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난다말라비왐사 큰스님 가르침>
위뿔라냐니 스님 옮김
https://cafe.daum.net/DHAMMADIPAKOREA/DTZD/2
Ⅱ
마하다나
(고귀한 보시)
1. 보시하는 물질과 보시하는 의도
붇다께서는 ‘앙굿따라 니까야’에 있는 ‘아비산다 숟따’에서 ‘마하다나’란 ‘위대한 보시, 고귀한 보시, 무궁한 보시’라고 설하셨습니다. 또 붇다께서는 누구나 지켜야 할 5계, 즉 자신이 습관 들여야 할 계율 중의 하나인 5계도 ‘마하다나’라고 부르셨습니다. 이는 다른 경전에서는 언급되지 않는 ‘마하다나’에 대한 새로운 의미입니다.
붇다께서는 선업을 설명하실 때 보시 선업, 지키고 실천해야 할 지계 선업, 증장시켜야 할 수행 선업, 이렇게 세 가지로 나누어 설하셨습니다. 이때 각 선업이 하는 역할이 다릅니다.
‘다나(보시)’란 자신에게 속한 무언가를 누군가에게 바침 또는 버림을 말합니다. 이는 일반적으로는 자기 물건을 타인에게 주는 것을 뜻하지만, 때에 따라서는 보시의 원인이 되는 의도를 뜻하기도 합니다. ‘왇투다나’는 ‘보시할 물질(재물)’ 혹은 ‘물질 보시’를 말합니다. ‘쩨따나다나’는 ‘보시하고자 하는 의도’ 혹은 ‘의도 보시’를 말합니다.
보시와 관련한 빠알리 두 문장을 살펴보겠습니다. 1) ‘다낭 데띠’는 ‘보시하다’라는 의미입니다. 이 문장에서의 보시는 물질을 주는 것이지 의도를 주는 것이 아닙니다. ‘다낭 : 보시거리인 물질을, 데띠 : 주다’라고 번역합니다. 2) ‘다네나 보가’는 ‘다네나 : 보시로 인해, 보가 : 재물이 풍족하다’라는 의미입니다. 이 문장에서의 보시는 물질인 재산이 아니라 ‘쩨따나(의도)’가 됩니다.
우리는 보시를 할 때 보시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어서 보시할 거리인 물질을 보시하게 됩니다. 이때 보시의 결과에 영향을 주는 것은 의도(쩨따나)이지 물질이 아닙니다. 하지만 또 물질 없이 의도만으로 결과를 가져오지는 못합니다. 왜냐하면 보시할 거리인 물질에 의지하여 보시하고자 하는 의도가 일어나지 않습니까? 그러니 이 두 가지가 함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보시의 가치, 즉 보시의 결과가 있게 됩니다. 보시 의도(다나 쩨따나)가 결과를 가져옵니다.
그러나 보시할 거리인 물질에 의지해서 보시하고 싶은 의도도 더불어 풍성해집니다. 그리고 그러한 의도가 왕성할수록 보시 선업의 결과인 부유함 역시 크게 돌아옵니다. 그러니 만약 재물과 의도 이 두 가지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중요하냐고 묻는다면 두 가지 다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굳이 보다 더 중요한 것을 말하라고 한다면, ‘쩨따나(의도)’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웰라마 숟따’에서는 ‘물건이 좋은 것인지 천한 것인지가 중요한 게 아니다. 보시물이 많든 적든 그것도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바로 의도이다’라고 합니다.
그러니 법을 사랑하는 여기 모이신 청중들은 무언가를 줄 때마다 이 보시 선업을 짓는 의도가 풍성해지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이 의도가 무엇으로 풍요로워질 수 있는가?
첫째, 보시하는 재물로 인해서 그 의도가 풍성해집니다. 보시할 재물이 고귀해지면 의도 역시 더 강력해집니다.
둘째, 보시 받는 존재로 인해서도 의도가 풍요로워집니다. 보시 받는 존재가 지계와 사마디로 채워진 분 또는 상가 대중이면 보시자 마음의 존경심으로 인해 보시하고자 하는 의도가 더더욱 왕성해집니다.
보시할 물질과 보시 받을 존재, 이 두 가지를 원인으로 의도가 풍성해지고 활력을 띕니다. 즉 의도의 풍요로움과 강력함을 위해서는 보시할 물건도 중요하고, 보시 받을 존재 역시 중요합니다.
다시 한번 정리합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의도(쩨따나)입니다. 보시하는 물질이 아무리 훌륭해도 의도가 천하면 결과가 볼품없습니다. 그러니 결과를 만드는 데 정말 중요한 것은 의도이지, 보시한 재물이 아닙니다. 선업을 지을 때 마음씀씀이가 정말 중요한 핵심입니다. ‘마음 쓸 줄 알면 고귀하다’는 속담이 있지 않습니까?
하나 더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보시하는 대부분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받으려 함’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선업을 지으려고 보시하지만 거기에 ‘얻고자 함’이 내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보시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보시를 받는 존재를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 깨끗한 의도를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염두에 두지 않아야합니다. 보시 받는 존재만을 고려해야 합니다. 하지만 세간 대부분의 보시는 보시하는 존재를 위해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보십시다. 불사를 한다면 절 보시자로 대우받고 싶어 합니다. 대중 안에서 돋보이고 싶은 마음도 범부라면 있을 법합니다. 무언가 하나 보시하면서, 보시자로서 유명세를 얻고 싶습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을 생각하고 하는 보시는 ‘사고 파는’ 장사꾼의 심산입니다. 그러니 이렇게 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보시자는 ‘이 절에서 지내는 모든 존재들, 또는 상가들이 행복하기를’ 하고 마음을 써야 합니다. 다시 말해, 보시 받는 존재의 이로움을 위해 하는 보시가 매우 고귀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지금 보시하면서 자신의 서원을 세우지 말라는 뜻은 아닙니다. 보시 받는 존재의 이로움을 위해 보시한 뒤에 자신의 서원을 상기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시하면 그 선업이 저절로 결과를 가져올 것입니다. 이 선업으로 결과를 얻고 싶은지 자신의 서원을 상기하는 것, 이것을 ‘기원한다’고 합니다.
