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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년 가해 8월25일 금요일[(녹) 연중 제20주간 금요일]
[수도회] 마땅히 온 존재를 바쳐 사랑해야 하는 우리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룻 1,1.3-6.14ㄴ-16.22
† 복음 마태 22,4-40
◈ 오늘의 묵상
오늘 독서에 나오는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라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선택합니다. 나오미는 베들레헴 출신의 남편 엘리멜렉이
죽고, 두 아들마저 죽자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나오미의 곁을 지킨
며느리는 모압 출신 룻이었습니다. 룻은 하느님을 섬기는 베들레헴
지방으로 가서 보아즈의 아내가 되었습니다. 룻은 오벳이라는
아들을 보게 되는데 “그가 다윗의 아버지인 이사이의 아버지”
(룻 4,17)입니다. 이방인 여자의 하느님 선택은 다윗 가문의 뿌리로
열매를 맺습니다. 오늘 마태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달려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같은 내용의 사건을 기술하면서
(루카 10,25-28 참조), 그 앞부분에 하느님 아버지와 아들의 친교를
언급합니다. 그리고 그 뒷부분에서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어
참된 이웃을 언급합니다. 루카는 참된 하느님의 뜻과 사랑은
예수님을 따르는 데 있으며, 참된 이웃 사랑은 유다인 사랑을 넘어
이방인까지 사랑하는 것임을 보여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라는 유언을 제자들에게 남기셨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새 계명은 예수님의 수난과 희생을 따르는 신앙인의 삶에서
재현됩니다. 우리는 십자 성호를 그으며 예수님의 새 계명을 지키고
따르겠다는 다짐을 하게 됩니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
- 매일 미사 -
◈ [인천] 배움에는 때가 없습니다.
2017년 가해 8월25일 연중 제20주간 금요일
제1독서
<나오미는 모압 출신 룻과 함께 돌아와 베들레헴에 도착하였다.>
○ 룻기의 시작입니다. 1,1.3-6.14ㄴ-16.22
복음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2,34-40
제가 인천 시내를 나갈 때에 항상 다니는 길이 있습니다. 워낙 자주
다니는 길이다 보니 어느 차선으로 가야 더 빨리 갈 수 있는지, 어느
구간에 속도와 신호 단속 카메라가 있는지 등을 훤히 알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차가 없을 때에는 과속도 하게 되는 길입니다.
이렇게 잘 알고 있으니 누구보다도 빠르게 목적지까지 도착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얼마나 빨리 도착하는지
시간을 재보았지요. 혹시라도 끼어드는 차로 인해 방해받을까봐 앞
차에 바싹 붙어서 운전을 했고, 과속을 할 수 있는 구간에서는
과감하게 과속도 했습니다. 빨리 갈 수 있는 차선을 찾아서 계속
차선 변경도 했습니다. 성지까지 도착하는데 40분 걸렸습니다.
이렇게 빨리 도착할 수 있다면서 흐뭇했지요.
다음 날에도 이 길을 가야만 했습니다. 이번에는 정상적으로 운전을
하고 싶었습니다. 규정 속도를 철저히 지키고, 앞 차와의 간격도
충분히 띄어 놓아서 다른 차들이 끼어드는 것에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모든 것을 다 지키면서 또 여유를 가지고 운전을
했는데 시간은 얼마나 걸렸을까요? 깜짝 놀랐습니다. 44분
걸렸습니다. 겨우 4분 차이인 것입니다. 이 4분을 단축하겠다고
전날에는 40분을 초집중할 수밖에 없었고, 때로는 다른 차를 향해
부정적인 마음도 품었으며, 남에 대한 배려도 전혀 없었습니다.
4분의 보상을 위해서 이러한 상황을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과연
저에게 이득일까요? 손해일까요?
누군가가 말했습니다.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라고 말입니다.
즉, 삶의 질이 더욱 더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늘
속도를 더욱 더 중시했던 것 같습니다. 방향을 제대로 잡지 않고
바쁘게만 달려가면 목적지에서 더욱 더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한 율법 교사 한 명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인지를 묻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옛날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탈출시키신 뒤에, 가나안 땅에 들어가
사람답게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지침으로 십계명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계명을 나누고 쪼개어서 세부 조항을
만듭니다. 즉, ‘무엇을 어떻게 하라’는 조항이 248개,
‘하지 마라.’는 조항이 365개, 도합 613개의 율법입니다. 이 율법
가운데에서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이냐는 질문이었지요.
