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4139
2월19일[연중 제6주간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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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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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2Ed-0gvfC8E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류지인 야고보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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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하느님은 우리를 구조해주시는 분이 아니라 구원해주시는 분입니다!>
다가오는 사순시기, 예수님께서 몸소 겪으셨던 수난과 십자가 죽음의 신비에 대한 깊이 있는 묵상으로 우리를 안내할 따끈따끈한 영적 독서책이 막 도착했습니다. 제목이 특별합니다. ‘나를 구하시지 않는 하느님’(로널드 롤 하이저 著, 생활성서)입니다.
로널드 롤 하이저 신부님은 오블라티 선교 수도회 소속이시며 헨리 나우웬 신부님 이후 대표적인 가톨릭 영성 작가로 손꼽히고 있는 영성가이십니다.
고통과 십자가에 대한 저자의 성숙하고도 친절한 안내가 돋보입니다. 하느님께서 예수님의 고통을 면제하시지 않은 것처럼, 예수님도 우리의 고통을 면제해주시지 않는답니다. 너무나 신박한 표현들 앞에 개인적으로 깜짝 놀랐습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구조해주시는 하느님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굴욕과 고통, 죽음에서 우리를 구해 주시려 개입하시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일이 벌어진 후에 굴욕, 고통, 죽음에서 우리를 구원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병에 대한 면역을 만들어 주시고 죽음을 피하게 해주신다고 약속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고 의롭게 하시며 고통을 감내할 힘과 영원한 생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일은 우리 삶의 마지막에 일어날 일들입니다.
우리는 삶의 여정에서 다른 모든 이가 겪는 굴욕과 고통, 그리고 죽음을 똑같이 겪을 것입니다. 십자가와 예수님의 부활은 구조하시는 하느님 아니라 구원하시는 하느님을 보여줍니다.”
부끄럽게도 우리 한국 교회 안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입니다. 예수님 인류 구원 사업의 정점인 골고타 언덕으로 올라가는 고통스런 여정은 생략하고 싶습니다. 그저 현세의 지속적인 축복과 끝도 없는 치유, 나와 내 가족만의 안녕만을 갈구하는 미성숙한 신앙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가슴 아픈 사회 현실은 외면한 채 고상함과 경건함, 신비함과 달콤함만을 추구하는 ‘값싼 신앙’의 천박한 그림자가 남아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고통과 십자가는 외면하고, 승승장구와 만수무강만 추구하는 싸구려 신앙을 거부해야겠습니다. 고통과 십자가 없는 구원은 기대조차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우리 가톨릭 교회의 분위기나 가르침은 조금 밋밋해보입니다. 가톨릭 교리는 지극히 상식적이고 통상적이어서 그렇습니다. 이성적이고 평범한 것이어서 그렇습니다. 그런데 사실 보편적이고 인간적인 것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 모릅니다.
우리 가톨릭교회에서는 고통스럽고 부당한 현실, 단박에 뒤집힐 것이라고 외치지 않습니다. 우리 눈앞에 신천지가 나타날 것이라고 사기 치지 않습니다. 지금 겪고 있는 이 끔찍한 병고 즉시 치유시켜 주겠노라고 과장하지 않습니다. 목돈을 갖고 오라고 협박하지 않습니다.
대신 우리 가톨릭교회는 고통스럽고 부당한 현실 앞에서도 너그러운 마음을 지니자고 초대합니다. 기도 속에 주님의 뜻을 찾아보자고 안내합니다. 호의적이지 않은 이 현실, 넓은 마음으로 받아들이자고 가르칩니다. 천천히 가자고, 인간의 때가 아니라 하느님의 때를 기다리자고 권고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눈먼 이를 치유하십니다. 그 과정이 참으로 놀랍습니다. 그를 군중 사이에서 따로 불러내십니다. 세상 다정하게 그의 손을 잡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십니다. 그리고 이런저런 접촉과 함께 그의 장애를 풀어주십니다. 그의 두 눈에 침을 바르시고, 손을 얹으십니다. 그의 머리 위에 손을 펼쳐 안수를 해주십니다. “무엇이 보이느냐?” 등 자상하게 이것저것 물어봐 주십니다.
치유받은 사람입장에서 묵상해보니 얼마나 은혜롭고 축복된 순간이었는지. 놀랍게도 주님께서 나를 선택하셨습니다. 굳이 그렇게 하지 않으셔도 될 일인데, 그분께서 내 손을 잡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가십니다. 가는 길에 이것 저것 물어봐 주십니다. 이름이 뭐냐? 어디 사는가?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는지? 그간 살아오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예수님의 따뜻함과 자상함에 그의 눈에서는 쉼 없이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예수님과 손을 잡고 마을 밖으로 걸어가는 그 짧은 순간, 이미 그는 모든 것을 다 얻었습니다. 깨달았고, 치유 받았습니다. 구원받았고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육체의 치유는 사실 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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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내가 속한 공동체의 시력이 나의 시력을 결정한다>
박지성 선수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뛰고 있을 때 라이언 긱스라는 전설적인 공격수가 있었습니다. 전성기 때는 그를 막을 수 있는 선수가 거의 없었습니다.
박지성 선수도 한국 대표팀에 한 명만 데려오라면 누구를 데려오고 싶으냐는 질문에 라이언 긱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긱스는 월드컵에서 뛰는 것을 한 번도 볼 수 없었습니다. 그의 조국 웨일스가 월드컵 예선을 단 한 번도 통과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축구는 아무리 혼자 잘 해도 나머지 10명의 평균을 넘을 수 없습니다.
오는 복음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믿음이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가를 잘 보여줍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눈먼 이를 치유해주시는 사건과 장소의 이동이 겹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눈먼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오자 예수님께서는 “그 눈먼 이의 손을 잡아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셔서” 치유해주십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저 마을로는 들어가지 마라.”하고 말씀하십니다. 분명 눈의 치유와 소경이 머무는 장소와 연관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을은 하나의 공동체입니다. 예수님도 공동체를 이루셨습니다. 교회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공동체에 머물러야 바로 볼 수 있고, 또 시력을 온전히 유지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우리가 선택하여 속한 가톨릭교회는 에덴동산에 있었던 ‘생명나무’를 예수 그리스도로 봅니다.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보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죄를 범한 아담과 하와가 생명나무를 먹어 영원히 살게 해서는 안 되겠다고 그들을 에덴동산 밖으로 쫓아내십니다.
“자, 사람이 선과 악을 알아 우리 가운데 하나처럼 되었으니, 이제 그가 손을 내밀어 생명나무 열매까지 따 먹고 영원히 살게 되어서는 안 되지.”(창세 3,22)
그렇다면 에덴동산의 생명나무는 영원히 살게 하는 양식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영원히 살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당신이 곧 생명나무임을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사람을 나무로 볼 수 없다면 성탄트리를 보면서도 그것이 예수님임을 알아볼 수 없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소경의 첫 번째 눈을 띄워주시는 것은 바로 이 상징을 볼 수 있는 영적인 눈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성령의 힘이 필요한데 그의 두 눈에 침을 바르는 행위나 그에게 안수하시는 행위가 다 성령을 주시는 상징적 표현입니다.
그러자 그는 눈이 밝아져 무엇이 보이느냐고 물어보시는 예수님께 “사람들이 보입니다. 그런데 걸어다니는 나무처럼 보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가톨릭교회는 전통적으로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성탄절에 이 생명나무를 성탄트리로 장식하며 우리가 이 상징을 볼 수 있는 시력을 가졌음을 입증합니다.
예로부터 성탄트리 맨 위에 별을 달아 다윗의 별인 그리스도를 상징했고, 불을 밝혀 빛으로 오신 예수님임을 보여주었으며, 둥그런 밀떡을 달아 이 나무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임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런데 만약 그렇게 영적인 눈을 뜨게 된 사람이 죄의 동네로 들어가면 어떻게 될까요? 어떤 공동체에 속하던 그 속한 사람은 그 공동체의 시력을 물려받게 되어있습니다.
만약 개신교라는 공동체에 속해있다면 성탄트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 성체와 성혈로 볼 수 있을까요? 그 공동체는 성체성혈에 대한 믿음이 없기 때문에 그 공동체에 속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지금 가졌던 믿음의 눈을 다시 잃게 됩니다. 그 영적인 시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만한 믿음이 있는 공동체에 머물러야 합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 부근에는 레드우드라는 공원이 있습니다. 심한 더위와 가뭄 때문에 아무것도 살 수 없을 것 같은 이 사막에 어떻게 수령이 2,3천년쯤 되며, 높이가 100m를 넘고 둘레도 8-9m나 되는 큰 참나무 숲이 형성될 수 있었던 것일까요?
그것은 이 덩치 큰 나무들이 깊이 뿌리를 박고 그 뿌리로 다른 나무들과 서로서로를 연결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공동체란 이와 같습니다. 서로서로 연결되어 그 공동체를 유지시키는 각자의 믿음이 있습니다. 혼자 새로운 믿음의 세계로 나아가려면 그 공동체를 떠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 공동체에 머물면 그 공동체의 평균정도는 자랄 수 있습니다.
