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전을 정결케 하심
요 2:13-25
13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
14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15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16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17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18 이에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예수께 말하기를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냐
1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20 유대인들이 이르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 하더라
21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22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23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의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의 이름을 믿었으나
24 예수는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25 또 사람에 대하여 누구의 증언도 받으실 필요가 없었으니 이는 그가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셨음이니라
요 2:13-25 / [성전 청결 ; 마 21:12-13, 막 11:11-18, 눅 19:45-46] 유대인들이 해마다 지키는 유월절 축제가 되자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다. 14) 예수께서는 성전뜰에 이르러 희생제물에 쓸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 또 그 뒤에 환전상들이 들어 앉아 있는 것을 보셨다. 15) 그래서 밧줄로 채찍을 만들어 양과 소를 몰아내고 환전상들의 돈을 땅바닥에 쏟아 버리며 그들의 탁자들을 둘러엎으셨다. 16) 그러고나서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다. `이것들을 여기서 가지고 나가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 17) 그때 제자들에게는 ㄴ) `하나님의 집을 아끼는 열정이 나를 삼킬 것이다' 라고 성경에 기록된 예언의 말씀이 떠올랐다. (ㄴ. 시 69:9) 18) 그러자 유대인 지도자들이 몰려와서 예수께 따졌다. `무슨 권한으로 그들에게 나가라고 명령하시오? 만일 당신이 하나님께로부터 그러한 권한을 받았다면 그것을 증명할 만한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시오.' 19)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이 성전을 허물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성전을 다시 이곳에 세우겠다!' 20) `뭐라구요?' 그들이 소리쳤다. `이 성전을 짓는 데 46년이나 걸렸는데 당신이 이것을 사흘 안에 다시 세울 수 있다는 겁니까?' 21) 그러나 예수께서 말씀하신 성전은 자신의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22) 제자들은 예수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뒤에야 이 말씀을 기억하고 예수께서 자신이 대해서 인용하신 성경 구절들을 깨달았으며 또 그것이 다 이루어진 것을 알게 되었다. 23) [사람의 마음을 아시다] 예수께서 유월절 축제 동안 예루살렘에서 많은 이적을 행하시는 것을 본 사람들은 예수야말로 메시야이시라는 사실을 믿었으나 24-25) 예수께서는 그들을 신임하시지 않으셨다. 그것은 누가 예수께 말씀드리지 않아도 예수께서는 인간의 마음을 너무도 잘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갈릴리 가나의 혼인잔치에 참석하신 후 가버나움으로 내려가셨다는 기록을 통해 초기 사역이 갈릴리 지역에서 행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유월절을 맞으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성전을 방문하셨고 성전 타락을 보시고 주저치 않으시고 정결케 하셨습니다.
성전 정화(12-17) 유월절 규례에 따라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던 예수께서 성전 안에서 행해지는 제사용 제물의 판매와 성전세를 위한 환전상들이 앉아 있는 모습을 보시고 채찍을 만드사 짐승들을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환전상들의 돈을 뒤엎으시고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여기서 나가라고 외치셨습니다. 문제는 이런 상업 행위가 성전 밖이 아닌 성전 안에서 행해지고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성전을 내 아버지의 집이라고 말씀하시며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고 선포하십니다. 성전은 종교를 빙자하여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는 인간의 욕망의 장소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집이 성전입니다. 또한 예수께서 자기 육체를 가리켜 성전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인은 성령이 거하시는 전입니다. 성전은 거룩해야 합니다.
사람들의 반응(18-22) 예수께서 성전을 정결케하시는 행동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반응은 서로 달랐습니다. 유대인들은 네가 누구인데 이런 일을 행하느냐 말하며, 무슨 표적을 보이겠느냐고 묻습니다. 예수께서 우문현답 같은 답변을 하십니다.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유대인들은 당시에 헤롯에 의해 지어졌던 성전이 무려 46년 동안 지어졌는데 어떻게 삼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고 반문합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했으며,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믿었더라고 기록합니다. 성경말씀이 기억되고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 기억되고 믿어져야 합니다. 또한 예루살렘의 많은 사람들이 예수께서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의 이름을 믿었다고 기록합니다.
사람의 속을 아셨음(24-25) 예수께서 제자들과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따랐지만 그들에게 자신의 몸을 의탁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께서 메시야이심을 증명하심에 있어서 굳이 사람들의 증언이 필요하신 분이 아니십니다.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시고 친히 사람 속에 있는 것을 아셨기 때문이라고 기록합니다. 장차 제자들도 고난의 상황에서 예수를 버릴 것을 이미 알고 계셨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결코 신뢰의 대상이 아닙니다.
적용: 나의 몸이 성령이 거하시는 거룩한 성전이 되어야 합니다(참조 고전 6:19; 골 2:9-10). 우리의 신앙생활과 예배가 거래되지 않도록 해야합니다. 성전을 하나님으로 생각했던 이스라엘의 잘못을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 대상을 바르게 설정한 믿음을 받아주십니다.
율법은 약속의 실체이신 예수를 가리키고 인도하는 몽학선생입니다. 율법은 믿음이 올 때까지 필요합니다. 그러나 진리이신 예수가 내 안에 나의 주인으로 계신다면 어떤 율법에서도 자유하게 됩니다. 진리이신 예수님을 붙잡을 때 율법에서 자유하게 합니다. 성경의 모든 것이 가리키는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이신 예수님을 바라보는 하루가 되길 소망합니다.
< 설 교 >
마음의 성전을 거룩케 하라
이동휘 목사
1. 예수께서 유월절에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셨습니다.
예수께서 유월절에 성전에 올라가신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유월절 절기는 하나님께서 “이 날을 여호와의 절기를 삼아 영원한 규례로 대대에 지킬지니라.”(출12:1-14)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절기입니다. 유월절의 내력은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조상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그에게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창 15:13-14) (13)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반드시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 (14) 그들이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벌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이 약속에 따라 아브라함의 자손 야곱이 가족 70명을 이끌고 애굽 고센 땅으로 이주해서 400년을 지내면서, 그 후손들이 200만 명이 족히 넘는 큰 민족으로 번성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애굽 왕은 위협을 느끼며 이렇게 말합니다.
(출 1:9-11) (9) 그가 그 백성에게 이르되 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이 우리보다 많고 강하도다 (10) 자, 우리가 그들에게 대하여 지혜롭게 하자 두렵건대 그들이 더 많게 되면 전쟁이 일어날 때에 우리 대적과 합하여 우리와 싸우고 이 땅에서 나갈까 하노라 하고 (11) 감독들을 그들 위에 세우고 그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 괴롭게 하여 그들에게 바로를 위하여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을 건축하게 하니라
이스라엘의 번성을 막기 위해 온갖 압박을 가하고, 심지어 남자 아이가 태어나면 모조리 죽이라는 명령을 내린 애굽 왕 바로의 압제 아래 이스라엘은 너무나 고통스러웠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고통과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해방하기 위해 지도자 모세를 세워 바로에게 보냈습니다. 하나님의 보냄을 받은 모세는 하나님께서 명령하신대로 바로에게 가서 “내 백성을 내보내라. 그리하여 하나님을 섬기도록 하라”며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하라고 전했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강퍅한 바로가 그냥 이스라엘 백성을 내보낼 리 없었습니다. 이때부터 10가지 재앙이 하나씩 하나씩, 바로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할 때마다 애굽 전역에 걸쳐 내리게 되었습니다. 바로가 결정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내보내게 된 재앙이 마지막 재앙인 장자 죽음의 재앙이었습니다. 장자 죽음의 재앙은 어린양의 피가 문설주에 묻어있지 아니한 집에는 사람이든 짐승이든 처음 난 것, 즉 초태생은 모조리 죽임을 당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재앙으로 어린양의 피를 볼 수 없었던 왕궁의 바로 왕의 장자를 비롯해 모든 애굽의 장자들이 죽임을 당하자 강퍅한 바로는 그만 무릎을 꿇고 이스라엘 백성을 내보내게 되었습니다. 장자 죽음의 재앙은 세상을 상징하는 애굽 전역에 내린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누구든지 이 재앙을 피할 수 없습니다. 이 재앙의 심판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하나님 말씀대로 어린양을 잡아 그 피는 문설주에 바르고 고기는 불에 구워 무교병과 쓴 나물과 아울러 먹어야만 합니다. 어린양의 피가 문설주에 묻어 있는 것을 볼 때에 죽음의 사자가 그 집을 그냥 넘어갔습니다. 이를 넘을 유(逾), 넘을 월(越)자를 써서 유월절(逾越節)이라고 하며 이스라엘 백성은 죽음의 재앙에서 구원받은 것을 기념하여 이 절기를 반드시 지켜야만 합니다.
(출12:1-14) 여호와께서 애굽 땅에서 모세와 아론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 달로 너희에게 달의 시작 곧 해의 첫 달이 되게 하고 너희는 이스라엘 회중에게 고하여 이르라 이 달 열흘에 너희 매인이 어린 양을 취할지니 각 가족대로 그 식구를 위하여 어린 양을 취하되 그 어린 양에 대하여 식구가 너무 적으면 그 집의 이웃과 함께 인수를 따라서 하나를 취하면 각 사람의 식량을 따라서 너희 어린 양을 계산할 것이며 너희 어린 양은 흠 없고 일년 된 수컷으로 하되 양이나 염소 중에서 취하고 이달 십사일까지 간직하였다가 해질 때에 이스라엘 회중이 그 양을 잡고 그 피로 양을 먹을 집 문 좌우 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그 밤에 그 고기를 불에 구워 무교병과 쓴 나물과 아울러 먹되 날로나 물에 삶아서나 먹지 말고 그 머리와 정강이와 내장을 다 불에 구워 먹고 아침까지 남겨 두지 말며 아침까지 남은 것은 곧 소화하라 너희는 그것을 이렇게 먹을지니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으라 이것이 여호와의 유월절이니라 내가 그 밤에 애굽 땅에 두루 다니며 사람과 짐승을 무론하고 애굽 나라 가운데 처음 난 것을 다 치고 애굽의 모든 신에게 벌을 내리리라 나는 여호와로라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의 거하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 너희는 이 날을 기념하여 여호와의 절기를 삼아 영원한 규례로 대대에 지킬지니라
그런데 세례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세례를 받으시고자 오시는 것을 보고 이렇게 세상에 선포합니다.
(요1: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기 위해 어린 양이 희생되어 그 피를 흘려야 했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 인류를 죽음에서 구원하기 위해 어린양으로 십자가에 희생될 것을 예언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온 인류 구원을 위해 유월절 양으로 희생되신 것입니다. 이를 사도 바울은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고전 5:7)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은 물론 누구든지 죽음의 심판에서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은 오직 어린양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가 있어야만 합니다. 다시 말해 예수께서 십자가에 피흘려 희생되신 것은 나 자신을 구원하시기 위해서라고 믿는 믿음을 가진 사람은 누구든지 구원함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월절에 어린양으로 세상에 오신 예수께서 성전에 올라가신 것은 인류 구원을 위한 중요한 발걸음이었던 것입니다.
에덴동산에는 성전이 없었습니다. 그곳에서는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와 함께 계셨기 때문이었습니다.(창3:8)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므로 자기들이 벌거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입고 하나님을 얼굴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시며 찾으셨습니다. 아담은 자신이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다고 대답합니다. 하나님은 “누가 네가 벗은 것을 말해주었느냐? 네가 먹지 말라고 한 나무 실과를 먹었구나?”며 물으셨습니다. 회개할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은 하나님께서 주신 하와가 그 실과를 주어 먹게 되었다며 그 책임을 하와를 아내로 주신 하나님께 돌렸고, 하와는 뱀에게 그 책임을 전가시켰습니다. 결국 회개하지 않은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2:16-17)는 말씀대로 범죄한 인간에게 내려진 심판은 죽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심판하시되 인간 스스로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만든 치마 대신에 가죽 옷을 지어 입히셨다고 했습니다.(창3:21) 하나님께서는 심판 중에서도 인간의 죄를 가리울 가죽옷을 입히시는 은혜를 베푸신 것입니다. 가죽옷은 동물의 희생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죄 때문에 동물이 희생된 것입니다. 동물이 희생되었다는 것은 피를 흘렸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피값으로만 인간의 죄가 가리워질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를 확실하게 잘 설명해주는 말씀이 레위기 17:11입니다.
(레 17:11)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14) 모든 생물은 그 피가 생명과 일체라 그러므로 ... 모든 육체의 생명은 그 피인즉 무릇 피를 먹는 자는 끊쳐지리라
피 없이는 죄 사함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시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인간을 위해 가죽옷을 입히신 하나님 마음에는 벌써 인간의 죄 사함을 위해 희생제물을 염두에 두신 것입니다. 죄를 범한 인간이 죄 사함을 받아 사는 길은 희생제물을 드리는 제사에 있음을 알게 하신 것입니다.
성전은 바로 인간이 죄 사함을 받기 위해 희생의 제사(예배)를 드리기 위해 세워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범죄한 모든 인류가 사는 길은 오직 하나님의 성전에 나와 예배드리므로 죄 사함을 받는 것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면 인간이 하나님 성전에 나와 죄 사함을 받기 위해 드리는 희생제물은 무엇이겠습니까? 세례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요1:29)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바로 모든 인류가 죄 사함을 받기 위해 희생되어야 할 제물은 “하나님의 어린양”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인류의 죄 사함을 위해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십자가에 희생제물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입히신 가죽옷은 인류 구원을 위해 예비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마음에 두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죄 사함을 위해 십자가에 희생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영접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예배드리는 곳이 바로 성전인 것입니다.
2. 예수께서 유월절 절기를 지키기 위해 성전에 올라가셨습니다.
성전은 인간이 하나님을 만나는 거룩한 곳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기 때문에 성전은 거룩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시니 그 곳에서는 장사가 한창이었습니다. 성전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곳이지 그 어떤 이유로서도 장사할 수 없는 곳입니다. 성전은 어느 곳이나 “만인이 기도하는 집”이어야 했으나 성전 당국자들과 유대 상인들이 이방인의 뜰을 어느 누구도 기도할 수 없는 소란하고 뒤죽박죽이 된 곳으로 만들어 버렸던 것입니다. 소들의 울음소리, 양들의 울음소리, 비둘기가 구구거리는 소리, 행상인들이 물건 사라고 외치는 소리, 동전 바꾸는 쩔거덩거리는 소리, 흥정하는 소리 등 이 모든 것들이 뒤섞여서 성전을 아무도 예배드릴 수 없는 장소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을 찾아 기도하고 예배드려야 할 곳을 도저히 기도하고 예배드릴 수 없는 곳으로 만든 것에 대해 크게 분노하셨던 것입니다. 예수 당시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돈은 로마의 화폐인 ‘달란트’였습니다. 그런데 예배드릴 때는 유대인들이 사용하는 ‘세겔’로 바꾸어서 헌금해야만 했습니다. 환전은 본래 시장에서 이루어졌으나 성도들의 편리를 도모한다는 구실로 성전 뜰에서 허용하므로 성전에 환전장사가 들어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 바치는 제물인 소나 양, 비둘기 등도 각 가정에서 가장 좋고 흠이 없는 것으로 정하게 잡아 바쳐야 했으나 먼 곳에서 오는 사람들에게 편리를 제공한다는 구실로 마침내 성전 뜰에까지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행위는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이용하여 축재하고자 환전상과 장사하는 사람들에게서 권리금을 받고 허락한 것이었습니다. 제사장은 성도들이 가져오는 제물들을 검사하는 특권을 가졌습니다. 아무리 깨끗한 제물일지라도 제사장이 불합격 판정을 내리면 몇 번이라도 다시 바꾸어서 가져와야만 했습니다. 돈을 벌기위해서는 얼마든지 흠을 잡아서 불합격 판정을 내렸던 것입니다. 장사꾼들이 성전에서 장사를 하기 위해서도 제사장의 허락을 받아야만 했기 때문에 제사장의 권력은 더욱 커져만 갔던 것입니다. 성전 마당에서 구입한 제물이 아니면 모두 불합격으로 판정하여서 장사꾼들과 서로 이득을 탐했던 것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정경유착의 부조리가 판을 쳤던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 예수께서 나타나셔서 채찍을 들어 장사판을 둘러엎고 장사치들을 몰아 내셨던 것입니다. 아무리 타락한 그들일지라도 일말의 양심은 살아 있어서 자신들의 행위가 잘못된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의 진노하시는 행위에 대해서 아무런 항변도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궁여지책으로 한 말이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뇨?”(요2:18)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은 “당신은 그 행동으로서 자신이 메시야임을 주장했다. 그러니 이제 당신의 주장을 증명해 줄 어떤 이적을 우리들에게 보이라.”는 뜻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께서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요2;19)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성전은 헤롯 성전으로서 무려 46년 동안 걸려서 지은 건물이었습니다. 이렇게 큰 성전을 헐고 사흘만에 다시 짓겠다는 예수의 말씀을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성전’의 뜻을 알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사람들이 하나님께 예배하되 그리심산에서도 아니고, 예루살렘에서도 아니며 오직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릴 날이 올 것이라고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요4:21-23). 예수께서 말씀하신 ‘성전’은 자기 자신의 몸을 가리킨 것입니다. ‘사흘만에 다시 짓겠다’는 것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시겠다’는 뜻입니다. 예수가 모든 인간의 죄를 사하시는 십자가의 제물이 되시므로서 인간이 하나님을 만나는 성전이 되신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손으로 지은 이 성전을 내가 헐고 손으로 짓지 아니한 다른 성전을 사흘에 지으리라.”(마가복음14:58)고 말씀하신 것은 예수 이전의 모든 성전 의식은 완전히 폐하여지고 예수의 이름으로 드려지는 영적 예배제도를 세우겠다는 것입니다. 예수 전 구약시대의 모든 동물 희생의 제사와 번잡한 의식을 없애고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 즉 성령을 통해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을 경험하도록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같은 예수의 말씀은 성전 제사 제도를 이용해서 돈벌이에 혈안이 되었던 당시 종교 지도자들에게는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성전 제사 제도를 통해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고 예수 십자가를 통해서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때문이었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제물이나 눈에 보이는 성전이나 그 어떤 제사 의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죄사함을 이룩하신 예수 십자가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십자가 예수만이 하나님을 만나는 유일한 “길”이 되는 것입니다. 이를 예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요 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하나님을 만나는 역사가 없다면 성전의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를 자신의 구세주로 믿는 사람들은 성령이 거하시는 마음의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전서 3:16에서,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 엄히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믿으시는 여러분은 여러분의 몸과 인격이 바로 ‘하나님의 성전’인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의식에 우친 성전과 장사하는 성전, 형식적이고 외식적이고 교만하며 탐욕하는 마음의 성전을 모두 하나님 앞에 남김없이 헐어버려야만 합니다. 헐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직접 헐어버리고 맙니다. 당시 헤롯 성전에 대한 책망을 듣고도 그들은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에 주후 70년에 로마 디도 장군에 의해 하나님께서는 그 성전을 깨끗이 헐어버렸습니다. 나의 인격과 마음의 죄악들을 헐어내야만 합니다. 성도 여러분의 심령은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는 성전임을 믿으시고 그 마음의 성전을 가장 소중이 여기며 거룩하게 지키시기 바랍니다.
알퐁스 도데의 <고셰 신부의 불로장생주>라는 단편 소설의 내용을 소개합니다. 프레몽트르 수도원은 가난을 미덕으로 삼았던 수도원으로 심지어 종을 살 돈이 없어 기도 시간을 알리는데 나무로 된 딱다기를 사용해야 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이 수도원이 떼돈을 벌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불로장생주‘라는 술 덕분이었습니다. 불로장생주는 고셰라는 수도사가 여러가지 약초를 제조해서 만든 훌륭한 약주였습니다. 그 술이 날개 돋친 듯 팔리게 되자 수도원은 생기를 되찾았습니다. 술 판매로 매주 막대한 돈이 들어오기 때문이었습니다. 모든 건물이 깨끗이 단장되고 신부들도 비싼 옷으로 바꾸어 입었습니다. 고셰는 그 공적으로 인해 어느덧 신부까지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미사가 진행될 때 술에 만취된 고셰가 성당에 뛰어들어 괴상한 소리를 질러댔습니다. 그는 손수 만든 술을 시음하다가 술 중독자가 되어 버린 것이었습니다. 이후부터 고셰는 성당에 나오지 못하고 주조장 안에서 혼자 기도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고셰는 자신의 영혼이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원장을 찾아가 술 제조를 그만두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원장을 비롯한 신부들은 이건 바로 하나님을 위한 선한 사업이므로 이를 그만둔다면 바로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라고 고셰를 윽박질렀습니다. 따라서 순진한 고셰는 할 수 없이 계속 술을 만들었습니다. 그 수도원은 술로 인해 매우 바빠졌습니다. 심지어는 신부나 수도사 전체가 술병을 포장하고 상표를 붙이고 또한 그것을 운반하느라고 미사를 거를 때까지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배당 안에는 아주 작은 소리지만 고셰 신부의 술주정하는 소리와 고함치는 소리가 점차로 더욱 자주 들려 왔습니다. 우리는 늘 무엇인가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은 열망을 갖고 있습니다. 따라서 돈에 구애받지않는 생활을 하고자 열심히 돈을 법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아십니까? 돈을 벌수록 돈의 노예가 되어간다는 사실을! 고셰신부나 프레몽트르 수도원은 처음에는 가장 순수한 동기에서 술을 제조하였습니다. 그러나 돈의 맛을 안 다음부터는 가난했던 시절 순수했던 기도나 하나님께 대한 사랑, 예배 등을 모두 잊어버렸습니다. 오로지 술을 팔아 돈을 벌기에만 급급하였던 것입니다. 즉 수도원이 본래의 의도와 목적을 벗어나서 부의 축적에만 혈안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는 예수 당시의 예루살렘 성전에서도 보여지고 있는 모습입니다. 거룩해야 할 하나님의 성전이 장사의 소굴로 변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하나님이 의도하신 본래 목적대로 거룩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습니까? 혹시 교회 자체의 부에 혈안이 되어 장사의 소굴로 변해 있지는 않습니까? 만일 그렇다면 하나님은 그러한 교회를 그냥 두지 않으실 것입니다. 친히 채찍을 들어 장사꾼들을 추방하고 만민이 기도하는 거룩한 성전으로 정화시키실 것입니다. 또한 우리 자신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우리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몸된 성전입니다(고후6:16). 여러분은 거룩한 성전으로서의 역할을 다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거하실 그 성전을 알콜로 찌들게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또한 사리 사욕에 얽매여 신앙과 사랑과 도덕성을 져버린 채 장사의 소굴로 만들어 버리지 않았습니까? 히브리서12:14에서,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마음의 성전을 거룩케 하시는 예수 십자가를 통해 날마다 하나님을 만나며 경험하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다윗 왕은 하나님의 말씀이 담긴 법궤가 천막 속에 보관되고 있는데 반해 자기 자신은 백향목 궁전에서 산다고 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 너무나 송구스러웠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성전을 짓고자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다윗 왕의 마음을 아시고 “너는 내 성전을 지을 자가 아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성전을 짓고자 하는 그 마음 중심을 기뻐하시고 이렇게 축복하셨습니다. “1) 세상에서 존귀한 자의 이름 같이 네 이름을 가장 존귀하게 만들어 주리라. 2) 앞으로 이스라엘을 위하여 한 정착지를 마련해 주고 그들이 다시는 옮겨 다니지 않도록 하리라. 3) 너를 모든 대적으로부터 평안하게 지켜 주리라. 4) 네 자손들이 영원토록 이스라엘의 통치자가 되게 하리라. 5) 네 아들이 내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지을 것이니라. 6) 네 자손들이 왕이 되어 범죄하면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을 징계할지라도 사울처럼 왕권을 빼앗지는 아니하리라. 7)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리라(삼하7:1-1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도 다윗 왕처럼 성전을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는 마음이 되어 다윗 왕이 받은 7가지 축복들을 모두 누리시기 바랍니다.
3.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한 곳은 다윗이 번제와 화목제를 드린 아라우나 타작마당이었습니다.
