픽에서 뛰어난 기량을 발휘하는 경기자들을 볼 때마다 모두들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었다고 찬사를 보냅니다. 상상을 초월하는 과학문명에 대하여 신(神)의 경지에까지 이른다고 경탄해 마지않습니다. 그렇지만 인간은 인간일 뿐 그 이상일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이 신체적 악조건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동양 사람들은 서양 사람에 비하여 체구가 작습니다.
피부 색깔을 자랑하는 백인들은 유연성과 순발력이 뛰어난 흑인들을 못 당합니다. 무엇보다 예측할 수 없는 질병과 사고의 위협에 노출된 상태로 모든 사람은 죽음에 대한 불안을 떨치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3. 사고(思考)와 인격의 한계가 있습니다.
영국의 경험주의 철학자 베이컨(Francis Bacon)은 그의 유명한 우상론(Idola)을 피력하면서 사람마다 자기중심의 사고와 개인의 편견, 언어, 권위, 전통과 같은 굴레에 갇혀 있다고 하였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사고의 한계와 고정관념의 벽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벽이 두꺼운 사람일수록 외부 세계에 접근하지 못합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적인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이방인들도 그들이 자랑하는 철학적 지식의 교만에 갇혀 십자가의 복음을 수용할 수 없었습니다(고전 1:22-23). 바울은 이들을 향해서 “너희 마음을 넓히라”고 하였습니다(고후 6:13). 누구나 다 자기 중심의 고정관념과 편견을 허물게 될 때 그리스도의 이상에 접근할 수 있습니다.
2. 신앙세계의 한계가 있습니다.
성경은 믿음의 신비성(神秘性)을 말합니다(마 13:11). 인간의 상식이나 과학적 지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도 믿음의 세계에서는 이를 가능하게 합니다(히 11:1). 그리스도인은 자기의 불완전성을 인정하고 그 한계를 뛰어넘기 위한 노력을 해야만 합니다.
1. 믿음의 한계입니다.
보통 때는 대단한 믿음을 가진 것처럼 말하던 사람도 결정적인 상황에 이르게 되면 자기의 벽에 걸려 넘어지곤 합니다. 결국 믿음의 한계가 거기까지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믿음을 가지도록 가르치셨습니다. 먹고 입고 사는(衣食住)문제에 허덕이는 사람들에게 새를 먹이시고 꽃을 입히시는 하나님의 보장을 믿으라고 하였습니다(마 6:30). 하나님의 존재하심과 그의 보장을 믿는 사람은 불가능을 모르는 사람입니다(막 9:23). 성경에 나오는 많은 사람들은 오직 믿음만으로 불의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고 칼날을 피하기도 하고 연약한 가운데서도 강하여지고 온갖 시험과 죽음을 이겨낸 경험이 있습니다(히 11:33-38). 믿음에 어떤 이유나 조건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그 사람의 한계입니다.
2. 순종의 한계입니다.
성경에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논할 때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액면 그대로 믿고 거기에 순종하였다는 것을 강조합니다(히 11:8). 건전한 믿음은 그의 삶을 통하여 실천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믿음을 아는 것과 고백하는 것으로 그치고 실천하는 데까지 미치지 못합니다. 말씀을 순종할 때 믿음의 능력이 행사되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따르지 못하고 마는 한계에 부딪치곤 합니다. 예수님을 따라 나선 부자 청년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네 소유를 가난한 자에게 나눠 주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는데 그 청년은 재물이 많으므로 근심하며 돌아갔습니다(마 19:20-22). 참 좋은 기회가 주어졌지만 그 사람에게는 신앙의 한계가 거기까지였기에 순종으로 옮길 수 없었던 것입니다.
3. 축복의 한계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무궁무진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구원을 받게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기인하지만 성도가 세상에서 누리게 되는 축복은 그 사람의 수용할 수 있는 용량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하늘나라에서 받게 되는 영광도 해와 달과 별과 별들의 영광이 있다고 했는데 이 역시 세상에서 행한 일과 정비례 하는 것입니다(고전 15:41). 그릇의 한계가 있는 사람은 그 용량 이상의 복을 수용하지 못합니다. 똑 같은 상황에서도 신앙의 용량에 따라서 받을 수도 있고 받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손에 잡은 장자의 축복을 놓쳐버린 에서처럼 그릇이 안 되는 사람은 축복의 현장에서도 이를 피해갑니다(창 25:34). 요셉처럼 큰 그릇이 되는 사람은 캄캄한 어둠 속에서 혜성처럼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창 50:20).
