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2017년 가해 8월27일 주일[(녹) 연중 제21주일]
[수도회] 신앙을 고백하는 하늘나라의 실험적 수련소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이사 22,19-23
○ 제2독서 로마 11,33-36
† 복음 마태 16,13-20
◈ 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
하고 물으셨습니다. 제자들은 사람들의 다양한 견해를 전해
드립니다. 세례자 요한으로, 어떤 이들은 용맹한 예언자 엘리야로,
또 어떤 이들은 고통받은 예언자 예레미야라고 한다고 말입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이 시대에 물으신다면 사람들은 더 유식한 언사로
예수님께서 누구신지 설명할 것입니다. 수난받는 하느님의 종,
하느님의 사랑에 불타 성전을 정화하신 메시아, 물과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으로 말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너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라고 물으신다면,
우리는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답변이나 의견을
설명하면서 답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러저러한 핑계나 학설을 대며
자신의 의견을 치장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우리
각자가 그리스도와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지 고백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베드로 사도처럼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할 수 있는 개인적 체험과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당신의 메시아 신원을 밝히지 않도록
함구령을 내리신 이유는, 그리스도의 수난을 통해서 사도들의
믿음이 완성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베드로 사도와 같은
신앙 고백을 할 때, 그리스도의 십자가 길을 따를 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얻을 수 있습니다. 하늘 나라의 열쇠는 십자가의 삶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열두 사도처럼, 십자가를 지고
걸어가시는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야 하겠습니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
- 매일 미사 -
◈ [인천] 영혼의 구원이라는 큰 선물
2017년 가해 8월27일 연중 제21주일
제1독서
<나는 다윗 집안의 열쇠를 그의 어깨에 메어 주리라.>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22,19-23
제2독서
<만물이 그분에게서 나와,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나아갑니다.>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입니다. 11,33-36
복음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6,13-20
심리학자 밀턴 에릭슨은 훌륭한 정신치료법을 고안해내 많은
사람들의 추종을 받았습니다. 그가 이렇게 훌륭한 심리학자가 된
데에는 어렸을 때의 중요한 체험 때문이었습니다. 12살 때
소아마비에 걸렸는데, 병을 앓기 시작하고 열 달 뒤에 의사가 그의
부모에게 하는 이런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아드님은 오늘 밤을 넘기지 못할 것입니다.”
이 말에 크게 슬퍼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면서 그는 이렇게
생각했답니다.
‘일단 오늘 밤을 잘 넘기자. 그러면 어머니가 조금이라도
안심하시겠지.’
그래서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 잠을 자지 않으면서 정신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에릭슨은 어머니에게
외쳤습니다.
“보세요. 저 아직 살아 있어요.”
너무나 기뻐하는 부모님의 모습을 보면서, 에릭슨은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 매일매일 병을 견뎌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 뒤 장성한 에릭슨은 어렸을 때의 체험을 기억하면서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는 극한 능력에 관한 의미 있는 저서를 많이 집필했고,
1990년 7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에릭슨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세상의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으려는 마음은 바로 누군가를
기쁘게 하는 마음이라는 것을 말이지요. 그러나 많은 이들이 자기
자신의 만족만을 추구합니다. 다른 이들을 염두에 두지 않는 그러한
마음이 어쩌면 쉽게 포기하고 절망으로 빠지게 만들었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그렇다면 주님을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 매일매일 죄를 견뎌내기로
마음먹고 실천하다면 어떨까요? 분명히 죄의 유혹도 거뜬히 이겨낼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어떠한 어려움도 별 것 아닌 것처럼 지나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
라는 질문을 던지십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세례자 요한,
예레미야나 예언자 가운데의 한 분 등의 사람들의 말을 전합니다.
하지만 이 모든 답은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토록
당신이 어떠한 분인지를 말씀과 행적으로 계속해서 보여주셨는데도
알아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달랐습니다.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주님을 흡족하게 하는 정답을 이야기합니다.
