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4141
2월21일[연중 제6주간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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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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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군종교구 김영인 요한사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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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십자가로부터 도망치려 하지 마십시오. 십자가를 좀 더 호의적으로 바라보십시오. 십자가를 꼭 끌어안으십시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마르코 복음 8장 34절)는 예수님의 강력한 권고 말씀이 오늘따라 유난히 제 가슴을 칩니다. 예수님께서는 ‘뒤를 따르는 사람’ 즉 당신의 제자(弟子)가 되기 위한다면, 세 가지 구체적인 노력을 해야 한다고 당부하십니다.
① 자신을 버리고. 40년 가까이 버리고 또 버린다고 발버둥 쳐왔지만, 아직도 버리지 못한 것이 산더미 같습니다. 징글징글한 악습, 수시로 솟구치는 분노, 나락으로 떨어트리는 무력감과 우울감, 끝까지 남아 괴롭히는 깊은 상처, 우후죽순처럼 솟아나는 자만심...
버리는 일, 말은 쉽지만, 결코 만만치 않은 작업입니다.
버리고 또 버리고, 나 자신조차 버리고, 버렸다는 생각조차 버린 어느 날, 그토록 염원했던 잔잔한 마음의 평화가 찾아오리라 확신합니다. 그때 우리는 보다 기꺼이 주님의 뒤를 따를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 순간 우리는 그토록 염원했던 주님의 현존을 온몸으로 체험할 수 있으리라 희망합니다.
② 제 십자가를 지고. 오늘 내가 지고 있는 십자가가 어떤 것들인가? 생각해봅니다. 조금씩 나이를 먹어가면서 지니게 되는 노화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참 큰 십자가입니다. 내가 점점 작아지고 약해지는 것을 어쩔 수 없이 견뎌내야 하는 현실 또한 만만치 않은 십자가입니다. 매일 백번 천번도 더 탈출하고 싶지만 그러지 못하는 고달픈 삶의 현실 역시 큰 십자가입니다. 매일 마주해야만 하는 나와 철저하게도 다른 그는 십자가 중의 왕 십자가입니다.
주님께서는 바로 그 십자가들을 외면하지 말라 하십니다. 그 십자가들로부터 도망치려 하지 말라 하십니다. 그보다는 기꺼이, 그리고 기쁘게 그 십자가들을 짊어지라 하십니다. 주어진 십자가들을 좀 더 호의적으로 바라보라 하십니다. 꼭 끌어안고 가라 하십니다. 그런 노력을 통해 십자가는 점차 괴로움의 대상이 아니라, 주님께서 내 성장과 구원을 위해 보내주신 선물 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③ 나를 따라야 한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예수님처럼 매일 새롭게 떠난다는 것입니다. 공생활 기간 내내 예수님께서는 한 고을에 오래 머무시지 않고 지속적으로 옮겨 다니셨습니다. 지리적, 공간적인 이동도 이동이지만, 영적인 이동 역시 거듭되었습니다. 나에게서 아버지에게로, 삶에서 죽음으로, 그리고 또다시 삶으로. 높음에서 낮음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그리 길지도 않은 이 한 세상, 어찌 그리 숱한 우여곡절을 겪으며 살아가는 우리네 인생인지 모릅니다. 다들 자신의 인생을 정리하자면 대하소설 10권으로도 부족할 것입니다. 돌아보면 후회스런 순간들, 되돌이키고 싶지 않은 비참했던 순간들, 죽고 싶었던 순간들도 많았습니다. 우리 인간 존재 자체가 근본적으로 부족하고 나약해서 그랬던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그 깊은 상처, 쥐구멍으로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은 부끄러움, 큼지막한 지우개로 싹싹 지우고 싶은 흑역사들에 연연해하지 말아야겠습니다. 매일 되살아나는 아픈 기억들, 부단히 주님 자비의 손길에 맡겨야겠습니다. 아침이면 아침마다 어제의 나를 딛고 기쁘게 일어서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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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사람은 대부분 자기 잘난 맛에 사는 것 같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다른 사람이 저를 싫어하는 것이 싫어서 모든 사람의 마음에 들도록 행동하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대체적으로는 인간관계가 좋은 편이었습니다.
그러나 살다보니 내가 아무리 잘 해 주어도 나를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이렇게 잘 해 주는데 왜 나를 싫어하지?’ 그렇게 생각하며 성경말씀대로 나를 미워하는 사람까지 사랑하려고 부단히 애를 썼습니다.
나의 사랑이 부족한 것 같아서 모든 에너지의 98%를 그 사람을 위해 썼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결국 저를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노력 끝에 이런 것을 느꼈습니다. ‘그 에너지를 다른 사람을 위해 썼었다면...’
오늘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절개 없고 죄 많은 이 세대에서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이는 다시 말하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 나도 너희를 사랑하지 않겠다.’라는 말과 별반 다름이 없습니다. 그래서 끝까지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은 영원한 고통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들을 사랑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본질이 사랑이신데 어떻게 사람이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당신도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으실 수 있을까요?
어느 날 포장마차에서 친구와 술을 한 잔 하고 있었습니다. 남자들이 몇 더 들어왔는데 이야기하는 것을 들어보니 다른 지방에서 올라온 조직폭력배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술 마시는 것은 참으로 재미있었습니다. 영화에서나 보아오던 장면들이었습니다.
보스는 포장마차 아주머니와 이야기를 하면서 가끔 소주병을 집어 들었습니다. 그러니 옆에 있던 급이 낮은 사람들은 얼른 자신들의 술잔을 비웠습니다. 보스는 그냥 보지도 않고 아무 곳에 술을 부었습니다. 졸병들은 술을 따르는 곳에 재빨리 술잔을 갔다대어 술을 받았고 넘치기 전에 약간 잔을 들어 올려 따르는 것을 멈추게 했습니다.
그렇게 여러 차례 보스는 다른 곳을 보며 본인이 원하는 곳에 술을 부었고 그 때마다 졸병들이 잔을 갔다대며 술을 한 방울도 바닥에 흘리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보스가 주는 술을 흘릴 수 있겠습니까? 사회에서도 웃어른이 따라준 술을 다른 곳에 붓거나 버린다면 큰 실례가 됩니다.
은총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은 은총을 낭비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은총은 성령님의 선물이고 거룩하고 고귀한 것입니다. 그것들을 아무에게나 주실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은총을 받을 만큼 자신을 비운 사람에게 그 비운 만큼만 은총을 주십니다.