3. 참 이스라엘로 거듭나야 됩니다.
“이스라엘”은 축복의 대명사입니다(신 33:29). 옛날 선택받은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즐겨 쓰던 이름입니다. 사도 바울이 자기의 문벌과 신분을 자랑하면서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라고 한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빌 3:5).
1. 편견의 벽을 허물어야 됩니다.
대부분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민족주의적인 우월감에 사로잡혀서 외부 사람들과의 벽을 쌓고 살았습니다. 형식적인 율법에 사로잡혀
그 고정관념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나다나엘 역시 그런 사람입니다. 빌립이 찾아와서 율법이 소개한 메시야가 바로 나사렛 예수라고 하였을 때, 그는 첫말에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하고 일축하였습니다. 그렇던 나다나엘도 “와보라”고 하는 빌립의 권유에 못 이겨 결국 자기의 고집을 꺾고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향해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함이 없도다”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예수님의 말씀은 나다나엘로 하여금 이름뿐인 이스라엘에서 명실상부한 참 이스라엘로 거듭나게 하였습니다(창 32:25-28).
2. 예수님을 받아들여야 됩니다.
예수님께서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선언하실 때 나다나엘은 크게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향하여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하고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나다나엘은 즉각적으로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하고 신앙고백을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과정은 그가 성령으로 거듭난 사실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고린도후서 12:3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요 나의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요 1:12-13).
3. 신비로운 체험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일을 보리라”고 하였습니다. 이어서 또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고 하였습니다(51-52절). 이후부터 그가 성령에 사로잡히게 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나다나엘처럼 자기중심의 사람이 그리스도 중심의 사람으로 그 삶의 패턴을 바꾸게면 새로운 세계관이 열리게 됩니다. 능력 있는 사역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실패를 거듭한 베드로에게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고 하였습니다(눅 22:32). 은혜를 받은 사람은 이전보다 더 큰일을 하게 되고 상상할 수 없는 축복의 열매를 증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회의주의자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다
오정호 목사
인간은 예외 없이 본성의 한계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고 거듭난 사람이라도 태생적인 한계 때문에 그침 없는 자기와의 싸움을 싸웁니다(롬 7:22-24). 그렇지만 성도가 자기의 한계를 알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투쟁을 시도하면 성령께서 힘을 실어주는 것입니다. 여기 빌립의 친구 나다나엘은 지금까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는 식의 주관적인 장벽에 갇혀 있어 예수님께 접근할 수 없었던 사람입니다. 그가 친구의 권유에 못 이겨 예수님께 나왔을 때 한순간 자기의 벽을 허물고 ‘참 이스라엘 사람’으로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1. 인간 세계의 한계가 있습니다.
인간은 자기의 머리털 하나도 희고 검게 할 수 없는 무능한 존재입니다(마 5:36). 세상을 사는 사람은 다 자기 힘으로 어찌 할 수 없는 한계점에 부딪치고 있습니다.
1. 외부적인 한계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최상의 행복을 누릴 수 있는 특권을 부여 받았습니다(창 1:26-28). 그렇지만 자기의 의사와 상관없이 여의치 못한 외부적인 사정 때문에 기본적인 생존권도 포기하고 살아가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오늘날 지구상에는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 같은 국가 간의 분쟁이나, 또는 오랜 기간 그침 없는 내전으로 포화 속에서 목숨을 지키기 힘든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곳에서는 전쟁보다 더 무서운 독재권력의 횡포로 자유와 권리를 유린당한 채 짐승보다 못한 삶을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똑같은 지구상에서도 자연적인 악조건 때문에 극심한 가난과 목마름에 허덕이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온갖 불합리한 요소를 안고 있으면서도 자기 힘으로 어찌 할 수 없는 한계에 좌절할 뿐입니다.
