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마고의 노래 원문보기 글쓴이: 사람이 하늘이다
졸본성의 위치(위도 39도~40도 사이) |
세계적인 천문학자인 박창범 교수는 『천상열차분야지도』를 연구한 결과 중앙부인 북극부분은 조선시대 초기의 하늘을 나타낸 것이고, 그 바깥에 있는 별들은 기원전‧후에 해당하는 고구려시대 초기의 하늘로 밝혀냈다. 관측자의 위치도 중앙부는 한양의 위도인 38〬이고, 바깥부분은 39〬~40〬로 밝혀냈다.(『하늘에 새긴 우리의 역사』참조)
박창범 교수의 연구 결과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고대에서 천문도가 지니는 상징성으로 보아 천문을 관측한 지점은 고구려 초기의 수도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별들을 관측한 시기가 기원전‧후 무렵이고 관측자의 위치가 위도 39〬~40〬이므로, 고구려의 졸본성(BC 37~AD 3) 또는 국내성(AD 3~209)은 위도 39〬~40〬에서 찾아야 한다.
필자는 『천상열차분야지도』가 제작 시기나 상징성으로 보아 고구려의 첫 수도인 졸본성에서 제작된 것에 무게를 둔다. 통설에서 주장하는 졸본성이나 국내성은 오늘날의 중국 요령성 환인과 집안지역으로 위도가 41〬를 넘어선다. 『천상열차분야지도』의 관측지점과 많이 어긋난다.
『천상열차분야지도』는 고구려 초기수도를 추적할 수 있는 귀중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당시 고구려의 문화수준을 보여주는 척도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세계에서 제일 오래된 전천천문도는 중국 남송 시대인 1247년에 만들어진 순우천문도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천상열차분야지도』는 이보다 무려 1,000년 이상 빠른 시기에 제작된 것이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추모왕이 부여를 탈출하여 남하할 때 엄호수강에 이르러 “나는 천제의 아들이요, 하백의 외손이다.”라고 소리쳤다. 그러자 물고기와 자라가 물위로 떠올라 다리를 만들어주어 무사히 강을 건넜다고 한다. 추모왕은 스스로가 천자임을 자처하였으며, 고구려는 건국하면서부터 천자국임을 선언한 것이다. 『천상열차분야지도』는 후손들에게 고구려가 천자국이었음을 웅변하고 있다.
(2) 현토군으로 보는 졸본의 위치
기원전 108년 한 무제는 위만조선을 평정하고 그곳에 낙랑군, 임둔군, 진번군, 현토군 등 한사군을 설치하였다. 한사군은 설치된 후 27년 만인 기원전 82년에 이르러 임둔군과 진번군이 폐지되고 낙랑군과 현토군의 두 군만 남게 되었다. 이중 현토군은 초기 고구려의 위치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현토군의 위치를 통하여 초기 고구려가 일어난 졸본의 위치를 살펴보기로 한다.
『후한서』‧『삼국지』 등의 기록에 따르면 초기 현토군은 옥저 땅에 설치되었는데, 뒤에 이夷·맥貊의 침략을 받아 현토군을 고구려의 서북쪽으로 옮겼다. 『한서』 ‘소제본기’에서는 “(소제 원봉元鳳) 6년 봄 정월에 군국의 사람들을 모집하여 요동 현토성을 쌓았다(六年春正月, 募郡國徒築遼東玄菟城).” 고 하였다. 한 소제 원봉6년은 기원전 75년으로 이때 현토군이 옥저 땅에서 요동에 위치한 고구려의 서북쪽으로 이동한 것을 알 수 있다. 『한서』「지리지」와 『수경주』를 통하여 이동한 후의 현토군 고구려현의 위치를 살펴보자.
