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4142
2월22일[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연중 제6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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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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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IecmI5UxVmY
[작은형제회 신우창 임마누엘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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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그 어떤 파도에도 흔들리지 않는 든든한 반석!>
오늘도 예수님의 복음 선포 여정은 계속됩니다. 벳사이다를 떠나 카이사리아 필리피 지방에 도착하신 예수님께서는, 생각만 해도 마음 든든한 수제자, 언제나 듬직한 반석 같고 큰 바위 같은 제자 베드로를 축복하십니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 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마태 16 17-18)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막중한 임무, 엄청난 역할을 수여하십니다.
“또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에게 주신 것이 무엇인지? 정말이지 엄청난 권한을 부여하셨습니다. ‘하늘 나라의 열쇠!’ 하늘 나라의 열쇠를 쥐고 있다는 것은, 세상 전부를 쥐고 있다는 말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사실 베드로 사도는 존재 자체로 우리 후배 신앙인들에게 큰 위로와 희망을 선물로 주시는 분입니다. 그분은 하늘 나라의 열쇠를 손에 쥔 분으로, 그 어떤 시련과 박해의 칼날 앞에서도 눈 한번 까딱하지 않았던 분, 넓직한 반석같이 든든한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베드로 사도에게도 한때 치명적인 과오, 치욕적인 흑역사가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참 만남과 더불어 참 제자가 되기 전, 그는 여러 측면에서 미성숙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베도로 사도의 성격은 과격했고 불같았으며, 마치 럭비공 같아 어디로 튈줄 몰랐습니다. 때로 조용히 있었으면 50점이라도 딸텐데, 괜히 먼저 나서다가 스승님으로부터 호된 질책을 받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마침내 수난의 시기, 그는 스승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며 배반하는, 결정적 과오를 범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인재 양성의 귀재이신 예수님의 탁월하고 예술적이며 인내로운 단련에 힘입어, 베드로 사도는 그 어떤 풍파에도 흔들리지 않는 참 제자로 거듭납니다. 작은 바람에도 쉼없이 흔들리던 나약한 갈대 같았던 베드로는 그 어떤 시련과 고초 앞에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큰 바위로 재탄생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베드로 사도는 매일 새벽닭이 울면 일어나 ‘수제자 배반 사건’을 떠올리며 크게 울었답니다. 낮 동안에도 틈만 나면 송구한 마음에 울고 다녔답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의 눈자위 주변은 늘 붉게 물들어있었으며, 짓물러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그 어떤 파도에도 흔들리지 않는 든든한 반석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베드로 사도는 오늘 우리에게 알려주고 계십니다.
우리도 이왕이면 작은 모난 돌맹이가 아니라, 크고 든든한 반석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겠습니다. 주님께서 보시고 기뻐하시고 흡족해하실 반석, 세파에 지친 사람들이 편히 앉아 쉬고 갈 수 있는 그런 반석이 되기 위해, 뾰쪽하고 모난 부분들을 갈고 또 갈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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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사람은 대부분 자기 잘난 맛에 사는 것 같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다른 사람이 저를 싫어하는 것이 싫어서 모든 사람의 마음에 들도록 행동하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대체적으로는 인간관계가 좋은 편이었습니다.
그러나 살다보니 내가 아무리 잘 해 주어도 나를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이렇게 잘 해 주는데 왜 나를 싫어하지?’ 그렇게 생각하며 성경말씀대로 나를 미워하는 사람까지 사랑하려고 부단히 애를 썼습니다.
나의 사랑이 부족한 것 같아서 모든 에너지의 98%를 그 사람을 위해 썼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결국 저를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노력 끝에 이런 것을 느꼈습니다. ‘그 에너지를 다른 사람을 위해 썼었다면...’
오늘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절개 없고 죄 많은 이 세대에서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이는 다시 말하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 나도 너희를 사랑하지 않겠다.’라는 말과 별반 다름이 없습니다. 그래서 끝까지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은 영원한 고통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들을 사랑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본질이 사랑이신데 어떻게 사람이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당신도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으실 수 있을까요?
어느 날 포장마차에서 친구와 술을 한 잔 하고 있었습니다. 남자들이 몇 더 들어왔는데 이야기하는 것을 들어보니 다른 지방에서 올라온 조직폭력배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술 마시는 것은 참으로 재미있었습니다. 영화에서나 보아오던 장면들이었습니다.
보스는 포장마차 아주머니와 이야기를 하면서 가끔 소주병을 집어 들었습니다. 그러니 옆에 있던 급이 낮은 사람들은 얼른 자신들의 술잔을 비웠습니다. 보스는 그냥 보지도 않고 아무 곳에 술을 부었습니다. 졸병들은 술을 따르는 곳에 재빨리 술잔을 갔다대어 술을 받았고 넘치기 전에 약간 잔을 들어 올려 따르는 것을 멈추게 했습니다.