다윗이 아라우나 타작마당에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게 된 사연은 이렇습니다. 일찍이 하나님께서는 다윗 왕에게 인구 조사를 금했습니다. 인구 조사를 통해 자칫 자신의 능력과 영예, 그리고 막강한 군사력을 과시하여 교만과 자만에 빠지게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윗 왕이 통치 말엽에 이제 이룰 만큼 이루었고, 자신과 나라의 위세가 어느 정도인지 알고 싶어했습니다. 그래서 신하들의 간곡한 만류를 뿌리치고 기어이 인구 조사를 명령합니다. 조사 결과 병력수만 무려 130만 명이나 되었습니다. 지금에 비해도 실로 막강한 군사력을 보유하게 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인구 조사가 끝나고 다윗은 스스로 양심의 가책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하나님께 이렇게 회개합니다. “내가 이러한 일을 해서, 큰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주님, 이제 이 종의 죄를 용서해 주시기를 빕니다. 참으로 내가 너무나도 어리석은 일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은 책임을 요구하시듯이 많은 것을 경험하고 많은 것을 누리게 된 다윗 왕에게 엄중하게 문책하십니다. 하나님은 세 가지 징벌을 제시하시며 “그 중 하나를 택하라 내가 너에게 그대로 처리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선지자 갓을 통해 다윗에게 제시된 세 가지는 “왕의 나라에 일곱 해 동안 흉년이 들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아니면, 왕이 왕의 목숨을 노리고 쫓아다니는 원수들을 피하여 석 달 동안 도망을 다니시는 것이 좋겠습니까? 아니면, 왕의 나라에 사흘 동안 전염병이 퍼지는 것이 좋겠습니까?” 등 이었습니다. 다윗 왕은 “괴롭기가 그지없습니다. 그래도 주님은 자비가 많으신 분이니, 차라리 우리가 주님의 손에 벌을 받겠습니다. 사람의 손에 벌을 받고 싶지는 않습니다.”며 세 번째 징벌, 질병의 징계를 택합니다. 그리하여 그 날 아침부터 정하여진 때까지, 이스라엘 전역에 전염병을 내리시니, 질병으로 죽은 사람이 하루에만 칠만 명이나 되었습니다. 이 처참한 모습에 다윗 왕이 이렇게 통회합니다. “바로 내가 죄를 지은 사람입니다. 바로 내가 이런 악을 저지른 사람입니다. 백성은 양 떼일 뿐입니다. 그들에게는 아무런 잘못도 없습니다. 차라리 나와 내 아버지의 집안을 쳐 주십시오.” 다윗 왕의 통회를 들으신 하나님께서 선지자 갓을 통해 하신 말씀이 바로 이것입니다.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으로 올라가서, 거기에서 하나님께 제단을 쌓으라” 그래서 다윗 왕이 하나님의 명령대로 아라우나 타작마당으로 갑니다. 그리고 아라우나에게 “그대에게서 이 타작 마당을 사서, 주께 제단을 쌓아서, 백성에게 내리는 재앙을 그치게 하려고 하오.”라고 말합니다. 아라우나는 “높으신 왕께서는, 무엇이든지 좋게 여기시는 대로 골라다가 제물로 바치시기 바랍니다. 보십시오, 여기에 번제로 드릴 소도 있고, 땔감으로는 타작기의 판자와 소의 멍에가 있습니다. 왕이시여, 아라우나가 이 모든 것을 왕께 바칩니다. 하나님께서 왕의 제물을 기쁜 마음으로 받아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다윗 왕은 아라우나에게 “그렇게 해서는 안 되오. 내가 꼭 값을 지불하고서 사겠소. 내가 거저 얻은 것으로 주 나의 하나님께 번제를 드리지는 않겠소.”라며 은 쉰 세겔을 주고, 그 타작 마당과 소를 샀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습니다. 다윗의 제사와 기도를 들으시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내리던 재앙이 그치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솔로몬이 건축한 하나님의 성전은 다윗 왕이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던 아라우나 타작마당, 참회를 예배를 드린 타작마당, 그래서 재앙을 그치게 한 타작마당이었습니다.
성전은 이처럼 참회의 제사를 드리는 곳입니다. 다윗은 밧세바를 범하고 우리아를 살인한 죄악을 범하고 이렇게 회개합니다.
(시 51:1-2)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2)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다윗은 하나님께서 제사 제물보다 상한 심령으로 통회하는 것을 멸시하지 아니하시는 분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시 51:16-17)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 아니하시나이다 (17)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하나님은 회개하는 사람을 부끄럽게 여기지 아니하십니다. 하나님은 참회라는 사람을 멸시하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통회하는 사람을 더럽다고 하여 멀리 하지 않으시고 죄악을 도말하여 정결케 하시며 더욱 더 가까이 하십니다. 회개하는 사람은 구원의 기쁨으로 유쾌해지는 삶을 누리게 됩니다. 그러나 회개하지 아니하는 사람은 은혜를 깨닫지 못하고 삶의 기쁨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하나님은 회개하는 사람에게서 성령을 거두지 않으십니다. 다윗 왕은 지은 죄를 두고 즉시 회개하므로 성령이 항상 그와 함께 하시었습니다. 그러나 사울 왕은 지은 죄를 지적받았을 때 회개하지 못하고 변명을 일삼고 그 죄의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하기에 급급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 사울 왕에게서 성령을 거두시고 그를 버리셨습니다. 회개하면 살고, 회개하지 않으면 망합니다. 예수께서 유월절 식사를 제자들과 함께 하는 자리에서 “너희 중에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서로 근심하여 “주여, 접니까?”고 물었습니다. 예수께서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나를 팔리라.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 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이에 유다가 “랍비여, 접니까?”하고 묻습니다. 예수께서 “네가 말하였도다.”며 말씀하십니다. 이렇게까지 분명히 회개할 기회를 주시는데도 유다는 회개하지 아니하고 결국 예수를 팔고 자살하여 죽고 맙니다.(마26:21-25)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님으로부터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마16:23)며 책망을 듣고 기분 나쁘게 여겨 예수를 배신하거나 떠나지 아니하고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며 더욱 더 예수께 달라붙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예수를 배신하여 세 번씩이나 부인했던 일을 회개했을 때 예수께서는 베드로를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베드로를 다시 찾아가셔서 소중한 사명을 주셨습니다. 죄를 회개하지 않은 유다는 망하고, 회개한 베드로는 더 큰 사명을 받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 갈릴리 사람들이 그런 변을 당했다고 해서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들보다 죄가 더 많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지만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다 그와 같이 망할 것이다.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 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사는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 죄가 더 많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지만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다 그와 같이 망할 것이다.”(눅 13:2-4)
죄 때문에 망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회개 하지 않기 때문에 망한다는 것입니다. 죄를 졌기 때문에 망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회개하지 않기 때문에 인간은 망하게 됩니다. 이 나라 민족과 지도자들이 엄청난 죄를 짓고도 멀쩡하다고 안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만 죄를 회개할 기회를 주신 하나님의 은총임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끝까지 회개하지 않으면 그 죄로 망할 날이 반드시 이르게 될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회개란 수치스러운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복을 가져오는 열쇠가 되는 것입니다. 영국의 성직자인 제레미 테일러는 “회개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가장 위대한 축복이다”라고 했습니다. 덴마크의 철학자인 키에르케고르는 회개에 대해서 “그리스도인이란 죄를 짓지 않는 존재가 아니라, 죄를 지어도 회개하고 그 자리에 계속 머물러 있지 않는 자이다.”라고 했습니다. 비록 죄와 허물이 있다고 해도, 마음과 생각을 바꾸어서, 하나님 앞에 돌아와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용서하시고 다시 축복을 베풀어 주십니다.
■ 옛날 가수 박재란씨는 18세 때 가수가 되어 “럭키 모닝”, “산너머 남촌에는”, “밀짚모자 아가씨” 등을 부르면서 인기 가수가 되었습니다. 인기와 돈으로 박재란씨의 인생은 황홀하였습니다. 그러나 가요계에 새로운 가수가 계속 등장하면서 박재란의 인기는 떨어지기 시작하였고 신혼의 단꿈마저 딸 하나를 얻은 뒤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가요계의 영광의 자리를 다시 차지하려고 했지만 어려웠습니다. 집념은 병이 되어 박재란씨를 쓰러뜨렸습니다. 심장과 신장에 이상이 오더니 급기야는 악성 위궤양이 되어 음식을 전혀 먹을 수없는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발병 초기에 딱하게 여기고 도와주던 이웃들도 하나, 둘 떨어져 나갔습니다. 6개월, 1년 2년이 되면서 얼굴은 새까맣게 기미로 뒤덮히고, 스타킹을 신을 수 없을 정도로 다리는 가늘어져서 일어서서 걷기조차 어려웠습니다. 나날이 짙어가는 것은 죽음에 대한 생각 뿐 구체적으로 어떻게 죽어야 할까를 생각하던 어느 날 무심중에 TV를 켜니 어느 목사님의 말씀 중에 “하나님께서 우주와 인간을 창조하시고...” 하는 말씀이 들려 왔습니다. 그 한마디가 갑자기 하늘과 땅을 가득 채웠습니다. 수없이 들어 왔고 무심히 지나쳤던 그 한 말씀이 갑자기 박재란씨의 마음을 치고 들어온 것입니다. “성경! 성경이 어디있지!” 하면서 성경을 찾아 읽기 시작했습니다. 한 번도 실감할 수 없었던 대목 대목들이 생명수처럼 마음속으로 흘러들었습니다. 눈물, 콧물, 엎드려 통곡하다가 자신의 죄를 자복하다가 어릴 적 소꿉동무에게 행한 거짓말까지 낱낱이 떠올라 회개로 밤을 세웠습니다. 시장기를 느낀 박재란씨는 냉수에 밥을 말아 김치를 반찬으로 먹었습니다. 먹다가 “아니 내가...김치하고 냉수에 밥을 말아서 먹고 있지 않아?” 깜짝 놀랐으나 몇 시간이 지나도록 멀쩡했습니다. 오히려 활기와 힘이 솟구쳤습니다. 너무도 신기하여 그때부터는 감사의 눈물을 봇물처럼 흐르면서 기도하였습니다. 그 후 15년 동안 병이 무엇인지 모를 만큼 건강하게 살면서 하나님을 간증하며 하늘나라의 영광을 노래하는 전도사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성경과 강단 설교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성경과 설교말씀을 듣고 보고만 끝나서는 안됩니다. 말씀을 들을 때 내 죄가 드러나야 하고 그 죄를 회개할 줄 아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박재란씨에게 애통한 회개가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예수님은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마 9:13) 하셨습니다. 세상의 빛이 되어 살려면 회개해야만 합니다. 기도가 열리고 감사가 넘치는 생활은 회개를 통해 얻어지는 것입니다. 사명이 회복되고 찬송과 기쁨이 회복되며 축복의 문이 열리는 길은 회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회개의 제사를 드려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곳입니다. 마음의 성전을 항상 거룩하게 지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복된 성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참된 성전
임덕순 목사
우리 중에 누가, 지난 추석에 고향집을 찾아갔더니 그동안 비워두었던 아버지가 살던 집에 낯모르는 사람이 들어와 살면서 온갖 잡동사니를 들여놓고 오물을 묻혀 놓았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 사람이 계속 집을 더럽히게 놔두겠습니까? 당신이 누군데 이집에 들어와서 이렇게 함부로 사용했느냐고 책망하면서 당장 나가라고 내어 쫓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이 집에서 놀든 말든 당신이 뭔데 우리한테 큰소리요?”라고 그들이 대든다면, 아들은 뭐라고 하겠습니까? “이 집은 내 아버지의 집이란 말이요, 내 아버지의 집이 당신네 놀이터인줄 아시오? 당장 나가고 다시는 들어오지 마시오.”라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웃집 사람들은 낯모르는 사람들이 내 아버지의 집에 들어와서 더럽히는 것을 보고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자기 아버지의 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들은 그런 일을 당하고 가만히 있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의 내용은, 예수님께서 갈릴리 가나 혼인집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들어서 그 집의 곤란한 문제를 해결해 주신 일이 있고난 다음에 예루살렘으로 가셔서 성전을 더럽히는 사람들을 내어 쫓으셨다는 기록입니다.
주님이 가서 보시니 성전이 난장판이었습니다. 온갖 장사하는 사람들로 우글거렸고 환전상들로 넘쳐났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제물로 제사하는 것을 이용해서 큰돈을 벌고 있었습니다. 모두들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줄을 알고는 있었지만 아무도 그 사람들을 말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왜냐 하면 그들은 그 집 주인의 아들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광경을 보시고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성전 안에서 파는 짐승들을 내몰으시고, 물건 파는 사람들의 좌판을 뒤집어 엎어버리셨습니다. 주님은 열정적이고 권위 있게 장사치들을 모두 성전에서 내쫓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무도 감히 건드리지 못하는 성전의 장사치들을 그렇게 열심히 소탕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분이 바로 이 성전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아들의 자격으로 아무도 못하는 일을 하셨고, 그분의 권위 앞에 사람들은 감히 대들지 못하였습니다.
주님은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고 호통 치셨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모독하면 죽임을 당할 수 있는 상황에서 누가 감히 하나님의 성전을 자기 아버지의 집이라고 당당하게 주장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아들은 할 수 있었고 당연히 해야 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성전을 내 아버지의 집이라고 하셨을 때, 사람들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 아심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러니까 감히 저항하지도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믿고 따르지는 않았습니다.
요즘 사람들의 관심사는 미국의 경제위기로 인한 영향이 우리의 물가와 주가에 어떻게 영향을 끼치는지에 관한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물가가 오를까 걱정이 되고, 돈이 조금 있는 사람이라면 내가 투자한 종목의 주가가 어떻게 되었는지, 그게 관심입니다. 그러나 당시 유대인들의 관심의 중심에는 성전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가 바로 드려지면 그들의 삶은 안전하고 복을 누렸으며, 성전제사가 피폐해지면 그들의 운명도 그렇게 되는 것을 반복적으로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물가보다 성전에 관심을 두었습니다.
오늘도 신앙을 제대로 가진 사람에게 가장 민감한 문제는 교회입니다. 만약 교회가 부패하고 타락한 사상이 교회를 오염시키면 마음이 불안해집니다. 교회는 세상의 빛과 소금인데, 교회가 부패하면 이 세상의 마지막 보루가 무너진 것이며, 하나님은 불신자들이 타락해서 세상을 심판하시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타락해서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게 되면 결국 그 사회를 심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앙이 깊은 사람들은 교회가 타락하면 하나님의 진노가 임할 것이라는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성전은 신자들에게나 의미 있는 기관이 아니라 역사의 흐름을 가름하는 바로메타가 되는 곳입니다.
그런데 당시의 성전은 헤롯이라는 이방인 출신 왕이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려고 무려 46년이나 걸려 멋지게 지어준 성전입니다. 겉은 아주 멋지고 화려했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서는 더 이상 더러울 수 없을 정도로 타락한 행위가 자행되고 있었습니다. 제사장의 자리는 돈을 주고 사고팔았으며, 제사장이 되면 제물 판매권을 통해서 돈을 벌어들였습니다. 해마다 유월절이 되면 전 세계에서 백 만 명도 넘는 유대인들이 몰려와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때 판매되어 바쳐지는 제물은 헤아릴 수 없이 많았고, 가만히 앉아서 엄청난 이익을 챙겼으며 이익이 있는 곳에는 온갖 비리와 범죄가 판을 쳤습니다. 이것이 당시의 예루살렘 성전입니다.
바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그렇게 타락한 성전의 모습을 보면서 두려워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이 저래도 될까? 제사장이 저렇게 타락했는데 심판이 없을까?” 모두 두려움에 휩싸였지만 아무도 감히 입을 떼지 못하였습니다. 잘못하면 성전모독죄로 사형을 당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주님이 오셔서 성전을 개혁했으니 생각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바로 알아보았고 반겼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교회가 타락했어도 사람들이 해결하기는 어렵습니다. 종교의 저항 때문에 정치나 법으로는 해결 못합니다. 교회스스로 회개하고 개혁을 하든지, 아니면 하나님이 심판하시든지 둘 중에 하나입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그런 모습을 보면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요즘 한국교회가 얼마나 부패하고 타락했는지 저는 대충 압니다. 말씀을 드릴 수 없을 정도로 부패하고 타락하여 두렵습니다.
한국교회의 타락상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강단의 부패입니다.
복음이 아닌 인간의 사술이 교회의 강단에서 멋진 화술로 포장되어 전파되고 있고,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훨씬 인기가 있습니다. 오늘 인간의 사술이 강단을 장악해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달콤하고 짜릿한 이야기와 감성적인 음악이 말씀을 제쳐버렸습니다. 심지어 어설픈 자기주장을 하고는 “믿습니까?”라고 묻고, “아멘” 하도록 강요하여, 세상 사람들이 교회를 생각할 때 예수쟁이들은 모두 맹신자인것으로 오인하게 만들었습니다. 교회는 말씀을 회복해야 하고, 성도들은 자기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한마디를 듣기 위해서 교회로 찾아와야 합니다.
둘째는 교회정치의 부패입니다.
교회생활은 공동 신앙생활인데, 공동생활에는 질서를 유지해야 서로에게 유익하고, 타락하고 범죄하지 않아야 교회의 거룩성이 유지됩니다. 그래서 교회에는 당회 노회 총회 등 치리회라는 기관이 있어서 성경을 가지고 성도들의 생활을 지도하고 감독하고, 혹시 죄를 범한 사람을 징계하기도 하고, 행정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공동신앙생활을 하는 교회는 치리회가 건실해야 안전하고 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한국교회의 치리회가 타락해가고 있습니다. 성경과 교회법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이 잣대가 되었습니다. 성도들도 죄를 지었으면 종아리를 걷고 매를 자청해야 하는데, 잘못을 저지르고도 변명하고 대들고 도망치는 상황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더럽히는 것이요 우리 모두를 망하게 하는 매우 위험한 타락상황입니다.
셋째는 성도 생활의 타락입니다.
오늘 교회에 다니는 한국 성도들이 생활은 반듯하고 정직하고 성실해서 불신자보다 낫다고 할 수 있습니까? 과연 주님이 명하신 대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고 있습니까? 오히려 불신자들이 신자들을 욕하지 않습니까? 예수쟁이들은 말만 잘하지 생활은 우리만도 못하고, 외상값도 잘 갚지 않고, 한번 토라지면 끝내 풀지 않는 옹졸한 사람이라고 비난받지 않습니까? 양심이 화인 맞아서 불신자보다도 더 뻔뻔하고, 음란에 함께 빠져있지 않습니까? 과연 우리의 생활은 거룩하고 성실합니까? 그렇지 않고 타락했습니다.
따라서 오늘의 한국교회나 예수님이 오셨을 때의 예루살렘 성전이 별반 다를 바 없습니다.
예루살렘의 성전이 그렇게 타락해서 모든 백성이 두려워하고 있을 때 몇 명의 제자를 데리고 갈릴리에서 올라오신 젊은 예수가 성전에 들어가셔서 아주 권위 있게 부패한 성전을 청결케 하는 모습을 사람들이 보았고, 이 사건은 유대인들에게 너무나 충격적인 사건이어서 삽시간에 온 나라 안에 퍼져나갔을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그분이 바로 그 성전의 주인의 아들이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우리 같지 않고 성경을 달달 외울 정도로 많이 읽은 사람들인지라, “보라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소개한 세례요한의 소개가 아니더라도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주님 앞에 나와서 나다나엘처럼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고백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이런 질문을 하였습니다.
“이에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예수께 말하기를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뇨.”(18)
“네가 겁 없이 이런 일을 하는 것을 보니 아마 선지자인 모양인데, 네가 선지자라는 증거를 한번 보여 줘 봐” 그런 말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으면서도 일부러 자기 양심을 속이면서 ‘당신이 아마 선지자인 모양인데 선지자라는 증거를 대봐’하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가증한 사람이 되었을까요? 그들의 마음에 진리를 사모하는 마음은 없고, 오직 돈 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마음이 어떤 욕심으로 마음이 채워지면, 진리가 무엇인지 알면서도 진리에 관심을 두지 않게 되고, 자기가 따라야 할 진리를 발견하고도 인정하지 않으려 하게 됩니다.
사람이 죄를 짓는 이유는 진리를 몰라서일까요? 무엇이 죄인 줄 몰라서 죄를 지을까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몰라서가 아닙니다. 무엇이 옳은지 몰라서 의롭게 살지 않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 죄인 줄 몰라서 죄를 짓는 것도 아닙니다. 무엇이 옳은 줄은 다 압니다. 다 알고 있지만 돈에 양심을 팔았기 때문에 옳은 것을 보고도 옳다고 인정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성경을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사용하기를 포기했습니다. 유리할 때는 성경을 펼쳐들지만 불리할 때는 성경을 덮어버리고 얼마든지 무시합니다. 이것이 잘못된 신자들의 모습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잠자는 양심을 깨우려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알면서도 일부러 모르는 체 합니다. 이것이 죽은 영혼, 죽은 양심을 가진 오늘 한국교회 신자들의 모습입니다.
이제 우리 그렇게 하지 맙시다. 주님의 말씀이 내게 부딛칠 때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읍시다. 나다나엘이 했던 것처럼 고백합시다.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나의 임금이십니다. 저는 저의 임금님이신 주님의 뜻대로 살겠습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죄와 욕심으로 죽었던 나의 양심을 살려주실 것이고, 내 영혼을 새롭게 하시며 나의 길을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주님은 그날 그들앞에서 성전을 헐면 다시 세우겠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19)
이스라엘 사람들이 금기시 하는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성전 파괴와 관련한 것인데, 성전이 파괴되는 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아 나라가 멸망하는 것을 의미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과거에 자신들의 범죄로 성전이 파괴되고 나라가 망해서 뿔뿔이 흩어져서 살았던 쓰라린 과거가 있었기 때문에, 성전이 파괴되는 것을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성전의 파괴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좀 특이한 것은 이방인이 와서 성전을 파괴한다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라고 하심으로 유대인들이 성전을 파괴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의 성전을 파괴하면 자신이 사흘 만에 다시 일으키겠다고 하십니다. 이 말씀을 유대인들은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 성전은 사십 육년 동안 지었거늘 네가 삼일 동안에 일으킬 수 있느냐.” 그들은 눈에 보이는 건물만을 성전이라고 생각하고 주님의 말씀을 비웃고 있었습니다. 네까짓 것이 아무리 목수라고 하지만 이 큰 성전을 사흘 만에 짓겠다니, 너 미친 사람 아니냐는 조롱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21절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자존심이요 돈벌이가 되는 성전을 자기들 손으로 파괴할 리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헤롯이 지어준 건물인 성전을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성전은 참 성전이 되시는 당신의 육체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이해하십니까? 예수님이 어떻게 참 성전이 되시지요?
성전이 무엇이지요? 죄를 지어서 하나님의 외면과 심판을 받는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 뵐 수 있는 유일한 장소가 구약의 성전이었습니다. 광야생활을 할 때는 텐트로 만든 성막이었고, 가나안에 정착한 후에는 멋진 건물을 짓고 성전이라 불렀습니다. 모양이야 어떠하든지 성전은 죄인이 하나님께로 가는 유일한 길이요 장소였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본문에서 당신이 성전이라고 하십니다. 무슨 뜻이지요? 예수님은 인간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려고 하나님이시면서도 인간의 몸을 입고 찾아와주신 분이요, 주님이 우리 죄를 지고 십자가에서 죽어주신 이후로는 누구든지 예수님께로 가면, 즉 예수를 믿으면 멸망할 우리의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의 품에 안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요14:6에서 “내가 곧 그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당신이 그 길이라는 말씀은, 당신이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는 유일한 길, 참된 성전이라는 뜻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유대인들은 성전 되신 주님을 죽였으므로 성전을 파괴한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심으로, 성전을 사흘 만에 다시 일으키겠다던 말씀을 이루셨습니다. 그러니까 구약의 성전들은 참된 성전이신 예수님이 오시기까지 예수님이 하실 역할을 암시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구약의 성전은 “죄인이 하나님께 용서받고 사랑받는 방법은 하나님이 준비하신 제물인 그리스도가 죽으시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준비하신 그 제물이시고, 인간구원의 그 길이시다.”라는 사실을 암시하고 예고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참되신 성전이신 예수님을 유대인들은 헐었고, 하나님은 일으키셨습니다. 성전이신 예수님은 일어나셨습니다. 유대인들이 죽음에 내어준 당신이 부활로 다시 일어나신 것만이 아니라, 주님은 다른 성전을 세우셨습니다. 당신을 하나님의 아들이요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을 모아서 교회라는 공동체를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사람들에게 성령을 부어 주셔서 그들이 머리이신 그리스도에게 속하여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롬6장에 보면,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는 것은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와 연합된 우리도 성령님을 모신 성전이 되었습니다. 고전 3:16-17에 보면,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신자는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었고, 죄인된 사람을 하나님과 연결시키는 자이기에 신약시대의 신자는 그 시대의 성전입니다. 그리고 이 성전된 신자들의 모임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이 하셨던 것처럼 사람들 가운데 있으면서 죄인과 거룩하신 하나님의 만남을 주선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주님이 자신을 희생해서 죄인을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가 되게 하신 것처럼, 오늘의 성전인 교회와 성도들 역시 자신을 희생해서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해주어야 합니다.
사람들의 눈에는 하나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을 믿는다는 교인들이 보입니다. 우리가 타락하고 부패한 모습으로 살아서는 죽었다 깨어나도 사람들을 하나님께 인도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도리어 우리를 보고 하나님이 죽었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새로워져야 합니다.
이 시대에 하나님의 성전을 깨끗하게 한다는 것은, 우리가 거룩해 지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안에 똬리를 튼 죄 된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을 이용해 먹으려는 속셈을 버리고, 부패한 습성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성령이 내안에 거주하시는 성전입니다. 그러므로 성전답게 깨끗해야 하고, 그리스도다워야 합니다.
구약시대에는 보이는 건물이 성전이었지만, 오늘날에는 보이는 건물이 성전이 아닙니다. 물론 건물이 없으면 모이기가 불편하겠지만 큰 건물이 있으면서 거기서 자기 유익을 추구하는 것보다 건물이 없을지라도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더 진실해지고 더 말씀에 순종해서 주님을 닮아가는 삶을 살고 이웃을 위해서 사랑을 실천하며, 그들이 하나님을 공경하는 생활을 하도록 해준다면, 그것이 성전의 역할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람들을 하나님께 인도해서 하나님의 품안에서 사랑받게 하는 길입니다.
