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은 행복학교 학생들과 함께하는 행복캠프가 열리는 날입니다. 행복학교는 법륜 스님의 행복 메시지를 통해 개인과 사회의 행복을 이야기하고 소통하며, 지금 이 순간 행복해지는 연습을 해보는 곳입니다. 오늘은 행복학교를 수료한 학생들이 모두 모여 스님과 즉문즉설 시간을 가졌습니다.
새벽 4시 30분, 목탁소리와 함께 정토회관의 아침이 시작됩니다. 스님은 오늘도 대중보다 일찍 법당에 내려와 조용히 명상을 하고 있었습니다.
천일결사 기도를 마친 후 스님은 외부 손님과 미팅을 하기 위해 나갔습니다. 미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는 잠시 이비인후과에 들러 진료를 받았습니다.
행복학교 학생들과 함께하는 행복캠프는 오전 10시부터 수원시청 대강당에서 열렸습니다. 스님은 오후 1시가 다 되어 수원시청에 도착했습니다. 오전부터 학생들끼리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재미있게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스님이 도착하자 모두 화들짝 놀라며 반가워했습니다.
오후 1시부터는 스님과 함께하는 생방송 행복학교가 시작되었습니다. 먼저 행복학교 학생 두 분의 축하 공연이 있었습니다. 두 분은 연세가 80세가 넘으셨는데도 ‘살풀이’와 ‘판소리 사랑가’를 무용공연으로 멋지게 보여주어 큰 박수를 받았습니다.
스님도 감동을 받아서 무대로 올라와 두 분과 특별히 악수도 해주고, 기념사진도 찍었습니다.
멋진 공연이 끝나고 사회자의 선창으로 ‘법륜 스님’ 하고 부르자 스님이 무대 위로 올라왔습니다. 그동안 영상 강의를 통해서 행복학교에 참여해 왔는데, 오늘은 스님과 직접 생방송으로 스님과 행복학교를 경험해보는 시간입니다.
“행복학교 다니고 행복해지셨어요?”
“네!”
“사람은 누구나 다 행복할 권리가 있고,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기 생각에 빠져서 자신이 불행하다는 착각을 하고 살아가요. 그 착각에서 깨어나면 내가 본래부터 행복한 존재라는 것을 자각하게 됩니다.
공자님께서 ‘아침에 도를 이루고 저녁에 죽어도 좋다’라는 말씀을 하셨잖아요. 그처럼 우리도 ‘내가 본래 행복한 존재였음을 깨닫는다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자세를 가져보면 좋겠습니다. 하루를 살더라도 행복하게 사시기 바랍니다.”
스님의 인사말이 끝나자 본격적으로 생방송 행복학교가 시작되었습니다. 먼저 한 줄 쓰기 시간을 가졌습니다. 사회자가 “아침에 탁 눈을 뜨면 생각나는 것은?” 하고 묻자, 각자 자신의 경험을 떠올리며 도화지에 적었습니다.
“오늘 직장에 나갈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화장실에 가야겠다.” “살아 있어 감사합니다.” “오늘도 살았구나.” “밥 차려야지.”
다양한 대답들에 이어서 첫 번째 질문자가 이와 관련된 질문을 스님에게 물었습니다.
‘오늘도 살았네’라는 말이 마음에 와 닿지가 않습니다.
“옛말에 ‘시작이 반이다’ 하는 말이 있잖아요. 정초 기도를 하는 이유는, 한 해를 출발할 때 몸과 마음의 정성을 기울이면 올 한 해가 그 어떤 한 해보다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정초에는 21일 간 기도를 하거나, 보름간 기도를 하거나, 일주일 간 기도를 하거나, 아무리 못해도 3일 동안은 기도를 해야 합니다. 이것이 출발하는 자의 자세예요.
