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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가톨릭문화원 원문보기 글쓴이: 익명회원 입니다
축일 1월11일(1월19일) 3) 옵세르반트의 확장 이탈리아에서의 개혁 그룹인 리포르마티(Riformati)는 1402년에 시에나의 성 베르나르디노, 1414년에는 카페스트라노의 성 요한, 1415년에는 살테아노의 성 알베르토, 1416년에는 마르카 관구의 성 야고보가 입회를 했다. 이들은 모두 옵세르반트의 방향을 결정짓는 인물들이었다. 스페인에서의 옵세르반트(Alcantarini, Discalceati, Guadalupesi)는 통합성은 부족했지만, 아비뇽의 교황 보호 아래 이탈리아보다 더 열정적으로 일어났다. 이 개혁 그룹들은 제각기 독자적으로 움직였다. 이들은 은둔소 칩거의 형태로 살았다. 1415년에는 12개나 되는 은둔소가 설립되었다. 알칼라의 성 디에고(+1463)가 1441년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한 것도 이 은둔소였다. 프랑스에서의 옵세르반트(Recollect) 개혁 운동은 은수적 생활이 아닌 학문과 사도적 활동에 큰 비중을 두었다. 또 교황은 회칙의 영적 준수를 위해 집짓는 일을 허락하였다. 15세기 초에 프랑스 관구의 여러 수도원은 개혁을 받아들였다. 그 후에 개혁 공동체들은 자신들의 관구봉사자들로부터 큰 고통을 당했다. 이들은 1415년에 자신들의 사정을 콘스탄츠공의회에 상정하여 교황들의 초기 해석을 가지고 회칙을 준수할 권리를 주장했다. 그리고 모든 관구의 옵세르반트 수도원들에게 개혁을 받아들이고자 하는 모든 수도자들을 받을 수 있는 자유와 독자적인 장상을 달라고 요청했다. 공의회는 1415년 9월 23일 칙서 <Supplicationibus personarum> 에서 옵세르반트에게 그들이 요청한 모든 것을 허락해 주었다. 더구나 관구 내 속관구들은 해당 관구봉사자들의 재치권 아래에 있지 않으며 나름의 총장 대리를 가지고 총봉사자는 시찰할 권한만 있다고 선언했다. 어떤 수도자라도 본인이 원하면 회칙 준수파 형제들에게 넘어갈 수 있게 되었다. 옵세르반트 조직 체계를 확장시켜나간 그룹들 외에도 많은 다른 개혁 그룹들이 거의 동시다발적으로 생겨났는데, 그들은 자치를 누리면서도 법적으로는 형제회에 속한 채 남아 있었다. 프랑스 북부와 독일의 콜레타니(Coletani), 이탈리아의 아매디테(Amaeditae), 클라레니(Clareni) 등이 있다.
◆ 탈혼 ◆ 한자 脫魂 라틴어 ecstasis 영어 ecstasy 출처 : [가톨릭대사전] 예언자적 탈혼과 신비적 탈혼이 그것이다. 예언자적 탈혼(prophetic ecstasy)은 하느님이 한 개인을 통하여 메시지를 대중에게 전달하고자 할 때 그 개인의 지성을 열어 줌과 아울러 메시지를 오해하거나 그릇 전달하는 일이 없도록 지각기관을 구속함으로써 일어나는 현상이다. 예언자 에제키엘이 성령으로 인도되었을 때(에제 11:24) 탈혼된 경우가 그 적례이다. 이러한 탈혼은 무상으로 주어진 은혜이며 사죄(死罪) 중에 있는 자에게도 허락된다. 한편 신비적 탈혼(mystical ecstasy)은 깊은 묵상의 경지에서 묵상자의 영혼이 하느님께 드높여짐으로써 일어난다. 탈혼자의 얼굴은 빛나는 것이 보통이며 듣거나 볼 수 없으나 하느님과의 일치를 의식한다. 이 탈혼 중에 성령은 그의 선물 특히 지혜와 이해력을 통하여 작용한다. 신비적 탈혼을 경험하고 나면 생활이 성스러워지고 사랑과 기쁨이 커지며 인내심, 참회의 정이 솟아나 신앙이 굳어지고 완덕을 지향하는 열정이 뜨거워진다. 신비적 탈혼은 묵상 중 하느님의 계시를 감당할 만한 육체적인 힘이 부족하여 일어나는 수가 많으므로 건강이 회복되면 탈혼도 그치는 게 보통이다. 관상은 염경기도나 일반적 묵상기도와 달리 단순 본질의 직관적 성격을 갖는 것으로 본질적인 것의 터득에서 오는 것이므로 직관의 기도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과의 친교가 직접적이고 내재적인 일치로 발전한 나머지 하느님을 단순히 바라보는 것이다. 자신 안에 특별히 긴밀한 양식으로 내재하는 하느님을 본질적으로 바라보고 직접적으로 사랑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하느님과 친교하기 위해서 우리는 여러 언어와 개념과 이미지 등에 매개수단을 사용한다. 그러나 친교가 깊어지고 하느님이 사람에게 가까이 현존하심에 따라 그러한 매체가 불필요해지며 마침내 하느님의 영(靈)이 사람 안에 직접 내재하여 활동하실 때에는 사람의 사고와 감정과 상상은 하느님과의 '침묵의 일치'를 방해하는 소음이 되기에 이른다. 더우기 인간의 언어와 개념 등은 하느님이 인간 안에서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계시하고 활동하시려는 자유를 제한하기에 이른다. 관상은 이러한 단계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관상자는 인간의 자연적인 능력을 모두 침묵시키고 단순히 하느님을 바라보고 사랑하는 것이다. 이처럼 관상을 통하여 하느님과 친밀한 친교를 체험하는 가운데 사람은 자신 안에 내재하는 하느님의 존재가 본질적인 것임을 깨닫게 된다. 하느님은 그 사람에게 도달해야 할 목적이라기 보다는 삶의 주제요 내용이며 생명의 원리가 되기에 이른다. 관상은 이에 도달하는 양식에 따라 수득적(修得的) 관상과 주부적(注賦的) 관상으로 나누어진다. 전자는 개인의 노력으로써 직관의 능력에 도달하는 것으로 능동적'관상이라고도 한다. 마음을 가다듬어 번뇌를 끊고 진리를 깊이 생각하여 무아정적(無我靜寂)의 경지에 몰입하는 불교의 선(禪)은 이에 해당한다 하겠다(비그리스도교 선언문 2). 한편 후자 즉 주부적 관상은 하느님의 은혜로 인하여 신적(神的) 영역을 체험하고 신비에 대한 깊은 깨달음을 얻는것으로 수동적 관상이라고도 한다. 일상생활 가운데 성령의 감화를 받아 하는님의 본성을 체험하는 경우가 이의 대표적인 예이다. 이러한 구분에 대하여 과연 인간의 노력으로 관상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는지를 의문스럽게 여기는 전해도 있어서 학설은 일치되지 않고 있다. 관상은 완덕에 도달하는 하나의 수단이지 완덕 자체가 아니다. 모든 사람들은 여러가지 모양으로 완덕에 부르시는 하느님은 일반 신자들의 일상생활이나 활동수도회의 활동생활 가운데 관상의 경지에 도달하게 도와주시기도 하고 교회내 관상기도 한다. 관상은 본직적인 것과 '단 한 가지의 필요한 것'(루가 10:41) 즉 하느님께 집중하게 함으로써 우리를 더욱 겸손하고 관대하게 하며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게 한다. 성 이냐시오의 영신수련에서 나오는 관상 및 관상기도는 또 다른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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