이것을 알면서도 행하지 않아서 자신이 타락한 채로 살아가고, 교회가 타락하게 가만히 놔둔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성전을 파괴하는 행위입니다. 하나님은 그를 버리셔서 하나님 앞에 서지 못하게 하실 것입니다.
오늘 우리 신자들의 모임이 구약시대 성전보다 더 위대하며, 참 성전이신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안에 거주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바로 그 영광스러운 성전이라는 성경말씀을 이해합시다. 우리 모두가 거룩한 생활에 힘씁시다. 우리의 변화된 생활과 헌신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우리 주님의 거룩하시고 사랑해주시는 모습을 보여 주면서 하나님께로 이끌어 하나님과 만나게 해주어 이 시대의 성전 된 사명을 다합시다. 주님의 영을 모신 우리가 각자 자신을 깨끗하게 하고 전도에 헌신함으로 이 시대의 참된 성전이 됩시다.
종교개혁의 정신 회복
전국교회가 종교개혁주일로 지키는 날입니다.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의 성전 청결 사건으로서 종교개혁의 중요한 성경적 원리가 됩니다. 그런데 본문의 말씀은 종교개혁을 485주년을 맞이한 시점에서 많은 도전과 각성이 되는 중요한 말씀입니다.
오늘은 전국교회가 지키는 종교개혁을 기념하여 지키는 종교개혁기념주일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중에는 종교개혁이 얼마나 중요하기에 종교개혁기념주일까지 지키느냐고 반문하시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 물음에 대해 대답부터 한다면 종교개혁은 개혁교회, 장로교회에 참으로 중요한 의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장로교인이라면 말하면서 종교개혁에 대해서 무관심하거나 무지(無知)하는 것은 참으로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물론 종교개혁에 대해서 몰라도 천국은 갑니다. 그러나 장로교인이라고 말하면서 장로교회의 뿌리를 모른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한국교회는 매년마다 종교개혁기념주일까지 지키면서 그 정신과 뿌리를 다시금 되새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로 인해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은 우리는 과연 무엇을 의지하며 살고 있습니까? 혹 말씀이 아닌 세상적인 철학이나 과학만을 믿고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까? 삶의 척도요, 믿음의 본질이 되는 말씀에 따라 살게 될 때만이 우리는 승리의 삶을 살수 있으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은 두 가지 중요한 명제를 가집니다. 하나는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이었고 다른 하나는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원리로는 성경으로 돌아가야 하고, 방법으로는 항상 개혁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작금의 한국교회는 개혁교회를 표방하면서도 개혁교회답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지금은 어느 때보다 개혁교회다운 자기 정체성을 회복할 때입니다. 지금은 어느 때보다 개혁정신이 회복이 필요할 때입니다.
지금 우리는 세계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는 지금 표류하고 있는 듯 한 상황 속에 있습니다. 16세기에 개혁의 기치를 들고 세워진 개신교회는 18세기 이후에 밀어닥친 [근대과학주의]라는 새로운 시대에 대처할 수 있는 교회로서의 정체성을 가지지 못할 때에 여러 종류의 분파가 발생되었던 것처럼, 이제 21세기의 대변화의 시기를 맞아 오늘날의 현대교회가 개신 교회로서의 참된 모습을 나타내지 못할 때에 현대교회는 도태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시대적 정황을 떠나서 존재할 수 없는 교회공동체는 반드시 시대에 걸 맞는 복음의 요람지(搖籃地)가 되기 위해서는 시대적 변화에 민감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현대교회 특히 한국교회는 [빛 좋은 개살구]격으로 시대적인 사명감을 상실한 채 방향감각(方向感覺)을 잊어버렸고, [교인 늘리기]에만 급급한 채 빛과 소금으로서의 본을 보이지 못한 채 제자리를 걷고 있는 실정입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불신자들로 하여금 복음의 능력을 나태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믿는다는 이름을 가졌으나 사실상 믿음의 내용(알맹이)를 갖지 못했고, 에베소 교회처럼 처음 사랑을 버렸으며,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차지도 덥지도 아니한 것이 오늘의 실제적인 상황입니다. 그러나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교회 안에 교회 안에 세속화의 물결이 들어와서 상업주의,혼합주의,교권주의,형식주의가 판을 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특히 21세기 들어와서 건전한 정신문명이 결여되고 기계화, 정보화, 산업화 과정에서 인간이 더욱 소외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인들까지도 황금우상주의, 과학우상주의, 기술우상주의로 인하여 성경적인 가치관이 위협을 받고 있는 실정에 있습니다.
그래서 혹자는 "바로 지금이 제2의 종교개혁의 깃발을 들어야 때이다"라고 역설적으로 피력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종교개혁은 "개혁교회는 끊임없이 개혁되어야 한다(Ekklesia semper reformanda)"는 명제 속에서 출발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종교개혁의 배경과 개신교회의 출발점을 함께 살펴보면서 우리가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면서 은혜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1. 종교개혁과 개혁교회은 어떻게 출발했습니까?
종교개혁은 로마 카톨릭의 젊은 사제인 마틴 루터(Martin Luther)에 의해서 지금부터 485년 전에 시작되었고 쟝 칼벵에 의해서 체계화되었습니다. 마틴 루터가 1517년 10월 31일 정오에 개혁의 깃발을 높이든 것은 바로 부패의 온상(溫床)이 되어버린 로마 교회를 복음의 요람지(搖籃地)로서의 제 기능을 발휘하도록 시도한 것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로마교회는 이를 거부했습니다. 이에 성경적인 교회 상을 추구하고 복음의 요람지로서의 참된 교회의 모습을 띤 교회가 새롭게 태동되었는데, 그것이 개신교회입니다. 본래 [개신교]라는 말은 영어로 [프로테스탄트](Protestant)라는 말인데, 이 말은 16세기 변질된 로마교회에 대해서 반항하여 개혁의 기치를 들고 세워진 성경적인 교회 상을 추구하는 개신교회를 지칭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16새기에 종교개혁이 시작된 직접적인 발단은 [교황 레오 10세]가 [대 베드로 성당 건축]을 위한 기금 조성을 위해 속죄표(면죄부)의 판매를 강매함으로 말미암아 비롯되었습니다. 물론 종교개혁의 분위기는 부패하고 타락한 로마 카톨릭를 바로 잡기 위해서 시작되었지만, 이것이 기폭제가 되어서 종교개혁의 불씨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100년 동안 이끌어 온 공사비를 충당하기 위해서 1506년 다시 로마 카톨릭 교회는 속죄표 판매를 계속하였습니다. 그리고 판매의 촉진을 위해 판매 수입의 반액을 지방 감독이 차지하고 판매 책임자 판매량에 따라 보상을 받고 나머지는 교황청으로 보내게 하였다. 당시의 판매 책임자인 [도미니칸 수도사 테첼]은 “속죄권을 사는 사람은 죄를 용서받을 것이요, 연옥에 있는 자를 위해 사면할 수 있는데, 그 은화가 헌금함 속에 떨어지는 소리가 나는 순간에 곧 천국으로 올라간다”라고 외쳤습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비텐베르크 시에는 속죄권 판매를 통해서 일확천금을 누리고자 하는 종교 모리배들이 판을 치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때에 젊은 사제 마틴 루터는 로마서 1장 16절과 17절을 통하여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살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으리라”는 진리의 말씀 앞에서 뜨거운 도전을 받고 종교개혁의 깃발을 들고서 일어났던 것입니다. 젊은 사제 마틴 루터가 개혁의 깃발을 드는 것이 어쩌면 무모하기에 이를 데 없는 어리석은 행동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말씀대로 살려고 몸부림치는 젊은 개혁자 마틴 루터의 팔을 붙잡아 주셨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강력한 도우심 속에서 급기야 1517년 10월 31일 정오에 비텐베르크 성 교회문 앞에 95개조 선언문을 게재하고 반대설교를 하였습니다. 그 요지를 보면 ① 속죄권은 판매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며, 속죄권을 가지고 하나님께 대한 죄를 사할 수 없다 ② 교황은 죄사할 권세가 없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에게만 권한에 있는 것이다. ③ 속죄권은 연옥에 있는 영혼에 대하여 효력이 없다. 교황은 죽은 자에게 권한이 미치지 못한다. ④ 사죄에 필요한 것은 오직 회개요, 돈이나 속죄권은 쓸데없고 교황의 중계가 필요 없다 등 입니다.
그런데 루터의 이러한 생각은 교황의 반성을 촉구하고 교회가 개혁되기를 원하는 생각에서 시작된 것이지 교황이나 카톨릭 교회에 반항하고자 하는 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이 기폭제가 되어서 한 달 만에 전 유럽에 퍼져 각국에 큰 충동과 선풍을 일으켰습니다. 하지만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 후 모든 주변 국가는 탄압을 하였지만 화란(네덜란드)만은 프로테스탄트(신교)를 환영하였고 이 결과 화란은 스페인과 30년, 100년 전쟁을 치루게 되었습니다. 결국 전쟁은 화란의 승리로 끝나게 되었고 프로테스탄트는 루터를 통하여 개혁이 되고 [쟝 칼벵]은 통하여 체계화 되었던 것입니다. 개혁 1세대인 루터는 원리 중심의 개혁을 했다면 개혁 2세대인 칼빈은 실천 중심의 개혁을 시도하였습니다.
개혁과 갱신에 대한 바른 이해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개혁](Reformed)란 말은 “무엇이든지 과거의 것은 부수고 새로운 것을 만드는 것”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과거의 것을 부수고 새로운 것을 만드는 것의 뜻을 내포하는 단어는 요즘에 쓰이는 있는 갱신(Renew) 혹은 변혁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개혁이란 교회가 비본질적으로 되어진다든지 신앙의 내용이 선지자와 사도들이 증거 했던 성경 진리와 달라졌을 때 그것을 본래의 신앙의 원리대로 바로잡고 바로 되돌려 놓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개혁 교회(Reformed Church)는 계속해서 개혁되어야 한다는 개혁교회의 기본적인 명제는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에 있는 교회는 늘 부패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오늘날 와서는 신학의 변질과 세속주의, 물질주의, 편리주의로 말미암아 교회는 사실상 위기에 봉착하였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개신교회는 ① 배금주의, 상업주의 ② 혼합주의 ③ 형식주의 등으로 인하여 개혁정신이 왜곡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오늘날의 현대교회가 수적으로 성장하였다고 하지만 윤리와 도덕적인 면에서 많은 타락을 하였기에 불신자들로 하여금 믿음생활에 대한 설득력을 상실해 버렸습니다. 그러기에 지금 우리는 종교개혁의 정신을 회복해야 합니다. 개혁되지 않는 교회는 건강한 교회가 될 수 없습니다.
2.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에 종교개혁의 정신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본문의 말씀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그의 공생애의 첫 번째로 예루살렘 성전을 방문하였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성전은 성전 본래의 기능을 상실하고 상업화, 시장화 되었으며, 세속주의가 판을 치고 있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메시야적 행동으로 과감하게 성전의 상인들과 환전상을 내어 쫓아내셨습니다. 그것은 메시야적 권위로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행위와 말씀은 거기 모인 모든 사람들에게와 제자들에게와 당시 교회 지도자들에게는 놀라움과 충격이었습니다.
첫째로, 교회의 본질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집입니다. 기도하는 집입니다. 성전은 하나님 앞에 경건히 예배드리는 처소입니다. 성전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곳입니다. 그리고 구원이 선포되는 곳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의 유대교는 이미 타락했습니다. 이미 상업주의가 강하게 침투되었습니다. 유월절 절기가 하나의 상업상의 대목 경기로 바뀌어졌습니다. 경건하고 신성해야 될 성전 안은 양과 소를 파는 우시장이 되었고, 관심은 오직 상거래뿐이었습니다.
종교가 세속화 될 때 무력하게 됩니다. 그것을 제재할 아무런 기력도 없었습니다. 당시의 제사장들은 타락했습니다. 금전 수수를 통해서 예물을 바치는 순서를 바꾸는 등 실로 원초적인 부정행위가 자행됐으므로 성전 안에 들어온 상업주의를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요 2:16에 "내 아버지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교회 안에 들어온 상업주의가 성전을 부패하게 했다는 예수님의 예리한 분석이었습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한지 485년을 지난 지금 오늘날의 한국교회의 현실적인 상황을 진단하고 평가하는 참으로 중요한 의의가 있는 것입니다. 선교2세기를 맞이한 한국교회는 괄목할 만한 급격한 교회성장을 가져왔습니다. 그래서 세계교회로부터 주목을 받으며 연구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수적성장은 질적인 성숙을 동반하지 못한 면이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급성장에서 찾기도 하고 유교적 가치관과 혼돈에서 찾기도 합니다. 그러나 보다 정확한 분석은 교회의 윤리적 타락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교회의 윤리적 타락은 어떠한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는 수치요, 마땅히 바로 잡아야 할 교회의 과제입니다. 그러면 오늘날의 한국교회는 어떠한 위험수위에 있는지 함께 생각해 봅시다.
① 교회내의 상업주의입니다.
교회사를 보면 상업주의가 교회 안에 깊숙이 들어올 때 교회는 타락했습니다. 물질주의가 교회에 들어올 때 진리의 표준을 잃고 표류하게 되는 것입니다. 중세기에는 교회가 포도주를 만드는 양조장을 수도원에서 시작하고 양곡장사와 모리장사를 동시에 함으로 외형적으로 교회당의 건물은 화려하고 크게 되었으나 교회는 냄새나는 타락하는 교회가 되고 결국은 비교회로 되어 생명없는 단체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예수님 당시 성전은 제사 용품을 팔고, 돈을 바꾸는 장터로 변했습니다. 이러한 상업주의는 지금의 교회에서도 만연하고 있습니다. 왜 이스라엘의 여로보암은 벧엘과 단에 금송아지를 만들어 그들을 이끄는 신이라도 했습니까? 금은 가장 값진 것이기에 하나님은 값진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배금주의, 상업주의는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가장 두드러지는 윤리적 타락의 요소입니다. 교회의 재산은 재산 증식 수단이 아니라 재산의 분배의 수단임에도 오늘날의 현대교회들은 앞을 다투어 많이 가지려고 하고 있습니다. 언제부터인지 한국교회는 예배당, 교육관, 기도원의 순으로 부동산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교회의 재산축적은 중세 교회의 타락요소를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며 한국교회의 중세화를 가속화시키는 것입니다. 동시에 이러한 물질적 타락은 윤리적 타락뿐만 아니라 세상의 빛도 소금도 되지 못하게 되는 본질적인 타락인 것입니다.
② 교회내의 혼합주의입니다.
지금 교회는 교회로서의 순수성을 상실해 가고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성전은 헤롯 성전으로서 헤롯은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유대인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성전을 지었고 당시 교권자들은 성전완공을 위해서 온갖 야합을 서슴치 않았습니다. 종교와 정치의 야합, 그리고 사회적 방법이 판을 치는 종교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한국교회는 교회로서의 순수성을 이미 상실하고 정치에 인기를 얻기 위하여 사회적 공실이 일반화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불법적으로 지은 교회 건물도 수없이 많고,교회의 업무를 위해서 뇌물을 주고, 교회의 지도자들이 거짓말을 예사로 하고,교회 이름을 붙인 차들이 일반 차들의 비난을 받으면서 교통위반을 해도 가책조차 느끼지 않고 있습니다. 교회가 추구해야 방법은 적어도 사회의 방법은 아니어야 합니다. 결과뿐만 아니라 과정도 중요함을 알아야할 것입니다.
③ 교회내의 교권주의입니다.
당시의 성전은 대제사장을 비롯한 교권주의자들이 득실거리는 자리였습니다. 성전이 하나님의 것이며 자신의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상인들에게 돈을 받고 성전의 이권을 주었습니다. 어느시대를 막론하고 교회가 교권주의에 흐르게 되면 교회의 윤리적 타락은 가속화될 수 밖에 없습니다. 교회의 성직자들이 타락하면 교회도 타락하고,성직자들이 타락하지 않으면 교회는 타락하지 않습니다. 한국 교회의 가장 큰 윤리적 약점은 교권주의입니다. 교회가 권위주의로 흐르고, 성직자들의 생활이 윤택해짐으로 소명의식보다 직업의식이 앞서고 교회가 대형화됨으로 그 다음 순서인 명예심이 교회를 지배하여 교회도 박사인 목사를 원하며, 목사라는 직분도 시시하고 박사라는 칭호를 얻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총회에서는 [장](長)자리에 대한 욕구로 수억을 주고 총회장 자리를 사기도 합니다. 중세 시대뿐만 아니라 현대에도 성직매매(聖職賣買)가 성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복음의 본질을 변질시키며 교회의 순수성을 변질시키는 요소들인 것입니다. 따라서 교권주의 혹은 권위주의는 복음주의 교회에서는 분명하게 배격되어야 합니다.
⑷ 교회내의 형식주의입니다.
원래 이스라엘 성전 앞에서 파는 제사용품은 여행자들을 위한 것이었으나 얼마 후에는 일반인들이 제물을 준비하지 않고 성전 앞에서 적당히 제물을 사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흠이 있는 비둘기는 반액으로 깎아 팔고 제사장은 이들 상인들이 판 흠이 있는 것들도 제사용으로 합격시켜 주었습니다. 상업주의와 교권주의는 결국 교인들로 하여금 형식주의자가 되게 하였습니다. 이름은 분명 그리스도인이지만 사회에서 작은 그리스도로 살지 못하고 까닭이 여기에 있고 주일에는 교인이지만 평일에는 훨씬 비윤리적인 집단으로 전락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이러한 윤리적 타락이 우리의 아픔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형식주의와 편리주의가 성전 안에 들어 왔을 때,그것은 생명없는 종교로 시장화되어 버렸습니다. 교회가 생명을 잃을 때 형식주의가 되어 버립니다. 진리운동,말씀운동이 약화될 때 요란하게 옷을 입고, 요란하게 책상과 의자를 꾸미게 되는 것입니다. 요란하게 건물을 꾸미고 외형을 단장하는 형식주의가 일어납니다. 세속주의적인 편리주의도 마찬가지 입니다.본래 멀리서 온 유대인들의 편리를 도모하기 위하여 성전 뜰에서 소와 양을 팔고 히브리 돈인 세겔로 바꾸는 편리한 제도를 만들었으나 결국 그것은 성전 안을 점령하고 깊숙히 세속주의가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편리하게 보이고 합리적으로 보이는 것도 진리가 아니면 용납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은 그 반대로 노끈을 만드시고 성전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몰아냈습니다. 결국 예수님의 행위 즉 예수님의 개혁운동은 교회를 참 교회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진리의 기둥과 터입니다. 교회는 구원의 방주이며 세상의 빛과 소금을 감당해야 합니다.
교회를 참 교회되게 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지상 과제입니다. 그것은 16세기의 개혁자들의 과제인 동시에 오늘 우리의 과제입니다. 지정한 개혁은 언제나 교회되게 해야 합니다. 형식보다는 진리와 은혜가 있는 교회로 겉모양보다 내용을 지켜 나가는 교회에 되어야 합니다. 의식주의, 형식주의, 유물주의, 편리주의 사상에서 깨어나 주님께 향하여야 하겠습니다. 현대신학에 있어서 교회란 가능성만 보려하고 진정한 교회의 본질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무관심해 버립니다. 선교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바른 원리를 갖고 선교를 해야만 인간이 자랑이나 공로가 들어나지 않고 주님의 은혜가 드러납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서든지 오직 주님이 나타나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드신 채찍은 마땅히 현대교회를 향한 것이어야 한다고 확신합니다. 이를 위해서 교회의 주요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①
복음 전파(행 5:42) ② 말씀을 가르침(행 2:42) ③ 성도의 교제(행 2:42-46) ④ 성만찬과 세례 집전(고전 11:23,24) ⑤ 권징(마 18:17) ⑥ 구제(행 6:1-3) 등 우리가 감당해야 할 몫이 참으로 많이 있습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말씀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루터의 개혁을 성경으로 돌아가는 운동이었다면 현재의 개혁도 성경으로 돌아가는 운동이어야 합니다. 개혁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시작하며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을 숙정하신 일도 성경이 가르치는 예배로 돌아가려는 의도였습니다. 성전에서 장사꾼과 환전상을 내쫓은 것은 성전에서의 제사를 방해하는 것이었습니다. 악행을 하고 하나님의 집에 들어와 보호받으려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셨습니다. 지금의 개혁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회복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본문에서 행하신 것은 자기의 성전 청결사건은 구약의 약속성취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개혁사실은 구약의 성취이며, 성경을 성경되게 하는 운동입니다. 요 217에 보면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한 것을 기억하더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참된 개혁은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의 사상으로 되돌아가는 운동입니다. 교회가 타락하는 과정에는 말씀보다 다른 것이 강조되기 시작합니다. 성경보다 사람의 이름이,성경보다 돈이, 성경보다 사업이, 성경보다 사랑이, 성경보다 정의가 강조되어 집니다.성경보다 사람의 소리가,성경보다 전통이, 성경보다 이적이, 성경보다 꿈이, 성경보다 다른 무엇이 강조됩니다. 성경보다 전통과 편리주의와 의식주의가 강조되었을 때 천주교는 타락했고 18세기와 19세기 교회는 성경보다 합리주의, 과학주의를 강조하다가 자유주의 신학을 만들어 유럽교회는 다시 멍들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오늘 성경을 성경으로 바로 해석하고 하나님의 말씀 지상주의가 되어야 합니다. 성경만이 신학과 신앙과 행위의 유일법칙임을 깨닫아야 할 것입니다.
요 2:22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및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고 한 것을 보면 그리스도의 개혁운동은 말씀을 성취하는 운동이었습니다. 오늘 많은 진보적인 사상을 가진 사람 중에는 성경 없는 기독교를 주장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역사를 보면 결국 중세교회가 성경 없는 기독교를 만들다가 썩어 냄세나는 교회가 되었던 것처럼 오늘도 성경 없는 기독교를 만들다면 그것은 머지않아 교회는 깊은 타락의 구렁에서 헤어 나올 수 없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일찍이 정통신학자 사무엘 박사의 말처럼 "성경 없이는 교회가 없다. 성경이 없이는 오래 전에 한 이해할 수 없는 만화로 퇴화해 버렸을 것이다"라고 한 말은 정곡을 찌른 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말씀으로 바로 선포되어질 때 참된 교회가 되는 것이며, 이것이 참된 개혁의 요건이 되는 것입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은혜를 회복되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1장 16-17절에서 말씀하시고 있는 것처럼 우리가 의인은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믿음조차도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사는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서도 공로신앙이 나타나지 말아야 합니다. 자기의 업적이 나타나지 말아야 합니다. 오직 주님께서만 영광을 받으셔야 합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성전 청결의 사건 현장에서 그의 개혁의 합리성을 따지면서 '무슨 표적(이적)을 우리에게 보일 수 있는가?'라고 따졌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말을 듣고 성전된 자기의 몸과 십자가를 통한 구속을 제의했습니다. 즉 십자가에 죽었다가 삼일만에 부활하실 자신을 제시했습니다. 이적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 자신입니다. 주님의 은혜입니다. 십자가의 대속을 통한 그의 은혜입니다.
인간의 노력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사실을 제시했습니다. "오직 은혜로(Sola Gratia)" 말미암아 성도가 살 수 있음을 제시했습니다. 교회가 타락하고 어두워지면 인간의 공로와 노력을 상당히 강조하기 시작합니다. 인간의 지식과 자연과학이 마치 신앙의 해석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될 때 교회는 어두워집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되는 사실을 말씀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은혜를 은혜되게 할 때 참된 기독교는 지켜집니다. 오늘의 한국 교회의 문제는 '은총의 종교'를 '율법의 종교'로 바꾸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율법주의 사상은 또한 자율주의 사상입니다. 자율주의는 절대로 하나님을 만날 수 없고 은총의 복음을 깨닫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은총의 복음으로 바로 선포되고 바로 믿는 한국 교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3.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21세기를 맞이한 한국교회은 새롭게 거듭나야 합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상업주의, 혼합주의, 교권주의, 형식주의 혹은 편리주의에 사로 잡혀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라도 개혁의 정신에 따라서 다시금 복음의 교회로의 정상적인 교회공동체를 유지하려고 개혁을 시도한다면 급격하는 21세기를 대처할 수 있을 것입니다.
