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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포도주
요 2:1-12
1 사흘째 되던 날 갈릴리 가나에 혼례가 있어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 계시고
2 예수와 그 제자들도 혼례에 청함을 받았더니
3 포도주가 떨어진지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4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5 그의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6 거기에 유대인의 정결 예식을 따라 두세 통 드는 돌항아리 여섯이 놓였는지라
7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귀까지 채우니
8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시매 갖다 주었더니
9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도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
10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
11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12 그 후에 예수께서 그 어머니와 형제들과 제자들과 함께 가버나움으로 내려가셨으나 거기에 여러 날 계시지는 아니하시니라
요 2:1-12 / [가나의 결혼잔치] 이틀 후 갈릴리 가나 동네에 결혼잔치가 있었다. 그 잔칫집에는 예수의 어머니도 계셨고 2) 예수도 제자들과 함께 초대를 받아 와 계셨다. 3) 그런데 잔치를 하는 도중에 포도주가 떨어지자 예수의 어머니가 이 문제를 예수께 의논하였다. 4)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지금은 하는 수 없습니다. 아직 내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 5) 그러나 예수의 어머니는 하인들에게 `무엇이든지 그분이 시키는대로 하게' 하고 일렀다. 6) 거기에는 마침 물이 너덧 말 들어가는 돌항아리 여섯 개가 놓여 있었다. 이 항아리는 유대 사람의 정결예식에 사용하는 것이었다. 7-8) 예수께서는 하인들에게 `항아리마다 물을 가득 채우라' 하고 이르셨다. 그들이 그 말씀대로 물을 다 채우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이 물을 떠서 잔치를 주관하는 사람에게 가져다 주어라.' 9) 잔치를 주관하는 사람이 그 물을 맛보았을 때는 이미 물이 포도주로 변해 있었다. 하인들은 그 포도주가 어디서 난 것인지 알고 있었지만 그 사람은 그 포도주가 어디서 난 것인지 몰랐으므로 신랑을 불러 10) 말하였다. `이거 아주 훌륭합니다! 최고의 맛입니다. 누구나 처음에는 최고급 포도주를 내놓다가 손님들이 실컷 마시고 취한 뒤에는 값싼 것을 내놓는 법인데 당신은 마지막을 위해서 최고급품을 준비해 두었군요!' 11) 갈릴리 가나에서 있었던 이 이적은 예수께서 자인의 능력을 첫번째로 사람들 앞에 나타내신 것이었다. 제자들은 참으로 예수가 메시야이신 것을 믿었다. 12) 결혼 잔치가 끝난 뒤에 예수께서는 어머니와 동생들과 제자들과 함께 가버나움에 내려가셨다. 그리고 그곳에서 며칠 동안 머무르셨다.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공생애 기간 동안 행하신 7대 표적을 통해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고 한다고 증거합니다(요 20:30-31). 그 중 갈릴리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행하신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사건은 공생애 첫 번째 표적이며 요한복음에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포도주가 떨어진지라(1-5) 가장 행복하고 즐거워야 할 축제인 혼인잔치에 손님들을 대접하는 포도주가 다 떨어졌습니다. 잔치집에 포도주가 떨어진 일은 매우 당황스러운 일로서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포도주가 없다고 상황을 전합니다. 예수께서 나와 무슨 상관이 있냐고 답변하시며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예수의 어머니는 그 집 하인들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고 당부합니다. 첫 번째 표적은 이렇게 포도주가 떨어짐으로 출발했고 그 사실을 예수께 알리므로 시작되었습니다. 인간의 결핍을 주님께 아뢸 때 하나님의 은혜는 시작됩니다.
하인들은 알더라(6-10) 예수께서 즉각 하인들에게 정결예식에 사용하는 돌항아리 여섯에 물을 채우라고 말씀하셨고 하인들이 물을 아귀까지 채웠습니다.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 갖다 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상황은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하인들은 주저치 않고 예수께서 명하신 대로 순종하여 항아리의 물을 떠다 연회장에게 주었습니다. 연회장은 물로 된 새 포도주를 맛보고 사람들이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어주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주는 것이 일반적인데 오히려 좋은 포도주를 준비했다가 주었다고 칭찬합니다. 연회장은 맛보고도 알지 못했지만 먹어 보지 않았으나 ‘하인들은 알더라’고 성경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표적은 이렇게 하인들의 순종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제자들이 믿으니라(11) 가나의 혼인잔치에 함께 따라온 제자들은 앞서 요한복음 1장에서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상 죄를 지고 가시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선포하는 말씀에 따라 예수를 따랐습니다. 이제는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고 예수께서 첫 표적을 통해 영광을 나타내시며 제자들이 그를 믿었다고 기록합니다. 말씀이 지식으로 알고 경험적으로 믿어지는 일이 진정한 축복입니다.
적용: 결핍을 통해 주님을 찾았던 일이 있습니까? 결핍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때입니다. 요한복음의 저자는 예수님의 첫 번째 표적이 혼인잔치에 참석하셔서 행하셨음을 말합니다. 결혼식과 새 포도주로 모두에게 기쁨을 안겨 주었다는 것입니다. 두 가지를 주목하십시오. 세상에서의 혼인잔치의 모습과 시랑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과 교회가 이룰 혼인잔치를 묵상하셔야 합니다(참조 사 62:4; 마 25:1; 계 21:9).
크신 하나님을 우리의 사고 속에 가두어 두면 안됩니다. 우리의 사고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역사하실 수 있도록 우리의 사고가 하나님의 사고로 바뀌어야 합니다. 아주 작은 일부터 실천할 때 주님의 일하심을 볼 수 있습니다. 내가 할 일은 날마다 주님과 함께 가는 것입니다. 주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할 때에 비로소 알게 되는 신앙의 경험이 있는 것입니다.
< 설 교 >
길을 닦는 사람들
길을 닦는 문제는 참 중요한 문제입니다. 우리 나라가 이처럼 짧은 시간에 경제발전을 이루게 된 가장 큰 요인중에 하나가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한 일이라고 합니다.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끝나자 경제가 발전하고 물동량이 크게 늘어났습니다. 문제는 길이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외국을 시찰하고 돌아와 고속도로 건설을 앞장서 밀어 부쳤다는 이야기는 유명합니다. 때마침 태국의 고속도로 건설을 하고 돌아온 현대의 정주영회장에게 맡겨 고속도로 공사를 시작하였는데 공사도중에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습니다. 어려운 난관을 뚫고 1969년 9월 11일, 590일만에 428Km의 경부고속도로가 완공되었습니다. 그래서 경제가 급성장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길은 로마로 라는 말이 있습니다. 로마가 세계를 쉽게 정복할 수 있었던 비결을 역사학자들은 길에서 찾습니다. 로마는 어떤 나라를 정복하면 제일 먼저 길을 닦는다고 합니다. 길을 넓고 곧게 만드는 작업을 해 놓습니다. 그리고는 점령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나면 신속히 그 길을 따라 로마의 군대를 파견하여 반란을 평정하여 로마의 강력한 통치를 지속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뿐만아니라 새로운 지역을 점령할 때도 잘 닦여진 길을 통해 군대를 파견하기 때문에 신속하게 군대를 이동할 수 있어서 좋고 물자를 보급하는데도 용이하여 다른 나라보다 전쟁을 쉽게 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길을 잘 닦아 놓는 것은 중요합니다.
2000년 전에 광야에서 요한이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을 인용하여 외쳤습니다.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골짜기는 메우고, 산을 낮게 깍고 험하고 굽은 길은 곧게 평탄하게 만들라."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기에 앞서서 나타나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께서 오시니 길을 닦고 주님을 맞을 준비를 하라는 선포를 하였습니다. 마음의 길을 닦고 주님을 맞으라는 말씀입니다. 헛된 마음을 버리고 닫힌 마음을 열고 그리스도를 영접할 준비를 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여기서 길을 예비하라는 말은 본래 옛날에 왕들이 행차를 할 때 미리 백성들을 동원해서 길을 닦고 청소를 하여 임금을 맞을 준비를 하는데서 나왔습니다. 그렇습니다. 왕이 행차를 하는데 길을 닦아서 반듯하도록 준비해 놓지 않으면 얼마나 불편하겠습니까? 먼 길일수록 길이 좋아야 피곤하지 않게 잘 다녀올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백성들이 나와서 수고하여 깨끗하고 불편함이 없는 길로 만들어 놓아야 합니다. 그래야 왕이 순조롭게 행차를 하여 백성들에게 좋은 정치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왕중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곧 우리들에게도 찾아 오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위하여 길을 예비하는 사람이 많이 있어야 주님께서도 불편함없이 순조롭게 찾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큰 은혜를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 주십니다. 오늘 우리도 주님이 우리에게 오실 길을 찾아 준비하여야 하겠습니다.
요한이 광야에서 사람들에게 주의 길을 예비하라고 외쳤습니다. 예수님이 이제 찾아오시니 무엇보다도 길을 신속하게 준비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가운데 찾아오시록 가만히 앉아서 기다릴 것이 아니고 길을 준비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마음에, 우리의 가정에, 우리의 교회에 우리 민족 한가운데 오시게 하기 위해서 우리가 준비하여야 할 길은 무엇입니까?
1. 골짜기를 메워야 합니다.
반듯한 큰 도로를 만들기 위해서는 돌과 흙을 퍼 날라서 골짜기를 메워야합니다. 우리의 마음에 주님께 향하는 도로를 만들기 위해서도 골자기를 메워야합니다. 우리의 마음에 있는 골짜기는 무엇입니까? 흔히 골이 깊이 파였다고들 말합니다. 사람들의 마음에 불신의 골이 파이고, 피해의식의 골이 파이고, 절망의 골이 깊이 파였습니다. 그래서 마음에 파인 깊은 상처로 인해 예수님의 복음이 마음에 들려오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믿어지지 않습니다. 진리가 기쁨으로 역사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오셨어도 이미 마음에 골이 깊은 사람들에게는 거부의 몸짓이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사마리아 우물가의 여인은 주님을 만나 이야기를 하면서도 계속 의심하고 퉁명스럽게 대하지 않습니까?
어느날 영국의 유명한 복음운동가 휘필드가 깊은 절망감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때 그를 신앙적으로 도와오던 헌팅펀여사가 나타났습니다.