은총은 사랑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그 사람이 받을 만큼만 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결국 사랑을 흘려버리거나 낭비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인간이 받아들을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사랑을 주실 준비가 되어있지만 그 사랑을 왜 받아주지 않느냐며 그 한 사람에게 온 사랑을 쏟아 붓지는 않으십니다. 더 합당한 사람을 더 사랑해주십니다.
따라서 우리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 나를 좋아하도록 모든 에너지를 그 사람에게 쏟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 사람이 준비가 될 수 있도록 기도해주며 받아들이는 만큼만 사랑할 수 있습니다. 나머지 에너지는 나를 원하는 사람에게 더 사용하는 것이 좋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사람을 사랑하는 것과 그 사람이 나를 사랑하도록 모든 에너지를 쏟는 것과는 다릅니다. 사랑은 하되 그 사람을 위해 나의 소중한 에너지를 소진할 필요는 없습니다. 내가 사랑해야 할 많은 사람이 주위에 있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우리도 우리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 때문에 그 사람에게 묶이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냥 내버려두십시오. 받아들이겠다면 언제든 사랑할 준비를 하되 그 사람에게 묶여서는 안 됩니다. 그냥 내버려두십시오. 그것은 스스로 자초한 일이고 우리가 모든 사람에게 사랑을 받아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무엇이든 좋은 것은 그 사람이 받을 만큼밖에는 줄 수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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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진화의 메커니즘은 ‘돌연변이’에 있다고 합니다. 돌연변이는 환경의 변화와 위기의 상황에서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을 주기도 합니다. 2020년 코로나 바이러스가 팬데믹 위기를 가져왔을 때입니다. 모든 사람이 같은 면역체계를 가졌다면 인류는 더 큰 재앙에 빠졌을 겁니다. 그러나 인류는 저마다 다른 면역체계가 있어서 코로나의 위기를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민주주의는 서로 다른 생각과 이념을 가진 사람들이 서로 존중하면서 더 많은 지지를 받은 정당이 국가를 운영하는 제도입니다. 비록 그 과정에서 갈등과 분열이 생기지만 그보다 더 좋은 제도를 찾지 못하였기에 대부분의 나라는 ‘민주주의’를 채택하고 있습니다. 파시즘, 봉건제도, 제국주의가 하나로 힘을 모아서 좋을 것 같지만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는 말처럼 인류는 그런 제도로 인해서 많은 전쟁과 폭력을 경험했습니다. 아직도 형식은 왕을 인정하는 국가가 있지만 정치의 형태는 대부분 민주주의를 채택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바벨탑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바벨탑 이야기는 단순히 하느님께 반역한 인간이 벌을 받은 사건이 아닙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 인간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야 하는지, 그리고 하느님의 계획 속에서 우리의 자리가 무엇인지 깊이 고민하게 합니다. 최근 과학 기술의 발전은 인간이 창조 질서를 스스로 결정하려는 시도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DNA 돌연변이를 연구하고 유전자 편집을 시도하는 이 시대는, 어쩌면 또 다른 바벨탑을 쌓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인간은 시간이 지나면서 변화해 왔습니다. DNA 돌연변이는 인간의 생존과 적응을 가능하게 하였고, 여러 환경 속에서 다양한 인류 집단이 형성되었습니다. 과학적으로 보면, 인간의 다양성은 자연스러운 진화의 결과입니다. 그러나 신학적으로 볼 때, 이는 단순한 자연적 현상이 아니라 하느님의 섭리가 작용하는 과정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하나의 틀에 가두지 않으시고, 오히려 각자가 서로 다른 모습을 가질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문제는 인간이 자신의 지혜를 맹신할 때 발생합니다. 우리가 자신의 힘으로 유전자를 조작하고 인간을 통일된 존재로 만들려 한다면, 그것은 또 다른 바벨탑을 쌓는 것이 될 것입니다. 바벨탑 사건을 보면, 인간들은 하나의 언어를 사용하며 "하늘에 닿는 탑을 쌓자"라고 합니다. 이는 단순한 건축이 아니라 인간이 하느님 없이도 스스로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교만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셔서 그들을 흩으셨습니다. 이 사건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하느님께서 인간의 통일과 협력을 방해하신 것일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하나의 방식으로만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다양성 속에서 참된 조화가 이루어지기를 바라셨던 것입니다. 세상을 보면, 다양한 민족과 문화, 언어가 존재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를 "분열"이라고 하지만, 하느님의 계획 속에서는 "조화로운 다양성"입니다. 만일 인간이 하나의 언어만을 사용하고, 하나의 문화만을 강요하며, 한 가지 방식으로만 살아야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하느님의 창조 질서를 거스르는 것이 될 것입니다.
바벨탑의 혼란은 신약에서 놀라운 방식으로 치유됩니다. 사도행전 2장을 보면, 성령 강림 사건이 나옵니다. 성령께서 임하자, 사도들은 여러 언어로 복음을 전했고, 각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자기들의 언어로 그 말씀을 이해하였습니다. 바벨탑에서는 인간이 하나의 언어를 사용하려 했고, 그로 인해 하느님께서 그들을 흩으셨습니다. 하지만 성령 강림 사건에서는 각기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하나의 성령 안에서 일치를 이루었습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참된 뜻입니다. 인간이 강제로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각자의 고유한 모습으로 일치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느님 없이 자신을 통일하려 하면, 그것은 오히려 파괴와 혼란을 초래할 것입니다. 반대로, 우리가 성령 안에서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조화를 이루려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참된 일치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모두 알려 주었으니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부른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앞서가는 사람을 끌어 내리는 탑을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뒤에 따라오는 사람을 밀쳐내는 탑을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동료의 십자가를 함께 지고 가는 탑을 말씀하십니다. 이웃의 아픔에 공감하는 탑을 말씀하십니다. 누구나 갈 수 있지만 아무나 가지 않는 길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그 길만이 우리를 영적인 갈증을 풀어 주는 샘물로 인도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길만이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체험하고, 죽어서는 영원한 생명에 이를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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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삼의딸들수녀회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님]
그리스도인으로 세례를 받고도 예수님과 그분의 말씀을 부끄럽게 여기는 사람이 있을까요? 있습니다. 부끄럽게 여긴다는 것은 감추려고 한다는 것이지요.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이 세상살이에서 필요하고 유리할 때는 내세우지만 불리하고 걸림돌이 될 때는 감추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살면서 주어지는 십자가를 거부하는 것은 예수님의 뒤를 따르려는 마음이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따르기 위한 두 가지 조건으로 제시하신 ‘자기를 버림’과 ‘십자가를 짐’은 사실 힘겨운 일입니다. 힘겨운 일도 기꺼이 즐겁게 할 수 있게 하는 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예수님을 참으로 사랑한다면 순교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십자가와 순교의 그리스도교적 의미는 고통과 죽음이 아니라 바로 사랑입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 때문에 자기를 잊고, 사랑 때문에 십자가를 끌어안으며, 사랑 때문에 죽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자기 목숨을 잃는다는 것은 물론 목숨을 스스로 버리라는 뜻은 아닙니다. 예수님과 그분의 복음을 위하여 목숨을 잃을 각오를 할 때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참생명을 찾아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혼자 그 모든 어려움을 감당하도록 내버려두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께서 명령하신 것을 우리가 실행할 수 있도록 몸소 도와주십니다. 