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인천유스제이씨
 
 
 
카페 게시글
자유게시판 스크랩 조선의 궁궐-창덕궁6(헌종의 사랑과 망국의 아픔이 한 곳에-낙선재,석복헌,수강재)
민지홍(8기) 추천 0 조회 36 12.09.28 01:3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저녁을 먹고 산책을 나가 하늘을 보니 달이 밝다.

보름을 며칠 앞둔 시점이라......한가위가 다가온다.

불경기 속에서도 민족 명절이라 사람들이 분주하다.

추석에는 창덕궁도 무료입장이 가능하니 평소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찾아올 게다.

 

조선의 참 궁궐이 창덕궁을 찾은 사람들은 궁궐을

돌아보며 조선 왕조 500년을 아는대로 기억할 것이고 

그리고 오늘 소개할 낙선재에서는 헌종이라는 한 임금의

사랑이야기를 떠올리며 미소를 지을 것이다.

 

그런가하면 낙선재 바로 옆에 붙은 작은 한옥인 수강재를 돌아보면 망국의 설움속에 한 많은

삶을 살다간 덕혜옹주를 떠올리며 어쩌면 인생 무상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앞에 소개한 창덕궁과는 달리 오늘 소개할 낙선재 등은 비록 창덕궁 내에 있지만 전혀 궁궐다운

면모를 보여주지 못한다. 과연 이곳이 조선 왕조의 궁궐인 창덕궁인가 싶을 정도로 지극히 검소하고 소박하다.

 

구중궁궐의 위엄스런 건축도 없고 화려한 단청도 없으며 어디로보나 민가같은 분위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통 건축의 묘미가 살아 있는 건축들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사대부 양반집의 종가집 같은 분위기의 이 집들에 대해 이제부터 설명하도록 하겠다.

 

 

(안내책자의 낙선재 도면.

 

성정각 건너편, 승화루와 상량정 아래에 위치한 낙선재는 출입구가 두 곳이다.

한 곳은 측면 출입구이고 정문이 별도로 있는데 장락문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그 옆의 건물이 석복헌이고 또 그 옆의 작은 전각군이 수강재이다.

 

 

(성정각을 나와 낙선재 가면서 바라본 낙선재 측면 모습. 오른쪽에 측면 출입구가 있고 사진 왼쪽에

화계와 한정당이 보인다)

 

왼쪽 위에 보이는 저 한정당은 일제강점기에 세워진 것으로 한옥식 흙벽이 없고 창문에는 유리를 

사용했으며 기간에 타일을 바르는 등 한옥에 새로운 형식을 가미한 것이나 출입이 불가하여 답사를

할 수 없었다.

 

그 한정당으로 들어가는 화계 위의 아치문을 '만월문'이라고 하는데 위에 지붕을 세웠지만 중국풍이다.

아쉽게도 도면에는 이름이 없다.

  

낙선재만 측면에 바라본 모습. 장대석 1단의 기단 위에 4단의 사대석을 쌓아 올리고 그 위로는

전돌을 올린 담장이 고전적이나 장대석을 제외하고는 전부 새로 지은 듯 깨끗하여 원래부터

있던 담장이지만 의심스러울 정도이다.

 

측면 출입구와 낙선재 안의 모습.

 

낙선재 정면과 마당. 왼쪽에 보이는 출입구가 정문이다. 마당 앞에 우물이 하나 보인다.

 

낙선재 정문. 민가중 사대부 양반집 중에 큰집도 이보다는 입구가 큰 곳도 있다. 솟을대문이다.

 

솟을대문은 궁궐에서는 당연히 설치하는 것이고 주변 행랑채보다 한층 높인 대문인데 초기에는

사대부 민가에서도 종2품 이상의 관료가 되어야만 세울 수 있어서 지체높은 양반집의 상징이 되었는데

나중에는 웬만한 양반집들은 다 솟을대문을 세웠다.

 

처마를 살펴보기 바란다. 단순히 둥근 서까래 하나만 지붕을 받친 홑처마 지붕이다.

그런데 나중에 지적하겠지만 낙선재 안에서 석복헌으로 들어가는 중문은 다포식 처마이다.

 

정문 현판에 장락문이라고 되어 있다. 멀리 화계 위로 꽃담이 보이고 그 뒤로 상량정이 보인다.