보시한다면 대중을 위해 해야 합니다. 보시 받는 존재의 이로움을 우선으로 해야 합니다. 보시받는 존재에게 자애의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그런 의도가 있어야 하고, 연민을 가져야 합니다. 예를 들어 가난한 존재들에게 유산을 준다면, ‘오, 그에게 먹을거리가 없으니, 먹게 되기를’이라고 마음을 써야 합니다. ‘오늘 내가 그에게 줬으니 언젠가는 그가 내게 무언가를 해 주겠지’라고 기대한다면 계산이 되어 버립니다. 보시란 주고 받고가 되어선 안 됩니다.
보시에는 ‘예경 올린다’는 것과 ‘나눈다’는 것,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예경 올린다는 것은 자신보다 고귀한 분, 지계와 사마디가 있는 존재들을 위해서 절을 하며 존경을 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족한 자에게는 나눕니다. 무엇으로 나눕니까? 먹을 것이 없으면 먹을 것을 주고, 입을 것이 없으면 입을 것을 줍니다. 이것이 나누는 것입니다. 이런 나눔은 보시하는 자기 자신을 위해 행해서는 안 되고 오직 받는 존재들을 위해 이루어져야 합니다.
2. 법 보시
보시를 할 때 보시 받는 존재가 ‘무엇’을 얻는가를 가늠해서 보시의 크기와 고귀함을 결정할 수 있습니다. 붇다께서는 ‘삽바다낭 담마다나 지나띠(법 보시가 모든 보시를 이긴다)’라고 설하셨습니다.
그러면 법보시가 왜 보시 중에서 가장 귀한 보시가 되는가? 생각해 봅시다. 예를 들어, 물건 하나를 보시하면 이 물건을 얻는 존재에게 이것이 얼마나 이로움을 주는가를 가늠해보고 가치 있다 혹은 가치 없다. 를 판단할 수 있습니다. 담마다나(법보시)도 마찬가지입니다. 담마(법)를 보시함으로써 이 담마(법)를 보시 받는 존재에게 얼마나 좋은 결과를 줄 수 있는지를 보고 판단해야 합니다. 보시하는 존재가 아니라 보시 받는 존재를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밥을 보시합니다. 밥이란 모두 알다시피 오전에 먹었지만, 오후가 되면 또 먹어야 합니다. 미얀마 사람들은 밥의 수명이 7일이라고 말하곤 합니다. 이것은 한 끼 식사로 7일 간은 죽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하루에 밥을 몇 번 먹습니까? 하루 한 끼만으로는 버티기 힘듭니다. 최소한 두 끼는 먹습니다. 그래서 밥 한 끼의 보살핌이 한나절 간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밥 한 끼 보시하면 그 사람에게 한나절만 이로움을 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밥이 그 사람에게 이로움을 주는 기간(양)이 몹시 적습니다. 옷을 보시하는 것을 봅시다. 옷이 주는 이로움은 밥보다는 더 깁니다. 하지만 이것도 그다지 길게 이로움을 주진 않습니다. 고작 한 달, 두 달, 석 달입니다. 하지만 불사를 하면 수십 년 이로움을 줍니다. 그래서 불사를 보다 더 귀한 보시라고 하는 것입니다. 보시 받는 존재에게 이로움을 주는 기간과 정도가 더 크고 강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담마다나(법보시)’는 보시 받는 존재에게 어떤 이로움을 얼마나 줄 수 있는지 봅시다. 앗사지 존자께서 사리뿓따 존자에게(사리뿓따 존자는 그 당시 우빠띳사라는 이름의 외도였습니다) 법을 설하셨습니다. ‘담마다나(법보시)’를 하신 것입니다.
‘에 담마-헤뚜빠바와-.
떼상 헤뚱 따타가또 아-하’
(원인으로 인해 생겨나는 것(법)들, 결과 되는 것(법)들의 원인 되는 것(법)들을 붇다께
서 설하셨다)
이와 같이 법보시를 했습니다. 이 한 줄의 게송을 들은 외도 우빠띳사는 얼마만큼의 이로움을 얻었느냐 하면, 수다원이 되어 버립니다. 자! 생각해 봅시다, 이 법을 듣고 우빠띳사 이교도가 수다원이 된 것은 적은 이익입니까? 많은 이익입니까? 보시 받은 존재가 얻은 이로움이 어마어마합니다. 참으로 고귀한 보시입니다. 그래서 ‘삽바다낭 담마다나 지나띠(법보시가 모든 보시를 이긴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지금 이 법문에서는 ‘마하다나’라는 이름으로 설하셨습니다. ‘마하’라는 단어에는 ‘위대한, 고귀한, 무궁한’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즉 ‘위대한 보시, 고귀한 보시, 무궁한 보시’를 의미합니다.
3. 5계
‘5계를 지킴’은 ‘고귀한 보시’입니다. 붇다께서 앙굿따라 니까야에 실린 ‘아비산다 숟따’에서 ‘실라(지계)’가 ‘마하다나(고귀한 보시)’라고 설하셨습니다. 또한 이 경에서 ‘마하다나’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셨습니다.
1. 악간냐 : 원시, 매우 옛날부터,
아주 아주 처음부터
2. 랃다냐 :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햇수
3. 완사냐 : 진정 착하고 의로운 이들의
전통, 선인과 의인들의 의무
4. 뽀라냐 : 참으로 전통적인 것
이러한 특성을 가진 ‘마하다나’를 지혜 있는 이라면 그 누구도 훼손시키지 않는다고 합니다. 매우 원시적 부터 있었고(세상이 처음 열릴 때 함께 생겨났고), 무구한 세월 동안 전해 내려 온 전통인 이 관습을 누구도 감히 업신여기지 못한다고 합니다.
