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23일 아버지 상수(上壽)를 맞아 기념앨범을 펴내드린 후, 아버지 아래 총생들만 모여 조촐한 잔치를 해드렸다. 현장의 이런저런 사진들로 별책부록을 만들면서, 『아버지-100년의 봄, 100장의 기억』 감사앨범에 빠트린 기억 몇 장을 덧붙인다. 편집자로서 그 소회를 글로 정리하려다 발견한 게, 2007년 6월에 아버지 팔순과 부모님 회혼기념으로 펴낸 가족문집 『대숲 바람소리』에 실린 <아버지 아버지 우리 아버지>란 '시 아닌 시'였다. ‘아버지의 독백’이 이어진다.>
아버지 아버지 우리 아버지
아버지, 새벽 3시 고향집 마당에 서다.
등줄기가 써늘하다.
여덟 살 때 집(장수군 산서면 백운리 새터)
뒤안의 대숲에서 서걱이던 바람소리가 들린다.
서걱이는 대숲 바람소리가 아련히 들려온다.
팔십 평생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간다.
홧병으로 젊어 백태가 끼는 바람에
영영 눈을 잃은 할아버지(定자 宣자)는
<동국사략>을 외우게 했다.
“유인(唯人)이 천지만물(天地萬物間)에 최귀(最貴)하니…”
그 할아버지, 환갑에 설흔하나 외아들(亨자 友자) 참척을 당했다.
곡기 끊은 지 5개월만에 5대 독자 아들 뒤를 따랐다.
고개실같은 논 다섯 마지기를 나에게 물려주다.
아버지는 한량이셨던 모양이다.
당시 흔치 않은 양복을 입고 찍은 멋쟁이 사진이 한 장 남아있다.
야매(무허가) 치과의사였다고 한다.
당신이 직접 해박은 금치아를 60년만에 이장하면서 처음 봤다.
누가 불법영업한다고 신고하면 며칠씩 콩밥을 드셨다고 한다.
다섯 살 때인가, 자전거에 태우고 학교(산서초등학교) 운동 활동사진을 보여줬다.
“저게 ‘또 역(亦)’자다”알려주던 그 목소리, 그 용모 어렴풋이 기억난다.
맹일 할아버지, 부담(책 담는 종이상자)에
천자문, 명심보감 등 기초 한문교재와 문방사우를 넣고 팔러 다니셨다.
요즘으로치면 이동서점이자 문방구였을 것이다.
돌아가시던 날 “세철(나의 아명)아, 세철아”
손자 이름만 애타게 부르며 찾았다고 한다.
28살 어머니는 부엌에서 옷고름만 깨물었다.
나는 고샅에서 대나무가지로 말타는 시늉을 하며 놀고 있었다.
어머니는 손자에게 무슨 말을 해주려느냐고 묻지 못한 것을 오래오래 후회했단다.
그때 기어다니던 두 살 남동생(秉자 壽자. 1933년생)이 있었다.
어머니와 외삼촌 사랑방(임실군 오수면 봉천리 냉천)에 세 식구 기탁했다.
그때부터 고사리손으로 안해 본 일이 없었다.
재너머 한실, 행기목재, 여시박국, 뒷산을 훑어 나무를 해 팔아야 했다.
밤에는 어머니와 가마니를 짰다.
나이 열다섯도 안돼 튼튼한 농삿꾼이 되었다.
학교라야 공청(公廳.마을회관)에 개설된 분교 2년과
둔남공립초등학교(현 오수초등학교) 3년이 전부였다.
전과목 수(秀)였으나, 상급학교 진학은 꿈도 못꾸었다.
먹을 게 없어 뱃속이 늘 헛헛했다.
어머니와 함께 살림을 늘려야 했고, 동생을 가르쳐야 했다.
그때 일생일대 결심을 했다.
“재가하지 않은 고마운 어머니와 함께 이 집안을 일으켜 세우리라.
어미니를 위해 살리라”
한창 클 때 먹지 못해 키가 작은 것일까.
신발은커녕 짚신조차 없어 오수까지 십리 길을 맨발로 다니기도 했다.
요즘 세상같이 하얀 종이의 노트가 흔전만전할까.
삽 등에 숯으로 글자를 썼다.
이렇게 물자가 넘치는 세상이 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주경야독이나 하면 얼마나 좋았을까.
