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살 봄으로 넘어 서던 문턱.
평소때와 다름없이 점심을 먹지 못한 배를 물로 채우고
아무도 가지 않던 별관 옥상위에 올라가 달력이면지 뒤에 깨알같이 쓴 영어단어를 읊조리던 때.
묵직한 3층도시락을 품에 안고 소리도없이 조용히 다가와 하얀 배꽃같은 웃음을 짓던 나의 천사.
그 때의 그 쿵쾅쿵쾅 미친듯이 떨렸던 심장과 별 생각 없이 외운 영어단어와 따뜻했던 바람. 그리고, 6년의 시간.
지잉- 지잉-
앞치마 주머니에서 진동이 느껴지자 쟁반에 있던 커피를 마저 서빙하고 후닥닥 휴게실로 들어와 휴대폰을 받았다.
[나예]
-뻔하다 뻔해. 또 알바중이지?
"............"
-아무말 못하는 거 보니까 맞구나? 결아. 내가 몇번을 말해~ 그런 거 하지 말라니까!
".......내가 너랑 같냐."
-같지 그럼! 뭐가 다르냐? 아무튼 이 꽉 깨물고 집에 들어와라. 되도록 빨리. 최대한.
"왜?"
-있어 그런게~ 빛보다 빠른 속도 와야된다.
"응"
이로써 나예 몰래 하나 늘렸던 알바를 또 다시 2개로 줄여야 될 것 같다.
작은 한숨과 함께 휴대폰 폴더를 탁 닫고 휴계실을 나왔다.
좋은 오후다. 카페 안은 좋은 오후에 걸맞는 좋은 커피 향기와 좋은 사람 냄새가 넘쳐난다. 웃음이 절로 난다.
"결씨!"
"네?"
"어떤 여자분께서 결씨 찾으러 왔는데? 6번테이블로가봐."
"네 감사합니다."
누굴까. 날 찾아올 사람은 없을텐데.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앞치마를 푸르며 가는데
그렇게 익숙하지도 않고 설마 하는 느낌도 있지만 머릿속에선 이미 경보음이 삐오삐오 울리기 시작했다.
발걸음이 천근만근 추를 단 것 같이 무거워진다. 몸이 급속도로 굳는다.
"안녕.......하세요."
"앉아."
나예의 어머니다. 쭈뼛쭈뼛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커피를 한모금 호로록 마시더니 고운 미간을 찌뿌리며 '커피맛하고는...' 하며 악어백에서 A4크기의 서류를 꺼내시는 나예 어머니.
고운 입가를 끌어올리며 왼손으로 잡은 서류를 오른쪽손바닥에 톡톡 친다.
왼손 약지에서 햇빛을 받은 다이아 반지가 번쩍 빛을 낸다. 눈이 부시다.
"신상 조사좀 했는데...괜찮지?"
"...........네?"
"이름 한 결. 1983년 9월 19일생. 말벙어리 엄마는 11살터울인 동생을 낳고 자살. 그 후 한달뒤 영양실조로 동생도 죽었고.
아빠는 아침엔 신문배달에 오후엔 공사판 노동자로 나름 열심히 살고 있었다.
하지만 엄마가 생활고로 자살하고 난뒤부턴 알코올중독에 틈만나면 아이를 폭행. 그러다 엄마를 찾으러 나간다며 나갔다가 실종.
주위 친족하나 없는 아이를 옆집 할머니께서 보살펴 주심.
하지만 몇년 뒤 돌아가신 이후로 정부에서 나오는 보조생활금과 아르바이트로 생활을 이어감.
가람초-동중-합정고 졸업. 성적은 항상 상위권. 오- 중학교때에는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았네? 여자 관계는 깨끗. 술 담배 하지 않음.
나예와는 고2때 만났고 그후 둘다 명문대 합격. 사진전공. 포토그래퍼가 꿈. 뭐 그외 등등등..............적당히 하라고 했는데 많이도 조사했네"
"어,어떻게 그런 걸...."
"이런 건 별거 아니지. 결군. 그나저나 우리 참 오랫만에 만나지? 저번에 만났던 게 고등학교 졸업식이였는데."
백에 서류를 다시넣는 어머니에게서 고개를 돌려 창밖을 내다봤다.
참 많은 사람들이 분주하게 오간다. 입속이 바싹 타오르고 살짝 쥔 손에서 땀이 난다.
"길게 말 끌진 않겠어."
꽤 길었던 정적이 깨졌다. 또 다시 무언가를 가방에서 꺼낸다.
테이블 위에 놓여진 건 흰 봉투와 여권과 비행기표.