그렇게 여러 차례 보스는 다른 곳을 보며 본인이 원하는 곳에 술을 부었고 그 때마다 졸병들이 잔을 갔다대며 술을 한 방울도 바닥에 흘리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보스가 주는 술을 흘릴 수 있겠습니까?사회에서도 웃어른이 따라준 술을 다른 곳에 붓거나 버린다면 큰 실례가 됩니다.
은총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은 은총을 낭비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은총은 성령님의 선물이고 거룩하고 고귀한 것입니다. 그것들을 아무에게나 주실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은총을 받을 만큼 자신을 비운 사람에게 그 비운 만큼만 은총을 주십니다.
은총은 사랑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그 사람이 받을 만큼만 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결국 사랑을 흘려버리거나 낭비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인간이 받아들을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사랑을 주실 준비가 되어있지만 그 사랑을 왜 받아주지 않느냐며 그 한 사람에게 온 사랑을 쏟아 붓지는 않으십니다. 더 합당한 사람을 더 사랑해주십니다.
따라서 우리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 나를 좋아하도록 모든 에너지를 그 사람에게 쏟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 사람이 준비가 될 수 있도록 기도해주며 받아들이는 만큼만 사랑할 수 있습니다. 나머지 에너지는 나를 원하는 사람에게 더 사용하는 것이 좋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사람을 사랑하는 것과 그 사람이 나를 사랑하도록 모든 에너지를 쏟는 것과는 다릅니다. 사랑은 하되 그 사람을 위해 나의 소중한 에너지를 소진할 필요는 없습니다. 내가 사랑해야 할 많은 사람이 주위에 있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우리도 우리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 때문에 그 사람에게 묶이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냥 내버려두십시오. 받아들이겠다면 언제든 사랑할 준비를 하되 그 사람에게 묶여서는 안 됩니다. 그냥 내버려두십시오. 그것은 스스로 자초한 일이고 우리가 모든 사람에게 사랑을 받아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무엇이든 좋은 것은 그 사람이 받을 만큼밖에는 줄 수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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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아침 산책길에 가끔 코요테와 같은 동물을 만납니다. 보통은 서로 갈 길을 가기에 별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한번은 저를 보더니 멈추어서 길을 가지 않았습니다. 저도 순간 당황해서 멈추었습니다. 옆을 보니 나뭇가지가 있어서 손에 잡았습니다. 그러자 코요테는 가던 길을 갔고, 저도 나뭇가지를 내려놓고 저의 길을 갔습니다. 문득 생각이 들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저를 향해 다가오는 유혹의 코요테가 많았습니다. 시기, 질투, 욕심, 게으름, 분노, 이기심의 코요테입니다. 저는 아무런 준비 없이 그런 유혹의 코요테를 만났고, 쉽게 넘어졌습니다. 유혹의 코요테를 몰아낼 영적인 나뭇가지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가장 좋은 나뭇가지는 기도입니다. 그리고 말씀과 나눔이 있습니다. 기도, 말씀, 나눔의 나뭇가지가 있다면 아무리 강력한 유혹의 코요테가 저에게 다가와도 쉽게 이겨낼 수 있습니다. 우리를 유혹하는 유혹의 코요테가 우리를 보고 무서워서 자기 갈 길을 가도록 영적인 나뭇가지를 준비하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사는 지구에는 푸른 녹지와 사막이 있습니다. 녹지는 좋고, 사막은 나쁜 것 같지만 사실 우리가 사는 지구에 사막은 필요하고도, 소중한 존재라고 합니다. 사막의 뜨거운 열기 덕분에 지구의 대기는 흐를 수 있다고 합니다. 사막의 먼지는 바람을 타고 멀리 아마존까지 도달한다고 합니다. 사막의 먼지에 있는 미네랄 성분이 아마존 나무들을 울창하게 한다고 합니다. 사막에는 많은 지하자원이 있어서 우리의 삶에 도움을 준다고 합니다. 지구에 사막이 없고 모두 울창한 녹지가 된다면 좋겠지만 그렇게 되면 지구에 큰 문제가 발생한다고 합니다. 지금 대기 중의 산소는 20%인데 만약 사막이 모두 녹지가 되면 산소의 농도가 40%까지 높아진다고 합니다. 그렇게 되면 지구에는 엄청난 재앙이 초래될 수 있다고 합니다. 지구에 그런 환경이 한 번 있었는데 그때 엄청난 화재가 발생했고,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석탄, 석유는 모두 그때 화재로 인해서 생겼다고 합니다. 좋은지, 나쁜지 결정하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오늘은 베드로 사도의 자리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생전에 베드로 사도는 자신의 자리를 내세운 적이 없습니다.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였고, 동생 안드레아의 손에 이끌려 예수님을 만난 뒤로는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였습니다. 그런 베드로를 교회는 사도들의 으뜸이라고 생각하였고, 기꺼이 베드로에게 사도좌의 권위를 내어주었습니다. 그것은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을 사랑하였고, 죽기까지 예수님의 뒤를 충실하게 따랐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3가지를 약속하셨습니다. 이것은 베드로의 능력과 재능에 따라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주시는 선물이었습니다. 첫째,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교회를 맡겨 주셨습니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에 따라서 우리는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라고 고백합니다. 베드로 사도를 계승하는 교황은 또한 예수님으로부터 위임받은 권한으로 교회를 이끌어 가고 있습니다.