가도가도 끝이 없는 주경야경(晝耕夜耕)의 연속이었다.
일제는 놋그릇조차 빼앗아가는 등 태평양전쟁 말기 발악을 하고 있었다.
해방 직전 공군조종사 시험에 합격했다.
홀어머니를 두고 객지로 떠날 수는 도저히 없었다.
그때 입교했더라면 공군 창설의 주역이 되었을까.
일제 가미가제(신풍) 희생양이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쨌거나 나의 인생은 180도 바뀌게 진행됐을 것이다.
임실 옥정호 확장공사에도 끌려다녔다. 하루 주먹밥 한 개로 배를 채웠다.
외삼촌 행랑을 벗어나 오두막집 한 채를 마련했다.
나이 스물에 결혼을 하고 스물 둘(1949년)에 큰아들을 보았다.
민족의 비극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잠시 경찰이 되어 빨치산들과 성수산(聖壽山) 전투에서 죽다 살아났다.
내 친구는 인민군을 쫓는 국군의 총에 이유없이 죽어야 했다.
꽃같은 새각시와 뱃속 아이를 둔 채.
1950, 60년대 나의 장년은 그렇게 흘러갔다.
아버지쪽 친척이 하나도 없는 게 한이 돼 아들 다섯만 낳으려 했다.
열두 살 때 고모부가 진외가집(구례 토지면 간전리)에 데리고 갔다.
여기가 네 할머니 묘, 여기가 네 상할아버지 묘,
어른들 생신과 돌아가신 날짜를 알려줘
연필에 침을 묻혀가며 손바닥보다 작은 작기장에 적어놓았다.
그 작기장(몇 쪽도 안되는 종이수첩) 지금도 갖고 있다.
넷째가 ‘가보 1호’라고 말해줘 기뻤다.
삼십 리도 더 떨어진 고개를 두 개나 넘어야 하는 성묫길
30년 동안 1년에 두 차례 혼자 다녔다.
허기가 져 산길 임자 없는 감나무 홍시로 배를 채웠다.
당연히 해야 할 일로 알았고,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려야 했다.
백운리 아버지, 할아버지 묘플 진안 마이산록에 옮겨 드렸다.
1992년에야 고향 뒷산에 가족묘지를 별도로 조성했다.
어머니 유해는 5년만에 육탈이 돼 있었다.
중학교 다니는 큰아들이 우리 뿌리가 어디냐고 물었다.
멸실된 가문엔 족보조차 없었다.
일제강점기 구례군수가 발행해준 제적등본에
본관이 초계(草溪)에 4대조부모 성명까지 기록돼 있었다.
구례군에서 상권을 쥘락펼락했다는 말을 고모부에게 들었다.
전남 초계최씨대종중을 찾아 제적등본을 내밀고
뿌리를 찾아달라며 일가 족보를 밤새 뒤졌다.
그 결과, 구례에서 맥이 끊긴 선조 아래 대(代)를 이었다.
다시 찾은 이름이 초계최씨 판관공파 28대손 최세휴(崔世休)였다.
진주 강씨 아내(강기순)는 타고난 일꾼이었다.
손발이 척척 맞았다. 백말 띠, 무엇보다 건강해서 좋았다.
한때는 아이들 키우고 가르치면서도 논이 30마지기를 웃돌았다.
양주(兩主)가 머슴 서너 명 몫은 너끈히 해치웠다.
자식들 손톱 밑에 흙 묻히지 않게 하리라.
회전의자 돌리는 사람으로 만드리라.
등록금 마련할 때마다 신이 났다.
망태에 돼지새끼 한두 마리 싣고 자전거로 오수장에 내다팔았다.
등록금은 밑 빠진 독, 대도 대도 끝이 없었다.
어디 한두 놈이어야지, 돈 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차고 나섰다.
누에도 치고 담배도 팔고 방앗간도 운영하고
깽변(강변) 논을 사 몇날 며칠 돌 골라내느라 허리가 휘었다.
장포들 논 아홉 마지기는 옹골찬 고래실이었다.
70년대초 탈농 이농이 시작될 때였다.
동네일(이장)을 17년이나 봤다.
경지정리 진두지휘하느라 목이 쉬고 성대가 상했다.
초가집도 없애고 마을길도 넓히고 새마을운동은 가차없이 진행됐다.
비료와 농약이 무차별적으로 살포되기 시작했다.