"저는 이제 용기와 힘을 잃었습니다.이제 다시 일어날 수 없을것 같아요" 그러자 헌팅펀여사가 빙긋이 웃으며 말했습니다.
"잃어버린 것을 감사하세요.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잃은자를 구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기 때문입니다.바로 당신을 구하시기 위해 오셨다는 말입니다" 상심하고 절망하던 마음에 희망을 채우고 다시 도전하였을때 살아계신 주님의 능력을 체험하고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주님의 진정한 은혜를 맛보고 참 생명을 누리기 위해서는 먼저 골짜기를 메워야 합니다. 마음에 말슴으로 채워야합니다. 마음에 용서와 사랑으로 채워야 합니다. 마음에 감사와 기쁨으로 채워야 합니다. 그럴때 주 예수님게로 이어지는 고속도로가 뚫릴 수 있습니다.
2. 산과 언덕은 낮아져야 합니다.
반듯하고 큰 도로를 만들기 위해서는 산을 깡아서 평평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에 주님께 향하는 도로를 만들기 위해서는 교만의 산을 깍아 내야 합니다. 자만의 산도 깍아 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마음을 쓸데 없이 높여 산과 같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교만의 산이 예수님을 만나는데 큰 방해물이 되고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고향사람들은 교만하게도 예수님을 선입견을 가지고 판단하고 불신하였습니다. 그들을 위해 고향에 가셨으나 고향사람들은 하나같이 교만한 마음을 보리지 못하고 예수님을 낯추어 보고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아무 능력도 행하지 않고 선지자가 고향을 제외하고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다고 하시며 떠나가셨습니다.
1646년 프랑스의 한 의사가 얼음판에 넘어져 골절상을 입은 환자에게 왕진을 갔다가 환자의 아들에게 성경을 건네주었습니다. 그 아들은 23세의 패기에 찬 청년으로 19세때 이미 계산기를 발명한 과학자요 수학자인 [천재]였습니다. 이 [오만한 천재]는 그러나 성경을 받은것을 계기로 오만한 마음을 버리고 겸손해졌습니다. 그리고 후에 그 어떤 과학이나 수학의 업적보다 위대한 업적을 인류에게 남겼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진리와 사랑을 사유한 책 [팡세]였습니다. 청년의 이름은 파스칼. 파스칼은 1662년 39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날 때 말했습니다. [주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예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선물을 받아 누리기 위해서는 교만과 자만의 산을 깍아내리는 작업을 먼저 해야 합니다. 끊임없이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며 우쭐거리는 교만한 마음을 깍아내야 합니다. 평평하게 낮아지기 까지 다른 사람이 귀하게 보이고 중요하게 느껴질 때 까지 계속 깍아내야 합니다. 여러분 눈에 다른 사람이 시시하게 보여지고 있다면 아직 덜 깍은 것입니다. 여러분이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있다면 교만이 남아 있는 증거입니다. 부지런히 마음의 산을 깍아내시기 바랍니다.
3. 굽은 것은 곧아져야 합니다.
꼬불 꼬불 꼬부라진 길은 반듯하게 정비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에도 꼬부라진 길이 있습니다. 간사한 마음, 모든 것을 비판적이고 부정적으로 보는 시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칭찬도 아첨처럼 들립니다. 위로도 조롱처럼 들립니다. 충고도 멸시처럼 들립니다. 마음이 꼬였기 때문에 자주 삐칩니다. 쉽게 오해하고 삐뚤어진 마음으로 항상 부정적으로만 바라봅니다.
이처럼 꼬부라진 마음도 곧게 펴야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곧은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주님의 선물을 받아 누리며 하나님이 계획하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세상의 사람들이 또는 주변의 사람들이 꼬부라진 마음을 갖고 불평하며 오해하여도 여러분은 하나님의 백성답게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는 사람답게 항상 마음을 곧게 하시기 바랍니다.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은 자신의 신앙적인 열심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였습니다. 종교적인 행위, 율법에 대한 지식, 열심등에 대한 자부심으로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면서 구부러진 마음으로 가득하여 예수님이 찾아오셨건만 자신들의 오만하고 구부러진 잣대로 재어 보고는 판단하고 정죄하였습니다.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사람은 골짜기를 메우는 사람입니다. 높은 산도 깍아내어 평평하게 하는 사람입니다. 구부러진 길을 곧게 험한 길을 평탄하게 하는 사람입니다. 그 길은 다른 데 있지 않고 여러분의 마음에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의 마음에는 예수님이 오실 수 있도록 평평하고 반듯한 길이 뚫려 있습니까?
한신에서 상담학을 가르치시는 정태기교수님이 미국에서 공부할 때에 소록도에 관한 글을 읽고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유학생활을 마치고 돌아와 소록도에 찾아갓습니다. 주일날 예배를 드리는데 목사님께서 통성기도를 시켰습니다. 그런데 어떤 형제가 "하나님, 이 크고 놀라운 은혜를 어찌 다 갚는데유~ 하나님, 이 크고 놀라운 은혜를 어찌 다 갚는데유~ 하나님, 이 크고 놀라운 은혜를 어찌 다 갚는데유~" 하면서 통곡을 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도대체 얼마나 큰 은혜를 받아서 그러나 싶어서 살짝 눈을 뜨고 쳐다 보았더니 한쪽 눈을 달아나고 없었고 귀와 코는 문드러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고 입을 삐뚤어져 있었으며 손가락도 다 없어져 뭉뚱하게 생긴 두 팔뚝만 있는데 그 팔로 바닥을 치면서 "하나님, 이 크고 놀라운 은혜를 어찌 다 갚는데유~" 하고 기도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기도가 어찌나 정목사님의 가슴을 치는지 고압선에라도 감전된 것 같더랍니다. 이 형제가 이런 모습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어찌 다 갚는데유 하고 울며 기도한다면 나는 어찌해야 하는가? 그 시간에 마음에 응어리졌던 모든 상처가 다 녹아 내리는 것 같았답니다. 그래서 눈물이 왈칵 쏟아지고 흑흑거리며 예배시간 내내 울었답니다.
그렇게 울며 기도하는데 큰 몽둥이같은 것이 옆구리를 쳐서 깜짝 놀라 눈을 떠 보니 다른 사람은 모두 가고 그 형제가 서 곁에 서서 "예배 끝났시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정목사님이 "하나님께서 형제님에게 어떤 은혜를 주셨기에 그렇게 '크고 놀라운 은혜를 어찌 갚는데유~'하면서 기도를 하셨습니까?" 하고 물어보았더니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내가 병들었을 때 나를 가장 먼저 버리고 도망간 것은 아내였습니다. 우리는 17년간 연애하고 결혼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몹쓸 병에 걸리자 나를 버리고 도망갔어요. 형님도 동생도 다 날 버리고 떠나갔습니다. 나를 보고 눈물짓던 어머니 아버지도 나를 버렸습니다. 죽을 곳을 찾아 이 곳 저곳을 찾아 헤메다가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찬송을 펼칠때마다 하나님은 나를 반겨 주셨습니다. 말씀을 펼칠 때마다 나를 위로해 주셧습니다. 말씀을 들을 때마다 내게 용기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끝까지 사랑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추한 몸, 더럽다 하지 않으시고 존귀하다 말슴하시니 내가 은혜를 받은 사람이쥬. 이 은혜를 어찌 다 갚는데유~"
예수님이 오늘 우리가운데 찾아 오셨습니다. 길을 준비한 사람은 이 사람처럼 큰 은혜를 맛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길을 닦지 않고 있는 사람은 주님을 만나지 못합니다. 큰 은혜를 경험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볼 수 없습니다. 주 예수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에 깊이 찾아 오시도록 가정에 들어 오시도록 길을 닦는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산을 깍고 골을 메우며 구부러진 길을 곧게 만드는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여러분의 눈앞에 활짝 펼쳐 지기를 꿈꾸며 하나님의 능력을 날마다 체험하며 살아가기를 기대하며 크고 반듯한 길을 닦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변화하라
박인걸 목사
어떤 체제나 제도, 그리고 제도와 환경을 변화시키는 데는 몇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혁명, 개혁, 혁신, 그리고 변화입니다. 2014년 우리교회 표어는 변화, 성장, 부흥입니다. 오늘은 그 첫 번째 주일로서‘변화하라.’는 주제로 설교를 하려 합니다.
사람은 특별한 일이 있을 때면 결심을 하게 됩니다. 새해를 맞았을 때, 처음 학교에 입학을 했을 때, 군 입대와 제대를 하였을 때, 직장을 구하여 첫 출근 했을 때, 결혼을 했을 때, 자녀를 낳았을 때, 그리고 어떤 중요한 일을 시작했을 때입니다. 우리는 2014년을 맞아 변화를 결심하고 새롭게 출발하는 일은 아주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또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교회 금년 표어가“변화, 성장, 부흥”의 키워드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100%변화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여기서 변화는 내적 변화이며, 인간의 근본적인 변화를 칭합니다. 어떤 분은 인간을 파멸시키는 일곱 가지 타락요소가 있다고 했습니다.“원칙 없는 정치, 근로 없는 축재, 양심 없는 쾌락, 인격 없는 지식, 도의 없는 기업, 인간성 없는 과학, 희생 없는 신앙”이 그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이 일곱 가지 때문에 사회와 국가가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무엘 스마일즈(Samuel Smiles)는“사고가 바뀌면 행동이 바뀌고, 행동이 바뀌면 습관이 바뀌고, 습관이 바뀌면 성격이 바뀌고, 성격이 바뀌면 운명이 바뀐다.”는 말을 했습니다. 그의 주장은 운명을 바꾸게 하는 첫 단초는 사고의 변화, 즉 마음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회개는 마음의 변화를 뜻합니다. 지금까지 살아 온 삶의 스타일을 버리고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선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따라 복음적인 사람으로 변화 할 때 곧 구원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께서 공생애를 출발하시면서 행한 첫 번째 기적입니다. 가나 혼인집에서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게 한 일입니다. 전후 맥락은 본문에서 써져 있고, 교회를 오래도록 다닌 성도들은 본문을 주제로 수없이 많은 설교를 들었을 것입니다. 고로 문맥적 해석과 문화적 해석, 그리고 신학적 해석은 생략합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변화이며, 예수님은 이 세상을 변화 시키러 오셨고, 그의 사역은 3년 내내 사람을 변화 시키는 일을 하셨으며, 그를 만난 사람들은 모두 변화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복음이 들어간 나라, 민족, 가정, 개인은 모두 변화하였고, 지금도 그 변화는 지속적으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물이 포도주로 변한 이 사건은 적어도 여덟 가지 이상의 변화가 일어났다고 생각합니다. 맛의 변화, 질의 변화, 색깔의 변화, 위치의 변화, 역할의 변화, 가치의 변화, 가격의 변화, 용도의 변화입니다. 물이 포도주로 변화하는 사건으로 인하여, 잔치집의 분위기가 달라졌습니다. 포도주의 고갈로 인하여 근심하던 주인의 불안이 사라졌습니다. 흥이 되살아났습니다. 축제 분위기로 바뀌었습니다. 변화는 모든 사람을 행복하게 합니다. 삶의 본질을 바꾸어 놓습니다.