둘째,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천국의 열쇠’를 주셨습니다. 천국은 죽어서 가는 곳이 아닙니다. 천국은 지금 이곳에서 이미 시작된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고, 아껴주며, 나누는 이곳이 이미 천국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은 베드로에게 천국의 열쇠를 주신 것이 아니고, 살아있는 베드로에게 천국의 열쇠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셋째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주셨습니다.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의 조건으로 용서를 이야기하셨습니다. 용서가 없는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권위는 주장하고 내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권위는 유리와 같아서 쉽게 깨지고, 상처를 받기 쉽습니다. 진정한 권위는 아낌없이 내어주고, 희생하는 것입니다. 그런 권위는 불의와 폭력 앞에서 위축되지 않으며 어둠 속에서 더욱 빛나기 마련입니다.
나의 자리가 없다고 생각하신다면, 나의 권위를 알아주지 않는다면 그것은 참된 권위가 아닙니다. 나의 체면과 나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권위일 뿐입니다. 오늘 베드로 사도는 참된 권위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 가운데에 있는 하느님의 양 떼를 잘 치십시오. 그들을 돌보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자진해서 하십시오. 부정한 이익을 탐내서 하지 말고 열성으로 하십시오. 여러분에게 맡겨진 이들을 위에서 지배하려고 하지 말고, 양 떼의 모범이 되십시오. 그러면 으뜸 목자께서 나타나실 때, 여러분은 시들지 않는 영광의 화관을 받을 것입니다.” 사랑과 용서, 나눔과 희생으로 사라지지 않는 우리들의 자리를 만들어 가야 하겠습니다. 그 자리가 푸른 녹지라면 열매를 맺으면 좋습니다. 그 자리가 뜨거운 사막이라면 정화와 단련의 기회로 만들면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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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삼의딸들수녀회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님]
예수님께서는 특별히 사랑하시던 제자도, 첫눈에 거짓 없다고 칭찬하시던 제자도, 독립운동에 투신하던 제자도 아닌 어부 출신의 단순하고 우직하며 열정적인 베드로에게 교회를 맡기십니다. 오늘 복음은 그 이유를 그리스도에 대한 그의 뚜렷하고 분명한 신앙 고백에서 찾는데, 예수님께서는 그 신앙이 바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가르침을 받은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교회의 직무 수행에는 지식이나 인간적 능력이 아니라 하느님께 이끌리는 신앙이 무엇보다 먼저 요구됩니다. 그래서 지금도 교회에는 사목의 큰 책임을 맡는 사람에게 먼저 신앙 고백을 요구하는 전통이 이어져 옵니다.
이미 초세기 교부들이 인정하고 제1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선언하였으며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도 확인한 교황의 수위권은 하느님 백성의 ‘친교’인 교회 일치의 중심이자 주교단의 머리로서 가지는 권한입니다. 교황께서 국제 사회에서 바티칸 시국의 수반이시기는 하지만 베드로에게서 이어받은 직무는 행정이나 조직 운영, 또는 정치를 위한 것이 아니며 본질적으로 하느님 백성을 돌보는 일 곧 사목을 위한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당신을 세상에 널리 퍼져 있는 교회의 본당 사제요 로마의 주교라고 즐겨 부르시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베드로 사도는 자신을 바로 그러한 목자로서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 그분의 영광에 참여할 사람으로 소개하고, 다른 목자들에게 자진해서, 열성으로, 모범으로 양 떼를 치라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이는 교회 안에서 공동체를 돌보는 임무를 맡은 모든 이에게 해당하는 말일 것입니다. 그들을 위하여, 특히 교황님을 위하여 오늘 더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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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6,13-19: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준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필립보의 카이사리아 지방으로 가셨다. 예수께서는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13절) 물으신다. 이렇게 물으신 것은 유대인들의 생각과 제자들의 생각을 대비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제자들의 생각을 먼저 묻지 않으셨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15절). 그동안 주님과 함께 있었고, 기적을 보았으며 주님과 함께 기적을 행한 제자들의 답은 무엇이었을까? 베드로는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16절)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이라 부름으로써, 베드로는 그리스도께서 생명 자체이시므로 죽음은 그분에게 아무런 권한도 없음을 나타낸다. 육신은 나약하여 죽었지만, 다시 살아났다. 그 안에 거하시는 말씀을 죽음은 가두어 둘 수 없었기 때문이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18절) 주님께서는 이 반석이라는 신앙 위에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하셨다. 가장 먼저 이 신앙을 고백한 사람을 이 이름으로 부르시며, 장차 그의 것이 될 권한에 대해 말씀하셨다. 베드로의 고백은 바로 우리의 고백이며, 우리의 공통적인 고백을 베드로가 가장 중요시할 것이다. 그러기에 베드로가 갖는 열쇠는 바로 교회가 갖게 되리라는 말씀이다. 그리스도는 결코 흔들리지도 닳아 없어지지도 않는 바위이시다. 그래서 베드로는 흔들리지 않는 교회의 확고한 믿음을 나타내는 이 이름을 예수께로부터 받은 것이다.