"프랑스에 있는 유명한 학교야. 이미 입학허가 받아놨으니까 거기가서 사진 기술 더 배워.
솔직히 이 좁은 한국에서 배울게 뭐가 있나? 재능도 있다며. 좀 더 넓은 곳에 가서 배워.
학비는 물론 생활비 또한 절대 부족하지 않게 전액 대줄꺼야. 집도 이미 마련해뒀어.
거기가서 열정을 다해서 배우든지 아니면 방탕하게 살다 오든지 그건 결 군 선택이야."
"어머님."
"대학은 자퇴해. 자퇴소속은 내일 우리쪽에서 알아서 하도록 하지. 우선 떠나. 떠나고 보자. 네 짐은 추려서 프랑스로 보낼 껀 보내고
처분할 껀 처분할테니까. 여기까지야. 내가 해 줄수 있는건. 어때?"
"..어머님."
"제일 중요한 걸 말 안했네. 내가 방금 말한 것들은 나예와 헤어진다는 조건 하에 붙는 프리미엄들이야. 꽤 괜찮지?"
"전 나예와 헤어질 수 없어요."
"어째서?"
"사랑..하거든요."
"사랑? 사랑한다고 헤어질 수 없어? 나예도 그런말을 지껄이던데 아주 순애보구나 너희 둘.
잔말말고 헤어져. 너랑 나예랑 계속 사겨봤자 나예에게 이득되는 건 하나도 없어."
"아니요. 이득되는 건 있어요. 적어도 행복하거든요. 행복했었고 행복할거구요."
"....너희 설마 결혼까지 생각하고 있었던 건 아니지?"
"......................."
"미친놈."
짝. 고개가 힘껏 오른쪽으로 돌아갔다. 너무 아프다. 볼이 뜨겁게 부어오르는 게 느껴진다.
고개를 다시 돌리자 유리잔을 부들부들 쥔채로 절대로 참을 수 없다는 듯 입술을 깨무는 나예 어머니가 보인다.
"아주 정신이 나갔구나? 나예가 누구라고 넘보길 넘봐? 니네 달동네 옆집 처녀라도 되는 줄 아니?
허이구. 사람을 놀려도 유분수지 이사람아. 나예가 어떤 아이인진 자네가 더 잘 알것 아냐?
갭이 틀려! 갭이! 가난뱅이와는 차원이 다르다구! 알아? 현실을 봐야지!! 그딴 망상들이 언제 까지나 갈 것 같아?"
현실.
나의 현실이 어떻길래?
아... 나의 현실은 맞다. 이렇지. 갑자기 눈 앞이 까마득해 진다.
"결 군이 정말로 나예를 위한다면 유학가는 게 좋을꺼야.
나예는 결혼 할 사람도 이미 정해져 있다구. 자네도 나예 행복하길 바랄 거 아냐? 아니야?"
".............나예가 행복해 졌으면 좋겠어요."
"그렇지. 그러니까 내가 손본데에서 끝내자 이말이야. 나예아버지가 아시면 자넨 뼈도 못추려."
아. 근데 왜 갑자기 눈물이 나오려고만 하지.
왜이렇게 코가 시큰시큰한거야. 울면 안되는데 왜 꼭 울것만 같은거야.
지난 6년간의 추억들이 파노라마같이 머릿속을 흘러간다.
뚝뚝.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뒤 더이상 흐르지 못할 거라 생각했던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화려한 꽃자수가 놓인 손수건이 내 눈물을 훔쳐간다.
"울지말아. 결 군. 내가 자네 맘 이해 못하는 것도 아냐. 하지만 나예를 편안하고 행복하게 해주고 싶어하는 부모의 마음도 이해해줘.
솔직히 자네랑 살아봤자 가난뱅이 아내밖에 더돼? 하나밖에 없는 딸이야. 회사를 이을 아이라구."
"........어,언"
말도 잘 나오질 않는다.
울음이 계속 터져 나온다. 남들이 보면 얼마나 웃길까. 나예가 보면 얼마나 슬퍼할까.
가슴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언제"
나예야.
강나예.
"언제 떠나면"
강나예.
나예야.
사랑해.
"언제 떠나면 됩니.....까."
참 잔인하다. 나예의 엄만. 그제서야 눈꼬리를 휘며 웃으신다. 웃는게 엄말 닮았구나.
"내일 1시 20분표야."
"내일....이요?"
"내일 나예에게 중요한 맞선이 있거든. 근데 이놈이 맞선 날 남자친굴 데려오겠다고 선포를 놓지뭐야. 급하게 준비했지만 착오는 없을꺼야. 그럼."