“고구려현 : 요산에서 요수가 나오는데 서남쪽으로 흘러 요대현에 이르러 대요수로 들어간다. 또한 남소수가 있는데 서북쪽으로 흘러 장새 밖을 지난다(髙句驪 : 遼山, 遼水所出, 西南至遼隊, 入大遼水. 又有南蘇水, 西北經塞外).” 『한서』「지리지」 ‘현토군’
“소요수 : 또 현토군 고구려현에 요산이 있는데, 소요수가 나온다. 고구려현은 옛날 고구려로 호胡의 나라이다. 한무제 원봉 2년 우거를 평정하고 현토군을 이곳에 두었으며, 왕망은 하구려라 하였다. 소요수는 요산에서 나와서 서남쪽으로 흘러 요양현을 지나 대량수와 만난다. 대량수는 북쪽 새외에서 나와서 서남쪽으로 흘러 요양에 이르러 소요수로 들어간다... 중략 ...소요수는 또 서남쪽으로 흘러 양평현을 지나서 맑은 못이 되었다. 진晉나라 영가 3년에 말랐다. 소요수는 또 요대현을 지나 대요수로 들어간다. 사마선왕이 요동을 평정할 때, 공손연을 소요수 상에서 죽였다. (소요수는) 서남쪽으로 흘러 요대현에 이르러 대요수로 들어간다(小遼水: 又玄菟高句麗縣有遼山, 小遼水所出, 縣, 故高句麗, 胡之國也. 漢武帝元封二年, 平右渠, 置玄菟郡于此, 王莽之下句麗. 水出遼山, 西南流逕遼陽縣與大梁水會, 水出北塞外, 西南流至遼陽入小遼水... 中略 ...小遼水又西南逕襄平縣為淡淵, 晉永嘉三年涸. 小遼水又逕遼隊縣入大遼水. 司馬宣王之平遼東也, 斬公孫淵于斯水之上者也. 西南至遼隊縣, 入于大遼水也).” 『수경주』 ‘소요수’
위의 『한서』「지리지」와 『수경주』의 기록을 종합해보면 현토군 고구려현에는 요산이 있고, 장새가 있으며, 서북쪽으로 흘러 장새를 지나는 남소수가 있고, 또 서남쪽으로 길게 흐르는 소요수와 대량수가 있다. 즉 현토군 고구려현의 지리적 특징은 장새 및 서북류 하는 강물과 서남류 하는 두 개의 강물이 있다는 것이다. 현 중국 하북성 지역과 요령성 지역에서 이러한 지형을 찾아보면 오직 한 곳을 찾을 수 있는데, 현 중국 하북성 승덕시 흥륭현 일대이다.
현토군 고구려현의 위치 |
위의 지도에서 연산산맥을 요산으로 보면 요산을 따라 길게 이어진 장새가 있고, 요산으로부터 발원하여 서남쪽으로 흐르는 사하沙河와 려하黎河의 두 강물을 소요수와 대량수로 비정할 수 있다. 『수경주』에 의하면 소요수와 대량수는 요양현에서 합류하여 다시 서남쪽으로 흘러 요동군 양평현을 지나서 요대현에 이르러 대요수에 들어가는데, 요동군 양평현은 현 중국 하북성 천진시 계현 일대이며 대요수는 조백신하로 비정된다.
또 류하柳河가 연산에서 발원하여 서북쪽으로 흘러 장새 밖을 지나서 30여리를 흐른 후 승덕시 흥륭현에 이르러 동북쪽으로 흐름을 바꾸어 난하로 유입되는데, 이는 서북쪽으로 흘러 장새 밖을 지나가는 남소수의 흐름과 일치한다. 그러므로 현 중국 하북성 승덕시 흥륭현 일대의 지형이 『한서』「지리지」와 『수경주』에 나오는 현토군 고구려현의 기록을 모두 충족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반면 강단사학계의 통설에서는 현 중국 요령성 무순撫順 일대를 한나라 현토군 지역으로 비정하고 있다. 그리하여 동요하를 남소수, 혼하를 소요수, 태자하를 대량수, 요동군 양평현을 요양시, 대요수를 요하로 보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비정은 위에서 살펴본 『수경주』의 기록과 물길이 일치하지 않는다. 『수경주』에 따르면 서남쪽으로 흐르는 소요수와 대량수가 합류한 후 요동군 양평현을 지나는데, 통설을 따르면 혼하와 태자하가 각각 서남쪽으로 흘러 요양시를 훨씬 지나서 합류하므로 물길이 합류하는 지점이 일치하지 않는다.