 

상량정(上凉亭)은 원래 이름이 평원루(平遠樓)였으나 일제강점기에 이름을 바끈 것이다.

경사가 다소 급한 지붕선을 가진 육각형의 육모정으로 계자난간에 다포식 누각인데 돌기둥

위에 세웠으며 아래에 연못은 없다.

 

 

장락문이라는 문은 창덕궁에 두 곳이 있다. 하나는 이 낙선재이고 다른 하나는 후원에 있는 연경당 정문.

장락(長樂)이라는 이름은 중국 전설에 나오는 것으로 간단히 설명해서 불사약을 가진 선녀 서왕모

살던 월궁(月宮)의 이름이다.

 

이를 차용해 온 것은 그야말로 이곳에 기거하는 사람이 오래 장수하기를 기원하기 때문이다.

 

 

낙선재 안의 모습. 사각 기둥들이 단정하게 늘어선 것이 마치 엄격한 유교질서를 보는 듯하다.

한 눈에 보기에도 헌종의 사랑을 독차지 하는 후궁의 처소라고 보기에는 힘들 정도로 검소한 분위기다.

기둥에 걸린 한자 문구들을 주렴이라고 하는데 한자 실력이 약해서 풀이할 수 없음을 양해바란다.

 

낙선재 현판의 글씨는 청나라 금석학자 섭지선의 글씨로 이는 추사 김정희와 친교가 있었던 사람으로

헌종은 시화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대단했던 임금이다.

 

 

마당 한가운데서 본 낙선재 정면. 왼쪽에 보이는 건물과 가운데 보이는 건물의 기단에 높이의 차이가 있다.

우리나라 전통 건축은 항상 기단을 먼저 세우는데 이는 습기를 막고 온돌의 영향도 있다. 그리고 기단의

고저는 집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신분 고저를 나타낸다. 주인은 종보다 당연히 기단이 높은 곳에서 산다.

 

조선 제24대 임금인 헌종은 평소 검소했던 영조를 존경했기에 그 자신도 검소한 것을 좋아했는데

자신이 사랑한 경빈 김씨를 위해 이 낙선재를 지을 때 단청도 하지 않고 '궁'이라는 이름도 지어주지

않은채 낙선재를 지어주었다.

 

조선시대에서 왕비나 세자비를 간택할 때는 세자나 임금이 이에 관여하지 못했다. 그런데 헌종은 첫번 째

왕비 효헌왕후가 16세의 어린 나이로 세상을 뜬 후 이듬해 다시 왕비 간택을 할 때 이 원칙을 깨고 마지막

후보에 오른 여인들(이를 삼간택이라고 함)을 보게되었는데, 이 때 헌종은 김 자청의 딸을 마음에 두었으나

(쉽게 말해 한 눈에 뿅~~~^^) 왕비간택의 결정권은 대왕대비(23대 순조의 왕비. 그 사이에 효명세자가

있었으나 22살에 요절함)에게 있으므로 대왕대비는 명헌왕후 홍씨를 결정하였다.

(무지 실망하였을 것임.^^)

 

이후로 3년 뒤 왕비가 있는데도 생산 가능성이 없다는 핑계를 대고 후궁을 새로 맞으니 그녀가 바로 

처음에 마음에 두었던 김자청의 딸 경빈 김씨이다. (3년동안 왕비가 수태하지 못하도록 수를 쓴 것이 

확실하다.^^ 앙큼한.......ㅋㅋㅋ.)

 

사대부 출신으로 후궁이 된 경빈 김씨는 헌종의 사랑을 독차지 하였음은 당연한 것이고 석복헌도 지어

주었는데 그 이유는 나중에 수강재순원왕후 조씨가 기거함에 따라 가까이에서 모시라는 뜻이었다.

할머니와 손주며느리가 친하게 지내라는 앙큼한 계략인 것이다.^^

 

참으로 실화이면서도 재미있는 조선 왕조의 야사가 아닌가한다. 조선왕조의 역사도 재밌지만

야사를 읽어보면 더 재미있는 내용들이 많고 이런 것들이 종종 사극으로 등장한다.   

 

 

낙선재 왼쪽 누마루 밑의 돌기둥 안쪽에 빈 공간이 있고 그 안벽에는 이런 문양이 있는데

다들 궁금해한다. 사실 이것은 온돌이므로 불이 나지 않도록 추상적 상징성을 가진 문양으로

이를 빙렬(氷列)이라고 한다.

