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명_사랑하기 전부터 사랑한 것 아니냐 ●지은이_김재우
●펴낸곳_시와에세이 ●펴낸날_2024. 12. 20
●전체페이지_120쪽 ●ISBN 979-11-91914-74-0 03810/신국판변형(127×206)
●문의_044-863-7652/010-5355-7565 ●값_ 12,000원
진정한 인간 회복을 꿈꾸는 참다운 시편!
김재우 시인의 첫 시집 『사랑하기 전부터 사랑한 것 아니냐』가 ‘詩와에세이’에서 출간되었다. 김재우 시인은 시적 대상이 무엇이든 그것의 본질에 다가갈 수 있는 심미적 감각을 보여 준다. 그의 시편은 삶에 대한 존재론적 인식과 구심적 상상력만큼이나 인간사나 세상사와 같은 외부 세계를 시적 대상으로 하는 원심력의 상상력, 즉 삶과 세계에 대한 관계론적 인식을 중심으로 파급하는 자본주의 기술 문명사회의 비인간화, 폭력성, 가난과 소외의 문제 등을 형상화하고 있다.
할머니의 장독 간장
최후의 맛을 내는 것은
완숙한 보름달이다
장독이 열리기만을 기다리며
하늘에서 온 마음을 부풀리다가
어느 날 밤
할머니가 장독을 열자마자
장독 간장 속으로 첨벙 뛰어들어
두둥실 한 점 찍는 보름달이다
—「화룡점정」 전문
이 시는 “할머니의 장독 간장”과 “하늘에서 온 마음을 부풀”린 보름달이 원초적으로 간직한, 그러나 지금의 현실적 삶에서는 찾을 수 없는 할머니와 간장독과 보름달의 상호 교감과 호응에 대한 재신비화이며 재신화화이다. 김재우 시인은 우리에게 잃어버린 온전한 우주적 교감과 생명의 신비한 질서를 감각하도록 한다.
그대 떠나보내고/잎 떨구는 은행나무 아래 앉아/눈을 감고 있었다/은행잎이 무더기로 떨어져도/그대 생각뿐/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마침 는개비가 내리고/단호하게 일어서 우산을 펼쳤다/함께 받던 우산 아래/홀로 서니 들렸다/은행나무가 소나기처럼 우는 소리/노랗게 울음이 쌓이는 소리
—「노란 울음」 전문
모든 사랑은 매혹이지만 그 매혹의 끝은 ‘울음’이다. 그 ‘울음’은 사랑의 무상이며 허망이고 고통이다. 하지만 이 ‘노란 울음’이 말하는 것은 단지 사랑의 무의미와 허망함이 아니다. 노랗게 쌓이는 사랑의 ‘울음’ 속에서 고통받으면서 비로소 사랑을 들을 수 있는 것이다. 고통은 가장 절실하게 우리가 살아 있음을 자각하게 만드는 매재이다. 홀로 선 ‘울음’의 고통 속에서야 우리는 비로소 사랑을 느낄 수 있고 들을 수 있다. 그래서 “노랗게 울음이 쌓이는 소리”라는 표현이 가능한 것이다. 그리하여 사랑의 고통스러운 ‘울음’은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의 “노란 울음”처럼 황홀하다.
마스크들의 죽음을 아무도 애도하지 않았다/죽음의 시대를 아무도 두려워하지 않았다/죽음은 나의 것이 아니라/타자에 속한 것이었다/마스크의 화장터가 부족해도/그건 뉴스에 불과하였다/주검은 자막에 뜨는 숫자에 불과하였다/삶이 죽음보다 더 끔찍했다
—「마스크 시대」 부분
코로나 팬데믹을 통과하는 공포의 상황을 그리는 이 시는 마스크를 죽음의 상징으로 비유해 죽음이 엄습하는 공포와 죽음에 무감각해진 끔찍한 상황, “죽음의 시대”를 고통스럽게 직시하고 있다. 수많은 일회용 마스크가 쉽게 버려지듯 죽어가는 생명, 그리고 “장례식도 없이 유기”되고 “아무도 애도하지 않”는 냉담한 죽음, 또 “아무도 두려워하지 않”는 죽음은 얼마나 끔찍하고 묵시록적이며 그로테스크한가. 화자가 투시하는 것은 현실이 은폐했던 불길한 죽음이다. 이를테면 “삶이 죽음보다 더 끔찍”한 죽음의 일상화이다. 여기에서 죽음으로 얼룩진 그로테스크한 일상의 풍경은 구원의 가능성을 상실한 묵시록적 현실 세계를 지시한다.