이 사건에서 변화의 주도자는 예수 그리스도이며, 예수 그리스도가 개입한 인생은 변화가 가능하다는 것을 일깨우며, 동시에 변화를 가져오게 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며, 동시에 우리의 구세주가 된다는 것을 본서는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어떻게 변화해야 한다는 말입니까?
1. 변화의 내용
저는 적어도 다섯 가지가 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인생이 변화고, 가정이 변화고, 교회가 변화할 것입니다.
첫째, 의식의 변화해야 합니다.
다른 말로 가치관의 변화 혹은 사고의 변화입니다. 사람들은 어떤 고정관념 속에 갇혀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고정관념이란 잘 변하지 아니하는 행동을 이르는 말이며, 또는 무엇을 결정하는 확고한 의식이나 관념을 이르는 말입니다. 우리는 21세기 최첨단 과학정보화 시대를 살아가면서 아직도 농경문화 시대의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분들이 있고, 도시문화 속에 살면서도 시골 농사짓고 살던 시대의 가치관에서 한 걸음도 더 나가지 못한 분들이 있습니다.
국내 대그룹의 사원들을 대상으로 의식조사를 실시하였습니다. 회사를 어렵게 만드는 좀비족 44개지 중에서 고정관념, 권위주의에 빠진 자들이 상당수 있다는 것을 찾아냈습니다. 기업이 변화하기 위해서는 경영환경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해야 그 조직이 살고, 본인도 그 조직에서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이제는 옛날 사고, 옛날의 생활방식으로는 통하지 않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진리는 변할 수 없는 절대 가치이지만, 우리들의 사고와 의식은 변화해야 합니다. 한국교회도 교회 문화적 측면에서 놀랍게 변화하고 있습니다. 건축물, 예배학, 설교학, 교회음악, 리더십, 전반에 걸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그런데 60-70년대 사고와 의식에 갇혀서 살아가는 분들이 있습니다. 죽어도 변화를 싫어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자신과 주변 사람들을 불행하게 합니다. 긍정적이고, 적극적이며, 진취적이고, 능동적이고, 복음적인 사고의 변화를 가져와야 합니다. 주님은 “새 술을 새 부대에 넣으라.”(마9:17) 고 했습니다.
둘째, 언어의 변화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말씀으로 창조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한 인간이 다른 피조물들과의 구별성은 언어, 즉 말을 할 수 있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은 우리를 축복과 저주의 삶을 살게 하였습니다. 돈이 없거나, 지식과 기술이 없어서 불행해 지는 것이 아니라 인생은 말에 권세에 의하여 축복과 저주의 삶으로 나뉩니다. 그래서 우리의 언어가 축복의 언어로 바뀌어야 합니다.“너를 축복하는 자를 내가 축복하고 너를 저주하는 자를 내가 저주하리라.”(창12:3)불행하게 사는 사람들의 언어를 연구해 보세요. 한결같이 타인을 축복하지 않습니다. 시기하고, 비방하고, 불평하고, 침묵하고, 반대합니다. 축복의 삶을 살기 원합니까? 축복의 언어로 변화하시기 바랍니다. 만수기 14장 28절의 말씀대로“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라고 했습니다.
셋째, 인격의 변화해야 합니다.
해리성 장애(dissociative disorder)의 하나로, 한 개인이 가지는 정체성 안에 있는 의식, 기억, 정체감, 환경 등의 통합적 정신 기능에 대한 지각이 붕괴되면서 개인의 활동이 각각 구별되는 다수의 정체감이나 인격이 반복적으로 조절되면서 나타나는 증상을 다중인격이라고 합니다. 죄로 타락한 인간들은 어떤 의미에서 다중인격자로 볼 수 있습니다. 마치 거라사의 광인처럼 고유 인격을 상실하고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했던 사람과 같이 나로 인하여 가정과 사회, 그리고 교회와 조직체를 망가트리는 인격이 변화해야 합니다. 기독교인의 인격은 진실과 정직입니다. 그래서 다윗은“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51:10)라고 기도했습니다.
넷째, 습관이 변화해야 합니다.
새로운 습관을 만드는데 걸리는 시간은 66일이라고 합니다. 지금 여러분이 어떤 습관을 가지고 있다면 약 두 달 동안에 걸쳐 형성 되었고, 새로운 습관으로 변화 하려면 그 정도의 시간이 소요된다는 뜻입니다. 습관을 바꾸기 위해서는 자신의 습관을 면밀히 관찰하고, 그 습관을 반복할 경우 적당한 벌을 주며, 행동을 세분화 하고, 행동에 대하여 기록하며, 힘들어도 반복할 때 잘못 된 습관을 고칠 수 있고, 좋은 습관을 만들 수 있습니다. 작은 습관의 변화가 인생을 성공의 길로 이끌 수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 세 가지 습관을 제안합니다. ① 기도하는 습관, ② 전도하는 습관, ③ 성경 읽는 습관을 가지십시오.
다섯째, 삶의 방향이 변화해야 합니다.
다른 말로는 행동의 변화입니다. 인류 역사를 크게 네 가지 물결로 봅니다. 제 1의 물결, 이 시대는 농업사회를 칭합니다. 제 2의 물결, 공업과 산업혁명 시기를 칭합니다. 우리나라는 1970년 산업화를 시작으로 경공업에서 중공업으로 도약하며 100억불 수출을 캐치프레이즈로 내걸었던 시대입니다. 제 3의 물결, 정보화 시대입니다. 아나로그에서 디지털 시대로 옮겨왔습니다. TV, 스마트폰, 인터넷, IP TV, SNS, 페이스북, 카톡, 벤드, 이메일, 모두 온라인 시대입니다. 제 4의 물결, 감성의 시대입니다. 현대는 모든 문화가 감성적으로 통합니다. 문화, 예술, 음악, 뮤지컬, 인터테인먼트, 디자인, 창조경영시대입니다. 요즘 사람들은 기능도 중요하지만 디자인이 좋아야 삽니다. 그래서 남녀 할 것 없이 얼굴과 몸매를 성형합니다. 제 5의 물결, 저의 이론입니다. 영성의 시대입니다. 4차원의 세계입니다. 사람이 영성적 존재로 변화할 때 온전한 인간이 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인류는 빠른 속도로 사회문화적 제 4의 물결 속에 살아갑니다. 사람들은 그 물결 속에 매몰되거나 함몰되어 살아갑니다. 그러나 영원히 변할 수 없는 삶의 방향이 있습니다. 그것은 복음적 삶인 것입니다. 영성적인 삶인 것입니다. 예수께서 살아간 삶의 방향을 따라 가는 것이 가장 바른 변화인 것입니다.
2. 변화의 통로
사람이 변화하는 통로는 다양합니다. ① 독서가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그래서 책을 많이 읽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책을 가장 많이 읽은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유시민 씨입니다. 이분은 아주진보적인 인물이며 좌파적 성향이 강하며, 반 기독교적 태도를 가진 분이지만 저는 그분의 깊은 지식과 바른 논리, 그리고 달변을 높이 평가합니다. 그의 그런 지식은 독서에 있다고 봅니다. 좋은 책을 많이 읽는 습관은 아주 중요합니다. ② 특이한 사건이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죽을 고비를 넘긴 사람이나 교도소생활, 혹은 극한 가난을 경험한 사람들은 삶에 대한 태도가 확 변합니다. ③ 좋은 사람을 만나면 사람이 변합니다. 그 사람의 영향을 받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나쁜 사람을 만나면 나쁜 방향으로 변합니다. ④ 생활환경이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그래서 맹자의 모친은 자신의 아들을 위하여 세 번이나 이사를 하였습니다. 공동묘지에서 시장, 시장에서 서당 옆으로 간 것입니다. 서당 옆에서 맹자는 글 읽는 습관을 배웠고 그는 세계적인 학자가 되었습니다. ⑤ 교육이 사람을 변화 시킵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평생동안 각가지 교육을 받아야 합니다. ⑥ 훈련이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군사 훈련 중에도 강도 높은 훈련이 있습니다. 특전사나, 해병대 훈련은 사람을 갱생시키기도 합니다.
저는 사람을 변화 시키는 통로로서 위의 네 가지를 모두 인정합니다. 하지만 이런 것들보다 사람을 더욱 근본적으로 변화 시키는 통로가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말씀이 변화의 통로입니다.“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넉넉하니.”(딤후3:16)입니다. 성경말씀은 단순한 지식이 아닙니다. 성경이 기록될 때에 저자들에게 성령이 영감하였듯이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말씀은 영감하는 신령한 힘이 있습니다.“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히4:12)라고 했습니다. 말씀은 가난한 자를 부요하게 하고, 병든 자를 치유 하며, 약한 자를 강하게 하고, 죄인을 회개하게 하고, 눌린 자를 일으켜 주고, 영적으로 죽은 자를 살리며, 눈먼 자를 보게 하고, 미련한 자에게 지혜를 주십니다. 그래서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키는 자는 변화의 사람이 되게 합니다.
둘째, 성령이 변화의 통로입니다. 성령이 임하면 사람이 변화합니다. 오순절에 120명에게 성령이 임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변화하였습니다. 유약한 자들이 담대해졌습니다. 지식 없던 자들이 해박한 성경지식으로 설교하였습니다. 그들은 영적 권위를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탁월한 카리스마가 있었습니다. 자신들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변화 시키는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사회와 시대를 변화 시켰습니다. 성령 받은 사람들은 인류 역사를 바꿔놓는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을 받아 변화 되어야 합니다.