우리들 불자들의 입장에서는 삼보에 귀의함과 더불어 5계를 받아 지키는 것은 당연한 것이 되었습니다. 당연한 것이라서 가끔은 그 고귀한 가치를 잊어버리곤 합니다. 의미심장하게 숙고해보지 않아서 당연해져 버리면 자신을 위해 전혀 특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지키고자 하는 의도도 흐릿해집니다. 섬세할 리 없습니다. 그러니 그렇게 되지 않도록 우리가 5계를 받을 때마다, ‘위대한 보시를 하고 있는 중이다’라고 스스로 일깨워서 그 의지에 힘을 북돋워 주어야 합니다.
1) 살생을 피하겠습니다.
(빠나띠빠따 웨라마니 식카빠당 사마디야미)
우리는 자기 자신부터 시작해 세계 전체를 보아야 합니다. 나 한 명만 보지 말고 모두를 다 아울러서 생각하십시오. 퍼센트로 보십시다. 세계의 인구가 77억이 넘습니다. 이 중에서 다른 생명을 죽이는 것을 삼가는 인구는 아주 조금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하는 일이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지 나옵니다. 77억이 넘는, 인구 가운데서 ‘빠나띠빠따(다른 생명을 죽임)’를 피하는 존재가 1억조차도 안 될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빠나띠빠따 웨라마니 식카빠당 사마디야미(살생을 피하겠습니다)’라고 계를 받고서는 가까이에 있는 모기나 파리를 가볍게 ‘탁’ 때려 죽여 버립니다.
어떤 이들은 모기를 안 죽이면 말라리아나 뎅기열에 걸릴 거라고 주장합니다. 생각해 봅시다. 모기를 죽이면 뎅기열이나 말라리아에 안 걸립니까? 다른 원인으로 걸릴 수도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인간의 건강을 위해서 사람들에게 해로운 동물들을 죽여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기적인 발상일 뿐입니다. 인간들에게는 이기적인 생각이 뼛속 깊이 박혀 있습니다. 나만 안전하면 된다는 이기적인 생각일 뿐입니다. 짐승이나 해충이 인간에게 해롭다고 여겨 두려운 마음으로 짐승들을 죽인다면 이것은 분명 잘못 판단한 것입니다.
병이란 동물로부터 오지 않고 다른 경로를 통해서도 생기기 마련입니다. 생명체들을 죽이는 방법으로만 해결하려 해선 안 됩니다. 다른 방법의 해결책은 없는지 어디 한번 찾아봅시다. 모기를 죽이는 대신 모기장 안에서 자면 됩니다. 모기가 서식할 만한 곳을 미리 깨끗이 청소해 두는 방법도 있지 않습니까? 대체할 수 있는 방법들이 많이 있습니다. 죽이지 않고 개선할 수 있는 방법이 많음에도 하지 않고 살다가, 산란한 뒤 성충이 된 뒤에 죽인다면 살생업이 되어 버립니다.
이렇게 ‘빠나띠빠따(살생업)’가 되면 이 죽인 사람은 모기들에게 위협적인 존재가 됩니다. 그는 모기가 사람들에게 해롭다고 생각하고 모기는 그 사람이 위험을 주고 있다고 여기고 있으니 이는 서로서로 죽이고 있는 형국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처럼 자신의 안전을 위해 다른 존재를 죽이는 행위가 무엇과 같으냐 하면 바로 악인들의 행태와 같습니다. 내게 위험이 될까 봐 내가 먼저 제거해 버리는 것과 마찬가지 아닙니까? 다를 게 없습니다. 기본 마음 씀이 같은 것입니다. 이런 마음 씀이 점점 더 커지면 사람까지도 내게 위험스럽다 싶으면 없애도 된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니 ‘빠나띠빠따(살생업)’를 피해야 한다는 것에서 점점 더 멀어지게 됩니다. 이렇듯 5계 중에서 살생업을 삼가는 사람은 매우 귀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붇다께서는 ‘빠나띠빠또 빅카웨 아세위또 바훌리까또(빅쿠들이여, 살생을 피함을 증장시키라)’라고 하셨습니다. 살생하려는 의도를 처음 시작하고 반복해서 거듭거듭 행한다면 이 불선업이 ‘니라야상왇따니꼬(지옥에 나게 한다)’ : ‘아빠야상왇따니꼬(4악도에 태어나게 한다)’ : ‘띠랏차나상왇따니꼬(축생에 이르도록 밀어 넣는다)’라고 설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살생 의도를 가지고 다른 생명체를 죽인 결과로 인해 천상에 갈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잘못된 견해로 뒤덮인 무지한 종교인들은 ‘중생을 죽여도 천상에 태어난다, 천국에 이른다’라고 믿습니다. 이것은 두 겹의 무지로 덮인 것입니다. 첫 번째 잘못은 그릇된 시각이고, 두 번째 잘못은 그릇된 행위입니다. 이렇게 잘못이 두 가지라면 결과도 두 배로 받아야겠지요? 붇다께서는 살생을 거듭 반복해서 행한 결과를 받을 때는 지옥, 아수라, 아귀, 축생이라는 4악도에 떨어진다고 하십니다. 가장 가벼운 과보를 받는 경우가 ‘압빠유까상왇따니꼬’랍니다. 태어나는 생에서 단명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살생 의도의 과보입니다. 고귀한 성인들은 다른 생명을 죽이지 않습니다.