나는 예수님을 누구라고 고백할 수 있는가? 나에게 있어 그분은 누구인가? 어떤 존재인가? 이 질문을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해야 하며, 그 답을 각자의 생활과 믿음에서 각자가 발견하고 고백해야 한다. 다른 사람이 알려준 지식으로서가 아니라 나 자신 안에서 우러나오는 답이어야 한다. 베드로 사도좌 축일을 지내는 의미는 바로 당신 자신을 “종들의 종”이라고 부르면서 교회를 위하여 봉사하시는 교황을 중심으로 온 교회가 더욱 일치하고 그분이 더욱 많은 봉사를 잘하실 수 있도록 기도하는 데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베드로 사도가 당신의 신앙고백으로 이러한 직책을 가지셨고 하느님과 교회를 위하여 일생을 바쳤다면, 이제 우리도 올바른 신앙고백과 함께 삶을 이어가고, 언제나 하나인 교회를 위하여 기도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주님께서 세우신 교회의 으뜸, 교황님께서 하느님의 대리자로 교회를 올바르게 인도하도록 기도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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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반석’은 가장 아래쪽에서 전체를 떠받치는 일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시몬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 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또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 16,15-19)
1) 예수님께서 교회를 세우시고, 베드로 사도를 교회의 반석으로 삼으신 일은, 당신의 구원사업에 인간들이 능동적으로 참여하기를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구원사업은 인간들을 위한 일입니다. 그러니 인간들이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옳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대로 수동적으로 따라가기만 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입니다.
-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마르 2,27)라는 예수님 말씀은, 교회에 대해서도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사람이 교회를 위하여 생긴 것이 아니라, 교회가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입니다.
- 예수님은 ‘나를’ 구원하려고 오신 분입니다. ‘내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나 자신’이 구원받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나의’ 신앙생활은 바로 ‘나 자신’을 위한 일입니다. 예수님을 위해서도 아니고, 교회를 위해서도 아닙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나 자신을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바로 그렇게 하기를 바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가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고 교회나 예수님께 생색낼 것도 없고, 자랑할 것도 없습니다. 또 신앙생활을 잘한다고 시상식을 할 이유도 없습니다. 선교활동도 마찬가지인데, 사실 선교활동도 일차적으로는 ‘나 자신의 구원’을 위한 일입니다.
이웃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사랑 실천은, 사실상 ‘나 자신을 위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교활동을 잘했다고 교회가 시상식을 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기도 하고, 잘못된 일이기도 합니다. 나중에 예수님께서 칭찬해 주시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2)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를 교회의 ‘지붕’으로 삼으신 것이 아니라, 교회의 ‘반석’으로 삼으셨습니다. ‘반석’은 건물의 가장 밑에서 전체를 떠받치는 일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가장 높은 자리를 주신 것이 아니라, 전체를 섬기는 가장 낮은 자리를 주셨습니다.
“민족들을 지배하는 임금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민족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자들은 자신을 은인이라고 부르게 한다. 그러나 너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가장 어린 사람처럼 되어야 하고 지도자는 섬기는 사람처럼 되어야 한다. 누가 더 높으냐? 식탁에 앉은 이냐, 아니면 시중들며 섬기는 이냐? 식탁에 앉은 이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사람으로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22,25-27)
여기서 “섬기는 사람처럼 되어야 한다.”는,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입니다. 사도들뿐만 아니라, 교회의 모든 직책은 ‘섬기는’ 직책입니다. 그것을 잊어버리고 군림하고 권세를 부린다면, 그것은 주님의 뜻을 거스르는 죄를 짓는 일이고, 사랑을 거스르는 죄를 짓는 일이기도 합니다.
제자들은(신앙인들은) 예수님보다 더 높아질 수 없습니다. 예수님보다 더 낮아져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가장 낮은 자리에서 섬기는 일을 하시니, 직책을 맡은 이들은 예수님이 계신 그 자리로 내려가서 섬기는 일을 실행해야 합니다.
