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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다말라비왐사 큰스님 가르침>
위뿔라냐니 스님 옮김
https://cafe.daum.net/DHAMMADIPAKOREA/DTZD/4
Ⅳ 위빳사나 지혜의 초석
1. 붇다의 눈(붇다 짝쿠)
불자라면 평범한 앎이 아니라 특별한 깨달음 하나를 얻어야 마땅합니다. 태어남과 죽음의 반복인 윤회를 도는 범부의 생에서 업(의도)과 업의 결과를 믿는 지혜(깜맛사까따 삼마딛티)를 아는 것은 매우 요긴합니다. 우리는 붇다, 보디삳따, 벽지불 그리고 다른 바라밀을 닦는 이들이 설하시는 것을 들었기 때문에 ‘원인과 결과를 믿는 지혜’라는 바른 시야를 이번 인간의 생에서 얻을 기회를 가졌다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이 견해를 얻을 수 있는 생과 얻을 수 없는 생을 나누어서 보면 얻을 수 없는 생이 더 많을 것입니다.
붇다께서는 불교에 첫발을 내디디는 존재들을 만났을 때 그들이 갖춘 소양을 보시고 수행 방법을 설하시곤 하셨습니다. 설하실 때마다 청중들 한 명 한 명을 붇다의 지혜로 가늠해 보셨습니다. 먼저 ‘아사야눗사야냐나(중생의 성향을 아는 지혜)’로 보십니다. 세세생생 윤회에서 가져온 개개인의 서로 다른 성향들과 관점들을 살펴보십니다. 그런 뒤에 중생의 근기를 아는 지혜(인드리야빠로빠리야띠냐나)로 신심(삳다), 정진력(위리야), 집중(사마디), 지혜(빤냐)의 성숙도를 보십니다. ‘인드리야빠로빠리야띠냐나’로 중생들의 마음 씀과 마음에 새기는 방식들을 보시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지혜를 ‘붇다 짝꾸(붇다의 눈)’라고 합니다. 이 ‘붇다의 눈’으로 보시고는 어떤 법문을 하기에 적절한지 결정 내리십니다. 붇다의 제자들에게는 이런 능력이 없습니다. 오직 붇다께서만 가질 수 있는 지혜라서 이 지혜를 ‘붇다 짝꾸(붇다의 눈)’라고 합니다. 이 ‘붇다의 눈’으로 보시고 설하실 때 중생들의 마음 안에, 심장 안에 즉시 꽂혀서 지혜들이 빠르게 자라는 것입니다.
2. 붇다의 가르침을 듣고 깨우침에 이르는 유형
자갈을 한 움큼 쥐고 청중에게 던지면 맞는 사람도 있고, 맞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꽃을 한 움큼 쥐고 청중들에게 뿌리면 꽃이 닿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닿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붇다의 법문을 듣는 사람은 누구나 특별한 이익을 얻습니다. 특별한 이익은 각자가 기억해 새길 것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이 단어를 썼더니 지혜가 열렸습니다. 다른 존재들은 그것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는 중입니다. 한 번 더 설명했을 때 생각 중이던 존재들 일부가 깨치게 됩니다. 남은 다른 존재들은 말하고 설명해도 지혜가 아직 열리지 않습니다. 규칙적으로 집중 수행을 하고 매일 맹렬히 노력해서 지혜가 열리는 존재도 있습니다. 어떤 존재는 이 생에서 지혜가 열리지 않고 들은 정도에서 다음 생으로 넘어갑니다. 이런 식입니다.
1) 욱가띠딴뉴
말로 듣기만 해도 깨치는 경우를 경전에서는 ‘욱가띠딴뉴’라고 부릅니다. ‘욱가띠딴뉴’란 입에서 나감과 동시에 ‘뉴’-알게 되는 것입니다. 법문을 듣는 청중의 자리에서건 어떤 자리에서 이건 가르치는 사람이 말을 하는 즉시 깨달음을 얻는 존재, 이런 존재들은 가장 수승한 분들입니다. 아주 희귀합니다. ‘사리뿓따’ 존자의 경우입니다. 앗사지 테라를 처음 뵙고,
“스님이 모시는 스승은 누구입니까?
스님은 어떤 견해를 좋아합니까? 이야기해 주십시오.”라고 여쭈었습니다.
“나는 장황하게 설명할 줄 모릅니다.
간략히 설명하겠습니다”라고 답합니다.
“존자시여, 길게 말씀하실 필요 없습니다. 제게 핵심만 말해 주십시오.”