백을 챙기며 일어선다.
따라서 일어섰다.
"어머님. 한가지만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물어봐."
"가난뱅이에게서 소중한 딸을 빼앗는 것. 그것도 모성애라고 할수 있나요?"
옷 매무새를 몇번 다듬는다.
"당연하지. 아! 나도 질문 하나가 있는데 해도 돼?"
"네."
"둘이 서로 사랑한다고 했지? 근데 틀렸어. 결 군이 나예에게 준건 사랑일진 몰라도
나예가 결 군에게 준건 사랑을 가장한 동정이자 연민이야. 일종의 자선이라고나 할까?
나예는 어렸을때부터 불쌍한 사람들을 그냥 지나치는 아이가 아니였거든."
"...................그럼 안녕히........가십시오."
고개를 숙이는 데 또 눈물이 바닥으로 떨어진다.
"그래. 얼굴 마주치는 건 여기가 끝이였으면 좋겠어. 그럼 잘 살아."
#
찰칵-,따뜻한 방안 공기가 언 몸을 녹여준다.
"뭐야~ 결! 왜 지금오는 거야~"
".......아 일이 좀 늦었어."
"야. 이쪽 볼이 왜 이렇게 부었어? 왜이래?"
"아..그거 문에 정통으로 부딪혔거든."
"어휴 조심하지. 눈은 또 왜그렇게 빨갛게 부었어?"
"피곤해서 그런가봐."
"......그만뒀지?"
"응."
"잘했져잘했져~ 나 배고파. 우리 라면 끓여먹자!"
"응. 조그만 기다려."
가슴이 한켠이 계속 욱씬거린다. 아프고 시리다. 목구멍에 뭐가 차오른 것 같다.
안돼. 울면안돼. 절대 아무렇지도 않은척하자. 웃자고 한 결.
"다됐다~ 어서 먹어."
TV에서 하는 개그프로그램을 보며 깔깔거리다 잘 익은 라면을 보고 아이처럼 좋아라 하는 나예.
"야 졸라 맛있어~"
"기지배가 졸라가 뭐냐 졸라가. 애도 아니고."
"잔소리 즐! 내맘이네요."
"저 말하는 것좀봐. 넌 그 말하는 싸가지 먼저 고쳐야돼."
"내 말투가 뭐 어때서!"
"그 드센것도 고쳐야 돼고."
"야 내가 이렇게 드세니까 니 옆에 있는거야. 고마워 해야돼~"
"그렇게 말 함부로 하고 드세면 남자들이 싫어해."
"괜찮아. 남자는 너 하나 뿐이니까."
"하여간 말은.................근데 이 쇼핑백은 뭐야?"
"아! 그거? 수트!"
"웬 수트?"
"너 입으라구."
"왜?"
"내일 울엄마 아빠한테 인사드리러 가게."
"강나예."
"어이쿠 무셔워. 이런 반응 나올 줄 알았다."
"난 안가...........아니, 못가"
"왜? 가자. 가서 우리 결혼할겁니다! 이렇게 당당하게 말하자."
"그래서?"
"그래서라니."
"그래서 너희 부모님이 우리를 인정하고 이해해 주실 것 같아? 가난뱅이 사위와 금이야옥이야 키웠던 재벌 3세 딸. 이어질수가 없잖아."
"사랑하잖아. 사랑한다는 걸로 벌써 이어진 거 아냐? 가난 그따위게 뭐 대수야?
너도 그래~ 이런 얘기 꺼내면 무조건 가난 가난 가난. 왜 가난얘기만 꺼내는데? 우리가 결혼하는 게 그렇게 무서워?"
"응. 무섭고 두려워. 넌 몰라 가난이 어떤건지."
"......................결아."
내이름...부르지마.
"결아. 6년이야."
부르지말라구.
"한결. 결아?"
부르지마시라구요. 그러시면 저 가슴이 더 아파온다구요.
".........왜."
"이거 입자. 응? 부탁이야. 입자. 제발 한번만."
"............."
"안돼면 또 도전하고 또 안되면 또 도전하면되지. 강한 결이는 어디가 있는거야."
"............알았어."
"아휴~ 이뻐요 그냥~"
쪽. 볼에 닿은 나예의 입술은 뜨겁다.
나예야. 난 내일 아마 그 옷을 입을 수없을거야.
..................이 곳에 없거든.
"너 오늘 너무 피곤해보인다. 얼른 자. 내일 12시 40분에 데리러 올게."