2. 신체적인 한계가 있습니다.
현대를 사는 사람들은 인간이 만들어 내는 첨단 문화의 이기를 누리면서 인간의 가능성이 끝이 없다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세계 올림픽에서 뛰어난 기량을 발휘하는 경기자들을 볼 때마다 모두들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었다고 찬사를 보냅니다. 상상을 초월하는 과학문명에 대하여 신(神)의 경지에까지 이른다고 경탄해 마지않습니다. 그렇지만 인간은 인간일 뿐 그 이상일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이 신체적 악조건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동양 사람들은 서양 사람에 비하여 체구가 작습니다.
피부 색깔을 자랑하는 백인들은 유연성과 순발력이 뛰어난 흑인들을 못 당합니다. 무엇보다 예측할 수 없는 질병과 사고의 위협에 노출된 상태로 모든 사람은 죽음에 대한 불안을 떨치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3. 사고(思考)와 인격의 한계가 있습니다.
영국의 경험주의 철학자 베이컨(Francis Bacon)은 그의 유명한 우상론(Idola)을 피력하면서 사람마다 자기중심의 사고와 개인의 편견, 언어, 권위, 전통과 같은 굴레에 갇혀 있다고 하였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사고의 한계와 고정관념의 벽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벽이 두꺼운 사람일수록 외부 세계에 접근하지 못합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적인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이방인들도 그들이 자랑하는 철학적 지식의 교만에 갇혀 십자가의 복음을 수용할 수 없었습니다(고전 1:22-23). 바울은 이들을 향해서 “너희 마음을 넓히라”고 하였습니다(고후 6:13). 누구나 다 자기 중심의 고정관념과 편견을 허물게 될 때 그리스도의 이상에 접근할 수 있습니다.
2. 신앙세계의 한계가 있습니다.
성경은 믿음의 신비성(神秘性)을 말합니다(마 13:11). 인간의 상식이나 과학적 지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도 믿음의 세계에서는 이를 가능하게 합니다(히 11:1). 그리스도인은 자기의 불완전성을 인정하고 그 한계를 뛰어넘기 위한 노력을 해야만 합니다.
1. 믿음의 한계입니다.
보통 때는 대단한 믿음을 가진 것처럼 말하던 사람도 결정적인 상황에 이르게 되면 자기의 벽에 걸려 넘어지곤 합니다. 결국 믿음의 한계가 거기까지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믿음을 가지도록 가르치셨습니다. 먹고 입고 사는(衣食住)문제에 허덕이는 사람들에게 새를 먹이시고 꽃을 입히시는 하나님의 보장을 믿으라고 하였습니다(마 6:30). 하나님의 존재하심과 그의 보장을 믿는 사람은 불가능을 모르는 사람입니다(막 9:23). 성경에 나오는 많은 사람들은 오직 믿음만으로 불의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고 칼날을 피하기도 하고 연약한 가운데서도 강하여지고 온갖 시험과 죽음을 이겨낸 경험이 있습니다(히 11:33-38). 믿음에 어떤 이유나 조건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그 사람의 한계입니다.
2. 순종의 한계입니다.
성경에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논할 때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액면 그대로 믿고 거기에 순종하였다는 것을 강조합니다(히 11:8). 건전한 믿음은 그의 삶을 통하여 실천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믿음을 아는 것과 고백하는 것으로 그치고 실천하는 데까지 미치지 못합니다. 말씀을 순종할 때 믿음의 능력이 행사되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따르지 못하고 마는 한계에 부딪치곤 합니다. 예수님을 따라 나선 부자 청년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네 소유를 가난한 자에게 나눠 주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는데 그 청년은 재물이 많으므로 근심하며 돌아갔습니다(마 19:20-22). 참 좋은 기회가 주어졌지만 그 사람에게는 신앙의 한계가 거기까지였기에 순종으로 옮길 수 없었던 것입니다.