이렇게 법문을 청하자, 원인과 결과, 8정도, 12연기를 압축해 4성제를 설하십니다. 원인이 소멸한 자리인 열반도 설하십니다. 이런 내용의 짧은 게송을 읊어 주자, 사리뿓따 존자가 그 자리에서 완전히 깨닫습니다. 수다원이 된 것입니다. 수다원이 되었다는 뜻은 4성제에 대한 의심이 완벽하게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견해가 청소되어 청정해진 것입니다. 이런 상태를 유아견과 법에 대한 의심을 제거했다고 합니다. 시간이 지나면 다시 혼돈스러워지는 일시적인 청소가 아닙니다. 다시는 이전 상태로 되돌아가지 않는 완전무결한 청소인 것입니다. 단 한 번에 완전하게 법에 대한 시야가 청정해져서 의심으로 인한 갈팡질팡함이 다시는 들어올 수 없습니다. 이렇게 들어서 단숨에 깨달음을 얻는 사리뿓따 같은 존재를 ‘욱가띠딴뉴’라고 부릅니다.
2) 위빤찌딴뉴
다음 존재는 ‘위빤찌딴뉴’입니다. 한 줄의 게송으로는 깨달을 수 없습니다. 설명이 보태져야 합니다. 상세히 설명해야 합니다. 봅시다. 붇다께서 다섯 빅쿠들에게 초전법륜경을 설하실 때 꼰단냐 존자가 첫날 수다원 과를 얻습니다. 남은 네 분의 존자들은 아직 깨닫지 못한 상태입니다. 다음 날 거듭 설하시자 이해하게 됩니다. 이런 존재들을 ‘위빤찌딴뉴’라고 합니다.
3) 네야뿍갈라
세 번째 존재는 ‘네야뿍갈라’ 입니다. ‘네야뿍갈라’는 한 단계 한 단계 이끌어 주어야 합니다. 요즘 시대에 맞추어 설명해 보자면, 선원에서 안거를 여러 번 지내고 매일매일 힘을 짜내어 오랜 세월 정진을 계속하다가 지혜가 무르익어서 법을 얻고 가는 존재들을 ‘네야뿍갈라’라고 합니다.
4) 빠다빠라마
어떤 이들은 이 세 종류 안에 없습니다. 붇다의 법문을 들은 뒤 기억은 합니다. 하지만 그 말의 핵심 의미를 깨달아서 이해하지 못합니다. 수박 겉핥기 정도로만 아는 존재를 ‘빠다빠라마(단어뿐)’라고 부릅니다. 말보다 더 알지 못합니다. 말만 들리는 것입니다.
청중 여러분 중 몇몇은 ‘빤짝가뿐나’라고 들어보았을 것입니다. 무엇을 보시하든 가장 먼저 앞장서서 다섯(빤짜) 종류씩 보시하므로 ‘빤짝가뿐나’라고 불렸습니다. 깟사빠 부처님 당시에 이 사람은 ‘나마 루빠(물질과 마음)’라는 단어를 들었습니다. 들은 뒤 이 단어를 기억했습니다. 그러나 물질과 마음이라는 이 단어의 실질적인 뜻을 정확히 통찰하지는 못했습니다. 위빳사나 지혜가 제대로 생겨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늙음과 죽음을 거친 뒤 고따마 붇다를 만났습니다.
“붇다시여, 빅쿠란 무엇을 뜻합니까?” 라고 여쭈었습니다.
“삽바소 나마루빠사밍 얏사 낟티 마마이땅(물질과 마음 위에 ‘나’라는 집착으로 지배함이 완전히 사라진 존재를 빅쿠라고 부른다)”라고 대답하시자,
‘이 단어를 내가 들어 본 적이 있는데?’ 하고 생각해 봅니다. 기억을 떠올리는 동안에 그는 아나함이 됩니다.