자기를 버리고 십자가를 지는 것이 두렵다면 우리에게 예수님에 대한 사랑을 더해 주시도록 그분의 도우심을 청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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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8,34-9,1: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어제 복음에서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 베드로 사도의 생각과 같이 현세적이고 기복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시어 많은 기적과 가르침을 베푸셨지만, 당신이 진정으로 가야하고, 또 제자들이 가야 할 길은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그것도 항상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34절) 따라야 한다고 한다. 자기를 버린다는 말은 하느님의 뜻과 반대되는 악으로 갈 수 있는 자기 자신을 버리는 것이다. 이악한 자아를 버리고 그분의 뜻을 따르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 자신의 좋은 것까지 모두 버리라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제일 힘든 것이 그러기 때문에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제 십자가는 바로 자기 자신이다. 나 자신을 이기는 것이 가장 어렵고 힘들다. 이 십자가를 잘 지고 갈 때 우리는 그분을 올바로 따른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 어려운 것은 나 자신이지 다른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이 십자가는 우리가 더욱 당신을 닮게 해줄 것이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여러 가지로 말씀하시는 것이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35절)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38절) 우리가 구원받는다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가장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닮는 길은 다른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십자가를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의 영광을 입으셨듯이 우리도 이제는 우리 자신의 십자가를 통하여 내가 창조될 때 입은 하느님의 모습, 즉, 그리스도, 아드님의 모습을 닮아야 한다. 이 십자가를 통하여 자기 자신이 죽었을 때 우리는 부활의 기쁨을 안고 살아갈 수 있을 것이며, 이것이 우리의 구원의 삶이 될 것이다. 아마 주님께서는 당신의 모습을 닮은 우리를 아버지 앞에 영광스럽게 여기실 것이다. 당신과 같은 사람이 되어있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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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희망, 믿음, 기쁨이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힘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군중을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절개 없고 죄 많은 이 세대에서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예수님께서 또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에 서 있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죽기 전에 하느님의 나라가 권능을 떨치며 오는 것을 볼 사람들이 더러 있다.’"(마르 8,34-9,1)
1) 여기서 ‘부끄럽게 여기다.’라는 말은, “관계를 끊다. 관계 맺기를 거부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은, “누구든지 나를 믿기를 거부하고, 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면”, 또는 “누구든지 내가 주는 구원을 받기를 거부하면”입니다.
“사람의 아들도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는, “그는 마지막 날 심판 때에 구원받지 못할 것이다.”입니다. <그 자신이 구원받기를 거부해서 못 받게 되는 것입니다.>
“절개 없고 죄 많은 이 세대”는, 영혼 구원을 얻는 일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죄 속에서 사는 것이 더 좋다고 고집부리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는, 예수님께서 ‘심판관’으로 재림하실 때입니다. 우리를 구원하려고 ‘구세주’로 오신 예수님께서는 재림하실 때에는 심판하시는 ‘심판관’으로 오실 것입니다.
2) 구원받기를 거부하는 자들이 멸망을 향해 가는 것을 안타까워하시면서 예수님께서 한탄하신 적이 있습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언자들을 죽이고 자기에게 파견된 이들에게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는 너! 암탉이 제 병아리들을 날개 밑으로 모으듯, 내가 몇 번이나 너의 자녀들을 모으려고 하였던가? 그러나 너희는 마다하였다. 보라, 너희 집은 버려져 황폐해질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 하고 말할 때까지, 정녕 나를 다시는 보지 못할 것이다."(마태 23,37-39)
이 말씀에서 ‘예루살렘’은, 예수님을 믿기를 거부하면서 예수님을 박해하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오신 분이기 때문에, 박해자들과 죄인들도 ‘예수님의 구원사업의 대상’입니다. <아무도, 그 어떤 죄인도 구원사업에서 배제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사람도 잃지 않으려고 애쓰시는 ‘착한 목자’이신 분인데, 구원받기를 거부하면서 스스로 떨어져 나가는 자들은 예수님도 어떻게 하실 수가 없습니다. <구원받기 싫다는 사람을 강제로 끌고 가는 것은 구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 하고 말할 때”는, ‘예수님의 재림과 심판 때’입니다. “정녕 나를 다시는 보지 못할 것이다.”는, “지금 회개하지 않으면 그날 구원받지 못하고 멸망하게 될 것이다.”입니다. <반대로, ‘지금’ 회개하면 누구든지 구원받을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3)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라는 말씀은, “누구든지 구원받기를 원하면 어떤 어려움이라도 받아들일 각오를 하고 나를 따라야 한다.”라는 뜻입니다.
‘어떤 어려움’은 일상생활의 ‘작은 불편’에서부터 목숨을 잃는 일, 즉 ‘순교’까지 모두 포함하는 말입니다. 간단하게 말하면, 누구든지 ‘목숨을 걸고’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구원받기를 희망하기 때문이고, 그 구원을 예수님께서 주신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 믿음은 나의 희망이 틀림없이 이루어진다는 확신입니다. 바로 그 확신에서 ‘기쁨’이 생깁니다. 희망, 믿음, 기쁨이 곧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게 하는 ‘힘’이고, 신앙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만나는 온갖 어려움을 감내할 수 있게 하는 ‘힘’입니다. 누구에게나 “신앙생활은 기쁨의 생활”입니다.
<희망이 없으면 처음부터 신앙인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희망이 있더라도 믿음이 없으면 신앙생활을 시작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만일에 신앙생활이 힘들기만 하다고 불평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희망이 잘못되었거나, 즉 잘못된 것을 희망하는 사람이거나, 믿음이 부족한 사람입니다.>
4)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는,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것만 희망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고”입니다.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는 “예수님과 예수님의 가르침을 믿고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희망하면서,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것에 대한 애착을 버리는 사람은 그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입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온 세상을 얻는다고 해도, 그것은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는 데에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입니다.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는,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는 사람은 먼지처럼 허무하게 사라질 것이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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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따르는 길>
마르코 8,34ㅡ9,1 (예수님을 어떻게 따라야 하는가)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군중을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절개 없고 죄 많은 이 세대에서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예수님께서 또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에 서 있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죽기 전에 하느님의 나라가 권능을 떨치며 오는 것을 볼 사람들이 더러 있다.”