3. 축복의 한계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무궁무진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구원을 받게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기인하지만 성도가 세상에서 누리게 되는 축복은 그 사람의 수용할 수 있는 용량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하늘나라에서 받게 되는 영광도 해와 달과 별과 별들의 영광이 있다고 했는데 이 역시 세상에서 행한 일과 정비례 하는 것입니다(고전 15:41). 그릇의 한계가 있는 사람은 그 용량 이상의 복을 수용하지 못합니다. 똑 같은 상황에서도 신앙의 용량에 따라서 받을 수도 있고 받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손에 잡은 장자의 축복을 놓쳐버린 에서처럼 그릇이 안 되는 사람은 축복의 현장에서도 이를 피해갑니다(창 25:34). 요셉처럼 큰 그릇이 되는 사람은 캄캄한 어둠 속에서 혜성처럼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창 50:20).
3. 참 이스라엘로 거듭나야 됩니다.
“이스라엘”은 축복의 대명사입니다(신 33:29). 옛날 선택받은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즐겨 쓰던 이름입니다. 사도 바울이 자기의 문벌과 신분을 자랑하면서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라고 한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빌 3:5).
1. 편견의 벽을 허물어야 됩니다.
대부분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민족주의적인 우월감에 사로잡혀서 외부 사람들과의 벽을 쌓고 살았습니다. 형식적인 율법에 사로잡혀
그 고정관념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나다나엘 역시 그런 사람입니다. 빌립이 찾아와서 율법이 소개한 메시야가 바로 나사렛 예수라고 하였을 때, 그는 첫말에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하고 일축하였습니다. 그렇던 나다나엘도 “와보라”고 하는 빌립의 권유에 못 이겨 결국 자기의 고집을 꺾고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향해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함이 없도다”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예수님의 말씀은 나다나엘로 하여금 이름뿐인 이스라엘에서 명실상부한 참 이스라엘로 거듭나게 하였습니다(창 32:25-28).
2. 예수님을 받아들여야 됩니다.
예수님께서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선언하실 때 나다나엘은 크게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향하여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하고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나다나엘은 즉각적으로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하고 신앙고백을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과정은 그가 성령으로 거듭난 사실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고린도후서 12:3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요 나의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요 1:12-13).
3. 신비로운 체험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일을 보리라”고 하였습니다. 이어서 또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고 하였습니다(51-52절). 이후부터 그가 성령에 사로잡히게 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나다나엘처럼 자기중심의 사람이 그리스도 중심의 사람으로 그 삶의 패턴을 바꾸게면 새로운 세계관이 열리게 됩니다. 능력 있는 사역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실패를 거듭한 베드로에게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고 하였습니다(눅 22:32). 은혜를 받은 사람은 이전보다 더 큰일을 하게 되고 상상할 수 없는 축복의 열매를 증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VIP(4) 나다니엘
이동원 목사
