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4140
2월20일[연중 제6주간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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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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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vKDDJVMKf40
[서울대교구 최민석 베드로(문정동성당 보좌)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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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이토록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바오로 사도의 극적인 삶의 전환에 대한 묵상도 은혜롭지만, 수제자 베드로 사도의 신앙 여정에 대한 묵상도 참으로 풍요롭습니다. 어찌 보면 베드로 사도는 우왕좌왕, 좌충우돌하는 오늘 우리의 모습을 대변하는 듯 합니다.
베드로 사도의 나약하고 흔들리는 모습은 꼭 저를 보는 느낌입니다. 어찌 그리 저와 빼닮았는지 모릅니다. 정말 제대로 된 제자로 한번 살아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데, 그래서 결심하고, 시작은 잘하는데, 뒷받침이 그렇게 안 됩니다. 머리로는 분명히 될 것 같은데, 삶이 받쳐주지를 못합니다.
첫출발 때 목숨이라도 바칠 것 같이 달려들던 그 열렬한 마음, 예수님을 향해 활활 타오르던 그 불같은 열정, 순수한 신앙, 그런 초심을 항상 유지하고 싶었는데...생각뿐입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일단 용감히 따라나서기는 했지만, 워낙 신앙의 기반이 약하다보니, 의지력이 부족하다 보니, 뱁새가 황새 쫓아가는 분위기입니다.
베드로 사도의 경우 수제자 직분까지 맡다 보니 거기서 오는 부담감이나 스트레스는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아직도 갈 길이 멀었던 제자단이었습니다. 아직도 세속의 물이 제대로 빠지지 않았던 제자단이었습니다. 아직도 영적인 삶보다는 육적인 생활에 익숙해 있던 제자단이었습니다.
이런 제자단의 대표 격이었던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의 요청과 제자단의 미성숙 사이에 끼여 참으로 고생이 많았습니다.
학창시절, 돌아보니 한 가지 생각이 떠오릅니다. 담임선생님들께서는 당신들이 담당하셨던 학급에 문제가 생기거나 뭔가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을 때, 먼저 반장을 불러 혼을 내거나 족쳤습니다.
제자단의 반장이었던 베드로 사도 역시 자신이 맡았던 직책상 무수히 교무실로 불려갔습니다. 제자들을 대표해서 혼도 엄청 많이 났습니다.
오늘 복음 말미에서도 베드로 사도는 제자들을 대표해서 예수님으로부터 엄청 야단을 맞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전혀 깨닫지 못하는 제자들, 옛 삶의 방식, 옛 사고방식을 떨치지 못하는 제자들, 무조건 인간적으로만 생각하는 제자들을 향해 엄청난 꾸중을 하시는데, 반장인 베드로 사도가 대표로 꾸중을 듣습니다. 꾸중의 강도가 엄청납니다. 화들짝 놀랄 표현까지 등장합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르 8,33)
베드로 사도의 문제점은 다른 무엇에 앞서 십자가 신비에 대한 이해 부족이었습니다. 인간 구원을 위한 은총으로 다가오신 메시아 예수님에 대한 개방성 부족이었습니다.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으시고, 사람들로부터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할 것” 이라는 예수님의 예언 말씀에 베드로 사도는 크게 실망합니다. 그간 예수님께 걸었던 모든 기대가 수포로 돌아감도 느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을 꼭 붙들고 따졌던 것입니다. 절대로 그래서는 안 된다고.
이토록 우둔함에도 불구하고, 아직 깨달음에 도달하려면 한참 기다려야만 함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지속적으로 수제자로서의 사명을 부여하십니다.
오늘 우리 역시 마찬가지겠지요. 아직도 제대로 된 신앙의 눈을 뜨지 못한 우리지만, 아직도 고통의 신비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우리지만, 그래서 너무나 부족한 우리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런 우리를 부르십니다. 제자로서의 사명을 부여하십니다. 복음 선포의 사도로 파견하십니다. 이토록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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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인간적이 되다가 사탄이 될 수도 있다>
영화 ‘조커’(2019)는 어떻게 평범한 사람이 악의 화신이 되어 가는지를 담아내었습니다. 광대복장을 입고 홀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주인공에게 젊은 아이들은 구타하고 조롱하며 가진 것을 빼앗습니다.
그는 어머니를 통해 자신이 시장 밑에서 일할 때 태어난 고담시의 시장 아들임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 밑바닥 생활에서 조금은 나아질 수 있는 기대를 갖습니다.
그러나 알고 보니 그것도 어머니의 망상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사실 아들을 감금하고 폭행하였습니다. 믿을 사람은 어머니 한 분 뿐이었는데 그마저도 자신을 학대하고 이용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조커는 지금까지 자신을 속여 온 어머니를 죽이고 자신에게 피해를 입혔던 이들에게 보복을 합니다. 그리고 고담시티의 악의 상징이 됩니다.
이 영화는 조커가 끊임없이 관객을 향해 ‘내가 이렇게 된 것은 이런 상황에서는 너무나도 당연한 일 아니야?’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당신도 이런 상황에서는 나처럼 될 수밖에 없지 않았겠느냐?’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정말 영화는 ‘보통 인간이라면 그런 상황에서는 다 조커가 될 수밖에 없겠다.’ 라는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그렇게 악이 정당화됩니다.
우리는 한 평범하고 모범적인 직장인이 어떻게 악의 화신이 되는지 알고 있습니다. 바로 유태인 6백만 명을 학살하는데 유용한 시스템을 고안하여 학살을 도운 1급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입니다.
그도 그저 평범하고 인간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공무원으로서 승진하려고 나라가 시키는 일을 열심히 한 죄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너무 인간적이었기 때문에 사탄이 되어버렸습니다.
‘인간적인 게 그렇게 나쁜가?’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더 나아가 인간적인 것이 좋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적인 것, 인간이라면 그런 상황에서 다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이 사람을 사탄이 되게도 만듭니다.
아무리 세상의 많은 악한 일들을 하는 사람들도 ‘인간이니까 이럴 수 있지 않나?’ 라는 생각으로 자기 행동을 합리화합니다.
자신이 짐승이라 그런 행동을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인간이기에 그럴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니 인간적이라는 말은 거의 사탄이 되는 것까지도 정당화하는 말이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지극히 인간적이 되어버린 베드로에게 이렇게 꾸짖으십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여기에서 “생각하는구나.”의 단어는 ‘프로네오’인데 ‘흥미를 가지다, 관심을 가지다. 애정을 두다.’란 뜻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아닌 사람의 뜻에 관심을 가지면 사탄까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은 사탄이 되려고 해서 사탄이 된 것이 아니라 지극히 인간적인 일에만 관심을 가졌기 때문에 사탄이 되었다는 뜻도 됩니다.