고귀한 성인에게나 평범한 범부에게나 두 종류의 선택지가 주어집니다. 그런데 성인들의 선택과 우리 범부들의 선택은 매우 다릅니다. 봅시다. 성인들은 ‘법(담마)’과 재물 중에서 무엇을 선택하느냐 하면 법(담마)을 선택합니다. 재물은 포기합니다. 범부들은 무엇을 선택하느냐 하면 재물을 선택합니다. 법(담마)은 있어도 되고, 없어도 상관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세상에 선택지들이 있습니다. 보십시다. 보통 사람들의 입장에서 말하겠습니다. 목숨과 재물 이 두 가지 선택지가 있습니다. 무엇을 택하겠습니까? 재물을 잃겠습니까? 목숨을 버리겠습니까? 이런 경우에 대부분 재물을 버립니다. 죽음을 택하진 않습니다. 생명과 사지 중에서 무엇을 택하느냐 하면, 목숨을 건지기 위해서 사지가 잘리는 건 감내합니다. 목숨을 택합니다. 그런데 성인들에게 법과 목숨 중에서 무엇을 선택할 거냐고 물으면 그 분들의 대답은 법입니다. 목숨을 원치 않는다고 합니다. 범부들은 목숨이 우선입니다. 법을 우위에 두지 않습니다. 성인들은 자신의 목숨이 걸렸어도 다른 생명을 죽이지 않습니다. 자신만 죽습니다. 이것은 무엇에 더 비중을 두는 선택인가 하면, 자신의 목숨보다 지계를 더 중시한 가치관의 선택입니다. 잣대가 다른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성인들과 같은 결정을 내리지 않습니다. 목숨을 포기하기는커녕 와서 건드리는 것조차 참으려 하지 않습니다. 내게 위험하다 싶은 존재는 제거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생명을 죽인다고 칩시다. 다른 생명을 죽이게 되면 살생 행위로 인해 살생업을 범한 것이 됩니다. 이 업을 저지른 결과로 이 생에서 죽은 뒤 살생업의 과보로 인해 다음 생에 지옥에 떨어질 수도 있고 짐승으로 태어날 수도 있습니다. 인간으로 태어나더라도 세세생생 수명이 짧을 것이고 그 밖의 다른 나쁜 결과들을 받을 것입니다. 범부들은 이러한 것들을 보지 못해서 법을 택하지 않고 가치 없는 목숨만을 선택합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살생을 피하는 존재와 살생을 범하는 존재 중에서 살생을 피하는 존재는 극소수이고, 살생을 행하는 존재가 대다수인 것입니다. 붇다께서는 ‘성인이 된 제자’들은 생명 죽임을 피한다고 하셨습니다. 이 성인분들이 살생을 피하는 극소수에 포함됩니다.
이렇게 ‘살생을 삼가함’이 보시의 관점에서 보면 매우 고귀한 보시가 됩니다. 그렇다면 살생을 피하는 것이 왜 ‘고귀한 보시(마하다나)’가 되는지 봅시다. 우리 주변에 생명체들이 아주 많이 있습니다. 인간만 보더라도 77억 넘게 있습니다. 비인간 생명체는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이렇게 셀 수 없이 많은 생명들을 내 손으로 절대 죽이지 않겠다는 의지는 얼핏 보기에는 하찮은 듯하지만,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중생에게 내가 ‘아바양 데띠(위험 없음)’를 베풂이 됩니다. 이것은 크나큰 선업입니다. 모든 존재들에게 위험을 끼치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그 순간부터, 전 세계 80억 정도 되는 인간들에게 위험을 끼치지 않게 됩니다. 그렇다면 80억 정도 되는 인간들을 안전지대로 보내준 게 되지 않습니까? 이 80억 정도 되는 인간들이 나라는 적으로 인해 고통에 빠질 일이 절대 없다면, 적으로부터 멀어지도록 보호해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아웨랑 데띠(적이 없음, 적으로부터 멀어짐)’를 주었다고 합니다. 또한 ‘아뱌빳장 데띠’를 주었습니다. 80억 정도 되는 인간 중생들을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도록’ 해 준 것과 같은 것이 됩니다.
자-, 생각해 봅시다. 살생을 하지 않고 피하는 것이 이 정도까지 은혜로운 결과를 가져옵니다. 그 한계가 없습니다. 여기까지는 인간만 언급한 것입니다. 모기의 개체수를 보자면, 80억뿐이겠습니까? 개미의 개체 수를 보자면, 80억이 넘습니다. 하나의 개미굴에 있는 개미들만 해도 60억이 넘을 것입니다. 그러니 헤아릴 수 없는 중생들에게 내가 위험 없음을 베풀어 준 것입니다. 적으로부터 멀어지도록 해 준 것입니다. 고통 없음을 준 것입니다. 그래서 ‘마하다나(위대한 보시)’인 겁니다.
이러해서 붇다께서는 “내가 중생을 죽이지 않고, 살생을 피하는 계를 지킴으로써 모든 생명들을 안전지대로 이르게 해 준 것이 되므로 이 ‘빠나띠빠따’를 피하겠다는 자신의 지계가 진정으로 고귀하고 위대한 보시이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너무나 거대하고 수승한 보시이므로 ‘마하다나’라고 일컫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숙고해보면 마음이 한없이 충만해질 것입니다.
2) 주지 않은 물건을 가지는 것을 피하겠습니다.
(아딘나다나 웨라마니 식카빠당 사마디야미)
주지 않은 물건을 안 가지는 사람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동네에 도둑이 적다. 좋은 사람이 많다.’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이 집에 들어가서 훔치고, 저 집에 들어가서 훔치고 하는 절도범은 적습니다. 하지만 다른 방법으로 훔치는 이들은 꽤 많습니다.
예를 들어, 고춧가루에 다른 것을 섞어서 파는 것, 고춧가루라는 이름으로 팔면서 아닌 것을 섞으면 이것이 훔치는 것 아닙니까? 강황 가루에 다른 가루를 섞어서 파는 것은 어떻습니까? 참기름에 다른 기름을 섞어서 파는 것, 이런 것들도 ‘아딘나 다나(주지 않은 물건을 가짐)’에 들어갑니다. 주의해야 합니다. 이름 붙인 것과 파는 것이 다르면 이것 역시 ‘25종류의 훔침’에 들어갑니다. 좋은 물건과 안 좋은 물건을 섞는 것. 사람들은 이것을 도둑질이라고 여기지 않습니다. 누구도 도둑질이라고 단정 짓지 않습니다.
실은 ‘25종류의 도둑질’의 관점에서 보면 ‘주지 않은 물건을 가짐’에서 벗어나는 이는 매우 드뭅니다. 정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타인의 재산을 가지는 모든 행위가 ‘아딘나 다나’입니다. ‘아딘나 다나’는 두 단어의 합성어입니다 : 아딘나(타인이 분명히 주지 않은 물건)+아다나(가짐). 확실하게 주는 물건이 아닌 것을 가지는 모든 행위를 ‘아딘나 다나’라고 기억해야 합니다.