21세기는 다양화와 국제화의 시대입니다. 따라서 교회도 마땅히 이 새대적인 구조에 맞도록 다양한 길을 가야 합니다. 국제화의 의미나 다양화의 의미는 인간이 더불어 살기 위한 표현입니다. 때문에 교회는 더불어 살 수 있는 길을 모색하는데 앞장서야 합니다. 종교개혁은 교회공동체를 파괴하자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정상적인 교회공동체를 회복하려는데 그 목적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종교개혁은 지구촌의 교회가 더불어 그리스도의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파하기 위하여 공동체적인 의미의 연합사업에 동참하여야 하며, 기독교의 정체성을 제대로 심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할 때에 한국교회의 큰 병폐 중의 하나인 교회가 사회에 대한 현실감각을 상실성에 대한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21세기에 교회가 살아나기 위해서는 교회가 사회에서 인정을 받을 수 있는 위상을 정립해야 합니다. 결국 인간의 삶 전체를 복원시키는 구원 운동을 전개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사회복지 운동(재소자의 교정문제, 신체장애자, 고아, 과부, 소년소녀 가장, 병든 자, 가난한 자에 대한 배려), 인권문제(여성문제, 정치적 탄압),국가문제(남북분단의 극복과 이산가족 문제, 경제적 불평등 문제), 신흥종교 및 이단종파 문제, 환경문제, 핵전쟁 문제 등에 대하여 방향을 제시해야 합니다. 이것을 보다 좁은 의미에서 우리 아름다운교회가 지역사회와의 관계에서 본다면 아름다운교회가 지역사회에 좋은 인상과 좋은 영향력을 미치도록 때때로 소리를 내고, 그들의 권익을 대신해 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할 때에 내일의 아름다운교회의 위상이 흔들리지 않고 복음의 교회로서의 생명력을 다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교회가 돈의 족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지역사회에 환원하고 지원하는 몸부림이 없으면 아무리 윤리적, 도덕적인 개혁을 외친다고 할지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복음에 무지한 자들에게 전달되기란 무척이나 많은 시간과 인내의 소요가 요구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종교개혁을 485주년을 맞이한 한국교회는 지금 어떤 상황에 있습니까? 믿는다는 이름을 가졌으나 사실상 믿음의 내용을 갖지 못했고, 에베소 교회처럼 처음 사랑을 버렸으며,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차지도 덥지도 아니한 것이 오늘의 한국교회 실제 상황입니다. 아니 이것이 저와 여러분의 상황이 아닙니까? 바로 이때가 바울의 고백 즉 빚진 자의 고백을 요구하고 있으며, 과학 만능주의, 금전 만능주의 우상 앞에서 방황하는 우리들의 문화를 개혁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종교개혁의 성경적인 원리인
①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위하여 (Soli Deo Gloria)
② 하나님 앞에서(Coram Deo)
③ 오직 믿음으로(Sola Fide)
④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Sola Scriptura)
⑤ 오직 은혜로(Sola Gratia)로 자신의 삶을 개혁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따라서 종교개혁 485주년을 맞이하여 우리는 종교개혁의 정신을 계승하여 교회를 교회되게, 성경을 성경되게, 은혜를 은혜되게 하는 운동이 바로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개혁의 출발점은 바로 우리 자신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할 때에 우리의 개혁정신은 우리의 삶의 현장 속에서 강력하게 일어날 수 있으며 교회도, 사회도, 세계도 변화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상의 교회는 결코 완전한 교회가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개혁교회는 끊임없이 개혁되어야 한다"( Ekklesia semper reformanda)는 원리가 여러분의 신앙 원리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을 모신 영혼의 성전
성흥모 목사
저는 요즈음 영성훈련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고 그 말씀을 붙잡고 묵상하고 또 해석하면서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보려고 합니다. 또한 앞서 믿은 성도들은 무엇을 믿었고, 어떻게 믿었는지 알고 싶어서 영성에 대한 책도 많이 참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만나기”란 책을 보는 중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네 가지 단계”라는 글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중세의 영성가인 프랑스 시토수도회의 클레르보의 성 버나드라는 분이 말한 것이었습니다. 버나드는 아주 신실한 신앙인이었습니다. 그는 구약의 족장인 야곱의 영성이 어떻게 자라고 성숙하게 되는지를 자세히 살펴보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네 가지 단계”를 말하고 있었습니다.
1) 자기를 위해 자신을 사랑하는 단계가 있습니다. 사람들의 영성형성은 이 단계로부터 출발합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을 떠나서 자기의 힘과 능력을 의지하고 자신만을 이기적으로 사랑하며 하나님이 없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이 단계로부터 출발하지만, 인생길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2) 자신을 위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단계입니다. 살아가면서 가장 힘든 순간에 하나님을 만나고 찾게 됩니다.
그는 자기를 위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이때부터 그는 변화되기 시작합니다. 자기를 찾고 자기가 누구인지 발견하게 됩니다. 거짓된 나에서 참된 나, 참된 나-자아를 발견하게 됩니다.
3) 하나님을 위해 자기를 사랑하는 단계입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이 자기를 위해서 자신을 사랑하던 옛 사람의 사랑이 아니라, 자신을 긍정적으로 보면서 하나님을 위하여 자신을 사랑합니다. 이제 하나님과 신비한 연합으로 나아갑니다.
4)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단계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경험합니다. 하나님을 열정적으로 갈망합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에 오래 머무르며 깊이 사귀게 됩니다. 하나님 한분으로 만족합니다.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 나의 아버지입니다.
사도바울이 그의 살아 있는 영성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행17:28에서 “여러분의 시인 가운데 어떤 이들도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이다' 하고 말한 바와 같이,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살고, 움직이고, 존재하고 있습니다.”(새번역)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살고, 움직이고, 존재하고 있습니다.”이 말씀대로 되어야 합니다. 참된 영성, 참된 신앙은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살고 움직이고 존재합니다.
저는 요한복음을 자세히 강해한 적이 있고, 요한복음을 가지고 소그룹에서 몇 년 동안 공부하였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을 가장 많이 연구하였습니다. 요한복음은 저자의 의도하는 바에 따라 편집되었고, 기록되었습니다.
요한복음을 기록하는 목적을 말씀하였습니다.
요20:30-31에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사도요한의 저술의 목적과 의도를 잘 나타내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세 가지 중요한 단어를 보아야 합니다. 표적(Signs)과 믿음(believe) 그리고 생명(Life)입니다.
이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행하신 많은 표적을 보여주기 위함이었습니다. 표적이라고 할 때에는 언제나 그 사건이 그리스도를 변증하는 기독론적인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표적은 예수님은 과연 누구시냐 하는 것을 드러내는 사건입니다. 이 사건을 보고 접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믿음이 생겼고,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생명은 영원하고 풍성한 생명, 하나님 안에 있었던 생명인데, 이제는 아들 안에 들어온 생명이요, 우리는 생명이신 예수님을 영접하여 구원받게 되었고, 하나님의 생명, 아들의 생명을 받아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요한복음은 표적을 기록하면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생명을 얻게 하려는 의도에서 기록되었습니다.
본문으로 들어가 봅니다. 예수님은 유월절이 다가오는 것을 아시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고 있습니다.
성전은 본당건물이 있고, 제사장이 들어가서 제사를 집행하는 제사장의 뜰이 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의 남자들이 들어가는 남자의 뜰이 있습니다.
다음으로 여자들이 들어가는 여자의 뜰, 그리고 담장 밖으로 이방인들이 들어갈 수 있는 이방인의 뜰이 있었습니다. 여기까지가 성전입니다.
지금 예수님이 들어가신 곳은 이방인의 뜰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성전에 들어가셨을 때에 성전 안에는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환전상들이 앉아 있었습니다. 이런 짐승들 소와 양과 비둘기 같은 것들은 성전 안에 들어올 수가 없었습니다. 돈 바꾸는 것도 성전 밖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소나 양이나 비둘기 같은 제물은 각자가 자기 집에서 끌고 와야 하지만, 오는 중에 병들거나 다칠 수도 있고, 멀리 북쪽 갈릴리에서 예루살렘까지 짐승을 끌고 온다는 것도 사실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비둘기를 새장에 넣어가지고 오다가 모이를 주어야 하는데, 그만 비둘기가 날아가 버리면 다시 집에서 가서 다른 비둘기를 가져와야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예루살렘 양시장, 우시장에 가서 제물을 사가지고 오는 것이 좋은 일이었습니다. 그래야 소를 키우는 사람도 경제적으로 이익을 얻고 경제가 활발하게 돌아갈 수도 있다는 장점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미 제사장들이 목축업자로부터 사들여 합격 판정을 마쳐놓은 짐승을 성전 근처에서 살 수만 있다면 편리한 것도 사실입니다. 예루살렘 우시장에서 가서 사왔는데, 제사장이 자세히 보더니 병든 것 같다고 하면 거절하고 비토하면 다시 우시장에서 그 짐승은 무르고, 다른 짐승을 사가지고 와야 합니다. 이렇게 한두 번 비토를 놓으면 번거롭기도 하고 귀찮기도 하고, 신경질이 나고 아예 제사를 포기하고 돌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교인들이 편의를 도모한다는 취지에서 제사장도 돈을 벌고, 이익을 챙기고 목축하는 업자들도 좋고, 교인들은 편리해서 좋고, 이런 저런 생각이 맞아 떨어지면서 이방인의 뜰은 가축시장이 되어버렸습니다.
성전세가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남자들은 20세 이상이 되면 반 세겔이 되는 돈을 속전으로 바치게 되어 있었습니다. 당시에 통용되는 로마의 데나리온과 드라크마는 부정한 돈이라고 하여 받을 수가 없었고, 유대나라에 만든 세겔이라는 돈만 성전에 바칠 수가 있었습니다. 이래서 환전상이 성전에 들어왔습니다. 상납의 고리가 연결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장삿속으로 하는 모든 행위를 보시고 분노하셨습니다.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양과 소와 함께 그들을 모두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돈 바꾸어주는 사람들이 돈을 쏟아 버리시고 상을 둘러 엎으셨습니다. 그리고 외치셨습니다.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 사건을 보고 있던 제자들은 성경 말씀을 하나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시편69:9의 말씀은 인용하고 있습니다. 시편69:9입니다.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이 나를 삼키고 주를 비방하는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본 뜻은 “주님의 집에 쏟은 내 열정이 내 안에서 불처럼 타고 있습니다.”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성전을 위하는 열성이 가득하였습니다.
12살 때에도 성전에서 성생님들과 함께 앉아 그 분들에게 듣기도 하고 묻기도 하였는데, 예수님을 찾는 어머니에게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눅2:49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항상 성전에 마음이 있었고, 성전에 머물고 싶었습니다. 성전은 곧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신성한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을 접한 유대 교권자들이 물었습니다.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냐”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이 다시 말합니다.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그 말씀을 기억하게 되었고, 성경과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믿었습니다. 예수님이 곧 성전이십니다. 예수님의 육체가 성전입니다. 예수님을 모시고 살면서 모든 죄사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의 임재 안에 머물게 됩니다.
중세 영성가인 마이스터 에크하르트(Meister Echhart)는 영적 성장은 성경 읽기로부터 시작된다고 강조합니다. 성경을 읽을 때에는 본문의 표면적인 의미에만 머무르지 말라고 합니다.
본문을 깊이 묵상하는 중에 영적인 진리를 캐내라고 합니다. 오늘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어야 신앙과 삶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에크하르트는 ‘성전’이라는 말에 주목하라고 합니다. 성전은 하나님이 임재하시고 거하시는 거룩한 공간이요, 곧 우리의 영혼을 상징합니다.
저는 오늘의 본문 말씀을 보면서 우리 영적 상태를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영혼이 성령의 전입니다. 고전3:16-17에서는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의 성전이기에 하나님이 나의 영혼에 임재하시고 거하시기 원한다면 하나님만이 거하실 수 있도록 다른 잡다한 것은 다 비우고 버려야 합니다. 예수님이 성전에 들어가셔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다 내쫓으셨습니다. 예수님이 내쫓으신 이들은 누구입니까? 그들은 제물을 파는 장사꾼들이며 종교적인 선행을 하나님께 파는 신앙의 장사꾼입니다.
우리는 영적인 의미에서 신앙의 장사꾼들과 같습니다. 우리가 드리는 찬양과 기도, 금식, 헌금, 봉사가 때로는 하나님께 무엇을 얻어내기 위한 장삿속으로 행하는 경우가 없지 않습니다. 내가 이것을 드리면 하나님은 내게 더 많이 주실 것이라고 하는 것은 장삿속의 신앙입니다. 이러한 상업적인 신앙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우리의 영혼은 이기적인 욕심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 안에 잡다한 우상들, 내 속에는 내가 너무 많이 들어앉아 있습니다. 버려야 할 것은 바로 나입니다. 소유욕과 명예욕과 세상 정욕으로 가득 차 있는 나를 버리고 싶습니다. 더 이상 끌어안지 말고, 미련 없이 버려야 합니다. 예수님과 같은 마음, 그의 인격, 사랑과 삶을 그대로 살아가야 합니다.
백석대학의 하덕규교수가 부른 ‘가시나무’라는 성가가 있습니다. 그 가사는 우리의 마음 상태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 / 내 속엔 헛된 바램들로 당신의 편할 곳 없네 / 내 속엔 내가 어쩔 수 없는 어둠, 당신의 쉴 자리를 뺏고 / 내 속엔 내가 이길 수 없는 슬픔 무성한 가시나무 숲 같네 / 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와 동일화하느냐 따라 그의 삶의 질이 달라지고 위대한 인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우리가 평생 믿고 의지하고 따라가야 하는 유일한 분은 우리 구주 예수님이십니다.
유명한 작가 ‘오 헨리’의 본명은 ‘윌리엄 시드니 포터’였습니다. 그가 은행의 직원으로 일하다가 공금횡령죄로 감옥에 수감되어 5년간 복역하던 중에 신실한 신앙을 가진 ‘오 헨리’라는 교도관의 전도로 예수를 믿게 되었고, 그의 감화를 받아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오 헨리라는 사람은 예수님의 사랑으로 가득 찬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아주 장래가 촉망되는 한 청년을 예수님의 사랑으로 품어주었습니다. 시드니 포터는 자기의 옛 사람인 윌리엄 시드니 포터라는 이름을 버리기로 하고 대신 예수님의 사랑을 보여준 ‘오 헨리’라는 이름으로 살기로 하였습니다. 교도관의 양해를 얻고 출소하여 많은 작품을 쓰면서 오 헨리로 책을 내었습니다. 시드니 포터가 출소하던 날 교도관 오 헨리는 “우리들의 이름을 잘 지키고 아름답게 사세요”라고 손을 흔들어 주었습니다.
그 후 시드니 포터는 오 헨리의 이름으로 수많은 걸작을 내어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을 담아내었습니다. 한 사람의 영혼에 예수님이 주인이 되시고 임재하시는 성전이 될 때에 그의 인생은 예수님의 생애와 같이 위대한 인생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 외에는 구원이 없습니다. 한국선교신문에 실린 실화가 있습니다.
■ 미얀마(버마)에 한 독실한 불교 승려가 황열병과 말라리아 병에 걸려 죽었다가 삼일 만에 화장하기 직전에 살아난 일이 있습니다. 승려는 삼일 동안 죽었을 때 천국과 지옥을 보았는데, 천국과 지옥을 보고 온 사실을 간증하면서 전도하다가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의 이름은 파울루(Ather Pyan Shinthaw Paulu)입니다. 파울루는 1958년에 델타 (Irrawaddy Delta)라는 곳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부모의 권면으로 17살 때 불교 수도원에 들어가서 19살 때 정식 승려가 되었는데, 그 때 받은 이름이 아쉰트라야(U. Nata Pannita Ashinthraya)입니다. 그 때에 미얀마에서 가장 존경받고 있었던 승려가 사얀다우(U. Zadila Kyar Ni Kansayandaw) 승려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파울루 승려가 수도원에 들어간 지 6년째 되던 해에 황열병과 말라리아병에 걸려서 죽었습니다. 그가 죽었다가 화장하기 직전에 살아나서 관에서 벌떡 일어나니까 모든 승려들이 놀라서 도망을 갔습니다. 그는 3일 동안 죽은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몸이 부패해서 냄새가 났습니다. 관에는 송장 물이 흥건히 흘렀는데 불에 집어넣기 직전에 깨어 일어났습니다. 그가 죽어서 관에 있는 동안 이러한 일이 있었습니다. 강한 폭풍이 불어오더니 모든 나무가 다 쓰러진 뒤에 강 건너편을 바라보니까 무시무시한 지옥 불이 보이더랍니다. 그 지옥에 가까이 가서 보니까 지옥의 사자가 있는데 얼굴이 사자 같고 발은 뱀 같고 머리에는 뿔이 있더랍니다. 이름이 뭐냐고 물으니까. "나는 지옥의 왕. 파괴자다(destroyer)" 하더니 지옥을 보라고 해서 들여다보니까 그 나라에서 가장 존경받던 사얀다우 승려가 있었습니다. 그는 얼마 전 교통사고로 죽었는데 지옥에 와 있더랍니다. 아니, 그 훌륭한 분이 왜 이 끔찍한 지옥 불에 들어왔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좋은 선생이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기 때문에 지옥에 왔다."고 하더랍니다. 또한 곳에 보니까 긴 머리칼이 덮인 자가 머리를 왼손으로 감싸 쥐고 번민하고 고통당하는 것을 보고 누구냐고 물어보았습니다. "네가 숭배하던 가우타마(부처 Buddha)다." 하더랍니다. "부처님은 훌륭한 윤리와 도덕적인 사람인데 왜 지옥에서 고통을 받습니까?"라고 했더니, "얼마나 착한가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그는 영원하신 하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지옥에 온 것이다."라고 하더랍니다. 또 한 곳을 보니까 그 나라에서 가장 존경받는 지도자이며 혁명가인 아웅산이 있더랍니다. "아니, 우리나라에서 가장 존경받는 아웅산 지도자가 여기에 왜 있습니까?" "그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죽였다. 그러나 가장 큰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하더랍니다. 그 외에 많은 사람을 보면서 가는데 좁고 험한 길이 보이는데 빛이 환하게 비취더랍니다. 그 쪽으로 가는데 베드로라는 분을 만났는데 더 이상 못 간다 하더니, 앞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라는 지상의 명령을 다 행한 후에 들어오라고 하면서 “예수를 믿으면 천국에 가고 안 믿으면 지옥에 간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네가 지금까지 본 것을 세상에 나가 전하라."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그는 죽었다 3일 만에 살아나 자신이 본 일들을 말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는데 그 간증한 내용을 비디오와 오디오 테이프에 담아 버마 지도자들에게 전달하였습니다. 그는 죽어있는 동안에 천국과 지옥을 보고 온 사실을 승려들에게 그대로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를 살려두면 엄청난 배교가 이루어질 것을 생각하고 붙잡아 감옥에 보냈는데, 생사를 모른다고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영원한 성전이 되시는 예수님, 우리 몸과 영혼이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신 성전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더럽고 추한 탐욕과 명예를 내려놓고 오직 예수님만을 믿어 구원받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전을 거룩하게
이응효 목사
예술의 전당과 같은 음악당에는 어린아이들의 출입을 제한하고 있습니다.
공연 중 아기들이 울거나 뛰어다니면 공연에 방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음악당에 장사꾼이나 환전상 같은 사람들을 들여보낼까요?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하물며 하나님께 경건한 제사를 드리는 성전에 이런 장사치들을 들여보냈다면 그 사람들은 소위 돈에 환장한 사람들이 분명합니다.
며칠 전 부산대학 의학연구팀에서 우두항체를 변형시켜 간암말기 환자의 간에 침투시켜 그 항체들이 암세포를 파괴하여 없애버리므로 간암환자들 중에 여러 사람들이 생존하였다고 발표하였습니다. 세계학술지에도 실릴 정도로 톱뉴스가 되었습니다.
우리 몸 안에 암세포나 바이러스 같은 나쁜 것들이 들어와 있다면 몰아내거나 죽여 없애 버리는 것이 몸을 건강하게 하고 사람을 살리는 것입니다.
암이나 바이러스를 살살 달래는 것은 옳은 치료법이 아닙니다.
1. 예수께서 성전을 더럽힌 사람들을 내쫓으셨습니다.
14절,15절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주님은 온유하고 겸손하시지만 탐욕에 사로잡힌 사악한 종교인들과 이들의 비호아래 욕심을 넓히는 불의한 장사꾼들을 용납하지 않으시고 분노하시며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시어 소나 양들을 성전에서 다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그 사람들을 성전에서 몰아내셨습니다.
이 날은 유대인의 최대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 날이었습니다.
유월절은 유대월력으로 1월14일 저녁을 말하고, 그 이튿날 1월15일부터 21일까지 7일간이 무교절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백성들이 가나안땅에 들어가면 반드시 유월절 예식을 지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출12:24~27)
무교절 칠일동안은 무교병을 먹고, 누룩은 집에서 제하여 버려야합니다.
그리고 유월절 기간 중 이스라엘 모든 남자들은 가축의 태에서 처음 난 수컷을 구별하여 성전으로 가지고 와서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이 절기에는 전 세계에 흩어졌던 유대인들과 이스라엘 전역에서 모든 남자들이 성전으로 모이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학자들은 그 당시 200만 명이상 의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모여들었을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근처에 사는 사람들은 소와 양을 직접가지고 제사장에게 위탁하면 되지만, 먼 곳에서 오는 사람, 특히 당시 소아시아나 헬라 문화권에 살던 유대인들은 소나 양이나 비둘기를 가져 올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돈으로 소나 양이나 비둘기를 사서 제사장에게 드렸습니다.
그런데 그런 제물들을 가축시장에서 사서 가지고 온다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문제는 시장에서 산 제물들은 검시관들이 합격판정을 해주지 않고, 성전 뜰에서 산 제물에 한 해 인정을 해주니 이것을 기화로 하여 상인들은 엄청난 폭리를 취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하니 성전 뜰은 자연히 동물시장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또 황제의 화상이 들어 있는 화폐(데나리온)는 성전에서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성전에 들어가기 위해 세금을 낼 때, 세겔이라는 은으로 된 유대화폐로 바꾸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환전상들이 성전에서 목소리 높여 환전을 해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불리는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전이었습니다.
성전은 이스라엘의 중심이요, 영광이요, 자랑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성전을 욕심이 잉태한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그 당시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과 산헤드린공회의원들 상당수의 마음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이 없었습니다. 주님을 존중히 여기는 마음이 있다면 주님의 전도 소중히 여기고 예배도 소중히 여길 것입니다.
그들에게 오직 돈이 전부였고, 돈이 신이었던 것입니다.
오늘 날 주님께서 우리를 보실 때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고린도전서3:16절에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신약시대에는 주님을 모신 우리의 마음과 몸이 곧 성전입니다.
작년에 서울 신월동에 뱀들이 출몰하여 가정집 부엌에도 들어오고, 방에도 들어와 사람들이 기겁을 하고 119대원들이 출동하는 소동이 오랫동안 이어졌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의 집 방안에 뱀이 스물 스물 기어 들어온다면 얼마나 몸서리칠 일입니까.
그런데 우리들의 마음속에 뱀 보다 더 징그럽고 무서운 죄악들! 곧 탐욕과 교만과 시기와 질투와 미움과 분노와 다툼과 음란과 정욕과 향락이 들어와 있는 것은 별로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살전 5:23-24)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성전이 정화되도록 주님 앞에 고백하고 도움을 구하십시다. “주여 내 안에 있는 세속과 자랑과 교만과 탐욕과 음란과 시기와 질투와 타락한 근성이 있습니다. 주님 우리의 마음성전도 정화시켜주옵소서”라고 간절히 기도하십시다. 우리의 심령성전에 변화가 일어나기를 소원합니다.
2. 예수께서 성전을 사모하는 열심을 가지고 이 일을 행하셨습니다.
17절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런 행동을 보고 다윗이 지은 시편69:9절 말씀이 생각이 났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를 사랑하셨습니다. 주님은 아버지의 사랑받는 아들이었습니다. 아버지를 사랑하는 열정이 가득하신 주님은 아버지의 집을 더럽힌 것을 보고 참을 수가 없으셨던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버지를 사랑한다면 아버지의 이름이 더럽혀지는 것을 보고 가만히 있지 않을 것입니다.
구약의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이며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영광이 머무는 곳이었습니다. 오직 유일한 성전 그것이 이스라엘의 신앙의 중심이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곧 성전을 사모한다는 말과 같았습니다.
다윗은 법궤를 다윗성으로 매고 올라올 때 겉옷이 흘러내려 속살이 드러난 것도 알지 못할 정도로 백성들 앞에서 기뻐 뛰며 춤을 추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온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였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법궤가 안치되어 있는 성막도 소중히 여기고 사모했습니다.
시편84편은 고라자손의 시로 되어 있지만 사실은 다윗의 시를 편집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생존하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시84:1~2)
그 당시에는 성전이 건축되기 전이므로 물개와 해달의 가죽으로 덮어씌운 성막이 있었습니다. 비록 보잘 것 없고 초라하게 보이는 성막이지만 그 성막을 하나님의 궁정이라고 부르며 쇠약해질 정도로 하나님의 전을 사모하는 마음이 깊었습니다.
“주의 집에 거하는 자가 복이 있나이다. 저희가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시84:4) 시온의 대로 즉 하나님을 사랑하여 그 마음이 성전으로 향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전건축을 위해 사모하며 준비한 다윗을 영원히 축복하셨습니다. 다윗 한사람으로 인하여 그의 자손대대로 복을 받았습니다.(대하29:1~3) 그가 하나님을 그토록 사랑하였기에 하나님이 갚으신 것입니다.