추석 절을 잘 지내셨는지요? 믿지 않는 가족들에게 전도의 기회도 가져 보셨는지 궁금합니다. 앞으로 두 주 후면 이웃 사랑 축제가 열립니다. 이 축제는 믿지 않는 우리의 이웃들에게 복음을 들려주고 예수를 믿을 수 있는 고귀한 기회를 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사실, 교회가 존재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교회가 그 일을 중단하면 존재의 의미를 상실하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우리 교회는 전도해도 이제 수용할 공간도 없지 않은가 고 반문하실 분이 계실지 모릅니다. 물론 그것은 우리 교회가 직면한 문제임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전도는 꼭 어떤 분을 우리 교회 교인을 만들기 위한 노력이 아닙니다. 전도 받은 분들이 예수만 믿을 수 있다면 어느 교회에 출석하느냐는 것은 그렇게 중요한 문제는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는 전도를 꼭 결과에 의해서만 평가할 필요도 없습니다. 복음 전도의 일차적 과제는 복음을 들을 기회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일단 복음을 들으면 복음의 씨가 그 마음에 뿌려 지는 것입니다. 결실은 당장이 아닌 얼마 후에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전해진 말씀은 결코 헛되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합니다. 바울 사도는 낙심치 아니하면 때가 이르면 반드시 거둘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복음에 관심이 없어 보이는 우리의 이웃들인 전도 대상자들, 곧 우리들의 VIP들에게 어떻게 접근하느냐는 것입니다. 이 질문에 답을 얻기 위해 예수님이 이 지상에 계실 때 그가 만나주신 한 VIP에게 초점을 맞추어 보고자 합니다. 그의 이름은 나다나엘로 되어 있습니다. 이름으로 미루어 그는 종교적 배경을 가진 사람으로 보입니다. 그의 이름의 뜻이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성경학자들은 그의 다른 이름이 공관복음서의 12제자 명단에 나오는 바돌로매 였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12제자의 명단에 바돌로매가 나오면 나다나엘은 나오지 않습니다. 공관 복음에는 바돌로매만 등장하고 요한 복음에는 나다나엘만 등장합니다. 그런데 바돌로매라는 이름이나 나다나엘이라는 이름은 반드시 빌립과 함께 등장합니다. 이런 이유들로 학자들은 바돌로매와 나다나엘이 동일 인물일 것으로 추정합니다. 바돌로매의 뜻은 ‘돌마이의 아들(바)’이라는 뜻입니다. 돌마이는 물론 그의 부친의 이름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흔히 사람들에게 돌마이의 아들로 불리워졌지만, 그의 정식 이름은 나다나엘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그의 친구였던 빌립에 의해 예수님께 인도되어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는 이 만남을 통해 한 사람의 이웃을 복음적으로 접근하는 예수님 자신의 효율적인 전도전략을 학습하고자 합니다. 자, 이제 오늘의 본문-예수님과 나다나엘의 만남의 사건을 통해서 우리가 배울 레슨은 무엇일까요?
1. 인간은 누구나 약점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다고 기록합니다. 그 말은 모든 사람이 저마다 피할 수 없는 약점을 갖고 인생을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약점에서 자유로운 인생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친구 네 사람이 만나 서로의 약점을 고백하기로 했습니다. 첫째 친구는 자기에게는 사실 거짓말을 고치지 못하는 약점을 아직도 갖고 있다고 고백합니다. 둘째 친구는 도벽의 습관을 고백합니다. 셋째는 성적인 약점을 고백합니다. 그런데 넷째 친구만이 가만히 있어서 “너는 통뼈냐? 너도 고백을 하라”고 다그쳤더니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미안하지만 내 약점은 다른 이들의 비밀을 알면 불고 다니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먼저 고백한 사람들이 큰 일 나지 않았습니까? 이야기의 초점은 약점에서 자유로운 인생이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웃들에게 예수님을 인도하고자 할 때에도 이런 약점들이 장애물로 작용하는 것들을 볼 수 있습니다.
본문에 나타난 나다나엘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그의 약점은 한마디로 말하면 편견입니다. 문화 평론가인 손드라 티더맨(Sondra Thiederman)박사는 “편견은 언제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것으로 특정한 개인이나 집단만이 지니는 특정한 성향이 아니라, 모든 선한 사람들이 갖고 있는 삶의 태도이다”라고 말합니다. 착하고 선한 사람도 편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나다나엘이 바로 그런 케이스였던 것입니다. 46절을 보십시오. “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수 있느냐” 그는 소위 오늘의 우리 식으로 말하면 지방색의 편견을 갖고 있었습니다. 편견은 설명만으로 해소되지 않습니다. 편견의 가장 효율적인 해소는 사실을 접하게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에 대한 편견도 단순한 설명만으로 해소를 기대하는 것은 순진한 발상일 것입니다. 먼저 예수님의 제자가 된 빌립은 나다나엘의 편견을 깨기 위해 어떤 전략을 사용했습니까? 46절의 마지막 대목을 읽어보십시오.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당신이 오해했다고 말합니까? 그 오해를 풀기 위한 반론을 제시했습니까? 아닙니다. 그의 전략은 단순하지만 직설적이었습니다. 뭐라고 했습니까? “와서 보라”(46절)입니다. 사실을 사실 그대로 경험해 보라는 것입니다. 당신이 직접 확인해 보라는 것입니다. 빌립은 이런 전략으로 나다나엘의 편견이라는 약점을 돌파하고자 한 것입니다. 나는 이것이 우리 지구촌 성도들이 다가오는 이웃 사랑 축제에서 사용할만한 바람직한 전략이라고 믿습니다. 기독교를 변명하려고 애쓰지 마십시오. 그냥 한번만 “와서 보십시오”라고 초청하십시오. 기도하고 믿음으로 초청하십시오.
