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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서도 뭔가 보여주고 죽어서도 뭔가 보여준 이주일 노창현
2002-08-28 오후 12:32:31 조회 : 17789
참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지난 1월 6일 기자닷컴에 올린 '이주일믿다가 박종환에게 혼쭐난 기자'를 읽어보고 있었지요.
1988년 새내기 기자시절 이주일씨와 박종환감독과의 에피소드를 다룬 이 글을 왜 생뚱맞게 다시 한번 읽어보았는지 모릅니다.
덕분에 오자를 하나 발견해 고쳐쓰기까지 했습니다.
한시간쯤 뒤 이주일씨가 타계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제가 그 기사를 읽고 있던 그 순간 유명을 달리한 것이었습니다.
만감이 교차했습니다.
기자를 떠나 한 사람의 팬으로서 그이와의 작별이 가슴아팠습니다.
아직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나이인데...
그는 그저 단순한 코미디 스타가 아니었습니다.
온 국민이 실의와 좌절에 빠져있을 때 웃음과 희망을 주었고
누구보다 불우한 이들을 많이 도왔으며 끝내는 자신의 몸을 불사르며 마지막 순간까지 감동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위대한 코미디의 황제였지만 겉치레와 가식이 없는 대중의 친구요,다정한 이웃집 아저씨같았습니다.
동료코미디언 한무씨의 말처럼 그이는 "살아서도 뭔가 보여주고 죽어서도 뭔가 보여준 사람"입니다.
그이를 처음 보던 때를 잊을 수 없습니다.
80년 어느날 TV에서 난생 처음 보는 코미디언이 나와
우는듯한 찡그린 얼굴로 "못생겨서 죄송합니다"하는 모습이
얼마나 웃기던지 포복절도하고 말았습니다.훌렁 까진 이마,그러면서도 장발에 가까운 뒷머리,찌그러진 코...보기만 해도 우습고 못생긴 얼굴인데 스스로 "못생겨서 죄송하다"니요.
못생겨서 서러운게 아니고 죄송하다는 자학적이고 페이소스 가득한 멘트에 대중은 폭소를 터뜨리면서도 연민의 감정을 느꼈습니다.
곧이어 나온 2탄 "뭔가 보여드리겠습니다"는 멘트는 불붙은 인기에 기름을 부었습니다.도통 웃을 일이 없던 그 시절 사람들은 시대의 아픔을 유머로 승화시킨 이주일씨에 열광했습니다.
새 역사가 노도처럼 물결치던 1980년아니던가요.박정희정권의 오랜 독재가 막을 내리고 국민들은 이제 민주주의가 도래하는구나하는 희망의 싹을 안은 서울의 봄을 맞았습니다.
그러나 광주 민주화 항쟁이 전두환정권에 의해 무참히 진압되고 계엄치하에서 모든 것이 얼어붙었습니다. 신문과 방송은 정권에 순치된 소식만을 전했고 사회정화의 명분에 많은 이들이 일터에서 쫒겨나고 붙들려갔습니다.
국민들은 살아있는 화석이었습니다. 숨은 쉬지만 가슴은 답답하기만 했습니다. 좌절과 분노 실의에 잠겨 있던 그 시절
갑자기 나타난 이주일씨가 내뱉은 '못생겨서 죄송합니다'는 폭압적인 정권에 시달리는 못난 국민들의 자책과 회한,풍자가 담겨 있었습니다. 지금은 짓눌려있지만 언젠가는 움추린 가슴을 펴고 당당하게 소리칠 날이 있을 것이라는 오기와 희망을 '뭔가 보여드리겠습니다'에서 발견한 것입니다.
그때까지 그이는 제도권 코미디언이 아니었지요. TV카메라를 보고 대본을 외워 하는 연기가 아니라 임기응변과 동물적인 본능으로 대중들과 같이 호흡하는 실전파 코미디언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