또 『후한서』「군국지」의 기록에 따르면 낙양에서 동북쪽으로 상곡군까지의 거리가 3,200리이고, 낙양에서 동북쪽으로 요동군까지의 거리가 3,600리이다. 그러므로 상곡군 치소에서 요동군 치소인 양평현까지는 대략 400여리의 거리이다. 현 중국 하북성 장가구시 일대에 해당하는 상곡군 치소로부터 동쪽으로 400여리를 가면 현 중국 하북성 천진시 계현 일대가 된다. 위에서 필자가 비정한 요동군 양평현의 위치와 일치한다. 반면 통설에서 요동군 양평현으로 비정하는 현 중국 요령성 요양시 일대는 상곡군 치소로부터 2,000여리나 떨어진 곳이다. 『후한서』「군국지」의 거리기록과 맞지 않는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한서』「지리지」와 『수경주』에 나타난 지형 및 『후한서』「군국지」의 요동군 양평현의 거리기록을 모두 충족하는 현토군 고구려현의 위치는 현 중국 하북성 승덕시 흥륭현 일대가 유일하다. 『삼국지』등의 기록에 따르면 현토군이 고구려의 서북쪽으로 이동하여 갔으므로, 고구려는 현토군 고구려현의 동남쪽에 위치한다. 현 중국 하북성 승덕시 흥륭현 일대를 현토군 고구려현으로 보면 고구려는 연산산맥 동남쪽지역에 위치하였다. 현 중국 하북성 천진시와 당산시 및 진황도시 일대에 해당하며, 이곳이 초기 고구려 지역이자 졸본부여가 위치했던 곳이다. 그러므로 졸본성의 위치도 이곳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3) 『삼국사기』로 보는 졸본성의 위치
1) 바닷가에 위치한다.
① 주몽이 비류수가에 도읍한 후 상류에서 채소가 떠내려 오는 것을 보고 비류국을 찾아갔을 때, 그 나라 임금 송양이 “과인은 바닷가 한 구석에 외따로 살아와서 군자를 만난 적이 없는데, 오늘 우연히 만나게 되었으니 또한 다행스런 일이 아니겠는가!(寡人僻在海隅 未嘗得見君子 今日邂逅相遇 不亦幸乎)”라고 하였다. 비류수 상류가 바닷가이면 하류에 위치한 졸본도 바닷가임을 알 수 있다.
② 유리왕 28년(AD 9)에 부여 사신이 왔을 때 왕이 부여왕에게 회답하기를 “과인은 바닷가에 치우쳐 있어서 예의를 알지 못합니다. 지금 대왕의 가르침을 받고 보니 감히 명령을 따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寡人僻在海隅 未聞禮義 今承大王之敎 敢不惟命之從 )”라고 하였다. 이때는 국내성으로 도읍을 옮긴 후인데 국내성도 역시 바닷가에 위치하였다.
2) 주몽사당이 요동성에 있다.
“(요동)성 안에는 주몽의 사당이 있고 사당에는 쇠사슬로 만든 갑옷과 날카로운 창이 있었는데, 망령되게 말하기를 전연 시대에 하늘이 내려준 것이라고 하였다(城有朱蒙祠 祠有鎖甲矛 妄言前燕世天所降).”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당나라 태종이 서기 645년 고구려의 요동성을 공격할 때 나오는 내용이다. 고구려 역대 왕들은 주몽의 사당에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졸본으로 갔다. 요동성 안에 주몽의 사당이 있고 사당에 하늘이 내려준 갑옷과 창이 모셔진 것으로 볼 때, 요동성이 곧 졸본성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수나라 양제가 서기 612년 고구려의 요동성을 공격할 때, 『삼국사기』는 “여러 군대가 승세를 타고 나아와서 요동성을 포위하니 이 성은 곧 한나라의 양평성이었다(諸軍乘勝進圍遼東城,即漢之襄平城也).” 라고 기록하고 있다. 고구려 요동성은 곧 한나라 양평성이었다.
위 『삼국사기』의 내용들을 종합하면, 고구려의 졸본성과 국내성은 모두 바닷가에 위치하였다. 그리고 고구려가 개국한 졸본성은 훗날 고구려의 요동성과 같은 지역이며, 한나라 시절에는 요동군 양평성 지역이었다.
(4) 『광개토태왕비문』으로 보는 졸본성의 위치
『광개토태왕비문』에 따르면 “비류곡 홀본 서쪽 성산城山 위에 도읍을 세웠다(沸流谷忽本西城山上而建都)”고 하였다. 서기 1805년에 제작된 중국 고지도인 『당토명승도회』 ‘순천부총도’에 성산城山의 위치가 잘 나타나 있다. 오늘날의 중국 하북성 천진시 계현 일대로 반산盤山 부근이다.
『당토명승도회』에 표시된 성산城山의 위치 |
(5) 필자가 보는 졸본성의 위치 종합
지금까지 필자는 4가지의 서로 다른 사료들을 토대로 고구려 초기 수도인 졸본성의 위치를 살펴보았다.
첫째, 고구려 초기에 작성된 천문도인 『천상열차분야지도』를 통하여 졸본성의 위치를 과학적으로 추적해 보았으며, 졸본성은 위도 39〬에서 40〬 사이에 위치하였다.
