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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라, 사슴 모양이네. 한 마리가 아닌 걸?"
7일 오전 11시 39분 백두대간 5회차 이틀째 전북 무주군 무풍면과 경북 김천시 대덕면의 경계를 이루는 대덕산(1290m) 정상을 오르며 눈을 비볐다. 영락 없이 사슴 무리가 노니는 것 같았다. 처음에는 인간이 세운 장식물인가 싶었는데 다가갈수록 상고대임이 분명했다. 정상으로 다가가며 각도가 달라지니 완전 다르게 보였다. 안갯속에서 분투하며 올랐는데 20분 전쯤부터 날이 맑게 개이기 시작하면서 사슴의 환대를 받았다. 물론 그 뒤 하산 길이 험난했지만 사슴의 위로로 모든 것을 보상받은 기분이었다.
4회차는 육십령까지였는데 육십령부터 할미봉 거쳐 남덕유, 그리고 덕유산이 모두 산불조심 출입 통제기간이라 건너뛰고 빼재(뼈재, 신풍령)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백두대간 5회차를 떠난 것은 전날 오전 7시 40분 서울 남부터미널을 출발한 구천동행 버스로 였다. 무주와 설천, 무주리조트 거쳐 네 번째 정차한 곳이 구천동 입구였다. 안내센터에서 알려준 택시 번호 010-3678-5696로 연락드렸다. 기사님은 오는 도중 전화를 걸었는데 늘 묵음으로 해놓는 내가 전화를 받지 않는다며 만나자마자 호통을 쳤다. 딴 택시 타고 가버렸나 걱정했다는 것이었다.
빼재 올라가는 길은 예상했던 것보다 눈이 훨씬 많았다. 걱정이 덜컥 밀려왔다. 차단했을 것 같은데 차단되지 않아 꽤 높이 올라갔다. 그러다 오른쪽 가파르게 올라가는 계단이 눈에 띄었다. 그러곤 택시는 멈췄다. 50m쯤 앞에 차단기가 내려져 있다. 물론 눈밭이다. 기사님은 더 못 간다고 했다. 1만 7000원만 달라고 했는데 현찰 2만원을 드렸다. 기사님은 적잖이 걱정되는 눈치를 감추지 않았다.
"조금만 올라가면 왼쪽과 오른쪽 갈라지는 길이 나올 거에요."
너무 곧이 그 말을 믿은 것이 잘못이었다. 11시 20분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출발했는데 그것도 못지 않은 잘못이었다.
조금 올라가니 적어도 상당 기간 아무도 이곳을 오르지 않은 것 같았다. 왼쪽으로 덕유산 국립공원 안내판이 보이고 오른쪽으로 멀리 생태이동통로가 보였다. 음, 오른쪽으로 가면 삼봉산(1254m) 가는 길이 나오겠구나 생각했다. 그런데 500m쯤 올라가도 도무지 산 들머리를 찾을 수 없었다. 해서 생태이동통로 위로 그냥 올라가 봤다.
처음 곰 조심 경고판이 나오길래 무시했다. 그렇게 300m쯤 올라가 두 번째 곰 경고판이 나왔다. 왼쪽으로 계속 오르면 등산로와 만날 것 같긴 한데 위험을 감수하느니 처음 원점으로 돌아가 안전하게 산행하기로 했다.
돌아오니 역시나 택시 내린 곳 바로 아래 계단 들머리가 지척이었다. 여기서 시작해야 하는 것이었다. 허비한 시간은 20분쯤이었다. 40분에 산행을 시작했다. 얼마 뒤 표지판이 나왔다. 빼봉 1km-삼봉산 3.9km였다. 길은 지난번 4회차 때와 비슷했다. 지난번처럼 거리 표지판을 믿을 수가 없다. 성수목이 1101m란 옛날 표지판이 오히려 믿음이 갔다.