그것처럼 하루의 시작은 눈을 뜨는 것입니다. 눈을 뜰 때 어떻게 시작하느냐에 따라서 오늘 하루가 달라져요. 그런데 대부분 좀 짜증스럽게 하루를 시작합니다. ‘일어나기 싫어’, ‘졸려’, ‘오늘 하루를 또 어떻게 보내지’ 이렇게 부담스러운 마음으로 시작해요. 아주 상쾌하게 시작해도 하루를 살다 보면 점점 부담이 돼서 저녁이 되면 지치잖아요. 그런데 출발부터 벌써 부담스럽게 시작하니까 지치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어요. 그래서 좀 상쾌하게 출발하라는 겁니다.
‘일어나야지!’ 하는 말은 의지를 표현하는 말이에요. ‘일어나야지!’ 하고 왜 자꾸 의지를 표현하게 될까요? 아침에 일어나기 싫으니까 의지를 가지고 억지로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눈뜨면 부담스러운 하루가 됩니다. 가볍게 싹 일어나야 하루를 가볍게 보낼 수 있어요. 그래서 제가 ‘일어나야지!’ 하고 결심하지 말고 알람이 울리면 싹 일어나라고 하는 거예요. 엿처럼 끈적끈적하게 일어나지 말고, 쌀과자가 부서지듯이 쌈박하게 싹 일어나면 하루가 훨씬 더 가벼워요. 그래서 다른 생각할 필요 없이 싹 일어나 보라고 말하는 겁니다.
만약 버스를 타고 가는데 교통사고가 나서 사람들이 다 죽었어요. 그런데 나는 팔만 부러지고 안 죽었습니다. 그러면 팔이 하나 부러졌더라도 어떤 생각이 들까요? 기적적으로 살았다는 생각이 들겠죠. 그런데 아무도 안 다치고 나만 팔이 하나 부러졌다면 재수 없다고 말합니다. 팔이 하나 부러진 것은 똑같은데 다른 사람이 다 죽으면 재수 좋다고 하고, 다른 사람이 아무도 안 다치면 재수 없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심리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우리의 행복이란 남의 불행을 딛고 있습니다. 부처님의 표현을 빌리자면, 타인의 불행 위에 자신의 행복을 쌓는 거예요. 우리 속담에도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이 있잖아요.
그런데 타인의 불행을 딛고 자신의 행복을 쌓는 것은 지속 가능하지 않습니다. 마음을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면 심보가 더러워요. 팔이 부러진 것은 좋은 일도 아니고 나쁜 일도 아니에요. 하나의 사건일 뿐입니다. 좋은 일이 되느냐, 나쁜 일이 되느냐는 팔이 부러진 사건에 있는 게 아니라 그 사건을 내가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달려있어요. 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은 좋은 일, 나쁜 일이 따로 없어요. 그냥 사건만 있는데 마음에서 그걸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좋은 일이 되기도 하고, 나쁜 일이 되기도 하는 겁니다. 그래서 좋은 일, 나쁜 일이 본래 없다고 말하는 거예요.
다만 사건이 일어난 시간과 공간에 따라 좋은 일, 나쁜 일이 되는 겁니다. 다른 사람이 다 죽은 상황에 팔이 하나 부러지면 좋은 일이 되고, 아무도 안 다친 상황에서 팔이 하나 부러지면 나쁜 일이 되는 겁니다. 객관적으로 보면 아무도 안 다치고 내 팔 하나 부러진 게 사실은 더 좋은 일이에요. 내가 정말 깨어있다면 내 팔 하나 부러지고 아무도 안 다쳤을 때 이렇게 말해야 돼요.
‘감사합니다. 이렇게 사고가 났는데도 제 팔 하나만 부러지고 아무도 안 다쳤으니 정말 기적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지 못하죠. 인생을 살아가면서 매일매일 겪는 불만은 내가 다 살아있기 때문에 생기는 일입니다. 내가 겪고 있는 모든 일은 죽게 되면 경험할 수가 없습니다. 사실은 교통사고가 나서 다 죽고 나 혼자 살았을 때와 같은 그런 기적이 매일매일 일어나고 있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감았던 눈을 못 뜨면 죽은 거잖아요. 그래서 아침에 눈을 탁 뜰 때 ‘아이고, 오늘도 살았네’라고 말해 보라는 겁니다. 마치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것 같은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하면 오늘 하루가 굉장히 소중한 날이 됩니다. 살게 된 기념으로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는 마음이 됩니다. ‘어떤 일을 해도 살았으니까 하는 일이지, 죽으면 이 일도 못한다’ 이렇게 생각하게 돼요. 사람의 심리는 상대적인 거예요. 어디에 기준을 두느냐에 따라서 심리 상태가 달라집니다.