솔로몬은 하나님을 사랑하여 일천번제를 드렸고, 7년 동안 성전을 건축한 후 성전 낙성식에서 무릎을 꿇고 손을 들고 하나님께 기도할 때 하늘에서 불이 떨어져 성전 번제물과 제물들을 태워 응답하셨고, 주의 영광이 성전에 가득하여 제사장들이 여호와의 전으로 능히 들어가지 못하였고 일반 백성들도 불이 내리는 것과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위에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경배하였습니다.(대하7:1~3)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하나님의 것을 소중히 여길 것이 분명합니다.
구약의 성전은 그리스도가 오시긴 전 그리스도를 대신 한 것입니다.
시내산에 강림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성막을 지으라고 명령하신 후 그 성막에 오시어 그의 영광을 나타내셨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는 성전에 임하시어 그 영광을 나타내셨으며, 마지막 때에는 친히 육체를 입고 우리 가운데 오시므로 걸어 다니시는 성전이 되셨습니다. (계21:22)
이제는 성령으로 그리스도의 몸인 성도들의 공동체 안에 들어오셨습니다.
가장 가까이, 정말 가장 가까이 오신 것입니다.
우리는 참된 성전이신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알게 되었고, 하나님께로 나아가게 되었으며, 하나님의 한없는 사랑을 받게 되었습니다.
예수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유일한 중보자요 하나님과 우리사이의 길이십니다.
그러기에 구약의 백성들이 성전을 사모했다는 것은 오늘 신약성도들이 주 예수님을 사모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참 된 성전이신 예수님을 열심을 다해 사랑하고 섬기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그렇습니다. 시대는 달라도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자들을 하나님께서도 존중히 여기신다고 하셨습니다.
3. 예수께서 자기 몸을 성전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성전을 ‘내 아버지 집’(16절)이라고 하시어 자신이 바로 메시아임을 분명히 선언하시었습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네가 메시아라면 표적을 보이라’(18절)고 하였습니다.
그 말에 예수님이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19절)
이에 대해서 유대인들은 어이없어 하며 ‘이 성전을 짓는데 46년의 세월이 걸렸는데 어떻게 삼일 만에 다시 짓겠는가?’(20절) 라고 반문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몸이 곧 성자하나님이 도성인신하신 성전 이므로 그 몸이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실 것을 말씀 하신 것입니다. (21절)
그렇습니다. 구약의 성전은 예수님을 가리키는 상징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건물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부활이야 말로 최고의 표적입니다. 당신이 부활을 믿는다면 최고의 지식을 가진 것이고, 최고의 소망을 가진 것이며, 최고의 표적과 최고의 능력을 가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므로 우리에게 산 소망이 되셨고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시어 우리들도 주님을 모신 하나님의 집이 된 것입니다.
성경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피로 값 주고 사신 하나님의 집이라고 하셨고, 또, 교회를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셨습니다.
교회는 우주에서 가장 소중한 곳입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닙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부르신 그 백성들의 공동체입니다. 즉 예수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우리들이 교회요 우리들이 성전입니다. (계3:12)
그런데 이 지상의 교회는 완전하지 않기에 주님 오시는 날 까지 개혁되어야 합니다. 그것을 성화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앞으로 곧 도래할 새로운 교회시대를 위해서 먼저 성전을 새롭게 하셨습니다.
교회가 우주의 중심입니다. 그러기에 교회가 변해야 세상이 변화됩니다.
즉 교인들이 변해야 세상이 변화됩니다. 인본주의와 세속주의, 편리주의가 교회를 지배하는 한 교회는 교회의 본래의 사명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한국목회자 협의회에서 리서치기관에 부탁하여 교인들에게 설문조사한 결과 결혼 전에 성관계 해도 상관없다고 하는 사람들이 51%, 궁합을 보아도 괜찮다는 사람들이 30%, 오늘의 운세 같은 것을 본다는 사람들이 30%, 이혼해도 괜찮다는 것이 61% 이러한 통계는 오늘날 성도들의 윤리의식이 희박해졌다는 것이요 교회 안에 혼합주의가 들어와 교회가 많이 변질되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래 전 어느 집사님 가정에 심방을 가서 보니 그 집 거실 진열장에 양주병이 진열되어 있는 것을 보고 왜 술을 진열해 놓았느냐고 물으니 누가 선물로 주어서 버리기 아까워 진열하여 두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제가 갖다 버리라고 하였습니다. 비싼 고급술이라도 버려야 할 이유는 그리스도인들의 가정에 주님이 머물러 계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 교회는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온전한 예배가 드려지고 있습니까?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받고 그 말씀에 순종하고 복종하고 있나요?
여러분은 성령으로 충만하여 서로 사랑하며 먼저 섬기는 종이 되기를 힘쓰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주신 사명을 따라 영혼구원을 위해 전도에 힘쓰고 있습니까?
이 질문에 ‘예’ 라고 대답하지 못한다면 우리교회가 어느 부분이든 부패하였다는 것이고 변질되었다는 것입니다.
지상에 있는 교회는 끊임없이 개혁되어야 합니다. 그 이유는 교회는 여전히 세상 속에 있고, 인간은 언제라도 부패하고 타락하기 쉽고 인본주의로 흐르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언제든지 말씀과 성령으로 새로워지려고 노력해야 하고 개혁되어야만 합니다.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성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가고, 우리 교회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거룩한 교회가 되는 것이야말로 주님께서 소원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이 거룩한 성전이 되기 위해 결단하고 회개하고 하나님의 도움을 간구하십시다. 그리하여 성령께서 이끄시는 대로 순종하는 삶을 사시기를 축복합니다.
내 아버지의 집
요 2:13-17 / 이규왕 목사
인간 생존을 위해서는 반드시 더위와 추위, 비와 눈을 피하여 안락한 삶을 살게하는 주택이 절대로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도 인간들처럼 집이 필요하실까요?
우리가 알기로 하나님의 집은 영원한 하늘나라이며 그곳을 가리켜 천당이라고 합니다. 그 하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의 궁극적인 목적지이기도 합니다.
불신에 가득찬 사람들은 천당의 존재를 의심하기도 하지만 사람도 없는 말을 만들지 않으려고 한다면 하물며 하나님께서 없는 천당을 성경에 기록하게 하실 리가 없을 것입니다.
하늘나라가 얼마나 아름다운 곳인가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도 요한에게 보여주신 곳으로 요한계시록에 기록되어 있는 사실대로 입니다.
(계 21: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계 21:11) 하나님의 영광이 있으매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같이 맑더라
만일 지상에서 한 평생 슬픔과 고통과 죽음의 공포 속에 살아가던 인생들에게 사후에 천국이 없다면 세상에서 인간보다 더 불쌍한 존재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어 하죽음이 올지라도 그 영원한 천국에 당당하게 들어갈 수 있는 것은 그 천국이 예수를 믿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해 예비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집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하나님께서 왜 인간들이 사는 이 세상에 당신의 집을 세우셨으며, 그 하나님의 집은 지금 어디에 있으며,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집을 어떻게 섬겨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을 오늘 성경 말씀을 통해서 깨닫고 믿어야 하겠습니다.
1. 하나님과 성전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유한하신 분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들처럼 지상에 당신이 거하실 집을 세우실 필요가 없으신 분이심에도 불구하고 왜 지상에 하나님 아버지의 집을 세우게 하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경제적인 여유가 있는 사람들 중에는 계절이 바뀔 때마다 기후가 좋은 별장에 가서 휴가를 즐기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렇게도 좋은 하늘나라가 있으심에도 불구하고 무엇 때문에 문제 많은 이 세상에다 하나님의 집을 세우게 하신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유일하게 당신의 형상으로 지으시고 그 인간을 위해 지상 낙원인 에덴 동산을 창설하셨으나 하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위한 어떤 별장도 만들게 하신 적이 없으셨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지상에 당신이 거하실 처소인 성전을 세우게 하신 것은 시내산에서 인간들이 지켜야 할 율법을 제정하시면서 그 율법에 위배되는 죄인들이 하나님께 나아와 속죄와 감사와 헌신의 제사를 드리는 장소로 성막과 성전을 세우게 하신데서 부터 비롯된 것입니다.
우리 중에는 군에 입대한 아들을 면회하기 위해 여러 시간동안 차를 타고 깊은 산골짜기에 있는 부대까지 찾아갔을 때 불쑥 부대로 들어가서 아들을 만난 것이 아니라 반드시 면회 신청을 하고 부대장의 허락을 기다렸다가 반드시 면회소에 기다렸다가 군복을 입고 충성이라고 우렁차게 인사를 하는 대견스러운 아들을 보고 기뻐했던 적이 있을 것입니다.
인간이 범죄하기 전에는 하나님을 만나기 위한 특별한 장소가 필요 없이 에덴 동산 어디서든지 하나님과 교제가 가능하였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범죄하고 그곳에서 쫓겨난 후 인간은 어디서든지 하나님을 만날 수 없는 죄인의 몸이 되었습니다. 그러한 인간들을 위해 하나님이 인간들이 사는 세상에 특별히 하나님을 만나 교제가 가능한 특별한 장소 하나를 허락하신 곳이 바로 구약시대에 성막이요, 성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성막이나 성전은 그들이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항상 기억하고 찾아가고 삶의 중심이 되는 구심점이었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그 성전에 임하셔서 당신의 백성들의 제사를 받으시고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그곳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왕상 9:3) 내가 너의 건축한 이 전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나의 이름을 영영히 그 곳에 두며 나의 눈과 나의 마음이 항상 거기 있으리니
인간은 오직 그 성전에서만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죄를 대신하는 제물을 드려 속죄함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게 되었고, 오직 성전에서만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돌려 드리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에서 하나님과 그와 같은 영적인 교제를 바르게 하는 동안에는 비록 이스라엘 나라가 약소국일지라도 강대국과 맞서 싸울지라도 승리할 수 있었고, 백성들은 평안한 삶을 누릴 수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구약의 이스라엘의 역사의 중심축이었습니다. 만일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제가 깨어지게 되면 하나님의 집인 성전은 훼손되고, 파괴되고 하나님과의 교제도 단절되고 말았습니다.
그와 같은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민족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고 제사를 소홀히 하며 이방 우상을 숭배하게 될 때는 반드시 이스라엘은 침략을 당하고 포로로 끌려가고 고통스런 식민지 생활을 해야만 하였습니다. 그 때가 바로 사사시대요, 이스라엘의 압제받음과 멸망의 역사입니다.
(왕상 9:7) 내가 이스라엘을 나의 준 땅에서 끊어 버릴 것이요 내 이름을 위하여 내가 거룩하게 구별한 이 전이라도 내 앞에서 던져 버리리니 이스라엘은 모든 민족 가운데 속담거리와 이야깃거리가 될 것이며
그러므로 하나님의 집인 성전은 단순한 구조물이 아니라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과의 관계를 맺어주는 영적 면회소요, 이스라엘의 흥망성쇠를 보여주는 온도계 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살면서 성전에 나와 제사 드리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시고 그것을 책망하신 하나님의 성전과 제사가 본질을 상실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멸망의 원인은 군사력의 약화 때문이 아니라 바로 그와 같은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성전조차 여러 차례 무너지는 수모를 겪게 된 것을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2. 예수님과 성전
하나님께서 당신의 택하신 백성들을 지상에서 하늘나라로 불러 올리시는 일만으로도 얼마든지 구원하실 수 있으심에도 불구하고 구태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신 까닭은 무엇 때문일까요?
1) 성전의 역사는 출애굽을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곳에 정착을 하지 못하고 자주 이동을 해야만 하기 때문에 그 상황에 적합한 이동식 천막인 성막이 곧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성전이었습니다.
2) 그 다음 솔로몬 성전은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을 한 후에 480년만에 솔로몬 왕에 의해서 7년동안 지어졌습니다. 나무는 레바논의 백향목을 사용하였고, 청동은 아라바에 있는 솔로몬 동광및 제련소에서 만들었고, 금과 상아는 멀리 남쪽에서 가져와서 지었습니다. 수 만명이 동원된 이 공사는 엄청난 공사였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의 성전은 주전 587년 느브갓네살 왕에 의해 안타깝게도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3) BC 539 년에 페르시아의 고레스 2세가 바벨론을 정복하고 포로된 이스라엘 백성들을 본국으로 귀환시켰습니다. 본국으로 돌아온 이들은 본국으로 BC 516년경 제2의 성전을 재건 하였는데 이것을 스룹바벨성전이라고 합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들이 바로 학개와 스가랴이며 산산히 부서진 예루살렘 성전을 스룹바벨의 지휘하에 재건하였다고 해서 스룹바벨 성전이라고 호칭을 합니다. 물론 그 규모는 초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4) 스룹바벨 성전은 그 후에 거듭되는 외침으로 말미암아 크게 훼손되었던 것을 헤롯 대왕이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주전 20년에 공사를 개시하여 예수님 당시까지도 계속되었는데 그 성전을 가리켜 헤롯 성전이라고 합니다.
헤롯 성전의 크기는 솔로몬 시대의 두 배로 예루살렘 시가의 1/6 면적을 차지할 정도로 확장하여 그 외형적인 모습은 매우 웅장하고 아름다웠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깨달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흥망성쇠는 성전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과 힘들여 큰 돌로 재건한 성전까지도 허물어지게 만드는 근본 원인은 다이너마이트가 아니라 백성들의 죄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유월절이 가까워 오므로 성전을 방문하셨습니다. 물론 그 외모는 40 여년 이라는 긴 기간동안 정성을 드려 재 건축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 성전에 모여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때문에 백성들이 매우 하나님을 열심히 잘 믿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성전을 둘러보시면서 내리신 평가는 정반대였습니다.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셨을 때 성전 뜰에는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과 돈을 바꾸는 환전상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 사람들은 누구를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었을까요? 겉으로 보기에는 그들이 파는 물건들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 반드시 필요한 제물들입니다.
간혹 타국이나 예루살렘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성전을 찾아오는 사람들이 미리 제물을 준비하여 가지고 와야 한다면 많은 시간과 수고가 필요한 것을 성전 안에 미리 준비하였다가 제공하여 주는 것은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보시고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셔서 그것을 휘두르시면서 양과 소와 함께 그 사람들을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환전상들의 돈을 쏟아 버리시고 좌판을 뒤엎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좋은 말로 타이르시지 않고 도리어 과격해 보이는 모습을 취하시면서 까지 그들을 성전에서 내쫓으신 까닭은 무엇 때문일까요?
그것은 그들이 성전 안에서 제물을 파는 목적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제사를 드리는 사람들을 돕기 위한 순수한 목적으로 사심없이 하는 행위가 아니라 그것을 가장하여 돈을 버는 것을 목적으로 하여 하나님의 성전을 도떼기시장으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당시 성전을 관리하는 대제사장이나 제사장이나 서기관과 같은 사람들은 제사를 드리러 오는 사람들이 직접 가지고 온 제물은 흠을 잡아 불합격을 시키는 대신 장사꾼들이 파는 물건만을 제물로 드리게 하였기 때문에 백성들은 비싼 값으로 제물을 사서 제사를 드려야만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기득권세력의 막강한 힘에 눌려 아무도 그 같은 불법적인 행위를 뻔히 보면서도 막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장사꾼들과 종교지도자들은 이익을 배분하고 공생하는 관계를 오래 동안 관행처럼 유지해오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성전을 자신들의 생존과 돈벌이를 위한 수단과 도구로 이용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성전인 것 같으나 실상은 인간이 주인이 되고 돈이 목적이 되어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성전을 가리켜 (요 2:1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고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그 일로 인하여 후일에 성전 모독죄로 고소를 당하고 예수님을 죽이려는 자들에게 빌미를 제공하는 일이 될 것을 잘 아시면서 성전을 헐라는 말씀을 하신 까닭은 무엇 때문일까요?
3. 우리와 성전
구약 성경 여러 곳에 기록된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와 멸망은 성전의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성전을 청결히 하시는 청소작업의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 다시 세워진 성전은 여전히 부패를 되풀이하였습니다.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그렇게 성전을 청결히 하는 일을 하신 이후 과연 그 성전 안에는 제물을 팔고 환전을 해주는 사람들이 다 없어지고 깨끗한 성전이 되었을까요?
역시 세상 만사가 다 그런 것처럼 그 때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마감하시고 십자가에 달리시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을 방문하셨을 때에도 이와 똑같은 역사가 반복되었음을 우리는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마 21:12)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자를 내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고 (마 21:13) 저희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
우리는 그와 같은 역사의 반복을 오늘의 교회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종교개혁입니다. 종교개혁은 타락한 기독교에 대한 성전 청결운동이었습니다. 그 산물로 이 지상에 개신교가 들어서게 된 것입니다.
마틴 루터가 진정한 교회는 교황 중심이 아니라 성경 중심으로 돌아가야 하고 만인이 하나님 앞에서 제사장의 사명을 감당해야 할 것을 주창하고 1517년에 종교개혁의 기치를 든 지 채 500년이 되지 않았으나 지금 개신교는 천주교보다 얼마나 깨끗한 기독교가 되었습니까?
구약시대의 성전이나 예수님 당시의 성전이나 중세교회의 성전이 가지고 있었던 문제점들은 오늘의 지상 교회 안에도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역시 되풀이 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실망을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기독교를 버리고 개종을 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새로운 개척교회를 세우기도 하고, 교단을 새로 만들기도 합니다. 처음에는 정말 신선한 것처럼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시간이 가고 나면 오히려 더 많은 문제점을 안고 더 많은 분열과 분쟁이 거듭되는 것을 우리 주변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과연 그렇다면 성전의 개혁이나 청결은 불가능한 이상이나 꿈이라는 말입니까? 만약에 하나님의 집인 성전이나 교회나 청결하지 못하고 부패해버린다면 우리는 어디에다 희망을 걸고 살아가겠는가 하는 생각까지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하나님의 성전이요,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예수께서 성전과 교회에 대한 뜨거운 사랑과 열정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성전을 청결히 하시게 된 동기는 사람들에 대한 정죄가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열성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더럽혀 놓은 성전을 당신이 무허가 건축 철거반처럼 천군 천사를 데려다가 뚜드려 부시는 일을 하시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인간들에게 스스로 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가장 좋은 개혁은 타에 의해서가 스스로에 의해서 개혁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문제가 많은 인간들이 모여있는 성전을 희망이 없는 곳이라고 버리고 떠나신 것이 아니라 그 성전을 가리켜 내 아버지 집이라고 성전에 대한 애착을 말씀하셨습니다.
(요 2:16)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이것은 성전에 문제가 많이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럴지라도 성전은 존재해야 하며 더욱 성전이, 성전 되어 지게 하는 일에 더 많은 사람들의 노력을 요구하고 계심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문제가 많은 인간들이 모인 지상의 성전은 아무리 아름답게 건축을 하고 제도를 바꾸고 새로운 예배의 형식을 도입하고 사람들을 바꿀지라도 문제의 본질인 인간들이 모여 주인 행세를 하는 동안에는 해결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전에 장사꾼들이 보기 싫다고 매일 그 사람들을 쫓아내시는 일로 하루 하루를 보내시거나, 법정에 고소를 하고 공권력을 동원하여 그 사람들을 성전에 쫓아내는 일을 하시거나, 그 성전을 외면하시고 등을 돌리시는 일을 하시는 일로 공생애를 보내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동안 그 성전을 자주 찾아가셔서 그곳을 더럽다고 비판만 하신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 사람들에게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고, 병든 자를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는 신령한 일을 그곳에서 하셨습니다.
(마 21:14) 소경과 저는 자들이 성전에서 예수께 나아오매 고쳐 주시니 (막 14:49)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어서 가르쳤으되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는 성경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시더라
그것만이 아닙니다. 성전이 하나님이 계신 집이라면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성전은 천국 다음에 예수님 당신 자신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육신을 입으시고 세상에 오셨으나 그 속에는 신성이신 하나님이 임마누엘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성전의 주인이며 성전보다 크시다는 말씀을 하셨지만 당시 사람들은 그 깊은 뜻을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마 12:6)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그러나 문제는 그와 같은 성전은 예수님 하나일 뿐이며, 세상 성전은 여전히 문제 속에 휘말려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상에 세워진 하나님의 성전은 언제까지 세워지고 무너지고, 다시 세워지고 무너지는 악순환을 반복해야만 하는 것일까요? 그것을 해결하시기 위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입니다.
(요 2:20)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 (요 2:21)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그로 말미암아 성전이신 예수님 안에 거하시던 하나님의 신이신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영접하는 각 사람 속에 거하시는 축복을 주심으로 누구든지 예수님을 마음에 영접한 사람은 성령을 마음에 영접한 새로운 성전이 되게 하시는 길을 열어 놓으심으로 만인이 성전되게 하셨습니다.
그것만이 성전을 청결하게 하는 최선의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는 것은 물질이 아닌 인간이라면 그 인간이 성령을 모신 성전이 되어 자신을 청결하게 할 때 그 사람들이 모여 이룩한 성전은 자연이 청결한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고전 3: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고전 3:17)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예수님은 이를 위해 당신의 육체를 십자가에서 무너뜨리시고 사흘 후에 새 성전을 이룩하셨으니 그 성전이 바로 오늘 우리가 몸담고 있는 교회입니다.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가 몸담고 있는 교회가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집인 거룩한 성전임을 알아야 합니다. 물론 오늘의 교회가 구약 시대의 성전처럼 제사를 드리지는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신령한 제사마저 배격해서는 안됩니다. 어쩌면 오늘 우리가 교회에서 드려야 할 제사는 구약 시대의 제사보다 더 어려운 제사인지 모릅니다.
(롬 12:1)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오늘 우리가 몸담고 있는 교회는 과거 어느 성전보다 거룩하고 정결한 성전이 되게 하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 교회의 머리는 예수님이시며, 주인은 하나님 아버지이시며, 목적은 그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드리기 위함이며, 그 방법은 이 교회를 사유화하거나 자기 유익을 위한 물질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도구나 자기 이름을 내는 명예의 전당이 되어서는 안된 다는 것입니다.
(요 2:16)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설령 인간들이 모인 곳이기 때문에 문제가 있을 수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처럼 이 교회를 내 아버지 집으로 사랑하고, 늘 찾아와서 만민이 기도하고 예배하고 말씀 배우고, 위로하고 치유하는 곳이 되게 하는 일에 우리 모두 자신을 희생하고 헌신할 때, 교회는 정말 하나님과 사람들 보기에도 아름다운 교회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 제일 먼저 우리에게 요구되는 마음의 자세가 무엇일까요?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인간들이 모인 교회가 아무리 문제가 많아도 내 아버지의 집이라는 그 마음이 변함이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누구의 교회도 아닌 내 아버지 하나님의 집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고 예수님과 같은 교회에 대한 열심과 애착과 사랑을 기대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가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먼저 내 마음이 주님을 모신 성전이 되게 하는 본질적인 일에 최선을 다하여야 합니다.
정말 모든 문제의 요인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나 자신이 성전이 되게 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항상 성령을 마음에 주인이 되시게 하며, 매일 매일을 그 성령의 뜻에 복종하여 세상 죄에 물들지 않는 정결한 심령과, 남을 배려하고 불쌍히 여기는 긍휼한 심령을 가지고 살아가려는 사람들이 모인 교회가 바로 이 시대의 바람직한 성전인 것입니다.
종교인가? 신앙인가?
요 2:13-17 / 박기완 목사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소위 '성전 청결 사건'이라 불리우는 내용입니다.
생명은 없고 '종교 의식'만 있는 유대교의 추악한 모습을 예수님께서 드러내신 사건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전혀 다른 또 다른 모습의 주님을 보게 됩니다.
평소에 그렇게 인자하시고 사랑이 많으시던 주님께서... 오늘 본문에서는 노를 발하시는 장면입니다. 그냥 화를 내신 것이 아니라 채찍을 만들어 짐승들을 다 쫓아내시며... 상을 둘러 엎으셨습니다.
그 당시 사방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은 주요 절기 때가 되면 예루살렘 성전에 가서 제사를 드려야만 했습니다.
오늘날처럼 교통이 발달되지 않은 시대이기 때문에... 가까이 사는 사람들이야 별 어려움이 없겠지만 멀리 사는 사람들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더구나 제사에 사용되는 소, 양, 비둘기와 같은 제물은 흠도 없고 점도 없어야 하는데... 먼 여행을 하는 도중에 동물에게 병고가 생기면 어떻게 합니까?...
그래서 신명기 14장에 보면, 이런 경우에는 돈을 가지고 와서 동물을 사서 제물로 바치도록 허용이 되었습니다(신14:24-26).
또 20세 이상 된 유대인 남자들은 해마다 반 세겔을 성전세로 바치도록 되어 있었는데(출30:13-16), 로마 황제의 형상이 새겨진 동전은 부정하므로 돈을 유대나라 돈으로 바꿔서 바쳐야 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멀리 떨어져 살던 사람들은... 예루살렘에 도착을 하면 곧 흠도 없고 점도 없는 제물을 사야되고... 로마 돈도 유대 돈으로 바꿔서 헌금을 드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상거래는 당연히 성전 밖에서 이루어져야 했는데... 성전 안에 시장이 형성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 14절에 보면... 성전 안에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종교로 타락한 전형을 여기서 볼 수 있습니다.