<따르는 길>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 8,34)
십자가를 지신 분을
따르는 길은
오직 십자가를 짊일밖에
낮추신 분을
따르는 길은
오직 낮춤일밖에
비우신 분을
따르는 길은
오직 비움일밖에
품으신 분을
따르는 길은
오직 품음일밖에
베푸신 분을
따르는 길은
오직 베풂일밖에
섬기신 분을
따르는 길은
오직 섬김일밖에
돋우신 분을
따르는 길은
오직 돋움일밖에
이루신 분을
따르는 길은
오직 이룸일밖에
살리신 분을
따르는 길은
오직 살림일밖에
십자가를 지신 분을
따르는 길은
오직 십자가를 짊일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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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나’가 아니라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흔하게 십자가를 봅니다. 성당이나 교회의 수많은 십자가를 볼 수 있고,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십자가 목걸이를 하고 다니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의미를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혹 십자가를 생각한다 해도 사랑보다는 고통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렇지만 우리 믿는 이들은 십자가에 담긴 사랑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멸망할 자에게는 십자가에 관한 말씀이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받을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힘입니다.”(1코린 1,18)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사실 바오로는 십자가에 담긴 구원의 능력을 알았기에 자발적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었고 십자가를 짊어질 수 있었습니다. 바오로는 말합니다. “나에게 이로웠던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 안에 있으려는 것입니다.”(필리 3,7-9)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내가 육신 안에서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해 당신 자신을 바치신 하느님 아드님에 대한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갈라 2,20)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어떠한 것도 자랑하고 싶지 않습니다.”(갈라 6,14) 이제부터 인생의 주인은 ‘나’가 아니라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 8,34)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십자가는 선물이요, 은총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억지로, 질질 끌고 갈 것이 아니라 차라리 짊어지는 것이 가볍습니다.”(성 아우구스티누스) 자신을 버리고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새로운 것을 받아들인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자기 것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버린다는 것은 새로운 것을 담을 그릇을 준비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빈자리가 없으면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받아들일 수 없는 법입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주시는 선물을 받아들이려면 먼저 빈자리를 마련해야 함은 당연합니다. 예수님을 만났으면 마음이 예수님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성직자 수도자들은 온전한 봉헌을 위해서 결혼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존경도 받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외적인 것 못지않게 자기 자신을 얼마나 버리고 사는가입니다. 혼자 산다는 핑계로 자기중심적으로 변해가고, 예수님 중심으로 살아가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철저히 제 울타리를 만드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섬김보다는 대접을 받고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늘 부끄럽습니다.
익숙해져 있는 나의 낡은 삶의 양식을 버리지 못하는 것은 믿음이 약한 탓입니다. 나를 비우지 않고는 결코 주님께서 거처하실 곳이 없다는 것을, 생각하며 오늘은 주어지는 십자가를 기꺼이 짊어지길 희망합니다. 때로는 하고 싶어도 하지 말아야 하고, 때로는 하고 싶지 않아도 해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를 내 안에 건설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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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김윤태 루카 신부님]
<십자가>
각자의 일터와 생활에서 잘 지내시는지요. 아마 대부분 힘들고 어려운 현실에 희망이라도 없으면 살아가시기가 무척 어려우리라 생각됩니다. 그런데 그 희망이 우리에게 확신을 주고 기쁨을 주어 현실의 무게를 견디어 낼 수 있는 것이길 바랍니다.
만일에 그 희망이 이루어지는 것이 더욱더 우리 자신들과 가족을 곤궁에 처하게 만들거나 일시적 행복을 주고 파탄에로 이끈다면 큰일이 아니겠습니까.
청취자 여러분! 그런 일에 우리들의 마음을 빼앗기지 말라고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고 말입니다.
그럼 지금 우리들이 바라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생명에로 이끄는 것입니까. 죽음에로 이끄는 것입니까?
혹시 아무리 힘든 현실이라도 그것이 죽음인지 독인지 모르고 눈앞의 일을 위해 걸어가거나 마신다면, 주님께서 생명에로 이끄시는 양식을 주시지만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됩니다.
사실 어려움 속에서 주님의 편에 생명의 길을 희망하기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소위 십자가를 묵묵히 짊어지기란 어렵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우리들은 자신들의 욕망으로 이기심으로 십자가를 지기보다 어려움을 비겨가거나 내려놓기를 원합니다. 그것이 설령 이웃의 유익과 하느님의 영광에 반해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말입니다.
나아가 생명을 버리고 죽음을 선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선택은 좀 여유 있고 성공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실제로는 세상에 굴복하는 것입니다.
이런 내용은 첫 번째 인간 아담 에덴동산의 유혹에서 두 번째 사람 예수님의 광야의 유혹이야기에서, 어떤 것이 성공의 길인지 알려주십니다.
잘못된 길에 들어서면서 소위 돈, 명예, 권력 등으로 포장된 것들에 의해 자신의 생명을 잃어버립니다. 자신이 관심을 두지 않는 사이에 자신의 생명을 좀먹고 있는 줄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조금만 관심을 갖고 소위 성공한 사람들의 생활을 들어다 보면, 이런 내용을 금방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이 부럽고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들과 같은 생활을 하고 싶다면, 이미 당신은 세상의 악성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치료를 요하는 상태입니다. 바로 의사이신 주님이 필요한 시간입니다. 그런데 의사를 찾지 않고 어디로 가십니까?
여러분! 우리는 생명을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건강을 위해서 하루만 열심하면 안되고 매일매일 꾸준히 노력하고 준비해야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일확천금을 꿈꾸며 욕심스럽게 삽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하느님의 초대에 맞지 않는 생활입니다. 주님께서 들려 주시는 하느님의 초대에 귀를 기울이고 복음의 가르침에 따라 살아야 합니다.
혹시라도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도 들려주시는 말씀 “너희들이 잘 보이지 않는다면 내가 잘 보게 해 주겠는데, 너희들이 잘 보인다고 하니 나도 어찌할 수 없다”는 주님의 깊은 탄식이 우리들에게 하시는 말씀이 아니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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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신기현 시몬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인간들을 죄에서 해방시키시고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상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실 것을 예고하십니다. 그러면서 당신의 모범을 따라 충실히 살고자 하는 그리스도인에게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기에 대해 우리들은 어떠한 자세로써 살아가야 할 지 묵상해보도록 합시다.