두 눈이 다 안 보이는 사람은 한쪽 눈만 뜨게 되어도 기적에 가까울 만큼 좋은 일이지만, 두 눈을 뜨고 있던 사람이 한쪽 눈을 다쳐서 한쪽 눈만 보이게 되면 엄청난 불행이 됩니다. 한쪽 눈만 뜨고 있어야 하는 상황은 똑같은데,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불행이 되기도 하고 기적이 되기도 하는 겁니다. 두 눈을 다 뜬 것을 기준으로 잡으면 한쪽 눈만 뜬 것은 불행이 되고, 두 눈을 다 감은 것을 기준으로 잡으면 한쪽 눈이라도 뜬 것은 기적이 됩니다. 그것처럼 우리가 불행한 이유는 기준을 너무 높게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 기준에 못 미치기 때문에 만사가 다 불만인 겁니다.
방금 한 줄 쓰기를 할 때 ‘오늘 직장에 갈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라고 말씀하셨는데, 직장 다니는 사람은 오늘 직장 가는 게 괴로움이지만, 직장이 없는 사람은 아침에 출근할 직장이 있다는 자체가 굉장한 행복이 됩니다. 그래서 그 기준점을 가장 낮춘 것이 ‘살아있다’라는 것입니다. ‘살아있어서 감사하다’ 이런 관점을 가지면, 기준점을 가장 낮추었기 때문에 아무런 불만이 없어집니다. 그래서 어떤 일을 해도 하루를 상쾌하게 보낼 수 있습니다.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고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지난주에 미국에서 즉문즉설을 강연을 했는데, 스무 살 먹은 젊은이가 이렇게 질문했어요.
‘공부도 해야 하고, 돈도 벌어야 하고, 결혼도 해야 하고, 막 복잡한 이야기를 하면서 제가 어떤 선택을 하고, 어떻게 살아가야 됩니까?’
그래서 제가 다시 물었습니다.
‘네가 보기에 법륜 스님이 좋아 보이니? 그러면 너는 67살 먹은 법륜 스님이 될래? 공부도 해야 되고, 결혼도 해야 되고, 돈도 벌어야 되는 20살이 될래? 나하고 바꿀래?’
그러자 그 젊은이는 ‘안 바꾸겠습니다’라고 그랬어요. (모두 웃음) 젊다는 것은 달리 보면 선택의 기회가 매우 많은 거예요. 공부하려면 공부할 수 있고, 취직하려면 취직도 할 수 있고, 결혼하려면 결혼도 할 수 있고, 많은 길이 열려있는 겁니다. 혼란스럽게 생각할 필요가 없어요.
나이가 들면 선택의 폭이 점점 닫혀요. 이제 이 나이가 되어서 다시 공부를 하려면 어려움이 많습니다. 결혼을 하려고 해도, 취직을 하려고 해도 어려움이 많아요. 객관적으로는 20살이라는 그 자체만으로도 이미 엄청난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는데, 그 좋은 조건은 무시해버리고 불만인 것만 이야기를 하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20대라는 그 사실만 가지고도 엄청난 행운이다’ 하는 것을 자각한다면, 청년들이 여러 가지 도전을 해가면서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가 아침에 눈 떴을 때 ‘살았네!’ 하고 말해보라 한 겁니다. 지금 한 번 연습을 해봐요. ‘살았네!’ 하면 기분이 좋아요, 나빠요?”
“좋아요.”
“반대로 ‘죽었구나’ 해보세요. 기분이 좋아요, 나빠요?”
“나빠요.”
“이렇게 하루를 가볍게 출발하자는 뜻으로 말씀을 드린 겁니다.”