오후 1시 58분 삼봉산 정상에서 돌아본 빼재 구간이다. 오른쪽 뒤 능선이 백암봉~귀봉~못봉~대봉에서 뻗어나온 갈미봉 자락이다. 빼봉(수령봉) 지나 된새미기재와 호절골재 지나 금봉암 가는 길 지나쳐 삼봉산 정상에 이르렀다. 정상석 앞에 자리를 깔고 라면을 끓여 먹었다. 알타리무 김치와 곁들이니 환상적이다. 남부터미널에서 버스 탑승 전 유부우동을 먹은 뒤라 몹시 허기졌던 모양이었다. 오른쪽 덕유산 자락은 흐릿하기만 하다. 덕유산은 4월 30일까지 깊은 잠에 빠져든다.산불조심기간이라 통행을 전면 금지하고 시설 보수를 하게 된다.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이번 산행 여정도 곳곳에 쓰러진 나무 투성이다. 어느 순간부터 아무도 이곳을 지나지 않은 것 같아 보인다. 길이 없다. 그저 이쪽이겠다 큰 그림을 그리고 나아간다. 국립공원 관할 구간이 아니어서 군청에서 큰 신경을 써야 할 것 같다. 상당한 인력을 투입해 쓰러진 나무를 베어내고 길을 만들어야 할 것 같다.
지난번은 나무 위에 고드름이 떨어져 힘들었는데 이번은 날이 풀린 탓인지 눈비가 내리는 게 문제였다. 사방에서 제무게를 못 견딘 눈이 스르르 떨어졌다. 암릉 구간은 날이 풀리면 꽤 아름다운 조망을 선사할 것 같다. 이날은 내내 날이 흐려 시원한 조망을 선사하지 않았다.
이제 하산 길 2.1km로 안내돼 있어 사실 가볍게 봤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산행기들에서 가파른 구간으로 소개돼 있었는데 눈이 가득 쌓인 터라 이 하산 계곡 길은 참담했다. 커다란 나무들이 찢기고 쪼개지고 널부러져 있다. 길은 찾을 수 없고 앞선 이들의 족적을 찾았는데 쉽지 않았다. 그저 건너편 소사고개 쪽을 바라보고 내려가는 수밖에 없었다. 건너편 개들의 아우성이 계속 들려왔다.
누가 산행기에 적었다. 백두대간을 종주꾼들이 망친다는 것은 어림 없고 경작하는 손길이 훨씬 큰 피해를 낳고 있다고, 과연 그랬다. 고랭지 배추밭이 앞쪽에 즐비한데 그 규모가 실로 창대하다.
여튼 기신기신 하산해 솔숲을 만났다. 적이 안심이 됐는데 덕유산 농장 쪽으로 잘못 방향을 잡았던 것 같다. 도로에 내려와보니 탑선슈퍼민박으로부터 300m쯤 떨어진 지점이었다. 터덜터덜 걸어가 민박집 마당에 도착, 주인을 찾는데 안 계신다. 하릴없이 물에 흠뻑 젖은 등산화를 말리려고 했는데 한 어르신이 담배 사러 오셨다. 주인이 요아래 사과밭에 있다며 곧 올라온다고 했다.
5분쯤 뒤 주인 할머니가 오셨는데 하룻밤 묵을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준비가 안돼 있다며 요아래 펜션 가보라고 했다. 할 수 없이 등산화를 다시 신고 산들 펜션(010-5280-4434)을 찾았는데 소사분교를 리모델링한 곳이었다.
주인과 반갑게 수인사하는데 꽤 젊어 놀라웠다. 널찍하고 취사시설에다 TV와 화장실도 따로 갖춘 좋은 방을 5만원에 신세졌다. 펜션 방에서 바라본 삼봉산 전경이다. 저녁으로 흑돼지 김치찌개, 다음날 아침으로 백반을 했다. 화목난로가에 등산화와 양말을 말리고 목말라 맥주를 단숨에 들이켜니 마른안주를 내준다. 저녁은 따로 방에 가져가 먹었는데 흑돼지 고기가 맛있어 게눈 감추듯 했다.
새벽 내내 잠을 설치며 이스마일 카다레의 소설 '잘못된 만찬'을 들척이다 TV 채널을 만지작대다 팔굽혀 펴기를 하다 5시쯤 아예 자리를 떨쳐 일어났다. 날이 흐리니 아예 갠 다음 산행을 시작할까 고민했다. 오늘 코스는 대덕삼봉산 올라 대덕산 올랐다가 덕산재 내려선 다음 삼도봉으로 내뻗을까 생각했다. 덕산재에 12시쯤 내려서면 가능하겠다 싶어 서둘러 보기로 했다.대덕산 하산길에 눈이 그렇게 쌓여 있는지 알았더라면 가능하지 않은 일정이란 사실을 깨닫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7시 30분, 주인장이 문을 두드린다. 아침 준비가 돼 있단다. 계란 프라이 둘에 누룽지, 강된장국을 맛있게 먹었다. 강된장국이 일품이었다. 여주인은 도시 분이라 짜다고 하지 않을까 속으로 걱정했다고 얘기했다.따듯한 식혜를 내주었는데 차갑지 않은 식혜를 먹어본 것이 50년 전에 마지막이었던 것 같다고 하자 여주인은 반색했다.