이 사람들이 왜 교회 안에 들어와서 장사를 할까요?
왜 성전 안에 소를 팔고 양을 팔고 비둘기를 팔며... 돈을 바꿔주는 환전소가 있습니까?
물론 두말할 필요 없이 사람들의 편리를 위한 겁니다. 다리도 아프고 피곤한데 여기 저기 다닐 필요 없이... 한 곳에서 다 해결하자는 겁니다.
요즘 그런 쇼핑몰이 많지 않습니까?... 주상 복합몰... 그런 겁니다. 백화점이나 대형 마켙에 가면... 다른데 돌아다닐 필요 없이 다 있습니다. 한 곳에서 다 해결할 수 있어요. 얼마나 편리합니까?...
편리하자는 겁니다. 그래서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이 제사장이나 서기관들 같은 관리들과 결탁을 하고... 아예 장사를 하게 된 겁니다.
장사꾼들은 교회에 월세를 냈겠지요. 서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 뇌물도 오고 갔을 겁니다.
다시 말하면... 교회를 이용하여 장사를 하므로 많은 이익을 취하고 있었던 겁니다.
지금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이나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보다는 제사가 더 중요합니다.
어찌됐든 제사만 드리면 다 된다는 식입니다. 심하게 말하자면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고 틀리더라도 제사만 드리면 되는 겁니다. 그러면 끝이에요.
그렇습니까? 여러분?.....하나님의 뜻과 상관이 없는데도 예배만 드리면 다 되는 겁니까?....
제사가 뭡니까?...
제사, 곧 예배란 하나님과의 교제입니다.
인간 편에서 죄를 회개할 때... 하나님 편에서 용서하고 받아주시는 교제가 있어야 되고 교통함이 있어야 진정한 예배가 되는 겁니다.
그러므로 마음에 없는 억지로 드리는 제사는 예배가 아니에요.
하나님이 그걸 모르십니까?... 하나님은 절대 속지 않으십니다.
창세기 4장에 보면, 처음으로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물은 받으시고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어요.
설령 자기의 생각에 잘했는데도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셨다면, 겸손히 하나님께 물어봤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창세기 4:5절에 보면, 가인은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했다고 그랬습니다.
무슨 말씀인가 하면, "갖다 바치는 대로 받으실 것이지... 뭘 그리 까다롭게 구십니까?..." 그런 식입니다.
이것이 바로... 때우고 말겠다는 '형식 주의'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모르면... 형식주의에 빠집니다. 형식 주의는 하나님의 뜻은 상관이 없이... 자기의 뜻대로 하는 사람이 쉽게 빠집니다.
제사를 드리는 마음가짐에는 관심이 없고 제사의 행위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형식주의는 다음에는 꼭 편의주의가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제사만 드리면 되니까 쉽고 편한 길을 모색하게 되는 것입니다.
"불편하게 성전 밖에서 짐승을 사거나 돈을 바꿀 필요가 있나?... 성전 안에서 제물을 사서 곧바로 제단에 바치면 되지!"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당연히 제사장들과 제물을 바치는 사람들 사이에 안보이는 거래들이 이루어질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성전 밖에 있던 장사꾼들이 성전 안으로 들어오게 되니... 성전은 시장바닥이 되고 말았습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의 뜻을 잘 모르면 이렇게 형식주의와 편의주의에 물들 수 있습니다.
온갖 제도와 형식들을 만들어서 그것으로 때우는 것이... 신앙생활이 되어 버립니다. 그것이 쉽고 편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은 오늘날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여러분 자신이 한번 평가해 보시기 바랍니다.
혹시 형식적으로 치우치는 적은 없습니까?... "예배만 드리면 돼지..." 라는 생각... 이런 형식주의는 얼마나 위험한지를 알아야 합니다.
부부싸움을 하고, 형제를 미워하면서도 예배만 드리면 됩니까?
강도 만난 제사장은 예배 때문에 그냥 가나갔어요. 지금 사람이 죽어 가는데 예배를 드려야 합니까? 그게 하나님의 뜻을까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는 예배... 때우는 식의 예배를 열심히 드렸다고 해서... 그 열심을 하나님이 받으십니까?...
그건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행위가 되고 맙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스린다는 말은 그게 죄라는 겁니다.
열심이 중요한게 아니에요. 열심보다는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열심보다는 방향입니다. 방향이 틀렸는데... 열심히 달려가면 뭐합니까?... 소용이 없는 겁니다.
만약 우리에게 의미는 상실되고 그냥 따라가고 있는 것이 있다면... 얼른 돌이켜야 합니다.
하나님의 선민이라고 자부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알지 못하니까 형식주의에 빠지고... 편의주의로 치달아서... 종국에는 성전 안에서 장사하는 지경에 까지 이르렀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생명이 빠진 종교로 전락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열심이나 정성을 본다면... 다른 종교에서도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불교 다니시는 분들... 그 사람들... 얼마나 정성이 대단한지 몰라요. 꼭 목욕재개를 해야 되고 정성이 보통이 아닙니다.
그 사람들 새벽기도는 4시에 하더라구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렇게 열심을 다하면 뭐합니까?... 하나님이 없는.. 생명이 없는 종교에 불과해요.
예수님께서 이걸 지적하신 거예요.
하나님을 섬겨야 할 성전이 시장바닥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광경을 목격하시자 마자 그 온유하신 예수님께서 분노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셔서... 성경에 기록된 대로 보면, "내어 쫓으시고", "쏱으시매", "엎으시고" 일대 소동을 일으키셨습니다.
온유하시고 사랑이 많으신 주님에게서 이런 모습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그런 모습입니다.
그러나 온유라는 단어의 원어를 보면, 야생마가 길들여진 상태를 의미합니다.
야생마도 주인을 만나면 순한 양으로 변합니다. 다시 말하면 온유란 힘이 있는데도 사용하지 않는 걸 말해요.
온유하신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자신에게 고통이 닥칠 때는 참으셨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이 보내신 부르심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그 길만 가셨습니다.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일이라면 온갖 멸시와 천대를 받으셔도 다 참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름이 땅에 떨어지는 것을 보실 때는 분노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우습게 알고 성전을 시장바닥으로 만들어버린 사람들... 신앙이 아니고 종교로 전락해 버린 모습을 보고는 내어 쫓으시고, 쏱으시고, 엎으셨습니다.
그리고는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고 외치셨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신앙이 아닌 종교로 타락시킨 형식주의와 편의주의를 향하여 일격을 가하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언제 분노하십니까?
주님의 명예가 훼손을 당할 때입니까? 아니면 자신에게 손해를 당할 때 입니까?...
혹시 자신에게 억울한 일을 당할 때는 즉시 반응하지만...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지는 것에는 관대하지 않습니까?
우리에게 생명 없는 종교생활이 있다면 즉시 청산해야 합니다. 주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과감히 내어 쫓고, 쏱아 버리고, 엎어 버려야 합니다. 사람들이 다 그렇게 한다고 해도 버려야 합니다. 그게 편하고 좋아도 버려야 합니다.
변질된 교회
요 2:13-17 / 손상률 목사
마귀는 틈만 보이면 교회에 파고들어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고 시험에 들게 합니다(갈2:4).
좋은 씨를 뿌려놓은 밭에 가라지를 덧뿌리고 가듯이(마13:25), 아름다운 주님의 농장을 삽시간에 무성한 잡초 동산이 되게 하거나 가시덩굴과 엉겅퀴로 바꾸어 놓습니다.
교회를 교란시키는 자는 자기의 정체를 숨긴채 광명한 천사처럼 가장하고 나오기 때문에 식별하기가 어렵습니다(고후11:14).
그렇지만 이들의 하는 일은 어김없이 교회의 순수성을 변질시키고 결국은 그 기능을 마비시켜 버립니다.
외형적으로는 부흥되는 교회, 건강한 교회처럼 보이게 하고 그 내용만 바꾸어 놓으므로써 하나님의 기관이 인간의 집단으로 변질되게 합니다.
교회는 죄와 마귀와 죽음의 세력에 맞서서 생명의 능력을 발휘하는 기관이지만, 한번 거룩을 잃고 속화되어 버리고 나면 그 능력이 행사되지 못하고 마는 것입니다(딤후3:5).
주님께서는 교회가 그 본질에서 이탈하고 생명적 능력을 행사하지 못하게 되면 이는 "살았다는 이름을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자"라고 규정하십니다(계3:1).
주님께서는 지금도 불꽃같은 눈으로 지상교회를 살피시면서(계2:18), 교회로 하여금 정확한 자기 진단을 하여 그 처음 것으로 회복하기를 명령하십니다(계2:5).
본문 성경에는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께서 성전을 청결케하신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섰을 때 그 안에는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로 가득차 있었고 또 그들을 돕기 위하여 곳곳에 돈을 바꾸어주는 환전소(換錢所)까지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그것들을 다 쫓아내시고는 "내 아버지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고 하였습니다(16절).
이것은 오늘날 변질된 교회의 모습입니다.
그 본래의 모습에서 이탈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다시 회복되어져야 합니다.
Ⅰ. 주인의 개념을 분명히 하므로
주인이 없는 집은 아무나 주인 행세를 하려 듭니다.
누구든지 먼저 본 사람이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사람마다 저 좋을대로 행동하려 든다면 이는 무질서와 혼란이 있을뿐 교회가 될 수는 없습니다.
시장터로 바뀌어진 예루살렘 성전에서 「내 아버지의 집」이라고 선언하신 예수님은 교회의 주인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규명해 둔 것입니다.
사람들 중에는 교회를 인위적인 집단으로 착각하곤 합니다.
그래서 교회의 구성원인 공동체가 당연히 그 집단의 주인이라고 말을 합니다.
이는 엄청난 과오를 범하게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상에 세워지는 교회를 「내교회」라고 하였습니다(마16:8).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라고 하였습니다(행20:28).
1. 교회의 설립자가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들으신 예수님은 "내가 이 반석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마16:18).
본래 「교회」라는 말은 「부르심을 받은 자들」을 뜻합니다.
다르게 말하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나온 사람의 집단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나온자가 주체가 아니라 부르신 자가 주인입니다.
구약의 경우 갈대아 우르에 살고 있던 아브라함을 가나안 땅으로 불러내신 사건이 여기 해당됩니다(창12:1).
신약의 경우 언어나 국경이나 종족의 구별없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받은 자들이 여기 해당됩니다(엡1:4-6).
이사야 43:1에는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것이라"고 하였습니다.
2. 교회는 말씀이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인이 되는 교회는 그 말씀에 의하여 지배당합니다.
이것은 매우 합리성을 띈 논리입니다.
전제군주 국가에서는 임금님의 말이 곧 법이요 최고의 구속력을 행사합니다.
반대로 민주주의 나라에서는 국민의 소리가 주인의 소리로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이 유일한 법이요 권세의 원천입니다.
말씀 앞에서는 모든 사람이 아멘하고 순종하여야만 됩니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일러 가라사대 … 너는 나 외에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고 하신 말씀에 따라서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였습니다(출20:1-3).
모름지기 하나님 교회는 말씀이 가는 곳에 따라 가고 말씀이 서는 곳에 멈추어 서는 말씀중심의 기관입니다.
3. 하나님의 정하신 규례에 따릅니다.
에베소서 4:16에는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는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교회의 유기적 연합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교회는 개인뿐 아니라 모든 기관이 체계적으로 움직이되 통일과 질서를 유지하며 그리스도의 이상을 이루게 합니다.
이를 위해서 엄격한 규례가 정해져 있고 그 법도에 따라 관리되어야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그리스도의 권세를 시행하는 교회의 특수성인 것입니다.
Ⅱ. 목적의식을 확실하게 규명하므로
예수님께서는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장사하는 집"은 하나님의 목적과 전혀 맞지 아니하는 것으로 교회의 본질에서 벗어난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종교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성전행사를 이용하여 물질적인 이득을 취하고자 하였습니다. 유대인의 절기때에 다른 나라에서 모여온 사람들을 상대로 소와 양과 비둘기등 제물에 소요되는 짐승을 매매하고 또 현장에서 돈을 바꾸어주는 등 상행위를 상설화 하였습니다.
이처럼 사람들의 편리를 도모하는 여러 가지 환경을 만들어주고 다른 한편으로는 경제적 이득을 취하면서 그렇게 하는 일이 당연한 것처럼 여겨졌습니다.
주님의 교회는 육신의 일을 도모하는 곳이 아니라 신령한 일을 우선으로 하는 기관입니다.
그뿐 아니라 모든 사람이 다 좋아하는 일이라도 교회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의 의도에 어긋나면 그것은 교회를 변질시키는 것이며 하나님과 상관없는 교회로 전락되게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 본래의 목적에 충실하여야 됩니다.
1. 하나님께 예배하는 일입니다.
구약시대 이스라엘이 광야 여행기간에 성소를 지은 것이나 솔로몬 이후 예루살렘에 세워진 하나님의 성전은 다 백성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게 하는 처소였습니다.
그곳에서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세, 속건제등 모든 제사행위가 이루어졌고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광경이 나타나졌습니다.
오늘날 교회도 예수님의 피로 구속받은 성도들이 하나님께 감사하며 헌신하는 예배행위를 소중히 여기고 있습니다.
예배의 성격은 하나님께서 기뻐받으시는 산제사(롬12:1)여야 됩니다.
이는 드리는 사람들의 기호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받으시는 하나님의 성향에 맞도록 행하여져야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고 하였습니다(요4:24).
2. 예수님의 사역을 계승하는 일
마태복음 9:35에 "예수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구세주로 세상에 오신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을 요약한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계승하는 기관입니다.
교회는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여 그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주님께 나오게하는 일을 하여야 됩니다.
또한 교회 안에서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서 올바른 그리스도인이 되게하는 일에 진력하여야 됩니다.
그뿐 아니라 육신이 병들고 약한 자, 영적으로 곤핍한 모든 사람을 위로하고 도와주며 삶의 의욕과 용기를 북돋아 주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3. 세상을 변화시키는 일
교회는 세상에 있으면서도 세상에 속하지 않는 기관입니다.
교회가 세상 속에 존재하면서도 세상에 동화되지 아니하고 오히려 세상을 변화시키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산상보훈을 강론하실 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또는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시면서(마5:13-16) 교회의 사명을 명시하였습니다.
소금이 짠 맛을 통하여 부패를 방지하고 음식의 맛을 내게 하듯이 교회가 세상을 죄악에 오염되지 못하도록 방부제의 역할을 하여야 됩니다.
교회는 그 속성상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드러내어야 됩니다.
빛으로 오신 예수님이 교회의 주인이기 때문입니다(요1:9).
교회가 빛으로써 그 본분을 다하게 되면 어두움에 서식하는 모든 죄악의 요소들이 저절로 소멸되어 없어집니다(빌2:15).
역사적으로 기독교의 복음이 가는 곳에는 사람들의 가치관이 바뀌어지고 언제나 새로운 문화가 만들어져 나왔습니다.
Ⅲ. 교회의 능력이 행사되게 하므로
신약의 야고보는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행함이 따르지 못하는 신자를 가리켜 영혼없는 몸과 같이 죽은 것이라고 규정하였습니다(약2:26).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생명운동의 산실입니다.
교회가 그 특유의 생명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무기력증에 빠져들게 되면 이는 이미 교회로서의 능력을 상실했다는 진단을 받게 됩니다(계3:1).
예수님께서 청결운동을 시작하신 예루살렘 성전처럼, 명망있는 종교지도자도 있고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팔아 경제적으로도 부요하게 되었으며 각계각층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성시를 이루고 있었지만, 그곳에는 정작 있어야될 영적권세(靈權)가 행사되지 아니하였습니다.
이는 마치 오늘날 외형적으로는 웅장한 건물과 막대한 재력과 화려한 프로그램으로 그 위력을 과시하면서 실상은 영력을 상실해 버린 현실교회의 문제점을 보여주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교회는 세상을 향해 하나님의 권세를 행사하는 능력의 산실이어야만 합니다(마28:18).
1. 순수한 말씀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라고 하였습니다(히4:12).
확실히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이 있습니다.
그 말씀은 권력을 가진 제왕군주도 굴복시키며 완고하고 강팍한 마음의 소유자라도 변화가 되게 만들어 놓습니다.
다윗은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하고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고 하였습니다(시19:79).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 곧 복음의 위력을 선포하면서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고 하였습니다(롬1:16).
그의 말대로 그리스도의 복음은 로마의 권력을 굴복시켰고 마침내 오대양 육대주를 석권하여 인류의 역사를 새롭게 만들어 내었습니다.
문제는 교회가 순수한 말씀을 그대로 선포하여야 됩니다.
교회는 세상을 향해 선지자의 소리를 발해야 됩니다.
시대와 환경이 어떻게 달라져도 교회의 강단은 성경의 진리를 파수하고 그것을 올바로 전파하여야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에서 교회가 권세를 행사할 수 있도록 말씀의 특권을 부여하셨습니다(롬3:1-2).
2. 경건한 생활을 통해서 행사됩니다.
교회는 세상과 구별된 거룩한 기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니라"고 하였습니다(레11:45).
교회가 거룩을 지키기 위해서 경건한 생활을 훈련하여야 됩니다.
디모데전서 4:7-8에는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상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얽매인자 되어 흠도 없고 점도 없이 자기를 관리하는 사람은 남이 알지 못하는 큰 힘을 발휘하는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은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하는 이 없도다"(딤전3:16)하고 경건 생활의 신비로운 은혜를 간증하였습니다.
그러나 한편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능력을 잃고 세상 사람들에게 지탄의 대상이 되는 것을 보면서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딤후3:5)라고 하신 말씀을 경고로 받아야 할 것입니다.
3. 성령이 일하게 하시므로 나타납니다.
교회는 성령이 활동하시는 기관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당부하신 말씀가운데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였습니다(행1:8).
신약의 교회는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하시므로 시작되었습니다(행2:1-4).
한편 성령의 권능을 받은 제자들은 다른 방언으로 설교하였고 병을 고치며 여러 가지 능력을 행사하였습니다.
성령의 손에 붙들린 사람들이 복음을 들고 나설 때 수천명씩 회개하고 돌아오는 역사가 나타났으며 세계도처에 교회가 세워지고 놀라운 구원운동이 확산되어 나갔습니다(행19:20).
오늘도 하나님의 성령은 교회를 통하여 일을 하십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붙들리는 교회는 성령이 지배하시는 교회입니다.
날마다 죄와 싸우며 거룩을 지키기 위하여 안간힘을 다하는 교회, 경건생활에 진력하는 교회는 하나님의 능력이 행사되는 교회입니다.
회개하는 일을 게을리하거나 세상과 짝하면서 죄악된 생활을 두려워하지 않는 곳에는 성령이 근심하다가(엡4:30) 소멸되고 맙니다(살전5:19).
개혁자 칼빈(J. Calvin)은 「교회는 날마다 개혁되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오늘도 손에 채찍을 들고 교회를 청결케하고자하시는 주님 모습을 그려보아야 됩니다. 그 준엄한 징계와 채찍이 병든 교회를 회복시켜서 살아있는 교회가 되게 하시는 작업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군대
오창우 목사
할렐루야! 오늘도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말씀 속에 있게 될 줄로 믿습니다.
오늘 성경 말씀은 우리들이 너무나 잘 아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유월절이 가까운 때에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셨다가 그곳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과 돈 바꾸는 사람을 내좇으셨습니다. 그러면서, 내 아버지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 하는 내용입니다.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장사하지 말라는 뜻입니까? 교회에서는 장사하지 말라, 물론 그런 뜻이 있지만, 그보다 더 깊은 진실이 이 안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말씀은 교회가 어떤 곳이냐? 교회 생활을 어찌 해야 하는 가에 대해서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16절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하나님의 성전인 교회는 내 집, 하나님의 집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집.
오 목사님의 집에는 오목사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집에는 누가 있습니까? 하나님이 계십니다.
분명히 이야기했습니다. 하나님의 집에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의 집이 언제 만들어졌습니까?
창세기에는 없습니다. 출애굽기에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 땅에서 구출해 내시고, 광야 길에 있습니다. 가나안 땅, 젖과 꿀이 흐르는 하나님의 약속된 땅을 향해 가는 여정 속에서 이들이 시내 산까지 온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백성들에게 이야기를 합니다. 내가 너희의 하나님이 되어 너희를 인도하고 너희를 지켜 주고 보호해서 가나안 땅까지 이르게 해 주겠다 너희가 나를 따르겠느냐고 물을 때에 이스라엘백성들이 그러겠다고 약속을 합니다. 모세가 소를 잡아 피를 내고 하나님께 번제, 희생제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그 소에게서 나오는 피를 커다란 양푼에 받아서 하나님의 제단에 절반을 붓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절반을 백성들에게 뿌립니다. 이것이 출애굽기24장에 나오는 시내산 언약입니다.
하나님께서 노아 홍수 후에 무지개언약을 세우셨던 이후의 첫 번째로 세운 언약이 시내산 언약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나는 하나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라고 약속하면서 피의 증표로 드렸던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내가 목숨을 바쳐 하나님을 섬기겠고, 만약 하나님과의 약속을 어기면 이 소가 죽은 것처럼 나도 죽겠습니다. 하는 의미입니다. 이제는 하나님이 하셔야 할 일이 남았습니다. 하나님이 증표를 보여 주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내가 너희를 보호하고 인도하는 하나님이라’는 증표를 보여 주셔야겠는데, 그 증표가 바로 성막입니다. 성막을 보며 사람들이 하나님이 계시는구나, 하나님도 이 성막을 보시면서 내가 너희와 항상 함께 있고, 너희를 지키겠다는 것을 너희들이 알아라 하는 증표로 하나님께서 이 성막을 주신 것입니다. 이 성막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떠날 때에 같이 떠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설 때에 같이 섭니다. 이동하는 하나님의 집입니다. 백성들이 움직일 때에 같이 움직이는 것입니다. 백성들이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시고 함께 하신다 해서 이동할 때에 하나님의 법궤를 늘 앞에 두고 하나님의 성막을 따라 가는 것입니다. 요단강을 건널 때에도 하나님의 법궤를 앞세우고 갈 때 요단강이 갈라져서 건너갈 수 있었습니다. 언제나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하나님의 성막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갈 때에 하나님의 성막이 가운데 있었고, 그 중심으로 이스라엘 열두지파가 텐트를 쳤던 것입니다. 언제나 함께 하는 표시, 하나님이 계시는 곳이 ‘성막, 거룩한 곳, 하나님의 집’ 바로 상징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약속의 징표로 보여주신 것이 성막이라는 것입니다. 성막은 하나님의 표상입니다. 그래서 언제나 백성들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성막을 만들라고 하신 하나님의 뜻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이 함께 한다는 것을 보여 주고 가르쳐 주기 위함입니다. 성막에 있어서 건물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 로마, 이집트의 신전을 하나님의 성막과 비교해 보십시오.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비교할수 없을 정도로 하나님의 성막이 초라합니다. 얼마나 잘 지었느냐 하는 것이 성막의 중요성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집은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중요한 것이지, 건물의 크기와는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나안 땅에 정착해서 다윗이 왕이 된 후에 성전을 짓겠다고 할 때에, 나단 선지자는 기뻐했지만 하나님은 기뻐하시지 않았습니다. 사람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이 이렇게 다른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 ‘네가 나를 위하여 내가 살 집을 건축하겠느냐’, 어떻게 사람이 하나님을 자신의 집에 가두어 두겠느냐는 말씀입니다. ‘내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부터 오늘까지 집에 살지 아니하고 장막 안에 다녔나니’, 하나님이 장막 안에 계신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백성들과 함께 하기 위함입니다. 어느 한군데에 두고 하나님이 움직이지 못 하신다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성전은 하나님을 모시기 위한 곳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곳이 성막이고 성전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염려하시는 것은 세상을 섬기듯이 좋은 건물을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반대로 좋은 건물이 싫어서 그러시는 것도 아닙니다. 성막은 초라한 텐트였지만 하나님이 백성과 함께 하신다는 표상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언제나 함께 하시는 하나님, 언제나 우리의 길을 인도하시고, 하나님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시는 표상이 바로 성전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성전은 움직일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찾아와야 하나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성전의 모습은 하나님이 우려하시는 대로 하나님을 성전 안에만 가두어 두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성전 안에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소와 양을 성전에서 내 좇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고 상을 엎으시며 비둘기 파는 사람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내 아버지 집에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장사하는 사람들은 있어도 아버지는 안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 하지 않는 것입니다. 집에서도 어른이 들어오시면 벌떡 일어나지 않습니까?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전혀 찾아볼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성전을 헐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이 성전이 낡아서가 아닙니다. 너무나 웅장하고 아름답습니다. 이들의 말대로 36년동안 지은 건물입니다. 이 성전을 헐라고 한 것은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느낄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내가 성전이다’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17-22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이에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예수께 말하기를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이 이르되 이 성전은 사십육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 하더라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예수님께서는 성전된 자기 육체가 바로 성전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이 말씀을 알았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고, 이 땅에서 하신 일이 있었고, 예수님이 이 땅에서 마지막으로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실 때에 예수님이 성전이신 것을 깨달았습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함께 하심의 표상이라고 했습니다.