예수님께서는 조금의 생각도 하지 않으시고 단호하게 바로
‘사랑’이라고 말씀하시지요.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라고 하십니다.
따라서 사랑의 마음 없이 행한다면 아무리 율법을 지킨다 해도
주님의 뜻을 제대로 따른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방향이
잘못된 것이지요.
주님께서 가장 강조하신 ‘사랑’에 우리의 모든 것을 맞춰나간다면
어떨까요? 비록 속도가 느려도 방향만 제대로라면 분명히 주님께서
약속하신 하느님 나라의 선물을 얻게 될 것입니다.
꿈을 너무 거창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그냥 남들보다 조금 더 잘
하는 것, 조금 더 좋아하는 것, 그런 사소한 행복에 집중하는 게
중요해요(주호민).
송주석 안셀모 신부님 1주기 미사 다녀왔습니다.
열의를 가져보세요. 배움이 재미있습니다.
학창시절에 학교 가기가 너무 싫을 때가 있었습니다. 아마 중학교
1학년 때였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공부를 하다가 앞으로 학교 다닐
시간을 계산해보니 끔찍한 것입니다.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여기에 대학교 4년까지 앞으로 10년을 꼼짝없이 학교에 다녀야
한다고 생각하니 숨이 막히는 것만 같았습니다(물론 신학교에
들어가서 대학원까지 다녔으니 도합 13년의 시간을 보냈다).
이제 신부로 살아가면서 시험을 보는 학교에 갈 일은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평생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그래야 주님도 더 잘 알 수 있고, 주님의 뜻에 맞게
제대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젊었을 때에는 이
사실을 왜 깨닫지 못했을까요? 바로 열의가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제서품을 받고서 처음 간 본당에는 어르신들을 위한 학교가
있었습니다. 학교라고 공식 명칭이 되어있는데, 어르신들이 얼마나
좋아하시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 학교는 1년이라는 짧은
과정입니다. 그래서 이 과정을 마칠 때쯤 어떤 할머니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뭔 놈의 대학이 1년 만에 끝나? 서운해 죽겠네.”
배움에는 때가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면 분명히
배움에는 때가 없습니다. 열의만 있다면 누구보다도 신나게 공부할
수 있고, 기쁘게 생활할 수 있습니다.
해바라기가 벌써? 가을이 다 왔나봅니다.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마땅히 온 존재를 바쳐 사랑해야 하는 우리 -
기경호 프란치스코
2017년 가해 8월25일 연중 제20주간 금요일 마태 22,34-40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태 22,37.39)
마땅히 온 존재를 바쳐 사랑해야 하는 우리
예수님께서 사두가이들과 하신 부활 논쟁에서 그들의 말문을 막아
버리십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이 소식을 들은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을 공격하려고 한데 몰려와 율법과 예언서에 관한 논쟁을
벌입니다. 그들 가운데 한 율법 교사가 예수님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인지 묻습니다(22,34-36).
예수께서는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여 주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라 하십니다
(22,37-38). 하느님으로부터 온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계명은
하느님 사랑이라고 답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이
아침저녁으로 암송하던 ‘쉐마 이스라엘’(너, 이스라엘아 들어라.
신명 6,4-5)을 상기시켜주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 자신의 가장 심원한 곳에 있는 마음과 생명력, 사고를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온 존재와 힘과 생각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으뜸 계명임을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나를
이 세상에 ‘있게’ 하시고, 생명을 주셨으며, 영원히 함께하시고
사랑하시는 주님을 온 힘과 정성을 다해 사랑함이 우리 도리입니다.