분교가 폐교된 지 한참이 됐고 마을위원회가 펜션 겸 농촌체험마을을 위탁하는데 젊은 부부가 맡은 지 얼마 안됐다고 했다. 바깥주인은 자녀들을 학교에 데려다주러 자리를 비운 사이에 커피를 마시며 여주인과 많은 얘기를 주고받았다. 학교 픽업하는 데 한 시간쯤 걸린다고 해 친절한 바깥주인에게 작별 인사도 못하고 출발해야 했다.
전날 개들의 아우성을 들으며 하산했는데 8시 20분쯤 본격 산행을 시작한 지 얼마 안돼 의문이 풀렸다. 경작지 곳곳에 개농장이 있었다. 포도 묘목을 심은 곳 등을 여러 번 거쳐 한 개농장을 거쳐야 했다. 그녀석들은 내가 자신들을 데리러 오는지 알고 맹렬히 짖어댔다. 약간 두렵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꽁꽁 묶인 녀석들의 절규는 대단했다.
전날 삼봉산을 하산하며 바라본 이곳 산 모습은 그대로였다. 출발한 지 한 시간이 지나서야 인간과 개들의 소음으로부터 벗어났다. 안갯속에 헤매는 기분이었다. 괜히 일찍 나섰나 후회가 밀려왔다. 조금 뒤 몽환이란 말뜻이 분명해졌다. 꿈속을 거니는 기분이었다.
10시 18분, 산행을 시작한 지 두 시간이 채 안 돼 대덕삼도봉(초점산 1249m)에 이르렀다. 따로 대덕산만 안내하는 입간판이 있었다. 대덕산(투구봉)까지 1.4km, 덕산재(644m)까지 3km라고 안내돼 있었다. 4,4km? 내려갔다가 대덕산 정상까지 오르막이 있긴 하지만 이르면 12시, 늦으면 12시 30분 덕산재에 이를 수 있겠구나 생각했다. 이만저만 아닌 오산이었다.
오르막을 시작하면서 뒤늦게 햇살이 말간 빛을 드리운다. 건너편 전날 내려왔던 삼봉산을 조망할 수 있겠다 싶어 계속 뒤를 돌아보고 카메라를 켜느라 시간을 지체했다. 큰바람이 일면 안개와 구름이 일순 사라져 시원한 전망을 볼 수 있겠구나 기대를 높였으나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정상은 생각보다 멀었다. 사슴이 나타나 반가움을 안긴 것은 이쯤이었다.
대덕산 정상에서 돌아본 대덕삼도봉 모습이다. 전북 무주와 경북 김천, 경남 거창을 나누는 곳이다. 그 뒤 오른쪽이 전날 내려온 삼봉산 위용이다. 하산길은 위험천만했다. 겨울 단독 백두대간 종주를 했던 남난희씨가 위대해 보이는 대목이다. 물론 올겨울만큼 많은 적설로 나무가 쓰러져 길을 지우지 않았을 수 있지만 지금처럼 표식기도 많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종주를 처음 시작했던 지리산 구간에서 표식기를 보며 약간 빈정대곤 했다. 뭐 자기 이름을 저렇게 남기겠다고 저러나 싶었다. 무영객, 비실이 부부, 대구 핵폭탄 등등을 보면 우습기도 했다. 그런데 사람들 흔적이 적은 국립공원 외 지역을 밟을 경우 표식기는 대단한 위로와 위안이 됐다. 어느새 나는 그들과 대화를 하고 있었다. 무영객님, 이름과 달리 계속 그림자를 남기시네요, 비실이 부부는 왜 그렇게 튼실하게 계속 다니세요, 핵폭탄님 계속 그렇게 강력한 자신의 이미지를 남기시니까 좋으세요 등등. 그런데 이날 하산길에도 이분들의 표식기가 없었으면 나의 종주는 한결 힘들었을 것 같았다.