세계 2차 대전 때 독일군이 폴란드를 침공했을 때 일입니다. 독일군 한 부대가 폴란드의 작은 마을을 점령하여 주민들에게 군인들이 먹을 음식과 전쟁에 필요한 철 그리고 많은 액수의 돈을 요구하였습니다.
만일 다음 날 정오까지 음식과 철 그리고 돈을 내놓지 않으면 주민들 중 10명을 붙잡아 사형에 처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주민들은 모든 식량을 꺼내고, 가정에 있는 모든 쇠붙이를 가져왔습니다. 식량과 철은 어느 정도 마련되었지만 마을에 있는 모든 돈을 모아도 그들이 요구한 돈에 반밖에 차질 않았습니다.
다음날 정오가 되었을 때 독일군들은 주민들 중 닥치는 대로 10명을 뽑아 그들을 밧줄에 묶고, 눈을 가린 채 마을 중앙에 나타났습니다. 독일군 장교 한 명이 앞으로 나와서 “음식과 철 그리고 돈이 준비되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때 주민 대표가 나와서 떨리는 목소리로 “음식과 철은 준비되었지만 돈은 아무리 구해도 우리에게 가진 것은 당신들이 요구한 금액에 반밖에 모이질 않았소, 이것이라도 제발 가지고 가고, 우리 마을에 있는 사람들은 죽이지 말아 주시오.”라고 애원하며 대답하였습니다.
그러나 독일군 장교는 독살스런 눈을 부릅뜨고 “복종하지 않으면 어떠한 대가가 치러지는지 다른 마을 사람들이 잘 알 수 있도록 본보기를 보여 주어야겠다.”고 말하면서 밧줄에 묶인 채 있는 마을 주민 10명을 향해 사격 명령을 내리려고 하였습니다.
그 때였습니다. 독일군 장교 앞에 조그마한 한 여인이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그 마을 병원에 근무하던 수녀님이었습니다. 그 수녀님은 독일군 장교에게 “남자를 죽이는 것보다 연약한 여자를 죽이는 것이 다른 마을에 더 많은 효과적인 본보기를 보일 수 있지 않겠습니까?”라고 말한 뒤 천천히 독일군 병사들 사이를 지나 밧줄에 묶여 있는 10명의 마을 사람들을 풀어 주고 가족들에게 보내고는 그들이 서 있던 자리에 당당히 서 있었던 것입니다.
그 순간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모두 숨죽인 듯 조용히 바라보고만 있었습니다. 독일군 역시 갑자기 닥친 일이라 어리둥절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독일군 장교는 너무나도 당당한 그녀의 모습을 뒤로 한 채 조용히 마을을 떠났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너무나도 사랑하신 나머지 당신의 것을 다 내어 놓고 십자가상에서 죽으셨음을 우리는 고백하고 있습니다.
십자가 죽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사랑과 희생의 결정체인 것입니다. 이 죽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들은 구원의 길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무상으로 주어진 구원의 길로 들어서게 된 우리들은 주님께 충실한 응답의 자세로서 새롭게 변모된 모습으로 그분께서 가르치시고, 모범으로 남긴 뜻을 잘 되새기며 살아가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 부르심은 자기 자신 만을 위하는 이기적인 삶에서부터 이웃 형제들을 위한 삶으로 방향 전환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매일을 살아가면서 매스컴을 통해 보고 듣는 것은 온통 이기적인 삶에서 드러나는 경우들이 대부분입니다. 나만 호의호식하며 즐기면서 살아가는 사람들, 자기만 잘 살아 보려고 가장 가까운 사람과의 신의를 저버리고 사는 사람들 더 나아가 몇 푼의 돈 때문에 이웃 형제를 죽이는 사람들 속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는 모습은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앞의 예화에서처럼 비록 연약하고 가진 것 없는 수녀님이지만 무서운 분위기 속에서 자칫 잘못하면 자기 목숨까지도 잃어버릴 수 있는 순간에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귀한 목숨까지도 이웃 형제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불의와 맞서서 주님의 사랑을 전한 수녀님의 용감한 행동을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의 생활 가운데 그 수녀님의 모습처럼 살아가고자 한다면 아주 조그마한 부분부터 사랑을 실천해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바로 옆에 있는 형제들의 마음을 잘 이해하고 얘기를 잘 들어주며, 우리의 따뜻한 마음을 전해야 할 것이고, 더 나아가 큰 어려움에 허덕이는 사람들을 위해 자기 자신에게 불이익이 닥칠지라도 끊임없는 사랑 안에서 희생하는 삶을 꾸준히 이어 나아갈 때 이런 삶의 모습이 모이고 모여서 종국에는 자기 목숨까지도 내어주는 사람으로 변모해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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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정용진 요셉 신부님]
오늘 우리가 제1독서에서 들은 바벨탑 이야기는 사람들의 일치와 다양성의 문제를 제기합니다. 오늘 제1독서는 “온 세상이 같은 말을 하고 같은 낱말들을 쓰고 있었다.”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모든 사람이 같은 말을 되풀이합니다. 이들에게는 하나의 목표가 있습니다. 하나의 도시, 하나의 탑입니다. 이들은 이렇게 하여 한 가지 두려움에서 벗어나고자 합니다. 흩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언뜻 보기에는 다 좋아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의 도시, 하나의 탑이 상징하는 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다름을 거절하는 것, 일치를 이룬다는 목표 아래 하나의 방식만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이들에게 진정한 배려는 있을 수 없습니다.
문제는 이런 삶의 방식이 하느님의 창조 위업의 과정과 정면으로 부딪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지난 주에 읽은 창세기의 창조 말씀을 보면 하느님께서는 창조의 과정에서 언제나 피조물의 다양성을 보존하는 방식을 취하셨습니다.(창세기 1장 참조)
반면에 사람이 추구한 바벨탑 쌓기의 과정은 하느님의 창조 방식을 거슬러 갑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생명과 자유를 지키는 일에 매우 강한 열정을 지니신 하느님으로 당신을 드러내십니다. 사도행전에는 바벨탑 이야기의 후속편을 보는 듯한 말씀이 나옵니다.
성령 강림의 이야기입니다.(2,1-12 참조) 창세기의 첫 이야기들(카인, 홍수, 바벨탑)은 사람들이 어떻게 죽음의 길을 걷게 되었는지를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들 안에서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자유를 주시고 그의 자율성을 존중하시는 분으로 드러나십니다.
우리는 사람들의 일치를 바라시고 그들의 다양성을 깨뜨리지 않으시며 오히려 그것이 더 자라나도록 배려하시는 하느님을 봅니다. 삼위일체 안의 하느님이십니다.