“감사합니다.” (모두 박수)
스님의 쉽고 명쾌한 설명에 질문자도 환하게 웃으며 자리에 앉았습니다. 즉문즉설이 끝나고 이번에는 한 줄 나누기를 했습니다. 각자 도화지에 즉문즉설을 듣고 내 마음에 남는 한 문장 또는 단어를 써보았습니다.
“기준을 어떻게 잡느냐?” “기분 좋게 하루를 시작하라.” “오늘도 살았네.” “나도 살아 있네요.” “기준을 너무 높게 잡아서 하루를 불안하게 시작했구나.” “남의 불행 위에 내 행복을 쌓지 말자.” “사건은 사건일 뿐,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행불행이 결정된다.”
똑같은 강의를 들었지만, 각자 가슴에 남는 구절은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했습니다.
이어서 행복 연습 시간을 가졌습니다. 모두 핸드폰을 꺼내 남편, 아내 아들, 딸, 부모님에게 감사의 톡 편지를 보내 보았습니다. 메시지를 보내자마자 반응이 오는 분들이 손을 들고 그 내용을 소개했습니다.
한 분은 ‘여보, 당신이 내 곁에 있어줘서 감사해요’라고 남편에게 메시지를 보냈는데, 남편에게 “나도 그래”라는 답변을 받았다고 하며 함박웃음을 보였습니다. 한 분은 일본에 유학 간 아들에게 “우리 아들, 내 아들이어서 고마워”라고 메시지를 보냈는데, 곧바로 아들에게 “엄마도 저를 낳아줘서 고마워요”라는 답변을 받았다며 “하트 뿅뿅까지 받았습니다” 하고 기뻐했습니다.
다음은 사회 문제를 주제로 즉문즉설이 이어졌습니다. “한국 사회의 적폐 청산에 걸림돌이 되는 친일 기득권 세력에 동조하는 집단이 존재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라는 질문에 스님은 해방 이후 한국 사회가 어떤 과정을 겪어서 여기에 이르렀는지 역사적 맥락을 자세히 설명하면서, 이들을 우리가 어떻게 포용해야 통일 대한민국으로 나아갈 수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생방송 행복학교를 모두 마치고, 드디어 즉문즉설 시간을 가졌습니다. 참석한 많은 분들이 스님에게 직접 묻고 답할 수 있는 오늘을 설레어하며 기다려 왔다고 합니다. 총 10명이 손을 들고 스님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그중에서 아버지가 자꾸 돈을 달라고 해서 고민이라는 분의 질문과 스님의 답변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도대체 누구 유튜브를 본 거예요? 법륜 스님 유튜브에 그렇게 답변한 내용이 있다면 그건 그 질문자의 특별한 사정이 있었을 겁니다. 저는 이런 질문에 주로 ‘해줄 수 있으면 해 주고, 못 해주면 못 해준다고 말해라’ 이렇게 답변을 하지 ‘무조건 부모가 원하면 해줘라’ 이런 말은 한 적이 없어요.
‘부모님이 돈을 달라고 하면 말로는 ‘예’라고 하고, 돈을 보내주기 싫으면 안 보내도 된다. 부모님이 ‘왜 안 보내니?’라고 물으면 ‘죄송합니다’라고 말하고, 또 안 보내면 된다.’
이런 법문은 제가 한 게 맞아요. 도대체 법문을 어떻게 듣고 그런 말을 하는 거예요. 질문자 같은 사람들 때문에 법륜 스님에 대해 나쁜 이미지를 갖는 사람이 생기는 거예요.” (모두 웃음)
“그래서 아버지에게 거절도 한 번 했었어요. 무릎 꿇고 울면서 너무 힘들다고 말씀도 드렸어요.”
“그건 바보 같은 짓이에요. 울 필요도 없고, 사정할 필요도 없어요. 아버지한테 전화가 오면 ‘예. 알았습니다’라고 말하고 돈을 안 보내면 돼요. 돈을 안 보내도 아무 문제가 없어요. 고민할 거리도 아니에요.
아버지에게 돈을 안 보내는 것이 내 마음이 불편해서 돈을 보내는 것은 아버지를 위해서 그러는 거예요? 내 마음이 불편해서 그러는 거예요?”
