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딸을 데리고 저 세상으로 가려던 아버지가 어린 딸들만 보내고
자신은 뜻을 이루지 못했다는 소식이 연초의 우리네 가슴을 아프게 찌른다.
사람은 살아 있어서 사람이다.
앞이 보이지 않을 때 사람은 죽음을 생각한다.
사람이기를 포기한다.
옛부터 우리는 “오죽했으면”이라는 말을 써왔다.
오죽했으면 그렇게 모질 수가 있으랴 하고 탄식을 하지만,
이 세상에서 아무도 당사자의 심정을 정확히 설명할 사람은 없다.
그와 같은 처지의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많다.
예나 지금이나 가난과 난치병을 함께 갖고 있는 삶, 불구의 몸으로
세상 풍파에 부대끼는 굽이굽이 구곡간장이 녹는 사연과 절망의 삶들은 무수히 많다.
세상 구석구석을 보는 작은 창이 있다.
컴퓨터라는 창. 컴퓨터 창에는 고단한 삶의 호흡이 있고, 옛일의 궤적과 오늘의 모습이 압축된 흐름이 있다.
블로그는 망망대해 같은 온라인 세상에 띄운 작은 조각배 같은 것.
나의 작은 블로그가 눈에 띄어 찾아오는 사연이 어쩌다 나를 깜짝 놀라게 한다.
2006년 7월12일 쪽지가 날라왔었다.
―고 육영수 여사의 도움으로 미국 유학을 갔었는데 박근혜에게 감사함을 표현하고 싶습니다.
메일 주소를 알아봐줄 수 있습니까? 내 전화는 011)773-××××입니다. 부탁합니다.
잊어도 그만인 것을, 모른 체하고 살면 그만인 것을 자기 앞가림에 바쁜 일상을 팍팍하게 살면서
보은(報恩)의 진심을 고백케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육영수 여사의 선명한 존재 가치는 무엇일까.
쪽지를 보낸 사람은 미국 유학이라는 복(福)을 얻었지만,
절망의 밑바닥에서, 아득한 벼랑의 끝에서 육여사를 만난 사람들이 많았다.
육여사를 잊지 못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난날의 눈물과 고통의 인연으로 맺어져 있다.
대전에서의 일이다.
육여사가 온다는 소식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박정희 후보의 유세가 벌어진 것인데(1971년 4월),
선거 유세보다 육여사에 주목하는 눈길들이 따로 있었다.
유세가 끝나고 박정희 후보가 승용차를 세워둔 유세장 뒷문으로 먼저 나오고,
그 뒤에 두걸음쯤 떨어져 흰 운갑사의 수수한 한복을 차려입은 육영수 여사의 모습이
나타나자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그 중에 박정희 후보 승용차 앞에서 기다리던 한 젊은 여성이 육여사의 눈에 띄었다.
그 여성이 인사를 하자 육여사는 놀랍고 반가워 얼른 다가가 얼싸안았다.
믈론, 아는 사람이었다. 장항에 살고 있는 전명희(당시 22세)라는 여성이었다.
육여사가 그녀를 처음 만난 것은 그녀가 17세였던 1967년.
그녀는 어려서 앓은 소아마비로 양쪽 다리를 제대로 쓰지 못하고 있었다.
수술이라도 해보면 원이 없겠건만 엄두도 못낼 형편이라,
암울한 청춘에 한 줄기 희망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날, 육여사가 군산에 온다는 소식이 들렸다.
어려운 사람들을 돌봐주는 분이기에 그녀는 어머니를
따라 그저 지푸라기라도 잡아 보려는 심정에 군산으로 건너왔다.
육여사는 먼저 전주에 들러 전라북도 여성회관 기공식에 참석을 한 뒤
군산으로 와서 파월장병의 가족들 중에서
가장 어렵게 사는 사람의 집을 찾아가 위로했다.
이때 육여사는 몰려든 군중 틈에서 중증 장애의 그녀를 발견했다.
해맑은 얼굴의 예쁜 소녀였다.
“다리만 고칠 수 있다면…….”
육여사는 그녀의 손을 잡아 용기를 잃지 말도록 격려했고,
고개 숙인 그녀 얼굴에선 하염없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육여사는 상경하자마자 국립의료원에 교섭을 하고 그녀를 올라오도록 했다.
마침내 수술을 받게 되었다는 소식에 그녀의 부모는 이제 죽어도 한이 없다고 했다.
그런데 그보다 더 꿈만 같은 일이 일어났다.
그녀는 두 차례 수술을 받아도 정상적 보행이 어려워 보이는 중증 장애였는데
한번의 수술이 끝나자 거짓말처럼 걸을 수가 있게 된 것이었다.
