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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실에서 나온 세라의 표정이 자못 심각하다. 화장대 앞에 앉은 세라의 손에는 자가 임신 진단기가 들려져 있었다. 선명하게 두줄이 그어진 임신 테스트기를 보고있던 세라는 착잡한 심정으로 테스트기를 서랍 속으로 던져버린다. 그때 정 회장이 방문을 열고 들어오자 마치 도둑질이라도 한 사람마냥 화들짝 놀란다.
"어머!! 회장님."
"왜 그렇게 놀래? 무슨 일 있어?"
"아~뇨. 일은 무슨일이.........."
정 회장은 허둥대는듯한 세라를 미심쩍은듯 쳐다보았지만 이내 상관없다는듯 출근준비를 서둘렀다. 무슨일인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게 보였지만 지금 정 회장에겐 세라의 일 따위는 중요하지가 않았다. 지금 정 회장의 머리속에 가득한 것은 어제 저녁, 하연이의 선에 대한 일이다. 윤 비서의 말로는 여지껏 하연이 보았던 선과는 달리 꽤 오랜시간 함께 있었다고 했다. 제법 웃음 소리도 들렸고, 농담소리도 들렸다고 했다. 선보는 내내 편안해 보이는 얼굴이었다고 윤 비서는 전했다. 어떤 놈이었는지 사실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윤 비서에게서 진성 산업 아들에 대해 전해들었었지만, 그리 큰 기대를 하지않았기에 흘려보았었다. 사무실로 나가자마다 자신의 서랍 속에 들어있는 진성 산업의 아들에 대한 자료를 다시 확인하리라. 사진도 함께 전해받았었는데 얼굴이 기억나질 않는다. 분명 괜찮아 보였던거 같았는데, 도대체 어떻게 생긴 놈이길래 하연의 호감을 끌어낸건지, 더구나 연애를 시작한 하연에게서 뜻밖의 호감을 받았다는게 신통하기만 하다.
'진성 산업 아들이라고 했지.'
"저기......회장님........회장님! "
깊은 생각에 빠져있던 정 회장이 조심스러운 세라의 목소리에 퍼득, 현실로 돌아왔다. 양복 저고리를 들고있는 세라는 뭔가 할말이 라도 있는건지 안절부절 자신의 눈치를 살피고 있다.
"뭐야, 할말이라도 있는거야?"
"그게......아니예요."
"싱겁긴......."
분명 뭔가 할말이 있는 눈치다. 보나마나 또 호적 타령이겠지. 너무 오래 데리고 있었나보다. 분수를 모르고 이젠 유일 그룹 안주인 자리까지 넘보다니, 하연을 결혼시키고 나면 둘을 이 집으로 불러 들일 것이다. 그 전에 세라부터 정리를 해야겠다. 그 동안 하연도 없는 집이 너무 썰렁해 데리고 있었던건데, 사사건건 하연과 부딪히는 것도 마땅치가 않고, 굳이 이 집에 둘 이유가 없다. 적당한 아파트를 하나 마련해 그리로 보내면 될 것이다. 아직 나이가 젊으니 본인이 원한다면 놔주는 것도 괜찮을 것이고......
정 회장은 세라를 보며 괜한 동정심에 일을 벌여 골치가 아파진것 같아 때때로 후회가 되기도 했었다. 그때, 그냥 그렇게 지나갔어야하는건데.......
세라를 처음 본 건 10년 전이었다. 그때가 세라 나이가 스물 여섯인가 일곱인가, 아무튼 그날도 다른 때와 마찬가지로 접대를 위해 룸 싸롱을 찾았고, 하나,둘 문을 열고 들어오는 아가씨들 중에 세라가 있었다. 처음엔 그리 눈에 띄는 아이가 아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간들어지게 웃으며 애교를 떠는 다른 아가씨들과는 달리 중간중간 멍한 듯 시선을 놓고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었다. 그렇다고 넋을 놓고 멍청하게 앉아있는 것도 아니었다. 자신의 역활을 충실하게 수행하 듯 거짓 웃음을 지으며 사내들의 시중을 드는 중간 중간 웃음기가 사라진 얼굴로 그렇게 앉아있었다.