왜 예수님이 성전이라고 하신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까? 그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이 보여 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알 수 있었습니다. 마태21장에 보게 되면 이들을 내쫓고 표적을 보여달라 했을 때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마 21:14-15 / 맹인과 저는 자들이 성전에서 예수께 나아오매 고쳐주시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하시는 이상한 일과 또 성전에서 소리 질러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 어린이들을 보고 노하여
예수님이 하는 일을 보면 하나님을 볼 수 있고, 예수님을 보면 하나님을 찬양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보게 되면 하나님이 그 안에서 발견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나를 보는 것은 하나님을 보는 것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이 예수님이 하늘에 오르시고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이 계시므로 이 성전은 그리스도인들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전 3:16-17 /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고전 6:19-20 /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설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하나님의 성막, 하나님의 성전이 이제 예수그리스도가 되었고, 이제는 우리들이 하나님의 전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의 집이 되었습니까? 내 안에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전에 하나님이 계신 것을 알면서, 예수믿어 구원받은 나를 보면서 하나님의 계심을 사람들로 하여금 알게 해야 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것처럼 너희는 나를 본 받으라’ 고 합니다. 그 속에는 하나님을 나타내 보이는 성전의 개념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심, 더 나아가 하나님이 계심을 볼 수 있게 해야 하는 것이 성전인 우리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교회에서 우리의 사역은 하나님의 계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일본을 여행하던 한 분이 예수 믿어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자기가 어느 찹쌀떡 집에 들어가서 떡을 사먹고 있는데, 대학생들이 들어와서 이것저것을 집어먹고 얼마를 주고 가더랍니다. 그런데도 주인이 아무 소리 안하고 그냥 받더랍니다. 그래서 이상해서 물어보았습니다. 어떻게 떡을 몇 개나 먹었으며 얼마인지 계산도 안하고 돈을 받습니까? 주인이 하는 말이 저 학생들은 동기사 대학교 학생들인데 저들은 예수 믿는 학생들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틀림없을 것입니다.
적어도 성전, 성막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계신 것의 표상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들을 성전이라고 부르시는 것은 우리들을 통해서 하나님을 보여주라는 뜻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연세드신 분들에게는 죄송한 말이지만, 이 다음에 죽으면 잘 죽어야지 하는 생각을 합니다.
20세기의 유명한 ‘철학자 사르트르’ 는 죽음으로부터의 자유를 강조하던 사람이 아닙니까? 삶이 인생의 최고다. 죽음 후에 무엇이 있는지 무슨 상관이냐? 1980년 3월 폐수종으로 파리 부르쉐 병원에 입원해 있는데, 그 병의 고통이 얼마나 극심한지, 한달 동안 소리 지르고,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절규를 했습니다. 물론 육체적 고통도 극심했지만, 더 큰 공포는 죽음에 대한 공포였던 것입니다. 1980년 4월 그가 죽자, 불란서 신문은 사르트르의 죽음에 대해 떠들기 시작했는데, 죽음으로부터의 자유를 외쳤던 그가, 죽음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고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 것은 그에게 돌아갈 고향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의 많은 것을 가졌지만,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비참한 죽음을 죽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우리의 진정한 행복과 기쁨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인줄 믿습니다.
본회퍼 목사님은 독일 히틀러에게 항거하다가 죽음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감방에 있던 동료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했는데, 그렇게 그 모습이 평안하고 기쁘고 아름다울 수 없었답니다. 마지막 말이 “여러분, 나에게는 죽음이 왔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이것은 마지막이 아니고, 시작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위해 예비하신 아버지 집에서 나를 만날 때까지 여러분 안녕히 계십시오.”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성전입니다. 교회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처럼 우리 속에는 언제나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죽을 때까지 우리가 이 믿음을 간직하고 살아야 될 줄로 믿습니다.
어떻게 우리가 아버지의 집, 하나님의 집으로 살 수 있습니까? 오늘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성전은 장사하는 집이 아니다.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다.’ 라고 했습니다.
장사하는 집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장사하는 집이라는 것은 단순히 보면 장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는 뜻은 단순히 물건을 사고 팔고 하지 말라는 뜻만은 아닙니다. 그 속에는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장사는 거래하고 흥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상숭배와 미신을 믿는 이들의 방식입니다.
제가 잡지에서 본 글입니다. 어느 여자분이 결혼을 했는데, 결혼 전부터 사귀었던 애인을 잊지 못해서 계속 만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무당에게 가서 상담하는 것입니다. 무엇이라 말했으며, 무엇이라 대답했겠습니까? 상식적으로 이야기하면, “결혼했으면 옛 애인은 끊어버려야 한다.” 이것이 맞는 말 아닙니까? 그런데, 이 무당이 하는 이야기는 이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좋게 받아들이고 한 내용이 “남편도 모르고, 옛 애인도 모르게 그것을 지켜 줄 터니, 복채나 많이 내시오.” 했다는 것입니다.
장사하는 곳에는 나의 유익만 있습니다. 윤리와 도덕이 필요 없습니다. 내 유익만 있는 것입니다. 나의 필요만 채우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이 신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장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적의 값이나 무당 굿판의 값에 따라서 그 효능이 크기도 하고 작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얼마짜리인가 재물의 크기를 따지는 것이 장사하듯 하는 미신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돈을 받고 소와 양과 비둘기를 사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제물을 드릴 때에 생활의 정도에 따라 드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언제나 제물을 드리는 기준은 내가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희생을 드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성막을 주셨고, 이 성막을 주시기 전에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피의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 피의 제사 속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겠다는 약속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들에게 도덕법으로 주신 것이 십계명이고, 민법으로 주신 것이 613개 조항이 있습니다. 하라는 것이 248개, 하지 말라는 것이 365개입니다. 그 다음에 종교법이 있습니다.
도덕법과 민법, 종교법 이 말씀대로 살겠습니다 할 때에 희생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내가 소를 드릴 것인가? 양을 드릴 것인가? 이것은 복채가 아닙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수준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의 최선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드리면서 ‘하나님 말씀대로 살겠습니다’ 약속하는 것이 희생제사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성전 안에는 이런 것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흥정하는 것과 거래하는 것만 있었다는 것입니다. 내가 이만큼 하니, 이만큼 달라고 하는 것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교회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거래하고 흥정하는 신앙생활을 하지 않습니까? 우리도 솔직히 흥정하고 거래하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준비하며 내 자신을 돌아보았습니다.
그럴 때마다 깜짝 깜짝 놀랍니다. 아내에게 가끔 ‘나는 저를 위해 이렇게 해 주는데, 저는 나를 위해 무엇을 해 주나?’하는 마음이 들 때가 있었습니다. 제 아내는 그런 마음이 없었겠습니까?
가끔 아이들에게 섭섭할 때가 있습니다. 피곤하고 힘들 때, 더 그런 마음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부모 자식간에 그런 거래와 흥정이 맞습니까?
부부지간에 거래하기 시작하면, 그 부부는 금이 가는 것입니다. 내가 주는 만큼 받아야 된다는 것은 세상적인 방법입니다. 부부지간에도 장사하기 시작하면 부부가 오래 살지 못합니다. 늘 마음고생하고 살게 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교회학교 교사로 성가대로 봉사했는데, 무슨 밥값을 내라 하나? 불고기 정도는 주어야지, 무슨 갈비탕이야?’ 이런 마음이 들 때가 있지 않습니까? 없다면 감사한 것 아닙니까?
그런데 가끔 ‘장로, 권사, 집사 투표’ 할 때는 있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 이 성전 안에서 하나님과 장사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약속잍 파기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거래하고 흥정할 관계입니까? 우리는 장사해서는 안 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구원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아이들이 설거지, 빨래, 청소 좀 했다고 해서 돈을 달라고 하면 맞는 말입니까?
하나님과 우리와의 약속,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 우리가 주를 위해 사는 것, 무엇 때문입니까? 우리를 죄 가운데서 구원해 내셨기 때문에 우리가 지옥 갈 사람인데, 천국 갈 사람 만들어 주었기 때문에 감사한 마음이 있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무슨 장사와 거래가 있습니까? 근본적으로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그런 관계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값을 어떻게 매길 수 있습니까? 그 은혜 받아서 오늘 우리들이 여기에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계시고, 우리를 인도하시고 보호하시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 축복의 땅으로 인도하시겠다고 했습니다. 그런 하나님께 무슨 흥정을 한다는 말입니까? 우리는 흥정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복채 내듯이, 정성 들이니까,“내게 이것을 주십시오” 라고 한다면 안 되는 것입니다.
성전은 기도하는 집이라고 했습니다. 기도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의 기도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자녀된 자로서 우리의 기도, 우리의 피의 제사는 무엇이 되어야 합니까?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가 모범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셔야 하는데, 너무나 큰 고통이기에 십자가를 지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응답이 없습니다. 마지막 결론은 이것입니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우리는 하나님과 장사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우리가 살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성도의 기도는 소원성취의 기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을 이루기 위한 기도입니다. 성도의 기도를 통해서 성도들은 하나님의 종으로 변해 가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예수님 닮는 사람입니다.
사도바울은 이방인의 선교를 위해서 하나님이 선택하신 일군이 아닙니까? 소아시아와 유럽의 복음의 초석이 된 사람입니다. 얼마나 대단한 일을 한 하나님의 사람입니까? 얼마나 많은 복을 받아야 합니까? 그런데, 그에게는 세 가지 육체적 가시가 있었는데, 두통과 간질과 안질입니다. 쓰러져서 거품을 품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고쳐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고침을 받지 못했습니다.
남의 병을 고쳐주면서도 자신의 병을 고침 받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는 원망하지 않습니다. 감옥에 갇히고 모진 매를 맞으면서도 찬송과 기도 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하는 순종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한 철저한 순종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기도의 응답을 이렇게 받았다고 합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니라’, 병들어서 고통받는 것이 무슨 은혜입니까? 그러나,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로 하여금 스스로 높아지지 않게 하시려고 내 병을 고쳐주시지 않으셨다’
사도바울의 병은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래야 하나님 앞에 순종하는 자로 겸손히 설 수 있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되는 것입니다. 신앙은 장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그렇게 살아가겠노라고 약속하는 것밖에는 없다는 사실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감동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가끔 기도 중에 “목사님의 말씀이 우리를 감동시켜 주시고”라고 합니다. 물론 성령 안에서 그런 역사가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맞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어떤 말씀을 주시던지, 어떤 상황에서든지, 순종할 수 있는 믿음과 능력을 주시옵소서” 라고 하는 것이 맞습니다. 이것이 장사하지 아니하고 피의 제사를 드리는 바른 기도라는 사실이라는 것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장사하는 신앙인은 언제나 내 뜻을 이루려고 하는 거래가 있습니다. 기도하는 신앙 속에는 순종하는 그런 신앙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 내 신앙의 문제는 무엇인가를 돌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는 나를 통해서 하나님의 집을 보여 주고 있는지, 내가 피의 제사를 드리는 것처럼 “어떤 상황에서든지 순종하며 살아 가겠습니다”, 받아들이고 “때가 되면 하나님 은혜 주실 줄로 믿습니다” 해야 합니다. 이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주일날 예배당 오는 것으로 흥정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십일조와 헌금 생활하는 것 가지고 흥정하지 마십시오. 이 세상에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 손에 달려 있는 줄로 믿습니다. 봉사하는 것 갖고 흥정하지 마십시오. 목사님을 위해 봉사합니까?
우리는 마땅히 봉사해야 합니다. 마땅히 하나님께 순종해야 합니다. 오죽하면 나를 목사 만드셔서 이렇게라도 해야 말씀 보고 기도하니까, 하나님이 목사로 만들어 주신 줄 믿습니다.
목사된 것 가지고, 교만할 것도 없고, 자랑할 것도 없고, 비굴할 것도 없고, 하나님이 맞춰서 그 은혜를 주신 줄로 믿습니다. 우리의 형편과 처지를 너무 속상해 하지 마십시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드리고자 하는 헌신과 의지, 피의 제사가 필요한 것입니다. 장사하는 듯한 신앙생활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백화점 왕이 된 제이시 페니라고 하는 사람, 고기를 음식점에 납품했는데, 음식점 주방장이 뇌물 달라는 말에 그렇게 못한다라고 해서 결국 그 사업은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다음 사업을 할 때에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를 크게 써 놓고 하나님의 뜻에만 순종하고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생활필수품 장사를 해서 오늘처럼 슈퍼마켓이 백화점이 되고 미국에서 최고 가는 백화점 왕이 되었습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너희에게 이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내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고 귀신 내좇고 많은 권능을 행했다’ 하는 것은 장사하는 신앙입니다. 우리가 봉사를 해도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주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서 봉사하고, 그렇게 가정에서 직장에서 교회에서 생활하는 하나님의 성전인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요즘 같은 난국에는 요셉 같은 사람이 필요합니다. 언제 어디서든지 사람이 무엇이라고 하던지 묵묵하게 순종하는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여! 내가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으로 살게 하옵소서!”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고요한 중에 기다리니 진흙과 같은 날 빚으사 주님의 형상 만드소서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온전히 나를 주장하사 주님과 함께 동거함을 만민이 알게 하옵소서
시장을 헐고 성전을 짓자
양인순 목사
신문에 보면 종종 무면허 의사가 의료행위를 하다가 입건되는 것을 봅니다. 전에 한 돌팔이 의사가 화제가 된 적이 있습니다. 한의대도 나오지 않은 무면허 한의사가 허가도 없이 암 치료제를 만들었습니다. 그 약을 수 억 원어치 팔았습니다. 그런데 돌팔이 한의사가 구속되니까 그 약을 먹고 나았다는 사람들이 몰려와서 탄원서를 냈습니다. 당신들이 볼 때는 돌팔이로 보일지 모르지만 그 사람이 지어준 특효약을 먹고 암이 나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경찰도 할 수 없이 그 사람을 풀어주었습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가 생겼습니다. 전국에 암 걸린 사람들이 전부 다 이 돌팔이 한의사를 찾아옵니다. 신문사마다 경찰서마다 그 사람의 주소와 전화번호를 알려달라는 전화가 폭주하여 업무가 마비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진짜 의사들이 암을 제대로 치료해서 회복되었다면 이런 일이 일어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진짜 의사가 해내지 못한 일을 비록 가짜 돌팔이 한의사이지만 암을 치료했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벌어진 것입니다.
진짜가 힘을 발휘하지 못하면 가짜가 판을 치게 됩니다. 어쩌면 이 시대의 교회의 모습 속에서 이런 아이러니한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교회가 병든 영혼을 치유하지 못하면 사람들은 교회를 떠나 엉뚱한 곳으로 갑니다. 이 땅에는 5만개가 넘는 교회가 세워져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와 함께 백 만명이 넘는 무속인들이 활개를 치고 있습니다. 그들이 TV에 나와서 당당하게 나라의 흥망성쇠를 예언하기도 합니다. 여기에 많은 정치인과 경제인들, 소위 지도자라는 사람조차도 이들을 찾아가서 운명을 묻습니다.
전에 교계 잡지에 이런 내용이 실렸습니다. 어떤 신학생이 교회를 개척하려고 했답니다. 그런데 어디에 개척을 해야 교회가 부흥할지를 몰라서 고민하다가 점쟁이를 찾아갔다고 합니다. “어디다 교회를 개척하면 부흥할까요?” 이것이 사실이 아니기를 바랍니다. 왜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것일까요? 교회가 경건의 능력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교회의 본질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입니다.
전에 목회자의 성공여부를 가늠하는 기준이 3B 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Bus-교인수가 얼마나 되느냐? Building-얼마나 크고 멋진 교회당을 가지고 있느냐? Budget-예산이 얼마냐? 이런 모습은 철저히 교회가 물량주의화가 되어 있고, 성공지상주의에 빠져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입니다.
대형교회 목회를 한다고 해서 성공한 목회자이고, 평생을 도시나 농어촌에서 몇 십 명의 성도를 위해 평생을 바친 자는 실패한 자라고 본다면 얼마나 문제가 있는 생각입니까? 크고 작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진실하게 한 영혼을 사랑했느냐가 목회의 본질입니다. 주님 앞에는 크기가 아니라 주님의 마음으로 얼마나 사랑으로 목회를 했느냐를 주님은 물으실 것입니다.
교회는 무엇보다도 생명을 살리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죽어가는 영혼들을 구원하는 일에 최우선 순위를 두어야 합니다. 물에 빠져 죽어가는 사람을 보고, “내가 지금 바쁘니까 이틀 뒤에 찾아오겠습니다. 그 때까지만 살아서 기다려주시기 바랍니다.” 라고 말한다면 얼마나 우스운 일일까요?
교회는 누가 뭐라고 해도 이 시대를 살리고, 민족을 살리는 희망이요 등불입니다. 비록 지금은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손가락질을 당하는 경우들이 있지만 그래도 교회는 세상의 희망입니다. 아니 희망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교회가 교회다워지는 것입니다. 주님이 이 땅에 세우시기를 원했던 바로 그 교회의 모습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예루살렘 성전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오늘 봉독한 본문 말씀은 흔히 ‘예수님의 성전 정화 사건’으로 사복음서 모두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공관복음-마태, 마가, 누가복음에는 고난주간의 첫 째 날에 행하신 사건으로 나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는 가나 혼인잔치 집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후 공생애 사역의 초기에 행하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학자들은 아마도 예수님께서 성전정화 사건을 공생애 시작과 마지막 부분에서 두 번 행하신 것이 아니냐는 해석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성전정화 사건을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로 연결하고 있다는 점에서 적절한 해석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요한은 시간적인 순서에 따라 말씀을 기록하지 않고, 의미를 중심으로 서술을 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성전정화 사건을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로 해석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관복음에서처럼 고난주간에 행하신 일로 보는데 아무런 무리가 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유월절을 맞이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남자들은 일 년에 세 번씩-유월절, 칠칠절, 수장절에는 예루살렘 성전에 가서 예배를 드려야 했습니다. 당시에 적어도 30만 명의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모였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모습은 지금까지 보여주셨던 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온유와 겸손함으로 모든 사람을 대하셨던 예수님이 오늘은 엄청난 분노의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 돈을 바꾸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신 예수님은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셔서 양이나 소를 성전 밖으로 좇아내십니다.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고, 상을 엎으십니다. 채찍을 휘두르고, 쫓고, 쏟고, 엎고...지금까지 볼 수 없는 과격한 모습입니다. 왜 예수님은 온유하게 장사꾼들을 몰아내지 않으시고 이런 분노의 모습을 보이셨을까요?
당시 성전은 제사장들만이 들어가는 지성소와 성소가 있었고, 그 밖에는 큰 뜰이 있었습니다. 큰 뜰은 유대인이 들어가는 뜰과 다음에 여자들이 들어가는 뜰, 그리고 이방인들이 들어가는 뜰이 있습니다. 장사꾼들이 장사를 하고 있는 곳은 바로 이방인들이 들어가는 뜰입니다. 이곳 역시 하나님이 거하시는 거룩한 성전의 일부분입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지금 상행위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된 이유가 있습니다. 처음부터 그들이 성전을 더럽힐 목적으로 이런 일을 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물은 흠이 없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랜 시간을 걸어오다 보면 흠이 날 수 있습니다. 때로는 병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그 예물을 드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이방인의 뜰에서 짐승을 사고 파는 행위가 이뤄지게 되었습니다.
돈을 바꿔주는 오늘날의 환전상이 성전 안에 있습니다. 예배를 드리러오는 모든 남자들은 성전 세금으로 반 세겔을 바쳐야 했습니다. 당시에 통용되는 화폐는 로마의 가이사 황제의 얼굴이 새겨진 드라크마입니다. 로마의 화폐를 유대인의 화폐로 바꾸는 과정에서 환전상이 등장했습니다.
특별히 성전을 관리하는 제사장들은 장사꾼들이 성전 안에서 장사하는 것을 묵인하는 조건으로 일종의 상납금을 받았습니다. 부정한 뒷거래가 이루어졌습니다. 이들은 거룩한 성전에서 예배를 빙자해서 탐욕을 채우고,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고, 만나는 가장 신성하고, 거룩해야 할 성전이 시장으로 바뀌고 만 것입니다.
여기서 성전의 개념과 시장의 개념이 대립하고 있습니다. 성전은 하나님 아버지가 거하시는 집입니다. 만이 모여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함께 모여서 경배와 찬양을 드리는 예배의 자리입니다. 죄를 지은 자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 용서를 경험하는 곳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와 평안을 얻는 곳입니다. 하나님이 베풀어 주시는 은혜와 복을 받는 축복의 자리입니다.
반면에 시장은 어떤 곳입니까? 시장은 사람들이 자기의 이익을 챙기기 위해서 모인 곳입니다. 그곳에서는 물건을 사고 팔고, 흥정이 이뤄집니다. 남대문 시장을 한 번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곳에는 많은 사람들이 북적입니다. 돈을 조금이라도 더 받으려는 상인과 조금이라도 값을 깎으려는 손님 사이에 흥정이 벌어집니다. 때로는 좋은 자리를 놓고 싸움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여기에 조폭들이 개입되어 칼부림이 나기도 합니다. 흔히 자본주의를 시장경제라고 합니다. 인간의 욕심을 최대한 이용하여 서로 뺏고 뺏기는 싸움터를 제도화 한 것입니다. 시장은 인간의 욕심이 지배하는 공간입니다.
성전은 아버지의 집이지만 시장은 사람의 공간입니다. 성전은 만민이 모여 기도하는 집이지만 시장은 자신의 유익을 위해 자신의 주장을 펴는 곳입니다. 성전은 성령의 다스림과 통치가 지배원리이지만 시장은 돈이 지배원리입니다. 성전은 죄 많은 인간을 거룩하게 만드는 곳이지만 시장은 인간의 욕심을 자극하는 공간입니다. 성전은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 곳이지만 시장은 사람이 자신의 방법으로 복을 만드는 곳입니다. 성전은 사랑의 원리에 의해 움직이지만 시장은 경쟁의 원리에 의해 물고 물리게 됩니다. 성전은 평화와 질서를 추구하지만 시장은 싸움과 혼란이 가득합니다.
당시에 제사장과 유대인들은 성전을 하나님의 집이요 예배하는 곳이라고 하면서 사실은 강도의 소굴로 만들고, 가증한 일을 행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모습을 보고 지금까지 보이셨던 것과는 전혀 다른 거룩한 분노를 표출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본 제자들이 시편 69편 9절의 말씀을 기억했습니다.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히 나를 삼키리라” 이 말씀은 다윗이 하나님의 성전을 사모하여 건축하고 싶었던 심정을 말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주의 전을 위한 열성이 특심하였던 사람입니다.
시편 84편은 성전을 사모하는 다윗의 마음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 주의 집에 사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다윗은 성전을 얼마나 사모했던지 몸에 병이 날 지경까지 이르렀습니다. 세상에서 천 날을 사는 것보다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더 소중하다고 노래했습니다. 이런 다윗의 성전을 향한 열심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줄로 믿습니다.
변방 갈릴리 출신의 시골뜨기 예수님이 거룩한 예루살렘 성전에서 일방적으로 장사꾼들을 내어 쫓고 상을 뒤엎는 사건을 목격한 유대인들이 묻습니다.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냐”(18절). 대체 네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짓을 행하는지, 그것을 표적으로 증명해 보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때 주님께서 엄청난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19절).”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성전은 자신의 몸을 의미합니다. ‘너희가 성전을 헐라’는 것은 ‘너희가 나를 죽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성전을 더 이상 건물로 보지 않으십니다.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서 온전히 이루실 구원을 말씀하십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을 때에 성소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습니다(막15:38). 죄로 막혔던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새로운 산 길이 뚫린 것입니다. 건물로서의 성전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통해서 거룩하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예수님이 단 번에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 드리심으로 모든 인류를 위한 구원의 길을 여셨습니다. 그러므로 건물로서의 성전은 더 이상 의미가 없어졌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다시 성전을 삼 일 만에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십자가에서 삼 일 만에 다시 부활하실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친히 거룩하고 영원한 성전이 되십니다. 요한 계시록에서 요한은 새 예루살렘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환상을 봅니다. 그 예루살렘 성에 성전이 있을까요? 요한이 성전을 찾아보려고 했지만 성전은 없었습니다. 왜 새 예루살렘에는 새 성전이 없을까요? 그 이유를 이렇게 답하고 있습니다.
“성 안에서 내가 성전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계21:22).”
전능하신 하나님과 어린 양 예수님이 성전이시기 때문에 더 이상 건물로서의 성전이 없습니다.
주님의 대답에 유대인들은 어처구니가 없었습니다. 사흘이라면 웅장한 성전을 헐어내기도 불가능한 시간입니다. 그런데 사흘 만에 다시 세우겠다니 한마디로 어불성설입니다. 유대인들은 조롱하듯 예수님께 묻습니다.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20절)”
당시에 헤롯이 지었던 성전은 예수님 당시에 46년이 되었지만 그 후에도 계속 증축하여 주후 64년에 완성되었습니다. 무려 83년 간 공사한 셈이 됩니다. 그러나 그렇게 잘 지은 성전인데도 주후 70년 로마의 군대에 의하여 완전히 무너지게 되었습니다.