사탄도 자신들은 영원한 종이고 인간이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에 분개해서 그렇게 되었다고 합니다.
질투하는 것은 어쩌면 인간적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인간적인 것이 사람을 사탄도 되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조커가 ‘나는 인간을 넘어서는 존재일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만 가졌어도 끊임없이 ‘인간이면 다 이럴 거야!’라는 자기 합리화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가톨릭교회교리서는 이렇게 가르칩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선택함으로써 하느님을 거슬렀고, 피조물로서 자신의 처지가 요구하는 것을 거슬렀으며, 결국은 자신의 선익을 거슬렀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거룩한 상태에 있게 하시고, 영광 안에서 충만히 ‘신화’(神化)하기로 정하셨다. 그러나 악마의 유혹으로 인간은 ‘하느님 없이, 하느님보다 앞서서, 하느님을 따르지 않고서’ ‘하느님처럼 되기를’ 원하였다.”(「가톨릭교회교리서」, 398)
하느님은 인간이 하느님이 되게 만들기로 결심하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끊임없이 인간임을 선택하였습니다. 그렇게 되어야 하느님이 되라는 악마의 유혹에 이끌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죄는 ‘인간이라는 믿음으로 사는 사람이 하느님처럼 되려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인간적이 되다가 사탄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인간적인 것 안에 하느님과 대적할 모든 요소들이 들어갑니다.
자기 자신의 하느님과 같아지려는 교만을 누르는 길은 이미 우리가 하느님이 되었음을 믿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인간이 신처럼 되려고 죄를 짓는다면 이미 신이 되었다는 믿음이 죄에서 벗어나게 해 주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성체성혈로 하느님의 본성을 모신 하느님의 성전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계시기에 성체를 하느님이라 믿는다면 그 성체를 영한 우리도 하느님이라 믿어도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믿어야 지극히 인간적인 사람이 지을 수 있는 죄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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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우리는 일상에서 수많은 표징(sign)과 상징(symbol)을 접하며 살아갑니다. 교통 신호등, 결혼반지, 국기 등은 모두 특정한 의미를 지닌 표징이며, 우리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떤 표징을 주셨을까요? 오늘 저는 구약의 무지개와 신약의 성체성사를 통해 하느님께서 우리와 맺으신 언약과 사랑의 의미를 나누고 싶습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창세기의 말씀은 노아의 홍수 이후 하느님께서 인류와 맺으신 첫 번째 언약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홍수가 끝난 후, 하느님께서는 “내가 너희와 언약을 세운다.”라고 말씀하시며 무지개를 그 표징으로 세우셨습니다. 무지개는 단순한 자연현상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 그리고 인류를 멸망시키지 않겠다는 약속의 상징입니다. 우리가 무지개를 볼 때마다 하느님의 사랑과 평화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지만 구약의 무지개는 하늘에서 바라볼 뿐, 그것을 통해 직접적인 생명의 은총을 받지는 못합니다. 단순히 하느님의 약속을 떠올리게 하는 역할을 할 뿐이지, 우리를 변화시키지는 않습니다.
신약에서는 어떤 표징을 통해 하느님의 언약이 완성될까요?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새로운 언약의 표징을 주시는 장면을 듣습니다.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고 축복하신 후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먹어라,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줄 내 몸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잔을 들어 “이것은 죄를 용서해 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순한 기념의 표징이 아니라,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내어주시며 새로운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성체성사는 무지개와는 달리, 단순한 눈에 보이는 표징이 아니라 우리 안에 실제로 받아들여지고,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살아 있는 표징입니다. 고인이 된 소설가 최인호는 본당 신부님을 찾아와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신부님 저는 성체가 몹시 고프답니다.” 당시 최인호는 암 투병 중이었습니다. 본당 신부님은 최인호에게 성체를 영해 주었습니다. 우리가 성체를 모시면서 우리의 몸은 예수님이 머무시는 ‘감실(龕室)’이 됩니다. 우리는 최초의 감실이었던 성모님처럼 순명과 믿음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구약에서 언약의 주체는 하느님과 노아입니다. 표징의 형태는 하늘에 나타나는 무지개입니다. 언약의 성격은 홍수로 멸망하지 않겠다는 약속입니다. 언약의 방식은 자연 현상을 통해서 드러납니다. 신약에서 언약의 주체는 예수님과 모든 인류입니다. 연약의 형태는 빵과 포도주입니다. 연약의 성격은 영원한 생명을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언약의 방식은 미사를 통해서 지속해서 이루어집니다. 무지개는 하느님의 약속을 상기시키는 외적인 표징이지만, 성체성사는 우리 안에 받아들이는 내적인 은총의 표징입니다. 무지개는 인간이 바라보기만 하는 것이지만, 성체성사는 우리가 직접 받아 모시며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게 합니다. 우리는 무지개를 볼 때마다 하느님의 약속을 떠올립니다. 우리는 성체를 모실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희생을 묵상하며 성체성사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무지개는 하느님의 언약을 기억하게 하는 표징이라면, 성체성사는 하느님의 언약을 우리 삶 속에서 실현하는 표징입니다. 우리가 미사에서 성체를 받아 모실 때, 그것이 단순한 종교적 의식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실제적인 하느님의 은총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에게 신앙고백을 하였습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듣고 크게 칭찬하였습니다. 그리고 교회를 맡긴다고 말하셨습니다. 그런데 베드로 사도는 자신의 신앙고백을, 삶을 통해서 실천하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고난의 잔, 십자가, 나눔, 희생을 통한 신앙고백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이야기하십니다. “너의 신앙고백을 너의 삶을 통해서 드러내어야 한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너의 신앙고백은 참된 신앙고백이 아니다.” 참된 신앙인은 십자가를 두려워하지 않아야 합니다. 참된 신앙인은 주님께서 늘 함께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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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삼의딸들수녀회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님]
살아가면서 우리가 때때로 되새겨야 하는 물음은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마르 8,29 참조)일 것입니다. 베드로가 내놓은 답은 모든 이에게 공통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나’에게 교리상의 정답만이 아니라 개인적인 체험과 고백이 담긴 답을 요구하실 것 같습니다. 나는 예수님을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나에게 예수님께서는 어떤 분이신가?