모두 고유한 자리를 잃지 않으시면서 충만한 일치를 누리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우리 믿음의 하느님을 찬미하며 그분의 길을 따라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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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제가 컴퓨터를 처음 접했을 때는 중학교 1학년 때였습니다. 당시 컴퓨터 본체의 가격은 25만 원으로, 짜장면 한 그릇에 500원 할 때이니 엄청나게 비싼 기계였습니다. 형과 저의 미래를 위해 아버지께서 큰돈을 들여서 사주신 것이었지요. 이렇게 비싼 기계이니 평생 쓸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Apple II’라는 당시의 컴퓨터는 그렇게 오래 쓰지 못했습니다. 그 뒤, 대학에 들어간 형이 아르바이트를 해서 번 돈으로 컴퓨터를 샀습니다. IBM 데스크톱 컴퓨터는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빨랐고, 저장 장치인 플로피 디스켓도 이용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역시 그렇게 오래 쓰지 못했습니다. 군대 제대 후, 노트북을 구입했습니다. 메모리 1M, 하드디스크 용량 40M, 이 큰 용량을 어떻게 채울 수 있을까 싶었습니다. 그러나 몇 년 뒤, 이 노트북의 용량이 너무 적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컴퓨터나 스마트폰을 보면서 기술의 발전이 얼마나 빠른지를 분명하게 체감합니다. 그 발전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서, 예전에는 최신 기기에 밝다는 소리도 듣던 저였지만 요즘에는 컴맹, 기계치 등의 소리를 듣게 됩니다. 참 다행스러운 것은 하느님께서는 세상과 달리 우리의 빠른 변화를 재촉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늘 기다려 주시고, 기회를 주셔서 우리 스스로 변화의 길로 들어서길 원하신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세상의 변화에는 어떻게든 맞춰 살려고 하면서, 주님을 향한 우리의 변화는 늘 뒤로 미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발전만큼 빠르게 변할 수는 없지만, 주님 뜻에 맞게 사는 신앙인으로의 변화를 늘 추구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마음은 바로 지금부터 이루어져야 함을 오늘 복음의 예수님 말씀을 통해 알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장차 겪게 될 고난에 대해 예고하신 뒤에, 제자들과 군중을 가까이 부르시고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따르려면, 제 십자가를 져야 한다. 비록 이 세상의 목숨을 잃게 되더라도, 끝내는 진정한 목숨을 얻어 누릴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자기가 져야 할 십자가를 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우리의 구원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변화에 발맞추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뜻에 맞춰 살아가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고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세상의 변화는 편하고 쉬운 것만을 쫓지만, 주님을 따르는 우리는 주님 뜻이라면 고통의 십자가라도 기쁘게 짊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변화가 필요할 때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지금부터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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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행복해지고 싶으십니까? 모든 사람의 목표는 행복한 삶을 사는 데 맞추어져 있습니다. 질문이 있습니다. 여러분과 여러분의 자녀가 돈을 많이 벌길 원합니까? 행복하길 원합니까? 유명해 지길 원합니까? 행복해지길 원합니까?
세상에 살면서 가난하고 업신여김을 받다가 하늘에서는 행복 속에서 사는 사람을 우리는 많이 알고 있습니다. 그게 누구죠? 수많은 성인이고, 수많은 순교자입니다. 그들은 주님을 믿고 따랐습니다. 주님이 가신 길, 보여주신 길을 고대로 걷고자 희망했습니다. 또한 죽어 하늘나라에 가면 주님과 함께 살길 희망했습니다. 그리고 그 희망을 이루려고 부단히 노력했습니다. 하늘에서 행복하려고 말입니다.
나의 십자가가 너무 무겁게 느껴지고 힘들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를 버리지 마십시오. 그것이 하늘나라의 열쇠입니다. 주님이 주신 십자가 열쇠 없이 주님 곁에 설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님도 지상에서 사는 동안 십자가를 지고 하느님께 나아가셨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그리고 주님께 가는 날까지 우리의 십자가를 지고 걸어야 합니다. 우리가 짊어진 그 십자가로 우리는 하늘나라에 들어갈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하느님 나라에서 행복하길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 십자가는 하늘의 행복을 얻는 열쇠라는 것을 우리가 늘 기억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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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전교수도회 김종오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코.8,34)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는 크고 작은 아픔들을 하나쯤은 누구나 다 안고 살아간다지만, 때로는 혼자만 아픈 것마냥 느껴지는 날에는 더욱 슬퍼집니다. 아무도 모르는 고통을 홀로 느끼는 날에는 가슴마저 쓰라립니다. 고통 중에 고개 들어 바라보는 십자가에서는 주님의 신음소리가 들립니다.
곱게 키워 열아홉 살이 되어 대학생이 된 딸이 불의의 사고로 영원히 떠나는 날, 살면서 길을 잘 찾지 못하던 딸이 죽어서 가는 길마저 잃을까봐 모든 이를 용서하겠다던 어떤 아버지의 눈물어린 고별사를 듣는 십자가의 예수님의 눈에는 피눈물이 흐릅니다.
마음을 주고 정성을 다 바쳐서 사랑하였지만, 배신으로 되돌아오는 아픔은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입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말로 다하지 못하고, 혼자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멍들고 숨겨진 가슴 속의 사연은 더욱 쓰라립니다. 말없이 우리의 아픔을 듣고 계시는 십자가의 예수님은 소리없는 절규를 하십니다.
제 십자가를 지며 겪는 우리의 고통은 혼자가 아니라 주님과 함께 겪는 고통입니다. 우리가 고통을 겪을 때마다 십자가에서 찔리신 주님의 가슴에는 피눈물이 흐릅니다. 세상에서 겪는 우리의 작은 고통에도 주님께서는 창으로 옆구리를 찔리신 극도의 고통을 느끼십니다.
아파하는 우리보다 주님께서는 더 아파하십니다. 우리가 자신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우리를 사랑하시는 십자가의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제 십자가를 짊어 질수만 있다면, 우리의 고통은 희망과 영광을 낳습니다. 우리가 지고가는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을 주님께서는 영광과 부활로 변화시키셨기 때문입니다.
영광의 십자가는 고통이 없어서가 아니라, 고통 중에 희망을 품기에 영광의 십자가입니다. 악이 만든 고통을 악으로 갚지 않고 제 십자가로 지는 만큼 십자가는 우리에게 영광으로 다가옵니다.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주님을 따르는 사람은 고통이 있지만 고통스럽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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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마르코복음>을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본다면, 어제 복음까지는 주로 예수님의 정체성을, 오늘 복음에서부터는 예수님을 따르는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길, 곧 제자 되는 길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 8,34)
이 말씀은 “나를 따르려면”에서, 먼저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기를 ‘원하는 지’를 확인하게 합니다. 그러니 이는 깨달음, 곧 자신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그것이 참된 것인지, 원해야 할 것을 원하고 있는지, 그리고 진정으로 원하는 지를 깨닫는 일을 바탕으로 합니다. 결국, 이 말씀은 예수님을 진정으로 따르기를 원하는 이들에게 제시되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먼저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나는 진정으로 예수님 따르기를 원하고 있는가?