둘째, 한나라 현토군의 위치를 통하여 졸본성의 위치를 살펴보았다. 『한서』「지리지」및『수경주』의 기록에 따르면 현토군 고구려현에는 요산이 있고 장새가 있으며, 서북류 하여 장새를 지나는 남소수가 있고, 요산에서 발원하여 서남류 하는 소요수와 대량수가 있었다. 소요수와 대량수는 요양현에서 합류하여 다시 서남쪽으로 흘러 요동군 양평현을 지나서 대요수와 합류하였다. 또 『후한서』「군국지」에 의하면 상곡군 치소에서 요동군 양평현까지의 거리는 400여리였다. 이러한 기록들을 종합하면 현토군 고구려현은 현 중국 하북성 승덕시 흥륭현 일대였다. 『삼국지』등의 기록에 따르면 고구려는 현토군 고구려현의 동남쪽에 위치하였다. 그러므로 초기 고구려의 위치는 현 중국 하북성 천진시와 당산시 및 진황도시 일대로 이곳이 졸본부여 지역이었다.
셋째, 『삼국사기』의 기록을 토대로 졸본성의 위치를 살펴보았다. 고구려의 졸본성과 국내성은 모두 바닷가에 위치하였으며, 졸본성은 고구려의 요동성과 같은 지역이며, 한나라 시절에는 요동군 양평성 지역이었다.
넷째, 『광개토태왕비문』을 통하여 졸본성의 위치를 살펴보았다. 졸본성은 성산城山 위에 위치하였는데, 중국 고지도인 『당토명승도회』에는 성산城山의 위치가 현 중국 하북성 천진시 계현 일대로 나타나고 있다.
위의 4가지 사료들을 종합해보면 고구려 초기 수도인 졸본성은 현 중국 하북성 천진시 계현 일대였다. 천진시 계현 일대는 위도 40〬 에 위치하고 있으며, 바닷가에 위치하였으며, 한나라 요동군 양평현에 해당하며, 성산城山이라는 지명이 존재하였다. 그러므로 현 중국 하북성 천진시 계현 일대는 위의 사료들에 나타난 졸본성 관련기록들을 완벽하게 충족하는 곳이다.
(6) 『삼국사기』및『삼국유사』의 저자가 보는 졸본성의 위치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저자들은 졸본성의 위치를 현 중국 요령성 북진시 의무려산 일대로 비정하고 있다. 졸본성의 위치가 필자가 비정한 현 중국 하북성 천진시 계현 일대보다 1,000여리 동쪽으로 이동한 곳이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관련 기록들과 문제점을 살펴보자.
『삼국사기』는 고구려 초기 도읍인 홀승골성과 졸본성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살펴보건대 『통전』에서 이르기를 ‘주몽이 한나라 건소建昭 2년(기원전 37년)에 북부여로부터 동남쪽으로 나아가 보술수를 건너 흘승골성에 이르러 자리를 잡고 국호를 구려라 하고 고高로써 성씨를 삼았다’라고 하였으며, 고기에서 이르기를 ‘주몽이 부여로부터 난을 피해 도망하여 졸본에 이르렀다.’라고 하였으니, 곧 홀승골성과 졸본은 같은 한 곳이다.
『한서지』에서 이르기를 ‘요동군은 낙양에서 3천 6백리 떨어져 있으며, 속한 현으로서 무려가 있어, 곧 『주례』에서 보이는 북진의 의무려산이며, 대요大遼때에 그 아래에 의주를 설치하였다. 현도군은 낙양에서 동북으로 4천리 떨어져 있고, 속한 현이 3현이다. 고구려가 이것에 그 하나이다.’라고 하였으니, 곧 이른바 주몽이 도읍한 곳이라고 말하는 흘승골성과 졸본은 아마도 한나라 현도군의 경계이고, 대요국 동경의 서쪽이며, 『한지』에 이른바 현도의 속현 고구려가 이것일 것이다.
