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수구리의 우리 고대사 : 사마천 사기등 중국 고대문헌의 지리적인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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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서의 살수가 구당서의 압록수로 지금의 하북성 난하((灤河)다
1) 수서 우문술열전의 살수가, 구당서 이적열전의 압록수다
-. 수나라가 고구려 침공시 수서 우문술열전에 압록수에서 살수까지 거리가 450리, 살수 동쪽에
평양성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살수에서 평양성의 거리는 200백리로 추정)
-. 당태종이 고구려 침공시 구당서 이적열전에 압록수에서 동쪽으로 200리 거리에 평양성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수나라 시대와 당나라 시대에 평양성은 같은 곳에 있었기에
수서 우문술열전의 살수가, 구당서 이적열전의 압록수다
☞ 수서와 북사 『우문술 열전』
우문술은 9군을 거느리고 압록수에 도착했다 ..., 그리하여 (우문술은) 여러장수들과 (압록)수를 건너
그(을지문득)을 추격했다. 당시 문덕은 우문술의 군대에 굶주린 기색이 있는 것을 보고, 우문술의 군대를
무너뜨리려고 싸울 때마다 편하게 북쪽으로 갔다. ..., (우문술은) 동쪽으로 살수를 건너서, 평양성에서
삼십리 떨어진 곳에 산을 의지하여 군영을 설치했다. ..., (우문술은) 고구려의 거짓 항복을 핑게로 회군했다.
우문술의 군대의 절반이 살수를 건너자 고구려는 당나라 군대의 후미를 공격했다. ..., (우문술은) 1.5일을
도망쳐서 압록수에 도착했는데 도망친 거리가 450리다. (그리고 압록수를 건너 요동성에 도착했는데,
요수를 건넌 수나라 군사 3십만 5천명 중에서 살아서 요동성에 도착한 군사는 2천7백명으로 기마병이다)
[원문] 述與九軍至鴨綠水,..., 遂與諸將渡水追之. 時文德見述軍中多飢色, 欲疲述衆, 每鬥便北.
..., 東濟薩水, 去平壤城三十里, 因山爲營. ..., 遂因其詐而還.衆半濟, 賊擊後軍. ...,
一日一夜, 還至鴨綠水, 行四百五十里.
☞ 구당서 『이적 열전』
(이적이) 군사 2만명을 거느리고, 고구려 영토를 점령하며서 압록수에 도착했다. 고구려는 남건을 파병하여
저항했는데, 이적이 병사를 동원하여 남건군대를 격파하고 2백리를 추격하여 평양성이 도착했다
[원문] 率兵二萬略地至鴨綠水. 賊遣其弟來拒戰, 勣縱兵擊敗之, 追奔二百里, 至於平壤城.
2) 수서의 살수가 구당서의 압록수로 지금의 하북성 난하((灤河)다
-. 당나라 고종 아들 이현(장회태자)의 후한서 동이열전 동옥저 주석에 따르면
멸망 당시의 고구려 평양성(장안성)은 진황도시에 있었다
-. 수서와 북사 내호아 열전에
내호아가 창해(발해만)를 바라보면(가르키며) 패수 입구에 이르렀고,
패수 입구에서 평양까지 거리가 육십리라고 기록되어 있다
수서 내호아열전에 수나라 시대의 패수는 발해만에 있었고, 패수 육십리 거리에 평양성(장안성)이 있으니
고구려 평양성(장안성)은 만주 요양이 될 수 없고, 북한 평양도 될 수 없다
수나라 시대의 패수는 발해만에 있었고,고구려 평양성(장안성)이 진황도시에 있었다는 장회태자의
주석이 수서와 북사의 내호아열전으로 증명되니
고구려 평양성(장안성)이 진황도시 무녕현이고,수나라 시대의 패수는 양하洋河이고,려성이 평양성이다
따라서
고구려 평양성(장안성)인 진황도시에서 서쪽으로 200리 거리에 있는
지금의 하북성 난하가 수서 우문술열전의 살수이며, 구당서 이적열전의 압록수다.
수나라 살수 서쪽(서남쪽) 450리 거리에 수나라 압록수가 있었으니
하북성 난하 서쪽(서남쪽) 450리 거리에 있는 영정하가 수서 우문술열전의 압록수다
☞ 북사와 수서 『내호아열전』
내호아가 누선을 이끌고 창해(발해만)을 가르키며(바라보며), 패수를 따라 평양까지 육십리를 갔다.
중국 고대사서에 발해만을 당나라 시대까지 창해로 기록되어 있다
[원문] 護兒率樓船, 指滄海, 入自浿水, 去平壤六十里.
■ 고구려 평양성.압록수 지명 이동 고찰
1) 당나라 고종 아들 이현(장회태자)의 주장에 따르면 멸망 당시의 고구려 평양성은 진황도시에 있었다
2) 삼국사기의 살수 대첩시의 수나라 우문술 군대의 평양성 공격 진로를 보면
압록수(서쪽) --> 살수 --> 평양성이고 살수에서 압록수까지가 450리로 나온다
평양성이 하북성 진황도시이기에 압록강과 살수는 하북성의 큰 강으로 보이며
고대 하북성의 큰강은 북쪽부터 난하, 조백하, 영정하, 대청하, 호타하, 부양하인데
진황도시에서 가까운 큰강은 난하이기에 난하가 살수로 보이고
살수에서 450리 ~ 500리 거리에 있는 강은 영정하이기에 영정하를 압록수로 비정한다
3) 원사지리지에 고구려가 멸망하자 평양성의 이름이 압록수(난하) 동(남)쪽 천여리로 이동되어서
고려서경의 평양성이 되었다고 한다
고려 서경(평양성)은 고구려 평양성인 진황도시(압록수) 동쪽 천여리 거리에 있는
만주 요하 동쪽의 요양시 지역에 있던 황성(한성)을 평양성으로 부르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진황도시에서 요양까지 거리는 약 400 km로 1천리정도 된다)
4) 고구려 압록수는 지명 이동이 3번 있었다고 본다
을지문덕 장군 시절에 고수전쟁 기록인 북사(北史)에 압록수가 처음 등장하는데..
고대 중국왕조에서 고구려 평양성으로 가기위해서는 반드시 건너야하는 큰 강으로 나타난다
평양성 이름이 진황도시 --> 만주 요양 --> 북한 평양으로 이동됨에 따라
압록수 명칭도 동쪽으로 이동되었다고 본다
(1) 고구려 말기의 평양인 장안성(진황도시) 평양 시기에는 영정하가 압록수였고
구당서 작성 시기(AD 1000년경)에는 난하가 압록수였다
(2) 고려초기의 서경인 요동반도(요양시) 평양시기에는 요하가 압록수 였고
(3) 조선 초 평양인 북한 평양(안승의 금마저金馬渚) 시기에는 지금의 압록강이다
※주) 고구려 부흥운동을 한 안승의 금마저金馬渚의 저渚는 모래섬이나 삼각주를 의미하는데...
대동강과 보통강 사이의 삼각주로 지금의 북한 평양으로 추정된다
☞ 『 원사(元史) 지리지(地理志) 「고구려(高句麗)」 』
당나라가 고(구)려를 정벌하여 평양을 함락시키자 그 나라 (평양)은 동쪽으로 옮겨갔다
(고구려) 압록수(난하)의 동남쪽 천여리에 (새로운 평양이) 있게 되었으나 옛(고구려) 평양은 아니다
(고려) 왕건이 평양을 서경으로 불렸다
[원문] 唐征高麗, 拔平壤, 其國東徙. 在鴨綠水之東南千餘里, 非平壤之舊. 至王建, 以平壤為西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