베드로는 출제자가 바라는 정답을 맞히고도 칭찬 대신 말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아마도 그가 “그리스도”(8,29)의 의미까지는 아직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였기에 예수님께서는 그가 당신께서 그리스도이시라는 사실을 섣불리 알리기를 바라시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과연 시험을 멋지게 통과한 바로 다음 순간 베드로는 스승에게서 “사탄”(8,33)이라는 극단적인 꾸지람을 듣습니다. “내게서 물러가라.”(8,33)라는 말씀은 그리스 말 원문을 볼 때 “내 뒤로 가거라.”입니다. 스승에 대한 인간적인 사랑으로 스승의 앞을 가로막은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는 제자의 자리로 곧 스승의 뒤로 가라는 가르침을 주십니다.
우리도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할 때 사탄을 따르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며 그분을 닮고자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에 참여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 성인은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릴 뿐만 아니라 진짜로 그리스도인이어야 한다.”라고 강조하고 순교를 향하여 가는 길에 “내가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 그리스도인이도록” 교우들의 기도를 청하였습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인은 삶으로 증언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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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8,27-33: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예수님은 필립보의 가이사리아에서 예수님은 당신에 관해서 물으신다. 베싸이다의 소경을 치유하신 것처럼 제자들의 신앙의 눈을 뜨게 해주신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신앙의 눈이 얼마나 밝아졌는지 알아보고 계시다. 예수께서는 공생활을 통하여 제자들을 가르치셨고, 기적을 통하여 육체적, 정신적 병을 고쳐주시는 모습을 통하여 하느님의 나라가 어떻게 실현되고 있는가를 알려주셨으나, 제자들이 당신에 관한 생각이 어떤지를 아시고 고쳐주시려고 하는 것이다. 먼저 사람들이 당신을 누구라고 생각하는지 물어보신다. 대답은 세례자 요한, 엘리야, 예언자 중에 하나라고 하였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27절) 하신다. 이때 베드로가 “선생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29절) 고백하였다. 예수님은 이 말을 칭찬하신다. 그러나 당신의 수난을 예고하시자, 베드로는 펄쩍 뛰며 그래서는 안 된다고 만류한다.(32절) 이에 예수께서는 가장 혹독하게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33절)고 책망하셨다.
우리는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해왔다. 신앙생활을 통하여 내 생활 속에, 내 삶 속에서 예수님은 나에게 어떤 분으로 생각하고 어떤 관계를 맺고 살아가고 있는가? 베드로와 같이 그리스도라고 고백할 수 있다고 하여도, 베드로가 생각하고 기대했던 세상의 행복을 위한 정복자로서의 그리스도인가? 아니면 그리스도께서 당신 스스로 말씀하시듯이 고난을 겪고 십자가라고 하는 어려운 길을 통하여 세상을 구원하시며, 하느님 나라를 완성하시어 모두에게 하느님의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게 해주시는 분으로 고백하고 있는지? 그래서 그분의 삶을 본받아 그분을 따르고 있는지 반성해야 한다. 그분의 십자가는 고통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부활이라는 영광으로 변화되었다. 그러기에 우리는 십자가의 신비 혹은 고통의 신비를 체험할 수 있으며, 그 십자가와 고통은 항상 영광의 신비로 부활의 신비로 연결됨을 잊지 말아야 한다. 나에게 있어 주님은 어떤 분이며, 어떤 관계로 살아가고 있는지 반성해 보고, 항상 그리스도의 신비를 체험하며 살아가는 우리 신앙인이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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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신앙생활의 목적은 ‘구원의 은총’을 얻는 것 하나뿐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베드로가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에 관하여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셨다. 예수님께서는 그 뒤에,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으시고 원로들과 수석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명백히 하셨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제자들을 보신 다음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하며 꾸짖으셨다."(마르 8,29-33)
1)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는 질문은, “너희는 왜 나의 제자가 되었느냐?”, 또는 “너희는 왜 나를 따르느냐?”입니다.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베드로 사도의 대답은, “저희는 스승님이 ‘그리스도(메시아)’ 라고 믿기 때문에 제자가 되었고, 스승님을 따르고 있습니다.”, 또는 “저희는 구원받기를 원하기 때문에 스승님을 따릅니다.”입니다.
예수님의 질문을 오늘날의 우리에게 하시는 질문으로 바꾸면, “너희는 왜 성당에 다니느냐?”, 또는 “너희는 왜 신앙생활을 하느냐?”입니다. 대답은 “구원받기를 원하기 때문에”이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1코린 15,19) 신앙생활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또는 신자가 되기를 원하는 이유가 처음에는 ‘현세적인 것’일 수도 있습니다. <아직 교리를 잘 모르고, 구원이 무엇인지, 하느님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모르는 때에는 그럴 수 있습니다.>
그렇게 시작했더라도 교리를 배우고 성경을 배우고 예수님을 알고 만나면서 성숙한 단계로 나아가면 됩니다. 그런데 앞으로 나아가지 않고 그냥 현세적인 소원을 비는 것으로 멈추어 버리면, 바오로 사도가 말한 것처럼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으로 남게 됩니다.
여기서 ‘불쌍하다.’는 말은 ‘어리석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의 은총’을 외면하고 현세적인 것만 원하는 것은 정말로 어리석은 일이고, 아무것도 아닌 것만 바라면서 인생을 낭비하는 것이기 때문에 불쌍한 일입니다. <‘구원의 은총’은 신앙인이 얻으려고 노력해야 하는 것, 신앙생활의 유일한 목적입니다.>
물론 인생을 살면서, 병이든지 어떤 사고든지 여러 가지 급박한 상황이 생길 때가 많고, 그럴 때에 예수님께 도움을 청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신앙 여정을 더 잘하기 위해서 도움을 청하는 것이고, 그 위기를 극복하는 것만을 신앙생활의 목적으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
2) 예수님께서 ‘당신에 관하여’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히’ 명령하신 것은, 당신을 그리스도로 믿는 신앙은 당신의 수난, 죽음, 부활 후에야 완성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명령은,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먼저 믿어야만 ‘예수님은 그리스도’ 라고 다른 사람들에게 증언할 자격이 생긴다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지금 읽고 있는 신약성경은, 예수님의 수난, 죽음, 부활, 승천, 성령강림을 모두 체험하고 믿음이 완성된 다음에 만들어진 책입니다. 기록할 때 시간적인 순서에 따라 기록한 것일 뿐이고, 예수님께서 어떤 말씀을 하실 때마다 받아 적은 것도 아니고, 어떤 일을 하실 때마다 적은 현장 기록도 아닙니다.
