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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자유게시판 스크랩 <도희야> 아파본 자만이 알아보는 상처
플로방스 추천 0 조회 149 14.05.22 21:1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최근 언론의 현주소에 대한 의문까지 품게 한 일련의 사건들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떠올렸을 화두가 아마도 '공감능력'일 것이다. 굳이 비슷한 상황을 겪어봐야만 아는 게 아니더라도, 인간이라면 응당 느껴야 마땅할 법한 공감대도 잃어버린 것 같은 행태들이 곳곳에서 눈에 띄면서 국민들을 분노케 했다. 진심어린 공감대가 없는 그 행태들에 국민들이 분노하는 건, 그것이 더 큰 재앙을 초래할 수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공감어린 이해는 치유와 개선으로 나아갈 수 있지만, 영혼 없는 기계적 끄덕임은 면피할 길만 찾기에 급급한 것이다. 가만 생각해 보면, 어쩌면 책임을 피하기 위해 있던 공감대도 일부러 버리는 건지도 모르겠다.

 

이런 상황에서 비슷한 아픔을 겪어 본 이들이 타인의 것을 가장 잘 이해하고, 그 결과 세상이 '기왕 이렇게 된 거' 하면서 그러한 아파본 이들에게 책임까지 떠넘기는 풍경은 몹시 불합리하고도 서글프다. 아픔을 안은 이들은 그들끼리 고립시키고, 그 아픔을 겪어 보지 않은 사람들은 제3자가 된 듯 모른 척하는 이 상황에서, '공감능력'이 설 자리는 점점 좁아지고 있다. 인간이기에 지닐 수 있는 중요한 미덕인데, 그걸 놓아버리는 이들이 점점 늘어나는 것이다. 영화 <도희야>의 카메라가 향한 어느 섬마을이 이와 같은 떠넘김과 모른 척의 결과로 인해 아픔을 품은 이들만이 고립된 곳이다. 남의 아픔에 공감 못하거나 자신의 아픔을 점점 무감각하게 받아들이는 이 마을의 모습은 한국 사회의 단면을 관통하는 저릿한 광경이다. 그런데 <도희야>는 풍부한 이야기와 뛰어난 연기, 끈질긴 긴장감으로 이 저릿한 현실을 관객이 도저히 거부할 수 없게 만든다.

 

 

경찰대를 졸업해 젊은 나이에 파출소장 직함을 달게 된 영남(배두나)이 어쩐 일인지 한창 잘 나갈 때 여수의 어느 외딴 섬마을로 전출을 오게 된다. 젊은이들은 거의 다 도시로 떠나고 나이 든 주민들만이 있는 이 조용한 마을에서 영남은 수양하듯 한동안 조용한 일상을 보낼 참이다. 그러나 어느날 마을에서 만난 한 소녀로 인해 그런 결심은 금세 깨지고 만다. 처음엔 지저분한 모습으로 바깥에 홀로 나와 생각에 잠겨 있는지 멍하게 있던 소녀. 어떤 날엔 학교 또래 친구들로부터 괴롭힘을 당하고 있던 소녀. 그러다 아버지로 보이는 한 남자로부터 무지막지한 폭행을 당하고 있는 소녀를 목격하고, 영남은 소녀를 구해준다. 도희(김새론)라는 이름의 그 소녀는 영남이 엄마처럼 느껴지는지 영남을 따르고 그녀와 한시라도 더 오래 함께 있고 싶어한다. 아버지 용하(송새벽)의 거듭되는 학대에 보다 못한 영남은 방학동안 도희를 자신의 집에서 머물게 하기로 한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한 시기에 숨기고 싶어 했던 영남의 비밀이 드러나면서, 영남은 더이상 무작정 도희를 지킬 수는 없는 상황에 놓인다. 비밀에 두려워 하는 영남과 그녀의 애정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갈구하는 도희, 그리고 영남의 비밀을 알게 된 용하 사이에서 상황은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이창동 감독이 제작한 <도희야>는 그래서인지 이창동 감독 영화와 유사한 색깔이 느껴진다. 단촐하고 소소하게 시작한 이야기가 어떤 사건을 기점으로 걷잡을 수 없는 격랑 속으로 휘말려 들어가는 분위기가 그렇다. 이창동 감독의 <밀양>, <시> 등이 그 예일 것이다. 다만 <도희야>는 인간의 본성과 흔들리는 심리 그 밑바닥까지 집요하게 파고 들어가는 철학적 분위기보다는 대중적 분위기에 더 무게를 실은 느낌이다. 감정을 좀처럼 뱉어내지 않아서 속마음을 헤아리기 쉽지 않은 인물들, 럭비공처럼 예상을 벗어나며 전개되는 사건은 미스터리 스릴러의 느낌을 고스란히 풍긴다. 그런데 섬마을, 여자 파출소장, 학대받는 소녀라는 소규모의 설정에서 출발한 영화가 이내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전개로 이야기를 휘몰아치는 힘이 상당히 강하다. 인물 배치가 그리 많지 않음에도, 심리적으로 편안한 인물이 없다 보니 누가 누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예측하기가 쉽지 않아서 관객은 고요한 분위기의 이 영화를 내내 가슴 졸이며 보게 된다. 조용하지만 발을 딛은 사람을 언제든 빨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살얼음을 걷는 기분이다.