옷걸이에 걸어놨던 감색 코트를 주섬주섬 입는다.
"나예야."
"응?"
"나 한번만 안아줘."
"어이구? 오늘 진짜 피곤한가 보네? 너 꼭 아플때만 응석부리잖아."
폭 안기는 나예는 너무 작다. 나예 특유의 향이 코를 자극하고 피부를 자극하고 머리를 자극하고 눈을 자극한다. 그래서 눈물이 날 것만 같다.
널 버리고 나는 가.
나는.....................정말 나쁜놈이야. 나예야.
"결. 나 오늘 그냥 자고갈까? 그냥 가면 내 맘이 편치 않을 것 같다."
"됐네요. 너희 엄마 아시면 큰일 나. 얼른 가. 시간 늦었잖아."
"알았어. 나 간다. 낼 봐요 자기~"
"응."
나예의 뒷 모습.
"나예야!"
그리고 한번이라도 네 얼굴을 더 보고 싶은 나의 마음.
"운전할 때 음악 크게 트는 거 고쳐. 그러다 사고나면 어떻게 해."
"네에~"
"술도 줄여. 무슨 여자애가 40대 술고래 아저씨 마냥 마시냐."
"유전이다~뭐"
"무조건 한번 보고 옷사는 것도 고쳐. 이것 저것 따져보고 사란 말이야.
아침으로 빵하고 오렌지 쥬스하고 절대 같이 먹지마. 넌 그것만 먹는 날이면 꼭 배탈이 나더라.
칫솔질도 왼쪽 아래 어금니 부분 신경써서 닦아. 넌 항상 거길 덜 닦으니까 충치가 생기는 거야.
TV 가까이서 보는 것도 하지마. 너 그러다 눈 갑자기 나빠지면 어떡할래?
가방엔 항상 메모장 가지고 다니는 거 알지? 넌 자주 까먹고 덜렁대니까 꼭 가지고 다녀야 돼.
다른 사람들하고 말할 때 입속에서 이 부딪치는 것도 하지마.
싫어 하는 사람이라도 티나게 대놓고 무시하지 말고. 그 사람 기분이 어떻...."
"한결 왜그래?"
"응?"
"어디 떠나는 사람처럼 왜 그러냐구."
"아니, 그게 아니라....."
"아주 오늘은 잔소리 종합선물세트로구먼. 나 간다~ 얼른자라. 너 더 이상해 질까 무섭다."
".............나예야"
"응?"
"......우리 19살때 심었던 바이올렛 기억해?"
"그럼~ 기억하지. 우리 그때 맹세했었잖아. 영원한 사랑하자구."
"그랬지."
"근데 갑자기 왜?"
"아니. 그냥 생각나서."
"얼른 자. 거실 불 끄고 갈게."
"...............나예야."
"응?"
"........................사랑해."
"아주 안하던 말까지? 히히~ 나도 사랑해요. 결"
거실불이 꺼지고 현관에서 구두 신는 소리가 들린다. 끼익- 쾅.
드디어 문이 닫혔다.
또록. 눈에다 수도꼭지라도 틀어놨나 눈물이 계속 흐른다.
입에서 한번도 터져본적 없던 울음소리가 터져나온다. 너무 아프고 답답해서 주먹으로 가슴을 쳐본다. 심장이 무너졌다.
엄마가 자살했을 때 보다, 동생이 죽었을 때보다, 아빠가 나갔을 때 보다,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보다
너무 아프다. 100배 1000배는 더 아프다. 강나예가 이 정도로 큰 가시였나보다.
#
출국장은 사람들의 분주한 모습들로 가득했다. 가만히 의자에 앉아 시계를 들여다 봤다.
1시 되기 5분전.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부재중 전화 11통. 음성메시지 7통.
집에다 놓고 갈까도 생각했지만 무슨 미련인지 휴대폰을 가지고 와 버렸지만 후회했다.
계속 울리던 진동이 가슴을 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필요가 없겠지. 굳게 마음을 먹고 배터리를 분리하려는데 지잉- 또 다시 진동이 울렸다. 나예다.
이걸 받아야 할까. 말아야 할까. 잠깐의 고민 끝에 떨리는 손으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작별인사는 하자.
-지금 당장 공항앞에서 기다리고 있어! 나 지금 가는 길이니깐.
"나예야."
-어쩜 그렇게 감쪽 같이 날 속일수가 있니? 엄마가 어제 너 찾아갔었다며. 거절했었......아니야. 기달려. 만나서 얘기하자.
"나 떠날거야. 나 가야돼 나예야."
-뭐?