3)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다음에 베드로 사도를 만나셨을 때, 당신의 양들을 잘 돌보라고 특별히 당부하셨습니다. “그들이 아침을 먹은 다음에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어린양들을 돌보아라.’"(요한 21,15)
여기서 예수님 말씀은 분명히,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한 일과 관련이 있는데, 그의 죄를 용서하신다는 말씀이기도 하고, 그를 반석으로 삼으신 일을 취소하시지 않았음을 확인해 주신 말씀이기도 하고, 그에게 ‘보속’을 주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가 실천해야 할 보속은 예수님의 양들을 돌보는 일입니다. ‘돌본다.’는 말은, ‘군림하고 권세를 부린다.’가 결코 아니고, ‘섬김’을 통해서 구원의 길로 인도한다는 뜻입니다. 한 가지 더 생각해야 할 점이 있는데, 베드로 사도 자신도 ‘예수님의 양들’에 포함된다는 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반석으로 임명하신 베드로 사도를 잘 섬기라고 양들에게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양들은 목자들을 섬기는 존재들이 아니라, 목자들의 인도를 받아서 구원의 길을 걷는 존재들입니다.>
목자들은 양들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신(요한 10,15) 예수님을 본받아서 자신들에게 맡겨진 양들을 잘 섬겨야 하고, 양들을 위해서 목숨을 바칠 각오를 해야 합니다.
만일에 그것을 잊어버리고 ‘삯꾼’처럼 살면(요한 10,12-13), 예수님께 죄를 짓는 것이 되고, 또 자기 자신의 구원에 아무 쓸모가 없는 존재가 되어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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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잇는 나>
마태오 16,13-19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다)
예수님께서 카이사리아 필리피 지방에 다다르시자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제자들이 대답하였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예레미야나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시몬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시몬 바르요나,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 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또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잇는 나>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 16,19)
당신과 나
곱게 이으신
하느님께서
당신 닮은
잇는 나
되라고 하시니
하늘과 땅
땅과 하늘
잇는 나
일 수 있기를
하느님과 나
나와 하느님
잇는 나
일 수 있기를
하느님과 벗
벗과 하느님
잇는 나
일 수 있기를
벗과 나
나와 벗
잇는 나
일 수 있기를
벗과 벗
벗과 벗
잇는 나
일 수 있기를
그리하여
나 있음에
모두 이어지기를
하느님의 믿음대로
하느님의 희망대로
하느님의 사랑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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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당신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오늘은 그리스도께서 베드로 사도를 선택하여 지상의 대리자로 삼으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베드로 사도를 교회의 최고 목자로 공경하는 이날 사도들의 후계자들과도 소통할 수 있는 은혜가 함께하길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마태 16,13) 하고 물으시자, 제자들이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예레미야나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하고 대답하자“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태 16,15) 하고 물으셨습니다. 이 물음은 남들이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내가 생각하고 또 받아들이는 사람의 아들’이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너희에게 내가 어떤 존재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이렇다 저렇다 하는 것에도 귀 기울여야 하지만, ‘나의 소신과 믿음’이 더 중요합니다. 결국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 이십니다.”(마태 16,16)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이 고백이 베드로의 고백이기도 하지만, 오늘 나의 고백으로 승화되어야 합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하는 질문 앞에서 ‘저는 당신의 무엇입니다.’ 하는 답을 해야 합니다. 성 마더 데레사 수녀님은 자신을 ‘주님의 손에 쥐인 몽당연필’로 표현하셨습니다. 연필을 사용하는 것은 주인 몫입니다. 설사 부러지더라도. 예수의 데레사 성녀는 환시를 통해 만난 아기 예수님의 ‘너는 누구냐?’는 질문에 ‘나는 예수님의 데레사’라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누구냐?’고 묻는 데레사의 질문에 예수님께서는‘데레사의 예수’라고 답해 주셨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는 물음에 “‘사랑’이십니다.” 그리고 “저는 당신의 연장입니다.” 하고 답합니다. 저의 삶의 여정에 많은 허물과 잘못, 죄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용서와 자비를 베풀어 주신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앞으로도 그러실 것이고 저도 끝까지 주님의 도구로 살고 싶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그분의 무엇인지를 생각할 수 있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만큼 주님께서 이루고자 하시는 소명에 귀 기울이고 복음적인 삶에 결코 소홀함이 없기를 희망합니다. 텔레비전 시청, 핸드폰 보는 시간을 10분만 줄여 성경을 봉독한다면 하루의 삶이 달라질 것입니다. 일반 잡지를 보는 시간 중 5분을 교회 서적을 읽는 시간에 할애하거나 묵주기도 1단을 봉헌한다면 기도의 맛을 느끼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육신을 위하는 시간 못지않게 영적인 몫을 챙겨야 합니다.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와 더불어 오늘을 변화와 쇄신의 날로 삼고 기뻐하시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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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는 그리스어로 ‘구세주’라는 뜻입니다. 히브리어로는 ‘메시아’입니다. 메시아는 ‘기름 부음 받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기름 부음 받은 사람’이라는 말이 구세주란 의미를 지니게 된 것은 이스라엘의 역사와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는 강대국이었지만, 그 후에는 쇠락의 길을 걷다가 마침내 기원전 587년 바빌론 침공을 받아 멸망합니다. 그리하여 약 50년간 바빌론 유배를 가게 되었습니다. 유배가 끝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나라를 재건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주변 강대국의 속박을 받으며 겨우 명맥을 이어갑니다. 이런 와중에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의 주님인 하느님께 희망을 두면서 그분께서 언젠가는 구원자를 보내어 선택받은 민족인 자신들을 구원해 주리라 믿었습니다. 이러한 기대를 하면서 미래의 구원자에 대해 상상하게 되었는데, 어떤 이들은 다윗과 같은 강력한 임금으로, 어떤 이들은 사제와 같은 인물로, 또 다른 이들은 위대한 예언자와 같은 인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임금과 사제, 예언자는 모두 머리에 기름 부음을 받아 임명되었고, 이런 공통점에 근거해서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보내주실 미래의 구원자를 ‘기름 부음 받은 사람’, 곧 ‘메시아’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베드로의 고백은 예수님의 신원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것은 예수님은 여러 예언자처럼 역사의 인물이기는 하지만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인물임을 인정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 사람 중의 하나가 아니라 으뜸 중의 으뜸이라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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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최정훈 바오로 신부님]
교회는 오늘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을 기념합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교회의 반석으로 삼으시고, 베드로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와, 무엇이든 묶고 푸는 권한을 주셨습니다. 그 뒤 베드로의 계승자들은 하느님 백성 전체에 대한 특별한 봉사직을 수행합니다.
