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년 넘게 무대를 지켜온 연극배우 오현경이 8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많은 매체들이 고인의 연기 인생을 돌아보며 안타까움을 털어놓는데 사실 서울 안국동 토박이로서 서울말과 서울(경성) 문화에 대해 증언해줄 사람이 사라졌다는 점이 안타까움을 더한다.
조선 제일의 문장가로 손꼽히던 구보 박태원의 소설과 에세이, 실제 삶의 흔적을 바탕으로 2018년 극작가 겸 연출가 성기웅이 '소설가 구보씨와 경성사람들'을 무대에 올렸을 때 박태원의 차남 박재영 씨와 함께 서울 토박이말에 대해 연출자에게 자문한 것이 바로 오현경 배우였다.
한 지인은 1936년 안국동에서 태어난 고인이야말로 서울말과 서울 말씨에 대해 증언해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인물이라며 암 투병 등으로 힘겨운 말년을 보내던 고인과의 인터뷰를 추진해 보라고 얘기한 적이 있다. 언젠가 꼭 해야지 미루기만 하다 끝내 신문사를 떠나게 됐고, 이제 부음을 접하고 말았다.
고인이 네 살 적인 1940년 발표된 채만식의 노벨라(중편) '냉동어'를 뒤늦게 찾아 읽으며 서울말이 얼마나 많이 달라졌는지 절감, 또 정감한 터였다.
헌데, 그러나 이미 한 꺼풀 망막 위에 드리운 관념의 베일이란 매우 기묘한 것이어서, 한 부분 한 부분을 차례로 그렇게 한번 웃어보고 난 다음 일순간 후에는, 그와 같이 인상적이던 부분부분의 특징이 삽시간에 죄다 해소가 되면서 따루이 전체의 모습만, 오래오래 사귀던 친구랄지 혹은 집안 권솔 아무고 누구처럼, 조곰도 낯이 설거나 어색한 구석이 없는 얼굴로 어느듯 통일 전화가 되어가지고는 담쑥 와서 마음에 앵기는 것이었었다.
"구차할 며린 없어! 구차할 며린 없어! 규각이라고 않나? 각에다가 원을 씌우자고 드는 건, 저 스스로는 어리석은 짓이요, 세상에 대해선 오히려 해를 끼치게 되는 거야. 그 세댈랑 그 세대의 담당자한테 맽기구서 가만히 그대루 죽은 듯기 앉었으면 구차스럽지 않구, 세상에 사폐 끼치지 않구, 두루 좋잖아? 그런 걸 왜? 무슨 망령으루? 뭣이냐, 비유가 꼬옥 적절하던 안 해두 마침 생각이 난 길에 이야긴데, 아따 저, XXX씨!"
처음에는 생경한 단어와 말씨 때문에 머뭇거려지고 멈칫대다가도 나중에는 소리 내어 읽어보듯 읊조리면 읽는 재미가 쏠쏠했던 것이다. 이제 이런 서울말과 서울 말씨, 서울 문화에 대해 증언해줄 사람이 정말 사라지고 있다. 그래서 오현경 배우의 떠남이 더욱 안타깝다.
고인은 1일 오전 9시 11분 경기도 김포의 한 요양원에서 숨을 거뒀다고 유족들이 전했다. 지난해 8월 뇌출혈로 쓰러진 뒤 6개월 넘게 투병 생활을 이어오다 이겨내지 못했다.
대중에겐 KBS 2TV에서 1987년 10월 18일부터 1993년 10월 14일까지 방영된 'TV 손자병법'의 만년과장 '이장수'로 널리 알려졌다. 아래 1회를 보면 드라마에서 쓰이는 우리말이 30여년 만에 얼마나 놀랍게 달라졌는지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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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 고교 시절 유치진 작가의 작품 '사육신'을 통해 무대에 데뷔한 뒤 극단 '실험극장' 창립 동인으로 활동하며 '봄날', '휘가로의 결혼', '맹진사댁 경사', '3월의 눈' 등에서 진정성 있는 연기를 펼쳐 호평을 받았다. 동아연극상 남자연기상을 비롯해 KBS 연기대상 대상, 서울연극제 남자연기상 등을 다수 수상했고, 2013년에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에 선출됐다.
뇌출혈로 쓰러지기 직전까지도 연극 무대를 떠나지 않았다. 지난해 5월에는 연세극예술연구회가 졸업생과 재학생들이 함께 올린 합동 공연 '한 여름밤의 꿈'에 잠깐 출연하기도 했는데 고인의 유작이 됐다.
지난 2017년 세상을 떠난 윤소정 배우의 뒤를 7년 만에 따랐다. 딸 오지혜 배우와 아들 오세호 씨를 유족으로 남겼다. 빈소는 연세대학교 신촌장례식장 12호실, 발인은 오는 5일, 장지는 천안공원묘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