육여사가 청와대에서 전명희양을 만나고 있다. 1967-06-22 국가기록원
그후 4년이 흘러 대전에서 만난 그녀는 보랏빛 원피스 차림의 아리따운 여성으로 변해 있었다.
육여사가 대전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감사의 인사를 하러 아버지와 함께 유세장 뒷문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늘씬한 아가씨인 줄 몰랐네. 정말 아름답구나”
육여사는 그녀의 몸을 아래위로 연신 훑어보며 감탄해 마지않았다.
그녀의 사연을 알게 된 사람들이 더욱 육여사 앞으로 몰려들어 유세장 뒷문 앞이
매우 혼잡했다. 유세장에 동행했던 한 여류시인은 인파에 부대껴 손을 다치고
안경알이 깨지는 수난을 겪으면서도 대통령 부인과 그녀의 재회를 보며
눈시울이 뜨겁고 가슴 벅찬 순간이었다고 술회했다.
(1971년 4월12일 주간여성)
육영수 여사가 생전에 얼마나 많은 불우 이웃들을 만났는지는 자세히 알 길이 없다.
박정희 대통령도 부인 묘소에 찾아오는 시각장애인, 지체장애 소년, 음성 나환자,
그리고 꼬부랑 시골 할머니와, 갓 쓰고 수염 기른 할아버지들을 보면서
“저 많은 사람들을 언제 만나고 다녔는지 모르겠다”며
부인의 생전 행적을 더듬을 뿐이었다.
육여사 서거후, 따님 박근혜는 어머니의 조문 편지가
너무 많이 와 제대로 답장을 못했다고 말했다.
대부분 서민층에서 보내온 편지였고 그중에서도 7할이 부녀자들이었다고 한다.
조문 편지를 보내온 사람들 중에는 고인을 생전에 한번도 본 일이 없는 사람들도
많이 있고, 또 편지를 읽노라면 “그 사람이 이런 일도 했나?”하고 몰랐던 일을
새삼 깨닫곤 한다고 박대통령은 말했다.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세태는 무심히 메말라가는데,
왜 사람들은 육여사의 영상을 자꾸만 찾아내려 하는 것일까.
대체 인간 육영수는 사람들 가슴에 어떤 영상으로 그려져 있는 것일까.
육여사는 최후의 구원이었다.
세상이 너무 어둡고 사방이 꽉 막혀 도저히 헤어날 길이 없을 때
마지막으로 구원을 청할 수 있는 사람이 육여사였다.
사람들은 그렇게 믿었다. 유일한 사람이라는 믿음이 강했다.
육여사의 손길이 세상 구석구석의 그늘을 다 지울 수는 없는 일이었지만, 사람들은 눈물과 불행을 어깨동무하고 험한 세상 굽이길을 함께 넘어가는 육여사를 보면서 힘과 용기를 얻었다.
“좌절하지 말고 굳세게 살아야지”
입술을 깨무는 모진 결심에는 뜨거운 사랑이 있고, 가슴이 녹아 흐르는 눈물이 있고,
바위처럼 굳은 믿음이 있었다.
지금, 사람들은 육여사의 영상을 따님 박근혜에게서 찾으려 하고 있다.
불우 이웃을 보듬던 살가운 손길의 육여사 영상이 박근혜의 정치적 자산이라고도 말을 한다.
서민층에서 박근혜 지지가 가장 높다는 여론조사를 봐도 그렇다.
분명, 박근혜는 서민과 가장 가까이 위치하고 있다.
도처의 무너진 삶 앞에 그가 있고, 보이지 않는 눈물과 한숨 속에 그가 있다.
박근혜에 대한 믿음도 있을 것이고, 믿고자 하는 뜨거운 열망도 있을 것이다.
박근혜가 놓쳐서는 안되는 것이 있다.
막막한 사람들의 간절한 매달림이다.
벼랑에 선 사람들의 아득함이다. 놓치지 말고 부둥켜안아야 한다.
세상살이를 포기하고 싶은 사람들의 끔찍한 불행만은 제발 막아달라는 애끓는 호소와,
사랑하는 가족과 내 이웃이 따뜻이 더불어 살아가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 달라는 소망을 그는 부둥켜안아야 한다.
그래서 박근혜의 어깨 위 하늘은 크고, 그가 걸어갈 광야는 멀다
출처 : 프리존 박근혜지지방
첫댓글 세상에서 바람을 거슬러 올라갈 수있는 것은 덕의 향기뿐입니다. 님의 향기에 눈물을 흘리며 참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