김재우 시인의 『사랑하기 전부터 사랑한 것 아니냐』에서 자본주의 문명에 대한 비감한 시적 반성은 물화된 세계의 상업적이며 경쟁의 가치관을 반영하는 「간판들의 아비규환」, 종교와 신앙의 가치나 상징마저도 결국 소비적이고 기계적인 것으로 변질되고 신을 잃어버린 채 방황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그리는 「부처님 똥통에 빠지다」나 「숨은 신」에서 그 의미론적 맥락을 연속한다. 김재우 시인의 대사회적인 현실 인식은 또한 세월호의 비극을 그리기도 하고, “구급차 사이렌 소리만/세상을 흔들어 깨”우는 “폭정”(「폭설」)의 근대사를 주목하기도 한다. 그리하여 ‘김재우’라는 시적 주체가 보여 주는 모든 시적 사유는 현실 원칙이 금지한 “억압된 욕망을 욕망”(「욕망」)하며, 스스로 존재하기 위해 자명한 것을 ‘의심’하고 ‘거부’(「무정부적으로」)하는 데로 모인다. 김재우 시인은 이 모든 의심’과 거부’를 통해 진정한 인간 회복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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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례
제1부
첫눈 세일·11
호외(號外)·12
오독하다·13
사랑 치과에서·14
그대를 생각하다가·15
사랑하기 전부터·16
실종·17
밤눈·18
개기월식·19
꽃 몸살·20
꿈방울·21
엽서·22
노란 울음·23
붙이지 않은 편지·24
자화상·26
제2부
마스크 시대·29
겨울비 21·30
4월 16일·31
세월호 떠오르다·32
완성되지 않는 문장·34
역사의 봄·36
폭설·37
HOMO FINGERTUS·38
외상·39
간판들의 아비규환·40
허공의 집·42
토끼풀·43
부처님 똥통에 빠지다·44
어느 겨울밤·46
무정부주의적으로·47
제3부
만추·51
야시(野詩)·52
업데이트·53
삼천사 마애불 앞에서·54
풍경·55
대청봉·56
노적봉이 사라지다·57
꽃자리·58
단둘자·59
꽃과 숨·60
피차간·61
연말 정산·62
겨울 거울·63
적나라(赤裸裸)·64
춘몽(春夢)·65
제4부
화룡점정·69
없는 귀·70
갈대와 억새 사이·71
숨은 신·72
비의·74
한 겨를·76
다움·77
시작과 끝·78
사람들 사이·79
허공의 코드·80
욕망·81
바늘귀·82
재건축·83
나는 왜 가난한가·84
꽃의 나이·85
해설|김홍진·87
시인의 말·118
■ 시집 속의 시 한 편
하나로 농협 시장에서
아내와 함께 김장용 배추 몇 단 사고
계산대 앞에 섰는데
육십이 넘어 뵈는 여점원이
계산할 생각을 잊고
고개를 돌려 창문만 바라보고 있다
워매! 첫눈이 오네요
워매! 첫눈이 저렇게 크게 내려요
계산대 앞에 줄을 선 고객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려
첫눈을 사러 온 것처럼
한참이나 창문을 바라보았다
계산대 뒤쪽에서
젊은 남자 직원이 외친다
첫눈이 옵니다
첫눈이 오니 첫눈 세일합니다
동해안에서 첫눈 맞으며 올라온
싱싱한 생선 반값에 드립니다
―「첫눈 세일」 전문
■ 시인의 말
내 넋두리가 시가 되겠느냐
시가 밥이 되겠느냐
시가 돈이 되겠느냐
슬퍼 마라,
나의 시여!
아무것도 되지 마라,
나의 시여!
사전 밖으로 나온 말들이
길을 잃고 타락한 시대
서랍장의 어둠을 깨치고 나온
나의 시가 길을 찾아 떠돌다,
막다른 골목에 절망을 만나
함께 울 수 있다면!
나의 시의 행간에서
날갯짓처럼 떠오르는 말들이
상처 난 가슴에
풍경을 울릴 수 있다면!
2024년 12월
김재우
■ 표4(약평)
김재우 시인의 시집 『사랑하기 전부터 사랑한 것 아니냐』 는 생의 빙설 위로 퍼붓는 눈을 온전히 다 맞으며 길의 이정표를 찾아 헤매는 시인의 내적 고투를 별다른 언어의 분칠 없이 담백하게 펼쳐 놓고 있는 시집이다. 대부분의 시편들이 순정하지 않은 세계의 순정하지 않음을 탄식하는 이 시집에는 세계의 부정과 불의를 대면하는 인간의 모순된 허위의식을 헤집어 최초의 상태로 표백하고자 하는 시적 의지로 보이는 ‘하얀’, ‘하양’, ‘흰’이라는 어사들이 유독 눈에 많이 띈다. ‘하얀’이 가리키는 지점이 눈더미를 뒤집어쓴 생의 이정표인 양 가로놓여 있기도 하다.
나무들은 각기 하나의 문장/울긋불긋 매달리던 형용사들/찬바람 피해 사전 속으로 돌아갔다/십일월의 문장에는 수식어가 없다//체로(體露)의 존재들, 각기/체로(體露)의 문장 하나
―「적나라(赤裸裸)」 전문
시 「적나라(赤裸裸)」에서의 ‘체로(體露)’는 『벽암록(碧巖錄)』 제27칙의 한 구절인 체로금풍(體露金風); 즉 몸을 벗기는 가을바람에서 비롯되었을 것인 바 이 시는 시 스스로 시공간의 관습적인 질서를 무너뜨리며 생이라는 험로의 준동하는 눈사태 속에서 시의 자리, 사람의 서 있을 자리가 어디인가를 새삼 숙연하게 되돌아보게 한다. 나뭇잎 잎잎들이 다 불려가도록 비명 소리 한 자락 내지 않는 11월의 나무들처럼 자문자답의 혹은 자승자박의 형식으로 생을 향한 질문들을 재배치하고 있는 『사랑하기 전부터 사랑한 것 아니냐』는 혹한의 퍼붓는 눈보라 속 한 그루 나무처럼 기꺼이 눈사람이 되고자 하는 시집이다. 그리하여 『사랑하기 전부터 사랑한 것 아니냐』의 시적 화자들의 절망은 더없이 온당하며 마침내 끼끗하다, 순정하다고밖에 말할 수 없을 터이다._김명리(시인)
■ 김재우
전북 김제에서 태어나 2024년 『시에』로 등단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