그런 세라의 모습이 정 회장의 시선을 끌어당겼고, 정 회장은 그 모습에 죽은 하연 엄마, 희연을 떠올리게 되었었다.
희연을 처음 만났건 군대를 제대하고 막 복학을 해서였다. 학기 정리를 하고 유학을 떠날 예정이었던 정 회장은 미대 건물를 지나던 중 창을 열고 화단에 핀 꽃을 스케치하고 있던 그녀를 만났다. 그녀를 보는 순간 한눈에 반했고, 유학을 포기 할 정도로 그녀에게 빠져들었다. 집안의 반대도 모두 뿌리치고 기어이 희연과 결혼한 정 회장은 10년이 넘어서야 딸 하연을 낳았다. 하지만 하연을 낳고 난 뒤 아내 희연의 몸은 점점 약해지고 있었다. 하지만 유일그룹의 안주인이라는 자리는 힘들다고해서 마냥 주저앉아있을 수는 없는 자리였다. 정 회장과 함께 공식적인 자리에 화려하게 꾸미고 나가 화사하게 웃으며 옆자리를 지켜주어야만 했고, 회사가 커 나갈수록 그런 자리는 더더욱 늘어만 갔다. 매번 싫은 내색없이 화사하게 차려입고 나가 정 회장의 옆자리를 지켜줬지만, 집으로 돌아올때면 어김없이 목에 걸린 목걸이를부터 풀러내며 지친 표정을 지어보이던 그녀였다. 정 회장 역시, 자신의 옆 자리를 지킨다는게 얼마나 힘들고 버거운 일이라는걸 알고는 있었다. 자신이 그녀를 사랑한 만큼 그녀 역시 정 회장에 대한 사랑으로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어쩌면 그때 그녀를 놔줘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그렇게 허무하게 떠나보내지 않아도 됐을 텐데.......하지만, 애써 모르는 척 힘들어하는 그녀를 잡고 있었고, 그리고 그녀를 놓쳐버린 정 회장이었다.
그만큼 사랑했고, 곁에 두고 싶었던 사람이었다. 결국 자신의 욕심으로 하루하루 힘겹게 버텨내던 그녀는 그렇게 허무하게 떠나버렸다. 그런데, 때때로 캠퍼스를 펼치곤 멍하니 앉아있던 희연의 모습을 세라에게서 본 것이었다. 그후로 그곳에 갈때마다 세라를 찾았고, 그렇게 7,8년을 봐오던 세라를 데려오게 된 것이다. 그때 희연의 모습을 세라에게서 보지않았더라면, 쓸데없는 정을 주지않았더라면, 그냥 그렇게 가끔 찾아가 보는걸로 끝냈어야 했다는 후회가 밀려오는 정 회장이다.
"아무래도 지워야 될 것 같아."
정 회장이 집을 나서자 외출 준비를 한 세라가 서둘러 집을 나서 찾아간 곳은 장미가 살고 있는 빌라였다. 아직 이른 시간이고, 장미에겐 한 밤중과 같을거라는 걸 잘 알고 있는 세라지만 지금 그녀가 찾아갈 수 있는 곳이라곤 그녀뿐이었다. 잠에 취해있었던 장미는 갑작스럽게 찾아온 세라를 보며 무척이나 놀란 표정이었다. 여전히 잠이 덜 깬 얼굴로 초조한듯 거실을 서성이는 세라를 보며 겨우 찬물 한잔을 들이킨 장미가 볼멘듯 투덜거렸다.
"뭔 소리야? 새벽부터 느닺없이 들이닥쳐선 밑도 끝도 없이 뭘 지워?"
"아기!!! 아기가 생긴거 같단말야!!!"