"널 기다리지 않겠다는 말이야."
-한 결! 넌 지금 울 엄마 꼬득임에 넘어간거야. 제발 정신 차려!!!!!!
"아니. 오히려 내가 너의 꼬득임에 넘어갔지. 이번 기회에 정실 똑바로 차릴 수 있었어. 너희 어머님께 오히려 감사해야 할 정도야."
-너 답지 않게 왜 이래?
"그만 가. 니 남편 될 사람 기다리겠다."
-내 남편 될 사람은 너야. 기다려. 응? 우리 가서 엄마아빠한테 잘 얘기해보자.
"얘기 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어."
-왜그래 너 나 안사랑해? 응? 한 결!!!! 결아!!!!!!!!!!!!
"그러지마. 사랑이 내 가난 통째로 없애준대? 내 꿈 대신 이루어준대? 우리가 사랑한다고 해서 세상이 변해?"
-왜그래.....응? 나 진짜 너 없으면 미쳐. 결아......... 제발 가지마......... 가지마아.......
운다. 나예가 운다. 나도 운다.
눈물이 비오듯 쏟지만 티를 내선 안된다. 이 순간만큼은 난 독한 한 결이다.
"울음 그쳐. 니가 운다고 해서 이 상황 해결 안돼."
-...........결아....내가 어떻게 하면 너 안가? 술줄이면돼? 충동구매 안하면 돼?
음악 크게 안틀면 돼? 칫솔질도 잘 할게. 말 함부로 안할게. 응? 제발 가지마
"이만 끊자. 그래도 옛 정이 있어서 작별인사라도 하려고 전화 받았는데 너랑 더이상 말 하고 싶지 않다. 난 너 싫어."
-거짓말하지마. 내가 널 안지가 몇 년인데. 그거 거짓말이야. 그치?"
"이거 거짓말 아냐. 사실이야. 나 너 사랑안했어. 너 돈 많잖아. 그래서 니 옆에 계속 있었던 거야. 넌 가난한 나에겐 굴러들어온 떡이었으니까."
-...............결아?
"고맙다 강나예. 너 덕분에 내가 6년 동안 잘 먹고 꿈도 못 꿨던 외국까지 간다."
-결아. 그러지마. 거짓말 하지 말라구.
"이젠 니 목소리 듣기도 싫어. 짜증나거든."
-....결아. 결아.
"우리 인연 여기서 마침표 찍자. 안녕 강나예."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을 닫았다. 온몸에 식은 땀이 흐르고 힘이 빠진다.
손끝에 힘없이 아슬아슬하게 들려있던 휴대폰이 또 다시 시작되는 진동에 의해 바닥으로 떨어졌다.
계속 눈물이 나온다.
"1시 20분 프랑스발 아시아나 비행기 탑승자 여러분께서는 9번 게이트로 가주시기 바랍니다. 다시한번 말씀..."
발밑에서 계속 진동하는 휴대폰을 애써 무시하고 발걸음을 뗐다. 휴대폰 정지는 알아서 해주겠지.
휘청.
"괜찮으세요?"
"........아, 고맙습니다. 괜찮아요."
다리에 힘이 풀렸나 보다. 온몸에 잔뜩 힘을 주고 또박또박 걸었다.
눈물은 창피하지도 않는지 훔치고 훔쳐도 계속 흐른다.
잘있어라. 강나예 그리고, 강나예를 사랑했던 한결. 굿바이. 정말 지독했다.
# 8년 뒤.
강남의 한 갤러리에 선이 잘빠진 검은 외제차 한대가 매끄럽게 들어온다.
차의 운전석에서 초콜릿색의 자연스러운 웨이브 머리에 샤넬 트위드 재킷에 스키니한 워싱 진을 입은 여자가
고개를 옆으로 꺾어 볼과 어깨사이에 휴대폰을 댄채로 나와 뒷자석에 있는 큰 꽃바구니를 꺼낸다.
"참 엄마! 예영이는 어때? 설사 멈췄어? 다행이네. 오늘 하루종일 맘에 걸렸는데. 강서방? 별일 없을걸. 응. 알았어. 응. 응~ 끊어요."
통화를 마친 여자는 경쾌한 걸음으로 갤러리 입구에 선다.
'한 결 사진전.'
"한결 사진전..................짜식 성공했네."
자동문이 지잉 열리자 여자는 입구의 데스크에 서있는 어시스턴트 보이는 사람 앞으로 간다.
"꽃 예쁘죠?"
"...네?"
"꽃 예쁘죠? 제가 이거 구하느라 얼마나 진땀뺐는데요."