한 오케스트라에 속해있으며 혼자 다른 곡을 연주할 수는 없습니다. 그 공동체에 속하면 다른 믿음엔 다다를 수 없습니다. 각 공동체가 제공하는 시력의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믿음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그 공동체에서 벗어난다는 뜻과 같습니다.
내가 속한 공동체의 시력, 내가 속한 공동체의 믿음이 결국 나의 영적인 시력을 결정함을 잊지 맙시다. 예수님께서는 영적인 눈의 치유와 그가 속한 공동체의 변화를 함께 이끄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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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지난 설날에 반가운 메일을 받았습니다. 잠시 메일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찬미 예수님! 안녕하세요. 신부님. 육군 장교로서의 직업군인 생활을 정리하고 2018년 신학교에 입학한 게 엊그제 같은데 제가 다음 주 2025년 2월 6일 목요일 오후 2시, 명동성당에서 부제 서품을 받게 되었습니다. 제가 신학교에 입학하기 전 성소에 대한 고민을 지니고 있을 때, 성소 국장 신부님께서 성소국 홈페이지에 올려주는 오늘의 묵상 말씀이 직업군인으로서의 군 복무 생활을 그리스도인으로서 기쁘게 생활하는데 큰 도움이 되곤 하였습니다. 성소국 홈페이지에 상담 글을 남기면 답변도 주시며 휴가 내어 종종 성소국에 방문하면 차 한 잔 주시면서 상담해 주시던 국장 신부님, 그리고 예비신학교에서도 함께 용기에 불어 넣어 주시던 가브리엘 신부님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그때를 생각하면 제 인생에서 그리스도를 전해주심과 동시에 거룩한 부르심에 대한 내비게이션의 역할을 해주셨던 신부님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이제 곧 부제 서품을 받게 되면 성직자가 되는데 더욱 기쁜 마음으로 직무에 충실하고, 사제직을 향해 더욱 기쁘게 나아가겠습니다. 신부님께서 지금 미국 댈러스 한인 성당에서 사목하시는 줄로 알고 있습니다. 먼 곳에서 늘 건강과 기쁨, 은총 가득해지시길 기도드리며 저도 더욱 기쁘게 정진하고 있겠습니다. 한국은 설날이네요! 2025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부족한 제가 젊은 군인에게는 ‘마른 땅’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으로 이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느님을 닮은 사람을 창조하셔서 이 세상을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컴퓨터에 바이러스가 들어오면 작동이 잘되지 않듯이 하느님을 닮은 사람에게도 ‘사탄’이라는 바이러스가 들어왔습니다. 그 바이러스는 하느님을 닮은 사람의 마음을 병들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하느님의 뜻을 저버리고, 전쟁과 폭력으로 하느님이 창조한 세상을 파괴하고, 타락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물의 심판’으로 병든 세상을, 타락한 세상을 다시 회복시키려 하셨습니다.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도록 하셨고 물의 심판이 끝난 후에 하느님께서는 노아에게 새로운 세상을 맡겨 주셨습니다. 40일 동안 방주에 있던 노아는 넓은 세상이 그리웠습니다. 40일이 지난 후에 노아는 방주의 뚜껑을 열고 까마귀를 날려 보냈습니다. 까마귀는 물밖에 없는 곳을 한참이나 날다가 돌아왔습니다. 노아는 이번에는 비둘기를 날려 보냈습니다. 비둘기는 올리브 잎을 하나 가지고 왔습니다. 노아는 이제 물이 빠지고 땅이 조금씩 드러난 것을 알았습니다. 노아는 다시 비둘기를 날려 보냈고, 비둘기는 이제 마른 땅에 머물며 배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비둘기에게 마른 땅은 새로운 삶의 보금자리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심판하는 방법을 포기하셨습니다. 인간의 자유의지를 박탈하지도 않으셨습니다. 대신에 하느님께서는 새로운 방법을 찾으셨습니다. 그것은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시는 것입니다. 외아들은 하느님 나라에 대한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의로움과 하느님의 거룩함과 하느님의 뜻이 드러나는 세상을 말씀하셨습니다. 전쟁, 폭력, 정복으로 이루어지는 평화가 아닌 나눔, 희생, 사랑으로 이루어지는 참된 평화를 말씀하셨습니다. 성공, 명예, 권력으로 이루어지는 행복이 아닌 자비, 인내, 희생으로 이루어지는 행복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이미 하느님의 나라를 체험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밀과 가라지’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인간의 죄와 인간의 잘못 때문에 세상을 심판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가라지를 뽑으려다가 밀을 뽑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밀과 가라지는 품종이 다른 것이 아닙니다. 지금은 가라지의 모습일지라도 뉘우치고 회개하면 밀이 될 수 있습니다. 지금은 밀의 모습일지라도 악의 유혹에 빠지면 가라지가 될 수 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옹기장이와 진흙’의 비유를 이야기합니다. 옹기장이 손에 있는 진흙은 무엇이 될지 모릅니다. 다만 옹기장이의 뜻에 따라서 화병도 되고, 그릇도 됩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화병이든, 그릇이든 쓰임새에 맞게 사용되면 됩니다. 주어진 나의 삶에 감사한다면 자비하신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새로운 세상을 보여 주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소경의 눈을 뜨게 해 주셨고, 소경은 이제 새로운 세상을 보았습니다. 욕망과 교만으로 닫혀있는 우리의 눈을 순명과 겸손으로 새롭게 뜰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은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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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삼의딸들수녀회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님]
벳사이다, 복음서의 서두부터 우리에게 익숙한 지명입니다. 바로 처음 부르심을 받은 사도들, 베드로와 안드레아, 야고보와 요한의 고향입니다. ‘어부의 집’이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이 마을에서 사도들은 사람 낚는 어부로 세상에 파견됩니다. 그런데 이 사도들의 마을에 눈먼 이가 있습니다. 예로니모 성인은 사도들의 고향을 눈멂이 다스리고 있다고, “눈먼 이”(마르 8,22)는 사도들의 마을에 살고 있던 유다 백성이라고 풀이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고쳐 주시기 전에 먼저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십니다. 눈멂이 지배하는 마을에서 그를 떼 내시는 것입니다. 그가 똑똑히 보게 된 뒤에 그를 집으로 보내시면서도 마을로는 들어가지 말라고 하십니다. 집이 마을 안에 있는데도 말입니다. 이는 우리가 새롭게 태어나려면 그때까지 몸담고 있던 어둠의 세계를 떠나야 하고, 다시는 그 어둠의 세계로 돌아가지 말아야 함을 뜻합니다.
예수님의 기적과 치유 방식은 대상과 상황에 따라 다양합니다. 직접 만나시지도 않고 먼 곳에서 말씀 한마디로 간청하는 이의 신앙을 시험하신 뒤, 본인이 아닌 주변 사람들의 요청에 따라, 또는 나인의 과부에게 하신 것처럼 요청 없이 기적을 행하십니다. 대부분의 기적은 한 번에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는 치유가 단계적으로 이루어집니다.
우리의 회개와 새롭게 태어남도 바오로 사도처럼 한순간의 강력한 체험으로 이루어지는가 하면 더 많은 경우에는 단계적으로 계속해서 이루어집니다. 점차 어둠에서 멀어져 빛으로 다가가는 여정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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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8,22-26: 베싸이다의 앞 못 보는 사람
예수님께서 베싸이다 소경을 보게 해주신다. 예수님은 많은 사람 앞에서 그를 치유해주신 것이 아니라, 군중을 떠나 마을 밖 조용한 곳으로 그를 데리고 가시어 환부에 침을 바르신다.(23b) 옛날에는 사람들이 입에서 나오는 침이 병을 고치는 능력이 있다고 믿었다. 그러한 것을 당신의 기적의 행위에서 반복하시면서 치유를 해주신다. 여기서 소경은 나무와 사람을 어렴풋이 보다가 차차 확실하게 보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항상 마르코 복음에서는 예수께서 기적을 행하시고는 기적의 이야기에 대해 입을 다물도록 명하신다. 오늘의 소경에게도 집으로 갈 것이지(26a) 마을로 들어가지 말라고 하신다.(26b)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별난 기적장이로 소문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시고 고난의 길을 가는 하느님의 아들로 남아있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전에는 기적 사건을 소문내지 않도록 명하셨다.