이 단어를 셀 수 없이 많은 생의 저편 깟사빠 부처님 당시에 들었는데 이제 와서야 결실을 맺은 것입니다. 물질과 마음이라고 듣자마자 깨쳐서 수다원, 사다함을 거쳐 아나함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깟사빠 부처님 당시에 그는 ‘빠다빠라마’존재였지만, 고따마 부처님께서 출현하실 즈음에는 지혜가 무르익은 것입니다. 그래서 수행자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수준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만 필요합니다. 어떤 이들은 자신의 바라밀이 채워지지 않았다고 핑계를 대며 한가롭게 지내는데 이렇게 살아서는 절대 바라밀이 채워질 리가 없습니다.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어야 언젠가는 얻는다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수행하고 있어야 합니다. 실천하고 있어야 합니다. 노력하고 있지 않은 이들이 매우 많습니다. 법문조차 듣지 않고 사는 이들이 아주 많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봅시다. 이 도시의 인구가 얼마나 있는지 봅시다. 그 가운데서 불법에 관심 있는 사람과 관심 없는 사람, 법문을 듣는 사람과 법문을 듣지 않는 사람을 비교한다면 어느 쪽이 더 많겠습니까? 지금처럼 불법이 있는 시기라 하더라도 ‘바른 법’을 듣는다고 할 수 없습니다. 전 세계 인구가 80억에 육박해 가고 있습니다. 오늘도 증가하고 있습니다. 이 많은 인구 중에서 물질과 마음을 구분해서 볼 줄 아는 위빳사나 지혜에 이른 사람이 천만이라도 될지 의문입니다. 아니, 천만이라도 이런 지혜를 원하기나 할지 모르겠습니다.
전 세계를 보자면 인구가 77억이라고 합니다. 매일 증가 추세입니다. 머지않아 80억이 될 것입니다. 이렇게 인구가 증가한다고 위빳사나 수행자가 많아지지는 않습니다. 위빳사나라는 단어를 들어 보지 못한 이들도 많을 것입니다. 들어 본 이들은 극히 소수일 것입니다. 이렇게 보자면 우리가 이처럼 법문을 들을 기회를 가지는 것은 참으로 행운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어떤 법문이든 귀 기울여 듣고 새겨 둘 필요가 있습니다.
3. 지혜를 증득하기 위한 내부 조건과 외부 조건
지혜를 증득하기 위해서는 외부의 두 가지 조건과 내부의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합니다. 무슨 일이건 외부와 내부 두 가지가 만나야 이루어집니다. 혼자서는 절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성냥불을 켤 때도 성냥개비의 황과 성냥갑 껍질의 인화 물질이 부딪혀야 불이 붙지 않습니까? 북이라면 북채와 북채가 가서 부딪힐 북 가죽이 있어야 합니다. 두 가지가 만나야 소리가 납니다. 하나만 있으면 소리가 울리지 않습니다. 내부 조건과 외부 조건이 만나야 합니다.
인간의 몸은 내부의 영양 물질이 외부의 영양 물질과 만나야 만들어지고 유지됩니다. 업으로 인해 생긴 내부의 영양 물질(깜마자하라)만으로는 몸이 지탱되지 않습니다. 매일 먹어줘야 합니다. 외부의 영양 물질(오자아하라)인 음식이 필요합니다. 다시 말해, 몸 내부의 영양, 외부의 영양 이 두 가지 다 양호해야 몸이 힘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이는 예를 들어서 말하는 것입니다. 어느 분야이든 마찬가지입니다. 안과 밖이 있습니다.
이제 붇다의 가르침이 있는 이 시기에 얻어야 할 지혜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위빳사나 지혜를 얻기 위해서는 내부의 준비된 바라밀과 외부에서 들려오는 붇다의 말씀이 함께 만나야 합니다.
1) 외부 조건
지혜 증득을 위해 필요한 외부 조건 중 첫째는 ‘현인을 의지해 가까이 다가감(삽뿌리수빠상세와)’입니다. 여기서 현인이란 붇다를 말합니다. 벽지불, 아라한 그리고 붇다로부터 얻은 법을 바르게 설할 수 있는 이도 현인에 포함됩니다. 둘째는 ‘바른 법을 들음(삳담마사와나)’입니다. 현인이 설하는 바른 법을 들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위빳사나 지혜가 생겨나도록 이끌어 줄 수 있는 스승 그리고 위빳사나 지혜를 생겨나게 하는 법, 이 두 가지가 필요한 것입니다. 빨리어로 말하자면 ‘삽뿌리수빠상세와, 삳담마사와나’입니다. 맞지 않습니까? 사리뿓따 존자가 저 혼자 수다원 과를 얻을 수 있었던 게 아닙니다. 첫 번째 조건은 앗사지 존자와의 만남입니다. 사리뿓따 존자는 앗사지 테라를 만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만난다는 것과 본다는 것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만나기 위해서는 가야 합니다. 그리고 만나서 앗사지 존자로부터 법문을 듣습니다. 이것이 두 번째 조건입니다.
2) 내부 조건
그렇다면 앞서 설명한 외부 조건 두 가지만 있으면 충분합니까? 현재 이 자리에도 법문하실 스님들이 와 계십니다. 법을 설하십니다. 이것은 외부 조건입니다. 중요한 내부 조건 두 가지가필요합니다. 외부 조건 두 가지만으로 위빳사나 지혜를 얻을 수는 없습니다.