신경질적으로 빽 소리를 지르는 세라를 보며 장미는 순간 세라가 하는 말을 알아듣지 못한듯 눈을 껌뻑거렸다. 방금 쟤가 뭐라고 한거지? 확인을 하는듯 빤히 쳐다보는 장미의 시선에 세라가 보일듯 말듯 고개를 끄덕인다. 아기라고 했다. 고개를 끄덕인다는 건 방금 자신이 들은 그 말이 잘못들은 것이 아니라는 걸 재차 확인해주는 것이다.
"너......임신했어?"
"그래, 임신인거 같아. 어제부터 벌써 두번째 확인해 봤어. 임신이야."
"근데 왜 지워? 너 기다렸던 아기잖아. 근데 왜 지워?"
"그.......그게....."
여전히 불안한듯 시선이 흔들리던 세라가 다시 초조한듯 거실을 서성였다. 장미의 말처럼 분명 기다리고 기다렸던 아이다. 하지만 정 회장의 아이가 아니다. 아니 정 회장의 아이가 아닐 확률이 많다. 두 달전 그날........
그제서야 장미도 놀란 토끼눈을 하고는 세라의 옆으로 바짝 다가갔다. 그리고는 불안해하며 어쩔줄 몰라 서성거리는 세라의 손을 잡아당겨 소파에 앉게 했다. 장미는 곧 따뜻한 차를 두 잔 끓여 세라에게로 갔다. 장미가 내민 차를 받아드는 세라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행동을 처음부터 끝까지 시선을 떼지않고 바라보던 장미가 자신의 몫인 차잔을 집어들었다.
"뭐 때문에 그렇게 불안해하는거야? 첨부터 우리가 생각했었던 시나리오잖아. 새삼 겁이라도 난거야? 아니면, 양심에 가책을 받는거니? 난 니가 지금 이러는 이유를 모르겠다."
"그게........불안해."
"뭐가 불안하다는 거야?"
"넌 몰라, 회장님이 얼마나 자식을 끔찍히 아끼시는 분인지, 하연이한테 하는것 만 봐도 그래. 하연이가 뭘 원하든 그게 어떤 것이든 입에서 떨어지기가 무섭게 하연이 손에 쥐어주시는 분이셔. 근데 만약 회장님께서 이 아이가 자신의 핏줄이 아니라는걸 아시게 된다면 얼마나 충격 받으시겠니. 그동안 하연이 하나 키우면서도 그렇게 끔찍하셨는데, 새로 자식이 생겼다는고 하면 정말 기뻐하실거 아니야. 근데 그게 자신의 핏줄이 아니란걸 아시게된다면.......그리고 과연 회장님이 믿어주실까? 여지껏, 2년동안이나 생기지 않던 하연의 결혼 말이 오가는 지금 갑자기 생겼다고하면 믿어주실까? 더구나....."
"더구나?"
"더구나, 나.......함부로 몸을 굴리고 살던 년이었는데......"
"그게 뭐!!!"
장미는 세라의 어두운 얼굴을 보고 있자니 목구멍으로 뭔가가 확 치밀어 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함부로 몸을 굴리고 살던 년은 임신하면 안된다는 법이라도 있단 말인가. 도대체 그동안 정 회장 밑에서 얼마나 눈치밥을 먹은 건지. 그렇게 원하고 바라던 임신을 했으면서도 불안해하는 세라를 보자 새삼 울화가 치밀어오른다.
처음 룸을 떠나는 그녀를 보며 얼마나 부러워했던가. 대한민국 제일의 그룹 회장 밑으로 들어간다고, 평생 지하 술집에서 술 따르며 살다 늙어선 어느 사창가로 흘러들어가 이놈 저놈을 거치며 병들어 죽을지도 모를 하찮은 인생이였던 그녀가 그룹 회장 밑으로 들어간다고 얼마나 부러워 했었던가. 지겨운 그 생활을 청산할수 있는 것 만으로도 모두에겐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동료들의 부러운 눈길을 보며 세라는 생각했다. 빛 좋은 개살구라고, 아무리 대한민국 제일의 부자라고 하더라도 결국은 늙은이의 노리개일뿐이고, 아직 젊다고는 하지만 자신은 기껏해야 술집 여자일뿐이다. 몇년 그럭저럭 비위 맞추며 살아주다 한몫 단단히 챙겨 나오면 그날로 팔자펴지는거다 그렇게 생각했었던 세라였다. 장미 역시 세라의 생각에 동의했었다. 젊은 여자를 데리고 살면서 온갖 위세까지 부리며 함부로 하더라도 몇년만 꾹 참고 살다 한몫 단단히 챙겨나오라 충고까지 했었다. 하지만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며 점점 변해가는 세라를 보게되었다.