이것은 우리도 하느님의 진리를 우리의 영적인 눈으로 단번에 즉시 다 보게 되고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하느님께 끊임없이 회개하면서 그분을 따르려고 하는 마음가짐과 함께 매일의 자기의 노력과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끝까지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일러주시는 말씀이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제자들도 예수님을 잘 알지 못하였었다. 예수님을 올바로 보지 못하는 소경들이나 다름없었다. 이 제자들의 눈을 뜨도록 해주시는 의미가 베싸이다의 소경의 치유이다. 소경이 조금씩 보게 되었고 예수께서는 다시 그 눈에 손을 얹어 완전히 보게 해주신 것처럼, 제자들의 신앙의 눈을 뜨게 하시어 당신을 완전히 잘 보고 당신을 따를 수 있도록 해주시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안다고 생각하는 것은 항상 어렴풋하게 보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는 우리 자신도 베싸이다의 소경의 모습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우리의 신앙이 바로 그럴 수 있다. 이제 눈을 뜨기 위해서는 우리의 삶을 통하여 노력한다면, 점차로 잘 보게 되고 이다음에는 당신을 따르는 자들을 위하여 준비한 모든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이러한 희망을 품고 신앙생활을 하여야 한다. 그것은 순간순간의 삶을 열심히 이어가려고 노력할 때 점차로 이루어진다. 눈을 가지고 있되 올바로 보지 못하는 우리에게 영적인 시력을 갖도록 노력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빛으로 이끌어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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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되돌아가지 말고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들은 벳사이다로 갔다. 그런데 사람들이 눈먼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는 그에게 손을 대어 주십사고 청하였다. 그분께서는 그 눈먼 이의 손을 잡아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셔서, 그의 두 눈에 침을 바르시고 그에게 손을 얹으신 다음, ‘무엇이 보이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는 앞을 쳐다보며, ‘사람들이 보입니다. 그런데 걸어 다니는 나무처럼 보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분께서 다시 그의 두 눈에 손을 얹으시니 그가 똑똑히 보게 되었다. 그는 시력이 회복되어 모든 것을 뚜렷이 보게 된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집으로 보내시면서, ‘저 마을로는 들어가지 마라.’ 하고 말씀하셨다."(마르 8,22-26)
1) 예수님께서 눈먼 이를 한 번에 고쳐 주시지 않고 단계적으로 고쳐 주신 것은, 우리의 신앙이 단계적으로 발전하는 것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하고, 눈먼 이를 고쳐 주신 다음에 하신 말씀, “저 마을로는 들어가지 마라.”라는 말씀은, “과거의 삶으로 돌아가지 마라.”로 해석하는 것이 일반적인 해석입니다. <그 마을에 무슨 문제가 있었다고 속단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들이 눈먼 이에게 손을 대어 주십사고 청하였다는 말은, ‘안수’를 해 달라고(고쳐 달라고) 청했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어떤 병자나 장애자든지 간에 예수님께 손을 대기만 하면, 또는 예수님께서 손을 대기만 하시면, 다 낫게 된다는 소문을(마르 6,56) 들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눈먼 이를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신 것은, 사람들이 없는 곳으로 데리고 가신 것이고, 보는 사람들이 없는 곳에서 그를 고쳐 주신 것은, “병을 잘 고치는 의사”로만 소문이 퍼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 여러 가지 동작으로 고쳐 주신 것은, 믿음이 없는 그에게 믿음을 심어 주기 위한 배려라고 해석됩니다. “무엇이 보이느냐?”라는 말씀은, ‘보는 일’은 그 자신이 스스로 해야 한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는 눈을 고쳐 주시는 것까지만 해 주시고, 보는 것은 각자 스스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로 가는 길을 보여 주시고, 그 길로 인도해 주시지만, 그 길을 걸어가는 것은 우리가 스스로 해야 하는 일입니다.>
2) “저 마을로는 들어가지 마라.”라는 말씀은, “과거의 삶으로 되돌아가지 마라.”, 즉 “이제부터는 새로운 인생을 살아라.”이고, “궁극적인 구원을 향해서 나아가라.”입니다.
<그가 죄 속에서 살고 있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모르고 있었고, 모르고 있었으니까 안 믿고 있었고, 복음을 들을 기회도 없었을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은 예수님 안에 있는 진리대로, 그분에 관하여 듣고 또 가르침을 받았을 줄 압니다. 곧 지난날의 생활 방식에 젖어 사람을 속이는 욕망으로 멸망해 가는 옛 인간을 벗어 버리고, 여러분의 영과 마음이 새로워져, 진리의 의로움과 거룩함 속에서 하느님의 모습에 따라 창조된 새 인간을 입어야 한다는 것입니다."(에페 4,21-24)
“여러분은 옛 인간을 그 행실과 함께 벗어버리고, 새 인간을 입은 사람입니다. 새 인간은 자기를 창조하신 분의 모상에 따라 끊임없이 새로워지면서 참지식에 이르게 됩니다."(콜로 3,9ㄴ-10)
예수님을 만나서 ‘새 인생’을 살게 되는 일은, 한 번에 끝나는 일이 아니라, 날마다 노력해야 하는 일입니다. 세례를 받은 것으로 만족하고서 아무것도 안 하면, 고인 물이 썩는 것처럼 생명력을 잃게 될 것입니다. 앞으로 나아가지 않고 멈추어 서는 것은 사실상 뒤로 되돌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흔히 “걸레는 빨아도 걸레다.” 같은 말을 하지만, “예수님은 걸레를 깨끗이 빨아서 새 옷으로 만드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걸레’로 되돌아갈지, ‘새 옷’으로 살아갈지, 그것은 우리 각자가 스스로 선택하는 일입니다.>
3) 복음서의 다른 이야기들에 “저 마을로는 들어가지 마라.”와 비슷한 말씀들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8장에 있는 이야기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몸을 일으키시고 그 여자에게, ‘여인아, 그자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단죄한 자가 아무도 없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 여자가 ‘선생님, 아무도 없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요한 8,10-11)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자를(요한 8,4) 예수님께서는 단죄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다시는 죄짓지 마라.”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여자를 용서하시긴 했는데, 그 용서는 ‘무죄 선고’가 아니라 ‘집행유예 선고’입니다. 만일에 그 여자가 다시 죄를 짓는다면, 그때는 ‘가중 처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요한복음 5장에 있는 이야기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뒤에 예수님께서 그 사람을 성전에서 만나시자 그에게 이르셨다. ‘자, 너는 건강하게 되었다. 더 나쁜 일이 너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 그 사람은 물러가서 자기를 건강하게 만들어 주신 분은 예수님이시라고 유다인들에게 알렸다. 그리하여 유다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그러한 일을 하셨다고 하여, 그분을 박해하기 시작하였다."(요한 5,14-16)
‘벳자타 못 가의 병자’는 자기를 고쳐 주신 예수님께 감사를 드리기는커녕 박해자들에게 예수님을 신고했습니다. 그것은 받은 은혜를 저버린 ‘배은망덕’입니다.
<구원을 향해 나아가기를 거부하고 과거의 삶으로 되돌아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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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밖으로 나오시게나>
마르코 8,22-26 (벳사이다의 눈먼 이를 고치시다)
그때에 예수님과 제자들은 벳사이다로 갔다. 그런데 사람들이 눈먼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는 그에게 손을 대어 주십사고 청하였다. 그분께서는 그 눈먼 이의 손을 잡아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셔서, 그의 두 눈에 침을 바르시고 그에게 손을 얹으신 다음, “무엇이 보이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는 앞을 쳐다보며, “사람들이 보입니다. 그런데 걸어 다니는 나무처럼 보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분께서 다시 그의 두 눈에 손을 얹으시니 그가 똑똑히 보게 되었다. 그는 시력이 회복되어 모든 것을 뚜렷이 보게 된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집으로 보내시면서 말씀하셨다. “저 마을로는 들어가지 마라.”
<밖으로 나오시게나>
“그분께서는 그 눈먼 이의 손을 잡아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셨다.”(마르 8,23ㄱ)
“예수님께서는 그를 집으로 보내시면서 말씀하셨다. “저 마을로는 들어가지 마라.””(마르 8,26)
있지 못함이
오히려 있음인 사람아
참으로 있고 싶거든
지금 있는 것
밖으로 나오시게나
보지 못함이
오히려 봄인 사람아
참으로 보고 싶거든
지금 보는 것
밖으로 나오시게나
듣지 못함이
오히려 들음인 사람아
참으로 듣고 싶거든
지금 듣는 것
밖으로 나오시게나
말하지 못함이
오히려 말함인 사람아
참으로 말하고 싶거든
지금 말하는 것
밖으로 나오시게나
느끼지 못함이
오히려 느낌인 사람아
참으로 느끼고 싶거든
지금 느끼는 것
밖으로 나오시게나
알지 못함이
오히려 앎인 사람아
참으로 알고 싶거든
지금 아는 것
밖으로 나오시게나
믿지 못함이
오히려 믿음인 사람아
참으로 믿고 싶거든
지금 믿는 것
밖으로 나오시게나
희망하지 못함이
오히려 희망인 사람아
참으로 희망하고 싶거든
지금 희망하는 것
밖으로 나오시게나
사랑하지 못함이
오히려 사랑인 사람아
참으로 사랑하고 싶거든
지금 사랑하는 것
밖으로 나오시게나
살지 못함이
오히려 삶인 사람아
참으로 살고 싶거든
지금 사는 것
밖으로 나오시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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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영의 눈을 떠야 합니다>
눈먼 사람이 보게 된다면 얼마나 큰 기쁨이겠습니까? 그러나 보고 싶은 것도 많고, 볼 것도 많지만 정작 보아야 할 것을 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마르코 복음에서 ‘보다’라는 동사는 단순한 시력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이해와 깨달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생명의 빵’이신 주님과 함께 있으면서도 빵이 없다고 걱정하였습니다. 그래서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마르 8,18.21)는 꾸지람을 들었습니다. 참으로 보아야 할 것을 볼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께서 눈먼 이의 두 눈에 침을 바르시고 그에게 손을 얹으신 다음 “무엇이 보이느냐?”하고 물으셨습니다. “무엇이 보이느냐?”는 말은 단순히 ‘육안으로 보이느냐?’의 질문이 아닙니다. 새로운 세상이 보이느냐? 권능을 지닌 ‘구세주가 보이느냐?’는 물음입니다.