오늘 <복음>은 그것을 확인할 수 있는 표시 두 가지를 말해줍니다. 곧 예수님을 진정으로 따르려고 하는 이들에게서 드러나는 두 가지의 표시입니다. 그것은 ‘자신을 버리는 일’과 ‘자기 십자가를 지는 일’ 입니다. 우선 예수님을 따르려는 이는 집과 가족 곧 소유와 사람들로부터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을 떠나는 일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는 지금 ‘자신으로부터 이미 떠났는지’, 적어도 지금 ‘자신을 버리고 있는지’ 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렇다면, 자신을 버린다는 것,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단순히 자신으로부터 떠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릇을 비웠는지 보다, 무엇을 채웠는지에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그릇의 정체성을 의미합니다. 곧 보석을 채우고 있으면 보석그릇이 되는 것이요, 쓰레기를 채우고 있으면 쓰레기통이 되듯이, 자신을 버리고 빛이신 그리스도를 채우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기에, ‘자신을 버린다.’는 것은 곧 예수님을 받아들여 ‘예수님의 그릇’이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나는 진정 예수님을 받아들여 따르고 있는가?
사실 우리는 스스로 자신의 힘으로 자신을 비울 수가 없으며, 이미 자신을 비우신 그분에 의해서 비워질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 그분을 받아들이고, 그분께 의탁하여 그 길을 갑니다. 만약 자신이 스스로를 비운다면, 그렇게 하고자 하는 자신을 실현하는 꼴이 되겠지만, 그분께 신뢰를 두고 의탁하는 신앙의 행위로 인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는 신앙 안에서 예수님과 함께 짊어질 때, 비로소 구원의 십자가가 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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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마르 8,34)
주님!
제 자신을 따르지 않고, 당신을 따르게 하소서!
가고 싶은 데로 가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제시한 길을 가게 하소서!
무엇을 하든, 그것을 통해 당신을 따르게 하소서!
제 자신을 붙잡고 가는 것이 아니라, 당신을 붙잡고 가게 하소서!
아니, 당신께 붙들려 가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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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어떻게 예수님을 따라야 하는가?“>
-주님 중심의 참된 제자의 삶-
“행복하여라, 주님을 하느님으로 모시는 민족, 그분이 당신 소유로 뽑으신 백성! 주님은 하늘에서 굽어 보시며, 모든 사람을 살펴보신다.”(시편33,12-13)
예나 이제나 인간의 관심사는 동일합니다. 누구나 마음 깊이에서는 참된 삶을 추구합니다. 부단히 희망을 길을 찾습니다. 희망을, 길을 잃었을 때 방황이요 혼란입니다. 여기서 저절로 나오는 물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입니다. 지금도 여기 수도원 피정집 마다 제가 쓴 3권의 책들이 비치되어 있습니다. 10년이 훨씬 지난 이미 품절된지 오래된 책들입니다.
“둥근 마음, 둥근 삶”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사랑밖엔 길이 없었네”
책 제목들이 삶의 길을, 삶을 방향을 제시합니다. 또 한권의 책을 낸다면 책 제목은 “하루하루 살았습니다”로 하고 싶습니다. 이 세권의 책들중 우선 찾아 보는 것이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라 합니다. 마음 깊이에서는 누구나 잘 살고 싶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는 “어떻게 죽어야 하나?” 물음으로 직결됩니다. 잘 살아야 잘 죽을 수 있습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예수님이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줍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물음은 더 구체화되어 “어떻게 예수님을 따라야 하는가?”바뀝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군중을 부르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제자들은 물론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인류 모두가 따라야 할 길이신 예수님이심이 드러납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예외없이 누구나에게 적용되는 참 삶의 길이자 참된 제자의 길입니다. 여기가 루카는 “날마다” 말마디를 추가합니다. 참 삶의 길, 생명의 길, 진리의 길, 구원의 길은 이 길 하나뿐입니다. 새삼 하느님을 그대로 드러내는, 그대로 하느님의 현존이자 화신인 예수님은 우리 삶의 목표, 삶의 방향, 삶의 중심, 삶의 의미가 됨을 깨닫습니다. 도대체 예수님 대신에 누구를, 무엇을 이 삶의 중심 자리에 놓을 수 있겠는지요?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6 목숨을 구할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느냐?”
참으로 유일무이한 목숨을 구하는 길은 오직 하나 예수님을 따르는 길뿐임이 강조됩니다. 이어지는 말씀도 오늘의 우리를 두고 하는 말씀입니다. 주님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당당히 고백하며 당신을 따르라 하시며 용기백배 힘을 주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절개없고 죄많은 이 세대에서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예나 이제나 절개없고 죄많은 세대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이런 혼탁한 와중에서 참된 삶의 길은, 길이요 진리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평생 하루하루 날마다 죽는 그날까지, 살아 있는 그날 까지, 주님을 고백하고 증언하면서 초지일관, 시종여일 주님을 따르는, 홀로와 더불어의 평생 여정의 길임을 깨닫습니다.
무엇보다 주님을 중심한 삶에 주님을 날로 깊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참으로 사랑할수록 자발적 기쁨으로 자기를 버리고 제 운명의, 책임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를 수 있습니다. 제 십자가에 대한 사랑은 그대로 아모로 파티, 운명애가 됩니다. 자기 버림, 제 십자가를 짐, 모두가 주님 사랑의 표현이요 주님 사랑의 힘이 샘솟는 힘의 원천이, 원동력이 되어 항구히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를 수 있습니다.
오늘 창세기 “바벨탑”이야기는 상징하는 바 참 깊습니다. 참된 제자의 삶에 좋은 가르침이자 깨우침이 됩니다. 바벨탑을 세우는 사람들! 삶의 중심인 하느님이 없습니다. 이들을 깊이 들여다 보면 그 안에는 뭔지 모를 두려움과 외로움이, 불안이, 깊은 내적 공허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오늘날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헛된 바벨탑 쌓기에 아까운 시간과 정력을 낭비하는지요? 지위, 명예, 권력, 재물등 탐욕이 끝없이 추구하는바 내외적 바벨탑 쌓기요, 탐욕과 교만의 근원에는 두려움이, 두려움의 악마가 똬리를 틀고 있음을 직시해야 합니다. 곳곳에 치솟는 고층 건물 아파트들을 볼 때마다 또 하나의 바벨탑은 아닐까 하는 불길한 생각도 듭니다.