옛날 대요가 멸망하지 않았을 때에 요나라의 황제가 연경에 있었으니, 곧 우리의 조빙하는 사신들이 동경을 지나 요수를 건너 하루 이틀에 의주에 이르러, 연계로 향하였음으로 고로 그렇다는 것을 알 수 있다(按通典云 朱䝉以漢建昭二年 自北扶餘東南行渡普述水 至紇升骨城居焉 號曰句麗以髙爲氏 古記云 朱䝉自扶餘逃難至卒本 則紇升骨城卒夲似一處也 漢書志云 遼東郡距洛陽三千六百里 屬縣有無慮 則周禮北鎮醫巫閭山也 大遼於其下置醫州 玄菟郡距洛陽東北四千里 所屬三縣髙句麗是其一焉 則所謂朱蒙所都 紇升骨城卒夲者 蓋漢玄菟郡之界 大遼國東亰之西 漢志所謂 玄菟屬縣髙句麗是歟 昔大遼未亡時遼帝在燕景 則吾人朝聘者 過東京渉遼水 一兩日行至醫州以向燕薊 故知其然也).” 『삼국사기』「지리」 ‘고구려’
『삼국사기』의 저자인 김부식은 졸본성의 위치를 현 중국 요령성 북진시 의무려산의 동쪽으로부터 요령성 요양시 서쪽 일대에서 찾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졸본성의 위치를 이렇게 보는 까닭은 북진시 의무려산 일대가 한나라 요동군 지역이고, 요양시 일대는 낙랑군 지역이며 현토군은 요동군과 낙랑군 사이에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요사지리지』는 요나라 동경인 현 요령성 요양시 일대를 낙랑군 조선현 지역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편찬하던 서기 1145년 당시에는 이러한 견해가 보편적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졸본성의 위치에 대한 김부식의 견해는 다음과 같은 문제점이 있다.
김부식은 『후한서』「군국지」의 거리기록을 인용하여 낙양에서 요동군까지의 거리를 3,600리로 보았다. 그런데 동 사서에서 낙양에서 상곡군까지의 거리가 3,200리로 나오므로 상곡군에서 요동군까지의 거리는 400여리에 불과하다. 그런데 현 중국 하북성 장가구시 일대의 상곡군에서 현 요령성 북진시 의무려산까지는 1,500리가 넘는 거리이다. 그러므로 『후한서』「군국지」의 거리기록에 의하면 현 요령성 북진시 의무려산 일대는 한나라 요동군 무려현이 될 수 없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김부식은 『후한서』「군국지」의 요동군 무려현을 현 북진시 의무려산 일대로 보고 이곳에서부터 동쪽으로 졸본성의 위치를 찾고 있다. 그러나 『후한서』「군국지」에 의하면 무려현은 요동군의 서부도위 치소로 요동군의 가장 서쪽에 위치했던 현이다. 그러므로 요동군의 범위는 북진시 의무려산 일대에서 훨씬 동쪽까지 갈 수 밖에 없으며, 결국 북진 의무려산과 요양시 사이에는 현토군이 들어설 틈이 없게 되는 모순점이 생기는 것이다.
갈석산과 더불어 이동된 요동지역의 지명들 |
필자가 중국 정사서인 『사기』ㆍ『후한서』‧『삼국지』‧『진서』‧『위서』등의 기록을 토대로 연구한 바에 따르면, 요나라(916 ~ 1125년) 이전의 요동과 요동군은 모두 현 중국 하북성 지역에 위치하였다. 그리고 요나라 시대에 이르러 요동과 요동군은 동쪽으로 1,000여리 이동하여 현 중국 요령성 일대로 옮겨졌다(필자의 글 ‘요동지역의 변천에 대한 고찰’ 참조). 김부식은 이러한 요동군의 변천과정을 모르고 현 중국 요령성 북진시 의무려산 일대를 한나라 요동군 무려현으로 보고 졸본성의 위치를 찾았다. 그로 인하여 본래의 졸본성 위치보다 1,000여리 동쪽으로 이동한 곳에 졸본성을 비정하는 오류를 범하였다.
