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탐험사 100장면 70 - 사하라를 최초로 동서 횡단하다 사하라 사막 9,000km를 혼자 걸은 필리프 프레이(199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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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jy9713
2024.04.27. 17:44조회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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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탐험사 100장면
사하라를 최초로 동서 횡단하다
사하라 사막 9,000km를 혼자 걸은 필리프 프레이(1990년)
요약 1990년, 필리프 프레이가 사하라 사막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데 도전했다. 프레이는 가능한 한 사막에 오래 머무르고 여행하며 혹독한 자연 환경과 마주쳐 이를 극복하기를 바랐다. 그는 아홉 달 동안 9,000km를 혼자 걸어 도전에 성공했고 1992년에 프랑스 탐험항해클럽이 주는 탐험대상을 받았다.
사하라 대이동
1991년 인류 사상 처음으로 홍해에서 대서양까지 사하라 사막을 동서로 횡단한 필리프 프레이.
영국의 래널프 파인스가 1979년 지구를 세로로 돌겠다고 하자 찰스 왕세자의 입에서 나온 첫마디는 "진짜로 미쳤군!"이었다.
요트로 남극 대륙 둘레를 돌거나, 북극점까지 혼자 걸어서 가거나, 노를 저어 보트로 대양을 항해하는 행위를 '미쳤다'는 말이 아니면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그런데도 모험가들은 미친 짓을 할 대상과 영역을 끊임없이 넓혀 오고 있다. 1991년 한 젊은이가 일곱 나라를 지나 사하라 사막을 동서로 횡단한 것도 그 중 하나이다.
사하라 사막을 남북으로 가로지른 사람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아랍인과 무어인들은 수 세기 전부터 대상(隊商)을 이루어 지중해 연안과 사하라이남 사이를 오갔다. 유럽인1)이 처음 사하라 사막을 건넌 해는 1823년이다.
그들이 걸은 거리는 1,700~2,000km 정도였다. 반면에 사하라를 동서로 횡단하는 거리는 직선 거리로도 짧아야 4,800km, 길면 5,600km 가까이 되므로 남북 종단에 비해 두 배 반쯤 더 멀다. 그때문에 홍해에서 인도양까지 사하라 사막을 가로지른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데 이 길을 이리 구불 저리 구불 장장 9,000km나 걸어서 아홉 달 만에 통과한 젊은이가 나타났다.
1990년 9월 4일 서른세 살 먹은 프랑스 인류학자 필리프 프레이는 이집트의 홍해 연안 마르사 알람 마을에서 이 대장정을 시작했다.
"낙타 2마리를 무릎 꿇리고 식량과 물 50리터, 새트내브2)를 싣고 나니 문득 겁이 났다. 수년간 사하라를 드나들며 적응 훈련을 했지만, 막상 대서양이 6,000km 너머에 있다고 생각하니, 이 여행은 아무래도 이룰 수 없는 꿈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프레이는 걸음을 떼었다. 아스완 댐 근처에 이르니 샤크 미사일 발사대가 수없이 배치되어 전쟁(걸프전)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겨우겨우 수단 국경에 이르니 그쪽은 더했다(수단은 이라크편이었다). 공습 경계 발령이 난 데다, 그에게는 입국사증(비자)도 없었다.
프레이는 거기서 포기할까 생각하기도 했지만 마음을 고쳐 먹고, 사흘동안 밤을 틈타 수단 사막으로 들어서는 데 성공했다.
리비아 사막의 일부인 수단 사막은 풀 한 포기 없는 모래 벌판이 1,300km나 펼쳐진다. 지도에 샘이라고 표시된 곳은 셋뿐인데, 그나마 하나는 완전히 말랐다. 나머지 두 군데에서도 두더지처럼 땅을 파야, 모세관 작용에 의해 실낱같이 솟아 나오는 물을 받을 수 있었다. 한나절을 받아서 겨우 50리터를 채웠다. 하지만 물이 전부는 아니다.
"물이 많아도 낙타가 없으면 그것을 가지고 갈 수가 없다. 만약 내가 낙타에게 먹일 사료를 남들이 하는 것보다 훨씬 많이 준비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목이 말라 죽었을 것이다. 낙타가 굶주리고 지쳐서 쓰러지면, 그 다음은 사람 차례이다."