“내 마음이 불편해서요.”
“네. 그건 자신을 위해서 돈을 보내 드리는 거예요. 아버지 때문이 아니에요. 18살 아래의 자식은 부모가 보살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아이가 유학을 보내달라는 요구에는 응해줄 필요가 없어요. 20살이 넘었다면 더더욱 자식의 요구에 응해줘야 할 의무가 없어요. 그리고 자식은 부모를 보살펴야 할 의무가 없어요. 왜냐하면 성인과 성인의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부모를 보살피면 좋은 사람이지만, 보살피지 않는다고 나쁜 사람은 아니에요. 스님은 항상 이렇게 법문을 하는데, 어떻게 저렇게 들을 수가 있어요? 그걸 경상도 사투리로 ‘디비 쫀다’라고 그래요. 그럴 바에는 앞으로 유튜브 즉문즉설을 보지 마세요. (모두 웃음)
본인이 부모님에게 해주고 싶으면 해 주면 되고, 못 해주면 안 해주면 되지, 해달라는 아버지를 미워하거나 원망할 필요는 없어요. 아버지는 돈이 필요해서 달라는 것이고, 나는 해줄 수 있으면 해 주면 되고, 해줄 형편이 못되면 안 해주면 돼요. 형편이 되어도 해주고 싶지 않으면 안 해주면 돼요. 그렇게 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어요.
고민이 되는 것은 질문자의 문제예요. 아버지 하고는 아무런 관계가 없어요. 지금처럼 자꾸 말하고 다니면 아버지가 나쁜 사람이 돼요. 저는 질문자의 아버지를 털끝만큼도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버지는 자신의 요구와 필요를 딸에게 얘기하는 것뿐이에요.”
“어떻게 아버지의 부탁을 지혜롭게 거절할 수 있을까요?”
“아버지의 부탁을 거절한다는 관점으로 보시면 안 돼요. 그냥 돈을 보내라고 하면 ‘네’ 하고 안 보내면 돼요. 다음에 전화해서 ‘왜 돈 안 보냈니?’ 하시면, ‘죄송해요. 다음에 보낼게요.’ 이렇게 얘기하면 안 됩니다. 다음에 보낸다는 말은 질문자가 아버지에게 약속을 하는 거니까 그렇게 얘기하면 안 돼요. 그러나 아버지가 ‘돈 보내라’ 할 때 ‘네’ 하는 건 약속이 아니라 ‘그런 당신의 마음을 알겠습니다’ 이런 뜻이에요. 이걸 잘 아셔야 해요.
그렇지만 ‘내가 보내겠습니다’ 하면 그건 약속이 될 수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보내라’ 하면 ‘네’ 하고 대답하고 돈은 안 보내면 되는 거예요. ‘왜 안 보냈니?’ 그러면 ‘죄송합니다’ 하고, ‘다음에 보낼 거지?’ 하면 ‘네’ 이러면 돼요. 그러면 아무 문제가 없어요. 아버지가 ‘호적 판다’라고 하면 ‘네’ 이러면 돼요. ‘호적 파가라’ 그러면 ‘제가 요즘 바빠서 호적 팔 여유가 없습니다’ 이렇게 얘기하면 되고요. 이렇게 질문자가 아버지의 말에 신경을 안 써야 해요.”
“감사합니다.”
“질문자처럼 잘못 생각하기 때문에 남이 들으면 아버지가 나쁜 사람처럼 보이는 거예요. 남이 보면 아버지가 딸을 괴롭히는 사람이라고 오해하겠죠. 질문자가 지금 아버지를 나쁜 사람 만들고 있어요. 아버지는 그냥 자기가 돈이 필요해서 얘기하는 거예요.