"예,예쁘네요."
"그럼 이 꽃바구니 좀 전해주실래요?"
"아..그건 이 옆에다 놓시면.."
"아니, 그거 말구요. 직접 전해 주시라구요."
"....아"
"돼죠? 돼겠죠? 돼야하는데"
"..지금 전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지금은말고!"
여자는 조금 뜸을 들이는가 싶더니 살짝 당황한듯한 어시스턴트를 향해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인다.
"사진들 다 보고 나서 저 나가면! 여기 계속 계시는 거 맞죠? 근데, 작가님은..."
"선생님은 위층 휴계실에서 쉬고 계십니다."
"이런 딱딱한 분위기 싫어하는 건 여전하네. 고마워요. 그럼 저 잘 주시해 주세요. 근데 그 목걸이 참 예쁘네요."
여자는 또 다시 장난끼 가득한 미소를 날리곤 사진전이 열리는 홀로 또각거리며 들어간다.
어느 한 공원에서 벤치에 앉아있는 외국 노부부의 행복한 모습. 지는 해와 붉은 하늘.
넓은 언덕 위에 서있는 나무 2그루. 이제 막 결혼식을 끝내고 행복하게 웃고있는 신랑신부.
여자는 꽤 많은 사람들로 붐비는 사진전을 느린듯 하면서 빠르게 돌아다니다 갑자기 어느 사진 앞에서 발걸음을 멈춘다.
"오 이거 느낌좋다."
어느 한 노숙자가 비지니스 맨들로 북적한 지하철 한 구석에서 주위 사람들 눈치를 보며 조용히 담배에 불을 붙히고 있는 사진.
한동안 그 사진에 빠져 멍하니 감상하고 있다가 불현듯 옆의 사람들 목소리가 여자의 귀에 들린다.
"구십팔년 십일월. 아이 스틸 러브 유 바이올렛? 도대체 무슨뜻일까?"
"글쎄. 왠지 포토그래퍼랑 사랑했던 여자 같지 않아?"
"그치. 그치. 흑백 첫 사진이라는데 이렇게 잘 찍어도 되는거야?"
"그러니까 젊은나이에 이렇게 존경받는 포토그래퍼가 됬지."
"난 이 사진이 젤 맘에 든다. 여자도 너무 예쁘고."
"머리 때문에 잘 안보이긴 해도 진짜 예쁠 것 같아."
옆의 무리가 그 사진을 떠나가자 마자 여자도 발걸음을 옆으로 옮긴다.
그리고 그대로 굳어버린다.
햇살 가득한 어느 오후 마당의 조그마한 화단에 쭈그리고 앉아 바이올렛을 심고 있는 한 소녀의 모습을 담은 흑백사진.
기억한다. 남자가 처음으로 찍었던 흑백사진이자.........
<98년 11월. I still love you.Violet.>
"짜증나...."
그 사진을 보던 여자의 눈에서 갑자기 눈물방울들이 끊임없이 어룽져 떨어진다. 닦아도 닦아도 멈출 생각을 하지 않고 계속 흐른다.
여자는 신경질이 나는 지 미간을 확 찌푸린다. 그날이...생각난다.
8년 전. 그렇게 어이없게 남자를 보냈던 여자는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뒤로하고 약혼자를 만나는 장소에 3시간이나 늦게 찾아가 난장판을 만들었다.
'엄마가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그건 인간이 할 짓이 아냐...결이 어디로 빼돌린거야?응? 엄마!!!!!대답해!!!!!!!!!!!!!!!'
'짝-'
'여, 여보!'
'어디서 배워먹은 말버릇이야. 여기 어른들 계시는 거 안보여? 그 놈 엄마 손에서 끝난 걸 다행인 줄 알아!'
'그래. 다행이지. 아빠가 손봤어봐. 결이 이미 딴세상 사람됬을껄?'
'나예야!'
'결이 당장 어디로 보냈는지 얘기해. 안그러면 이 개 같은 약혼자리 오지도 않았어.'
'이게..더 맞아야 정신을 차려? 다 널 위해서라는 거 몰라?'
'사랑하는 것 까지 간섭하려고 하지마. 그동안 간섭했으면 충분했던 거 아냐? 엄마 아빠 손에 잘 놀아 줬잖아. 안그래?'
여자는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음식점을 나왔다.
머릿속에 한 결생각으로 너무 꽉차 있어 어디에 차를 뒀는지 기억이 안나 길을 헤매고 있는 그녀를
뒤에서 폭 안는 남자가 있었다. 바로 그녀의 남편이 된 뻔뻔하다 싶을 정도로 오지랖넓고 상냥하고 유쾌한 남자.