참으로 주님을 삶의 목표, 삶의 방향, 삶의 중심, 삶의 의미로 확실히 자리 매김할 때 마음의 헛된 내외적 바벨탑 쌓기는 끝날 것입니다. 그러니 거창한 바벨탑은 두려움의 표현이자 내적공허의 표현인 것입니다. 말그대로 참으로 위태한 사상누각에 하느님 중심 없는 획일화된 집단 삶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생명의 길이 아닌 죽음의 길을 가는 이 집단을 살리기 위한 비상조치로 이들을 뿔뿔히 흩으십니다. 새삼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삶의 중심으로 모셔야 함을 배웁니다. 인간의 원초적 내적 두려움과 외로움, 공허감을 해소시켜 주실 유일한 분은 하느님이신 예수님뿐이기 때문입니다.
날마다 생명이자 사랑이자 빛이신 주님을 삶의 중심에 새롭게 모시는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거짓 안전의 내외적 바벨탑 쌓기를 중단시키고, 두려움과 외로움, 불안과 내적공허의 어둠을 몰아내시고, 생명과 빛으로 충만한 삶을 살게 하십니다. 다시 한 번 되뇌어 보는 제 좌우명 기도 고백시입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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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내 십자가는 내가!>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어제 가는 길을 가로막는 베드로에게 뒤로 물러나라고 하신 주님께서 오늘은 당신 제자라면 당신 뒤를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전에 저는 ‘내 뒤를 따르려면’이라는 말씀을 눈여겨보지 않았기에 그저 ‘나를 따르려면’으로 대충 알아들었는데 이번에 처음으로 주님 뒤를 따라야 함을 명확히 깨닫게 되고 묵상케 된 것입니다.
이런 묵상을 하면서 제가 주님의 뒤를 따르지 않는 이유도 묵상해봤습니다. 저는 여자 꽁무니를 따르느라 주님의 꽁무니를 따르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의 부귀영화를 쫓느라 주님의 뒤를 따르지 않는 것도 아니고, 누구의 똘마니가 되는 것은 더더욱 싫어하기에 인간 누구를 추종하다가 주님의 뒤를 따르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한때 저는 주님보다 프란치스코에 더 열광한 적이 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뭣 때문입니까?
나 때문입니다. 주님의 뒤를 따르지 않는 것은 단연코 나 때문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당신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라고 하시는데 그 버려야 할 나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저는 자주 나의 길, My way를 걸으려고 하기에 주님 뒤에 있지 않고, 주님과 상관없이 떨어져 있거나 있고 싶은 곳에 자유로이 있습니다.
이런 경우도 있겠습니다. 나의 길을 가는데 주님께서 내 앞길 편한 길 되도록 도와달라고 합니다. 십자가의 길을 가려고 하기보다는 꽃길을 가게 해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주님 말씀을 따를 수 없겠지요. 그리고 남의 십자가가 아니라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해도 지지 않고, 자기 십자가인데도 남의 십자가라고 하며 남들에게 미룰 것입니다.
그래서일 겁니다. 제가 제 십자가를 남의 것이라고 하며 제 십자가를 지지 않기에 마치 자기 짐을 지지 않는 자녀의 짐을 부모가 대신 지듯이 주님께서 제 십자가를 대신 지실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십자가의 길 제5처를 할 때마다 시몬이 주님을 도와 주님의 십자가를 진 것이 아니라
시몬이 져야 할 십자가를 주님께서 대신 지신 것이라고 묵상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 십자가를 남에게 또 주님께 미루지 말고, 내 십자가로 우선 받아들일 것이고 그다음엔
그것을 내 십자가를 대신 져주시는 주님과 함께 질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내 십자가를 대신 져주시는 주님의 십자가를 시몬처럼 대신 져드리는 셈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는 권고 5번에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대의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그대는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우리의 연약함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십자가를 매일 지는 일을 자랑할 수 있습니다.”
내 십자가는 내가! 이것이 오늘 우리가 다짐해야 할 것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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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마르 8,35ㄴ)
<부활의 길!>
오늘 복음(마르8,34-9,1)은 '예수님을 어떻게 따라야 하는가?'에 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군중을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마르 8,34ㄴ-35)
우리가 믿으며 따라가고 있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신 길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당신의 모든 것을 우리의 구원을 위해 내어놓으신 '희생의 길'입니다. 그리고 이 길이 곧 '생명의 길이요 구원의 길'이라는 것을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분명하게 드러났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살기 위해서, 부활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을 걸어갑니다. 그래서 예수님처럼 너를 위해 나 자신을 내어놓는, '십자가의 길, 희생의 길'을 걸어갑니다.
'고진감래(苦盡甘來)'라는 말이 있습니다. '쓴 것이 다하면 단 것이 온다.'는 뜻으로, '고생 끝에 행복이 온다.'는 뜻의 사자성어입니다. 우리가 걸어가고 있는 십자가의 길 그 너머에 영광과 부활이 있습니다.
"절개 없고 죄 많은 이 세대에서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마르 8,38)
예수님의 이 말씀이 의미심장하게 들려옵니다. 그리고 이런 물음들을 던져보게 합니다.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있지는 않은가?' '언제 어디서나 당당하게 십자성호를 긋고, 천주교 신자임을 드러내고 있는가?' '삶의 자리에서, 구체적인 이슈 앞에서 천주교 신자답게, 하느님 아버지의 뜻 안에서,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고 있는가?'
참된 그리스도인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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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 8, 34)
나무도
여행도
버려야
가볍게
떠날 수
있습니다.
자신을
버리는 길이
곧 자신을
살리는
길입니다.
자신을 버려야
주님께
나아갈 수 있고
주님께
돌아갈 수
있습니다.
자신을 버려야
맛보게 되는
평화입니다.
십자가는
우리 삶의
진정한
이정표입니다.
자기가 아닌
다른 무엇으로
십자가를
질 수는
없습니다.
죽음이라는
변화가 있기에
십자가는
부활이 됩니다.
영원한
생명의 세계에는
언제나
십자가의 여정이
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우리가
감당하고
받아들여야 할
우리 삶의
실존입니다.
우리자신이
죽어야만
완성되는
십자가의
여정입니다.
십자가의 여정은
밀알 하나의
여정입니다.
죽어야만
참된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여정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먼저
죽으십니다.
우리자신이
죽어야
하느님이
사시는
사랑의 힘찬
변화입니다.
참된
변화를 믿고
참된
변화를 따르는
오늘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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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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