우리는 흔히 눈을 ‘육안’, ‘심안’, ‘혜안(영안)’으로 구별합니다. 육안은 그야말로 밖으로 드러나 있는 것을 보는 눈입니다. 그러나 심안은 마음의 눈입니다. 품은 생각을 드러내는 눈입니다. 그 사람의 마음에 무엇을 담고 있느냐에 따라서 보이는 것이 다릅니다. 똑같은 것을 보아도 어느 사람은 긍정적으로 좋게 보고, 어떤 사람은 굽은 눈으로 봄으로써 자기 마음을 표출하게 됩니다. 어떤 이는 장미꽃을 보면서도 장미꽃의 아름다움은 보지 못한 채 가시만 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네 눈은 네 몸의 등불이다. 네 눈이 맑을 때에는 온몸도 환하고, 성하지 못할 때에는 몸도 어둡다. 그러니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 아닌지 살펴보아라.”(루카 11,34-35)
영안은 신앙의 눈입니다. 영안은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것을 보는 눈도 아니고 내 마음의 잣대로 판단하는 눈도 아닙니다. 영적인 눈은 하느님의 말씀에 비추어진 눈이요, 내 눈으로, 내 마음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눈으로, 예수님의 마음으로 보는 눈입니다. 그야말로 “당신의 말씀은 제 발에 등불, 저의 길에 빛이옵니다.”(시편 119,105) 영안을 가진 사람은 ‘예수님이시라면 어떻게 하셨을까?’를 먼저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이 세상일에 대해서는 많은 것을 알지만 자기가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고 있는지는 모르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분명 눈먼 사람입니다. 지식이나 재물도 꼭 필요한때 쓰지 못한다면 눈먼 이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눈 먼 이는 주님의 손길을 통해 사람들을 보았는데 처음에는 걸어 다니는 나무처럼 보았습니다. 이것은 평상시에 익숙해져 있는 대로 본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눈먼 이가 다니면서 제일 많이 부딪친 것이 무엇일까? 그리고 주님께서 다시 손을 얹으시자 똑똑히 보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겉으로만 본 것이 아니라 주님의 권능을 보게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능력은 아버지 하느님 안에서 행하여지고 마침내 십자가를 통하여 구원을 이루신다는 깨달음을 얻기까지는 아직도 갈 길이 멉니다. 똑똑히 보기 위해서는 한두 번으로 안 됩니다. 반복과 훈련이 필요하고 서서히 알아보게 되고 깨치게 됩니다.
육안의 눈을 넘어 마음의 눈을 뜨고 영적인 눈을 뜨기까지 사랑과 정성으로 기도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세상 것에 눈이 멀면 결코 주님을 볼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무엇이 보이느냐?” 하시면 “예, 주님, 뚜렷하게 보입니다.” 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보게 되었으면 어두운 과거의 마을로 돌아가지 않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저 마을로는 들어가지 마라.”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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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도 노아의 홍수 이야기가 계속됩니다. 모든 생물을 쓸어버린 홍수가 끝나고 물이 빠진 뒤 의인 노아가 가장 먼저 한 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물난리를 겪고나서 사람들이 가장 먼저하는 일은 보통 수해복구 작업이지요.
그런데 노아는 "주님을 위하여 제단을 쌓고 ... 번제물을 골라 그 제단 위에서 제사를 바칩니다."(창세 8,20)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것이 첫번째입니다. 그 다음이 수해복구입니다. 역시 노아는 주님께서 인정하신 사람답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향내를 맡으시며 마음을 바꾸십니다. 의인 한 사람이 바친 향기로운 감사의 봉헌이 하느님의 마음마저 바꾸는 힘이 있다는 것이 놀랍지 않습니까? 성경 저자는 굳이 주님이 후회하셨다는 말을 다시 쓰지는 않지만 그분 마음속 생각의 내용은 후회와 다를 바 없습니다. 혹 사람이 이 정도로 생각을 돌이킨다면 우리는 '회개(悔改)'라는 표현을 쓰는데, 주님께 감히 이 단어를 쓰기는 외람되지만, 주님께서 '회심(悔心)'하신 겁니다!
"사람의 마음은 어려서부터 악한 뜻을 품기 마련, 내가 다시는 사람 때문에 땅을 저주하지는 않으리라."(창세 8,21)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당신 모습대로 지으셨지만 원형과는 달리 사람 안에 악이 내재되어 있음을 뼈아프게 받아들이십니다. 그 악에 물든 사람들 때문에 세상 모든 피조물을 쓸어내었더니 가장 괴로운 존재는 바로 당신이셨습니다. 부모에게 한 자녀의 죽음도 무참한 형벌일진대, 거의 모든 피조물의 죽음이라니요! 게다가 얼마나 공들여 창조한 존재들입니까! 당신이 내리신 벌로 가장 크게 고통을 겪은 이는 바로 당신 자신이셨을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다시는..."(8,21) 이 말씀에는 하느님의 굳은 의지가 담겨 있습니다. 이 의지에 담긴 하느님의 마음이 곧 그분입니다. 이제 주님께서는 아무리 세상에 악이 판을 쳐도 결코 세상을 멸망시키지 않을 겁니다. 다그치고 단죄하고 심판하는 대신, 나약함에 신음하는 피조물을 죄악에서 구원할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과 구속이 새로운 해법이 될 것입니다. 이 노아의 홍수 이후에 벌써 당신 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실 맘을 먹으신 것일까요?
이렇게 세상 한가운데로 오신 예수님께서 벳사이다로 가셔서 사람들의 청을 듣고 한 눈먼 이를 치유해 주십니다. 이 치유사화에는 예수님과 눈먼 이의 접촉이 자주 등장합니다.
예수님께서 "손을 잡아" 데리고 나가시고, "눈에 침을 바르시고 그에게 손을 얹으시고", "그의 눈에 손을 얹으십니다."(마르 8,23) 자상하게 잡아주고 문지르고 얹은 손의 느낌과 의미는 눈먼 이가 가장 잘 알겠지요. 눈이 보이지 않는 만큼 다른 감각이 예민하게 발달했을 그로서는 육신보다 마음이 먼저 나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치유는 마음의 교감부터 시작됩니다.
그런데 이 치유는 "마을 밖"(마르 8,23)에서 이루어집니다. 치유 받은 뒤에도 "저 마을로는 들어가지 마라."(마르 8,26) 하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이 말씀이 좀 의문시 되었습니다. 왜 그렇게 말씀하시는 걸까요? 당신이 알려지면 또 시끄러워지고 말이 많아질까봐 함구령을 내리는 것과 같은 뜻일까요? 그 마음을 정확히 잘 알 수는 없지만 저는 이렇게 짐작해봅니다.
마태복음과 루카복음에서 '벳사이다'라는 지명을 정면으로 거론하신 부분을 보면,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 ... 심판 날에는 티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마르 11,21-22; 루카 10,13-14)란 구절입니다. 필립보의 고향이기도 한 벳사이다는 카파르나움, 코라진과 함께 예수님이 기적을 가장 많이 베푸셨지만 가장 회개하지 않은 3대마을 중 하나였습니다.
그러니 "저 마을로는 들어가지 마라."(8,26)는 말씀은 단죄보다 용서를, 심판보다 자애를 펼치시는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슬픈 일갈입니다. 회개하지 않는 고을에 대한 예수님의 안타까움이 담겨 있지요. 악을 선택한 스스로가 완고히 버티며 악을 고수하면 구해 줄 도리가 없으니까요. 구원받고자 하는 의지가 없는 이에게는 구원의 초대가 기쁜 소식이 아니니까요. 마을 전체가 기쁜 소식을 받아들이지 않고 회개하려 하지 않으면, 한 사람의 치유도 대수롭지 않은 소문이나 호기심 정도로 끝날 수도 있겠지요.