그녀를 다시 만난건 한 달쯤 후였다. 그때 그녀는 주구장창 피워대던 줄 담배를 끊었다고 했다. '뭐, 회장이 싫어하시니까' 라고 변명을 늘어놓는 그녀의 눈은 반짝이고 있었다. 그래, 지겨운 술집을 떠나 큰 집에서 두 다리 쭉 뻗고 자니 얼마나 좋을까 했었다. 자신과 몇살 차이나지 않는 딸년이 속을 긁어놓는다 하소연을 늘어놓을때도 그녀의 얼굴은 반짝거렸다. 술집에서 이놈 저놈 손목 잡혀가며 술 따르는 것보다야 백배는 낫다는 위로아닌 위로를 건냈을때도 '그렇지' 라며 쉽게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의 표정은 맑아 보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뭔가 석연찮은 기분이 들었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명품으로 치장을 하고 웃고 있는 그녀를 보며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곤 했다. 그리고 지금 막 그 석연치 못했던 기분의 정체를 확인했다. 세라는 진심으로 정 회장에게 마음을 준 것같다. 그녀 스스로는 깨닫지 못한것 같지만 그 동안 자신이 느꼈던 석연찮은 느낌이 바로 그것이었나보다. 지금 세라가 불안해하는 이유가 정 회장이 혹시나 상처 받을까봐 그것을 걱정하는거라면.......
장미는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저것이 2년간 몸 붙이고 살더니 그새 정이 든건지, 그 늙은이를 걱정하고 있다. 어쩌면 빈털털이로 쫓겨날지도 모를 자신의 처지를 잊고서 말이다. 한몫 단단히 잡고 나오겠다던 처음과는 달리 그렇게 호적에 올라가고 싶어 안달을 한 이유가 진심으로 그 늙은이의 부인이 되고 싶어서였나?
"세라야......그 영감한테 마음 준거니?"
"뭐?"
"그 영감 정말 사랑하게 된거냐구?"
"무.......무슨...."
"근데 왜그래? 왜 간댕이가 콩알만해져서는, 이렇게든 저렇게든 정식 부인으로 인정을 받을수 없다면 확 저질러보는것도 나쁘지 않잖아. 어차피 빈몸으로 시작해 여기까지 왔으면서, 일이 잘못되어 모든 것을 잃어버린다고해도 빈 몸뚱이 하나 남는건 마찬가진데 뭘 그렇게 불안해 하는거야? 일이 잘 풀린다면 넌 원하던 사모님 소리 듣게되는거고, 혹시 잘못되더라도 더이상 잃을것도 없는 니 처지에 뭘 그렇게 사서 고민을 하는거야?"
장미의 말을 멍하니 듣고 있던 세라가 고개를 떨구었다. 사랑한다. 아니 정 회장님을 향한 마음이 사랑이 아닐지 몰라도 상처 입게 하고 싶지 않다. 지독한 가난과 아버지의 폭력을 피해 어린 나이에 집을 나왔을 때도, 세상 천지 누구하나 손을 내밀어주는 사람이 없었다. 술집을 전전하면서도 자신의 몸을 탐하는 남자들을 보며 세상에 믿을 거라곤 돈과 자신의 몸뚱이 뿐이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26살이라는 뒤늦은 나이에 찾아온 열병과도 같았던 첫 사랑에 상처입고 모든 것을 놔버리고 싶었을때 자신에게 손을 내밀어준 사람이 정 회장이었다. 처음엔 정 회장의 호의가 다른 남자들과 똑같은거라 치부했었었지만, 그의 그늘에서 살았던 2년간의 시간동안 그는 늘 자신을 존중해줬었다. 술집 여자라고 무시하지도 않았고, 함부로 대하지도 않았다. 그 나이에 맞는 근엄함과 점잖음으로 자신을 대했었다. 단 한가지, 딸 하연의 일만 제외하고선 말이다. 처음 받아본 인간다운 대접이었기에 그것이 설사 형식적인 보살핌이었다 하더라도 그에게 기대고 싶어졌다. 하연의 존재 조차 무시 할 수 있을 만큼 정 회장에게 의지하고 있는 자신을 보며, 어느 순간부터 정 회장의 호적에 올라 정식으로 그의 부인이 되고싶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었다. 공공연하게 그의 팔짱을 끼고 그의 옆자리에 서서 그가 자신의 남편임을, 그 남편의 보호를 받는 아내임을 알려주고 싶어졌었다.