‘성전 정화’ 장면에 바로 그것을 나타내는 말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뒤에야,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그분께서 이르신 말씀을 믿게 되었다."(요한 2,22)
3)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말리다가 크게 혼난 일은, 그때까지는 ‘머리로만’ 믿고, 아직 ‘삶으로’ 믿는 단계에 도달하지 못했음을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를 ‘사탄’이라고 부르신 것은, 그가 마귀 들렸다는 뜻도 아니고, 사탄의 길을 걷고 있다는 뜻도 아니고, 그가 지금 하는 말과 행동이 사탄이 하는 행동과 같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을 가로막는 것은 사탄이나 하는 짓이라는 것입니다.>
“내게서 물러가라.”는 “제자의 본분을 지켜라.”입니다. 제자는 스승이 가는 대로 뒤따라가는 사람입니다. 세속에서는 제자가 스승보다 앞설 수도 있지만, 신앙인들은 스승이신 예수님의 뒤를 잘 따라가면 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고, 파견된 이는 파견한 이보다 높지 않다. 이것을 알고 그대로 실천하면 너희는 행복하다."(요한 13,16-17)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고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다. 제자가 스승처럼 되고 종이 주인처럼 되는 것으로 충분하다. 사람들이 집주인을 베엘제불이라고 불렀다면, 그 집 식구들에게야 얼마나 더 심하게 하겠느냐?"(마태 10,24-25)
4) 여기서 ‘하느님의 일’은 당신 자신을 십자가에서 속죄 제물로 바쳐서 인류를 구원하시는 일이고, ‘사람의 일’은 사도들의 ‘인간적인 애정과 판단’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아직 십자가 수난의 의미를 모르던 때였고, 예수님을 너무나 사랑해서 ‘십자가의 길’을 말렸을 뿐입니다. <나중에 모든 것을 깨달아 알게 되고 믿게 되었을 때에는, ‘온 삶’으로 예수님 뒤를 따르는 위대한 사도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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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당신과 나 사이>
마르코 8,27-33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카이사리아 필리피 근처 마을을 향하여 길을 떠나셨다. 그리고 길에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제자들이 대답하였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베드로가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에 관하여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셨다. 예수님께서는 그 뒤에,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으시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명백히 하셨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제자들을 보신 다음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며 꾸짖으시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당신과 나 사이>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르 8,27)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르 8,29)
당신과 나
사이
한 사람 한 사람
비우고 비워
당신과 나
사이
아무도 없어
사이마저 사라지고
당신과 나
갈림 없이 함께
당신과 나
나누임 없이 하나
당신은
나의 당신이 되고
나는
당신의 내가 되니
나의 당신과
당신의 나
사이
비로소
모든 이가
곱게 깃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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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아침에 주님의 말씀을 듣고 미사 봉헌을 하고 성체를 모시면 저녁에 죽어도 한이 없을 만큼 잘 살아야 하는 데 돌아보면 후회도 많고, 말씀을 들은 사람인지? 미사를 봉헌하고 성체를 모신 사람인지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로 속 좁게 살기도 합니다. 마음이 얼마나 간사한지 주님을 모신 감사함을 성당 문을 나서기가 무섭게 잊어버리곤 합니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도 그것이 주님의 마음에 드는 일이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하고 싶은 일을 하고 나면 영락없이 주님의 마음을 상해드리고 맙니다. “무릇 육을 따르는 자들은 육에 속한 것을 생각하고, 성령을 따르는 이들은 성령에 속한 것을 생각합니다”(로마8,5). 그리고 “육 안에 있는 자들은 하느님 마음에 들 수 없습니다”(로마8,8). 그것을 알면서도 여전히 육적인 욕망을 따르고 있으니 어쩌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하고 싶은 일을 우선순위에’ 놓고 사는 사람이 아니라 ‘해야 하는 일을 먼저’ 해야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앞세워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베드로는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마르 8,29)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당신에 관해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시며 ‘사람의 아들이 많은 고난을 겪으시고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베드로는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르 8,33) 하는 꾸지람을 듣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자기의 생각과 예수님의 생각이 달랐기 때문에 반박을 하였습니다. 사실 지금껏 스승을 믿고 따라왔는데 당신이 떠나시면 우리의 운명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하는 마음도 있고, 당신이 불행한 길을 가신다는데 어떻게 보고만 있겠습니까? 하는 마음도 담겨 있습니다. 지금껏 걸어온 길이 성공적이라 생각하였는데 지금 계획이 바뀐다면 그것은 스승님에게도 자기들에게도 실패하는 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스승과 함께 영광을 누리고 싶은데 수모와 배척을 당한다니 결코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베드로뿐 아니라 제자들 모두가 스승의 깊은 뜻을 아직도 헤아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인간적인 것에 매이는 것, 진리의 길을 가로막는 것이 사탄입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통하여 인간을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것은 아버지 하느님의 계획인데 그것을 반박하고 그 길을 가시고자 하는 예수님을 방해하였으니, 베드로는 사탄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느님의 일보다 사람의 일을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그 일을 먼저 하려 한다면 우리도 역시 사탄이 되고 맙니다. 하느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현실적인 나의 잇속을 챙김으로써 얼마나 자주 사탄이 되고 마는지요.
예수님을 따르려면 희생과 고통을 감당해야 합니다. 고통 없이 영광 없습니다. 이 시간 쉽고 편한 일, 쾌락을 즐기며 돈 되는 일을 쫓고, 소유와 지배, 명예에 맛 들이고자 하는 마음, 내 생각이 다 인양 남에게 주지시키려는 사탄의 마음을 주님께서 다스려 주시기를 청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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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
‘그리스도’는 그리스어로 ‘구세주’라는 뜻인데, 히브리어로는 ‘메시아’이다. 그리고 ‘메시아’는 ‘기름 부음을 받은 사람’이란 뜻이다. 왜 ‘기름 부음을 받은 사람’이란 말이 구세주의 의미를 지니게 되었을까?