자, ‘아딘나 다나’를 삼가했습니다. 청정하게 생계를 유지합니다. 정직합니다. 올곧습니다. 바른 방법대로 합니다. 내가 ‘아딘나 다나’를 삼가하면 상대편이 위험으로부터 안전해집니다. 나로 인해서 상대편이 곤경에 처하지 않게 됩니다. 예를 들면, 해로운 것을 먹었을 때 겪어야 하는 고통이 없습니다. 가짜 약을 먹어서 위험에 빠지지 않습니다. 여러 종류입니다. 이 시대에는 이런 유사품들로 인한 위험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갖가지 안전치 않은 생산품들이 있고, 이것들이 가져오는 위험도 그만큼 많아지고 있습니다. 이런 정직함만 지켜도 80억 정도 되는 인구들에게 생명과 재산의 안전을 보장하는 위대한 보시를 하고 있는 겁니다. 이런 위대한 보시를 내가 하고 있다고 스스로 새겨야 합니다. 무궁한 보시를 하고 있다고 스스로 일깨워야 합니다.
3) 삿된 음행을 피하겠습니다.
(까-메수 밋차짜라 웨라마니 식카빠당 사마디야미)
감각적인 것들과 연관되어 삿된 음행을 하지 않고 사는 존재가 세상에 얼마나 있는가 하면 아주 적습니다. 사람들이 몰라서 선한 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사람들 모르게 착한 사람인 양 행세하며 삽니다.
붇다의 공덕 중에 ‘아라항’이란 공덕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조차 불선업을 짓지 않는다’라는 의미입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타인의 비난이 두려워서 남의 눈 앞에서만 불선업을 피합니다. 이 점에 대하여 붇다께서 말씀하신 바가 있습니다.
‘낟티 로께 라호나마
빠빠깜망 빠꿉바또’
(불선업을 저지르는 존재에게
숨을 곳은 없다)
붇다께서 어떻게 부연 설명하셨냐 하면,
‘앋토 떼 뿌리사 자나띠’
(너 자신이 너를 알고 있다)
아무도 보지 못했다고 해도 나 자신은 압니다. 맞습니까? 또한, 내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들, 나를 보호하는 신장들이 모릅니까? 압니다. 나를 보호하는 천인들도 조용히 있을 리 없습니다. 다니며 발설할 것입니다. 천인이나 신장들도 사람처럼 수다를 떱니다. 그들 역시 소식을 전합니다. 초전법륜경을 설하실 때도 천인들이 소식을 전달했습니다. 붇다께서 법을 설하시자 제일 먼저 땅 위에 집을 가진 ‘붐마데와따’ 요정들이 전했습니다. 그러자 하늘의 천인들이 들었습니다. 하늘의 천신들이 이 소식을 더 높이높이 전달해 올렸습니다. 그래서 소문이란 흩어지기 마련입니다. 전 세상으로 흩어집니다. ‘사람 소식은 사람끼리 전하고, 꽃 소식은 바람이 전한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신문에 실을 필요가 없습니다. 모두 듣고 갑니다. 한 사람 한 사람, 차츰차츰 전해갑니다. 그러니 가려진 자리가 어디 있겠습니까? 천신은 인간의 마음을 압니다. 그러니 ‘빠라찓따위자나나(타인의 마음을 알 수 있는 지혜)’를 얻은 존재들 혹은 ‘쩨또빠리야냐나(타심통)’ 가진 존재들이 본다면 감춰진 곳이란 게 어찌 있겠습니까? 그래서 사람들은 불선업을 지으면서 아무도 모른다고 생각하지만 진정 안 보이는 곳이란 없습니다.
이 ‘까메수밋차짜라(삿된 음행함)’를 피하지 않으면 가정에서 서로서로 미워함이 일어나기 마련입니다. 몰라서 미워하지 않을 뿐, 알게 되면 미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까메수밋차짜라(삿된 음행)’를 피하는 존재가 80억 정도 되는 인구에게 이 불행을 주지 않는다면 모든 인간들에게 ‘아바양 데띠(위험 없음을 베풂)’를 한 게 아닙니까? 나의 습관, 지계가 대중 누구에게도 피해를 안 줌으로 인해 안전을 준 것입니다. 고통과 불행이 없는 행복을 준 것입니다. 이는 또한 원수를 멀어지게 한 것입니다. 따라서, 삿된 음행을 피함은 무량한 보시 중 하나인 것입니다.
4) 거짓말하는 것을 피하겠습니다.
(무사와다 웨라마니 식카빠당 사마디야미)
세간에서 ‘무사와다(거짓말)’를 피하는 사람은 매우 희귀합니다. 꾸밈없이 말하면 말이 매끄럽지 않은 듯합니다. 있는 그대로 말하면 덜 다듬어진 듯합니다. 그렇다면, 말이 매끄러우려면 바르게 말하지 말라는 뜻이 됩니다. 또 과장이 안 들어가면 문장이 껄끄럽다 합니다. 이 말을 누가 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약간의 거짓, 조금의 과장, 은근 슬쩍 덧붙임이 들어가야 그럴듯해진다는 것입니다.
재물이 들어오게 하는 말과 관련해서 주석서 저자들의 말씀이 있습니다. ‘우유와 버터로 지은 밥에 검지 손가락을 곧게 펴서 꽂았다가 빼면 손에 밥이 묻어나올 리 없다.’ 비유의 뜻은 ‘정직한 이는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입니다. 곧고 정직한 이는 아무것도 안 된다는 말입니다. 정직하게 해선 안 된다고 합니다. 요즘 사람들은 말합니다. ‘이 사람 너무 순진하군’이라고. 정직하면 비난을 듣습니다. ‘손가락을 약간 굽혀야 버터와 우유로 지은 밥이 좀 묻어오지 않느냐, 이렇게 좀 굽어야 재물이 묻어온단다.’ 이런 뜻입니다. 좀 굽어야 재물을 얻습니다. 그러나 열반은 너무나 곧아야 얻습니다. 굽어선 안 됩니다. 열반으로 가는 길은 세간의 부를 만드는 길과 정반대입니다. 손가락을 조금 구부리면 밥이 붙어 옵니다. 손가락을 펴서 넣었다 빼면 묻어오지 않습니다. 이와 한가지로 ‘진실만 있으면 문장이 매끄럽지 않다. 약간 부풀려 말해야 일이 잘 풀린다’라고 여깁니다. 이러니 세상에 거짓말 않는 이가 없을 정도까지 되었습니다.
