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에선 값이 4배… 조선 왕조 지탱한 ‘귀한 뿌리’
주변국에 경외 대상이던 인삼… 조선 왕조 효자 수출품으로 활약
“만지기만 해도 병 나을 수 있다”… 인삼 사려 특수 은화 만들기도
◇작지만 큰 한국사, 인삼/이철성 지음/420쪽·2만2000원·푸른역사
오원 장승업이 그린 기명절지도(器皿折枝圖). 꽃 과일 채소 등과 함께 왼쪽에 인삼이 보인다(왼쪽 사진). 전통 민화의 하나인 산신도. 산신을 호랑이가 호위하고, 산신은 인삼을 들었다. 푸른역사 제공
“영국 약전(藥典)에 있는 어떤 약도 극동에서의 인삼의 평판을 따라잡을 수 없다. 인삼은 이 나라의 가장 가치 있는 수출품이며 세입의 중요 원천이다.”
영국 지리학자 이저벨라 버드 비숍은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1898년)에서 인삼의 가치를 이렇게 소개했다. 오랜 세월 주변국이 우리를 인식한 가장 중요한 이미지는 인삼이었다. 사학자로서 주로 경제사에 천착해 온 저자는 37건의 인삼 이야기를 통해 이 귀한 뿌리가 국가의 통치 및 동아시아의 경제와 외교에 끼쳐온 역할을 밝힌다. 풍성한 정보를 담았으면서도 술술 읽힌다.
한반도 인삼에 대한 경외는 6세기 중국 양나라의 책에 ‘인삼은 백제의 것을 최고로 친다’고 쓰였을 만큼 역사가 깊다. 12세기 송나라 의관이 쓴 책에도 ‘인삼으로 사용되는 것은 모두 고려에서 나는 것’이라고 했다.
임진왜란 후 중국과 일본에서는 왕조와 권력이 교체됐지만 폐허가 되다시피 한 조선은 왕조를 유지할 수 있었다.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조선은 광해군 즉위 이듬해인 1609년 일본과 국교를 재개했고, 중국과 일본을 연결하는 중개무역으로 나라를 추스를 재원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인삼은 여러 나라가 원하는 최고의 상품이자 핵심 결제수단이었다.
당시 문헌은 ‘서울에서 70냥이면 사는 인삼이 일본의 에도로 들어가면 300냥에 팔린다’고 했다. 일본에서는 ‘인삼을 만지거나 인삼 씻은 물을 마시기만 해도 병이 낫는다’는 소문이 돌았다. 일본은 조선 인삼을 사기 위해 인삼대왕고은(人蔘代往古銀)이라는 순도 높은 은화를 특별히 제작했다. 이에 따라 조선에는 한 해 은 11만 t이 들어오기도 했다. 이렇게 확보한 은으로 중국의 옷감을 비롯한 온갖 상품을 사들였다.
조선 왕조의 주요 재원도 청과의 인삼 거래에 매기는 포삼세(包蔘稅)였다. 매년 20만 냥 정도로 곡물과 맞먹는 엄청난 규모의 세원이었다. 정조가 화성을 건설할 수 있었던 동력도, 흥선대원군이 군비를 증강한 배경도 포삼세였다. 주변국의 인삼 열기는 산삼의 고갈을 불러왔지만 18세기 초 인삼 재배가 성공을 거둔 뒤 찌고 말려 바스러지지 않는 홍삼이 개발되면서 산삼을 대체할 수 있었다.
이 같은 무역 및 외교사 이외에도 여러 흥미로운 일화가 책장을 수놓는다. 영조는 인삼을 주성분으로 한 보약에 건공탕(建功湯), 즉 건강을 지켜주는 공신이라는 이름을 붙였고 15년 뒤에는 이 약을 찬미하는 시를 지어 올리게 했다. 1년에 20여 근의 인삼을 복용한 그는 만년에 “이 늙은이는 인삼옹이로다”라고 탄식했다. 19세기 초 베트남의 개혁 군주였던 민망 황제는 충성을 고취하기 위한 선물로 인삼을 활용했다.
사족. 기자는 2004년 ‘책의 향기’ 지면에 신초(新潮) 학예상을 수상한 책 ‘해삼(海蔘)의 눈’을 소개하면서 아시아의 무역상품 하나에 확대경을 대 읽히는 책을 만들어낸 일본의 출판문화에 부러움을 표했다. 해삼 아닌 본래의 삼(蔘)을 다룬 이 책으로 아쉬움을 풀었다.
유윤종 문화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