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 저무는 등허리의 검붉은 바다 성근 별 창백한 그림자 희미하고 반쪽 푹 썩어 문드러진 야윈 반달 허무에 순응하려는지 이별마저 붉다.
가을비 博川 최정순
가슴속 응어리진 한 북받쳐 만물 휘젓는 휘모리장단 넓고도 황홀한 풍악산 일만이천봉 층층 비단결 수놓은 만첩홍산萬疊紅山 바람 따라 절승경계絶勝境界 돌고 돌다 하염없이 무심히 내리고
묘향산 칠성골 반석 위 휘감고 휘감기어 몸부림치다 박천 떠난 최씨 가문 소식에 한스러운 피눈물 씻으며 쓸쓸한 청천강 서편으로 서럽게 울고 간다.
가을 바람 博川 최정순
가파른 하늘재 넘어 송림松林 사이로 다가서는 한 뭉텅이 감나무 부딪히고 사과나무 얽혀 열매마다 핏빛 멍울 짙게 남기고 단호박 짙게 드리운 주름살 펴며 필사적으로 머물다 간다
회갈색 깊디깊은 구렁이 계곡 따라 인고의 상처 눈물 발 밑 뿌리며 먼저 지나간 인연 허위허위 쫓아와 인적 드문 산등성이 골짜기 이리저리 소요하며 거닐다가 허수아비 혼자 하늘 보고 꺼덕이는 몸서리치게 외로운 텅 빈 들판에도 머물다 콩 줄기 비집어, 비집어 툭툭 건들며 석류알 터져라 사력 다해 불다 겨울로 간다.
가을밤 博川 최정순
나무 옷 훌훌 벗어 땅 위 포목布木 되어 눕고 서리 입은 꽃잎 남루한 소복만 담장 밑 서성이며 떨고 있는데
돌밭 호박 나체로 뒹구는 벼폭 다리 잘려나간 황금들판 허수아비만 허허로이 서 하얀 비닐봉지에 덮인 짚덩이
북녘서 다가오는 겨울바람 소리 풀벌레 마지막 노래 서글픈데 둘 곳 없는 마음 들녘 헤매면 먹빛 어둠 속 잡념만 무성하네
이슬 끊임없이 가슴에 내려 도둑맞은 잠 뜨개질로 달래며 저 멀리서 나를 향해 손짓하는 죽음 향해 한 발 한 발 걸어가네.
중앙탑에서 博川 최정순
한반도 한가운데 세워진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 중원에 홀로 우뚝 서 한반도 치솟는 정기 모아 천하 굽어 살피고 있으니 나그네 잠시 발길 멈춰 인간사 무사무탈하기를 큰 절 올려 간절히 빌고 비니 저 멀리 찬바람 맞는 빨간 능금 알알이 옹골차게 영글어 가고 탄금호 핏빛 석양에 정겨운 우륵 가얏고 한 가락 갈대꽃 살랑살랑 흔들며 지나간다.
산국화를 보며 博川 최정순
고향 그리워 인적 없는 산골짜기 찾아드니 너희들 무더기 져 황금빛으로 환하게 웃고 있구나 너의 얼굴 얼굴 속 드리운 그리운 흔적 꿈에도 잊지 못할 고향 얼굴들 아버지 밤나무 가지로 숟가락 만들어 줘 소꿉놀이하던 친구 어머니 헌옷가지 인형 만들어 줘 신랑 각시 놀이하던 저 세상 명구 구매박골 계곡 물 가둬 멱 감고 물장구치던 동무들 돌틈 엉금엉금 기어가는 앙증스런 가재 보며 개울물에 희희덕거리며 빨래하던 너희들은 모두 내 기억의 모퉁이로 돌아서고 산에 핀 국화에서 너희들을 찾고 그리는가.
파초 博川 최정순
고향 멀리 떠나 반그늘지고 습기 많은 땅 뿌리 줄기 잎 밑동 감싸 헛 줄기 이루고 연노란 꽃 여름 가을 두 줄로 나란히 펴 장관 이뤄 기세등등 만산편야滿山遍野하였지 잎 하나 우산만 하여 얕은 돌담 덮고 거칠 것 없이 황금 꽃 피웠네 폭풍에 흔들리고 폭우에 고개 숙이다 삭풍 전선줄 붙잡고 울기 시작하면 자랑스런 황화黃花 푸른 잎 모두 떨구고 갈색 퇴물로 변하여 하늘 보면 맥없이 멀어져 간 아스라한 전설들 누구도 고칠 수 없는 고질병 남쪽 향한 그리움에 복장 터지는 울음으로 온몸 부여안고 속으로 운다.
이름 없는 들꽃에게 博川 최정순
천둥 비바람과 싸우며 날밤 새워 낙화 위해 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이름 없는 너 독기 어린 향기 품고 찬 이슬에 고개 숙이다 서리 맞아 떨어진다고 가슴 뜯으며 울지 마라 누군가의 발길질 어느 누가 던진 돌 머리통 산산이 깨어져도 너 사랑하는 나 있고 너의 씨 산화하여 새 봄 맞으면 사지 넓게 펴고 활짝 웃으며 이 산 저 산 향기 가득하리라.
야생화 博川 최정순
멀고 깊은 산길 명지바람 흔들리는 잡목 사이 너 고개 숙여 수줍은 미소 짓는데
잠깐 고개 숙여 이름 없는 너를 보며 제자리 종종 돌다 황망히 네 자리 떠나며 등 돌려 뒤돌아보니
아주 오래전 알았던 사람이던가 싶어 가던 걸음 멈추고 쉬이 못 가네.
낙엽 博川 최정순
겨울 가는 길목 누리 포탄 맞은 낙엽 작달비 바람 몸 비틀며 나뒹구는데 한국동란 때 쓰던 군화에 심어 놓은 노란 국화 벌 나비 가뭇없이 사라지고 다니던 가로수 기생 옷자락 모두 벗으니 마음만 어수선하여 거지주머니처럼 주저리주저리 아버지 마지막 모습 닮았네. 아버지 흔적 좇아 쏙 수리 감나무 아래 서면 낙엽은 아버지 비운 술병 소리 내며 굴러 간다.
구름 博川 최정순
바람결 쫓기고 쫓겨 어디론가 휘청거리며 흘러가는 먹구름 폭풍에 갈기갈기 찢긴 몸뚱아리 팔다리 한 맺힌 무서리 내려 석류알처럼 벌겋게 충혈 된 가슴 다독여 어루만지며 나그네 혼불 되어 북녘 고향 찾아 간다오.
알밤 博川 최정순
대수술 받은 이듬해 거동 순조롭다며 뒷산 올라 버섯 따고 밤 주워 가루 만들어 손수, 전 부치고 수제비 뜨고 튀김 만들어 몸 좋아진 것 같아 좋아하면서 철없이 먹어치운 불효자식 저승길 마지막 선물이었네 산길 지나다 떨어진 아람 밤송이 보니 아버지 생각에 차마 줍지 못하고 그냥 지나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