 

 

누구 하나 빠지지 않는 배우들의 연기는 영화의 이와 같은 '광기를 품은 고요'를 전달하는 일등공신이다. 세 주연배우의 연기에 대해 결론부터 말한다면 <도희야>는 이들 모두에게 복이 될 영화다. 할리우드에서의 화려한 분장과 캐릭터에서 벗어나고자 이 영화를 선택했다는 배두나는 고유의 캐릭터와 현실의 공기를 고루 버무려 영남이라는 인물에게 입혔다. 파출소장이라는 직위와 책임에 걸맞은 단호하고도 명료한 태도를 보이다가도 도희 앞에서는 큰언니 또는 엄마처럼 부드럽고 따뜻한 모습을 보이고, 자신의 비밀이 들킨 순간 불안하고 위태로운 심리를 숨기지 못하는 입체적인 인물의 성격을, 감정을 폭발시키긴커녕 억누르고 참는 가운데에서도 깔끔하게 소화한다. 무던하고 침착한 척 하지만 속에서는 태풍이 불고 있는 영남이라는 인물은 배두나에게 무척이나 적역이고, 배두나는 이 영남 역이 제공한 풍부한 내면 연기의 기회를 훌륭히 활용했다. 한편 도희를 학대하는 의붓아버지 용하 역의 송새벽은 한동안의 필모그래피로 인해 피어났던 우려를 이 영화 한 편으로 말끔하게 불식시킨다. 사실 그가 처음 스크린에서 주목받게 된 것이 <마더>, <방자전>에서 보여준 '폭력과 유머의 위태로운 공존'이었는데, 이후 그의 영화 속 역할은 유머로만 치중된 점이 컸다. 그러나 이 <도희야>에 이르러 송새벽은 다시금 그가 처음 주목받게 했던 광기 어린 에너지를 원없이 내뿜으며 명쾌하게 비상한다. 특유의 들뜬 말투와 폭력적인 행동이 어우러지면서, 그가 연기하는 용하는 '학대하는 의붓아버지'라는 인물의 전형성에서 한 발짝 벗어나 웃어야 할지 두려워 해야 할지 알 수 없는 개성을 부여받았다.

 

그리고 이 베테랑 배우들 앞에 김새론이 있다. 스크린에서는 데뷔작인 <여행자>와 최근작 <만신>을 제외하면 줄곧 19금 영화에만 출연할 만큼 어린 나이에 만만치 않은 역할들을 소화해 온 김새론은 <도희야>에 이르러 그동안 무르익어 왔던 가능성을 한껏 폭발시킨다. 유독 전형성에서 벗어난 아역 캐릭터를 맡아왔지만 이번에 <도희야>에서 그녀가 연기하는 '도희'는 그 정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도희는 아이와 어른, 선과 악, 피해자와 가해자의 경계를 허물어뜨리는, 배두나 말마따나 한국 영화 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여성 캐릭터다. (연령대까지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다) 더구나 다소 전형적인, 학대로 인해 과묵하고 위축되어 있지만 천진함을 내포하고 있는 첫 인상에서 시작해, 점차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성격과 행동으로 불안과 두려움마저 조성하며 갈수록 휘몰아치는 완급 조절 능력이 상당하다. 어떤 부분에서는 <아저씨>, <이웃사람> 등 여러 출연작에서 그녀의 캐릭터에 대한 스테레오타입으로 굳혀지는 듯 했던 '약하고 어린 피해자'의 이미지를 통렬하게 비틀기까지 하는 듯 영리하다. 이 영화에서만도 그녀가 보여주는 얼굴이 몇 가지인지 손가락을 접어가며 세어 봐야 할 정도다. 아직 성인이 되려면 5년여를 더 기다려야 하지만, 연기의 내공만큼은 이미 웬만한 성인 배우의 수준을 넘어섰다. 배두나, 송새벽 같은 베테랑 배우들이 기꺼이 그녀의 조력자가 되는 것이 섭섭하기는커녕 대단히 자랑스럽겠구나 싶을 정도다. 정서적으로 매우 힘든 역할이라도 연기가 끝나면 얼마든지 그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는 정신력만 든든히 갖춰져 있다면, 그녀의 프로필은 이대로라면 동세대 배우들 중 거칠 것이 없을 것이다.