내부 조건 두 가지는 무엇인가? 내부 조건은 존재 각각의 의식 안에 있습니다. 이 조건이 같을 수 없습니다. 예를 들자면 스님이 오셔서 설법을 하십니다. 청중 500명, 1000명이 와서 경청합니다. 외부의 조건은 같습니다. 하지만 같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무엇인가 하면 개개인이 가진 이해력이 다릅니다. 그래서 법문은 같지만 얻어 가는 것은 각자 천차만별일 것입니다. 그 이유는 개개인의 내부 조건의 차이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두 사람이 영양이 풍부한 같은 음식을 먹고 있습니다. 한 사람은 건강합니다. 다른 한 명은 병약합니다. 같은 음식을 건강한 사람이 먹으면 충분한 영양을 섭취할 수 있을 텐데, 병약한 사람이 먹으면 소화조차 안 될 수도 있습니다. 이해되십니까? 그래서 내부의 조건과 외부의 조건 두 가지가 만나서, 둘 다 좋으면 충분한 조건이 갖추어져서 특별한 지혜 하나를 얻는 것입니다.
내부 조건은 각자의 노력으로 갖추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같은 결과가 나올 수 없습니
다. 동일한 기회가 주어지더라도 얻어가는 이익이 다른 것은 내부 조건의 차이 때문입니다. 내부 조건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내부 조건 두 가지 중 첫 번째는 ‘요니소마나시까라’입니다. ‘요니소 : 지혜롭게’ ‘마나시까라: 마음에 새길 줄 아는 것’ 즉, ‘지혜로운 마음 새김’이라고 하면 좋겠습니다. 이 ‘요니소마나시까라’는 아주 중요합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짓는 모든 선업들이 ‘요니소마나시까라’가 있어야 생겨날 수 있습니다. ‘요니소마나시까라’가 없으면 아무리 보시를 많이 해도, 수행한다고 아무리 오래 선원에 있어도 이것들이 선업이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탐, 진, 치로 점철된 이기적인 마음에서 하기 때문입니다. 마음 씀이 매우 중요합니다. 자애와 자비 이타적인 마음으로 타인을 이해하려는 마음을 내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서 ‘요니소마나시까라’가 특별히 중요합니다. 바른 방법으로 마음에 새길 수 있어야 합니다. 바른 마음 씀이 있어야 합니다.
두 번째는 ‘담마누담마빠띠빧띠’입니다. 세 단어의 합성어입니다 : ‘담마’+‘아누담마’+‘빠띠빧띠’ ‘빠띠빧띠’란 수행을 실천함입니다. ‘아누담마’란 반복해서 훈련함을 의미합니다. 무엇을 반복해서 훈련하는가? 계율, 집중력, 지혜를 반복해서 훈련합니다. 반복해서 계율을 지키고, 반복해서 집중력을 키우고, 반복해서 지혜를 갈고 닦습니다. 계, 정, 혜 삼학을 닦는 것입니다. 이렇게 8정도의 계, 정, 혜 삼학을 닦는다는 것은 위빳사나 수행을 한다는 것과 같은 말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담마누담마빠띠빧띠’한다는 것은 치열하게 반복하여 삼학을 닦아 혹은 치열하게 반복하여 위빳사나 수행을 하여 ‘담마(도와 과 그리고 열반)’를 얻어가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음은 모곡 사야도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 ‘뿝빠바-가막가’란 위빳사나 수행을 말한다. ‘뿜빠바-가’는 ‘앞에 깔린’, ‘막가’는 ‘길’이라는 뜻입니다. 이 ‘막가’는 정견, 정사유, 정어, 정업, 정명, 정정진, 정념, 정정을 의미합니다. 이 여덟 가지 모임을 ‘막가’라고 부릅니다. 이 8가지 중에서 하나만을 ‘막가’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모곡 사야도의 말씀에 따르면 이 8정도가 바로 위빳사나입니다. 위빳사나를 반복하여 실천하고 닦아야 도와 과 그리고 열반이라는 담마를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봅시다! 어떤 건물에 올라가려면 올라가게 하는 계단, 들어가는 문이 있지 않습니까? 이 계단으로 오르지 않고 벽으로 오를 수 있습니까? 안 됩니다. 계단으로 올라가야만 합니다. 고층에 이르는 계단이 있습니다. 이 위빳사나 수행이란 도와 과로 가는 계단입니다. 이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3) 내부 조건과 외부 조건의 조응