셋째, 예수의 복음이 성령의 통로입니다. 원래‘좋은 소식을 가져온 사자에 대한 보수’ 또는‘좋은 소식에 대해서 신에게 감사의 뜻으로 바치는 헌물’이라는 뜻의 그리스어(語) 앙겔리온(euaggelion)이 점차‘소식’‘소식의 내용’ 등의 말로 쓰이게 되었습니다. 복음이라는 말은 이미 이사 40장 9절과 61장 1절에 나온 바 있거니와, 이 말을 가장 많이 쓴 사람은 사도 바울입니다. 그에 따르면 복음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하나님이 인간을 죄와 죽음의 상태에서 구원한다는 약속과 그 사실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신앙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그 부활의 힘을 믿는 일인데, 거기에서 복음적 신앙이 성립됩니다. 복음을 믿는다는 말은 복음의 중심이요.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말입니다. 그를 믿는 자는 변화합니다. 죄인에 의인이 되고, 사단의 백성에 하나님의 백성이 됩니다. 육에 속한 자가 영에 속한 자가 되고, 자기중심적 인물이 하나님 중심적 인물이 됩니다. 한마디로 가치 없는 인생이 가장 가치 있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복음은 인생을 근본적인 변화의 사람이 되게 해야 합니다.
우리는 위에서 변화의 내용과 변화의 통로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변화할 때 어떤 결과가 나타날까요?
3. 변화의 결과
첫째, 삶의 목표가 달라집니다. 인생은 모두 삶의 목표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대다수의 인생들은 자기중심적 인생목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 된 사람은 하나님 중심의 삶의 목적으로 변화합니다. 세상 것들을 목표로 한 삶에서 영원한 것을 목표로 합니다. 물질 중심 목표에서 신령한 것을 목표로 합니다. 이기적인 삶에서 이타적인 삶으로 변합니다. 세상적인 욕망의 사람이 신령한 사람으로 변화합니다. 악한 사람이 선한 사람으로 변합니다.
둘째, 삶의 방향이 달라집니다. 바울 사도는 유대교 바리세파였고, 율법학자였으며, 자신의 종교에 대한 열정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안에서 변화한 후 삶의 방향이 바뀌었습니다. 오직 주께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얻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았습니다. 예수님의 열두 사도와 이후 교회사적 위대한 인물들의 삶이 모두 그랬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변화는 삶의 방향을 획기적으로 바꾸어 놓습니다.
셋째, 존귀하고 비범한 인물이 됩니다. 기독교는 어떤 사람이 되게 하느냐 입니다. 무엇을 소유했느냐가 아닙니다. 어떤 인물이 되느냐 입니다. 얼마나 살았느냐가 아닙니다. 어떻게 살았느냐 입니다. 말씀과 성령과 복음으로 변화 된 사람은 대범하고 존귀한 인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데이빗은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33년을 통해 한결같은 태도로 같은 사역에 봉사한 것이 비범하였고, 30년간 아내를 온화하게 관심을 갖고 사랑한 것이 비범하였고, 기쁠 때와 어려울 때를 겪으면서 그의 자녀들에게 일관되게 헌신한 것이 비범하였고, 직장 동료나 아는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은 것이 비범하였고, 그가 56세의 젊은 나이에 갑자기 죽었을 때, 그에 대하여 나쁜 말을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것이 비범하였습니다. 그의 친구들과 가족들이 엄숙한 침묵 속에서 장례식장에 앉아 있었을 때 데이빗의 목사님은 그의 삶은 존귀하고 비범했다고 말했습니다. 가장 존귀하고 비범한 삶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복음으로 거듭난 사람입니다.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된 사건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 각자의 인생이 변화된 삶을 살아야 함을 예시한 기적입니다. 2014년 우리는 놀라운 변화를 가져오도록 더욱 복음 안에 사는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말씀대로 행하라
요 2:1-5 / 김경진 목사
< 예수님의 공생애 첫 사역은 갈릴리 혼인 잔치에서였습니다. >
오늘 본문은 요한복음 2장입니다. 여러분이 잘 알고 계시는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예수님이 기적을 베푸신 사건입니다. 요한복음 1장에 따르면,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시며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후 제자들을 맞이하셨습니다. 안드레와 베드로를 제자로 삼으시고, 빌립과 나다나엘도 제자 삼아 주셨습니다. 또 세례 요한의 제자였던 이들도 만나셨습니다. 이처럼 주님께서 제자들과 공생애를 시작하시는 장면이 요한복음 1장에 나타납니다. 이후 2장에서 이어지는 내용이 가나의 혼인 잔치입니다.
당시 예수님은 어머니 마리아와 제자들과 함께 혼인 잔치에 참여했습니다.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사역을 시작하고 마무리한 반면, 예수님은 혼인 잔치에서 공생애 첫 사역을 시작하십니다. 참으로 흥미로운 대목입니다. 과연 여기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본 사건에 하나님의 큰 의도가 담겨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불교는 죽음의 문제를 고민하며 탄생했는데, 기독교 특히 주님의 사역은 혼인 예식의 자리에서 시작된다는 것이 뜻깊습니다. 여기에는 영적으로 큰 의미가 있는 듯합니다. 예수님이 첫 이적을 베푸시는 현장으로, 성경은 본 장면을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사흘째 되던 날 갈릴리 가나에 혼례가 있어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 계시고 예수와 그 제자들도 혼례에 청함을 받았더니 포도주가 떨어진지라 (요한복음 2:1~3 중)
잔칫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잔치 음식일 것입니다. 게다가 혼례는 기쁨과 축제의 자리입니다. 모든 게 풍족해야 하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참으로 난감한 상황입니다.
공생애를 시작하신 예수님에 관한 첫 기사가 등장하는 장면입니다. 그러나 더는 잔치가 이어질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어찌 보면, 우리 인간의 현실과 가장 비슷한 모습이 아닐까 싶습니다. 마치 우리의 삶과 같습니다. 우리는 인생을 끊임없이 축제로 만들어 가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돈도 벌고, 명예도 얻으려 하며, 취미 생활도 하고, 운동도 합니다. 다양한 방식으로 축제와 같은 삶을 영위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하지만 곧 바닥을 드러낼 포도주 통처럼 우리 인생의 축제도 종말을 향해 가고 있음을 그간의 인생 경험을 통해 깨닫습니다. 나름대로 무언가를 가득 채웠다고 생각했는데, 어느덧 채워진 것들이 소진되어 가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이 여전히 축제를 이어 가고 싶은 욕심을 버리지 못합니다. 포도주가 떨어져 가고 있지만,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계속해서 축제의 삶을 살아가려고 합니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포도주가 떨어진 상황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의 입을 통해, 포도주가 떨어져 가는 현실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가지 행동을 가르쳐 주십니다.
그의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요한복음 2:5)
하나님께서 마리아를 입을 통해 주신 해결책은 “예수께서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라는 것입니다. 이후 예수님이 하인들에게 돌 항아리 여섯 통에 물을 가득 채우라 하셨고, 그것을 떠 연회장에 나눠 주라고 명하셨습니다. 이때 물이 변해 포도주가 되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난 사실을 요한복음은 전해 줍니다.
< 말은 그 자체로 힘과 생명력이 있습니다. >
오늘 말씀에서는 이 구절,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요2:5 중)를 중심에 두고 깊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행하는 것이 어떻게 우리 삶의 해결책이 되는지,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이 우리 삶에 어떤 의미가 되는지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 조금 다른 이야기를 먼저 해 보려고 합니다. 어린아이 둘이 있습니다. 둘은 남매인데, 서로 티격태격 싸웁니다. 아마 여동생이 귀여웠는지, 오빠가 계속 “바보!”라며 장난을 칩니다. 여동생도 “반사!”라고 외칩니다. 여러분도 ‘반사’라는 말을 아실 것입니다. 거울이 빛을 반사하듯이, 그 장난을 받지 않겠다는 여동생의 의지를 드러내 주는 말입니다. 그러자 오빠가 다시 “바보!” 하며 놀립니다. 오빠와 여동생 사이에, ‘바보’와 ‘반사’가 오가다 어떻게 될까요? 결국 여동생이 울고 맙니다. 그리곤 엄마 손을 붙잡고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엄마, 오빠가 나를 ‘바보’라고 해!”
여러분도 이런 모습을 많이 봐 오셨을 것입니다. 이런 아이들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어른의 입장에서는 이렇게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요? ‘뭐, 그런 별 의미도 없는 말에 그래? 오빠가 동생이 귀여워서 그런 거지. 마음에 담아두지 않아도 되는데….’라고 말입니다. 아마 아이에게도 별말 아니라며 그냥 잊어버리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이의 입장은 다릅니다. 아이들 마음에는 ‘바보’라는 말이 상처로 남기도 하고, 한동안 마음과 기분을 언짢게 하는 현실이 되는 것을 지켜보게 됩니다.
사실 ‘말’에 대한 이런 경험은 어린아이뿐만 아니라 어른들도 충분히 경험하는 현실입니다. 말에는 힘이 있습니다. 어떤 말이 발설되면, 그 자체로 생명력이 있습니다. 실재를 만들어 내는 힘이 있는 것입니다.
부부 사이 혹은 연인 사이에 다투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때 한쪽에서 “나는 당신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아.”라고 말한다면, 어떻게 됩니까? 그저 지나가는 말이 될 수 있을까요? 사라지는 말이 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말은 발설된 순간 굉장한 힘을 얻습니다. 그리고 큰 생명력을 갖게 되어 실재가 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더는 사랑하지 않는 현실, 증오하는 현실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말의 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목회자이자 신학자였던 유진 피터슨(Eugene H. Peterson)이 쓴 『메시지』 성경이 있습니다. 기존의 성경을 보다 현대적으로 쉽게 번역한 책인데, 야고보서 3장 5절을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하찮아 보이지만, 그 말은 무슨 일이든 성취하거나 파괴할 수 있습니다. (야고보서 3:5, 메시지 성경)
말이라는 게 그렇습니다. 그저 지나가는 말 같아도 어마어마한 파급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말에는 힘이 있습니다. 특히 강력한 의도를 가지고 발설된 말은 무언가를 창조할 수도, 파괴할 수도 있습니다. 축복의 말로 무언가를 세울 수도 있고, 저주의 말로 무언가를 무너뜨릴 수도 있습니다.