오늘날의 교회는 오순절 성령의 역사와 더불어 새롭게 탄생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영, 성령을 부어주셔서 교회를 만드신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성전이니 예수님의 몸은 당연히 성전입니다. 교회는 진정 하나님이 거하시는 집으로서 ‘참 성전’입니다. 교회는 ‘에클레시아’-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 모인 곳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사람이지 건물은 아닙니다.
원래 구약의 성전이 하나님이 사랑하는 백성들과 함께 하시기 위해서 세우셨습니다. 이제는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고, 주님을 믿는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에 함께하십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말씀합니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전3:16)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한 성도 자신이 교회요 성전입니다. 우리 자신이 바로 거룩하신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 자신을 더럽히는 것은 곧 하나님의 백성들의 공동체인 교회를 더럽히는 결과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집인 성전을 사랑하셨습니다. 그 자신을 불사를 정도로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들도 마땅히 성전을 사랑해야 합니다. 먼저는 하나님의 성전인 예수님을 깊이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복음입니다. 예수님은 구원의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누구라도 하나님께로 갈 자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목숨을 걸고 예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가룟 유다처럼 예수님을 배신하거나, 베드로처럼 예수님을 부인하면 안됩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고 보배로운 분이십니다.
♫예수 가장 귀한 그 이름 예수 언제나 기도 들으사
예수 나의 손 잡아주시는 가장 귀한 귀한 그 이름
예수 왕의 왕이 되신 주 예수 당신의 끝없는 사랑
예수 목소리 높여 찬양해 가장 귀한 귀한 그 이름 ♬
예수 그 이름이 여러분의 생에 가장 귀한 이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이 왕의 왕이 되심을 고백하며 주님을 최고로 높여드리는 삶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예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자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사랑하게 됩니다. 교회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느냐는 내가 섬기는 교회를 얼마나 사랑하느냐 입니다.
사랑하는 성지가족 여러분! 여러분은 성지교회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요?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붙어 있는 지체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교회를 사랑하고, 성도를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4:31-32).”
교회 안에서 조차 서로가 분을 품고, 서로를 비방하고 있다면 그곳은 교회가 아닌 시장입니다. 교회는 시장이 아닌 하나님의 집입니다. 서로 용서하고, 사랑하는 곳이 바로 성전입니다.
요즘은 교회를 쇼핑하러 다니듯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성도가 쇼핑을 하는 고객이 되는 순간 교회의 본질에서 멀어집니다. 교회가 자기를 들어내고, 자기를 자랑하는 곳이 되고 맙니다. 교회를 통해서 자기 이익을 대변하게 됩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는 다양한 성도가 있습니다.
달구지 성도입니다. 누군가가 밀어주어야만 움직이는 성도입니다. 럭비공 같은 성도입니다. 항상 어디로 뛸지 몰라서 노심초사하게 만드는 성도입니다. 풍선 같은 성도도 있습니다. 항상 감정의 기복이 심해 언제 폭발하지 모르는 성도입니다. 종이성도도 있습니다. 비가 오거나 눈이 오면 축쳐져서 예배에 나오지 않는 성도입니다.
교회는 자신의 인기나 명예나 부를 구하는 시장이 아닙니다. 교회는 성령과 진리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곳입니다. 우리 몸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림으로 경배와 찬양을 드리는 곳입니다. 더 이상 우리는 시장이 아닌 성전으로 새롭게 지어져 가야 합니다.
아무리 멋진 자동차라도 그 속에 엔진이 부착되어 있지 않으면 장난감에 불과합니다. 아방궁 같은 대저택에 살아도 그 속에 사는 사람들 사이에 사랑이 메말라 있다면 행복한 가정일 수 없습니다. 아무리 크고 화려한 건물일지라도 그 속에 진정한 성전이신 예수님이 계시지 않다면 그것은 거룩한 하나님의 성전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들이 감탄해 마지않는 거대한 성전을 헐어라. 내가 사흘 만에 일으키리라.”
오늘 우리 몸은 예수님 내 안에 살아 계실 때만 진정한 성전이 될 수 있습니다. 아직도 내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시장의 우상을 제거해야 합니다. 내 안에 있는 교만과 정욕과 질투의 시장을 무너뜨려야 합니다.
나는 죽고 내 안에 주님이 가장 존귀한 분이 되실 때 아름다운 성전으로 지어져갈 수 있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의 성전으로 세워질 때 우리가 섬기는 성지교회는 살아계신 주님의 성전이 될 수 있습니다. 세상을 변화시키고, 소망을 줄 수 있습니다.
사순절 다섯 번째 주간을 맞이하면서 내 안에 있는 모든 시장을 헐고, 새롭게 성전을 짓는 은혜의 시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독교 신앙의 내력
김영준 목사
청개구리 이야기를 잘 아실 것입니다. 엄마 말씀을 지독히도 안 듣는 청개구리가 있었습니다. 엄마가 이리로 오라하면 저리로 가고, 이 일을 해라 하면 저 일을 하고, 공부하라고 하면 놀고, 놀라고 하면 그때는 정말 놀고. 엄마가 하라는 말씀의 반대로만 했습니다. 그 엄마가 병이 들어서 세상을 떠나게 됐는데 나를 햇빛이 잘 드는 곳에 묻어달라고 했다가는 분명 개울가에 묻어줄 것이 뻔하기 때문에 일부러 내가 죽으면 개울가에 묻어달라고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제서야 청개구리가 철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의 마지막 유언은 순종하려고 어머니를 개울가에 묻어드렸습니다. 그래서 비가 올 때마다 어머니 무덤이 떠내려갈까 봐 개굴개굴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부모의 말을 지독히도 안듣는 놈을 청개구리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이 살아 계실 때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않은 것뿐만 아니라 이해하지도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예수님이 왜 오셨는지, 예수님이 왜 이런 말씀을 가르치시는지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언제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느냐? 예수님이 돌아가신 다음이 아니고 부활하신 다음입니다. 이것이 청개구리 이야기와의 차이점입니다. 청개구리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다음에 철이 들었지만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다음에 철이 들었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돌아가시기만 하고 부활하지 않았다면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영원히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고 모든 것은 물음표로 끝나고 말았을 것입니다. 기독교는 시작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위대한 진리가 아니고 하나의 큰 물음표로 끝나고 말았을 것입니다. 역사상 가장 짧은 편지를 빅터 휴고가 썼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가 레미제라블을 출판한 다음에 책이 얼마나 잘 팔리는지를 물어보려고 출판사에 물음표 하나만을 써서 편지를 보냈더니 ‘엄청 잘 팔립니다.’라는 뜻으로 출판사에서 느낌표 하나를 써서 답장을 보냈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만일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았다면 물음표만 있고 느낌표는 없는 종교가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과거에 의인으로 살다가 세상을 떠난 사람들, 소크라테스니 석가모니니, 간디니, 마틴 루터 킹이니, 이들의 의로운 죽음은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인간의 정신적인 가치를 발전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세상의 불의함과 맞서고 또 장렬하게 순교한 인간의 정신, 불의에 굴복하지 않는 인간의 용기, 진리의 힘, 평화의 힘, 이런 것을 몸소 실천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 자체로도 우리에게 감명을 줍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이러한 가치를 가르칠 목적으로 시작한 것이 아니에요. 만일 예수님이 이와 같은 가치를 가르치기 위해 오신 분이라면 예수님은 오시지 않아도 됐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없이도 얼마든지 그 정도를 가르치는 선생은 세상에 많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새롭게 기여하는 것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만일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았다면 예수님의 가르침 중에는 수수께끼와 같은 말씀이 많았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기록하고 있는 예수님의 말씀이 그 한 예입니다. 19절 말씀에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이 말씀은 요한복음에만 기록돼 있는 것이 아니고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도 기록돼 있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셨을 때 비판자들뿐만이 아니고 예수님의 제자들조차도 무슨 말씀인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수수께끼와 같은 말씀입니다. 그래서 비판자들이 대답하기를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 지었는데 네가 삼일동안에 일으키겠느뇨’ 이렇게 반문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부활하신 다음에 제자들이 그 말씀을 기억하고 그제서야 깨달았습니다. 21, 22절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성전된 자신의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을 기억하고 성경과 및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예수님의 부활을 염두에 두고 이 말씀을 읽으면 이해가 됩니다. 예수님이 성전을 가리켜 말한 것이 아니고 당신의 육체를 가리켜 말하는 것입니다. 당신의 몸을 성전으로 일컫는 것입니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다시 일으키리라’ 예수님의 부활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한 구절 말씀은 예수님이 왜 오셨으며, 왜 죽으셨으며, 예수님의 부활이 뜻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한 구절 안에 설명해 주는 아주 귀한 단서가 되는 것입니다. 이제 인간은 더 이상 사람이 손으로 지은 성전에 가야만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성전이 되셨기 때문에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되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길을 얻게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친히 육체의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죄사함을 얻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길을 얻을 수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한마디 말씀이 그 많은 진리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다만 예수님이 부활하신 다음에 이 구절을 읽어야 그것이 납득이 되고 이해가 되는 것이지 만일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이 말씀은 수수께끼로 끝나고 말았을 것입니다.
제자들이 그 당시에 예수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예수님의 부활이 진짜라는 것을 증빙해 줍니다. 왜냐하면 만일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예수님이 살아계실 때도 이해하지 못한 말씀을 돌아가신 다음에 이해할 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 이전에도 이해하지 못했던 말씀을 예수님이 돌아가신 다음에는 더욱 더 이해할 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치에도 닿지 않는 말씀을 모아서 책으로 펴낼 일이 없는 것이고 예수님의 말씀은 이치에 닿지 않는 미치광이의 말로 잊혀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 22절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remember’, ‘기억하고’ 아주 중요한 단서가 되는 단어입니다. 기억했다, 사람은 자기가 이해하지 못하는 말은 잊어버립니다. 자기와 상관이 없는 말은 잊어버립니다. 이해가 되는 말도 잊어버리는 통에 이해가 되지 않는 말을 마음에 담아둘 리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여기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도 잊어버렸어요. 휴지통에 집어넣어 두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부활하고 나니까 그 말씀이 기억이 났다는 것입니다. ‘아, 그때 예수님이 하신 그 말씀, 그거 우리가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그때는 무슨 뜻인지 몰랐는데 그게 바로 이것을 가리키는 말씀이었구나!’ 그제서야 그것을 기억하게 되고 깨닫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부활이 진짜라는 것을 증명해주는 단서가 되는 것입니다.
기억했다는 말은 본문에만 등장하는 것이 아니고 신약 성경 여러 곳에 등장하는 단어입니다. 누가복음 24장 6절에도 예수님이 부활하신 그 아침에 천사가 제자들에게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기워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 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한 대 저희가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했다’라고 기록돼 있습니다. 기억했다는 말이 누가복음에 두 번이나 나옵니다. 두 번 다 예수님의 부활 이후에 등장하는 단어입니다. 오늘 본문 17절에도 기억한다는 말이 또 등장합니다.
이 모든 것은 우연한 것이 아니고 하나의 패턴을 보여줍니다. 기독교 신앙이 정립될 수 있었던 과정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기독교는 폐업할 위기에 처했습니다. 창업주는 돌아가셨지요,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졌지요, 예수님이 남긴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예수님이 말씀은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수수께끼가 되고 사람들이 그것을 저버렸습니다. 폐업할 위기에 처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건이 일어나고 그 결과로 폐업할 위기에 처했던 기독교가 살아난 것뿐만이 아니라 그때까지 수수께끼 같던 예수님의 말씀이 별안간 새로운 의미를 갖기 시작하고 제자들이 그 말씀을 담대히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을 가능하게 한 것이 무엇이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어떤 사건이 일어났길래 이와 같은 급진적인 변화가 일어날 수 있었느냐? 그것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정말 부활하지 않았다면 이 모든 것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기 때문에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믿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오늘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22절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부활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및 예수님의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그 말은 믿음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의 부활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의 부활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의 부활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의 부활이 없었다면 기독교는 이해할 수 없는 수수께끼와 같은 궤변이 되고 말았을 것이고 사람들에게서 잊혀져 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삶 속에 이 말씀을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느냐? 부활의 경험이 고난의 의미를 깨닫게 해 주고 하나님의 선하심의 경험이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갖게 해 줍니다. 기독교는 고난이 유익하다고 가르치지만 그렇게 가르치는 이유는 고난만이 우리의 몫이 아니고 그 이후에 반드시 축복과 영광이 따라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을 통하여 예수님의 고난의 의미를 깨닫고 그것을 감사하고 신뢰할 수 있게 되는 것처럼 우리의 삶에도 우리가 믿음으로 고난을 극복할 때 그 이후에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평강과 영광과 능력과 승리의 경험을 통하여 우리의 고난이 과연 헛되지 않았고 여기에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고 여기에는 반드시 선한 결과가 따라온다는 사실을 경험을 통해서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말씀들은 그 자체로 보면 납득이 되지 않는 말씀입니다. 내 자신을 부인하라든가, 십자가를 지라든가, 자기 목숨을 구하려고 하면 잃고 잃으면 얻는다든가,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어야 열매를 맺는다든가, 원수를 사랑하라든가, 용서하라든가, 일곱 번에 일흔 번이라고 용서하라든가, 이런 말씀들은 그 자체로 보면 별로 이치에 닿지 않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실천하고 믿으라는 얘기입니까. 그러나 그것을 순종해보면 그 이후에 결과에 의하여 하나님이 우리를 높이시고 영화롭게 하시고 또 승리하게 하시고 영광의 면류관을 씌워 주시고 오히려 축복받게 하시고 넉넉하게 하시는 것을 경험함으로써 ‘주님의 말씀이 정말로 옳구나! 내가 이렇게 하기를 잘했구나! 내가 주님의 말씀을 순종하기를 잘했구나! 하나님은 정말로 옳으신 분이구나!’하는 것을 경험하고 그제서야 그것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이치만 가지고, 이론만 가지고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가슴으로 배우고 우리의 순종을 통하여 터득하게 됩니다. 그렇게 하게 되면 제자들이 성경과 및 예수님의 하신 말씀을 기억하고 믿은 것처럼 그때가면 우리도 하나님을 더 깊이 신뢰할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이 정립되는 과정입니다. 개인에게도 그렇고 교회에도 그렇고 역사적으로도 그렇습니다. 과거 우리의 믿음의 조상들은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그들이 믿음이 세워지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방법입니다. 이 이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예수님도 이 과정을 통과해야 했습니다. 예수님도 부활의 영광과 당신의 이름이 모든 이름위에 높아지는 그 영광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겟세마네의 고민과 고독함과 골고다의 십자가를 통과해야 했습니다. 그것을 통과한 다음에 죽음이 이길 수 없는 생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렇다면 오늘날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우리도 마찬가지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라고 예외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예비하신 생명의 길이요, 승리의 비결이요,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는 길이요,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방법이 됩니다. 할렐루야!
대속의 주 예수 그리스도
이수영 목사
오늘 본문을 바로 앞서는 1-11절에서 요한복음의 저자는 예수님께서 갈릴리 가나에서 있었던 한 혼인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심으로써 당신의 공생애를 시작하신 후 첫 번째 이적을 행하신 사건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오늘 본문에서 저자는 곧바로 예수님을 그저 물로 포도주를 만드시는 정도의 이적이 아니라 어마어마한 이적, 온 인류역사에서 가장 크고 단 한 번뿐인 이적을 행하신 분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미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가리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요1:29)고 증언했듯이 예수님이 모든 사람에게 “대속의 주”이심을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본문이 전하는 사건 즉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성전 안에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는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신 일이 유월절에 일어났다는 사실 자체가 의미 있는 것입니다. 유월절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노예와 같은 삶을 살며 신음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행하신 일을 기념하는 명절입니다. 유월절이란 말이 어떻게 해서 생겼습니까? 하나님께서 애굽 땅의 모든 장자들을 다 치실 때 어린 양을 잡아 그 피를 집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바른 이스라엘 자손의 집은 죽음의 사자가 넘어가서 이스라엘 자손을 구원하신 일에서 나온 것 아닙니까? 그 명절에 맞춰 예루살렘 성전을 깨끗하게 하신 예수님의 행위는 곧 그가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오실 이로 약속된 바로 그 메시야이심을 드러낸 일이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의 저자는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에게 그가 보게 되리라고 말씀하신 “더 큰 일” 가운데 첫 번째이며 가장 작은 일로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일을 기록했고 이어서 예수님께서 행하신 가장 크고 궁극적인 일인 십자가에서의 대속적 죽음을 예고한 사건을 나란히 기록한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십자가에서의 대속적 죽음을 예고한 사건이란 다름 아니라 본문 19절에서 보는 대로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삼일 동안에 일으키리라” 말씀하신 일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을 깨끗하게 하신 행동의 주된 목적이 당신이 모든 사람의 대속의 주로 오셨음을 선언하시는 데 있었음을 보게 됩니다. 사도 바울이 말했듯이 예수님은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고전5:7)이심을 알리고자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을 깨끗하게 하시며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자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그 행동과 명령의 정당성을 입증할만한 표적을 보이라고 요구했습니다(본문 18절). 이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깜짝 놀랄 표적을 행하시겠다고 공언하셨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성전을 헐면 예수님께서는 사흘 동안에 다시 일으키시겠다는 제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헐라고 말씀하신 성전은 당신의 몸을 가리키신 것이고(본문 21절)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하신 것은 당신의 부활을 뜻하신 것이었는데, 그 사실과 그 사실을 알리시려는 예수님의 행동과 발언의 의미를 유대인들은 전혀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고 반문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하신 것이 당신의 십자가의 죽음과 사흘만의 부활을 뜻하신 것임을 알지 못했던 것은 예수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본문의 저자는 마지막 절에서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다고 술회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한번 예수님의 육체가 성전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를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선 성전은 하나님의 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본문 16절에서 보듯이 성전에서 장사꾼들을 내쫓으시며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셨습니다. 성전이 하나님의 집이라는 것은 성전은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몸이 성전이라면 예수님의 몸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입니다. 요1:14에서는 이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했습니다. 또 요14:10-11절에 보면 예수님 자신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하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진정으로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성전이시라면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전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곳입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성전이시라면 우리의 진정한 예배는 손으로 지은 성전에서 드리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새 성전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제사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행해졌습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한 대속의 희생제물은 예수님의 몸에서 이미 바쳐졌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몸이 예배당 안에 있음 때문이라기보다는 우리의 마음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음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다고 할 때 예수님께서 제물로 바쳐질 짐승들을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을 성전에서 내쫓으신 것은 단지 성전을 물리적으로 깨끗하게 하신 일이 아니라 진정한 믿음과 예배가 무엇인지를 가르치신 일임을 보게 됩니다. 즉 외형적인 믿음에서 내적인 믿음으로, 성전 중심의 예배에서 그리스도 중심의 예배로 참된 믿음과 예배의 의미를 바꾸어 놓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을 성전에서 내쫓으신 것은 그것들이 다 필요하기는 한데 시끄럽고 지저분하고 냄새나며 돈 주고 받는 모양이 보기 안 좋으니 성전이 아닌 다른 장소에 있어야 할 것이라 생각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해서 이제는 그런 희생제물 자체가 필요하지 않게 된 때가 이르렀음을 선포하시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자신의 몸을 단 한 차례 영원한 속죄의 제물로 드리심으로써 우리를 구원하셨기 때문입니다(히9:26-28, 10:10, 12, 14, 18). 이제 성전과 예배와 믿음의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셔야 하고, 오직 그가 계심으로써 성전과 예배와 믿음이 온전한 의미를 찾을 수 있음을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짐승들과 장사꾼들을 내쫓으시는 행동으로 엄숙히 선언하신 것입니다. 이제 그 예수 그리스도 없이 성전만 찾는 신앙은 참된 신앙이 아님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믿음과 예배의 중심에 계셔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우리의 생명의 원천이고 삶의 원동력이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삶의 기쁨이고 감사의 이유이어야 합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유대인들에게는 국가적 정체성과 신앙적 정체성의 상징이었습니다. 솔로몬이 건축한 첫 성전은 바벨론에 의해 파괴되었다가 스룹바벨에 의해 재건되었으며 예수님의 탄생 직전부터 헤롯에 의해 개축되기 시작했습니다. 이 공사는 예수님 당시까지만 해도 아직 끝나지 않고 있었으며 서기 70년 로마군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기 7년 전인 63년에 가서야 완공된 것이 역사적 사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새 성전건축을 메시야의 도래와 함께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그 성전의 파괴와 그 삼일만의 재건을 언급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은 충격적이고 도발적인 것으로 들리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 자체의 파괴와 함께 그 성전 중심의 율법적인 신앙의 변혁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아니 예언하실 뿐만 아니라 당신 자신의 몸으로 그것을 실현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을 깨끗하게 하신 일을 통해 던지신 또 한 가지 메시지를 놓쳐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것은 참된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만인을 용납할 수 있는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유대인에게 국가적 정체성의 상징이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는 이스라엘이 국가의 주권을 상실하고 정복자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방인에 대한 반감이 거세져 있었을 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당시의 예루살렘 성전은 더더욱 유대인들의 애국심의 요새가 되어 있었습니다. 종종 포괄적으로 예루살렘 성전이라 부르지만 사실은 예루살렘 성전은 몇 겹의 구조로 되어 있었습니다. 엄격한 의미의 성전은 성소입니다. 제사는 성소에서 드려지는 데 거기에는 제사장만 들어갑니다. 성소 안에 있는 지성소에는 일 년에 한 번 대제사장만 들어가게 되어 있었습니다. 제사드리러 온 이스라엘 남자들에게 허용되는 구역은 성소 밖에 있는 [이스라엘의 뜰]입니다. 또 이스라엘의 뜰 밖에 있는 구역이 [여인들의 뜰]로서 제사드리러 온 이스라엘 여자들에게 허용되는 구역입니다. 그리고 그 전체를 둘러싸고 있는 외곽구역이 [이방인의 뜰]입니다. 이방인의 뜰은 제일 외곽구역이긴 하지만 넓은 의미로 예루살렘 성전이라 할 때 그 안에 포함되는 곳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에 제물에 바쳐질 짐승들을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이 자리 잡고 있던 곳은 바로 이방인의 뜰이었습니다. 비록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 예배하기를 원하는 이들이 들어와 예배드릴 수 있는 유일한 구역이 이 이방인의 뜰이었는데 거기를 짐승들과 장사꾼들에 의해 어지럽혀지게 만들어 이방인의 예배를 차단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일이었습니다. 솔로몬은 성전건축을 모두 마치고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의 백성 이스라엘에 속하지 아니한 자 곧 주의 이름을 위하여 먼 지방에서 온 이방인이라도 그들이 주의 크신 이름과 주의 능한 손과 주의 펴신 팔의 소문을 듣고 와서 이 성전을 향하여 기도하거든 주는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이방인이 주께 부르짖는 대로 이루사 땅의 만민이 주의 이름을 알고 주의 백성 이스라엘처럼 경외하게 하시오며 또 내가 건축한 이 성전을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줄을 알게 하옵소서”(왕상8:41-43). 또한 이사야를 통해 하신 하나님의 말씀도 다음과 같습니다: “여호와와 연합하여 그를 섬기며 여호와의 이름을 사랑하며 그의 종이 되며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지키는 이방인마다 내가 곧 그들을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을 나의 제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사56:6-7). 오늘 본문과 같은 사건을 전하는 막 11:17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 성전 뜰에서 짐승들과 장사꾼들을 내쫓으신 후 사람들을 가르치시며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셨는데 그 말씀이 바로 이 이사야서 56:7을 인용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여기서 “만민”이란 모든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모든 민족 모든 나라의 사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 곧 성전이 하나님을 찾는 만민에게 열려진 것임을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몸으로 다시 실현하셨습니다. 사람의 손으로 지은 성전 안에 갇혀있던 유대인만의 종교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믿는 모든 사람의 신앙으로 대체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을 깨끗하게 하신 사건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신앙이 보다 순수하고 그 모습이 보다 경건해지기를 가르친다는 사실 또한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본문 16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기를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 언행을 지켜보며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했다고 본문 17절은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성전을 사모하는 열심을 품되 그 열심이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는 장삿속 계산을 따르는 열심이 되지 않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 어떤 세상적이고 인간적인 동기와 목적으로 교회를 찾고 신앙생활을 하는 자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을 깨끗하게 하신 일은 우리의 믿음의 주인이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보여주신 일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짐승들과 장사꾼들을 쫓아내시며 “내 아버지의 집”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 자신이 예루살렘 성전의 주인이시라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성전은 거의 믿음의 표현 그 자체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제물에 바쳐질 짐승들과 장사하는 사람들을 다 내쫓으심으로써 성전이 믿음의 대상일 수 없고 성전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믿음의 대상이어야 함을 분명히 하신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매번 심혈을 기울여 지은 성전이었지만 허망하게 파괴되는 역사를 반복해 보여주었습니다. 헤롯 때부터 야심차게 개축한 예루살렘 성전도 완공된지 7년 만에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을 정도로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성전의 주인이신 예수님은 단 한 번 장사되신지 사흘만에 다시 살아 일어나셨고 영원히 영광 가운데 계십니다. 우리는 성전건물에 믿음과 소망을 거는 어리석은 자들이 되지 말고 온전히 성전의 주인이신 하나님과 그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는 참된 믿음과 지혜로운 삶의 소유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