『삼국유사』는 고구려 초기 도읍인 홀승골성과 졸본성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고기』에 이르기를 ‘『전한서』에 선제 신작3년 임술 4월 8일 천제가 다섯 마리 용이 끄는 수레를 타고 흘승골성(訖升骨城, 대요의 의주 지역에 있다)에 내려와서 도읍을 정하고 왕으로 일컬어 나라 이름을 북부여라 하고 자칭 이름을 해모수라 하였다. 아들을 낳아 이름을 부루라 하고 해解로써 씨를 삼았다. 그 후 왕은 상제의 명령에 따라 동부여로 도읍을 옮기게 되고 동명제가 북부여를 이어 일어나 졸본주에 도읍을 세우고 졸본부여가 되었으니 곧 고구려의 시조이다.’라고 하였다(古記云 前漢書宣帝神爵三年壬戌四月八日 天帝降于訖升骨城[在大遼醫州界] 乘五龍車 立都稱王 國號北扶餘 自稱名解募漱 生子名扶婁 以解爲氏焉 王後因上帝之命 移都于東扶餘 東明帝繼北扶餘而興 立都于卒本州 爲卒本扶餘 卽高句麗之始祖).” 『삼국유사』‘북부여’
“고구려는 곧 졸본부여이다. 더러는 말하기를 ‘지금의 화주 또는 성주이다.’라고들 하나 모두 잘못이다. 졸본주는 요동 지역에 있다(髙句麗即卒夲扶餘也或云今和州又成州䓁皆誤矣卒夲州在遼東界).” 『삼국유사』‘고구려’
『삼국유사』는 ‘북부여’ 항목에서 고구려 초기 도읍지인 흘승골성을 대요의 의주지역에 있다고 하였고, ‘고구려’ 항목에서 졸본주는 요동에 있다고 하였다. 요나라의 의주지역은 현 중국 요령성 북진시 의무려산 일대이다. 『삼국유사』도 『삼국사기』와 마찬가지로 북진시 의무려산 일대를 고구려 초기 수도인 졸본성으로 보는 오류를 범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7) 통설에서 보는 졸본성의 위치
현 강단사학계의 통설에서는 고구려 초기 수도인 졸본성의 위치를 현 중국 요령성 본계시 환인현에 위치한 오녀산성 일대로 비정하고 있다. 졸본성의 위치가 필자가 비정한 현 중국 하북성 천진시 계현 일대보다 무려 2,000여리 동쪽으로 이동한 곳이며,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 비정한 현 중국 요령성 북진시 의무려산 일대과 비교해도 1,000여리나 동쪽으로 이동한 지역이다.
통설에서 졸본성의 위치를 이와 같이 비정하게 된 배경을 한치윤의 『해동역사』와 이병도의 『삼국사기』해설을 통해서 살펴보고 아울러 문제점을 검토해보기로 한다. 참고로 『해동역사』는 ‘한국고전종합DB’의 번역을 인용한다. (http://db.itkc.or.kr/index.jsp?bizName=MK 참조)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흘승골성은 바로 졸본천으로, 지금의 폐여연군廢閭延郡의 강 건너편 지역이다. 『후한서』에 이르기를, ‘고구려는 요동에서 동쪽으로 1000리 되는 곳에 있다.’ 하였는데, 요동은 한나라 요동군의 치소인 양평현이다. -『대청일통지』에는 양평이 지금의 승덕현과 요양 사이에 있다고 하였다.- 또 부여는 지금의 개원현이다. 지금 개원현의 동남쪽에서 양평현의 동쪽 1000리 되는 곳까지 가면 여연閭延의 강 북쪽에 이른다.
주몽이 이미 졸본에 도읍하였는데, 유리왕 21년(2)에 교제의 희생으로 쓸 돼지가 달아나는 바람에 국내성까지 쫓아가서 잡았다. 무릇 하늘에 교제를 지내던 장소는 반드시 서울 가까운 곳에 있었을 것이며, 달아난 돼지도 또 그다지 멀리 가지 못하였을 것이니, 졸본은 국내성과 멀지 않은 곳에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국내성은 지금의 만포진에서 강 건너편에 있는 지역이다. 그리고 졸본천이나 비류수는 모두 한곳에 있는데, 비류수는 환도의 서쪽에 있고, 환도는 초산부楚山府의 강 바깥쪽에 있다. 이런 사실을 가지고 참고해 보면 졸본이 여연의 강 북쪽임을 더욱더 알 수가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성천부成川府를 졸본이라고 하는 것은 전혀 근거가 없는 설로, 『문헌비고』에서 변증한 것이 맞다. 내 생각으로는, 졸본은 바로 발해 솔빈부率賓府의 음이 변한 것이며, 솔빈은 바로 금나라의 휼품로恤品路인데, 휼품은 지금의 압록강 상류의 내외 지역이다. -이에 대한 내용은 고려 동북계연혁조에 나온다.- 그러니 졸본의 지역을 어찌 다른 곳에서 찾겠는가.” 『해동역사』「지리고」 ‘고구려’
『해동역사』는 한치윤이 완성하지 못하고 죽자, 그의 조카인 한진서가 완성하였으며, 윗글은 한진서의 견해이다. 한진서는 졸본의 위치를 발해 솔빈부, 즉 지금의 압록강 상류의 내외 지역으로 보고 있다. 안정복도 『동사강목』 ‘고구려강역고’에서 말하기를 “고구려는 맨 처음 요동 졸본의 땅, 즉 발해의 솔빈부에서 일어나서 화주‧익주‧건주를 두었다. 명나라에서 건주위를 두었으니 지금 심양 봉천부 흥경興京의 땅이 바로 그것이다.” 하였다. 졸본의 위치를 압록강 상류 내외지역으로 보는 이러한 견해는 조선 후기 실학자들의 일반적인 견해라 할 수 있다.