아주 오래전에 남편에게 한 말인데, 수십 년이 지나도 남편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말이 있습니다. 또 아주 오래전에 아내에게 한 말이라 남편은 잊었는데, 아내의 가슴에는 상처로 남은 말이 있습니다. 말은 생명력을 가지고 있어 끊임없이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고, 아픔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의 입에서 증오의 말이 뱉어진 순간 관계가 파괴되고, 사랑의 말이 이어질 때면 서로를 살리는 생명의 관계가 형성된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혹시 부부생활을 하면서, 또는 사회생활을 하면서 큰 상처가 된 사건이 있습니까? 여러 경험을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상처가 될 만한 말을 듣고, 그 말이 마음속에 박힌 경우가 대부분일 것입니다. 그만큼 말은 우리 삶에 큰 영향력과 힘을 발휘합니다.
<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세상이 창조되고 운행됩니다. >
그렇다면 하나님 편에서 말에 관한 이야기를 해 보면 어떨까요? 우리가 하는 말도 이렇게 힘과 파급력이 큰데, 과연 하나님의 말씀은 어떻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면 어떤 일이 발생할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창세기 1장이 바로 그 장면을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니 대단한 일들이 벌어집니다. 창세기 1장 3, 9, 11, 24절입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창세기 1:3)
하나님이 이르시되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창세기 1:9)
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어 (창세기 1:11)
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창세기 1:24)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니 그대로 되니라.”라는 사실을 창세기 1장이 분명하게 전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저 지나가는 말씀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자 사건이 발생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자 실재가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을 잉태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참이 되고, 존재가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법이자 원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온 세상이 창조되었듯이 말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운동력이 있습니다. 여전히 살아 있어 실재하는 능력의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말씀하시는 장면이 창세기 2장에 나오는데, 그중 16~17절이 이렇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세기 2:16~17)
온 세상을 말씀으로 창조하신 하나님입니다. 그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에덴동산에 있는 모든 열매를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만은 금하셨습니다. 그 열매를 먹으면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강력히 경고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창조주의 말씀이었습니다. 아주 무거운 말씀입니다. 말씀하시자 곧 법이 된 말씀입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그 말씀의 무게를 제대로 깨닫지 못했습니다. 얼마나 묵직한 말씀인지 인지하지 못했습니다.
도리어 그들은 얄팍한 뱀의 말에 귀를 기울입니다. 뱀이 하와에게 말했습니다.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하지만 그 말은 거짓이었습니다. 이 땅에 거짓말이 존재하게 된 순간입니다. 거짓이 실재가 된 순간입니다.
결국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은 죄인이 되고 맙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말씀하셨기에, 그 말씀은 참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인간은 죽을 운명에 처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렇게 힘이 있습니다. 성경은 바로 이 사실을 우리에게 끊임없이 전해 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자체로 대단한 생명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 성경의 많은 인물이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신뢰하며 순종했습니다. >
창세기에는 ‘노아’라는 인물도 등장합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포악한 세상을 멸하시겠다고 말씀하시며 방주를 지을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노아는 그 말씀을 참으로 받았습니다. 창세기 6장 22절에 따르면, 그는 그 말씀을 그대로 믿고 말씀에 순종합니다.
노아가 그와 같이 하여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창세기 6:22)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었습니다. 또한 성경에 나오는 모든 족장이 그랬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요셉까지 모든 족장이 하나님의 말씀의 무게를 인정하며 순종했습니다. 창세기 12장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입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창세기 12:1~2)
해와 달과 별과 온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명령이었습니다. 이때 아브라함이 어떻게 했습니까?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창세기 12:4)
그는 하나님의 말씀의 무게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길을 떠났습니다. 이렇듯 성경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이 하나님의 말씀을 귀히 여긴 사람들입니다.
야곱은 어떻습니까? 본래 그는 움켜쥐는 인생이었습니다. 욕심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야곱에게도 하나님께서는 복을 주시며, 그를 족장으로 세워 주셨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야곱은 하나님의 복을 받기 위해 아버지도 속이고 형도 속인 인물이 아닙니까? 하지만 바로 그 사실, 야곱이 그토록 하나님의 축복을 갈망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축복, 하나님의 말씀의 힘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 확신이 있었기에, 그토록 하나님의 축복을 얻길 원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간절히 원했던 야곱의 삶에서 그의 믿음 또한 발견하게 됩니다.
또한 야곱이 눈감을 때, 요셉에게 무엇을 부탁했습니까? 자신의 유골을 애굽에 두지 말고 약속의 땅에 안장해 달라고 요청하지 않았습니까? 애굽에도 얼마든지 좋은 땅이 있었습니다. 요셉 덕분에 애굽에서 말년을 잘 보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야곱은 하나님의 약속을 더 귀히 여겼습니다. 하나님께서 맺어 주신 약속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란 믿음으로 약속의 땅을 갈망한 야곱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믿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 믿음이란 하나님의 말씀이 실재가 됨을 시인하며 순종하는 것입니다.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이란 무엇일까요? 우리가 믿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발설하신 말씀, 그 약속이 실재가 되리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의 사람’이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반드시 이루어진다고 확신하며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가 말씀의 위력을 믿고 살아간 믿음의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라면, 요한복음은 창조주이신 말씀이 이 땅에 임하신 사건을 분명히 전해 주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 1~3절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요한복음 1:1~3)
요한복음 1장은 하나님의 창조 사건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리고 창조의 자리에 임했던 ‘말씀’에 주목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온 세계가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합니다. 또 그 말씀이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을 분명히 선포합니다. 14절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셨다.”라는 사실을 분명히 선포하는 본문이 요한복음 1장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써 모든 것이 실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2장으로 넘어가면서는 포도주가 떨어져 가는 잔칫집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그리고 이 문제를 예수님이 해결해 주시는데,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통해서였습니다. 즉 창세기로부터 내려오는 ‘말씀’의 줄기가 요한복음에서도 다시 한 번 발견되는 것입니다. 창세기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창조된 세계를 보여 주었다면, 요한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통해 인생의 문제가 해결된 사건을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께서는 이 사건 이후에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요한복음 14:1)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요한복음 11:25~2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인생은 마치 잔치가 끝난 것 같은 불안한 삶의 연속입니다. 계속 잔치는 진행되는데, 포도주가 떨어져 가고 있는 잔치와도 같습니다. 그래서 초조하고 불안합니다. 그게 우리의 인생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주목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온 세상을 창조했듯이, 말씀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모든 것을 완성하셨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말씀에 소망이 있습니다. 이 소망을 붙잡으시기를 바랍니다. 떨어져 가는 포도주 통을 보며 절망하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인생의 희망을 붙잡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요2:5 중) 바로 이 말씀에 우리의 모든 인생의 문제를 풀 수 있는 해결의 열쇠가 있습니다.
더 나아지는 인생
이영훈 목사
할렐루야! 오늘 말씀의 제목은 “더 나아지는 인생”입니다. 요한복음 2장 1-5절 말씀을 본문으로 함께 은혜 나눕니다. 제목을 따라해주십시오. “더 나아지는 인생”, “더 나아지는 인생”
사람이 세상을 살다 보면 항상 좋은 일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늘 기쁘고 행복한 날만 우리에게 있는 것은 아니고, 예기치 않은 어려움이 때때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평생 감기를 앓아본 적도 없는 분이 어느 날 몸이 불편해서 가보니까 이미 말기암이 라는 진단을 받았을 때, 그 충격과 절망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것입니다. 착하고 착하기만 아들이 어느 날 갑자기 부모에게 반발하더니 집을 나가버려서 온 집안이 초상집처럼 되어버린 그런 절망에 처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 믿고 꼭 기억해야 하는 것은 절망의 순간이 어려움의 순간이 우리에게 다가온다 할지라도, 그 자리에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절대 우리를 떠나지 아니하시고, 우리의 절망의 자리에, 슬픔의 자리에, 통곡의 자리에 주님이 함께하고 계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행복한 꿈을 꾸며 첫출발한 한 신혼 가정에 일어났던 절망적인 상황의 이야기입니다. 갈릴리의 가나에서 혼인 잔치가 있었는데, 그 시골 동네 혼인 잔치에는 많은 사람들이 북적였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이스라엘에서는 혼인 잔치를 하면 일주일 정도 많은 사람을 초청해서 잔치를 벌입니다. 우리 대한민국도 옛날에 보면 시골에서 혼인 잔치를 하면 동네 사람을 다 초청해놓고 3일, 4일 축제로, 잔치로 시간을 보냈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런데 손님이 많이 왔던지, 아니면 준비가 부족했던지 잔치를 지내는 중에 가장 중요한 음료인 포도주가 떨어진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물이 전 세계에서 가장 먹을 만하고 물에 다른 것이 섞여 있지 않은데, 유럽 쪽에 있는 나라들에는 물에 석회 가루가 많이 섞여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주 음료는 물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나 유럽의 대부분의 나라들이 포도주를 주 음료로 씁니다. 포도를 따서 즙을 내서 포도주를 만드는데, 그래서 이 잔치에는 꼭 포도주가 있어야 되는데. 그만 포도주가 떨어진 것입니다.
심부름하던 하인들이 와서 말합니다. “큰일 났습니다.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신랑과 신부가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했습니다. 혼주 댁 어르신들도 “큰일 났구나. 이 어디에서 포도주를 구해 올 수도 없고 어떡하나?” 안절부절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은 이 절망의 자리에 예수님이 계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1. 절망의 자리에 계신 예수님
먼저, 절망의 자리에 계신 예수님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보기 원합니다. 여기 보니까 요한복음 2장2절에, “예수와 그 제자들도 혼례에 청함을 받았더니”성경은 말씀합니다. 여기에 바로 문제의 해답이 있습니다.
예수님도 청함을 받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인생의 중심에 예수를 모셔 들여야 됩니다. 우리 마음 한가운데에 예수님을 모셔들이고 주님과 동행할 때 어떤 문제도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왜? 주님이 문제 해결자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을 필요할 때만 찾습니다. 잘나갈 때, 사업이 잘되고, 자녀들이 좋은 직장 얻고, 좋은 대학 가고, 높은 위치로 올라가고 할 때는 주님을 찾지 않습니다. 본인이 잘나서 그렇게 된 줄 알고 그 착각 속에 삽니다. 그러다가 한번 환란의 태풍이 불어서 와장창 무너지거나 하면 그때 가서야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이것이 우리 인생의 모습입니다.