우리는 독서에서 하느님의 '마음 돌이키심', 즉 회심(悔心)을 만났습니다. 아무리 애써도 죄의 굴레를 벗기 어려운 우리로서는 우리의 약함을 인정해 주심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고 또 우리도 다른 사람의 약함을 그렇게 인정하고 보듬어주어야 함을 배웁니다. 복음에서 예수님은 회개하지 않는 마을 벳사이다와는 별도로 따로 마을 밖으로 데려나와 눈먼 이에게 치유의 기적을 베푸시지요.
스스로 회개를 거부하는 집단에게는 아무리 정성스런 어루만짐으로 눈먼 이를 고쳐 주셨다한들, 이 기적조차 그들의 죄에 죄를 더할 뿐이라서 그러시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러니 이 역시 사랑때문이라고 해야 하겠지요.
저는 특히 복음에서 "무엇이 보이느냐?"(8,23)는 예수님의 질문이 오늘 강하게 제 마음에 들어옵니다. 우리에게도 던지시는 예수님의 질문입니다. "무엇이 보이니?" 아직 우리의 영적인 눈이 열리지 않아서 희미하게 어른거리는 뭔가만 보인다고 우리도 말씀드리겠지요.(8,24 참조)
예수님께서는 또 우리 눈을 만져 주시고나서 물으실 겁니다. "이제 뭐가 보이니?" "아직... 잘 안보이네요." 또 만져 주실 겁니다.
우리가 명료하게 주님을 알아뵙고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아볼 때까지 계속 안타까워하시며 우리 눈을 잘 볼 수 있도록 어루만지시며 애쓰실 겁니다. 마치 노아가 땅이 말랐는지 까마귀와 비둘기를 내보내어 계속 확인하듯이 말입니다.(창세 8,6-12 참조)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우리가 맑고 밝은 눈을 가지고 하느님과 이웃과 세상을 명료하게 알아보기를 간절히 바라시는 주님의 마음을 우리 안에 모십시다. 그리고 노아처럼, 무슨 일이든지 주님이 하신 일을 겪고나서 가장 먼저 하느님께 향기로운 감사의 기도와 제사를 봉헌하도록 합시다.
우리의 부족한 봉헌제물이 하느님의 마음도 움직일 수 있고 우리 눈도 뜨게 만들어 주신다는 것을 마음에 새기는 오늘 되시길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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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눈먼 이는 시력이 회복되어 모든 것을 뚜렷이 보게 되었다.”(마르코 8,25)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라, 요르단강이 갈릴래아 호수로 흘러드는 하구 동편에 있는 벳사이다로 갑니다. '어부의 집’이란 뜻을 지닌 이곳은, 베드로와 안드레아와 필립보의 고향이지요(요한 1,44). 어부의 집에서 어부들이 온 세상이 파견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마을 사람들이 회개하지 않자, 불행을 선언하기도 하셨습니다(마태 1,20-24).
오늘 복음에서, 눈먼 이는 소통과 교감을 할 수 있는 연결고리가 끊어진 채, 영혼의 어둠과 타락 상태에 갇혀 있었습니다.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그는 주님과 떨어져 있었을 뿐 아니라, 어디에서 주님을 찾아야 할지 모른 채, 자신을 어둠의 동굴 속에 둘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된 것은 그 안에 자리잡게 된 죄악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주님 안에서 더불어 행복하기를 갈망하던 애정 넘친 이웃들이, 그 소경을 예수님께 데려와 고쳐달라고 청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 눈먼 이의 손을 잡아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셔서, 두 차례에 걸쳐 그의 두 눈에 손을 얹어 고쳐주십니다. 마침내 소경은 시력을 회복하여 ‘모든 것을 뚜렷이 보게 됩니다.’(마르 8,25)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소경이 눈을 뜨게 되었다는 변화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움직임을 주의깊게 살펴봅시다. 그분께서는 고쳐달라는 청에 대해, 단 한마디도 토를 달거나 묻지 않으시고, ‘곧바로’ 그의 눈을 뜨게 해주시려고 움직이십니다. 진정한 사랑은 그렇게 철저히 타자중심으로 움직이며, ‘곧바로’ 응합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그의 손을 잡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셔서’ 고쳐주십니다. 영혼의 어둔밤 속에서 헤매는 그 눈먼 이의 어둠을 탓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포기하지도 않으시며, 사랑으로 함께하며 해방으로 이끌어주십니다. 왜 그런 잘못을 했느냐고 묻거나 훈계하려고 하지 않고, 빛으로 인도하는 것이 올바른 사랑의 태도임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사도들의 고향인 그곳에서 눈먼 이를 고쳐주셨다는 사실 또한 의미심장합니다. 이는 예수님과 계속 함께 지내면서, 가장 가까이에서 그분의 가르침과 행적을 목격했던 제자들의 고향에, 눈이 먼 상태, 곧 영혼의 어둠이 드리워져 있었음을 말해줍니다.
예수님을 믿는 나 자신과 우리 공동체도 눈먼 상태에 있을 때가 있지요. 예수님께서는, 회개하지 않는 벳사이다의 유다 백성들에게, 눈을 뜨는 해방의 기쁜 소식을 보여줄 때가 아니라고 생각하시어, 그 소경을 마을 밖으로 데려가서 고쳐주십니다. 그뿐 아니라 그를 집으로 보내시며 그 마을로 들어가지 말라 하십니다.(8,26) 주님의 자녀인 우리는 인간을 옭죄는 전통과 편견, 차별과 불의의 뿌리가 있는 ‘어둠의 집’이 아니라 ‘믿음의 집’, ‘사랑의 집’, 자유와 해방의 집‘으로 돌아가야겠습니다.
우리 모두 하느님의 진리를 외면하고, 세상의 가치를 하느님보다 더 중요시하며, 육(肉)의 질서를 따르는 소경이 되지 않도록 빛이신 주님께 내 손을 맡겨드려야겠습니다. 주님 사랑과 진리에 눈을 떠, 자신과 이 사회의 어둠과 불의를 식별할 수 있도록 회개하여, 주님 사랑의 집으로 되돌아가야겠습니다.
주님, 깨끗한 마음의 눈으로 제 영혼의 어둠을 ‘똑똑히’ 볼 수 있게 해주시며, 당신 사랑의 눈으로 세상의 어둠을 볼 수 있는 지혜를 허락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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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교구 한재호 루카 신부님]
하루하루 지내면서 짜증과 불만을 토로할 골칫거리는 눈에 들어오는데 감사할 일들에 대해서는 애써 시선을 두지 않기도 합니다. 이제 눈을 감고 감사해야 할 일들을 바라봅시다.
그분께서 다시 그의 두 눈에 손을 얹으시니 그가 똑똑히 보게 되었다.(마르코 복음 8장 22-26절)
<제대로 보기 위하여 눈을 감기>
뭘 해도 예뻐 보이던 나의 연인도 결혼하여 삶에 치이다 보면 뭘 해도 미워 보이기 시작합니다. 마치 지난 월요일에 나온 바리사이들처럼 말이지요. 또 우리 삶에 필요한 일들은 메모장에 꼼꼼히 적어놓지만, 정작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이끄시는 하느님은 머릿속에서 지워버린 채 살아가기도 합니다. 마치 어제 복음에 나온 제자들처럼 말이지요.
이처럼 우리는 보아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경우를 자주 만나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벳사이다의 눈먼 이는 이러한 우리 각자를 상징하는 인물입니다. 그는 사람들의 손을 붙잡고 예수님께 가까이 갈 수 있었으며 그분을 통해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우리 역시 우리를 위해 간구해주시는 하늘의 천사들과 수호성인, 이 땅의 은인들의 도움으로 예수님께 다가가 영적인 시력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특히 오늘 복음에서 눈먼 이가 눈을 뜨는 것이 결정적으로 예수님께서 그의 눈에 손을 얹으신 데에서 이루어졌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본디 누군가 우리의 눈에 손을 얹으면 우리는 앞을 볼 수 없습니다. 이는 곧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먼저 보지 않는 것이 필요함을 뜻합니다. 바오로 사도 역시 사흘 동안 앞을 볼 수 없는 체험을 하였기에 예수님에 대해 새로운 시선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제대로 보기 위하여 눈을 감읍시다. 그분 손길에 우리 눈을 맡깁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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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중국 고전 서적인 이담속찬(耳談續纂)에 등장하는 유명한 고사성어가 있습니다. 삼세시습 지우팔십(三歲之習至于八十),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말입니다. 지금이야 기대 수명이 80을 훨씬 넘었지만, 그 옛날에 80까지 산다는 것은 거의 ‘세상에 이런 일이’라는프로에 나올 정도였을 것입니다. 그만큼 사람은 바뀌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바뀌지 않을까요?