졸본의 위치에 대한 한진서 주장의 문제점을 살펴보자.
첫째, 요동지역은 요나라 시기에 현 중국 하북성 지역에서 요령성 지역으로 동쪽으로 1,000여리 지명이동이 일어났다. 한진서는 이러한 요동지역의 변천과정을 모르고 한나라 요동군의 치소를 『대청일통지』의 기록에 따라 현 중국 요령성 요양시 일대로 보았다. 이로 인하여 졸본성의 위치도 자연히 동쪽으로 1,000여리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둘째, 한진서는 『후한서』의 ‘고구려는 요동에서 동쪽으로 1000리 되는 곳에 있다.’ 는 기록을 토대로 졸본성의 위치를 파악하고 있다. 그러나 『후한서』의 이 기록은 『삼국지』 ‘고구려’의 기록을 인용한 것으로 저 곳은 졸본성의 위치가 아니라 동천왕의 평양성 위치이다. 진수가 『삼국지』를 쓸 무렵 고구려의 수도는 동천왕이 서기 247년 천도한 평양성이었다. 졸본성은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한서』 ‘소제본기’에 따르면 “(소제 원봉元鳳) 6년 봄 정월에 군국의 사람들을 모집하여 요동 현토성을 쌓았다(六年春正月, 募郡國徒築遼東玄菟城).” 고 하였다. 또 『삼국유사』에서도 “졸본주는 요동 지역에 있다(卒夲州在遼東界).”고 하였다. 그러므로 졸본주는 요동 지역에서 찾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한진서는 사료를 잘못 인용하여 요동 동쪽 1,000여리의 동천왕 평양성을 졸본성으로 오해하였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한진서는 요동의 위치를 잘못 비정함으로써 졸본성의 위치가 1,000여리 동쪽으로 이동하였을 뿐만 아니라, 동천왕의 평양성 위치를 졸본성의 위치로 오해함으로써 또 졸본성의 위치가 1,000여리 동쪽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결국 이러한 두 가지 잘못으로 인하여 현 중국 하북성 천진시 계현 일대에 있었던 본래의 졸본성 위치가 무려 2,000여리 동쪽으로 이동하여 현 중국 요령성 압록강 일대까지 가버린 것이다.
졸본성의 위치 비교
현 강단사학계의 통설에서는 졸본성의 위치를 현 중국 요령성 본계시 환인현에 위치한 오녀산성 일대로 비정하고 있는데, 이러한 견해는 통설의 원조격인 이병도가 『삼국사기』를 주해하면서 ‘졸본천’을 다음과 같이 해설한 까닭이다.
“호태왕(광개토왕)비에는 비류곡홀본서성산沸流谷忽本西城山이라 하고, 졸본의 주에는 위서를 이끌어 [지흘승골성]이라 했으니, 졸본은 바로 졸홀·승흘골의 이칭으로 볼 것이며, 고구려 최초의 수도인 만큼 저명한 곳이니, 지금 환인에 비정한다. 그러면 졸본천은 환인을 흐르는 혼강을 별칭한 것이라고 본다.” 『삼국사기』‘고구려본기 1 주(15)’
통설에서 졸본성을 환인 일대로 비정한 사유가 고 이병도 박사의 “고구려 최초의 수도인 만큼 저명한 곳이니, 지금의 환인에 비정한다.”는 주장에 근거하고 있다. 납득할 만한 어떠한 고고학적, 문헌학적 사료도 없다. 오늘날 통설은 이병도의 이런 주장에서 한 발짝도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있다. 참으로 허무하기 짝이 없는 주장이 해방 이후 70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통설의 행세를 하고 있는 것이다.
3. 마무리 글
지금까지 고구려의 천문도인 『천상열차분야지도』와 『한서』‧『수경주』및 『삼국사기』와『광개토태왕비문』등의 사료들을 토대로 졸본성의 위치를 추적해 보았다. 그리고 졸본성의 위치에 대한 통설의 문제점도 살펴보았다.
