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이야기 501 김천수도암[修道庵]
청암사 수도암 석조비로자나불좌상경북 김천시 증산면 청암사 수도암. 보물 제307호. 통일신라시대.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본사 직지사의 말사인 청암사의 부속 암자로 수도산 (일명 불령산) 정상 부근에 있다. 859년(헌안왕 3)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수도 도량으로 이 절을 창건하고 매우 기쁜 나머지 7일 동안 춤을 추었다고 한다.
조선 시대 1649년(인조 27)에 벽암각성(碧巖覺性)이 중창했으며, 동학농민운동 당시 암자의 일부가 소실된 것을 1899년(광무 3) 포응이 다시 이룩했다. 6·25전쟁 때 빨치산 소탕 작전으로 일부 건물을 제외하고 불타버렸다. 1960년에는 대적광전·약사전·정각암(正覺庵)·요사채 등 4동의 건물에서 3, 4명의 승려가 수도하고 있었는데, 조계종 제11대 종정인 법전(法傳)이 와서 크게 중수하여 20여 동이 넘는 큰 가람으로 변모했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적광전·약광전·수도선원·관음전·나한전·노전·정각·서전(西殿)·낙가전(洛伽殿) 등이 있다. 유물로는 약광전의 석불좌상(보물 296), 삼층석탑(보물 297) 2기, 석조비로자나불좌상(보물 307) 등과 함께 창건 당시의 것으로 보이는 기단과 초석이 있다.
이 가운데 석불좌상은 도선이 조성한 것으로 전하며, 금오산 약사사(藥師寺), 직지사 삼성암(三聖庵)에 있는 약사여래좌상과 함께 방광했다고 하여 삼 형제 불상으로 부른다. 머리 부분에 보관(寶冠)을 장식했던 흔적이 있는데 이는 약왕보살의 머리에 금속관을 설치했던 것으로서 흔치 않은 예이다.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은 경주시의 석굴암 불상보다 80cm 작으며 9세기에 거창군 가북면 북석리에서 제작되었다고 한다. 당시 이 불상의 운반에 고심하고 있을 때 한 노승이 나타나 불상을 등에 업고 이 절까지 운반했는데, 절에 다 와서 칡덩굴에 걸려 넘어지자 산신령을 불러 크게 꾸짖고 칡덩굴을 모두 없애게 했다. 그리하여 지금까지 이 절 근처에는 칡덩굴이 없다는 설화가 전한다.
또 삼층석탑은 이 절터가 마치 옥녀(玉女)가 베를 짜는 모습의 명당터라 하여 베틀의 기둥을 상징하는 뜻으로 두 탑을 세웠다고 한다. [검색창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