사랑으로 나에게 당신 자신을 건네주신 주님께 내 전부를 드리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내 삶의 근원이요 뿌리인 주님을 사랑할
때 우리는 내 밖의 존재를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사랑
자체이신 주님을 사랑하지 않고서, 또 주님의 사랑이 아닌 다른 그
어떤 것으로 누군가를 참으로 사랑할 수는 없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레위 19,8) 또한
하느님 사랑과 마찬가지로 중요하다 하십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은 비슷하며 서로 떼어놓을 수 없다는 것이지요. 하느님을
진정 사랑한다면 이웃을 사랑하지 않고는 못 배길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를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누가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한다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1요한 4,20)
그런데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힘은 절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신 하느님께로부터 옵니다. 이웃을 ‘나 자신처럼’ 사랑하는
일은 수시로 변하는 애정에서 나오는 감정이 아니라, 누군가와
연관된 선택의 문제입니다. 오직 사랑이라는 이유만으로
타자(他者)에게 자신을 내주고, 그를 중심으로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하려는 ‘선택’ 말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듯이 이웃을 사랑하는 그런 선택과 결단을 하려면,
사랑이신 하느님 안에 머물러, 자신을 개방하고 헌신해야 할
것입니다. 마음 열어 하느님의 자비와 선과 생명을 내 안에 받아
모시지 않고 사랑할 순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위해 ‘낮추시고
비우시어’ 목숨까지 바치신 주님의 사랑에 동화되고 동참하지 않고
어떻게 이웃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느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울타리를 허물고 원수와 피조물에게까지 사랑의
품을 넓혀갈 것입니다.
우리 모두 눈앞의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 사랑을 통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하고, 하느님 사랑으로 이웃사랑을 더 넓고 깊게
실천해 나가야겠습니다. 하느님을 드러내는 이웃사랑이 되도록
사랑이신 주님의 집에 머물도록 합시다. 기도가 공염불에 그치지
않도록 살아있는 기도가 되어 이웃에게 달려갑시다. 이웃사랑으로
드러나지 않는 하느님 사랑은 관념의 유희일 뿐이기 때문이지요.
오늘도 실천 없이 입으로만 떠들어대는 사랑, 사랑 실천으로
드러나지 않는 관상기도, 자신의 내적 평화와 기쁨만을 찾는
신심행위 그 어떤 것도 사랑의 이중계명과 무관함을 깊이 깨달아,
온몸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했으면 합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신부 -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 [수도회]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태 22, 37)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강론 묵상
2017년 가해 8월25일 연중 제20주간 금요일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태 22, 37)
율법의 역할은 사랑의 질서를 바로잡아주는 데 있습니다.
사랑의 질서는 삶의 의미로 이어집니다.
삶의 의미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데 있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할 때 이웃과 형제들또한 올바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향한 사랑 없이는 우리 존재또한 긍정할 수 없습니다.
삶의 여정안에서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을
끊임없이 만나게됩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우리의 모든 것이
하느님을 향해 소통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 방식인 섬김을 우리가 따른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할 때 흩어진
모든 것은 하나가 됩니다.
모든 것의 핵심은 하느님을 우리의
일상안에서 진심으로 사랑하는 섬기는 것입니다.
가장 큰 행복은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데서 행복을 깊이 체험하는
사랑의 오늘되시길 기도드립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서울] 연중 제20주간 금요일
2017년 가해 8월25일 연중 제20주간 금요일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 마태 22,34-40
전통적으로 국가는 ‘영토, 국민, 정부’가 있어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지구상에는 영토, 국민, 정부가 있는 나라가 많이 있습니다.
UN 회원국은 193개, 세계은행 통계는 229개, 세계지도는 237개,
국제법상은 242개(비독립국 포함)를 전 세계 국가수로 보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통신수단, 교통수단이 발전되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국가를 여행하기도 어려웠고, 다른 국가로 여행을 한다는 것은
위험을 각오하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지금 우리는 통신, 교통수단의
발전과 컴퓨터의 도움으로 예전보다는 훨씬 쉽고 편하게 해외여행을
할 수 있습니다. 국가는 개인에게 여권을 발급해주고, 여권은 다른
나라를 여행할 수 있는 통행증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구라는 별에서 세상을 보면 참 많은 나라가 있는 것
같지만 지구라는 별 밖에서 세상을 보면 지구는 참 외롭고, 작은
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구는 태양계에 속해 있고, 태양은
은하계에 속해 있고, 은하계는 성단에 속해 있습니다. 그리고
우주에는 정말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많은 별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또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 많은 별들 중에서 유독 지구만이
푸른빛을 보이고 있고, 지구만이 다양한 생명이 함께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나라 사람을, 우리의 이웃을
정말 내 몸처럼 아끼고 사랑해야 합니다.
현실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그릇된 신념, 인종적인 차별, 욕망,
적대감 때문에 서로의 가슴에 총부리를 겨누고 있으며, 인류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수많은 전쟁이
있어왔습니다. 자연재해와 사고로 죽은 사람의 숫자보다
동료인간들의 폭력에 의해 죽은 사람들의 숫자가 더 많을 것입니다.