주님의 사랑은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나의 삶 한
가운데에서 계속해서 흐르는 주님의 사랑을 분명히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사랑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주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가 있을까요? 단순히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말로만은 기쁘게 해드릴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 사랑을 기억하면서 나의 이웃들에게 실천을 하고,
또한 어떠한 상황에서도 포기나 절망 없이 기쁘게 살아갈 때
진정으로 주님께 큰 만족을 드릴 수가 있습니다.
베드로가 정답을 이야기한 뒤에 하늘 나라의 열쇠를 받았음을
기억했으면 합니다. 그만큼 그는 주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알았고,
그분의 뜻에 맞게 살아갔기 때문에 큰 선물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나만의 만족이
아닌 주님께 큰 만족을 드릴 수 있는 말과 행동을 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 역시 주님께로부터 영혼의 구원이라는 큰
선물을 받을 수 있습니다.
행복과 불행은 한 지붕 두 얼굴. 불행을 쫓아내면 행복도 따라간다.
두 가닥 잘 꼬인 새끼줄, 마음 단단히 묶는 법...(김원각).
수위권을 받는 베드로
300대 1을 뚫은 한 마디
(미쓰자와 마키, ‘어떤 능력이 당신을 최고로 만드는가’ 중에서)
취업 준비하던 시절, 나는 고객 만족 부문의 컨설턴트를 꿈꿨다.
그래서 한 유명 강연 업체에 지원했는데, 경쟁률이 무려 300대
1이었다. 합격할 거라곤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데 일주일 후
덜컥 합격 통지서가 날아들었다. 뜻밖이었다. 함께 면접을 본 지원자
중에는 뛰어난 사람이 많았다.
얼떨결에 첫 출근을 하고, 정신없이 하루하루를 보내던 어느
날이었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누군가 내 어깨를 툭 쳤다. 돌아보니
나를 면접한 이사님이었다. “일은 할 만한가?” “네, 솔직히 이번
채용에서 뽑힐 거라 생각 못했습니다. 혹시 합격한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 “커피 때문이지.”
그는 어리둥절한 나를 쳐다보며 빙그레 웃었다.
“다른 지원자는 면접이 끝나고 모두 나한테 ‘오늘 시간 내 주셔서
감사했습니다.’라고 인사하며 나갔는데 자네는 조금 다르더군.
지원자들이 마신 커피 잔을 가지고 나가는 직원에게 ‘커피 정말
맛있었습니다.’라고 했지. 그렇게 말한 사람은 자네밖에 없었어.
그래서 뽑은 거야. 서비스 분야에서 성공한 이들의 특징이 뭔지
아는가? 그들에게는 더 중요한 고객도, 덜 중요한 고객도 없다는
거야.”
“커피 잘 마셨습니다.”라는 인사는 누구나 할 수 있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하지는 못한다. 작은 행동 하나가 내 인생을 바꿔 놓을
줄은 몰랐다.
쉬운 말 한 마디, 그러나 그 쉬운 말 한 마디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우리는 아니었을까요? 그만큼 내 이웃을 향하지 못하는 우리의
사랑이었습니다.
하늘나라 열쇠를 들고 있는 베드로'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신앙을 고백하는 하늘나라의 실험적 수련소 -
기경호 프란치스코
2017년 가해 8월27일 연중 제21주일
이사 22,19-23; 로마 11,33-36; 마태 16,13-20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마태 16,13)
신앙을 고백하는 하늘나라의 실험적 수련소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직무에서 대단히 중요한 첫 시기를 매듭짓는
대목입니다. 그분께서는 제자들을 헤로데 안티파스의 통치권이
미치지 않는 카이사리아의 필리피 지방으로 제자들을 데리고
가십니다. 거기에는 그리스계 시리아인들이 살았고, 목신(牧神)인
판(Pan)과 님프신에 대한 숭배가 이루어졌습니다. 이는 마태오
공동체의 환경과 흡사했습니다.
거기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16,13) 하고 물으십니다. 갈릴래아 사람들은 예수님을
두고 세례자 요한, 엘리야 또는 예레미야나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특별한 능력을 지닌 선구자로
인정했지만(16,14) 메시아이심을 몰라본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16,16)
하고 고백합니다.