'완전 울보네요.'
갑작스런 포옹에 깜짝놀란 여자가 품에서 벗어나려 하자 남자는 더 꽉 안는다.
'볼좀봐. 완전부었다. 아프죠? 회장님도 나쁜 의도는 아니셨을 거에요.'
'...................좀 놔주실래요?'
'울어요. 같이 울어줄게요.'
'이봐요.'
'아 인사가 늦었나? 전 강영하에요. 그 개 같은 약혼자리에 참석했던 강나예씨 약혼자.'
'그래요. 약혼자씨. 오늘 본의아니게 민폐를 끼쳤네요. 잊어버리세요. 오늘일. 뭐 더이상 만날일도 없겠지만.'
'전 계속 만나고 싶은데요.'
'...약혼자씨.'
'강 영하에요. 나예씨.'
'강 영하씨. 제가 오늘 왜 그렇게 깽판친 줄 알아요? 6년 동안 결혼까지 생각 하고 사랑했던 남자를 엄마가 쥐도새도 모르게 어디로 감춰뒀거든요.'
'아 그런일이였구나.'
'네. 그래서 전 약혼도 뭐고 그 사람 찾아다닐 생각이에요.'
'네에.'
'엄마가 얼마나 어마어마한 돈을 썼을 진 몰라도 꼭 찾고 싶어요. 그사람.'
'왜요?'
'너무...너무 사랑하거든요.'
'그래요.'
'거기서 조금만 더 사랑했다면 아마 미친년 미친놈 소리 들었을 걸요.'
'그래요.'
'서로 정말 사랑했는데..........분명 무슨 사정이 있었을거에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 사람 없인..................전 하루도 살지 못해요.............'
'그래요.'
'그러니까........이 것좀...............놔주ㅅ..............'
그대로 여자는 목놓아 울어버리고 말았다.
여자는 아직도 그때 왜 그렇게 울었던 건지 알수는 없지만 확실한 건 그 품에서 울고 싶었다 라는거다.
그때 그는 여자의 등을 토닥이며.
'...............................나예씨는 울 때도 정말 예쁘네요.'
시간이 약이라고 했던가. 이 마냥 따뜻하고 자상하기만 한 남자는 여자를 자그만치 4년을 기다렸고 결국 결혼했다.
그렇게 한동안 그날 생각에 가득 차있다가
문득 주위에 온통 남자의 향기로만 가득해 지는 것 같이 아득하고 가슴이 미어질 듯 답답해진 여자는 급하게 발걸음을 돌려 뛰쳐나간다.
"...어?..."
입구에 서있던 그 어시스턴트가 고개를 갸우뚱 거리며 바이올렛 꽃으로만 가득 찬 큰 꽃바구니를 들고 2층으로 올라간다.
"선생님-"
"..............피곤해. 나중에 보자고 해."
"그게 아니라요. 어떤 분이 직접 이 꽃바구니를 전해주라고 하시길래요."
"옆에다 두고 가."
"네. 근데 꽃바구니가 참 특이해요. 이 꽃이 바이올렛이던가?"
"?"
쇼파에 느긋하게 기대 누워있던 남자가 그 말에 벌떡 일어나 꽃바구니를 본다.
보랏빛 바이올렛이 가득한 꽃바구니에서 나는 꽃향기가 남자의 코 끝을 건들이고 있다. 아득한 향수에 젖는 느낌이 든다.
남자는 바이올렛 사이에 꽂혀있는 카드를 뽑아서 본다.
낯익은 글씨체를 보자마자 코가 시큰해지면서 왈칵 눈물이 나올 것만 같다.
┌
결. 19살의 바이올렛을 기억하니?
┘
순간 남자의 머릿속에서 알수없는 소용돌이들이 휘몰아 치기 시작한다.
"그 여자분 굉장히 예쁘셨는데 특히 웃는게 너무 매력적이였어요. 근데요 선생님. 여자분이 갑자기 사진 보시다가 울면서 뛰쳐나가시더라고요. 어떻게 붙잡을 수도 없고.."
"......갔어?"
"네?"
"언제, 언제 나갔냐구"
"얼마 안됬어요. 방금 나가셨으...선생님!"
남자가 급하게 갤러리 밖으로 뛰쳐나간다.
무엇엔가 홀린 듯 남자는.
"나예야..................나예.........나예야..........."
나예라는 이름만 되뇌이며 갤러리 주변을 정신없이 헤매고 다닌다. 얼굴에 미치겠다는 심정이 역력하다.