윌로우 크릭 빌 하이블 목사님이 빌리 그래함 목사님 전도 집회가 어떻게 운영되고 있는지 알고 싶어 자원봉사를 한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가 보니까 무대 앞에 너무 빈 공간이 많아 시설 담당자에게 여기에 의자를 놓으면 1,000명 정도는 더 수용할 수 있지 않느냐고 했더니 그는 웃으면서 이런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 빈 공간에 빌리 목사님이 구원 초청을 할때 수천의 사람들이 이 곳으로 걸어 나와 결신할 것을 믿고 있습니다.” 이 대답을 듣고 그는 빌리 그래함 전도 대회가 수많은 영혼들을 결실하는 것이 바로 이들의 믿음 때문인 것을 실감했다고 고백합니다. 우리가 초청하는 이들이 결신할 것을 믿고 초대하십시오.
2. 인간은 누구나 강점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이웃들을 접촉할 때 단지 그들의 약점을 이해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마음을 여는 것은 상대의 강점을 이해하고 인정해 주는 일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비판받고 있다고 느낄 때 더욱 방어적이 됩니다. 그러나 인간은 자기를 이해하는 사람들에게 방어의 가면을 벗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나다나엘에게 사용하신 전략이었습니다. 그가 가진 편견에도 불구하고 그의 편견을 거침없이 말할 수 있는 정직함을 칭찬하신 것입니다. 47절입니다.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로다. 그 속에 간사함이 없도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한마디의 칭찬이 나다나엘로 그의 가드를 내리게 하고 그의 마음의 문을 열게 한 것입니다. 기독교를 비판하는 사람들과 방어를 위한 싸움을 시도하지 마십시오. 그들의 진정성을 칭찬해 보십시오. “선생님의 생각과 판단은 참 진지하시군요. 실제로 우리 기독교가 그런 문제를 갖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선생님의 비판은 선생님의 관심이라고 믿고 싶습니다. 그러면 이런 기회에 한번 복음을 직접 들어 보시도록 초청하고 싶군요”라고 말해 보십시오.
요즈음 유행한 베스트 셀러의 제목처럼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칭찬은 사실에 부합해야 합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나다나엘안에서 그런 칭찬받을 만한 강점을 보신 것입니다. 실로 나다나엘의 강점은 정직함이었습니다. 그의 안에 내재한 편견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을 숨기는 이중 플레이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적어도 자신의 감정에 정직하고자 했습니다. 이런 정직성이 예수님의 마음을 움직인 것입니다. 정신과 의사인 이무석씨가 지은 책 “30년만의 휴식”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중학교 1학년 쯤 되어 보이는 한 여학생이 시내버스에서 껌을 팔고 있었습니다. 이 여학생은 버스내 승객들에게 이런 말로 호소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저는 병든 어머니와 가난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학비를 벌기 위해 껌을 팔고 있습니다. 한 통에 300원입니다. 한 통씩만 사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여기까지는 늘 볼 수 있는 동정심을 이용하여 이익을 남기는 껌팔이 소녀였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한 가지 사건이 일어납니다. 한 신사가 이 소녀에게 1,000원 짜리 지폐를 내밀자 소녀는 700원을 거슬러 주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신사는 “돈을 거슬러 주는 것을 보니 넌 정직하구나. 나머지는 네가 가지라”고 했답니다. 이 때 소녀는 그 돈을 정중히 거절하며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선생님, 저는 지금 구걸하는 것이 아닙니다. 전 학비를 벌기 위해 장사를 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그 순간 버스안의 분위기는 숙연해졌고, 여기저기서 껌을 사겠다고 소녀를 불렀습니다. 껌은 순식간에 다 팔렸다고 합니다. 이 순간 승객들을 움직인 힘-그것은 정직이었습니다. 이런 정직함과 진지함으로 이웃들의 강점을 칭찬하며 접근해 보십시오. 전도의 무한한 기회가 열려 올 것입니다.