자녀들이 부모에게 뭐 해달라고 얘기할 때도 그걸 갖고 ‘우리 애들이 나한테 이래저래 협박을 합니다’ 이렇게 얘기하면 자식이 나쁜 사람 되는 거예요. 누구나 다 그렇게 말할 수 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가 해줘야 할 의무가 아닌 것 같으면 ‘알았다’라고 하면 돼요. 유학을 가고 싶다고 하면 ‘좋은 생각이다. 갔다 오너라. 그런데 돈을 달라고 하면 아빠는 돈이 없다’ 이렇게 말하면 돼요. 그걸 갖고 ‘우리 형편에 돈이 어디 있다고 유학을 가려고 하니?’ 이렇게 화를 낼 필요가 없습니다. 그건 상대의 의사를 존중하지 않는 태도예요. 유학 가겠다는 게 좋은 생각이면 동조를 해주면 돼요. 그러나 ‘돈을 주세요’ 하면 ‘돈은 없다’라고 하면 돼요. 유학을 가는 건 동의를 해주세요. 그렇지만 돈은 부모의 돈이기 때문에 주고 안 주고는 부모의 선택이에요.
그런데 여러분들은 애들에게 ‘우리 형편에 유학은 무슨 유학이야?’ 하면서 신경질은 다 내놓고, 애들이 나가면 어디 전화해서 돈 나올 데 없는지 찾아요. ‘우리 딸이 유학을 가려는데 비용이 좀 필요해서요’ 하면서 바보 같은 행동을 합니다.
인생을 살면서 그 누구도 다른 사람을 탓할 필요가 없습니다. 인생은 다 자기 결정이에요. 아버지가 돈을 달라고 했는데도 돈을 못 드렸어요. 그런데 갑자기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그래서 내가 돈을 못 드린 것이 후회가 된다면 자기 결정이 잘못된 거예요. 그때 아버지에게 돈을 주는 건 아버지를 위해서 주는 게 아니라 나를 위해서 주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를 원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돈을 못 보내면 ‘제가 돈이 없어서요’ 이렇게 얘기하면 됩니다. 아버지가 전화 와서 ‘돈이 필요한데 200만 원 보내라’ 이러면 ‘돈이 없습니다’라고 하면 돼요. 그걸 갖고 난리를 피우면 아버지를 나쁜 사람 만드는 거예요.”
“감사합니다.”
이 외에도 다양한 질문과 대화가 오갔습니다. 특히 자식에 대한 고민이 많았습니다.
중학교 2학년과 초등학교 4학년 아이가 있습니다. 둘이 심하게 다투어서 아빠에게 혼난 후부터 큰 애가 동생에게 분노와 적개심을 보이며 서로 말을 안 한지 1년 6개월이 되었습니다. 엄마로서 제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할까요?
스님 법문 듣고 나서 다른 건 다 실천을 할 수 있는데, 자식에 대해서만큼은 욕심이 드문 드문 솟아오릅니다.
고등학생입니다. 또래 아이들은 호들갑도 떨고 그러는데, 저는 그러지 못해서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게 고민입니다.
아이가 중3 때 진학을 포기하고 집에만 있습니다. 스님 말씀대로 했더니 예전보다는 아이가 많이 좋아졌는데, 더 좋아지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결혼한 지 4년이 되었지만 아이가 안 생겼습니다. 인공수정을 했지만 유산이 되었고, 지금은 시험관 아기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남자 친구와 헤어지고 나서 외로움이 극복되지 않습니다. 남자 친구를 잊지 못하겠습니다. 어떻게 외로움을 극복할 수 있을까요?
남편이 올봄에 희귀병 진단을 받았습니다. 아직까지 치료약이 없다고 합니다. 그때 이후 저에게 불안함이 자주 올라와서 괴롭습니다. 어떻게 하면 옛날처럼 돌아갈 수 있을까요?
요새 뉴스를 보면 가장이 가족들을 데리고 동반 자살을 하는 소식을 접합니다. 그런 상황에 놓인 사람들이 극단적인 선택을 피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성격이 내성적이어서 남들 앞에서 말하는 게 서툽니다. 어떻게 의사소통을 잘할 수 있을까요? 자꾸 좁은 마음이 되는데 어떻게 넓은 마음을 가질 수 있을까요?
법문을 듣고 많이 행복해졌다는 경험을 이야기하는 분도 몇 분 있었습니다 앞사람의 대화 내용을 들으면서 고민이 해결되어버려서 더 이상 질문할 것이 없다는 분도 있어서 큰 박수를 받았습니다.