여러분, 슬플 때나 기쁠 때나 절망의 때나 우리 삶에 희망이 넘쳐날 때나 언제나 주님을 그 중심에 모셔야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와 계시면 그것이 바로 문제의 해결이고, 응답이고, 기적이고, 축복인 것입니다. 참, 사람들의 인심은 고약해서 권력의 위에 위치해 있을 때, 가진 것이 많을 때는 몰려옵니다. 그런데 권력의 자리에서 내려오면 썰물처럼 싹 빠져버리고 맙니다. 정말 그분을 사랑하고 존경하는 사람이 몇 사람 옆에 남아서 그를 위로해주고 격려해줄 수는 있어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떠납니다. 그러나 그 옆에 있는 사람이 아무리 격려하고 위로한다고 해도 근본적인 그 마음의 절망과 그분이 가진 문제를 해결해줄 수 없는 것이 우리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삶에 예수님을 모셔들여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어떤 순간에도 우리를 떠나지 않으시고 우리 곁에 계시고 우리를 꼭 붙들고 계신다는 사실을 잊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가나의 혼인 잔치에 예수님이 와 계셨기 때문에 바로 거기에서 문제가 해결되는 놀라운 역사가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잘될 때는 마음의 문을 딱 닫아놓고 예수님 들어올 자리를 마련해놓고 있지 않아요. 친구들과 만나서 그저 교제하고 잘나가는 인생, “나 잘나간다.” 하고 여기저기 자기 얼굴을 내밀며 다니는 그때에는 주님이 들어가실 자리가 없습니다.
그런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똑, 똑, 똑’ 우리의 마음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요한계시록 3장 20절에 이와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마음의 문을 여셔야만 합니다. 마음 문을 여는 순간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과 기적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 내 마음 가운데 오시옵소서! 상처 입은 내 마음 가운데, 절망에 찬 내 마음 가운데 오셔서 내 상처를 어루만져주시고, 이 절망의 자리에서 나를 건져주시옵소서!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고통과 괴로움이 있는 이 불쌍한 영혼을 주님, 긍휼히 보시고 사랑의 품에 안아주옵소서!
예수님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12장 28절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어떤 상처를 입고 쓰러져 피를 흘리고 있던지 어떤 절망의 자리에서 탄식하고 있던지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다고 죽을 생각을 하고 있던지 간에 그 자리에서 모든 것 다 내려놓고 내게로 오라!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주님만이 문제의 해결자가 되십니다.
■ 미국의 유명한 저명한 작가요, 강사인 데일 카네기의 책 가운데 ‘카네기 행복론’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거기에 메리 쿠슈만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 분은 병든 남편과 다섯 자녀를 돌보고 본인은 파출부 일을 하느라 몸이 부서지게 일을 해야만 했습니다.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시간을 보냈는지 하루하루를 살기가 힘들었습니다. 남편의 병간호를 하느라 약값이 들죠, 다섯 자녀를 돌봐야하죠, 그래서 자기가 살고 있던 집도 다 팔고 빚만 쌓여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자기 아들이 슈퍼마켓에 갔다가 연필을 훔쳤다는 누명을 쓰고 야단을 맞고 온갖 창피를 당하고 눈물을 흘리며 돌아왔습니다. 그때까지 그 힘들고 어려운 것을 참고 견뎠는데 자기가 사랑하는 아들이 그렇게 모욕을 당하고 그렇게 누명을 쓰고 돌아오는 모습을 보자 마음이 와르르 무너져버렸습니다. ‘죽자! 이렇게 살아 뭐하나! 죽자!’ 사람이 마지막 벼랑 끝에 다다르면 ‘죽는 게 낫겠다. 차라리 죽자!’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예수 믿는 사람은 그 순간 다시 살아야만 됩니다. 죽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 주신 귀한 생명 지키고 살아야 합니다. 이제 메리 부인은 문을 잠그고 창문을 다 내리고 가스를 켜고 집에 있는 5살 난 딸을 데리고 침대에 누웠습니다. “엄마”, “왜?”, “낮잠 좀 자자” 가스가 흘러 들어와서 정신이 혼미해지는 순간 부엌에 틀어놓았던 라디오에서 찬송 소리가 들려옵니다.
죄 짐 맡은 우리 구주 어찌 좋은 친군지
걱정 근심 무거운 짐 우리 주께 맡기세
주께 고함 없는 고로 복을 받지 못하네
사람들이 어찌하여 아뢸 줄을 모를까
그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본인이 습관적으로 교회를 왔다 갔다 했지만 은혜를 받았을 때 그 모습이 다시 갑자기 그 마음 가운데 큰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안 되지~ 내가 죽으면 안 돼!” 벌떡 일어나서 창문을 다 열고 가스 밸브를 다 끄고 무릎을 꿇고 눈물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내 생명을 살려주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나의 가정을 주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자녀 주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뜨거운 눈물의 기도를 통하여 그녀는 회복되었습니다. 더 열심히 해서 자녀들 잘 길러서 다 시집장가 보내고 그 아이들이 또 결혼해서 아이를 낳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죽음의 막바지까지 다다랐던 그녀의 운명이 순간 주님의 음성을 듣고 일어나 새 삶을 찾게 되었던 것입니다.
어떠한 절망 가운데 있던지 간에 여러분은 혼자가 아닙니다. 거기에 주님이 같이 계시고 주님이 여러분을 그 자리에서 붙들고 계시고 일으켜 주고 계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신앙을 회복하고 절대 긍정 절대 감사의 믿음으로 나아가는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주님께 고하는 신앙
둘째로 우리는 이 절망의 자리에서 주님께 고하는 기도하는 그러한 신앙을 가져야 됩니다. 2장 3절에 “포도주가 떨어진지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님께 와서 말합니다. 저들에게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포도주가 없습니다. 성경을 보면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예수님이 12살 때 성전에 올라갈 때 등장하고 그 이후론 사라져 버립니다. 그러니까 아마 일찍 돌아가신 것 같아요. 그래서 예수님은 서른 살이 될 때까지 목수 일을 하면서 가정을 돌봐야 했습니다. 무슨 일이든지 어머니 마리아와 상의를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저들이 절망에 처한 것을 보고 예수께 왔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이 누군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정색을 하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2장 4절 보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내 때가 이르지 않았습니다. 나는 인류 구원을 위해서 온 것인데 나에게 왜 이러한 일을 부탁하십니까?” 여기서 보면 “여자여”라는 표현을 씁니다. 헬라어를 보면 여인에 대한 존칭어입니다. 우리로 표현하면 “여사여 여인이여” 이렇게 표현한 겁니다. 그 순간은 예수님이 어머니 마리아가 아니라 이제는 공인으로서 공과 사를 구분해서 “여인이여 왜 내게 그런 부탁을 하십니까? 아직 내 때가 이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주님 앞에 나와 기도하면 지금도 주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것입니다. 아무리 작은 기도 어떻게 보면 다른 사람이 보면 하찮은 것 같은 그 기도라 할지라도 간절한 기도를 응답해 주시고 기적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시때때로 우리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우리 죄를 고백하고 주의 도우심을 간구해야 합니다. “주님! 나를 불쌍히 여겨주시고 나를 이 절망의 자리에서 건져주시옵소서. 우리 가정이 큰 어려움에 처했사오니 우리 가정을 주님 건져주시옵소서.” 눈물로 기도할 때 주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실 것입니다. 주님은 온 인류 구원의 큰 역사를 이루시러 오셨지만 우리의 작은 정말 하찮은 일까지도 우리 아픔과 고통을 아시고 그것을 보시고 우리의 간구를 들으사 응답해 주시는 참으로 좋으신 우리 주님이신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5장 7절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할렐루야! 큰일이든지 작은 일이든지 내 개인일이든지 가정의 일이든지 부모의 일이든지 자식의 일이든지 무엇이든지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라 그럼 내가 이루어 주리라!
할렐루야! 기도하지 못하는 만큼 큰 문제도 없고 기도하지 않아야 할 만큼 작은 문제도 없습니다. 무엇이든지 기도하면 응답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아주 작은 기도도 주님 응답하실 뿐 아니라 “주여! 우리 대한민국이 복음화 되어 50퍼센트 이상 예수 믿게 하여주시고 남북통일이 복음통일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이런 거대한 기도 주님께서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기도할 때 주님 들으십니다.
마태복음 7장 7절 8절에 이와 같이 말씀합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할렐루야! 여러분의 일생이 주님께 간구하는 일생이 되기를 바랍니다. 문제를 만났을 때, 어려움을 당했을 때 사람을 찾아다니지 말고 그 시간에 주님께 엎드려 눈물로 기도하며 주의 도우심을 간구하는 여러분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말씀에 순종하는 신앙
셋째로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은 주님이 무어라 말씀하시든 말씀에 순종할 때 기적이 일어난다고 하는 것입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신앙에 대해 말씀드립니다.
요한복음 2장 5절에, 예수님 어머니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의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주님의 뜻에 대해서는 절대적인 순종입니다. 이유 없는 순종입니다. 주님이 하라고 하시면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명령하시는데 왜라고 하는 것이 없습니다. 내 인간적인 생각과 맞지 않아서 “왜요?” 그렇게 물어서는 안 됩니다. 하라고 하면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백 세 때 낳은 아들이삭을 모리아 땅에 있는 한 산에 바치라 하실 때 묻지 아니하고 “네” 순종하고 다음날 일찍 새벽에 일어나서 이삭을 데리고 떠났던 것을 우리는 압니다.
여러분 주님 명령하시면 “아멘”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과 기적이 임하는 것입니다. 한국이 오늘날 이렇게 복음화된 것은 수많은 선교사들이 그들이 그 지역에서 가장 탁월한 지도자였고 의사였고 목사였고 사업가였는데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조선이라는 나라가 어디인지도 모르고 배를 타고 몇 달 걸려 한국에 와서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하고 가족을 희생시켰던 것입니다. 순종 때문에, 희생도 마다하지 않았던 것을 기억합니다.
