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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교조를 깨자는 말인가? 도대체 어쩌자는 말인가?
전교조 위원장실. 윤희찬 동지 단식농성 14일이다.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고백하건대, 나는 지난 11월 2일부터 지금까지 전교조 장석웅 위원장과 집행부 그리고 그들을 뒷받침하고 있는 전교조내 의견그룹 집단인 ‘참실연’의 ‘폭력’을 규탄하고, 고발하는 일 하나만 하고 있다.
한미 FTA 반대 투쟁에도, 통합진보당 등 진보정치세력의 이합집산에도, 민주당의 전당대회에도 눈을 돌릴 틈이 별로 없었음을 고백한다. 내가 속하고 있어서만이 아니라, 내가 살아가는 가장 중요한 터전이었고, 터전이고, 앞으로도 오랫동안 터전일 전교조에 중대 사태가 벌어졌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전교조 내의 중대한 하자를 방치해두고, 잠시 어떤 일의 성과를 거둔들 그 중대한 하자에 의해 무력화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나는 ‘이주호가 벌이는 교장공모제 무력화 기도 저지 투쟁’ ‘정치기본권을 확보하기 위한 국회 의원회관에서 판을 펼친 무슨 토크 콘서트’ 그리고, 이러저러한 본부, 지부 단위의 사업, 행사들이 다 공염불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전교조에 매우 중요한, 아니 아주 심각한 ‘폭력’ 사태가 벌어졌기 때문이다. 전교조 장석웅 위원장의 총지휘 하에, 현 전교조 집행부와 그들의 의견그룹 집단인 ‘참실연’이 ‘마음에 안든다는 이유 하나로’ 무고한 한 조합원 동지를 짓밟는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나는 이 심각한 문제를 외면하고 다른 일을 할 수가 없다. 나는 그렇다는 말이다. 물론, 다른 조합원들도 그렇게 해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지만, 어디 우리네 삶이 그러한가? 살아가노라면 하루에도 엄청나게 많은 일들에 직면하고, 또 대처해야 하는 게 우리네 삶이 아닌가? 부모님이 아프면 하던 일 멈추고 부모님을 모시고 병원에 가야 하고, 살던 집을 빼달라 하면 또 부리나케 복덕방을 찾아야 하고, 담임 학급 학생에게 어떤 급한 일이 생기면 만사 제쳐두고 달려가야 하는 법이다.
그러나,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일, 그래서 당위적으로 시간을 할애해야 일 외에 무엇인가 스스로의 판단에 의해 선택하고 집중해야 할 일은 있게 마련이고, 그 일이 지금의 내겐 바로 전교조 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폭력 사태’를 온 정성을 다해 마주하는 것이다. 그 ‘폭력 사태’가 일시적이거나, 자연인 한 두 사람의 실책에 의해 벌어지는 것이라면 그렇게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현재, 전교조 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폭력 사태’는 바로, 자연인 한 두 사람이 아니라, 전교조의 집행부가 그 권력을 남용하여 조직적으로, 그리고 일시적으로가 아니라 계획적으로 지속적으로 집요하게 자행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심각성이 큰 것이며, 내가 온 정성을 다하여 이 문제에 골몰하는 이유이다.
전교조는 그저 사회 내에 존재하는 여러 단체들 중의 하나의 의미를 넘는다. 전교조는 매우 중대한 역사성을 가지고 있는 존재이다. 전교조는 한국사회의 민주화 운동의 산물이며, 한국사회 민주화 운동의 중요한 한 축인 교육민주화 운동의 중심 세력이다. 그런 전교조가 민주화 운동의 정체성, 교육민주화 운동의 정체성을 상실할 위기에 처해 있기에 나는 그 전교조의 앞으로의 진로를 심각하게 우려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당연히 전교조를 사랑한다. 단순히 전교조에 나의 젊음을 바쳤기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는 나의 삶의 가치가 여전히 그대로 녹아있기 때문이다. 나의 존재 이유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나는 현재진행형으로 한 조합원 동지에게 가해지고 있는 집단적, 조직적 집행부 권력의 폭력을 증오한다. 그리고, 그 폭력으로 인해 고통을 당하고 있는 그 조합원 동지의 아픔에 매우 가슴절절히 공감한다. 그러나, 단순히 그것만이 내가 지금 전교조 ‘폭력 사태’에 온 마음을 쏟고 있는 이유는 아니다. 그 집단적, 조직적 ‘폭력’이 ‘묵인’되고, ‘용인’되어, 전교조에 ‘내재화’되는 것을 우려하는 것이다. 이미, 지난 수년간 ‘전교조 내에 자리잡고 있는’ 그 ‘폭력’의 실체에 철저하게 맞서지 않는다면, 그것은 더욱 더 깊이, 전교조 내에 뿌리내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내가 깨려하는 것은 내 사랑 ‘전교조’가 아니다. 내 사랑 ‘전교조’의 역사성과 정체성을 송두리째 압살하고 있는 ‘폭력’의 문화일 뿐이다. 이 시점에 과거 일제 36년과 그 이후 대한민국 정부 60여년과의 관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일제 잔재 청산에 실패한 우리 사회가 그 댓가로 지불한 피해와 손실이 그 얼마인가? 지금 버젓이 현실로 존재하는 집단적, 조직적 ‘집행부 권력’에 의한 ‘폭력’에 눈감을 수 없는 까닭이다.
다시 말하지만, 윤희찬 동지에 대한 전교조 장석웅 위원장과 ‘참실연’ 집행부의 행위는 명백히 ‘폭력’이다. 그것도 1년 동안 한 치의 주저함도 없이 지속된 폭력이며, 지난 수년간 지속되어온 폭력의 연속선상에 있다. 이 어찌 심각한 일이 아니겠는가? 2005년 ‘참실연’ 집행부 폭력은 윤희찬 동지 한 사람을 짓밟기 위해, 피해구제 기간 제한 조항을 만들어 피해구제(해고자 급여지급)를 중단시켰으며, 2009년, 2011년 그 피해구제 기간 제한 조항을 연장 혹은 폐지하면서도 집요하게 윤희찬 동지의 피해구제만은 봉쇄해왔다. 그리고, 지난 1년 동안 그에 대한 숱한 문제제기에도 불구하고, 장석웅 위원장 스스로 대의원대회를 농락하고, 중앙집행위원회를 농락하고 중앙위원회를 농락하면서 그 ‘폭력’의 정당성을 가장하였다.
어찌 할텐가?
그냥 이대로 ‘폭력 집행부 권력’의 전교조에 대한민국의 교육민주화의 앞날을 기대할 것인가?
아니면, ‘집행부 권력’의 ‘폭력’은 절대로 용납될 수 없는 것이라고 전교조 스스로 분명히 확인할 것인가?
전교조 앞에 전교조가 싸워야 할 거대한 권력이 있다는 이유로 전교조 안의 ‘폭력’에 눈을 감는 것이 과연 온당한 일인가?
전교조 안의 ‘폭력’을 용인한다면, ‘전교조’의 정체성은 과연 무엇인가?
전교조 내외에 뜻을 같이 하는 동지들에게 무엇이 진실인가 호소하는 것이 헛된 일이 아니길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