그때 남자의 뒤로 검은 외제차 한대가 빠져나간다.
멍하니 서있는 남자와 입술을 꾹 깨문채 운전을 하는 여자의 눈에서 잠깐 멈췄던 눈물 방울들이 또 다시 쉴새없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건뭐야?'
'꽃 모종! 여기에 심을거야.'
'무슨 꽃인데?'
'바이올렛.'
눈만 감고 있어도 스르르 금방 잠이 들것만 같이 따뜻한 햇살이 비추던 오후였다.
결은 나예가 사다 준 흑백필름을 카메라에 넣고 조그마한 렌즈를 통해 눈부신 하늘을 보고
무너지는 담벼락 위에서 가르릉 거리며 졸고있는 도둑고양이를 보고
자신의 신발을 보다 바이올렛을 심고 있는 나예에게로 멈췄다.
그 조그마한 렌즈안에 쭈그리고 앉아있는 나예의 모습이 다 들어온다.
결이 가장 좋아하는 나예의 미소가 그녀의 길게 흐트려진 머리카락 사이로 희미하게 보인다.
'찰칵-'
'축하축하 강나예'
'뭐가?'
'결 님의 흑백사진에 첫번째 주인공이 되셨습니다.'
'오. 가문의영광이네'
둘이 눈을 마주치고 키득키득 웃는다.
'결아.'
'응?'
'바이올렛의 꽃말이 뭔줄 아니?'
'뭔데?'
'영원한 사랑.'
'영원한 사랑?'
'응. 영원한 사랑. 으아. 드디어 다됐다. 결아. 예쁘지?'
'응. 예쁘다.'
'.........결아. 우리도 바이올렛하자.'
'바이올렛?'
'그래. 바이올렛. 영원히 사랑하자구.'
'낯 쑥쓰러운 말도 잘해.'
'어쭈? 말 돌리기 시작하지 마라. 너 나랑 바이올렛 할꺼야? 말꺼야?'
쑥스러운지 결은 벌떡 일어나더니 거의 쓰러져 가는 집 마당으로 휘적휘적 가기 시작한다.
'야! 결!'
또 저런다. 라는 표정의 나예가 갑자기 씨익 웃으며 타닥 뛰기 시작하더니 가벼운 도약과 함께 결의 등에 올라탄다.
'야!!!! 내려와!'
'그대로 넘기려 하시면 안되죠~'
'아 쑥스럽단말야. 빨리 내려라.'
'우리 진짜 바이올렛 꽃말 같이 평생 사랑하자.'
'...........'
'바이올렛하자. 결아.'
'.......그,그래. 바,바이...올렛.....하자.'
'아구~ 잘했어요 잘했어요! 자자, 우리 맹세한 기념으로 찰칵!'
결이 주머니에서 조그마한 수동카메라를 꺼내 나예에게 넘긴다.
수동카메라를 든 나예는 업힌채로 자세를 한번 고치고 카메라를 둘의 얼굴을 향하게 한채로 긴 팔을 쭉 편다.
'자 찍습니다요. 결아 우리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표정 짓는거다.'
'하나.'
'둘.'
'셋.'
'결아 사랑해. 김치~'
End.
상당히 진부적이고 주절주절 쓰다보니 상당히 긴 글이 돼버렸군요.
06년도 작입니다. 년도를 06년도에 지정해 놓고 봐주세요.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표정을 짓고있는 두 소년소녀의 사진을
자신의 서재 책상 두번째 서랍 빨간 수첩속에 간직하고 있을 나예를 위하여.
소 가죽으로 만든 튼튼한 지갑속에 넣고 다니며 그날의 추억에 젖을 결을 위하여.
첫댓글 안녕하세요~~ 보면서 화두 나지만 한편으로는 가슴이 아프네여^^ 글 잘보고 갑니다~~
잘보고 가주시다니 정말 감사합니다. 항상 행복한 나날 되세요
ㅠㅠ슬프네여결이도불쌍나예도불쌍해여ㅠㅠ!!
그쵸. 너무 불쌍하죠.ㅠㅠ 저도 이 둘 생각하면 가슴이 쓰리답니다. 봐주셔서 감사해요.
결국....소중한 추억으로 남게되었군요...잊을수없는...아련한 추억..> <♡
빙고. 아련한 추억이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 것 같네요. 항상 행복하세요.
슬프다잘ㅠ_ㅜ 잘쓰셨어요^^ 재밌게 읽고 갑니다!!
어이구~과찬입니다~ 재미있게 읽고 가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