■ 1956년 미국 사회를 발칵 뒤집어 놓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휘튼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한 짐 엘리엇을 비롯한 다섯 명의 크리스천 젊은이들이 복음을 전하러 에콰도르의 아우카족에게 갔다가 모두 창에 찔려 죽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이 아우카족은 매우 난폭한 족속이 되어서 접근하는 모든 사람을 다 죽였습니다. 그들이 타고 간 경비행기는 산산조각이 났고 그들은 내리자마자 그들을 사랑한다고 손을 흔드는 그들에게 달려와 창을 찔러 그 자리에서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미국 신문에 이것을 충격적인 보도로 다루면서 “이 무슨 낭비냐?”(What a waste)라고 하는 그러한 기사가 나왔습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닙니다. 복음을 전해보지도 못하고 죽었는데 부인들이 모여 기도했습니다. 남편들이 못 이룬 꿈을 우리가 이루게 하여 주옵소서. 엘리자베스 앨리엇이 어린 아들을 데리고 그리고 다른 부인들과 함께 에콰도르 아우카족이 있는 마을로 갑니다. 아우카족은 아주 강하고 잔인한 족속이었지만 여자들은 해치지 않았습니다. 여자들은 연약한 존재라고 생각해서 여자들은 해치지 않았어요. 그래서 그곳에 들어가서 그들을 사랑으로 섬기고 아픈 사람을 치료해주고 그들에게 주의 사랑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희생과 헌신에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잠시 본국으로 돌아가게 되었을 때 추장이 와서 물었습니다. 도대체 당신들은 누군데 와서 우리를 이렇게 도와주고 우리를 사랑으로 보살펴 주십니까. 그때 짐 엘리엇의 부인 엘리자베스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남편들은 하나님을 알려주기 위해서 이곳에 왔습니다. 당신들이 그들을 죽여 뜻을 이루지 못했지요. 우리는 남편들이 그렇게도 당신들에게 해주고 싶었던 말을 들려주기 위해서 왔습니다. 그 말이 무엇이냐고요? ‘예수님은 여러분을 사랑합니다.’라는 말입니다.”
할렐루야! 이 엘리자베스 앨리엇은 남편의 일기를 다 보관하고 있었는데, 이 무슨 낭비인가라고 하는 기사를 쓴 기자에게 남편이 쓴 일기장을 보여주었습니다. 거기에는 이러한 글이 있었습니다. “영원한 것을 얻고자 영원할 수 없는 것을 버리는 자는 바보가 아니다.”
그다음에는 이런 글이 있습니다.
“이 쓸모없는 나뭇개비에 불을 붙여주옵소서. 제 삶을 주의 영광을 위해 태워주옵소서. 저는 오래 살기를 원치 않습니다. 오직 주님만을 위해 풍성한 삶을 살게 하여주옵소서.”
짐 앨리엇과 친구들을 찔렀던 다섯 명의 아우카 사람들이 모두 예수님 영접하고 그 중에 네 명이 목사가 되었습니다. 온 마을이 예수 믿게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20세기 선교 역사의 위대한 한 페이지를 장식하게 된 것입니다. 그들의 순종이, 그들의 죽음이 온 마을을 변화시켰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면 목숨조차도 아까워하지 아니하고 희생할 수 있는 그러한 용기와 결단이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인들에게 명령하십니다. 요한복음 2장 7절에서 8절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귀까지 채우니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시매 갖다 주었더니”
당시 모든 유대인의 집에는 밖에 나왔다가 들어오면 손을 씻는 물을 담아놓는 항아리가 있는데 그 항아리에 물을 채워서 떠가지고 연회장에게 가져다주라고 하는 것입니다. 연회장은 그 전체 잔치를 주관하는 책임자에게 갖다 주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세요. 물을 떠다 갖다 줬다가 무슨 욕을 먹으려고요. 지금 포도주가 없는데. 그런데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어머니가 하신 말씀이 있죠. 무엇을 시키던지 그대로 해라. 물을 떠서 가져가는 동안에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된 것입니다.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 믿는 인생의 모습입니다. 물같이 흔하고 무슨 맛인지 모르고 의미 없는 인생이 예수를 믿고 나서 포도주처럼 귀하고 맛있고 의미 있는 인생으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 물을 맛본 연회장이 말을 합니다. 요한복음 2장 9절과 10절입니다.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도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
예수를 믿고 우리는 이와 같은 인생을 살아야 됩니다. 더 나은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물 같은 인생이 포도주 같이 변해야 되는 것처럼 의미 있고 보람되고 행복하고 주님의 기쁨이 충만한 인생으로 바뀌어야 되는 것입니다. 절대로 무의미하게 살면 안 됩니다. 바뀌어야 합니다. 더 나은 인생이 되어야 됩니다. 어제보다 오늘이 낫고 오늘보다 내일이 더 나은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과거에 내가 실패를 연속했다고 할지라도 과거의 나의 삶이 상처투성이라고 할지라도 이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미래가 예비 되었기 때문입니다. 밝고 환하고 찬란한 더 나은 미래가 예비 되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게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실 때에 그것은 고난이고 슬픔이고 죽음이고 고통이었지만 십자가 후에 부활의 역사는 비교할 수 없는 더 나은 미래를 우리에게 가져와서 온 인류에게 구원의 문을 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 믿고 나서 더 나은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아직까지도 과거에 묶여있다고 하면 오늘 이 시간 예수님 안에서 더 나은 인생으로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된 것처럼 여러분의 삶이 완전히 바뀌어지게 되길 바랍니다. 어떤 문제가 있던지 어떤 어려움이 있던지 주님의 십자가 밑에 다 내려놓고 부르짖어 기도하며 주의 도우심을 간구하십시오. 찬송가 369장 3절이 이와 같이 되어 있습니다.
(3절)
근심 걱정 무거운 짐 아니진 자 누군가
피난처는 우리 예수 주께 기도드리세
세상친구 멸시하고 너를 조롱하여도
예수 품에 안기어서 참된 위로 받겠네
절대로 뒤로 물러가지 말고 주저앉지 말고 주님께 부르짖어 기도하며 믿음으로 전진 또 전진 또 전진 또 전진하는 여러분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님이 절대 여러분을 떠나지 아니할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오직 예수님만이 모든 문제의 해결이 되십니다. 예수님 붙잡고 예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고 예수님 안에서 더 나은 인생을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축원합니다. 축원합니다.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예수 그리스도
김양인 목사
사복음서는 예수님의 공생애를 기록한 것입니다. 공생애는 삼년 반 정도였는데, 그 동안 예수님께서는 쉴 틈도 없을 정도로 바쁘게 일하셨습니다. 회당과 산이나 들판, 그리고 해변에서 많은 무리에게 천국 복음을 전하셨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셨으며, 수많은 병자를 고쳐주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때로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나 예루살렘의 대제사장이 보낸 사람들과 논쟁하셨습니다. 그리고 바쁜 중에도 제자들을 가르치는 일을 소홀히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공생애 동안 예수님께서 행하신 모든 가르침과 이적 사건을 기록으로 남긴다면 적어도 수십 권의 책이 되고도 남을 것입니다. 그런데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이 쓴 복음서들을 보면, 하나 같이 수십 장을 넘지 않습니다.
사도 요한은 그가 복음서를 기록한 목적을 이같이 말했습니다.
“30)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31)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 20:)
그리고 요한복음서는 “예수의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요 21:25)는 구절로 끝을 맺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사도 요한이 복음서를 쓴 의도가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사복음서는 분량과 상관없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신 것을 충실하게 증언하고 있으며, 2천년 동안 무수한 사람들이 복음서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생을 얻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복음서를 수백 번 읽어도 아무 유익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이 의도한 대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알게 된다면, 그 사람은 복음서를 통해서 영생으로 인도받았으니 참 행복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보려는 기적 사건도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려주려는 동일한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빌립과 나다나엘을 제자로 삼으신 지 사흘 되던 날, 갈릴리의 가나라는 고을에서 혼인 잔치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과 함께 잔치에 참석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거기서 일을 돕고 있었고 예수님께 포도주가 떨어진 사실을 말한 것을 보면, 성모 마리아와 그 집이 매우 가까운 사이였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혼인 잔치에 참석하셔서 공생애의 첫 기적을 행하셨다는 사실은 큰 의미가 있습니다. 만약에 예수님께서 염세적인 분이었다면 혼인 잔치에 참석하지 않으셨을지 모릅니다. 불교는 인생의 모든 고통을 인연의 결과로 봅니다. 남녀가 만나 부부의 인연을 맺음으로써 애증의 관계가 성립되고 그로 인해 고통이 생겨납니다. 그래서 석가모니는 가정을 버리고 출가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삶을 소중히 여기셨습니다. 그러기에 혼인 잔치의 흥겨운 분위기속에서 사람들과 함께 즐거워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우는 자들과 함께 울고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사람답게 살아간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는 우울하고 비관적인 종교가 아니라 기쁨이 넘치는 생명의 종교입니다. 생로병사의 고통을 지고 괴로워하는 종교가 아니라 죄와 저주와 질병과 죽음을 정복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죄 사함과 치료와 영생의 복을 받아 누리는 소망의 종교입니다.
마치 혼인 잔칫집과 같이 즐겁고 흥겨운 종교가 기독교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기뻐하면서 살도록 힘써야 합니다. 우울한 그리스도인이란 표현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에게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권한 대로,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형편에서도 기뻐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등지고 은둔하신 것이 아니라 사람들과 함께 지내셨으며, 도움을 구하는 자들의 필요를 채워주셨습니다. 유대인들의 혼인 잔치는 보통 일주일 정도 계속되었습니다. 한 주간 동안 신랑, 신부는 잔치를 벌이고 축하객들과 함께 즐거워했습니다.
그런데 가나의 혼인집에 난처한 일이 생겼습니다. 포도주가 떨어진 것입니다. 잔칫집에 포도주가 떨어졌으니 이만저만 큰 일이 아니었습니다. 포도주가 떨어졌으면 상점에 가서 사오면 될 것이 아니냐고 단순하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다만, 포도주를 충분히 준비하지 못한 것을 보아서 신랑의 집안 형편이 그리 넉넉하지 못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마리아는 포도주가 떨어진 것을 알았을 때, 예수님께 와서 그 사실을 말했습니다. 이는 마리아가 예수님의 도움을 요청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여자”라고 부르신 것은 하대한 것이 아니라, 당시 지체 높은 부인에 대한 호칭이었습니다.
그러면 왜 “어머니”라고 하지 않으신 걸까요? 그것은 예수님께서 표적을 행하시는 것은 마리아의 아들로서가 아니라 그리스도로서 행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육신으로는 마리아의 아들이시나 영적으로 볼 때에는 마리아의 주님이십니다. 마리아는 곧 예수님의 뜻을 알아차리고 하인들에게 지시하기를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고 하였습니다.