뇌과학자의 말에 의하면, 우리 뇌는 새로운 습관을 형성하고 새로운 기술을 배우며 심지어 우리의 사고방식을 바꿀 준비가 되어 있다고 합니다. 얼마든지 바꿀 수 있는데, 스스로 할 수 없다는 단정을 지으면서 바뀌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미국 심리학자 캐럴 드웩은 마음을 고착형 마인드셋과 성장형 마인드셋으로 구분합니다. 그는 어느 정도의 지능, 성격, 윤리관을 가진 사람이라면 원하는 바를 충분히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마음, 어떤 마인드셋을 가져야 할까요?
답을 구하기 힘든 어려운 문제에 고착형 마인드셋을 가진 사람은 ‘역시 나는 이런 문제를 풀 수 있을 만큼 머리가 좋지 않아.’라는 마음을 갖고, 성장형 마인드셋을 가진 사람은 ‘아직 문제를 풀지 못했네.’라고 말합니다.
당연히 성장형 마인드셋을 가져야 합니다. ‘아직’의 힘을 믿어야 합니다. 충분히 변화될 수 있으며, 할 수 있는 것이 너무 많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일을 너무 쉽게 할 수 있을까요? 그러나 ‘아직’이라는 마음을 가지고 계속 노력한다면 나를 통해 하느님의 일이 완성된다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벳사이다에서 눈먼 이를 고쳐 달라는 청을 받습니다. 그런데 두 번에 걸쳐서 낫게 하십니다. 먼저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신 다음, 그의 두 눈에 침을 바르시고 그에게 손을 얹으신 다음, “무엇이 보이느냐?”라고 물으십니다.
그는 “사람들이 보입니다. 그런데 걸어 다니는 나무처럼 보입니다.”라고 대답하는 것을 볼 때, 완전하게 회복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주님께서는 다시 그의 두 눈에 손을 얹으십니다. 그러자 똑똑히 보게 됩니다.
우리 신앙인 역시 이와 같지 않을까요? 처음부터 주님의 뜻을 선명하게 아는 사람이 있을까요? 그냥 어렴풋이 짐작할 뿐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손길에 계속 맡기면서 선명하게 주님의 뜻을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성장형 마인드셋의 모습입니다. 아직’은 부족하고 나약한 우리이지만, 분명히 계속해서 주님 뜻에 다가서면서 주님과 일치할 수 있고, 그 안에서 하느님의 일이 완성됨을 보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뜻을 뚜렷이 볼 수 있도록 계속해서 성장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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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사람들이 눈먼 이를 주님께 데리고 왔습니다. 그의 치유를 위해서였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여느 때와 달리 그를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오십니다. 그러고는 그에게 치유의 은총을 베푸십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왜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오셨을까요? 자세한 내막을 알 수 없지만 사람들 앞에서, 바로 그 자리에서 치유의 기적을 행하실 수 없었던 이유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주님께서는 못하신 것이 아니라 안 하신 것입니다.
어쩌면 사람들은 주님을 시험하려고 눈먼 이를 데리고 왔을 것입니다. 그리고 눈먼 이의 눈이 치유된다면 분명 사람들은 주님을 강제로라도 자기들의 의사 혹은 왕으로 모셨을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주님께서는 눈을 뜬 그 사람에게 마을로 들어가지 말라고 당부하십니다.
눈먼 이가 조금의 눈을 떴을 때 주님께서 물으십니다.
“무엇이 보이느냐?”라고 말입니다. 그는 사람이 보이는데 나무처럼 보인다고 말합니다. 이는 사람의 굳어버린 마음, 완고한 마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굳어지고 굳어져서 나무껍질처럼 갈라져 버린 사람의 마음을 그대로 표현한 것입니다. 눈먼 이의 주변에 서 있던 사람들의 마음을 그대로 표현한 것이지요. 사람들은 저마다 바라는 바가 있었습니다. 눈먼 이를 시험대상으로 삼아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혹시 우리는 어떤가요? 주님을 이용해 내가 원하는 것을 얻으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지는 않은지요. 주님이 나의 주인이 아닌 내가 주인이 되어 주님께서 내게 봉사하기를 바라는 것은 아닌지요?
주님께서 그에게 말합니다. “저 마을로 들어가지 마라.”
그 마을은 더 이상 주님의 기적을 체험할 수 없을 것입니다. 굳어있는 마음들로 주님의 은총을 알아볼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 늘 주님의 은총을 알아보기를…. 그리고 굳어지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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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전교수도회 김종오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예수님께서 ‘무엇이 보이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는 앞을 쳐다보며, ‘사람들이 보입니다. 그런데 걸어 다니는 나무처럼 보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분께서 다시 그의 두 눈에 손을 얹으시니 그가 똑똑히 보게 되었다. 그는 시력이 회복되어 모든 것을 뚜렷이 보게 된 것이다.” (마르코.8,24-25)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우리는 소경처럼 삽니다. 살면서 사람이 사람으로 보이지 않을 때도 많습니다. 살면서 가지게 된 과거의 경험이나, 고정관념, 가정이나 추축들은 우리가 다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게 합니다.
이런 것들은 사람과 세상과 사건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자신만의 색안경을 끼고 보게 합니다. 특히 온전히 치유되지 않은 우리의 상처는 사람을 마치 ‘걸어 다니는 나무처럼.’ 보이게 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아프게 하고 상처를 건드리는 사람을 괴물처럼 보이게 합니다. 상처가 깊을수록 우리는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못합니다.
깊고 오래된 상처는 어린 시절에 우리가 세상을 다 알지 못할 때 받은 상처입니다. 이성적으로 사리 분별을 잘 할 수 없고 감정이 우리를 지배할 때 받은 상처입니다. 상황에 대한 인식도 부족하고 내 중심적이었을 때 받은 상처입니다.
저마다 상처를 안고 자라온 우리는 커서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 사람들’을 만나 그 상처를 상기하게 됩니다. 과거에 받았던 상처와 상처를 준 사람을 기억해 냅니다.
상처를 기억해 내는 것은 치유의 시작입니다. 아픈 상처를 기억하는 것은 고통스럽지만, 치유의 첫 걸음입니다. 이는 만나는 사람들을 사람으로 볼 수 있게 해 줍니다. 싫어하는 사람이라도 괴물이 아닌 사람으로 볼 수 있는 눈은 치유된 눈입니다. 치유된 눈은 사람의 한계를 수용하는 눈입니다.
사람이 사람으로 보이지 않고, 슈퍼맨이나 괴물로 보던 어린 시절의 눈에서 벗어나 우리처럼 상처입기 쉽고 연약하며 불완전한 인간을 받아들이는 눈은 치유가 된 눈입니다.
아픈 상처를 우리에게 가한 사람마저 우리가 사람으로 볼 수 있는 눈은 은총입니다. 보고 싶지 않는 우리 내면의 상처를 끌어 안는 용기입니다. 그 용기는 우리의 불완전함을 받아들이는 용기요 삶의 고통을 받아들이는 지혜입니다.
아직도 사람이 사람이 아니라 ‘나무처럼’ 보이고 괴물처럼 보이는 우리의 두 눈에 오늘 주님께서 다시 손을 얹어 주십니다. 받은 상처가 너무 아파 사람을 사람으로 볼 수 없는 우리 마음의 눈에 두려움을 없애시는 주님께서 은총의 손을 얹어 주시고 묻고 계십니다. “무엇이 보이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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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함승수 세례자요한 신부님]
“그분께서 다시 그의 두 눈에 손을 얹으시니 그가 똑똑히 보게 되었다.“(마르 8,22-26)
사람들이 눈먼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에게 손을 대어주십사고 청합니다. 그에게 손을 대기만 하면 그가 시력을 회복하리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사람들이 기대하는대로 그를 ‘한 번에’ 고쳐주시지 않고 여러 단계를 거쳐 고쳐 주십니다. 말씀 만으로 병자를 고치시고 더러운 영을 쫓아내시며 죽은 사람까지 살리시는 분께서 능력이 부족해서 그렇게 하신 건 아닐 것입니다. 그보다는 그의 눈을 보게 하시는 과정을 지켜보는 이들에게 제대로 본다는 게 무엇인지를 알려주시기 위함이라고 봐야겠지요.
이 세상에는 보고 싶은 것도 많고 봐야할 것들도 많지만, ‘제대로 본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성이 없는 동물들처럼 그저 대상을 보이는대로, 내 망막에 대상이 맺히는 그대로 보는 게 아니라, 대상에 대해 아는만큼, 즉 내가 이해하고 깨달은만큼 보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마르코 복음에서 ‘보다’라는 의미로 주로 사용하는 그리스어 동사도 단순히 ‘시력’을 뜻하기보다, ‘이해와 깨달음’을 동반한 참된 앎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눈먼 이의 두 눈에 침을 바르시고 그에게 손을 얹으신 다음 “무엇이 보이느냐?”고 물으십니다. 이에 그 사람은 사람들이 보이긴 하는데 ‘걸어다니는 나무’처럼 보인다고 답하지요. 사람은 마음에 무엇을 담고 있느냐에 따라 보이는 게 다른 법입니다. 그가 앞을 못 보던 시절에 자기 말고 다른 사람들은 길가에 서 있는 나무들처럼 이리저리 부딪히며 그가 가는 길을 방해하는 ‘장애물’ 같은 존재였기에, 시력을 회복한 뒤에도 자기가 보는 사람의 내면이나 본질을 보지 못하고 겉모습만 보았던 겁니다.