가톨릭 공동체 안에서 로마 주교의 수위권의 역할은 이미 2세기부터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와 리옹의 이레네오 같은 교부들에게 인정을 받았으며,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다시 확인되었습니다. “교회의 친교 안에는 고유한 전통을 지니는 개별 교회들이 당연히 존재한다.
그러나 베드로 교좌의 수위권은 온전히 보존된다. 사랑의 모든 공동체를 다스리는 베드로 교좌는 정당한 다양성을 보호하고 또 동시에 개별 요소들이 일치에 해를 끼치지 않고 오히려 일치에 이바지하도록 감독한다.”(교회 헌장 13항)
베드로 사도좌는 단순히 인간적 관점에서 제도를 효율적으로 운영하도록 만들어진 직무가 아니라, 그 안에 깊은 영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일치의 표지이자 목자의 구실을 하는 베드로좌는 당신 교회를 하나로 모아 구원으로 인도하시려는 하느님의 목자적 사랑을 보여 주는 특전적 표지입니다.
하느님 백성 전체를 돌보아야 하는 교황의 어깨가 얼마나 무거울지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급변하는 세상에서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의 구실을 할 수 있도록 전망을 제시하고, 하느님의 백성이 그 길을 담대히 걸어갈 수 있도록 이끌고 독려하여야 하는 교황의 직무가 한 인간이 맡기에 얼마나 크고 버거운 것인지 묵상하게 됩니다.
세상의 풍파와 도전에도 교회가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길을 갈 수 있도록 굳건한 반석의 구실을 하는 교황께 주님의 은총이 함께하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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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교회는 봉사자 하나 하나가 모인 제도로서의 공동체입니다. 여기에는 어쩔 수 없이 지도자가 있어야 하고 모범적인 원로들이 있어야 합니다. 베드로 서간에서 저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을 전합니다. “나는 여러분 가운데에 있는 원로들에게 같은 원로로서, 또 그리스도께서 겪으신 고난의 증인이며 앞으로 나타날 영광에 동참할 사람으로서 권고합니다. 여러분 가운데에 있는 하느님의 양 떼를 잘 치십시오. 그들을 돌보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자진해서 하십시오.”(1베드 5,1-2)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당신을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라고 질문하시고 이번에는 ‘제자들이 당신을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라고 이어서 질문하십니다.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께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 16,16)라고 대답하지요.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17절)
예수님의 말씀은 베드로가 정답은 말하기는 했는데 사실은 하느님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신 것이라고 말씀하시지요. 그리고 베드로에게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또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18-19절)
예수님께서는 미래의 사도들로 이어지는 교회를 내다 보시고 말씀하신 것이지요. 그러나 교회는 세속에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세상의 논리와 때로는 그릇된 그늘에서 자유롭지 못할 때가 있기도 하고 또 그 안에서 선의의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는 일도 벌어지기도 합니다. 아무래도 세상 안에서의 교회는 제도 위에 있어서 실망스런 말들이 오고 가기도 합니다.
‘아니, 교회는 왜 돈 타령이야?’, ‘저 사람, 정말 신앙인 맞아?’ ‘저 사제나 수도자 독선을 좀 봐’,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세상 사람들보다 더 하면 했지, 덜 하지는 않지.’ 등등의 말이 수 없이 교회 주위를 맴돌기도 하지요.
그렇다고 교회가 세상을 떠날 수는 없습니다. 그래도 스승이신 예수님께서는 제자 중에 베드로를 으뜸으로 삼아 천국의 열쇠를 주시고 양떼의 교회를 이끌어 갈 수 있는 권한까지 주십니다.