반듯반듯한 논, 농사 짓기는 몇 천 배 편해졌다.
나이 36에 애가 4남3녀 일곱이었다.
아들 넷을 짜란히 낳고, 딸이 주루룩 셋.
자식들을 키우는 재미를 우리는 잘 모른다.
어머니는 애들의 어머니 노릇까지 도맡았다.
우리는 그저 소나 말처럼 땅바닥에 붙어 있어야만 했다.
달빛 받으며 노적가리 쌓는 일은 재미에 힘든 줄도 몰랐다.
다행히 아이들은 큰 말썽없이 잘 자라줬다.
국립대학에 착착 들어가고 장학금도 타고
시국데모로 대학 휴강이 잦을 때 일손도 많이 도와줬다.
가방을 팽개치고 농삿일을 돕던 둘째는 쟁기질도 잘 했다.
상고를 나와 회사에 취직시키려던 셋째는
짧은 재수 끝에 용케도 상대에 들어갔다.
문학가 흉내를 내던 넷째가 일을 저질렀다.
사립대, 그것도 서울로 편입학을 했다.
어려운 경쟁을 뚫고 합격한 것은 백 번 장한 일이나
30만도 넘는 등록금 장만은 어떻게 하나, 앞이 캄캄했다.
큰 딸은 제 풀로 여상을 나와 일찌감치 밥벌이에 나섰다.
대학의 꿈을 지레 접었지만 가슴이 아팠다.
둘째 딸도 생활전선에 뛰어들었지만 꿈이 많았다.
대학 합격증을 2년째 갖고 와 도와달라는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아프다.
막내가 드디어 일곱 명 중에 처음으로
자식들 선생님 되는 게 소원이라던 아내의 바람을 풀어줬다.
교육대학을 나와 초등학교 교사가 된 것이다.
남들은 우리집 자식농사에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해댔다.
아들 넷을 차례차례 전주역에서 군대에 보냈다.
모두 다 성한 몸으로 국방의 의무를 마치고 돌아왔다.
우리집에 흉한 일은 하나도 일어나지 않았다.
취직도 저희들이 다 알아서 착착 해주었다.
결혼을 시키고 제금(분가)을 내주는 것은 또다른 기쁨이었다.
평생 마이산 천지탑에 공양만 드리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1986년 음 4월 26일).
하늘이 무너질 일이었다. 담벼락에 넝쿨장미가 흐드러지게 피던 날이었다.
행랑채에 영정을 모시고 1년상을 치러드렸다.
출입시 반드시 곡(告)하고 하루 두 번 상식을 올렸다.
임실향교 장의도 지냈다. 자식들이 이런 예법을 배웠으면 싶었다.
호남향교 38곳에 어머니 효열비 건립관련 통문을 돌렸다.
가문의 영광, 성균관장이 승인하는 찬양문을 내려줬다.
90년 동네 어귀에 ‘효열부진양하씨채녀지려’효열비를 세웠다.
칙힌 아들들이 몇 년 동안 돈을 모아 보태주었다.
특용작물이 돈 될 거란 생각으로 영지버섯을 재배했다.
한두 해를 애태우더니 이쪽저쪽에서 싹이 돋았다.
손해볼 일은 하나도 생기기 않았다.
자식들이 앞장서 판로를 개척해 주었다.
매실나무를 산기슭에 심기 시작했다.
감나무 접붙이기는 일도 아니었다.
거름하랴, 밭고랑 타랴, 하루도 쉴 틈이 없었다.
나이 일흔 중반에 산판을 하여 옻나무를 심었다.
사람들은 노인이 무슨 그런 힘든 일을 하느냐고 말렸다.
날마다 농약통을 메고 까끔을 올라다니며
칡과 아카시아 뿌리에 제초제를 발랐다.
검실검실 옻나무 잎이 짙어가는 게 보기에 심히 좋았다.
시한(겨울)에 옻닭 두 마리에 양주(兩主) 감기 한번 걸리지 않았다.
내가 죽어도 나무는 남을 것이다. 돈도 될 것이다.
6월초엔 매실매실한 매실이 쏟아진다.
말이 2500kg이지 늙은 삭신으로 감당할 수도 없다.
이날 평생 일이 무서워본 적이 없었는데, 나도 이젠 늙었다.