3. 인간은 누구나 예수를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전도는 전도 대상자들의 마음을 열고 그들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데서 끝나지 않으셨습니다. 한 영혼이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누구인가를 참으로 알고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시오 구주이심을 믿지 않는 한 아무도 누구도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죄인인 사람은 사람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구주는 하나님이셔야 합니다. 이 중요한 구원의 강을 건너도록 예수님은 당신의 VIP 인 나다나엘에게 당신이 참으로 누구이신가를 계시하십니다. 48절을 보십시오.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 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무슨 말입니까? “너에게 전도를 한 것은 빌립이지만 빌립이 너에게 전도하기 전 조금 전까지 네가 무화과 나무 아래서 무엇을 네가 기도하고 있었는지 무엇을 네가 생각하고 있었는지 무엇을 네가 고민하고 있었는지--나는 다 알고 있어”라고 하신 것입니다. 49절의 나다나엘의 반응을 주목하십시오.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그렇습니다. 마침내 그는 예수님이 평범한 인생 이상의 분, 존경할만한 스승 이상의 분, 나의 모든 생각과 마음을 아시는 전지하신 분-그렇다면 그는 우리 이스라엘이 기다려 온 하나님의 아들 곧 메시야, 구주라는 인식에 도달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거기서 끝나시지 않고 좀더 명확하게 그분이 누구이신가를 나다나엘에게 알게 하실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의 확실한 구원을 위해서 말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어지는 50절에서 나다나엘에게 무화과 나무아래 있던 너를 내가 알고 있었다는 것으로 놀라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보다 네가 더 놀라울 일, 더 중요한 일, 더 위대한 일을 보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십니다. 51절입니다. “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위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잘 아시는 대로 이는 구약 성경에서 야곱이 벧엘의 들판에서 밤에 본 환상 곧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사다리에서 천사가 오르락내리락 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성경학자들은 이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사다리야 말로 바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유일한 구원의 중보자로 오실 메시아의 예언적 환상이라고 지적합니다. 바울 사도는 딤전2:5에서 “하나님은 한분이시오 또 하나님과 사람사이에 중보도 한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고 선언하시지 않았습니까!
본래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의 진지한 구도자들이 인생을 사색하기 위해 찾는 곳이었습니다. 그는 아마도 그 무화과나무 그늘 아래서 오실 메시아를 생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의 구도의 마음을 아시고 주께서는 빌립을 그에게 보내신 것입니다. 이 가을 낙엽이 지는 거리를 바라보며 이 시대의 나다나엘들이 이 땅에서도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예수가 하늘의 사다리를 타고 이 땅에 오신 메시아라고 전해 주시겠습니까? 여러분이 먼저 그 메시아를 만났다고 전해 주시겠습니까? 그들도 이 메시아이신 예수를 만나야 한다고 전해 주시겠습니까? 그분, 오직 예수만이 그들이 인생의 해답이라고 희망이라고 구원이라고 전해 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비록 그들이 무신론자들이고 안티 기독교인이라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19세기 말에 토마스 헉슬리라는 무신론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다윈의 진화론을 옹호한 과학자였고, 후에 자신의 입장을 무신론에서 불가지론으로 바꾼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그가 한 무리의 명사들과 시골을 여행하다가 주일이 되어 대부분의 사람들이 교회 갈 준비를 하는 것을 보고 갑자기 헉슬리는 한 사람에게 예수가 도대체 누구이기에 여행길에도 그를 예배해야 하느냐고 묻습니다. 그의 눈에 있는 공허함을 발견한 이 그리스도인은 헉슬리 곁에 머물러 그의 이야기를 다른 이들이 교회에 다녀오기 까지 들어준 후에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나는 당신 같은 학자에게 논쟁을 통해 그리스도를 증명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이 당신을 떠나도 당신 곁에 머물 수 있는 유일한 친구임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것이 내가 오늘 당신 곁에 친구로서 이제까지 머물기를 원했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이 말에 그는 눈물을 글썽이며 자신의 오른 손을 내밀며 “그리스도가 당신 같은 친구라면 나도 그를 믿고 싶소”라고 고백했다고 합니다. 무신론자의 영혼에도 그리스도에 대한 기다림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 가을 복음의 이야기를 들려 줄 당신의 VIP는 어디에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