수행자들은 ‘현인을 가까이함’, ‘법문을 경청함’이라는 외부 조건 두 가지와 ‘들은 법문을 바르게 가슴에 새김’, ‘위빳사나를 실제로 반복하여 실천함’이라는 두 가지 내부 조건의 조응 여부에 따라 각기 다른 결실을 맺습니다. 여기서 짚고 넘어갈 것이 있습니다. 사리뿓따 존자가 수행하지 않고 수다원 과를 증득했다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법문을 들을 때, 듣는 동안 위빳사나로 관찰했기 때문에 법을 얻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좌선한다는 것은 그저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눈감고 앉아서 집안일을 생각하고 있으면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 누구나 앉아 있을 수 있습니다. 몸은 선원에 있으면서 마음은 사업을 구상하고, 집안일을 생각하고, 어제 일을 후회하고, 내일 먹을 것을 고민하고 있으면 좌선하는 의미가 있습니까? 앉아 있는 건 맞습니다. 가부좌를 틀고, 꼼짝 않고 앉아서 자기 생각에 빠져 있으면 이것은 선업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좌선이란 무엇인가? 마음이 바른 대상 위에 용맹스럽게 일을 하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자신이 하고 있는 일, 자신의 상념에 빠져 있는 것이 수행 선업입니까? 무엇을 하고 있느냐가 관건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요기들이 좌선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정말로 보시, 지계, 수행이라는 세 가지 선업 중에서 최상의 선업인 치열한 수행을 하고 있는지는 요기 자신만이 알 것입니다. ‘요니소마나시까라, 담마누담마빠띠빧띠’란 스스로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내적 조건이 갖추어지지 않으면 위빳사나 지혜가 생겨날 수 없습니다. 이는 ‘앙굿따라 니까야’에 실린 붇다의 말씀입니다. ‘수다원이 되기 위한 네 가지 조건’, 또는 ‘위빳사나 지혜가 생기기 위해 필요한 조건 네 가지’라고도 합니다. 이것은 나의 말이 아니고, 경전에 실린 그대로를 전하는 것입니다. 다시 정리합니다. 위빳사나 지혜를 얻기 위해서는 아래의 4가지 조건이 조화롭게 갖추어져야 합니다.
<외부의 조건>
1. 지혜 있는 이에게 다가갈 것
(삽뿌리수빠상세와)
2. 그 현인으로부터 바른 법을 들을 것
(삳담마사와나)
<내부의 조건>
3. 자기 자신의 마음에 바르게 새김
(요니소마나시까라)
4. 거듭해서 위빳사나를 닦음
(담마누담마빠띠빧띠)
이때 성취하게 되는 결과가 ‘빤냐(지혜)’입니다. 이것을 ‘아디감마’라고 하는데, ‘아디감마’란 얻음을 뜻하는 빨리어입니다.
세간의 사람들은 생계 활동을 해야 먹고 사는데, 이 과정에서 손익을 계산합니다. 장사하면서, 오늘 투자는 얼마인가? 순이익은 얼마인가? 계산해 보지 않습니까? 좌선하는 요기도 이런 손익 계산을 할 수 있습니다. 투자한 시간은 한 시간인데, 사띠는 얼마나 했는지? 지혜는 얼마나 자랐는지? 스스로 알 수 있습니다. 경제 활동을 하면서도 정산해 보면 알듯이 수행도 마찬가지입니다. 장사하는 사람이 이익이 남지 않으면 손해입니다. 수행에서도 자신에게 이익이 남았는지 남지 않았는지 알아야 합니다. 모르면 안 됩니다. 손익 계산을 해봐서 이익이 없다면 헛고생한 것이 됩니다.
‘마하사띠빧타나 숟따(대념처경)’에 있는 ‘담마누빳사나(법념처)’편을 봅시다. 내 안에 사띠가 생겨났는가? 사띠가 없는가? 이것만 생각하면 됩니다. ‘니와라나 담마(장애요인 5가지)’와 관련해서는 ‘까마찬다 니와라나(감각적 대상에 대한 갈애)’가 내 안에 있는가? 없는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있다면 제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현재 없다면 미래에도 생기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이렇게 스스로를 점검해야 합니다. 어떤 것이건 점검하지 않으면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이런 식으로 항상 주의를 기울여 지내야 합니다.