메시아라는 말은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와 관련이 있다. 이스라엘은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는 강대국이었지만, 그 이후에는 쇠락의 길을 걷다가 마침내 기원전 587년 바빌론의 침공을 받아 멸망한다. 그리고 왕족, 사제, 백성들이 바빌론으로 유배를 가게 된다. 약50년 후 유배가 끝나자 이스라엘 백성은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나라를 재건하기 위해 애쓰지만, 주변 강대국의 속박을 받으며 겨우 명맥을 이어간다. 이런 와중에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의 주님인 하느님께 희망을 두면서, 그분께서 언젠가는 구원자를 보내어 선민들인 자신들을 구원해 주시리라 믿었다. 이러한 기대를 하면서 미래의 구원자에 대해 상상하게 되었는데, 어떤 이들은 다윗과 같은 강력한 임금으로, 또 어떤 이들은 사제와 같은 인물로, 또 다른 이들은 위대한 예언자와 같은 인물로 생각하였다. 그런데 사제, 예언자는 모두 머리에 기름부음을 받아 임명되었고, 이런 공통점에 근거해서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보내주실 미래의 구원자를 ‘기름부음받은 사람’, 곧 ‘메시아’라고 불렀던 것이다.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베드로의 고백은 예수님의 신원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담고 있다. (손희송 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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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정용진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도 변함없이 우리를 믿음의 여정으로 이끕니다. 이를 위하여 복음서는 매우 강한 대비의 구조를 두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하느님 아버지의 도우심으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깨닫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곧바로 하느님의 계획에 반대합니다. 예수님께서 고난을 겪으시며 사람들 손에 죽임당하실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는 노아가 모든 것이 파괴된 땅에서 이제 막 드러난 마른땅과 마주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거기서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하라.’는 약속과 축복의 말씀을 해 주신 하느님께서는 노아와 계약을 맺으시며 사람의 피가 땅에 흘러 떨어지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죽임을 당하는 것은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오늘 복음에서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죽임을 당하시는 것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합니까?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하느님의 계획에 순응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며 하느님 말씀 안에서 모든 순간을 아버지 하느님의 뜻에 맡기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사야서가 말하는 고통받는 주님의 종과 아벨의 피와 형제들에게 버림받아 구덩이에 버려진 요셉과 구약의 많은 예언자처럼 하느님의 계획 안에서 살아간 의인들의 죽음을 보셨고, 외아들의 수난과 죽음을 통하여 모든 이의 구원을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기로 마음을 굳히셨을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하느님께 빛을 받아 옳게 시작하고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지만 어느 순간 인간적인 생각과 마음의 충동에 따라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사람’이 되려는 경우가 자주 있습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을 이루어 주시는 하느님만 찾지 말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따르는 삶을 살아갑시다. “여러분의 모든 걱정을 그분께 내맡기십시오. 그분께서 여러분을 돌보고 계십니다.”(1베드 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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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우리는 무엇에 대한 답을 찾을 때 다른 사람이나 다른 정보에 많이 의존합니다. 특히 오늘날엔 정보의 바다인 인터넷 덕분에 구글이나 네이버에 물어보면 그럴싸한 답들이 즐비하게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요즘은 자신이 진지하게 고민하고 묵상하고 발품을 팔아서 답을 찾는 노력은 쓰잘데없는 시간낭비로 생각되고, 쉽게 남이 찾아놓은 답중에 가장 맘에 드는 것을 정답으로 삼아버립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남들이 이야기하는 답은 비슷한 답일 수는 있어도 정답은 아닐 가능성이 높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더냐?"(마르 8,27) 물으시고, 이어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8,29)고 물으십니다.
사람들의 대답은 비슷해 보이지만 정답이 아닙니다. 그래서 '너희가 생각하는 답'을 찾아라고 하시는 것 같습니다. 베드로는 그 답을 찾았고 예수님은 그게 정답이라고 확인시켜 줍니다.
그렇습니다. 남이 이야기하는 답은 참조만 하면 됩니다. 어떤 깨달은 사람이 하느님은 이런 분이고, 영성이란 이런 것이고, 깨달음은 이런 것이라 해도 그건 정답이 아닙니다. 내가 깨닫고 체득한 답만이 정답입니다. 오늘 그 답을 찾는 기쁨을 누리시길 소망합니다.
베드로가 찾은 답은 사실 깊은 성찰을 통해 나온 답은 아닌 것 같습니다. 하지만 운좋게도 정답을 맞추기는 합니다.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마르 8,29)라고.
맞지요! 그렇지만 답만 알 뿐, 아직 예수님을 정확히 모르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시죠. "맞어. 그렇지만 아직은 아니야. 하느님의 그리스도가 되기 위해선 사람의 아들은 먼저 고난과 배척을 받고 죽어야 한다고! 이 말 알아듣겠니?"
사람의 아들이 죽어야 비로소 하느님의 그리스도가 된다! 기막힌 교환 아닌가요? 사실 베드로는 못알아 듣지요. 그래서 된통 혼나지요.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마르 8,33)고. 예수님은 "밀알 하나가 땅에 떨러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고 그토록 가르쳤건만 아직도 못알아 들은 게죠.
죽어야 산다! 사람의 아들이 죽어야 비로소 하느님의 기름부은 자가 된다! 놀랍지 않습니까? 그 비밀을 우리는 잘 몰랐던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하느님의 사람이 되고 싶지요? 그렇다면 죽으라네요. 오늘은 한번 죽어 보실래요? 에고(ego)를 죽이고, 욕심과 탐욕을 죽이고, 질투와 시기를 죽이고, 세상 달콤함에서 죽어 보세요. 사랑하니까, 사랑 때문에 죽으십시오. 그러면 벗님 또한 하느님 영으로 도유되어 참 생명과 부활의 기쁨을 누리게 될 겁니다.
죽지 못해 삽니까? 아뇨! 살기 위해 죽으십시오. 팍팍 썩으십시오. 그제야 부활의 신비를 조금이나마 깨우치지 않을까요? 그제야 참 생명을 싹틔워내지 않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조금씩 메시아의 운명을 이해할 수 있도록 기회가 되면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예고하십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으시고 ...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셨다가 ...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것"(마르 8,31)을 제자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하십니다. "반드시 ... 하셔야 한다."는 말씀은 그저 단순한 의무나 당위성 이상의 비장한 결단이 담겨 있습니다.
마르코는 덧붙여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명백히 하셨다."(마르 8,32)고 합니다. 말은 입밖으로 내는 순간 더 강력한 구속력을 갖게 마련이고, 공적으로 공포될 때는 배 이상의 무게가 얹힐 겁니다. 인성을 지니신 예수님께 당신이 몸소 겪으셔야 할 수난과 죽음이 어찌 수월한 과정이겠습니까만, 예수님께서는 방금 말씀하신 당신의 수난 예고를 더 명백히 하십니다. 그건 제자들에게 뿐만 아니라, 당신 자신에게도 그렇게 하시면서 결의를 다지는 것으로 보입니다.
베드로의 도를 넘은 반박에 예수님은 "하느님의 일"과 "사람의 일"(마르 8,33)을 들어 꾸짖으십니다. 사실 삶의 순간마다 하느님의 것과 사람의 것을 구별하는 일은 그리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수난 직전에 "하느님의 일"과 "사람의 일"로 고뇌하실 겁니다. 그리고 결국 "하느님의 일(뜻)"에 순명하실 것입니다.