 

꽃담이나 굴뚝, 담장의 추상적, 기하학적 무늬들이 집안으로 들어온 예이다.

돌기둥 위 누마루 나무 기둥이 조금 보이는데 그 옆으로도 낙양각을 설치하였으나 단청은 없다.

희정당 입구와 비교하면 얼마나 검소하고 소박한 지를 알 수 있다.

 

머름대 너머로 방안을 가로질러 건너편 방문 너머의 화계가 살며시 보인다.

한옥은 이런 풍경작용이 제일 큰 특징이다. 누마루 방의 한쪽 문이 둥근 테를 가졌다.

 

낙선재에서 승화루를 바라본다.

 

낙선재를 나서기 전에 다시 한 번 상량정 방향을 본다. 화계와 굴뚝이 살짝 보이는데 관람객이 가볼 수

없도록 하여 안타깝다.

 

낙선재에서 석복헌 방향. 화계방향으로 제법 넓은 폭의 중문이 별도로 있고 석복헌과 통하는 중문이 

오른쪽에 있는데(사진에 안나왔음) 담장이 아주 인상적이다. 거북 등을 형상화한 육각형 무늬인데

이것도 장수를 기원하는 기원의 상징이다. 담장 너머로 보이는 건물이 석복헌이다.

 

낙선재에서 석복헌으로 통하는 중문. 앞에 언급한 대로 낙선재 정문인 장락문보다 훨씬 적음에도

불구하고 지붕 아래 처마는 다포식이다. 홑처마로 세우면 솟을대문의 지붕이 낮아져 담장 높이와

별 차이가 없을 것이므로 지붕을 높이기 위해 다포식으로 세운 것으로 보인다.

 

석복헌 중문에 들어서서 화게방향으로 본 모습. 지붕이 없이 담장 아래 홍예문이 하나 있는데

화계로 나가는 문 중의 하나지만 관람객 출입불가.

 

전돌을 잘 사용하여 질서정연한 담장과 굴뚝, 예쁜 쪽문까지 만들어 전통 건축의 묘미들이 곳곳에 나타난다.

굴뚝 위의 연와도 정말 장난감같이 예쁘고 귀엽다.

 

낙선재 정문인 장락문이 있는 담장의 연장 선상에서 석복헌으로 들어가는 정문이 별도로 있다.

이렇게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는 유교시대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이는 다음에 기회가 되면

자세히 설명을 하도록 하겠다.

 

(이곳에서 바라보면 풍경작용 중에 거울작용을 볼 수 있다. 거울작용은 기본적으로 전통 건축의 특징인

중첩의 일환인데 거울을 비추듯 닮아서 풍경이 반복되는 것을 뜻한다. )

 

다만 일반 사대부 민가에서는 이처럼 정문(보통의 경우 솟을대문)을 통해 보이는 곳은 사랑채이고

안채는 정문을 통해 거의 보이지 않는다. 또한 경우에 따라서는 정문을 통해서도 사랑채조차

바로 보이지 않도록 하기 위해 문 안쪽으로 칸막이를 설치하는 경우도 있는데 사진에서 보듯이

이 집의 주인(경빈 홍씨)이 기거하는 곳이 바로 정문을 통해 보인다는 것은 이해가 가질 않는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이곳은 경빈 김씨를 위해 지은 집인데 궁궐 안에 후궁을 위해 별도로 건축을

한다는 것은 극히 이례적인 것이다. 그러니 헌종이 얼마나 경빈 김씨를 사랑했는지 알 수 있다.

 

 

석복헌 현판과 대청. 석복헌이라는 뜻은 '복을 내리는 집'이라는 뜻이다.

헌(軒)이라는 이름을 가진 건물들이 많은데 이 말의 원래 뜻은 '높은 곳에 올라 의기양양하다'는 듯이다.

 

그래서 전통 건축에서 헌(軒)이라는 이름이 들어가는 건물은 주로 높고 활짝 트인 장소에 짓는데

조선 후기에 들어오면 이런 원칙이 의미가 없어진다.

 

참고로 전통 건축에는 헌(軒) 이외에도 누, 정, 각, 당, 대, 사라는 이름이 들어가는 건물들이 아주 많은데

원래는 다 참뜻이 있으니 창덕궁 후원에서 설명하도록 하겠다.