4. 정견(삼마딛티, 바른 견해)의 중요성
<8정도>
1. 정견(삼마 딛티)
2. 정사유(삼마 상깝빠)
3. 정어(삼마 와짜)
4. 정업(삼마 깜만따)
5. 정명(삼마 아지와)
6. 정정진(삼마 위리야)
7. 정념(삼마 사띠)
8. 정정(삼마 사마디)
붇다께서는 8정도라는 길 위에 정견을 필두로 세웠습니다. 왜냐하면 무슨 일이든 바르게 해야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수행하는 것도 허튼 방법으로 하고 있으면 바른 결과를 얻을 리 없습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서울에서 북쪽으로 가면서 대구에 가겠다고 하면 대구에 도착하겠습니까? 바른 방향으로 가야 합니다. 백두산 가겠다고 하면서 동쪽으로 줄곧 가면 백두산에 도달합니까? 이래서 바른 길 위에 올려 주어야 합니다.
붇다께서는 이 바른 길의 첫걸음으로 계율을 청정하게 지키라 하셨습니다. 계를 지키는 것이 8정도의 첫 번째 계단입니다. 정어, 정업, 정명이 세 가지가 있으면 8정도의 길 위에 오른 것입니다. 법회 시작하면서 5계를 받는 것은 8정도 가운데서 ‘계학’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제 길 위에 올랐습니다. 바른 길 위에 지금 처음 오른 것입니다. 길에 오르기는 했는데 앉아 있으면 앞으로 나가겠습니까? 자! 길 위에 올랐으면 걸어야 합니다. 그래서 앞으로 나가기 위해 붇다께서 계율 다음으로 ‘사마디(집중)’를 닦게 합니다. 사마디 다음에는 지혜의 눈을 갖추는 위빳사나 수행을 하게 합니다. 붇다께서는 이런 순으로 바른 길 위에 8요소를 넣어서 설명하셨습니다. 이것을 숙고해서 제대로 알기 위해 정견(삼마딛티)이라는 바르게 보기가 필요합니다. 자신이 가고 있는 길을 바른 방향으로 계속 가도록 바르게 이해하는 것 즉, 정견이 지혜의 시작입니다. 마하사띠빧타나 숟따(대념처경)’에서는 ‘정견’을 ‘삼빠잔냐’라고 부릅니다. ‘삼빠잔냐’, ‘삼마딛티’, ‘정견’, ‘바른 견해’는 모두 같은 말입니다.
이 정견을 세분화하면,
1. 깜맛사까따 삼마딛티
(인과를 믿는 지혜)
2. 자나 삼마딛티(선정의 지혜)
3. 위빳사나 삼마딛티(위빳사나 지혜)
4. 막가 삼마딛티(도의 지혜)
5. 팔라 삼마딛티(과의 지혜)입니다.
이렇게 다섯 종류의 바른 견해(삼마딛티)가 있습니다. 이렇듯 바르게 볼 수 있는 것은 5계가 바탕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계율이 중요한 이유는 계율을 지켜야지만 ‘바른 견해’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바르게 본다는 것은 ‘바른 사고(정사유)’를 할 때 가능한 것입니다. 바르게 사고함 없이 저절로 바른 시각이 생겨날 수 없습니다. 보는 사람이 눈을 뜨고 봐야 보이지 않습니까? 눈을 감고 있으면 어찌 볼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눈 뜨고 보듯이 ‘정사유(삼마상깝빠)’로 보는 것입니다. 바르게 생각할수록 바르게 보게 됩니다. 정정진(삼마와야마)이라는 맹렬히 노력함이 필요합니다. 또한, 열심히 노력할 때마다 정념(사띠)이 있어야 합니다. 사띠 없이 맹렬히 노력하면 어긋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사띠가 있어야 합니다. 사띠는 있는데 마음의 고요함이 없다면 바르게 보기가 어렵습니다. 물가에 서서 고요한 물을 보면 내 그림자가 보이지 않습니까? 내 그림자가 비쳐 보입니다. 그 위에 돌멩이를 하나 던져 넣으면 어떻게 됩니까? 그림자가 흔들려 버립니다. 물이 흔들리면서 따라 흔들리는 것입니다. 시야도 흔들려 버리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마음이 고요함을 얻지 못하면 마음의 시야도 흔들려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정(삼마사마디)이라는 마음의 고요함이 중요합니다.