인간적인 베드로를 살펴 볼까요? 베드로는 스승의 신원에 대해 정답을 말하기도 하지만, ‘사탄’이라는 심한 말씀을 들어야 했습니다. 자신의 생명을 바치면서까지 주님을 따르겠다고 하면서도 세 번이나 주님을 모른다는 이율배반적인 연약함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베드로는 주님께 대한 사랑은 남다르게 깊습니다.
스승께서 말씀하신대로 부활 하신 승천하신 다음에 양떼는 베드로에게 맡겨집니다. 그는 그의 서간에서 원로들에게 믿음의 표양을 간직하며 기꺼이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어야 하며 주님께서 맡기신 양떼를 잘 돌보아야 한다고 당부합니다.
시편 저자는 변함이 없으신 하느님을 ‘바위’ ‘성채’에 비유하며 노래합니다. 주님께서도 시몬에게 바위라는 이름 ‘베드로’라는 이름을 새롭게 주십니다. 그리고 베드로에게 ‘너는 베드로이다’라고 말씀하시며 반석, 바로 ‘게파’ 베드로를 기초로 삼아 교회를 세우십니다. 그래서 교회는 초대 교황님으로 베드로를 삼아 역사를 이어오고 있습니다.
베드로 이후 계승되신 12분의 교황님들(64년에서 189년)이 계승되며 내리 순교하셨습니다. 그 후 빅토르(Victor, 189-199년), 제피리노(Zephrinus, 199-217년)로 이어지다가 다시 갈리스토(Callistus, 217-222)교황님께서도 순교하십니다.
오늘은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입니다. 교회를 박해하던 로마 제국의 수도인 로마에 그것도 사도 베드로와 이방인의 사도 바오로께서도 순교한 자리에 교회가 세워지고 오늘까지 내려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베드로에게 약속하셨지만 ‘저승의 세력’도 교회를 이기지 못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진실하시고 성실하신 분이십니다. 세속에서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는 주님께서 예고하신대로 그리스도와 함께 성령의 인도로 내려온 것입니다.
골고타는 세상에서 한 점에도 되지 않은 작은 언덕입니다. 로마의 한 언덕도 마찬가지로 작은 점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십자가에서 부활의 영광과 영원한 생명으로 이어지는 세상구원이 있는 것처럼, 사도 베드로가 묻힌, 그곳 언덕에 세워진 교회로부터 세상을 향한 구원이 펼쳐지는 것입니다. 교회를 인도하시는 성령께서 세기와 세기를 넘어 참으로 신비롭고 놀라우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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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구원받고자 하는 인간은 세 가지를 알아야 한다. 자신이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 자신이 무엇을 원해야 하는지, 그리고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제 말이 아닙니다. 성 토마스아퀴나스의 말씀입니다. 지금 우리의 모습을 생각할 수 있는 말씀입니다. 사실 구원 자체를 염두에 두지 않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믿음의 대상도 모르고, 무엇을 원해야 하는지도 모르고,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오로지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만을 이야기합니다.
구원 대신 ‘돈’이 자리 잡으면서, 믿음의 대상도 돈을 벌 수 있게 해 주는 것에, 원하는 것도 돈이고, 돈 벌기 위해 모든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하고 그렇게 노력해야 한다고 말하게 됩니다. 그러나 신부로 살면서 분명한 깨달음은 돈이 나를 편하게 해 주기는 하지만 영원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돈, 돈, 돈’ 하면서 돈을 애지중지하던 사람도 돈을 들고서 하늘 나라에 가지는 못하지 않습니까? 자신의 모든 것처럼 여겼던 ‘돈’이었는데, 더 소중하다고 할 수 있는 자녀들이 이 돈 문제로 남남보다 더 나쁜 관계로 돌아서는 경우도 참 많이 보게 됩니다.
무엇을 지향하면서 살아야 할까요? 세상의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이 아니라 구원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구원해 줄 하느님을 믿어야 하고, 하늘 나라에서의 영원한 생명을 원해야 하고, 이를 위해 지금 하느님의 뜻인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오늘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드로 사도를 선택하시어 당신의 지상 대리자로 삼으신 것을 기념하는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입니다. 복음에도 나오듯, 베드로가 하늘 나라의 열쇠까지 맡을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을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라고 고백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지위를 얻기 위해서, 또 이 세상 안에서의 부귀영화를 누리기 위한 것도 아닙니다. 구원받고자 하는 마음에서 누구를 믿고, 무엇을 원하고, 또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 뒤 베드로가 어떻게 살았는지를 생각해 보면, 이 점을 분명히 알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1독서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부정한 이익을 탐내서 하지 말고 열성으로 하십시오. 여러분에게 맡겨진 이들을 위에서 지배하려고 하지 말고, 양 떼의 모범이 되십시오.”(1베드 5,2.3)
구원을 위해 어떤 삶을 살아야 합니까? 베드로 사도가 보여 주셨던 하느님께 대한 굳은 믿음, 영원한 생명을 원하는 마음, 그리고 지금 열성을 다해 기쁜 소식을 전했던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런 삶을 살아야 베드로 사도의 말씀처럼 시달지 않는 영광의 화관을 받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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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전교수도회 김종오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또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마태오.16,18-19)
베드로라는 반석 위에 세워진 교회 공동체는 주님의 나라를 가기 위한 디딤돌입니다. 교회 공동체는 인류 구원을 위하여 도움을 주기 위한 디딤돌인 공동체입니다. 사람들이 딛고 올라 갈 수 있어야 그 돌은 디딤돌로 됩니다.