어릴 때 들은 큰스님의 말씀이 기억납니다. 웃기시려고 한 말입니다. 웃자고 한 말이지만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거짓말 한 이들은 그 불선업의 과보로 발음이 정확하지 않답니다. 치아가 고르지 않답니다. 어린 나이에도 이가 빠진다고 합니다. 이것과 관련하여 큰스님께서 뭐라 하셨냐 하면 “거짓말해서 이가 빠진다면 ‘담마까티까(법문 잘하는 스님)’들은 치아가 하나도 남아 있을 리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담마까티까’들에게 주의를 시킨 것입니다. 헛된 말 하지 않도록 주의를 주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들도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지금 지은 불선업이 오늘 당장 결과를 주는 게 아닙니다. 거짓말해서 이가 빠진다면 동네 치과의사들은 누구나 부자가 될 것입니다. 요즘 치아 하나 심는 데 백만 원이 넘는다 합니다. 요점은, 거짓말을 피하는 사람들이 매우 적다고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이렇게 적은 사람들 중에 속해야 합니다. 아는 대로 바른 말만 해야 합니다. 아니면 침묵하십시오. 말을 한다면 바른 말만 해야 합니다. 바르지 않은 것은 말하지 않아야 합니다.
거짓말을 피함이 무량한 중생들을 위험에서 벗어나게 해줍니다. 세상을 보십시오. ‘누가 누구를 사기 쳤다. 사기당한 사람이 매우 곤경에 빠졌다.’ 이런 뉴스들이 많습니다. 거짓말하고 사기 치고 나중에 사실이 드러나 속상해하고 원수지고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거짓말하지 않으면, 바른 말만 하면, 서로 간에 믿고 안심하는 사이가 될 것입니다. 그리되면 위험에 처하지 않게 됩니다. 그러니 ‘무사와다’를 피하는 것 역시 중생들에게 안전을 약속하는 마하다나 중에 하나인 것입니다.
5) 정신을 혼미하게 하는 술이나 약물을 취하는 것을 삼가하겠습니다.
(수라메라야 맛자빠마닫타나 웨라마니 식카빠당 사마디야미)
세간에서 술이나 마약을 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주변에서는 ‘이 사람이 마약 중독이래. 이 사람이 알코올 중독이래.’ 이렇게 비난을 합니다. 그들을 향해서는 비난만이 있을 뿐입니다. 세상에서 알코올중독자들이 칭송 받는 경우는 없습니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비싼 외제 술을 마신다고 자랑삼아 말하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동네에서 비틀거리는 가난한 이들만 알코올중독자로 봅니다. 정말 값 비싼 술을 마시는 이는 알코올중독자로 보지 않습니다. 그러나 누가 마시든 술은 술일 뿐, 마약은 마약일 뿐입니다.
자-, 이 마약을 하면서 어찌 어른이 되겠습니까? 불법의 눈으로 보면 술을 마시는 이는 절대 좋은 어른이 될 수 없습니다. 어떤 이들은 여러 사람들과 일을 도모하려면 술이 빠지면 안 된다고 합니다. 모임에는 이것이 반드시 있어야 한답니다. 이것이 없으면 일이 되지 않는다 하면서, 일을 하기 위해서 마셔야 한다고 합니다. 이건 핑계일 뿐입니다. 솔직하게 마시고 싶어서 마셨다고 말하십시오. 왜 일하기 위해서 마셔야 한다고 합니까? 또 어떤 이들은 말합니다. 술 마시고 조용히 자는 건 괜찮다. 누구에게도 피해를 안 주니까 괜찮다. 아닙니다. 정신을 혼미하게 하는 것은 무엇이건 복용하는 그 당사자의 정신부터 좀먹어 들어가는 것입니다. 뇌에 손상을 줍니다. 이 액체가 들어가면 뇌에 이상이 생기기 시작한다고 의사들이 말합니다. 뇌가 정상이 아니면 그 사람의 생각 역시 정상이라 할 수 없습니다. 어떤 작가들은 술을 마셔야 참신한 발상이 나온다고 합니다. 가치 없는 발상이 나올 수는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열반에 이르는 특별한 법을 얻게 하는 지혜들은 마비되어 갑니다. 가짜 지혜들이 열릴 수도 있습니다. 이건 지혜가 아닌 잔머리를 지혜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술이나 마약을 하면서 사람들의 생각이 어긋나게 됩니다. 알코올이 영향을 끼쳐서 생각이 잘못되게 됩니다. 이런 잘못된 것들이 자신의 생 안에 생겨나기 시작하면 진정으로 가치 있는 법의 지혜는 내 손에서 벗어나 떨어져나가 버립니다. 크나큰 손실입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지나치게 되면 나 자신의 이익과 번영을 이룰 능력을 잃어버립니다. 타인의 이익과 번영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수행의 지혜는 점점 멀어지게 됩니다. 점점 멀어져서 윤회의 고통에서 허우적거리는 존재로 남게 됩니다.
음주를 하는 존재들은 정신이 혼미해져 있어서 지혜를 상실해 버립니다. 살생도 저지를 수 있습니다. 도둑질도 범할 수 있습니다. 삿된 음행들, 거짓말들도 쉽게 저지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술을 마심으로, 다른 네 가지 허물을 저지르게 된다는 관점에서 보면 더 심각한 폐해를 가져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앙굿따라 니까야에 속한 ‘둣짜리따위빧따 숟따’에서 ‘수라메라야빠낭 아세위땅’이라 하셨습니다. ‘음주를 거듭해서 하게 되면 지옥에 떨어지게 된다’라고 하셨습니다. 음주의 가장 가벼운 허물이 미치게(취하게) 하는 거라 하셨습니다.