마침 마당에 두 세 통 드는 결례용 항아리가 여섯 개 놓여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외출했다가 돌아오면 결례용 항아리의 물로써 손과 발을 씻었습니다. 항아리 하나의 용량은 약 40리터에서 60리터 정도 되었으니 여섯 개면 도합 240리터 혹은 360리터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인들에게 항아리 여섯 개에 물을 채우라고 하셨습니다. 하인들이 그대로 하였더니,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고 하셨습니다.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본 연회장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습니다. 즉시 신랑을 불러 말하기를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자상하신 배려를 대합니다. 주님께서는 잔치에 꼭 필요한 만큼만 주신 것이 아니라, 모든 하객을 대접하고도 남으리만치 넉넉하게 주시되 그것도 최상급 포도주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은혜와 긍휼이 풍성하시므로 성도들이 무엇을 구하든지 최선의 응답을 베풀어 주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인들의 행동을 통하여 순종을 배워야 합니다. 항아리에 물을 채우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그 물을 병에 담아다가 연회장에게 갖다 주는 것은 망설여지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인들은 그 항아리에 든 것이 맹물임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요. 만약에 물을 갖다 주었다가는 연회장이나 손님들에게 무슨 욕을 먹을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인들은 예수님의 지시에 순순히 따랐습니다. 그랬더니 물이 포도주로 바뀌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이처럼 순종할 때에 놀라운 기적을 경험하게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연회장은 최고급 포도주를 풍성하게 준비한 신랑을 칭찬했습니다. 그러나 신랑은 어찌된 영문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이 일을 아는 사람은 마리아와 하인들과 제자들뿐이었습니다. 신랑의 체면을 살려주신 예수님은 참 멋있는 분이십니다.
11절은 이 기적에 대하여 이런 결론을 내립니다.
“예수께서 이 처음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이 기적을 ‘처음 표적’이라고 했습니다. 표적이란 보통 기적이 아니라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신 것을 입증하기 위한 기적이라는 뜻입니다.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기적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밝히 드러낸 표적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표적을 보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던 것입니다.
성경에는 많은 기적에 대한 증언이 나옵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는 사람은 성경에 기록된 그 모든 기적을 읽고서도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다. 믿는 사람들에게는 성경에 기록된 기적 사건들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여주는 표적이지만, 믿음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지어낸 이야기에 불과합니다.
예수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을 행하신 그 이튿날, 한 무리가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기를 “너희가 나를 찾아온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라고 하셨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예수님이 하늘로서 오신 그리스도이신 것을 보여주기 위한 표적이었으나 그들은 이 같은 진리를 알지 못하고 단지 떡을 얻어먹으려고 다시 찾아온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기적이 우리에게 주는 가르침이 무엇인지 살펴봅시다.
1. 예수 그리스도는 그를 믿는 자들을 본질적으로 변화시키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물이 포도주로 바뀐 것은 외형적인 변화가 아니라 질적인 변화를 의미합니다. 물과 포도주는 본질이 전혀 다릅니다. 이와 같이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질적 변화가 일어납니다. 예수 믿기 전에는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죄인이었는데, 예수님을 믿은 후에는 죄 사함을 받아 하나님의 법정에서 의인으로 인정을 받게 되었습니다.
“1)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
예수님을 믿고 죄 사함 받은 성도들은 더 이상 정죄 의식에 사로잡혀 살 이유가 없습니다. 그 대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의인의 신분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 믿기 전에는 마귀의 종노릇하던 자였는데, 예수님을 믿고 나자 천국 백성이 되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말씀하기를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벧전 2:10)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비록 이 땅에 발을 딛고 살지만 실은 천국의 시민입니다.
그리고 예수 믿기 전에는 하나님과 상관이 없던 자들이었으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나자 영으로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요한복음 1장에 이르기를 “12)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감히 하나님께 대하여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그 한없으신 사랑과 긍휼 가운데 살게 되었으니, 얼마나 놀라운 변화입니까?
그리고 이 같은 변화는 성도들의 실생활 속에서도 나타납니다. 세리장 삭개오는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불법도 서슴지 않고 행하던 사람이었으나 예수님을 만나자 자기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고 남에게 토색한 것이 있으면 네 배로 갚겠다고 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일곱 귀신 들려 인격이 파탄 났던 여자였으나 예수님을 만나자 변화되어 남은 생애를 경건한 여성으로서 주님을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세리 마태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순종하자 사도 마태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죽이려고 다메섹으로 달려가던 사울이 예수님을 만나자 이방인의 사도 바울이 되었습니다. 이 같은 변화는 오늘날도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오늘 이 예배에 참석한 우리 모두가 이 변화의 주인공들입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십시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존재적인 변화, 질적인 새로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2.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삶에 기쁨이 주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맹물같이 무미하던 삶이 포도주처럼 감미롭게 변합니다.
♪“나 속죄함을 받은 후 한 없는 기쁨을
다 헤아릴 수 없어서 늘 찬송합니다.”
오늘날 우리사회는 인터넷의 자살 사이트에서 만나 동반 자살을 시도하는 사건이 끊임없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대부분이 노인이 아니라 젊은이들이라는 사실이 우리를 안타깝게 만듭니다. 인생의 출발선상에 서 있는 젊은이들이 사는 것이 재미없고 권태로워 죽는 편을 택하다니 가련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요즘 우리 젊은이들은 불공평하고 불공정한 현실 앞에서 좌절하고 있습니다. 공평과 공정을 외치는 사람들은 많지만 개선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는 공의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 힘써야 하지만, 기대한 만큼 성과를 거두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면 현실이 개선될 때까지 우울한 삶을 살아야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현실의 어려움이 중첩되더라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항상 기뻐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과 그리스도인들의 확연한 차이점입니다. 하나님을 부인하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은 주님께서 주시는 신령한 즐거움을 맛볼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추구하는 감각적인 쾌락은 잠간 동안의 즐거움은 줄지 몰라도 곧장 더 깊은 허무의 늪에 빠지게 합니다. 그 심령에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지 않은 사람은 세상에서 성공 출세해도 마음의 공허함을 해결할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들 가운데 마약 중독자가 많습니다. 삶의 무의미와 지루함을 해결할 방법을 찾다보니까 점점 더 큰 자극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어 죄 사함 받은 사람은 가진 것이 많건 적건, 처한 형편이 좋건 나쁘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한 평안과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내 영혼이 은총 입어 중한 죄 짐 벗고 보니
슬픔 많은 이 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찬 495)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알코올로 된 술에 취하는 것이 아니라 새 술에 취합니다. 곧 성령을 받아서 참된 삶의 의미를 알고 가치 있는 인생을 살아가며,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참 된 행복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돈이나 명예, 권력을 통해서 행복을 맛볼 줄로 착각합니다. 그러나 세상이 주는 행복은 오래지 않아 슬픔과 허탈감을 안겨줄 뿐입니다. 진정한 행복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만 우리에게 주실 수 있으십니다.
3. 성도들은 삶의 문제를 만났을 때 주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나의 잔칫집에 포도주가 떨어졌을 때 마리아는 즉시 이 사실을 예수님께 말하고 도움을 구했습니다. “저희에게 포도주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하인들에게 명하여 마당에 놓인 여섯 개의 결례 항아리에 물을 채우게 하시고는 기적을 행하여 물을 포도주로 만드셨습니다. 이처럼 주님께서는 구하는 사람에게 언제나 좋은 것으로 응답해 주십니다. 우리는 주님을 인색한 분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십시오. 벳세다 해변에 모인 사람들이 장정만 오천 명이나 되었으나 모든 사람이 배불리 먹고 남은 것을 거두니 열 두 광주리에 가득 찼습니다. 이처럼 주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의 기도에 풍성한 응답을 주십니다. 가나의 혼인집에서 기적을 베푸셨던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히 13:8).
사랑하는 성도님들, 기도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 된 성도들에게만 주어진 특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의 위대함에 대하여 이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 7:7-11)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특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무슨 일을 만났든지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가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야고보 선생은 말씀하기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 1:5)고 했습니다. 혹시라도 내가 잘못 구하면 어떻게 할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가 구한 것보다 더 좋은 것으로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구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응답을 받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님들께서는 기도의 특권을 부지런히 활용하셔서 풍성한 응답을 받아 누리시기 바랍니다.
마지막 유월절 만찬석상에서, 예수님께서는 근심에 잠긴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요 16:24)고 하셨습니다. 기쁨이 충만한 삶을 원하시거든 주님께 신령한 기쁨을 부어달라고 구하여 받아 누리시기 바랍니다.
4. 주님의 말씀을 순종할 때 기쁨이 넘치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여섯 개의 돌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고 하셨을 때, 하인들은 즉시 순종하여 아구까지 채웠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퍼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고 하셨을 때에도 일언반구 대꾸 없이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실로, 가나의 표적은 하인들의 순종을 통해서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성경에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삼상 15:22)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려면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해야 합니다. 순종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과 같아서 주님의 능력을 체험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내 생각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지만 하나님의 말씀이니 순종해 보자” 그렇게 순종하면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이 되어 무덤에 장사 지냈습니다. 마침 예수님께서 베다니 마을에 오시자 나사로의 누이 마르다가 영접하며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하시니, 마르다가 대답하기를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줄을 내가 아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마르다가 대답하기를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줄 내가 믿나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무덤에 가셔서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자 “주여 죽은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자, 곧 순종하여 돌을 옮겨 놓았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하늘을 우러러 보시고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신 후에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죽은 나사로가 살아서 제 발로 걸어 나왔던 것입니다. 이처럼 주님의 말씀 앞에 순종할 때 기적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물을 변하여 포도주가 되게 하신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의 삶을 맛나고, 의미 있고, 새롭게 변화시켜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삶의 모든 권태와 피로와 걱정과 슬픔과 같은 부정적인 요소들을 몰아내고 생수의 강이 솟아나듯이 기쁨이 넘치는 삶을 살기 원하거든, 먼저 예수님을 성도님들의 삶 속에 모셔 들이십시오. 그리고 기도로써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시고, 주님의 말씀을 가감 없이 순종하십시오. 그리하여 이제껏 누렸던 것보다 더 차원 높고 더 풍성한 기쁨의 삶을 영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