"나......그 사람, 정말 사랑해."
"미쳤구나. 니가 미쳐도 단단히 미쳤어!"
"앉아요. 이름이 혜진양이라고 들었는데....."
"네, 이 혜진이라고 합니다."
문 앞에서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몇번이고 마음을 다잡고 심호흡을 했지만 별 소용이 없는것 같다.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우아하게 앉아 있는 도현의 어머니를 본 순간 철렁 심장이 내려앉는것만 같다. 단단히 각오를 하고 나왔음에도 세차게 요동치는 심장은 제발 진정하고 차분해 달라는 주인의 부탁따위는 잊은지 오래인가 보다. 우아하게 틀어올린 머리가 한 올 흐트러짐없이 단정하고, 실크의 느낌이 그대로 살아있는 블라우스는 혹여 파리라도 앉는다면 그대로 미끄러져 내릴 것처럼 매끄러운 광택을 자랑하고 있는 도현의 어머니를 보며 기껏 차려입은 오래된 정장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우아하게 자리를 권하는 손가락에서 빛나고 있는 커다란 다이아 반지가 주눅들린 혜진의 눈 앞에서 왔다갔다 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화려하고 고상한 느낌이 물씬 풍기는 도현의 어머니는 전통 한옥 분위기의 이곳 한정식 집과는 그리 어울리지가 않지만, 도저히 30살의 아들이 있는 중년의 여인으로 보기 힘들만큼 젊어보인다. 혜진은 도현의 어머니가 권하는 대로 그녀를 마주하고는 조심스럽게 앉았다. 미리 주문을 해 놓은 것인지 혜진이 앉자마자 조용히 문이 열리며 하나,둘 음식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둘이 먹기엔 너무 많아보이는 한정식은 그냥 보기에도 꽤나 정갈하고 먹음직스럽게 보였다.
"내가 기다리는 걸 워낙에 싫어해서, 그래서 미리 주문했어요. 아직 식사 전이죠?"
"말씀 낮추세요."
"초면에 그럴수는 없죠."
더 할수 없이 상냥한 말투였지만, 혜진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은 더 할수 없이 차갑기만 했다. 그런 그녀의 눈빛에 온 몸의 신경이 곤두서며 위축이 되는 혜진은 비록 대답을 했지만 과연 이 음식들을 먹을수가 있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들어요.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인데 식사는 제때해야죠."
"네"
마지못해 수저를 든 혜진과는 달리 정작 음식을 권한 도현의 어머니는 수저도 들지 않은채 혜진의 행동을 주시하고 있었다. 먼저 수저를 든 혜진을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음식을 먹자니 자신을 노려보고있는 어머니의 눈길이 신경쓰였고, 그렇다고 한 번 든 수저를 내려놓기도 애매했다.
"우리 도현이 어떻게 만났어요? 우리 도현이가 이런 시골에 올 일은 없을테고......"
"네, 그게 찬혁씨 저희 집 근처에서 사고를 당했습니다. 그래서 도현씨가 데리려 오면서 처음 만났습니다."
"그래요? 찬혁이가 사고를 당했다는 소리는 첨 듣는데, 그럼 찬혁이도 알고 있다는 소리네요?"
