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히어로보다 강한 “작은 새”의 울음으로 미래를 준비하는 문학
이은숙 〈본지 편집장〉
최근 블록버스터 영화나 서점의 신간 베스트 코너를 보면 급변하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 현대인들의 공통된 관심사나 화두, 혹은 시대적 담론이 무엇인지 짐작해 볼 수 있다. 언제부턴가 인기를 끄는 영화마다 각종 재난과 악으로부터 인류를 구원해줄 슈퍼히어로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인간들의 겁 없는 실험정신과 생태계 교란, 이를 악용한 영리 추구 등에 의해 지구가 위기에 처했다는 줄거리의 최근 개봉작 《쥬라기 월드: 도미니언》에서는 오만한 인간의 탐욕에 의해 세상이 잠식되어 버렸고 이젠 거대한 공룡들과 공존을 모색해야 한다는 말로 영화가 시작된다.
베스트 신간 서적들은 어떠한가? 미래사회에 대한 각종 전망과 제언을 담은 책도 가끔 보이지만 상당수가 다가올 미래를 이끌 근원적 가치의 위기에 대한 경고나 물음을 담은 책들이다. 또한 COVID-19 팬데믹 상황과 전 세계적 위기의 상황 속에 각종 문학 작품들은 디스토피아를 이야기하고 있다. 『사피엔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는 ‘호모 사피엔스의 종말’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인간이 신의 역할을 빼앗아서는 안 된다는 반대론을 펴는 것은, 독실한 일신론자들만이 아니다. 수많은 확고한 무신론자들도 과학자들이 자연의 역할을 대신하려 한다는 점에서 그에 못지않게 충격을 받았다.”
- 『사피엔스』 제10장 중
과학의 가능성에 무한한 찬사를 보내던 시대는 어느덧 그 가능성을 두려워하는 역반응의 시대로 변화되었다. 일찍이 헉슬리나 오웰이 예언했던 세계가 현실로 다가온 것이다. 그러나 이 ‘예언된 우울한 미래’가 ‘지금’의 현실만은 아니다. 한국 문학사를 돌아보면 국내에 신문학이 태동했던 1920~30년대에도 시대는 암울했다. 물론 일제강점기로 인한 ‘슬픈 모순’의 시절이었으므로 당시의 비관은 ‘지금’의 것과 다른 형태라고 생각할 수 있겠으나 당시의 문인들도 헉슬리나 오웰의 우울한 미래를 이미 체현했다. 이상의 「오감도」(1934)는 그 당시 공포와 불안의 디스토피아적 현실을 잘 보여준다. 통제와 검열, 문인들의 언어와 자의식이 외압에 의해 삭제되는 상황 속에 에로와 그로테스크와 난센스가 아니고서는 시대적 모순을 표현하기 어려웠던 비극적 시절이었다. 영국이 아일랜드를 통제하고 검열한 데서부터 디스토피아가 유래했다고 하지만 당시의 이상과 같은 작가들이 디스토피아를 드러낼 수밖에 없었던 것은 식민지 조선의 문인으로서만이 아닌 인간 존재의 모순이 낳은 시대적 불안과 공포에 대한 근원적 고뇌였다고 본다. 따라서, 풍요와 자유가 창궐하는 오늘날에도 우리는 여전히 디스토피아를 논할 수밖에 없다. 영화 《쥬라기 월드: 도미니언》에서 보여주는 불완전한 인간의 존재성은 유토피아와 자성적 척력으로 그렇게 멀어져만 간다. 이러한 우리 인간의 미래는 ‘거대한 공룡으로 비유되는 수많은 불안 요소들과 어떻게 공존할 수 있을까’를 고민할 수밖에 없는 세상에 직면하게 되는 것이다.