『천상열차분야지도』에 의하면 졸본성은 위도 39〬에서 40〬 사이에 위치하였다. 그리고 『한서』「지리지」및『수경주』에 나타난 현토군 고구려현의 기록을 참조하면 졸본부여는 현 중국 하북성 천진시와 당산시 및 진황도시 일대였다. 또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졸본성은 바닷가에 위치하였으며, 고구려의 요동성 지역이며 한나라 시절에는 요동군 양평성 지역에 해당하였다. 마지막으로 『광개토태왕비문』에 따르면 졸본성은 성산城山 위에 위치하였는데, 중국 고지도인 『당토명승도회』에는 성산城山의 위치가 현 중국 하북성 천진시 계현 일대로 나타나고 있다.
위의 4가지 사료들을 종합해보면 고구려 초기 수도인 졸본성은 현 중국 하북성 천진시 계현 일대였다. 천진시 계현 일대는 위도 40〬 에 위치하고 있으며, 바닷가에 위치하였으며, 한나라 요동군 양평현에 해당하며, 성산城山이라는 지명이 존재하였다. 그러므로 현 중국 하북성 천진시 계현 일대는 위의 사료들에 나타난 졸본성 관련기록들을 완벽하게 충족하는 곳이다.
반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저자인 김부식과 일연은 졸본성의 위치를 현 중국 요령성 북진시 의무려산 일대로 보고 있다. 졸본성의 위치를 이곳으로 본 것은 요동지역이 요나라(916 ~ 1125년) 시기에 현 중국 하북성 지역에서 요령성 지역으로 동쪽으로 1,000여리 지명 이동된 사실을 몰랐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본래의 졸본성보다 1,000여리 동쪽으로 이동한 곳을 졸본성 지역으로 비정하는 오류를 범하였다.
또 『동사강목』‧『해동역사』의 저자들을 비롯한 조선 후기 실학자들은 졸본성의 위치를 현 중국 요령성 압록강 일대로 보았다. 졸본성의 위치를 이렇게 본 것은 요동지역이 요나라 시기에 동쪽으로 1,000여리 지명 이동된 사실을 몰랐을 뿐만 아니라, 이에 더하여 서기 247년 동천왕 시대에 고구려의 수도가 요동지역에서 요동의 동쪽 1,000여리 되는 곳으로 이동한 사실도 알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고구려 초기 수도인 졸본성을 동천왕의 평양성과 인접한 곳으로 보는 오류를 범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졸본성의 위치가 본래의 위치보다도 무려 2,000여리나 동쪽으로 이동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통설의 원조격인 이병도는 졸본의 위치에 대하여 “졸본은 고구려 최초의 수도인 만큼 저명한 곳이니, 지금의 환인에 비정한다.”고 주장하였다. 어떠한 고고학적, 문헌학적 근거도 없는 참으로 허무하기 짝이 없는 주장이 아닐 수 없다. 환인지역은 필자가 앞에서 살펴본 졸본성에 대한 사료들의 내용을 하나도 충족하지 못하는 곳이다. 그러나 해방 이후 70여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강단사학계의 통설은 여기서 한 발짝도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하여 한민족의 상고사가 한없이 왜곡 축소되고 있는 것이다.
고구려는 애초부터 통설의 주장처럼 요령성 환인과 같은 첩첩산중에서 건국된 그런 나라가 아니었다. 발해만 일대의 요충지인 현 중국 하북성 천진시 계현 일대에서 건국하여 일찌감치 해양세력의 대표주자로 부상하였다. 그리하여 농경세력인 지나족과 유목세력인 흉노족과 더불어 중원의 패권을 다투었던 아시아대륙의 강자였다.
왕검성과 졸본성은 한민족 상고사의 양대 산맥과 같은 곳이다. 왕검성은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 만성현 일대에 위치하였으며, 신라인들이 떠나온 고향인 낙랑 땅이었다. 졸본성은 현 중국 하북성 천진시 계현 일대에 위치하였으며, 백제인들이 떠나온 고향이자 고구려가 건국한 터전인 졸본부여 지역이었다. 하루빨리 고구려 초기 수도인 졸본성의 위치를 바로잡아야 한다.(다음호 계속)
첫댓글 조선총독부 왜놈이 만들어준 허구 반도설은 버리고 일 만년 이상의 우리에 대륙사를 찾아야 합니다
좋은 연구 자료를 남겨 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 함니다. 얼른 바로 서야 하겟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