"네........"
"찬혁이가 우리 도현이랑은 대학때부터 친구라 내가 잘 알고 있어요. 공부도 잘하고 번듯하게 잘 생기고, 우리 도현 아버지가
찬혁이를 무척 신뢰하고 딸이 있었으면 사위라도 삼고 싶어 할 정도로 탐을 냈거든요. 물론 내 생각과는 많이 다르지만 말이죠. 딸이 없기는 하지만 설사 있다 손 치더라도 사위로 삼는다는 건 좀 그렇죠. 어쨌든 결혼은 비슷한 집안끼리 하는게 순탄한 법이니깐요."
혜진은 수저를 내려놓았다. 절로 손아귀에 힘이 들어가는걸 느꼈다. 찬혁에 대해 말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곧 자신에게 하는 말이라는걸 잘 알고 있는 혜진이다.
"도현이가 지난주에 선 본 건 알고 있어요? 상대는 유일그룹의 외동딸인데 내 생각으론 도현도 그리 싫은 눈치가 아니예요."
도현이 선을 봤다는 말에 놀라 번쩍 고개를 든 혜진은 무척이나 재밌다는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도현의 어머니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의 반응을 즐기는듯한 잔인한 눈빛에 혜진은 그대로 고개를 떨굴수밖에 없었다.
"몰랐었나보네요. 하긴 얘기 할수 없었겠죠."
"네......."
선을 봤다고? 유일 그룹 외동딸이랑? 말 한마디 없이.........그래, 말 할수 없었겠지. 말 하기가 그랬겠지. 하지만.......그래도......
갑자기 서운함이 밀려온다. 그럴수 밖에 없었으리라 짐작은 하지만, 그럼에도 서운한건 어쩔수가 없다.
"차라리 찬혁이를 만나지 그랬어요. 두 사람, 잘 통했을 텐데."
혜진의 무릎에 놓인 두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래, 공통점이 있지. 혜진은 생각을 비우려 애썼다. 앞에 앉은 고상한 사모님의 입에서 나온 모든 말들을 머리속에 담지 않으려 애썼다. 하지만 그녀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사모님의 말은 가시가 되어 그녀의 심장에 박히고 있었다.
"남자, 여자 다 거기서 거기예요. 아무리 죽고 못살아도 살다보면 시들해지는게 사람 맘이죠. 하지만 기업은 달라요. 기업을 책임지는 사람들은 말이죠, 그 가족으로 태어나면서부터 의무라는 걸 지고 있어요. 그 의무를 위해 모든 혜택이 주어지는 거고."
혜진은 자신의 앞에 놓인 수저놓는 받침대를 뚫어져라 보고있다. 도현의 어머니 앞에 놓인 수저 받침대와 똑같은 모양인걸 보니 흙물을 틀에 부어 건조시켜 찍어내는 주입식 방법으로 만들어진거다. 같은 모양으로 정갈하기는 하지만 손맛을 느낄수가 없다. 작지만 손가락으로 눌러 공통성은 있지만 조금씩 다른 모양으로 만든다면 참 좋을것을.......딴 생각을 하는 혜진과는 상관없이 상대편의 일방적인 대화는 계속됐다.
"결혼은 서로 엇비슷한 사람끼리 만나야 뒷 탈이 없어요. 생활수준이랄까, 생각하는 방식이랄까 그런게 비슷해야 잡음이 없죠.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도현이와 유일그룹 따님은 말이 필요없는 커플이예요. 두 사람에게 서로를 알수있도록 얼마간의 시간은 주어지겠지만 올해 안에 결혼하는 건 기정 사실이예요. 도현이가 결혼을 한 후에도 관계가 지속된다면 그건 혜진양이 도현이 그림자로 살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일거예요. 도현이에게 괜한 기대 안하는게 좋아요. 그게 혜진양을 위해서도 우리 도현이를 위해서도 옳은 일이예요."
도현의 어머니는 고개를 숙인채 대답이 없는 혜진을 빤히 쳐다본다.