음주를 피함과 동시에 주변에 평화를 주고 위험을 제거해 준 게 됩니다. 그래서 음주를 피하는 것이 마하다나라고 설하신 것입니다. ‘내가 마하다나(고귀한 보시)를 하고 있다’라고 떠올려 보십시오. 마음이 매우 풍성하고 행복해질 것입니다.
6) 5계 지킴의 이익
붇다께서 5계를 위대한 보시, 고귀한 보시, 무궁한 보시라고 설하셨습니다. 이 5계를 ‘마하다나’라고 부른 것은 고따마 붇다가 처음이 아닙니다. ‘마하다나’인 ‘5계’는 아주 오랜 옛날부터, 선근 있는 종족들이 세상의 개벽과 함께 하면서부터 있었던 것입니다. 누구도 함부로 훼손시킬 수 없다고 합니다. 이 5계라는 관습은 개선해야 할 전통이 아닌 것입니다. 이 계율은 지극히 고귀하고 위대한 보시인 것입니다.
붇다께서는 이 5계를 지니고 있는 것만으로 ‘선업들이 계속해서 밀려 들어오고 있는 것(뿐냐비산다)’이라고 하셨습니다. 얼핏 생각해 보면 살생을 피하는 것만으로 별 이익이 있을 것 같지 않습니다. 타인의 물건을 훔치는 것을 피함으로 인해서 아무것도 얻는 것이 없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행위를 피하겠다는 선업 의지가 매우 강하게 자신 안에 흐르고 있고, 거듭 생겨나고 있는 것만으로도 선업이라고 합니다. 붇다께서는 ‘뿐냐비산다’, ‘꾸살라비 산다’라는 단어를 쓰십니다. ‘아비산다’란 ‘끊임없이 흘러들어옴’입니다. ‘뿐냐’란 선업입니다. ‘꾸살라’ 역시 선업을 의미합니다. 5계를 지켜 살생이나 훔침을 피함과 동시에 ‘자기 자신 안으로 선업이 콸콸 흘러들어온다’는 의미입니다. 이미 선업을 짓고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뿐냐비산다(밀려들어오는 선업)’가 어떤 결과를 주느냐 하면 ‘수카싸하라(자기 자신에게 행복을 가져옴)’라고 합니다. 선업들이 내게 행복감을 가져온다는 뜻입니다. 돈과 재물은 행복과 만족만을 가져오지 않습니다. 도둑, 강도, 사기꾼들도 같이 데리고 옵니다. 그러나 선업은 도둑, 사기꾼들은 불러오지 않습니다. 돈과 재물만 있으면 도둑들을 부릅니다. 그래서 돈과 재산을 ‘수카싸하라’라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5계를 지키는 선업은 ‘수카싸하라’입니다. 진정한 행복을 불러오는 당위의 법 중의 하나입니다.
5계를 지키는 것이 행복과 즐거움만을 가져오는 것은 아닙니다. 이 지계 선업은 또한 ‘좋은 환경을 조성(소왁기까)’해 줍니다. 좋은 환경이란 ‘눈에 보여지는 것이 모두 좋은 것뿐’이란 뜻입니다. 지금 우리들의 눈에는 좋은 것도 보이고 안 좋은 것도 보입니다. 눈이 선택해서 볼 수 없습니다. 귀도 좋은 것만 선택해서 들을 수 없습니다. 싫은 소리도 들립니다. 코도 좋은 냄새만 맡을 수 없습니다. 싫은 냄새도 들어오면 맡아야 합니다. 혀 역시 좋은 것만 맛볼 수 없습니다. 좋지 않은 것도 맛보게 됩니다. 피부도 좋은 감촉을 느낄 때도 있고, 싫은 감촉을 느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살생업을 피해서 지내게 되면, 지계로 인해 선업의 흐름이 밀려들어오게 되고, 이 밀려들어오는 선업으로 인해 보여지는 것도 좋은 것만 보인다고 합니다. 들리는 것도 좋은 것만 들린다고 합니다. 냄새도 향기로운 것만, 혀로 느끼는 맛도 좋은 맛만 있다고 합니다. 좋지 않은 대상들은 끼어들지 못한다고 합니다.
또 무엇을 주느냐면, ‘행복한 결과(수카위빠까)’를 줍니다. ‘천상의 재물(삭가상왇땅기까)’이 생기게 해준다고 합니다. 지계의 결과는 좋은 것만 있습니다. 그래서 붇다께서는 이 5계가 범상치 않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마하다나’라고 부를 뿐만 아니라, 살생을 피하겠다는 의도가 생겨나는 것만으로도 자기 자신 안으로 행복과 즐거움을 주는 선업의 물줄기가 콸콸 밀려드는 것과 같다. 라고 하셨습니다.
자! 또 다른 관점에서 봅시다. 5계를 겉으로만 보면 계율일 뿐이라고 하찮게 여길 수 있습니다. ‘계율을 지키는 것보다 수행을 해야 한다, 사마디를 기르는 것이 더 중요하다’라고 말 할지 모릅니다.
이 5계를 8정도 안에서 보자면 ‘정어(삼마와짜), 정업(삼마깜만따), 정명(삼마아지와)’입니다. 이 5계를 어기지 않으며 건전하게 생계를 이어가면 ‘삼마아지와’(정업)입니다. 정업이란 8정도의 한 요소로서 붇다께서 설하신 ‘중도(맛지마빠띠빠다, 8정도)’의 일부입니다. 붇다께서는 ‘중도’는 열반으로 가는 길이라고 하셨습니다. 5계가 빈틈이 없도록 습관 들인다는 뜻은 8정도의 계학인 정어, 정업, 정명을 닦고 있다는 뜻과 동일한 것입니다. 이 5계가 갖추어지지 않으면 정견, 정사유, 정정진, 정념, 정정들이 생겨날 수 없습니다. 그러니 5계는 아주 근본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붇다께서는 이 5계를 지키겠다고 맹세하는 순간부터, 선업들이 저절로 내게로 콸콸 흘러 들어와서 열반으로 향하는 길에 들어선 것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8정도 가운데 이 세 가지 요소를 현재 닦고 있으면, 나머지 다섯 가지를 이루는 것만 남아 있다는 의미가 됩니다.