이에 주님께서 그의 두 눈에 손을 얹으시자 그는 비로소 ‘똑똑히’ 보게 됩니다. 주님의 안수를 통해 겉모습을 넘어 내면을, 현상을 꿰뚫어 본질을 알아보는 ‘영안’을 갖게 되었기에, 비로소 대상을 희뿌옇게 보지 않고, 즉 겉모습만 대충 훑어보고 미루어 짐작하지 않고 그 내면과 본질을 알아보려는 노력을 시작하게 된 겁니다. 그러나 참된 봄은 이제 겨우 ‘시작’일 뿐이지요. 주님과 함께 그분께서 이끌어주시는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고 나태함과 안일함에 빠져 다시 예전의 잘못을 반복하면 언제든 다시 눈먼 이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저 마을로는 들어가지 마라.”고 말씀하십니다. ‘저 마을’이란 ‘벳사이다’, 즉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그것을 받아들이고 따름으로써 회개하지 않고 잘못된 길을 고집함으로써 “불행하여라”라는 엄중한 경고의 메시지를 들었던 공동체를 가리키지요. 결국 “그 마을로 들어가지 마라”는 말씀은 욕망에 휘둘려 예전의 잘못들을 되풀이함으로써 주님께 받은 은총을 ‘도루묵’으로 만들지 말라는 경고의 뜻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 두 눈 부릅뜨고 늘 깨어있는 자세로 기도하며 주님의 뜻을 헤아리고 실천해야겠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똑바로 사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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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오늘 <복음>에는 ‘눈먼 이’가 등장합니다. 그런데 ‘눈먼 이’란 어떤 사람일까?
눈이 감겨 보지 못하는 이뿐만 아니라, 눈이 열려 있어도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는 이, 곧 어둠에 덮여 빛을 보지 못하는 이를 포함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치, 장미꽃의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고서 가시로 찔러 상처를 주는 것으로 알며, 불이 주변을 환히 밝혀줌을 보지 못하고서 태워 상처 입히는 것으로만 아는 것과 같습니다. 곧 상처를 볼뿐, 상처에서 흘러나온 구원을 보지 못하는 이입니다.
이처럼,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요한 1,5), 자신의 어둠에 갇혀 그 빛을 보지 못하는 이가 바로 ‘눈먼 이’입니다. 곧 진리이신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한 이가 바로 ‘눈먼 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대체 무엇이 눈을 가리고 있는 것일까?
어제 <복음>인 앞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느냐?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느냐?”(마르 8,18)하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서, ‘보다’라는 동사는 단순하게 시력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와 깨달음’을 포함합니다. 그러니 우리에게는 진리를 볼 수 있는 ‘영의 눈’이 필요한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세 개의 눈’을 가지고 있는 셈입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것을 보는 ‘육안’, 속을 들여다보는 보는 ‘심안’(마음의 눈), 그리고 복음의 빛으로 보는 신앙의 눈인 ‘영안’(영의 눈) 입니다. 우리는 신앙이 깊어가면서 ‘영의 눈’이 밝아져갑니다. 이는 <시편>에서, “당신 빛으로 빛을 보옵니다.”(시 35,10)라고 노래하고 있듯이, ‘성령의 인도로 하느님의 신비를 보는 눈’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눈먼 이의 두 눈에 ‘당신의 침’을 바르십니다. 이는 ‘귀 먹고 말 더듬는 이를 고치신 이야기’(마르 7,31-37)에서, 예수님께서 당신의 손가락에 ‘침’을 발라 귀먹고 말 더듬는 이의 혀에 대신 것처럼(마르 7,34), ‘영의 도유’를 통해, 치유된 눈을 말해줍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무엇이 보이느냐?”(마르 8,23) 혹 사람들만 보이나요?
이제는 ‘육안’으로 사람의 형상만 보지 말고, ‘심안’으로 그 사람의 아픈 마음을 헤아려 보고, ‘영안’으로 그 사람 안에서 구원을 펼치시는 하느님의 현존을 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두 눈에 ‘당신 손’을 얹어주시기를 청해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 겉 형상의 사람만 보지 않고, 그 사람의 아픈 마음을 헤아려 볼 줄 알게 하소서. 나아가, 그 사람 안에 구원을 펼치시는 당신의 현존을 볼 수 있게 하소서. 풀 한 포기에서도 당신의 능력을 보게 하시고, 베푸신 자비를 보는 눈을 열어 주소서. 지금 우리가 살아있는 바로 이 자리에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당신을 보게 하소서. 제 행복은 오직 당신을 뵙는 일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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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보이느냐?”(마르 8,23)
주님!
제 눈이 상처를 볼뿐, 상처에서 흘러나오는 구원을 보지 못했습니다.
빛이 어둠을 들통 내도 어둠을 볼뿐, 빛을 보지 못했습니다.
하오니, 이제는 겉 형상만 보지 말고, 그 안에 펼쳐지는 구원을 보게 하소서.
당신의 빛으로 제 눈이 밝아지게 하소서. 당신의 영으로 제 영혼을 도유하소서.
바로 지금 이 자리에 함께 계시는 당신 뵙겠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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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개안(開眼)의 여정>
-“무지(無知)에 대한 답은 개안뿐이다”-
“내게 베푸신 모든 은혜, 무엇으로 주님께 갚으리오. 구원의 잔 받들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리라.”(시편 116,17ㄱ)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벳사이다의 눈먼 이를 고치십니다. 상징하는 바, 참 깊고 오묘합니다. 점차 눈이 열려 좋아지는 시력은 그대로 개안의 여정을 상징합니다. 그동안 참 많이 강조했던 ‘마음의 병’이 무지였습니다. 마음을 눈멀게 하는 마음의 치명적 병이 바로 무지입니다.
바로 무지의 탐욕, 분노, 어리석음이 우리를 눈멀게 합니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게 합니다. 눈뜬 맹인들 얼마나 많습니까? 마음따라 보는 눈이요 마음따라 듣는 귀입니다. 마음의 눈, 심안이 날로 좋아져야 제대로 보고 제대로 들을 수 있습니다.
색맹, 문맹, 맹신, 맹목...모두 눈멀 맹자가 들어갑니다. 분별이 불가능하니 얼마나 답답하겠는지요. 온갖 불행의 원인은 무지의 눈멈에 기인합니다. 오늘 옛 현자의 말씀은 배움의 여정과 함께 가는 지혜와 자유를 보여줍니다. 역시 개안의 여정에 끊이없는 배움이 좋은 도움이 됩니다.
“배움에도 용기가 필요하듯, 용기에도 배움이 필요하다. 무모한 용기를 앞세우는 사람은 주변 사람들을 어지럽힌다.”<다산>
눈먼 무지의 무모한 사람들이 얼마나 세상을 어지럽히는지 작금의 현실이 증명합니다. 정말 편견, 맹신등 무지에는 답이 없습니다. 이래서 날로 지혜로워지는 배움의 여정을, 진리탐구 여정의 삶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맨몸으로 범을 잡고 강을 건너려다 죽어도 후회 않는다는 자와는 함께 하지 않겠다. 신중하게 계획을 잘 세워 일을 이루는 사람과 함께 하겠다.”<논어>
맹목의 사람과는 상종하지 않겠다는 현실주의적 현자 공자의 지혜로운 면모가 잘 드러나는 대목입니다. 사실 공부의 목적도 무지의 눈을 밝히는 개안에 있음을 봅니다. 회개와 깨달음의 여정 역시 날로 밝아지는 심안을 말해줍니다. 과연 날로 밝아지는 개안의 여정에 날로 좋아지는 영적 시력인지요? 육안은 어둬져도 심안은, 영안은 날로 밝아졌으면 좋겠습니다.
영적성장에 도약이나 비약은 없습니다. 돈오돈수(頓悟頓修)라기 보다는 돈오점수(頓悟漸修)입니다. 나무가 자라는 이치만 봐도 분명합니다. 점차적인 과정중 성장이요 성숙이듯 개안의 영적 현실도 그러합니다. 초기 교회에서 예수님의 눈먼이에 대한 치유는 회개의 상징이었습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맹인이 예수님께 치유되어 점차적으로 눈이 열려 시력이 좋아지는 경우는 바로 세례후 점차 좋아지는 개안의 여정을 상징합니다.