" 원한다면 혜진양이 요구하는 대로 해 줄 수도 있어요. 다들 이런 말들이 모욕이라고들 하는데 그런건 배부른 사람들 얘기구 현실적인 사람들은 안그래요. 내가 지금 혜진양에게 돈을 주면 아마 우리 도현이 귀에 들어가겠죠? 물론 혜진양이 직접 도현이에게 말하지는 않겠지만, 이런 저런 경로로 알게되더라구요. 그럼 도현이가 펄쩍 뛸거구 혜진양에게 미안해서라도 마음정리가 잘 안될거예요. 잘 정리가 되고 도현이 결혼식이 끝나고나면 그때 혜진양에게 섭섭지 않게 보상을 하겠어요."
여전히 대답을 않는 혜진을 보며 도현의 어머니는 마지막 말을 내뱉는다.
"몇달 연애 한 댓가치고는 나쁘지 않는 제안이잖아요? 그럼 난 혜진양이 알아들은걸로 알고 먼저 일어날테니깐 천천히 식사하고 가요. 아무래도 나랑 같이 식사하는거 불편할거니깐."
어느 유명 백화점 쇼 윈도에서 오가다 몇번 눈으로 구경만 하던 밍크코트를 걸치고 나가는 도현 어머니의 뒷 모습을 본 혜진은 씁쓸하다. 도현의 어머니가 나간후에도 한참을 그렇게 넋이 나간듯 무표정한 얼굴로 앉아있는 혜진의 눈에 머뭇머뭇 눈치를 살피며 살며시 들어오는 종업원이 눈에 들어왔다.
"저...........식사를 다하신건지.............."
"식사......."
그러고보니 아까 수저를 들다만 채 놓아버린 음식들이 아직 그대로다. 큰 상 가득하니 채워진 음식들은 형형색색 정갈한 차림으로 먹음직스럽게 차려져있다. 이름도 생소한 음식들을 보며 혜진은 자신의 처분만을 기다리는 종업원에게 웃어보였다.
"아직 못 먹었어요. 죄송하지만 국이랑 다른 음식들 다시 좀 데워주시겠어요?"
혜진은 식어버린 국 그릇을 내밀며 음식을 데워 줄 것을 요구했다. 그녀는 다시 데워진 음식들이 속속들이 상을 채우자 젖가락을 들어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한 방울 똑하니 탁자위로 눈물이 떨어졌다. 참 여러가지 한다 이 혜진. 남들 평생 살면서도 해보지 못했던 일들을 겨우 26년 길지도 않은 세월을 살았을뿐인데 다 해보는 구나. 심파 속 비련의 여주인공처럼 부잣집 마나님이 내 아들 포기하라는 대사도 들어보고, 이렇게 비싼곳에서 이런 근사한 밥상도 혼자 독차지해보고, 드라마에서 처럼 물컵 세례 받지 않는게 어디덴, 정말 억세게 운이 좋은가 보다. 남들 평생 한번도 겪어보지 못할 경험들이 잘도 찾아왔고, 또 앞으로도 찾아 올 것 같다. 미혼모라는 이름으로.....
"야~ 이 혜진. 세상 살기 얼마나 힘든데 이런 일로 울어. 이런 근사한 밥상 앞에서........내가 언제 이런 근사한 곳에서 이런 비싼 밥상을 받아보겠어. 뭐가 불만이야. 돈도 주신대잖아. 그럼 충분히 혼자 잘 살수있지 뭘그래................많이 아주 많이 달라고 할거야. 이 도현이 몸값이면 아주 많이 달라고 해도 되는거잖아. 안그래....."
혜진은 꾸억꾸억 밥을 퍼 입으로 가져갔고 탁자위에 눈물은 한방울 두방울 쉴새없이 떨어져내렸다.
첫댓글 그놈의 사랑이라는 감정때문에 울고웃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ㅎㅎ
돈이먼저냐 사랑이먼저냐
아무튼 사람들 마음은 알다가도 모르겟네요^^~~
ㅋㅋㅋ역시소설은 로맨스가최고인거같애요
즐감하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