농촌에선 목돈 되는 것은 이것뿐이다.
6월말에 복분자가 지천이다.
큰딸이 광양에서 현지 수송, 150kg을 팔아줬다.
10월 중순에 대봉시, 수시감이 또 풍년이다.
이앙기, 콤바인, 요즘 농사짓기는 식은죽먹기다.
예전엔 애벌, 두 벌, 김매는 것도 거판스러웠다.
작년에 취나물을 뜯어 15만원이나 했다.
은행도 털어 팔아 10여만원, 호도도 몇 kg가 된다.
이리 봐도 돈, 저리 봐도 돈,
연봉을 계산해보니 3천만원도 넘는다.
죽을 때까지 자식들에게 손 안벌리겠다. 현금 1억 예치.
그렇게 악착같이 살았다.
일곱 자식들, 쌀 한 톨 팔지 않게 뒷바라지했다.
지 에미는 에미대로 부식 챙기기에 이골이 났다.
고추장, 된장, 간장은 기본이고
마늘, 생강, 무, 김장김치, 찬지름, 들지름, 고사리, 산취,
당근, 양파, 호박고구마, 하다못해 실가리까지 택배다.
무슨 대가를 바란 것은 아니었으나, 안알아주면 때론 섭섭했다.
자식들은 소년등과, 판검사 소원 하나 들어주지 못했다.
아직도 장남이 군수가 되었으면 좋겠다. 국회의원인들 되지 못하랴.
1번부터 15번까지 크는 손자들에 기대를 걸었다.
머리를 물들이고, 사내놈들이 귀걸이를 하고,
휴대전화나 인터넷이 없으면 몸살을 댔다.
세상은 어차피 이렇게 변한 것이다.
임실 버스정류장 낙서판에서 보았다.
“세사금삼척 생애부일배”(世事琴三尺 生涯復一杯)
세상일은 거문고 3척에 불과하고, 한평생은 술 한잔 더 부은 것같다.
어느덧 결혼환갑, 회혼이 됐다.
쌍가락지 하나 끼어주지 못하고 평생 부려먹기만 한 노처가 안쓰러웠다.
익산보석박물관 하루 나들이 권하니 단호히 싫다고 한다.
이를 눈치챈 딸내미들이 비싼 외식을 시켜주고
백화점에서 반지를 맞춰줬다.
지 에미는 목걸이까지 선물받고 입이 함박만해졌다.
오죽하면 손가락 두 개를 빨아 지집애동생 터 팔았다며
넷째 아들을 칭찬했을까.
행복은 이런 것인데 싶다.
참으로 많은 일이 했다.
또 따지고 보면 아무 일도 안한 것같은 인생이다.
가끔씩 신새벽 마당에 서면
별똥별이 사정없이 빠르게 지나간다.
이렇게 나의 인생도 한 점이 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지리라.
하지만 말할 수 있다.
10대때의 결심, 나는 지키려고 열심히 살았고, 그 약속 다 지켰다.
가훈 세 가지를 환갑때(1987년) 자식들에게 써줬다.
육친가화(六親家和) 근면검소(勤勉儉素) 초지일관(初志一貫)
얼마나 잘 지키며 살 것인지, 이제 자식들 몫이리라.
대숲 바람소리가 귀에 연신 들려오는 것은
아마도 여우가 제 난 곳을 돌아다본다는 수구초심(首丘初心) 때문일까.
아버지는 거대한 뿌리였다.
농자치천하지대본.
이 땅에 일등 프로농사꾼이 되어
땀과 피와 눈물이 무엇인지를 온몸으로 보여주셨다.
어제에 머무르지 않고
오늘을 살며
내일을 꿈꾸고 계신다.
잔가지, 실뿌리에도 미치지 못하는 총생들은 부끄러울 따름이다.
어찌 아버지 생각의 끄트머리 일단(一端)이라고 글로 끄집아낼 수 있으리.
그저 언저리에라도 닿기를 바랄 뿐이다.
아버지는 지금도 기록을 계속 고치고 계신다.
당신의 아버지 향년 31세, 할아버지 62세, 어머니 79세를
훌쩍 넘기고 81세로 여전히 다혈질 청년의 기상이다.
쌀 40kg 한 푸대는 훌쩍훌쩍 던지신다.
부디 어머니와 백년해로하시기를.
2007년 2월 27일 불초 넷째 삼가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