하산을 시작하며 러셀한 흔적이 있어 반가웠다. 올라오는 길에는 전혀 그런 흔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약간 돌더라도 그 분이 만든 발자국을 찍어 걸었다. 계곡은 그야말로 난리법석이다. 곳곳에 큰 나무가 쪼개지고 짓이겨지고 널부러져 있다. 표식기는 자취를 감춘 지 오래다. 어느 순간 내려가던 방향에서 갑자기 90도로 꼬부라져 엉뚱한 방향으로 내닫다 갑자기 사라졌다.
이 순간 냉철한 판단을 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문제는 내려가며 찍힌 발자국과 오르며 찍힌 발자국이 구분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 때 멈춰서 종합적으로 신중하게 판단했어야 했는데 믿고 따르던 발자국이 갑자기 사라지자 당황해 집중력을 잃고 말았다.
그냥 내 감각만 믿고 따르자, 그게 패착이었다.
갈수록 경사가 급해지고 바위 계곡과 너덜이 나왔다. 아까 그 발자국 방향이 옳았다. 악전고투 끝에 임도 내려서니 1시 30분이 다 돼 있었다. 그 임도에서 덕산재 도로까지 나오는 데 30분쯤 걸렸다. 누가 봐도 등산로인데 어느 농민은 포도를 심는다며 펜스를 둘렀다. 다른 길로 우회하라고 안내도 돼 있지 않다. 펜스를 치더라도 한 사람만 지나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둘 수 있었을텐데 주인은 사유재산권을 무척 사랑하는 모양이었다.
아무튼 덕산재 아래 부평마을에 이르렀는데 도무지 사람들 기척이 없다. 등산화는 흠뻑 젖은 상황이었다. 버스 정류장에는 2시 18분 무풍이라고 안내돼 있었다. 할머니 한 분이 보여 민박집이 있느냐고 물었는데 잘 모른다고 했다. 체력이 바닥난 것은 아니었는데 두 발 모두 물속에 있는 것 같았다. 워낙 아침을 든든히 먹어 배가 고픈 것은 아니었지만 발을 말려 다시 나선다 해도 불투명한 숙박 가능성 때문에 망설여졌다. 출발할 때는 3박4일 일정을 생각했는데 숙박 여부가 불분명하니 큰일이었다. 한참 생각하다 이쯤에서 접기로 했다.
전날 이용했던 기사님에게 전화했다. 그런데 정말로 무주 일대를 도는 순환버스가 2시 18분쯤 왔다. 안 탔더니 회차한 기사님이 버럭 소리를 지른다. 어디 가요? 무주 가려고요. 무주는 안 가는데 무풍까지 가요. 그곳에서는 무주 가는 편이 많으니. 아니요. 저 택시 불렀어요. 그래요?
아무튼 약속은 약속이다. 할머니랑 나란히 버스 정류장에 앉아 있는데 벤치에 온기가 들어온다. 양말을 말리며 기다리는데 할머니가 집에 가서 커피 마시자고 한다. 괜찮다고, 택시 곧 온다고 했는데, 계속 같은 말씀을 하신다. 나중에 어르신 한 분이 올라왔는데 산에 가신다며, 산에 눈 많냐고 물어와 그렇다고 했다. 그러면서 길이 없어 혼났다고 했더니 그 어르신 이런다. 길 좋은데
그렇다. 늘 다니던 분이야 방향을 확실하게 아니 아무리 눈이 많아도 실수할 일이 없을 것이다. 종주꾼이야 초행이다보니 이런 착오가 적잖을 수 밖에. 아무튼 다음부터는 조금 더 신중히 종합적으로 판단해 착오를 줄이자 마음먹었다.
얼마 뒤 택시로 라제통문 거쳐 구천동 아래를 통해 무주터미널에 이르렀다. 택시비 4만원, 3시 35분 고속버스로 남부터미널 도착하니 6시 10분쯤이었다. 평일 전용차로 덕을 많이 봤다.
다음날 평일 산에 가는 평산회가 관악산 육봉 가기로 해 거기 합류할까 고민했다. 완전 체력이 바닥난 것은 아니었다. 조금 쉬는 게 낫겠다 싶었다. 카톡으로 산행이 진행되는 것을 파악하면서도 선뜻 나서지 못하니 죄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당분간 치과 임플란트 시술 준비와 다음 대간 종주 준비에 몰두하자 마음먹었다. 용서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