앞으로 우리가 만날 그 ‘거대한 공룡’은 무엇일까? 그것은 거대한 팬데믹일 수도 있고 지구의 각종 위기로 인한 포비아나 신드롬일 수도 있다. ‘거대한 공룡’을 대항하는 영화 《토르: 러브 앤 썬더》의 쿠키 영상에 나오는 제우스의 대사는 단지 유머로만 볼 수 없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인간들은 이제 신을 조롱하고 우습게 여긴다. 오히려 슈퍼히어로가 나타나 주기를 빌고 있는 인간들, 더는 안 되겠다. 더 큰 두려움을 주어야 한다.” 오늘날 현대인들은 더는 신을 믿지도 의존하지도 않으며 되레 비웃는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인류를 구원해 줄 것이라 믿는 슈퍼히어로는 어쩌면 어느덧 인간의 지성을 추월하고 있는 인공지능(AI), 휴머노이드(인간형 로봇), 각종 첨단 네트워크 기술, 백신 등일지도 모른다. 현대 인류는 이러한 것들을 신봉하고 이것들이 인류를 구원해 줄 것이라 기대하지만 한편으론 각종 부작용·역작용 또한 쉴새 없이 재생산되고 있다. 그뿐 아니라 이러한 것들은 우리의 인식을 풍요롭게 하거나 인간의 근원적 고독이나 한계를 극복하게 해 줄 수 없다. 사람과 사람의 등에서 전해지는 따스한 온기는 앞에서 말한 과학과 기술로는 만들 수 없다. 그것은 근원적 가치가 아닌 단지 인간 삶의 편리를 돕는 도구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현시대가 안고 있는 위기, 불안과 혼란 속에서 미래를 준비하는 문학은 어떤 문학이어야 할까. 시대마다 그 시대가 안고 있는 선천적 질병이 있고 그 병증은 사회 곳곳에서 염증처럼 퍼져 그 사회를 지탱하는 문화의 귀퉁이에서 깊이 곪아있다. 그 병증적 징후들, 문제를 발견하고 도려내어 그 원인과 양상을 해석하고 치유하는 힘이 바로 그 시대를 이끌어 가는 ‘문학(혹은 예술)’이다. 그 힘은 다른 이들의 참회와 각성만을 촉구하는 참여주의적 문학(혹은 예술)보다는 자기 자신에 대한 참회와 갱신의 의지로 시작된 기록으로써의 문학(혹은 예술)에서 더 강하게 드러난다. 작가의 의지와 상관없이 주변 세계까지 번지는 힘으로 발휘되는 것이다.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보자.”라며 암울한 현실 속에서 철저한 자기 성찰의 의지를 갈구한 윤동주 시인의 「참회록」 같은 자성적 문학이 사회의 갱신으로까지 이어져 치유의 힘을 가졌던 것을 우리는 보았다. 수많은 위기와 막급한 사형선고가 도사리는 감옥 속에서 ‘누군가를 겨냥하는 말’보다 시인의 참회는 교만한 우리의 지성과 가슴을 깨뜨렸다. 또 김소월 시인은 어떠한가? 그의 시 「산유화」는 근원적인 인간의 고독에도 불구하고 꽃이 좋아 산에 살며 곁에서 ‘울어주는 작은 새’를 발견하게 해 준다. 그리고 이를 통해 더불어 살아갈 세상에서 우리의 존재 방식에 대해 고찰하게 해 준다. 자기 고백적인 참회, 내일을 세워갈 묵시, “꽃이 좋아 산에 사는 작은 새”의 울음이 될 때 문학은 위기로 가득한 세상 속에서도 쓰러진 누군가에게 손을 내미는 언어로써 구별과 소외의 담을 허무는 언어가 될 것이라 믿는다.
참회이며 묵시, 그리고 곁에서 울어주는 ‘작은 새’의 울음이 되는 문학….
인간의 근원적인 고독이 인류가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인 것처럼, 우리는 아무리 뛰어난 논리와 이성, 첨단 과학의 합리성으로도 극복할 수 없는 문제들을 안고 살아간다. 그러나 누군가의 곁에 살며 더불어 울어주는 ‘작은 새’의 존재 방식을 통해 얼마든지 그 한계를 극복하며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소월을 비롯한 시인들은 노래했다. 각자의 엄중한 삶 속에서 김소월 시인의 시가 시대를 초월하여 ‘지금’의 우리에게도 여전히 울림을 주는 이유이다.
저만치 홀로 피어있네
…(중략)…
산에서 우는 작은 새여, 꽃이 좋아 산에서 사노라네
- 김소월, 「산유화」 중
소월은 “홀로 피어”있지만, 근원적 아픔을 간직하고 살아가는 우리 삶에 함께하는 ‘작은 새’의 존재를 깨닫게 한다. 홀로 쓸쓸하게 닳아지는 외딴 길과 같은 삶일지라도 문학은 항상 옆에서 울어주는 ‘작은 새’를 발견하게 하는 매개체가 되어야 한다. 우리 『시와산문』이 지향하는 인간 삶의 조화로움이야말로 우리 삶의 한편에 ‘작은 새’를 찾아내는 문학적 작업이라고 할 수 있겠다. 현대의 디스토피아적 위기 속에서도 끊임없는 참회와 묵시로 울어주는 문학이 계간 『시와산문』을 통해 이어지길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