독서는 홍수 이야기의 마무리 부분입니다. 새와 물고기를 비롯한 모든 짐승이 "너희를 두려워하고 무서워할 것이다"(창세 9,2)고 하실 때, 인류 첫 조상의 범죄가 떠오릅니다. 겁 없이 인간에게 하느님을 대적할 범죄의 올가미를 놓은 뱀과 그에게 맥없이 넘어진 인간. 하느님의 이 새로운 질서 이후에 다시는 짐승의 꾐에 빠져 하느님을 배반하는 인간은 등장하지 않을 겁니다.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유독 강조하고 있는 "피에 대한 책임"(창세 9,4)에서는 카인의 살인이 떠오릅니다. 당신이 손수 빚은 사람이 타인, 그것도 혈육의 피를 부른 비극을 겪으시면서 하느님께서는 '내가 그런 것을 싫어한다'고, '혹 또 다시 그런 일이 일어나면 반드시 책임을 물을 것이니 절대 그러지 말라'고 축복의 자리에서 미리 못을 박으시는 듯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계약을 세우십니다. 여기에도 놀라운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노아와 그 자손들과 계약을 세우시는 것에 그치지 않고, "너희와 함께 있는 모든 생물과"(창세 9,10)도 계약을 세우십니다.
하느님께서 사람뿐 아니라, 모든 생명체에게도 멸망시키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십니다. 요구조차 한 적이 없는 짐승들에게까지 그들의 살 권리를 보장해 주시는 겁니다. 악하고 부족한 인간 때문에 다른 피조물들이 파멸되는 일은 이제 다시는 없을 겁니다. 인간의 범죄와 타락을 겪으시고 고심 끝에 나온 하느님의 뜻이니 꼭 그래야 합니다.
창조주이시고 만물의 주인이신 하느님 혼자 속으로 생각하고 품으셔도 될 결심을 굳이 인간과, 모든 피조물과 공유하고 계약을 세우시는 이유는 뭘까요? 어쩌면 예수님의 수난 예고처럼, 이 역시 인간이나 피조물에게 전달하는 것을 넘어 당신 스스로에게 명백히 하시는 다짐이 아닐까 헤아려 봅니다.
하느님의 후회와 회심으로 인간과 모든 피조물은 제 주제로서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계약의 대상이 됩니다. 이 계약은 나중에 시나이 산에서의 계약과 예수 그리스도의 새 계약으로 이어져 나갈 것입니다. 벗님 여러분, 그 계약 덕분에 우리도 서약을 통해 이 계약의 축복을 누리게 되었으니 어찌 감사드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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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강영구 루치오 신부님]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스승이요 주님이신 예수님, 당신은 천千의 얼굴을 가진 사나이입니다. 당신의 그 다양한 모습 때문에 사람들은 당신 앞에서 어떤 결단을 내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당신의 고향 나자렛 사람들이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당신을 목수 요셉의 아들이라고 생각하고(마르6,2-6) 당신의 말씀과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당신을 먹고 마시기를 즐기며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리는 형편없는 인간(마태11,19)이라고 판단합니다.
세례자 요한의 목을 벤 헤로데는 당신을 세례자 요한의 현신現身이라 생각하며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마르6,14-16) 한편, 베드로는 당신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합니다.
당신은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예언자를 예언자로 맞아들이는 사람은 예언자가 받을 상을 받을 것이며, 옳은 사람을 옳은 사람으로 맞아들이는 사람은 옳은 사람이 받을 상을 받을 것이다.”(마태10,41)
당신의 말씀대로 사람들이 당신을 어떤 분이라고 판단하고 받아들이는가에 따라서 그의 운명도 결정됩니다.
당신을 목수 요셉의 아들이라 판단한 고향 나자렛 사람들은 당신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고 배척했습니다. 당신을 먹고 마시기를 즐기는 한량閑良이라 판단한 사람들은 당신을 손가락질하고 비난했습니다. 당신을 세례자 요한의 현신現身이라 판단한 헤로데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떨어야 했습니다.
당신을 그리스도라고 판단하고 고백하는 사람은 당신을 섬기며 당신이 걸었던 길을 걸어야 합니다. 저희는 베드로처럼 당신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당신은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이지만 십자가를 지고 죽음의 언덕을 오르는 그리스도입니다. 섬기고 봉사하고 자신을 내어줌으로서 모든 사람을 살리는 그리스도입니다. 오늘 하루도 저희가 그리스도인답게 섬기고 봉사하는 날이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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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초등학교 다닐 때의 일 하나가 생각납니다. 큰형님께서 일본으로 회사 출장을 갔다가 선물을 사 가지고 오셨습니다. 샤프펜슬이었습니다. 너무나 좋았습니다. 당시에는 거의 모두 연필을 사용할 때였고, 여유 있는 집의 아이들만 샤프펜슬을 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 역시 샤프펜슬을 쓰게 되었으니 얼마나 기분이 좋았겠습니까? 그러나 그 기분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루 만에 샤프펜슬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분명히 필통 안에 넣었는데 어디에 있는지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문득 아침에 내 샤프펜슬이 너무 좋다면서 빌려서 써 본 친구가 생각났습니다.
의심이 가득 생겼습니다. 그래서 하루 종일 그 친구만 보게 되었고, 이 친구의 모든 말과 행동이 다 의심스러운 것입니다. 훔쳐서 저런 말을 하는 것 같았고, 의심받지 않기 위해 저런 행동을 한다고 생각되었습니다. 의심은 점점 커졌고, 그 친구에 대한 미움도 커졌습니다. 하지만 결정적인 증거가 없으니 뭐라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틀 후, 문제의 샤프펜슬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책상 서랍 깊숙이에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찾고 나서도 친구의 말과 행동이 의심스러웠을까요? 아닙니다. 지극히 평범한 말과 행동일 뿐이었습니다.
의심, 부정적인 생각은 문제의 본질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게 합니다. 주님에 대해 의심하는 사람이 과연 제대로 알 수 있었을까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강조하셨던 것입니다. 제대로 알고, 참 진리의 길로 갈 수 있도록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제자들에게 물었습니다. 이 물음에 정답을 말한 사람은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말한 베드로였습니다. 이 정답에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까지 이야기하시지요. 그러자 베드로가 반박합니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께서 그런 수난과 죽음을 겪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지요. 이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인상적입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하느님의 일을 부정하고 사람의 일로만 생각하면 사탄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일을 부정하게 되면 믿음을 갖지 못하게 됩니다. 의심하고 부정하는 믿음 없는 곳에서 과연 하느님의 사랑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사람의 일로만 생각하면서 하느님의 사랑을 믿지 못합니다.
사탄의 길이 아닌 주님의 길을 따라야 합니다. 진정한 평화와 행복은 바로 주님의 길에서만 얻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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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거기까지는 좋았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고백한, 거기까지는 좋았습니다.