이 모든 것이 바르고 정확하게 보기 위해서입니다. ‘봄’에서 시작합니다. 중간도 ‘봄’입니다. ‘봄’으로 마무리됩니다. 그래서 붇다께서 ‘삼마딛티 뿌레자왕(정견이 이끌고 간다)’이라고 하셨습니다. 어떤 분야이건 ‘바른 견해’가 필수입니다. 마지막에 열반을 보는 것도, ‘정견(삼마딛티)’이 이끌고 갑니다. 변하는 대상들(상카라)을 무상, 무아, 고 즉 ‘삼마딛티’가 보여 줍니다. ‘삼마딛티’ 힘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대상만 바뀔 뿐, 실제로는 ‘삼마딛티’가 이끌고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8정도에서 ‘삼마딛티(정견)’를 제일 앞에 두는 것입니다. 이는 윤회의 굴레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을 행할 때 가장 우선이라는 것입니다.
자, 다른 쪽에서 봅시다. ‘12연기’에서는 무엇을 제일 앞에 둡니까? ‘아윗자’라고 하는 어리석음입니다. ‘아윗자(어리석음)’를 가장 앞에 세웠습니다. ‘아윗자’가 앞장서면서 계속 윤회하게 됩니다. 윤회(삼사라)를 계속하게 하는 법에서는 ‘아윗자’가 선두에서 이끌어 갑니다. 네. 그렇습니다. 어리석음을 선두에 세우면 윤회를 계속하게 됩니다. 윤회를 하게 하는 법에는 어리석음이 제일 앞에 섭니다. 그 뒤로 집착(딴하)이 이끌고 갑니다. 어리석음과 집착은 두 개의 머리를 가진 한 마리의 뱀과 같습니다.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아윗자’의 반대인 ‘윗자(지혜)’가 앞에 섭니다. 즉, ‘정견’이 앞에 서는 것입니다. 자, 이 두 가지는 붇다께서 우연히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의도적으로 면밀히 이 순서대로 놓으신 것입니다. 생겨나는 순서며 설하신 차례가 참으로 의미심장합니다. 윤회의 바퀴에서 벗어나기 위해는 바르게 이해함, 바르게 앎이 필수입니다. 윤회를 하는 이유는 벗어나는 법을 몰라서입니다. 무엇을 모릅니까? 진리(삿짜)를 몰라서 윤회를 하는 것입니다. 정견이 없기 때문입니다.
5. 빳짝카(직접적인 앎)와 아누마나(추론적인 앎)
붇다께서 설하신 바 있습니다. “삽베 빅카웨 아비자닙땁방 : 모두를 알아야 한다.” 아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빳짝카’와 ‘아누마나’입니다. ‘빳짝카’는 직접적인 앎이고 ‘아누마나’는 추론적인 앎입니다. 이 두 가지 다 바른 앎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그릇에 소금을 담아옵니다. 소금을 담아올 때 소금 그릇 하나에 소금 알갱이가 무수히 많이 있지 않습니까? 자-, 소금 알갱이 하나를 혀 위에 얹으면 맛을 알지 않습니까? 이것이 직접적으로 알게 된 앎입니다. 나머지 소금 역시 짤 것이라고 아는 것은 추론으로 안 것입니다. 우리가 소금의 맛을 알고 싶어서 모든 소금을 맛볼 필요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다 맛보지 않고 소금이 짜다는 것을 판단내린 것이 틀렸습니까? 맞습니다. 그래서 ‘빳짝카’로 아는 것과 ‘아누마나’로 아는 것은 같습니다. 모두 직접적으로 경험하여 알 필요 없습니다.
해변에서 보면 바다 전체가 보입니까? 어떻게 다 보이겠습니까? 내 시야만큼만 보일 뿐입니다. 저편에 있는 바다를 보지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바다를 봤다’라고 말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는 이런 경우 바다를 봤다고 합니다. 우리의 앎이란 이처럼 직·간접적으로 아는 앎입니다.
6. 위빳사나 수행의 대상
(위빳사나 수행을 할 때 무엇부터 시작해서 관찰해야 합니까?)
위빳사나 수행을 할 때 어떤 이들은 묻습니다. ‘위빳사나를 하면 무엇부터 시작해서 관찰해야 합니까?’ 이 질문은 질문자의 상태를 보고 그에 맞추어 답해야 합니다. 어떤 이들은 몸이 분명합니다. 이런 수행자들은 몸부터 시작해서 관찰하면 됩니다. 마음이 분명한 수행자는 마음부터 시작해서 관찰하면 됩니다. 모든 수행자에게 정형화시켜서 말할 수는 없습니다. ‘낌수꼬빠마 숟따’에서는 이와 같이 설명했습니다.