 

석복헌은 낙선재를 지은 다음해인 헌종 14년(1848)에 경빈 김씨의 처소로 지었는데 이후로 헌종은 

낙선재를 자신의 서재겸 사랑채로 사용하였다.

 

헌종은 독서를 즐겨했고 시화 사랑이 대단하여 낙선재에는 온갖 진귀한 서적들이 즐비했다고 한다.

  

 

석복헌 행랑채 방문을 통해 본 수강재 일부.

 

수강재.

이 건물은 헌종이 1848년(헌종 14년)에 대왕대비 순원왕후의 육순을 맞아 정조 9년(1785)에 지어진 것을

고쳐서 지어드린 곳이다.

 

순원왕후 조씨는 23대 임금 순조의 정비이자 효명세자의 어머니이나 효명세자가 일찍 요절하자 헌종이

8살에 왕위에 올랐는데 헌종 6년까지 수렴청정을 하였던 인물이다.

 

그런 역사적인 인물이 이런 지극히 소박한 건물에서 지냈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는다. 

 

사진에는 잘 나타나지 않으나 낙선재, 석복헌과는 달리 단청을 했던 흔적이 남아 있다.

수강(壽康)이란 '복(福)중의 으뜸인 장수와 강녕을 의미'하는 것이다.

 

뒤쪽으로 화계와 굴뚝의 일부가 보인다. 나중에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수강재 뒤로 작은 뒷마당이 있고

그 뒤로 화계와 굴뚝이 있다.

 

수강재 아궁이들. 마치 최근까지 사용했던 느낌이 든다. 그 이유는 덕혜옹주가 일본에서 돌아와

돌아가시기 전까지 사용했었던 곳이기 때문일까?

 

 

석복헌과 수강재를 이어주는 중문.

 

 

위, 아래사진. 수강재 측면의 문을 나오면 담장이 있고 그 위로 쪽문이 있다.

문은 닫혀 있어 출입이 불가하다. 저 문으로 들어가면 취운정이라는 정자가 있는데

숙종12(1686)에 지어진 정자가 현존한다. 다만 현판은 없이 정자만 있다.

 

 

위, 아래 사진. 취운정 가는 계단 위에서 수강재 일부의 지붕을 화면에 담았다.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은 듯한 숨결이 느껴진다. 사대부 민가의 종가집처럼.

 

들여다 본 수강재 뒷마당. 아담하다기 보다는 작다는 느낌이 든다. 궁궐인데.

 

뒷마당 위로 화계와 굴뚝이 있다. 대조전, 희정당이 있던 곳의 굴뚝과는 전혀 다른 소박한 굴뚝이다.

 

취운정 가는 문 옆으로 난 담장이 리듬감 있게 동선을 보여준다. 그 너머가 창경궁이다. 오래된 고목의

자태가 아름답다가 보다는 처연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조선 왕조의 마지막 여자들을 이 나무가

지켜보았기 때문일까?

 

수강재 옆에는 이런 이름없는 건물들이 있다. 안내책자 도면에도 이름이 없다.

 

낙선재는 1917년 희정당, 대조전의 화재시에 순종과 순종의 비가 재건되는 동안 생활했던 곳이며,

영왕(영친왕)의 비 이 방자 여사도 1989년까지 생활하였던 곳이다.

석복헌은 순종의 비 순정효황후가 1966년까지 생활하였던 곳이며, 수강재는 고종의 막내딸

덕혜옹주가 일본에서 귀국한 후 생활하였던 곳이다.

 

그러니 이 창덕궁이라는 궁궐에서 검소하고 소박한 민가같은 이 집에서 조선 왕조의 마지막

여인들이 모두 기거하다가 돌아가셨으니 말년에 그녀들의 인생과 삶을 저 고목이 지켜보았을 

것이다. 

 

오늘도 저 고목은 망국의 한을 머금은 그녀들의 삶을 기억하며 역사를 지키는 우아한 자태와 다소

꼿꼿함을 잃지 않은 모습으로 파수꾼같이 서 있다.

 

이상으로 창덕궁 편을 마칩니다.

다음편에서는 창덕궁 후원 편을 올릴 예정입니다.

조선 궁원(궁궐 정원)의 정수이자 한국 전통 정원의 백미를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우리나라 전통 건축의 진수이자 백미인 연경당도 후원에 있으니 후원편에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