그리고 그 후 주님께서는 그리스도가 겪어야 하는 고통과 고난, 죽음을 설명하십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나서서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부터는 상상력을 발휘해 보겠습니다.
스승님, 그런 일은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많은 사람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 치유하시는 능력을 지니신 분입니다. 우리는 그 능력을 보고 믿어 왔습니다. 그래서 우리 삶을 다 버리고 우리는 당신을 따라나섰습니다. 우리들의 모든 것을 고향에 두고 말입니다. 가족들도 일도, 돈도 놓고 왔습니다. 그러니 우리를 위해서라도 그런 일을 겪으시면 안 됩니다. 당신은 그저 높은 곳에 오르셔야 하고 그 옆에 저희를 있게 하셔야 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베드로에게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라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베드로는 구원자로서의 주님이 아닌 세상 왕으로서 주님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주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그대의 주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슬픔의 단상
어떤 종류의 슬픔은 물기 없이 단단해서,
어떤 칼로도 연마되지 않는 원석과 같다.
-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한강-
이런 슬픔 하나씩은 간직하고 있으리라.
이런 슬픔 하나씩은 품고 있으리라.
그 슬픔이 그대 빛나게 하리라.
그 슬픔이 그대 힘차게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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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전교수도회 김종오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르코.8,33)
부모는 자녀의 미래를 위해 보내야 합니다. 사랑으로 기른 자녀는 내 품에 두기 위해서가 아니라 보내기 위해서 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보내야 비로소 자녀는 성장 후 독립적인 한 사람이 됩니다. 부모가 양육 후 자녀를 보내는 것은 하느님의 일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보내지 않으면 양육은 부모 자신을 위한 일이 됩니다. 자녀를 위한 사랑이 아니라 자칫 부모의 욕구를 채우게 됩니다. 하느님의 일보다 사람의 일을 하게 됩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으면 부모와 자녀 모두에게 해롭습니다.
국가나 공동체의 크고 작은 일에 대한 책임자나 봉사자들이 진정으로 국민을 섬기고 공동체 구성원들을 돌보는 일은 하느님의 일입니다. 그러나 책임자가 인정과 권력의 욕구에 물들어 있으면 사람의 일을 하게 됩니다. 봉사자가 사람의 일만 생각하면 다른 사람을 도우기보다 해칩니다. 특히 봉사자가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깊게 흐르는 자신의 욕구를 알아차리지 못하면, 자신도 모르게 하느님의 일보다 사람의 일만 생각하게 됩니다.
자신의 욕구와 한계와 불완전함을 모르는 만큼 우리는 다른 사람과 세상의 불완전함을 잔인하게 대합니다. 더 나아가 때로는 사람인 자신의 욕구를 채우는 일을 하면서도 마치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처럼 착각합니다. 정의의 탈을 쓰고 사람을 해치는 마녀 사냥도 합니다. 자신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는 참된 봉사자는 자신보다 사람과 세상을 먼저 생각합니다. 참된 봉사자는 자신을 희생시켜 사람과 세상을 살리지만, 사람의 일을 하는 거짓 봉사자는 자신이 살려고 다른 사람과 세상을 희생시킵니다.
오늘 베드로는 잠시 자신이 살려고 그리스도의 희생을 거부했지만, 주님은 사람과 세상을 살리려고 당신을 희생하십니다. 사람의 일보다 하느님의 일을 하는 참된 봉사자가 하루 빨리 우리나라에서 나오기를 갈망하는 요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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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 찬미예수님
신학교 저학년 시절, 길가에서 파는 행운목을 사서 연학실 책상에 두고 키웠던 적이 있습니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하고 신학교에 들어간 저는 식물을 직접 사서 키우는 것이 처음이었습니다.
비록 사소한 식물이지만 어린 마음에 생명을 잘 키워내야 한다는 책임감이 들었고 나아가 무언가를 해줘야 겠다는 욕심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제가 해줄 수 있는 것은 그다지 많지 않았습니다. 햇빛을 쐬게 해주는 것은 어찌보면 자연이 하는 일이었고 제가 줄 수 있는 것은 물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하루에도 몇 번씩 물을 주며 잘 자라고 있는지 설레는 마음으로 행운목을 바라보았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나 처음에는 잘 자라던 행운목이 시간이 지날수록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애지중지 하면서 성실히 물을 주고 햇빛을 쐬어주었는데 결국에 남은 것은 초라하게 변색된 모습이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행운목은 겉흙이 말랐을 때에만 물을 흠뻑주어야 하는데 하루에 몇 번씩 물을 주니 뿌리가 썩고 잎 색이 변한 것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행운목을 잘 키우고 싶었던 저의 욕심이 일을 그르쳤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러한 경험은 식물을 한번쯤 키워보신 분들이라면 누구나 했을 법한 경험입니다. 잘 알아보지 못하고 어리숙하게 무조건 좋은 것이라 생각하고 물을 너무 많이 주면 그 식물은 썩어버리거나 색이 바래 죽어버리고 맙니다. 이것은 과일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귤이 맛있으려면 몇 가지 요소가 필요한데, 첫 번째는 햇빛을 많이 받아야 한다는 것이며 두 번째는 물을 너무 많이 주면 당도가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인간의 삶 역시 이와 비슷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만약 사람이 귤나무라면 햇빛은 “사랑”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란 사람일수록 당도가 있습니다. 한편 물은 인간의 “고통”이 아닐까 싶습니다. 고통은 인간의 삶에 있어서 고단하고 힘든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주 필요 없는 것은 아닙니다.
이 고통이 있기에 우리는 새로운 희망을 꿈꾸게 되고 용기를 내게 되며 이를 극복할 수 있는 활력을 얻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 고통이 너무 없다면 그 사람은 거만한 사람, 혹은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이 됩니다. 즉, 당도가 없는 사람이 되기 쉽상인 것입니다. 베드로는 물을 거부하고 햇빛만을 원했던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은 예수님이 세례자 요한 혹은 엘리야라 증언하지만 베드로는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라고 대답합니다.
예수님의 본 모습을 알고 있다는 사실은 그가 예수님으로부터 많은 가르침, 즉 많은 애정과 사랑을 받았으며 그로인해 깊은 깨달음을 얻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을 예언을 하시자 그는 이를 완강하게 거부합니다. 이로 인하여 이루어질 세상의 구원 사업은 베드로에게 있어서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저 언제까지나 함께 계실 예수님, 빛나는 예수님의 모습만 보고 싶은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한다”며 그를 꾸짖으십니다. 구원 사업을 위해 당신의 고통이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지금 당장은 깨닫지 못하지만 그 역시 이 고통을 겪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수난을 보고 도망치기도 할 것이고 여전히 거부하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고통이 있는 만큼 부활의 기쁨은 클 것이며 그로인한 구원의 열매를 바라보며 자신 또한 그 고통에 기꺼이 몸을 맡겨 누구보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행복하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의 삶에 있어서 고통스러운 일들은 일어나지 않으면 좋겠고 힘든 일들은 빨리 지나가기를 바라는 것이 인간의 마음입니다.