마칠 시간이 되자 스님은 어떤 경우에도 행복할 수 있고, 행복해야 한다고 강조하며 즉문즉설을 마쳤습니다.
“핵심은 이거예요. 이제 남 생각은 그만 하세요. ‘나부터 살고 보자!’ 이렇게 관점을 가져야 합니다. 물론 ‘나만 살면 된다’ 하는 건 이기심이에요. 그러나 나부터 살고 보자는 건 순서에 해당해요. 행복도 솔선수범을 해야 하는 거예요. 남이야 어떻게 살든지 그건 그 사람의 문제이고, 우선 나는 어떤 경우에도 행복해야 합니다. 먼저 내가 행복해야 남편에게도 행복한 길을 열어줄 수 있지, 나는 괴로우면서 남보고 행복하라고 하면 설득력이 없어요.
만약 내가 어떤 사람과 함께 물에 빠졌다면, 나부터 살고 봐야지 그 사람까지 건지려고 하면 둘 다 죽어요. 나라도 살아야 할까요, 같이 죽어야 할까요?”
“나라도 살아야 합니다.”
“예. 나라도 살아야죠. 그건 이기적인 게 아니라 지혜로운 거예요. 상대를 건지려다가 같이 빠져 죽는 것보다 나라도 살아야 물 밖으로 나가서 건질 기회도 생기는 겁니다. 설령 그 사람이 죽더라도 시체를 건져서 장례라도 치러줄 기회가 생기지 않겠어요? 둘 다 빠져 죽으면 그런 기회는 없어요. 이건 절대 이기적인 게 아닙니다. 그러니 나부터 일단 살아야 돼요. 나부터 일단 행복해야 해요.
‘자식이 어떻든, 남편이 술을 먹든, 바람을 피웠든, 부모가 어떻게 했든, 그건 다 지나간 이야기다. 그런 상황에 처한 나도 행복할 권리가 있다!’
이렇게 관점을 가져야 해요. 돈을 다 날려도 행복할 권리가 있어요. 살아있는 인간은 다 행복할 권리가 있습니다.
아이에게 우울증이 있다면, 내가 해줄 수 있는 것만 하는 거예요. 밥을 해줄 수 있으면 밥이라도 해주고, 옷을 빨아줄 수 있으면 옷이라도 빨아주고, 학교를 보내줄 수 있으면 학교라도 보내주는 거예요. 나머지는 내가 능력이 안 되니까 그건 네가 알아서 하라고 하면 됩니다. 이렇게 내가 할 수 있는 영역을 정해야 나라도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거예요.
제가 강연을 할 때는 질문자가 아무리 많아도 2시간 안에서는 답변을 다 해주지만, 강연이 끝나고 나가는데 누가 옷자락을 잡고 ‘스님, 딱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 하고 물어보면 답변을 안 해줍니다. 왜냐하면 저도 살아야 되기 때문이에요. 그래야 제가 내일 또 강연을 할 거 아니에요. 그런 사람들에게 붙들려서 또 대화하고, 또 대화하다가 무리하면 강연도 못하게 됩니다.
좋은 소리만 다 듣고 살 수 없어요. 욕도 좀 얻어먹고 살아야죠. 욕을 얻어먹어야 또 오래 살아요. (모두 웃음) 다른 사람이 원한다고 다 해줄 수도 없고, 또 내가 원하는 것도 다 이룰 수 없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다 행복했으면 좋겠지만 그건 될 수 없는 일이에요. 질문한 사람들이 제가 말한 대로 안 하잖아요. 한 번 생각해보세요. ‘내가 말했는데 네가 어떻게 내가 말한 대로 안 할 수 있냐?’ 이렇게 생각하면 법문을 더 안 하고 싶겠죠. 묻기만 하고 하지는 않을 건데 대답해서 뭐하겠어요. 그러나 제가 말한 대로 하고 안 하고는 그 사람의 일이에요. 저는 다만 성실하게 대화를 할 뿐이고, 들은 대로 하고 안 하고는 그들의 인생이에요. 이렇게 분리를 시켜야 제가 살아갈 수 있고, 여러분에게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남편이 어떻고, 아내가 어떻고, 그런 이야기 그만하고, 우선 나부터 살고,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하면서 살면 돼요. 그리고 ‘내가 원하는 게 되면 다행이고, 안되면 그만이다’ 이렇게 관점을 가져야 지금 행복할 수 있어요. 죽고 난 뒤에 일은 그때 가봐야 알 수 있잖아요. 이런 관점으로 인생을 살면 죽지 않는 이상은 행복할 수 있어요.