사실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이란 표현은 마태오 복음사가가
덧붙인 것으로서 초대교회의 발전된 신앙고백을 보여줍니다. 아무튼
이 신앙고백이야말로 교회의 기초입니다. 교회는 역사의 흐름
속에서 이 신앙고백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따라서 교회는 세상의
권세나 죽음의 힘마저도 극복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베드로가 참되고 행복한 신앙의 고백자가 된 것은 살과 피,
곧 나약한 인간성에 의존해서가 아니라, ‘어리석은 이들’(11,25)에게
약속하신 아버지의 계시 때문입니다(16,17). 베드로는 건물을
견고하게 하는 초석이 될 터인데, 그는 거기서 모든 백성이 나올
유일한 바위가 될 것입니다. 교회가 이 바위 위에 세워진다면, 그
어떤 죽음의 힘도 교회와 맞설 수 없을 것입니다(16,18).
마태오 복음사가는 ‘하느님에 의해 소집된 모임’을 예수님의 입을
빌어 ‘교회’라 합니다. 그런데 교회는 일종의 하늘나라의 실험적
양성소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베드로가 율법을 해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대리자로서 열쇠를 쥐고
있다 하십니다. 베드로는 하느님의 계시로 맺고 푸는 권한을
받았기에(16,19), 하느님께서도 그의 결정을 시인하실 것입니다.
신앙은 인간의 계획과 생각을 벗어납니다. 우리의 신앙의 자리는
어디입니까? 예수님과 동행하며 동고동락했던 제자들의 공동체를
지탱했던 근원적인 힘은, 바로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확고한
믿음이었습니다. 나에게도 그런 믿음이 있는지 돌아봐야겠지요. 그
믿음은 추상적인 생각이 아니라 그렇게 믿는 그리스도를 내 삶의
중심에 모시고, 그분의 가치를 받아들이며 그분의 길을 가는데
헌신하는 것입니다.
교회도 나 자신도 그런 신앙을 끊임없이 이어간다면 그 어떤 죽음의
힘도 이겨낼 것입니다. 내 마음, 교회공동체, 우리 각자의 삶의 자리,
이 사회가 곧 하늘나라의 실험적 수련소입니다. 모든 순간, 모든
상황이 바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도록 부름 받는 자리라는
것이지요. 나는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신앙인다운 선택과 결단을
하고 있습니까?
온갖 우상숭배의 함정이 도사리고 있는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너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하고 물으십니다. 나의 진정한
고백을 준비할 때입니다. 아울러 눈에 보이는 교회가 곧 하늘나라는
아니라는 사실을 직시해야 할 것입니다. 교회가 교계제도를
동일시하거나, 교회의 직분이 권위를 대신하는 일은 결코
없어야겠지요. 교회는 오직 하느님 나라를 향한 끊임없는 쇄신과
새로운 변화의 노력을 하는 주체여야 함을 명심해야겠습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신부 -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 [서울] 연중 제21주일
2017년 가해 8월27일 연중 제21주일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 마태 16,13-20
예신 담임 부제님들과 나가사키 성지순례 때 일입니다. 다른 모든
분들은 일본 입국 수속을 잘 마쳤습니다. 그런데 한 분이
입국심사에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여권에 있는 이름이 수배자의
이름과 같았기 때문입니다. 사진, 여권, 비행기 티켓, 지문을 모두
확인했지만 한국에서 수배가자 아니라는 보증을 해야만 입국할 수
있다고 합니다. 한국에서 신원을 확인해 주어서 무사히 입국할 수
있었지만 우리는 모두 걱정하면서 기다려야 했습니다. 물론
당사자는 가장 긴장했고, 답답했을 것입니다.
저는 교구청에 있기 때문에 교구청의 여러 곳을 출입할 수 있는
열쇠가 있습니다. 요즘은 비밀번호와 카드가 있어 굳이 열쇠가
필요하지는 않지만 원하는 곳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점에서는 같은
기능을 하는 것입니다. 신청사에는 성직자 신분증이 있어야 출입할
수 있습니다. 사무실, 숙소, 예비 신학생들이 머무는 기숙사는
비밀번호를 눌러야 들어갈 수 있습니다. 사이버 공간에서도 저를
나타내는 비밀번호와 아이디가 필요합니다. 비밀번호와 카드가
없으면 들어가기 어렵습니다. 열쇠는 조직을 위해서도, 보안을
위해서도, 본인을 위해서도 꼭 필요합니다.