하지만 삶에 크고 작은 어려운 일이 있다면 그것은 나에게 영양분을 주는 에너지원이라고 생각하시길 바랍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고통을 말려주고 달래주는 햇살, 즉 주님의 사랑이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햇살이 물을 말려주듯 우리의 삶의 고통을 달래줄 것이며 어떻게든 좋은 에너지로 쓰이도록 도와줄 것입니다.
이처럼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이를 기억하기 위해, 예수님이 우리의 그리스도, 즉 우리의 구세주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 지점에서 과연 우리는 예수님을 어떤 분이라 부르고 있는지 생각해 봅시다. 세상 사람들은 물질적인 위안을 그리스도라 부르고 육체적 즐거움을 그리스도라 부릅니다.
다른 사람을 시기 질투하는 마음을 그리스도라 부르기도 하고 미워하는 마음을 그리스도라 부르기도 합니다.
과연 나 자신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는 누구입니까? 고통을 겪으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그래도 물은 필요 없으니 그저 햇살만 달라고 청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이러한 이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날카롭게 이야기 하십니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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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신 다음,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다시 물으시자, 베드로가 나서서 대답합니다.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마르 8,29)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은 알았지만, 어떤 그리스도인지는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받아들여야 할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 직접 알려주십니다.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으시고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명백히 하셨다.”(마르 8,31-32)
여기에서, 예수님께서는 ‘반드시”(Dei) 말과 ‘명백히’(행전;담대히,parresia)라는 말을 사용하십니다. 곧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데에 있어서 “반드시” 걸어야 하는 길을 ‘명백히’(parresia) 가르쳐주십니다. 그것은 피해서도 안 되고, 거부할 수도 없는, ‘반드시’ 걸어야 하고 ‘반드시’ 실행해야 하는 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세 가지로 제시하십니다.
<첫째>는 ‘많은 고난을 겪는 일’ 입니다. 곧 한두 번이 아니라 ‘많은 고난’을 겪는 일이요, 그것을 자신을 지키기 위해가 아니라, 타인을 살리기 위해서 겪는 일입니다.
<둘째>는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는 일’ 입니다. 곧 배척당하는 것을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죽임을 당하는 일’까지도 받아들여, 그것이 진정 사랑임을 증거 하는 일입니다. 그것은 비록 타인으로 부터 당하는 수동태로 이루어지는 길이지만, 자유로이 흔연히 가는 길입니다.
<셋째>는 ‘다시 살아나야 하는 일’ 입니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삶이 되는, 곧 예수님의 생명으로 다시 살아나야 하는 의탁과 믿음의 길입니다.
바로 이 세 가지 일이 그리스도께서 ‘반드시’ 실행해야 할 일이요, 또한 그분을 따르는 우리가 ‘반드시’(담대히) 걸어야 할 길입니다. 그런데 막상 예수님께서 이 길을 실행하고자 하자, 베드로는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베드로는 왜 예수님이 그 길을 가는 것을 가로막았을까요? 그를 꾸짖는 예수님의 말씀 속에 그 이유가 드러납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르 8,33)
그렇습니다. 그는 입으로는 그리스도를 고백하지만, 실제로는 ‘하느님의 일’보다 ‘자신의 일’을 앞세워 그리스도께서 행하시고자 가시고자 하는 길을 막아섰던 것입니다. 곧 자신의 신변 안전을 도모하였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베드로처럼, 자신의 신변 안전과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며 주님께서 하시는 일을 가로막지는 말아야 할 일니다. 비록 눈앞에 벌어지는 일이 당혹스럽고 황당하더라도,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그 속에서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할 일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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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셨다가~”(마르 8,31)
주님!
피할 수도, 거부할 수도 없는 반드시 걸어야 하는 길,
당신께서 반드시 걸어야 했던 길이기에,
당신을 따르는 이도 반드시 걸어야 하는 길을 기꺼이 걷게 하소서.
비록 한두 번이 아니라 여러 가지 많은 고난을 겪고,
죽을 때까지 겪는 길일지라도 담대히 걷게 하소서.
어쩔 수없이 마지못해서가 아니라, 흔연히 끌어안고 가게 하소서.
배척받으면서도 배척하지 않는,
죽어 사라지기까지 사랑하는 그 길을 당신과 함께 걷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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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르8,29ㄱ)
<고난과 배척을 받으신 그리스도!>
오늘 복음(마르8,27-33)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말씀'과 '수난과 부활을 처음으로 예고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길을 가시다가 길에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르8,27ㄴ) 하고 물으십니다. 제자들이 대답합니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마르8,28)
예수님께서 다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베드로가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에 관하여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예고하십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신원을, 곧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정확하게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메시아로 바라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고난을 겪고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시는 그리스도로 받아들이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큰 꾸지람을 듣습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르8,33)
나는 예수님을 그리스도(구세주)라고 고백하고 있는가? 나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함께 믿고 있는가? 혹시 죽음(희생) 없는 부활(영광)만을 바라는 신앙은 아닌지?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은 모든 이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당신의 전부를 내어놓으셨습니다. 그렇게 모두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십자가 죽음'은 하느님 아버지께서 아들 예수를 이 세상에 보내신 '단 하나의 이유'입니다.
예수님의 이 십자가 죽음으로 인해 믿는 이들에게 구원의 길, 영원한 생명의 길이 열렸습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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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마르 8, 31)
예수님께서는
구원의 여정을
직접 걸어가십니다.
구원의 여정은
끝까지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는
충실함의
여정입니다.
고난과
배척을 통해
주님의 길은 더욱
선명해집니다.
주님의 길은
이렇듯 생명을
내어주는 구원의
길입니다.
구원의 길은
고난과
배척이라는
십자가의 길입니다.
십자가의 길은
십자가를 통해
바라보는
생명과 희망의
새로운 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수난과
배척속에서도
새로운 생명의
길을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죽음과 배척또한
은총의 길이
되게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십자가로
우리의 거짓과
교만을 밝히십니다.
진정한 사랑의
힘은 억압이 아닌
생명을 섬기고
내어주는 구원의
힘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과의
진실한 관계는
십자가의 길입니다.
저마다의 십자가에
응답하는 은총의
여정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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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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