디딤돌이 되려면 사람들보다 작고 낮아야 합니다. 항상 발아래 작게 엎드리고 있어야 사람들이 쉽게 딛고 올라 갈 수 있습니다. 교회 공동체의 모든 직분은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쉽게 딛고 올라가도록 만들어진 디딤돌입니다.
디딤돌이 너무 크거나 높으면 걸림돌이 됩니다. 봉사자로서 직분을 잊어버린 교회 공동체의 소임은 구원의 여정에서 걸림돌이 됩니다. 디딤돌은 사람을 ’땅에서 풀어주기‘위한 것이지만, 걸림돌은 사람들을 “땅에서 매어놓기‘ 쉽습니다.
교회공동체의 아무리 작은 직분이라도 맡은 직분을 힘의 도구로 사용하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봉사보다 힘의 직분이 되는 순간 우리의 직분은 구원의 여정을 가는데 걸림돌이 됩니다. 반석인 베드로를 ‘주님의 일보다 사람의 일을 먼저 생각하게 만든’ 사탄처럼 됩니다.
우리는 사도 베드로로부터 이어 오는 사도직을 수행하는 작은 베드로들입니다. 가장 작은 공동체에서 가장 작은 사도직을 통하여 가장 작은 반석이 되어 봉사하는 교회 공동체를 위한 디딤돌입니다. ‘사람의 일보다 주님의 일을 먼저 생각하는’ 작은 반석들입니다.
교회 공동체의 직책을 봉사의 도구로 사용할 때마다, 우리는 이 땅에 주님의 나라를 세우기 위한 ‘디딤돌’이 됩니다. 아무리 ‘작은 돌’이어도 우리가 투신한 작은 수고들은 주님의 나라에서 ‘머릿돌’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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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고,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마태 16,18.19)
<참 목자의 길!>
오늘 복음(마태 16,13-19)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제자들이 '세례자 요한과 엘리야와 예레미야나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생각을 전합니다. 다시 제자들에게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 16,16)
베드로의 이 신앙고백을 들으시고, 베드로(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하시고, 그에게 교회를 맡기십니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또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 16,18-19)
오늘은 베드로가 '제1대 교황으로, 곧 이 지상의 그리스도의 대리자'로 선택된 것을 기념하는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입니다. 현재 교황은 '제266대 프란치스코 교황'입니다.
'이 땅에 모든 성직자들(교황~부제)은 그리스도의 직무 대리자들'입니다. 곧 '이 지상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을 하는 사람들, 하느님의 양 떼를 돌보는 목자들'입니다.
베드로 교황이 말합니다.
"여러분 가운데에 있는 하느님의 양 떼를 잘 치십시오. 그들을 돌보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자진해서 하십시오. 부정한 이익을 탐내서 하지 말고 열성으로 하십시오. 여러분에게 맡겨진 이들을 위에서 지배하려 하지 말고, 양 떼의 모범이 되십시오."(1베드 5,2-3)
참 목자의 길을 걸어가는 성직자들이 이 땅에 많아지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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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마태 16, 19)
우리의 삶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한
믿음입니다.
사랑의
봉사자로
불리움 받은
우리들입니다.
신앙의 정체성은
사랑이신
하느님을 알고
사랑이신
하느님과의
하나되는
올바른 관계입니다.
하느님 백성인
우리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교회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교회정신입니다.
하느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우리의 진정한
구원입니다.
하느님의 일꾼은
하느님과 함께
기도하며
봉사합니다.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하느님 나라를
위한
우리의 전적인
투신이
필요합니다.
서로를 돌보고
보살피는 것이
하늘 나라의
진정한
열쇠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진정한
사랑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사랑은
열린 교회
열린 마음으로
우리를 이끄십니다.
겉도는 신앙이
아니라
생명의 길을
뜨겁게 걸어가는
사랑의 실천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약속은
결코
시들지 않습니다.
희망의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신
예수님의
사랑같이
사랑으로
풀어나가는
교회의
여정입니다.
그 여정에
사명을 다하는
성 베드로
사도좌가
있습니다.
사랑의 기도로
힘을 보태는
우리모두는
하느님
백성입니다.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교회의
지체들입니다.
건강한 교회를
위해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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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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