우리의 몸도 그렇습니다. 무절제한 생활, 과도한 음주와 흡연,
업무에 대한 심한 스트레스, 육류위주의 식사, 지나친 경쟁과 성장
위주의 삶은 분명 우리의 몸에 신호를 보내기 마련입니다. 우리 몸이
보내는 신호를 우리는 병이라고 말을 합니다. 그래서 겉으로 드러난
증상을 없애려고 합니다. 칼을 대서 수술을 합니다. 약을 먹어서
증상을 없애려고 합니다. 하지만 근본적인 원인을 고치지 않으면
우리의 몸은 또 다른 방법으로 신호를 보낼 것입니다. 그만큼
우리의 몸은 정교하고, 우리의 몸은 우리에게 원인을 치유할 수
있도록 표현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가치는 피부의 색, 직업과 직책, 재산의 많고 적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의 전환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사랑 받는 소중한 존재임을 알아야 합니다. 서로에 대한 신뢰와
소통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우리가 규칙적인 생활, 긍정적인 마음,
더불어 살아가려는 열린 마음을 갖는다면 우리의 몸은 평온을
되찾을 것입니다. 하루의 생활을 성찰하고, 이웃을 도와주며, 가진
것을 나눈다면 우리의 몸은 건강하게 될 것입니다. 하늘을 보고
흘러가는 구름을 볼 수 있다면, 아무런 욕심과 미련 없이 아래로
내려가는 강물을 볼 수 있다면, 아무런 대가 없이 아름답게
피었다가 지는 꽃을 볼 수 있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영원한 삶을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몸은 우리의 영혼을 보여주는 하느님의
소중한 선물임도 알게 될 것입니다.
본당에 있을 때, 나눔의 우산, 사랑의 우산을 기증해 주시기를
부탁드렸습니다. 우산을 가져오지 않고 성당에 왔는데 갑자기 비가
내리면 우산을 빌려드리기 위해서입니다. 많은 분들이 나눔의
우산을 기증해 주셨습니다. 본당에서 준비한 사랑의 우산을 쓰면서
비를 피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사랑의 실천입니다. 주위를
살펴보면 외로움의 비를, 슬픔의 비를, 고통의 비를 맞고 있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에게 따뜻한 위로의 우산을, 작은 봉사의
우산을, 희생의 우산을 나누어 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그 사랑이 우리를 하느님 나라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청주] 사랑은 모든 것의 근본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7년 가해 8월25일 연중 제20주간 금요일 (마태22,34-40)
사랑은 모든 것의 근본
하느님은 사랑 자체이시고(1요한4,16) 우리가 깨끗하지 못해도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느님은 사랑 자체이시기에 사랑하실
수밖에 없으십니다. 따라서 “선한 사람에게나 악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옳은 사람에게나 옳지 못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십니다”(마태5,45).
하느님의 사랑에는 한계가 없고 그 깊이 또한 헤아릴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성 요한은 “하느님께 대해 어떤 특별한 것을 알려
하거나 느끼고 싶어 하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가득 찬 마음을 지닌
채 주님을 향하는 것으로 만족하시오! 사랑에 불타는 영혼은 조금도
피로하지 않고 또 남을 피로하게 만들지도 않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사막의 은수자 까롤로 까레또도 “이해하려 들지 마시오, 결코
성공하지 못할 것입니다. 알려들지 마십시오. 결코 알지 못할
것입니다. 다만 사랑하기를 힘쓰십시오. 사랑 안에서, 사랑
안에서만 버림받은 예수님과 이 세상에서 버림받은 모든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계명은 사랑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사랑한다면 그 사랑이 구체적인 이웃 사랑으로 드러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의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가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의 형제도 사랑해야 한다는 이 계명을 우리는
그리스도에게서 받았습니다”(1요한4,20-21).
사랑은 모든 것의 근본이고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에 가치를 부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회피하지 마십시오. 사랑은 가까이
다가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을 산다는 것은 아무런 내색도 없이
어떤 요구도 없이 그저 베푼다는 의미입니다”(리지외의 성녀 데레사).
“사랑은 이유를 묻지 않으며 이익을 따지지 않습니다. 사랑이란
존재에 있습니다. 존재하기 때문에 사랑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존재합니다”(성 베르나르도). 그러므로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당신이 원하는 바를 하십시오”(성 아우구스띠노).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주님을 사랑합니다.
- 청주 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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