세례성사로 무지의 눈이 열린후 평생 성사인 성체성사, 고백성사가 개안의 여정에 얼마나 결정적 도움이 되는지 깨닫습니다. 오늘 창세기 홍수가 그친후 노아의 이야기 역시 초기 교회에서는 세례의 상징이었습니다. 방주안에서 물로부터 구원받은 노아는 즉시 지상의 표면을 걷지 않고 점차적인 일련의 과정을 겪은 후 때가 되자 물이 마른후 비로소 지상에서의 삶을 시작합니다.
세례의 물로 구원받은 우리 역시 하느님이 만든 동터오는 새벽의 새날을 신뢰로서 걷는데는 시간이 걸립니다. 평생 한결같이, 끊임없이, 개안의 여정에 항구하고 충실해야 함을 배웁니다. 살아 있는 그날까지, 죽는 그날까지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전사로 성공적 개안의 여정이 될 수 있도록 분투의 노력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창세기 후반부 노아의 봉헌제사시 봉헌의 향내를 맡으며 하신 주님의 다짐이 참 좋은 묵상감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어려서부터 악한 뜻을 품기 마련,
내가 다시는 사람 때문에 땅을 저주하지 않으리라. 이번에 한것처럼 다시는 어떤 생물도 파멸시키지 않으리라. 땅이 있는 한, 씨뿌리기와 거두기, 추위와 더위, 낮과 밤이 그치지 않으리라.”
얼마나 주님의 자비롭고 섬세한 배려의 사랑인지요! 주님은 인간의 내적 악의 현실을 이해하고 다시 한번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잘 살아보라고 선물처럼 주시는 삶의 기회들입니다. 자연리듬, 계절의 자연스런 흐름처럼 무리하지 않고 순리대로 살면서 공동의 집인 지구를 잘 관리해야할 막중한 책임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작금의 현실은 어떠한지요? 무분별한 탐욕으로 지구 자원의 오용과 남용으로 인해 섬세한 균형과 조화는 깨지고 기후위기등 지구의 병도 날로 깊어져 가는 위중한 상황입니다. 개안의 여정에 필히 생태적 회개의 여정이 함께 가야함을 봅니다. 지옥에는 한계가 없습니다. 무한한 탐욕에 따라 살 것이 아니라 개안의 여정과 더불어 자연리듬, 자연의 흐름에 따라 순리의 지혜로운 삶을 살아야 함을 배웁니다.
많이 기도하고 많이 공부하고 많이 나누면서, 동시에 적게 쓰고 적게 먹고 적게 활동하면서 관상적 지혜의 내적 삶에 힘썼으면 좋겠습니다. 날마다 주님의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개안의 여정, 회개의 여정에 참 좋은 결정적 도움이 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저희 마음의 눈을 밝혀 주시어, 부르심을 받은 저희의 희망을 알게 하여 주소서.”(에페1,17-1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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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이전으로 돌아가지 마라.>
지난주 금요일 우리는 마르코 복음 7 장 끝부분 얘기를 들었습니다. 여기서 주님께서는 귀먹고 말 더듬는 이의 귀와 입을 열어주십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를 군중에게서 따로 데리고 나가서 고쳐주십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은 8장의 얘기로 눈먼 이를 눈 뜨게 하시는 얘기인데 오늘은 주님께서 그를 마을 밖으로까지 데리고 나가 거기서 고쳐주십니다.
그런데 두 얘기 모두 다른 복음에는 없고 마르코 복음에만 있는 얘기이고, 두 얘기 모두 주님께서 그들을 따로 데리고 나가 은밀히 고쳐주시는 얘기입니다.
어쨌거나 이렇게 주님의 은밀함은 마르코가 좋아하고 강조하는 것인데 두 가지 깊은 뜻이 숨어 있습니다.
첫째는 주님의 은밀한 사랑입니다. 내밀한 사랑이라고 해도 좋겠습니다.
주님의 공적이고 공개적인 사랑도 좋고 필요합니다만 내게는 내밀하고 사적인 사랑이 더 좋고 더 필요합니다.
나만 사랑해주신다는 느낌 말입니다. 이는 아빠가 나만 데리고 가 선물을 사주시며 나를 특별히 사랑해주시는 것처럼 느끼게 해주시는데 아빠가 내게만 이렇게 해주시는 것이 아닌 줄 알면서도 나한테는 이렇게 사랑을 느끼게 해주시는 것이 좋고 필요한 것과 같습니다.
가끔 그런 느낌이 있지 않습니까? 달이 모든 곳을 비추지만 내 창으로 들어온 달이 아주 특별한 느낌 말입니다.
세종대왕이 지었다고 하는 월인천강지곡이 있고 월천강이라는 말이 있지요. 월인천강(月印千江)은 달은 하나이지만 천 개의 강에 비춘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우리 믿음으로 바꾸면 하느님은 한 분이시고, 하느님은 존재하는 모든 것을 사랑하시지만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 마음에 각기 달리 각인됩니다.
주님의 은밀함은 둘째로 감추심의 뜻이 있습니다. 당신의 신성을 드러내지 않고 감추시는 것입니다.
낮추심과 겸손하심의 뜻이 있고, 우리와 같아지심의 뜻도 있으며, 낮추시어 우리와 같아지시는 겸손한 사랑의 뜻이 있습니다.
이렇게 마을 밖으로까지 데리고 나가 밀애를 나눈 다음, 주님께서는 눈먼 이에게 마을로 돌아가지 말라고 하십니다.
“저 마을로는 들어가지 마라.”
마을로 들어가 사람들에게 떠벌이지 말라는 뜻도 있지만, 제 생각에 이전 생활로 돌아가지 말라는 뜻도 있을 겁니다.
주님 사랑에 의해 신적인 사랑에 눈뜬 사람이 이전 인간적 사랑으로 돌아가지 말라는 뜻도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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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무엇이 보이느냐?"(마르8,23)
<주님, 제 눈을 뜨게 하소서!>
오늘 복음(마르8,22-26)은 '벳사이다의 눈먼 이를 고치시는 말씀'입니다. 벳사이다는 갈릴래아 호수 북동쪽에 위치한 곳으로,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난 곳이고, 베드로의 고향으로 알려진 곳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벳사이다로 갔을 때, 사람들이 눈먼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는 그에게 손을 대어 주십사고 청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청을 들어주시어 그에게 손을 대십니다. 그의 두 눈에 당신의 손을 대시어 그가 시력을 회복하여 똑똑히 볼 수 있게 해주십니다.
어제 독서였던 '노아의 홍수'는 '하느님의 분노'입니다. 사람들의 악이 세상에 많아지자, 사십 일 동안 밤낮으로 땅에 비를 내리게 하시어 당신께서 만드신 모든 생물을 쓸어버리십니다.
오늘 독서(창세8,6-13.20-22)는 '노아의 홍수가 끝나는 이야기'입니다. 홍수가 끝나고 땅의 물이 마른 것을 확인한 노아는 방주에서 나와 주님을 위하여 제단을 쌓고 주님께 번제물을 바칩니다. 주님께서 그 향내를 맡으시고 마음속으로 생각합니다.
"사람의 마음은 어려서부터 악한 뜻을 품기 마련, 내가 다시는 사람 때문에 땅을 저주하지 않으리라. 이번에 한 것처럼 다시는 어떤 생물도 파멸시키지 않으리라."(창세8,21)
하느님께서 분노하신 것을 후회하십니다. 그리고 다시는 사람 때문에 당신께서 창조하신 어떤 생물도 파멸시키지 않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죽음(파멸)의 뿌리인 모든 악의 시작은 보는 눈으로부터 시작된다고 생각합니다. 볼 수 있는 눈은 가지고 있지만 선(善)이신 하느님과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선한 피조물들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영적 시력을 잃은 데에서 시작된다고 생각합니다.
주님께 영적인 눈을 뜨게 해 달라고 청합시다!
그래서 악으로부터 해방되어 제대로 볼 수 있게 해 달라고 청합시다!
이 청이 이루어지도록 임마누엘이신 주님께로 나아갑시다!
"주님, 제 눈을 뜨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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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그는 시력이 회복되어 모든 것을 뚜렷이 보게 된 것이다."(마르 8, 25)
세상의 고통과는
무관한
자아중심적인
신앙에서
벗어나고
회복되어야
진정으로
볼 수 있는
신앙인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존재와
세계에 대한
올바른 이해에
눈을 틔워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받은
은총을 보아야
진정 감사할 수
있습니다.
바로 보아야
바로잡을 수
있습니다.
사람을 위한
회복이며
사람을 위한
사랑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바로 보게
해 주시길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의 의미는
우리 삶의
의미입니다.
우리 삶의 모습을
제대로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제대로 보는 것이
바르게 사는 길의
시작입니다.
먼저
우리자신을
속였던
우리자신의
안과 밖의
먼지를 봅니다.
이기심에
갇힌
우리를
이 아침
보고 듣는
모든 것이
뚜렷한
생명의 선물임을
가르쳐 주십니다.
아픔을 딛고
일어서는 힘이
진정한
회복이며
진정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사람의 모습을
되찾으러
가는 길에
만나게 되는
예수님과의
만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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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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