흔히 혼자서 무인 지대를 여행하는 사람들이 제일 견디기 어려웠다고 호소하는 것은 '고독'이다. 그러나 프레이에게 고독이란 지옥과 같은 뜨거움에 비하면 사치였다. 게다가 그가 지나야 하는 나라마다 정정(政情)이 어수선해 신변의 안전을 장담할 수 없었다. 차드는 내전 상태였고, 니제르에서는 투아레그족이 끊임없이 정부군을 괴롭혔으며, 말리의 대통령은 반정부 시위대에 타도되었다.
프레이는 수단 북부를 거쳐 차드로 향했다. 그냥 가기에도 어려운 길을 리비아군과 수단군의 눈을 피해 가느라 더 더디고 힘들었다. 지도에 우물 표시가 된 곳에는 거의 우물이 없었다.
우물은 자꾸 쓰지 않으면 마른다. 전쟁이 일어나 사람이 끊기면 우물도 사라진다. 그런 우물을 만날 때마다 그를 유혹한 것은, 어느 쪽 군대에든 잡혀가고 싶다는 것이다. '최소한 물은 먹여 주겠지.'
프레이는 차드 국경을 넘은 지 얼마 안되어 바오빌리아의 국경수비대 근처에서 실신 상태에 빠졌다. 그는 차드의 수도인 은자메나로 수송되어 니제르로 추방될 운명이었으나, 몰래 수비대를 빠져나와 사막으로 돌아갔다. 결과적으로 물은 얻어 먹은 셈이다.
이 젊은 인류학자는 가능한 한 사막에 오래 머무르고 멀리 여행하면서, 가장 혹독한 자연 환경과 마주쳐 이를 극복하기를 바랐다. 그는 사하라 사막에서도 제일 자연 조건이 나쁘다는 리비아 사막과 니제르의 테네레 사막이 그러한 기대를 충족시켜 줄 것으로 기대했다. 실제로 이 두곳을 횡단하는 일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그러나 여행의 마지막 보름간 그가 모리타니의 아클레 사막에서 겪은 일에 비하면 작은 고생이었다.
아클레의 모래 언덕들은 20년마다 100km 넘게 이동하면서 완전히 다른 지형으로 바뀐다. 물론 프레이가 가진 지도는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낙타들도 끝없는 모래 언덕을 이곳저곳 헤매다 완전히 지쳐 버렸다.
프레이의 머리 속에는 50km 떨어진 곳에 있는 우물까지 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우물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과, 우물을 찾아도 거기에 물이 있을까라는 두 가지 생각말고는 어떤 것도 그의 머리 속에 틈입할 수가 없었다.
며칠 후 프레이는 또 한번 지도에게 배신 당했다. 우물은 없었다. 그가 낙타의 피와 위(胃)에 든 물을 마시려고 낙타의 목을 칼로 찌르려던 순간 기적같이 유목민 두 사람이 나타났다. 그들은 20km 떨어진 곳에 우물이 있다고 알려 주었다.
다시 행군. 36시간 동안 쉬지 않고 걷는 최악의 행군. 그는 안염(眼炎)에 걸려 이틀 동안 눈을 감은 채로 걸었다. 그리고 끝내 물을 얻었다.
1991년 6월 4일 모리타니의 누악쇼트에 도착한 프레이는, 멀리 일직선으로 뻗은 해변을 보자 미친 듯이 달려가 물속에 뛰어들었다.
"그 날은 내 일생에서 최고로 아름답고 고귀한 날이었다. 아홉 달 동안 나는 완전히 미쳐 있었다."
9,000km를 걷는 동안 '사막의 배'라고 불리는 낙타조차 12마리나 바뀌었는데, 사람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 혼자였다.
프레이는 1992년 프랑스 탐험항해클럽이 주는 탐험대상을 받았다.
▼ 우리나라의 관련 기록은 * 1996년 / 한국사하라횡단탐사대 도보(최종렬) · 차량(오광석 외 2명) 두 팀이 사하라 사막을 서에서 동으로 횡단(1995. 11. 10~1996. 6. 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