 

 

<도희야>의 이야기는 방사형의 구조를 띠고 있다. 앞서 얘기했듯 조촐한 인물 구도에서 출발하지만, 그 인물들과 그들이 활동하는 배경이 모두 저마다의 비밀을 품고 있기에 이야기는 뒤로 갈수록 대단히 풍성해진다. 그리고 그 비밀들로 인해 이야기는 예측하기 어려운 방향으로 흘러간다. 누군가는 피해자고, 누군가는 가해자고, 누군가는 보호자가 될 것이다라는 명백한 예상은 뒤로 갈수록 자신이 없어지게 된다. 타인이 갖고 있는 비밀만큼 자신 또한 무거운 비밀을 안고 있다면, 사람은 누구라도 관계 형성에 있어 복잡하고 혼란스런 계산에 빠지게 된다. 덮어놓고 지켜주거나 덮어놓고 보호받을 수 있는 처지가 아니게 된다는 뜻이다. 그 결과 영화가 형성하는 관계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시한폭탄처럼 아슬아슬하다. 전형적인 보호자와 피보호자 관계에 있는 것 같은 영남과 도희, 전형적인 가해자와 피해자 관계에 있는 것 같은 용하와 도희의 관계도 예외는 아니다. 그 비밀들을 풀어내고, 그로 인한 관계의 변화를 예측해 나가고, 예상치 못한 전개에 놀라게 되는 과정에서 <도희야>는 의외로 음습하고 불안한 미스터리 스릴러 장르극으로서의 재미를 충실하게 전한다. 재미로 볼 영화로 골라도 <도희야>는 손색이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재미있는 영화'로만 받아들이기엔 세상의 아픈 구석을 꽤 힘주어 때리는 경우가 많은 <도희야>는 결과적으로 재미를 넘어 세상의 어두운 면을 응시한다. 그 중에서도 <도희야>가 주목하는 대상은 '소외되고 약한 이들'이다. 이 영화가 마주한 세상은 약한 이들이 강한 이들에 보호받는 이상적이고 정의로운 세상이 아니다. 오히려 약한 이들이 마치 이 사회를 굴러가게 하는 데 걸림돌이 되는 존재인 양 격리시켜 놓은 것만 같은 곳이다. 그렇게 격리된 약자들은 그나마 '제 구실'을 한다고 평가받는 몇몇에 의해 학대와 협박이 반복되는 나날을 살아간다. 이 섬마을에서 약자의 유형은 다양하다. 이주노동자, 아동, 여성, 성소수자까지. 이들을 착취하는 자들은 그들이 각자 지닌 약점들을 무기로 서로가 서로를 섣불리 보호할 수 없게끔 사슬을 채워 놓는다. 이 약자들이 지닌 약점을 구시대적으로 희롱하고 물어뜯는 그들의 행동은 한편으로는 자신들의 손에 있는 기득권을 쉽게 빼앗기지 않으려는 데서 비롯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이렇게 격리된 듯한 섬 안에서 영남과 도희는 한마디로 '약자 중에 약자'다. 영남은 여성이면서도 그녀가 품은 또 다른 비밀로 인해 약자로서의 핸디캡을 이중으로 지니고 있다. 그녀가 보유한 파출소장이란 직함은 마을 구성원들로 하여금 그녀에게 더 매서운 견제의 눈빛을 보내게 한다. 아동이면서도 여성인 도희는 가정 내에서 당하는 무자비한 폭력에도 불구하고, 영남 외에는 고통에 휩싸인 그녀를 받아들일 창구가 존재하지 않는다. 영남은 마치 자신과 같이 스스로 의도한 적 없는, 사람들이 일방적으로 씌워버린 굴레에 힘겨워 하는 도희를 알아보고는 결국 기댈 공간을 마련해 주고 보듬어주게 된다. 팔짱 끼고 지켜볼 뿐인 바깥의 사람들은 절대 알지 못하는, 비슷하게나마 아파본 이만이 알 수 있는 상처를 알아본 것일까. 이 영화가 이상적이고 가족적인 영화라면 그들의 서로를 향한 의지와 사랑은 늘 굳건함을 유지하며 주변 사람들까지 감화시킬 것이다. 그러나 도희의 보호자처럼만 느껴졌던 영남도 실은 그 이전에 '피해자'이고, 그 상처에 여전히 남은 핏자국의 냄새를 맡고 달려드는 하이에나 같은 사람들 앞에 영남은 움츠러들 수 밖에 없게 된다. 위기에 처한 소녀를 지켜주는 보호자이기 이전에 영남은 마찬가지로 상처를 지닌 약자이고, 그 상처는 그녀로 하여금 외부의 위협에 마냥 의연할 수만은 없게 하는 또 다른 부작용을 만든다.