5계를 지키는 것은 원하는 것(읻타)들을 가져와 줍니다. 좋아할 만한 것들(깐따), 귀한 것들(마나빠라)을 이 선업이 가져옵니다. 이러한 지계의 결과들, 즉 불선업을 피하고자 하는 의도와 그 의도의 결과들을 알면 힘이 북돋아집니다.
4. 삼귀의
옛날 큰 스님들 말씀에 5계를 치마나 바지를 입듯이 항상 입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아주 긴요한 것이라서 이런 비유를 하신 겁니다. 5계와 함께 삼귀의를 말씀하십니다. 정말 끊임없이 선업의 흐름 안에 들게 하는 것이 ‘삼귀의’라고 설하십니다. 붇다께 의지하겠다고 다가간다면, 다가간다는 선업 의지가 모든 선업을 자신의 의식 안에 흘러들어오도록 길을 여는 게 됩니다. 따라서 선업의 강물이 내 안에 흘러들어온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붇다께 귀의합니다(붓당 사라낭 갓차미)
법에 귀의합니다(담망 사라낭 갓차미)
상가에 귀의합니다(상강 사라낭 갓차미)
이 세 가지 귀의함 역시 ‘꾸살라비산다’, ‘뿐냐비산다’인 것입니다. ‘선업들이 계속해서 밀려들어오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라낭’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적과 위험, 나쁜 것들을 제거해 버릴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것’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한국말로는 ‘귀의하다’라고 쓰일 것입니다. ‘사라낭’이라는 단어의 뜻이 ‘제거해서 버림’을 내포합니다. 무엇을 제거해서 버리는가? 고통을 제거해서 버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고통을 제거해서 버리는 것은 무엇이 그 역할을 해내는가? 붇다, 담마, 상가라는 삼보가 고통을 제거해서 버립니다. 그러면 어떤 식으로 제거해서 버리는가? 봅시다! 붇다께서 중생들의 이로움과 행복과 번영을 위해서 선업을 짓도록, 나쁜 결과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불선업을 피할 수 있도록, 훈계하고 타이릅니다. 이 가르침대로 따른다면 맞닥뜨리게 될 위험에 빠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훈계와 타이름을 주고, 길을 제시함으로써 중생들이 빠질 수 있는 위험을 제거해준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제거해준다는 것은 무엇으로 제거해주는가? 법으로써 제거해 주는 것입니다. 의사들이 사람들의 병을 치료한다는 것은 그의 손으로 치료하는 게 아닙니다. 무엇으로 치료하는 겁니까? 약으로 치료합니다. 약을 안 먹이면 나을 리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붇다께서 중생들의 위험과 곤경을 제거해준다는 것은 법으로써 제거해주는 것입니다. 이 8정도를 수행함으로써 우리가 위험과 적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에 이 법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법의 가르침대로 따르고 닦음으로써 적과 위험으로부터 벗어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라낭’이라고 합니다.
상가는 어떻게 ‘사라낭’을 주는가? 상가의 공덕을 떠올리며 사람들이 선업을 짓고, 합장 한 번 하고, 고개 숙여 예경 올리고, 4가지 보시물들을 보시한다면 매우 거대한, 한계를 알 수 없는 행복과 평화를 얻게 될 것입니다. 이런 평화를 얻게 해주는 주체가 무엇인가 하면 상가들이 닦고 있는 그들의 실라(계율)입니다. 봅시다! 비옥한 땅에 나무를 심습니다. 과실수를 심습니다. 사과나무를 심습니다. 심을 때 내가 심은 것은 한 그루 또는 한 알의 씨앗일 뿐입니다. 하지만 해마다 열리는 열매는 수백 배 수천 배로 늘어납니다. 한 해뿐만이 아닙니다. 햇수를 거듭해서 열매 맺습니다. 이것은 누가 주는 겁니까? 기름진 땅과 좋은 물이 주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상가에 보시해서 얻는 결과란 자신의 선업 의도가 거듭해서 열매 맺는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열매가 열리게 해주는 것이 다름 아닌 상가의 공덕인 것입니다. 이렇게 열매를 열리게 해줌으로써, 지옥에 떨어지고 고통에 잠기게 되는 상황들을 제거해 주기에 상가에 의지함 역시 ‘사라낭’이라고 부릅니다.
이 ‘사라낭’이라고 부르는 ‘삼보에 귀의하는 마음’을 ‘사라낭 가마낭’이라고도 합니다. 이 마음이 바로 선업의 마음입니다. 이 같은 선업의 마음이 생겨나는 것은 평범한 선업이 아닙니다. ‘뿐냐비산다’, ‘꾸살라비산다’인 것입니다. 삼보에 귀의함을 원인으로 해서 ‘선업들이 나의 의식 안으로 쉼 없이 흘러들어오게 된다’고 합니다.
정리하자면, 우리들이 삼귀의와 함께 5계를 받음으로써 ‘마하다나’라는 고귀하고 위대한 보시를 하게 된다고 마음에 새겨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상기한다면 자신이 매우 귀하고 거대한 보시, 모든 붇다들께서 칭찬하시는 일을 하는 것이 됩니다. 그뿐 아니라, 위빳사나(8정도) 수행의 길 위에 올라서는 것이 됩니다. 그 결과로 마음에 충만감이 생겨날 것입니다.
법을 사랑하는 청중들이 삼귀의와 5계를 받아서 지킬 때, 당연케 여기지 말고 자신이 받은 5계를 깊이 있게 숙고하기를 바랍니다. 또한, 삼귀의 의미를 숙고하기를 바랍니다. 8정도의 길 위에 한 발 들여놓았음을 알고, 계율이 한층 더 청정해지도록 스스로 노력하여 8정도의 남은 다섯 가지 역시 완전히 닦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사두 사두 사두
첫댓글 사두 사두 사두
사두사두사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