아버지가 매일 전화해서 돈 달라고 해도 행복할 수 있어요. 아버지가 전화해서 돈 달라는 건 나도 살아있고 아버지도 살아 계시다는 증거잖아요. 아버지가 살아서 돈 달라고 하는 게 좋아요,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돈 달라고 안 하는 게 좋아요?
아버지가 살아계셔서 돈 달라고 하는 게 낫습니다. 돈 좀 안 드리려고 아버지가 돌아가셔야겠어요? (모두 웃음) 그래도 아버지가 살아계셔서 돈 달라는 소리도 하는 거니까 돈이 있으면 주고 없으면 ‘알았어요, 근데 저 돈이 없어요.’라고 하면 돼요. 무겁게 받아들일 필요가 없어요.
어떤 사람이 ‘스님, 저 5백만 원 빌려주세요. 안 그러면 우리 집 다 날아가요.’라고 하면 제가 심각하게 받아들일까요? 아닙니다. 그러나 저는 굶어 죽는다고 하면 신경을 써요 북한 사람도 굶어 죽는다고 하면 돕습니다. 근데 돈 빌려줘서 못 받는 일은 제가 볼 때 아무 일도 아니에요. 있는 돈을 빌려준다는 건 그 돈 없이도 살 수 있다는 거예요. 사는데 지장이 없으니까 빌려줬을 거 아니에요. 그러므로 그 돈은 못 받아도 좋은 일이에요.(웃음) 그 돈 없어도 사는데 괴로워하는 건 바보 같은 짓이에요. 사실 별 거 아니에요. 어떤 일이든 탁 털고 행복하게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마지막 프로그램은 행복학교를 수료한 학생들에게 스님이 장미꽃을 전달하는 시간입니다. 한 분 한 분 무대 위로 올라오자 스님은 환한 웃음과 함께 장미꽃을 선물했습니다.
“졸업을 축하드립니다.”
무대 아래에서는 행복학교 담당자들이 자신과 함께한 학생들이 장미꽃 받는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주느라 취재 경쟁을 하는 훈훈한 모습이 펼쳐졌습니다.
오늘 행사 모습을 담은 사진을 함께 보며 행사를 마무리하고 있는 사이, 스님은 수원시청을 빠져나와 두북 정토수련원으로 향했습니다.
수원 시내를 빠져나오자 고속도로 주변에 아파트 단지가 어마어마한 규모로 지어지고 있었습니다. 스님이 차창 밖을 보며 한 마디 했습니다.
“저기 건물 짓는 것 좀 봐라. 끝이 없이 짓네. 인구가 계속 늘어나는 것도 아닌데, 아파트를 왜 이렇게 많이 짓는 걸까. 건물을 이렇게 많이 지어서 어떡하려고... 앞으로 환경 문제가 점점 심각해질 거야. 오염이 오염을 낳는 거지. 이렇게 건물을 많이 지으면서도 전쟁을 하자는 것은 정말 말이 안 맞는 거야.”
환경 위기가 닥쳤을 때 사람들이 따라올 수 있는 모델을 만들어야 한다는 스님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차로 3시간을 달려 저녁 7시 30분에 두북에 도착했습니다. 스님은 차 안에서나마 단잠을 자며 휴식을 취했습니다. 도착해서는 밤늦게까지 원고 교정을 보다가 오늘 일정을 마쳤습니다. 내일은 새터민과 함께하는 통일 체육축전에 참석했다가 나머지 시간에는 농사일을 주로 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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