 

이제 중요해지는 건 그들의 선택이다. 섬에는 다양한 형태의 약자들이 있지만 그들이 자신을 옭아매는 고난에 대처하는 방식은 제각기 다르다. 그냥 주저앉아서 마지못해 버텨나가기로 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박차고 일어나 현실을 벗어나기로 결심하는 사람들도 있다. 영남과 도희는 서로를 지켜주는 관계에 들어서면서 후자의 길을 택한다. 그러나 학대의 상처가 충분히 분출되지 못하고 안에서 곪아가고 있는 소녀와, 그런 소녀의 아픔을 지켜보지만 자신의 상처를 간수하기에도 벅찬 듯한 여인의 관계는 불안하다. 본능에 의해 불가피하게 순응하는 것을 거부하고 선택을 결심할 수 있겠지만, 그 갈림길은 극명히 다르다. 누군가는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괴물이 되기를 결심할지도 모르겠지만, 다른 누군가는 외부로부터의 상처가 낳은 괴물이 본래의 순수함마저 잡아먹지 않도록 지켜줘야 할 책임감을 느끼게 될지도 모른다. 약자가 자신의 아픔을 마음대로 털어놓을 수 없고, 강자가 있는 힘껏 약자를 지켜줄 수 없게 하는 짐승 같은 세상. 그 속에서 <도희야>는 다행히도 아파봤기에 서로의 상처를 알아보는 도희와 영남의 관계를 통해 일말의 희망, 허나 안타까운 희망을 제시한다. 때로 세상에는 그만큼의 아픔을 겪어 본 이들만이 치유할 수 있는 생채기가 있다는 사실 말이다.

 

 

아직 어른이 채 되지 못한 이들이 겪는 고통의 끝에, 그래도 미안함과 책임감을 등에 업고 다만 한줌의 희망이라도 던지려는 이야기들이 최근 한국 영화계에서 여럿 보여서 반갑다. 비탄의 현실을 똑바로 지켜보게 하는 것도 영화가 해야 할 일이지만, 그렇게 마냥 쓰라리게 지켜보게만 하는 건 어느덧 도리가 아니라 무책임한 방임이 될지도 모른다. <도희야>가 차마 아이가 감당하지 못할 서릿발 같은 현실을 목도하게 한 끝에, 그걸 지켜보는 어른의 선택을 전하는 것은 그런 점에서 더 큰 의미가 있다. 벼랑 끝에 선 듯한 아이의 위태로운 행보를 조마조마하게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어느덧 뒷짐지고 구경하는 '어느 외부인'이 아닌, 지나칠 수 없어 뒤에서 아이를 불러 세우는 '보호자'가 되어 있음을 느낀다. <도희야>는 일단 재미부터가 있다. 그러나 그 재미를 지나 귓가에 닿는 것은 아픔에 대한 이해와 포용을 마음 한가득 담아 세상의 상처 입은 이들을 향해 부르는, '도희야'라는 온기 깃든 메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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