얼마 전 저는 남미에 있는 교회를 방문하면서 가슴 아픈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부끄러운 이야기이지만 성직자들이 섬기는 삶을 살지
않았고, 희생하는 삶을 살지 않았고, 권위적인 모습으로 살았던 것
같습니다. 병원에 있는 성직자만 교회에 있고, 다른 성직자들은
국외로 추방당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많은 시간이 지났고, 지금은
다시금 성직자들이 교회에서 사목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마치
공소의 열쇠는 공소회장님이 가지고 있듯이, 아직까지는 본당의
열쇠를 성직자들이 가지고 있지 않고, 신자들이 관리한다고 합니다.
저는 교회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열쇠는 책임이 있는 사람, 성실한
사람, 정직한 사람, 부정과 불의에 타협하지 않는 사람이 관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제를 사목자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사목은 무엇일까요?
사목이란?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었지만 섬기러 오셨던 예수님처럼
신자들을 위해서 봉사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목이란
‘서비스’입니다. 교회에는 일곱 가지 성사가 있습니다. 사제는
성사를 성실하게 집행하면서 신자들이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어야 합니다. 고백성사, 성체성사, 병자성사는 신자들의
고민과 아픔을 치유해 주고, 영적인 양식을 드리는 성사입니다. 그
준비에 충실하고 그 집행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특히
가난한 이, 아픈 이, 외로운 이들과 함께하였듯이 사목이란 모든
이를 위해서 모든 것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때로 고난을 겪기도
하고, 십자가를 지고 가기도 해야 하고, 박해를 받기도 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니 사목이란 장난이 아닙니다.
사목이란?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복음이란 ‘하느님 나라’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먼저 이루어질 수 있도록 사람들에게 선포하는
것입니다. 아직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신앙 안에 있었지만 쉬고 있는 교우들에게 다시금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하지만 큰 감동과 기쁨이 적은 신자들에게 왜
복음을 믿어야 하는지, 왜 복음을 살아야 하는지 알려 주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제가 먼저 복음을 살아야 하고,
복음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사목이란? 본당의 재정, 조직, 건물을 관리하는 것입니다. 재정은
투명하게 하고, 그 예산은 하느님 보시기에 합당하게 사용하여야
합니다. 많은 본당에서 예산이 적어서 문제가 되기보다는 많은
예산을 독단적으로 사용하기에 문제가 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본당에는 많은 단체와 조직이 있습니다. 조직과 단체가 발전하고
촉진되도록 관심을 기울이고, 봉사할 사람들을 선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였듯이, 사제들은
봉사자들과 함께 본당을 운영하고 관리해야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질문을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합니까?’ 제자들은 예수님에게서 영광과 승리와
명예를 보았는지 모릅니다. 세상의 허물을 없애주고 새로운 왕국을
건설할 메시아로 보았는지 모릅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느님께로부터 선별된 사람입니다. 그리스도는 권한과
능력도 있지만 그에 따른 책임과 희생도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은 있을 수 없었습니다. 골고타 없는 하느님 나라도
없었습니다. 죽음이 없는 영원한 생명은 또한 없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다음 말씀에서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은 반드시
고난을 받고 죽었다가 다시 살아날 것이다.’ 그렇습니다. 신앙은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입니다. 많은 성인들은 바로 십자가 열쇠로
하느님께로 갈 수 있었습니다. 누군가 우리들에게 십자가를
지운다면 고마워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천국으로 가는 열쇠를 주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 열쇠를 이웃들에게
나누어 줄 수도 있습니다. 지금 우리들 마음에 몇 개의 십자가
열쇠가 있는지요? 아니면 타락과 욕심의 열쇠만 가득한 것은
아닌지요?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