‘청정도론’에서 말해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이 언급을 충고 삼을 수 있습니다. 반드시 이래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1. 사마타야니까 : 사마타 수행을 한 뒤에 위빳사나를 하는 수행자들입니다. 사마디가 강해지도록 우빠짜라사마디 단계까지 또는 압빠나사마디 단계까지 이른 뒤에 위빳사나 수행을 하는 경우라면 사마디의 힘이 좋아서 마음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그의 마음 안에 있는 생각들을 분명하게 압니다. 몸보다 정신이 더 분명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책에는 이런 경우에는 마음부터 시작해서 관찰할 수도 있다고 나와 있습니다.
2. 숟다위빳사나야니까 : 사마타를 하지 않고 처음부터 위빳사나를 시작하는 수행자들입니다. 이 경우 몸을 주 대상으로 두고 관찰하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사마타부터 시작하는 수행자는 무조건 마음부터 시작해서 관찰하는가 하면, 아닙니다. 마음부터 시작해도 되고, 몸부터 시작해서 사띠해도 됩니다. 하지만 위빳사나부터 시작한다면 몸부터 알아차림하라 합니다. 왜 이렇게 하라고 하는가 하면 분명하도록, 쉽게 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어떤 일을 처음 한다면 쉬운 것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어려운 것부터 시작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무슨 일이건 처음 할 때는 쉬운 것부터 시작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래서 청정도론에서 이렇게 제안해 둔 것입니다.
자! 좋습니다. 몸부터 시작해서 관찰한다면 대부분 호흡의 들고남이 가장 쉽습니다. 왜 쉬운가 하면 숨 안 쉬고 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숨을 쉬고 있으므로 이 몸의 콧구멍에서 바람이 항상 들락거리고 있습니다. 들락거릴 때마다 콧구멍 입구에서 부딪칩니다. 이 바람을 대상으로 집중하는 것입니다. 항상 있는 하나의 대상인 것입니다.
마하시 사야도께서는 배의 부풂 꺼짐을 관찰하라 하십니다. 이 부풂 꺼짐은 마하시 사야도께서 처음 창안하신 것이 아닙니다. 밍곤 제다원 사야도께서 시작하신 것입니다. 마하시 사야도께서 밍곤 사야도로부터 방법을 배우신 것입니다.
붇다께서 설하신 말씀 안에서 몸이든 마음이든 관찰대상으로 보고 있으면 됩니다. 어떤 이들은 심장 박동을 관찰하기도 합니다. 무엇을 관찰하건 사마디를 얻었다면 고유의 특성들을 바르게 아는 것이 핵심입니다.
7. 냐따빠린냐
위빳사나 수행을 시작했다면 위빳사나의 대상이 분명히 있어야 합니다. 이 위빳사나의 대상에 대해 알아야 할 것을 아는 지혜가 있도록 먼저 찾아야 할 것 입니다. 이 찾아야 할 것들을 ‘냐따’라고 합니다. 알 것이 세상에 아주 많습니다. 이렇게 무수한 알 것들 가운데서 위빳사나 지혜를 생겨나게 하기 위해서 공부해야 할 대상은 ‘몸과 마음’ 두 가지뿐입니다.
이 ‘물질과 마음’ 두 가지를 구분해서 꿰뚫어서 압니다. 꿰뚫어 안다는 것은 ‘이것이 몸, 이것이 정신일 뿐’이라고 구분해서 아는 겁니다. ‘몸이란 이뿐, 이 이상 없음; 마음이란 이뿐 이 이상 없음.’ 이렇게 정확하게 아는 겁니다. 이 몸과 마음이 어디서 왔는가? ‘원인이 있으면 생겨날 뿐, 어디서도 오는 것이 아님; 관련된 원인이 있으면 생겨날 뿐.’ 이렇게 아는 것을 정확히 안다고 합니다. 그래서 ‘냐따빠린냐’라고 합니다. ‘냐따’란 알아야 할 것들인 몸과 마음 두 가지를 말합니다. ‘빠린냐’란 ‘정확히 제대로 아는 것’을 말합니다. 위빳사나 지혜 중 하나를 ‘빠린냐’라고 부릅니다.
위빳사나 지혜란 모두들 알다시피 그 단계에 맞게 나갑니다. 위빳사나의 길에 들어서면 ‘냐따빠린냐’부터 시작합니다. 처음부터 ‘무상, 고, 무아’를 알 수는 없습니다. 집을 지을 때 벽부터 시작해서 올릴 수는 없습니다. 지반부터 다져야 하지 않습니까? 지반을 튼실히 다져야 건물이 올라갑니다. 지붕부터 올리면 건물이 쉽게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나마루빠빠릿체다냐나’
(몸과 마음을 구분해서 아는 지혜)
‘빳짜야빠릭가하냐나’
(원인과 결과를 아는 지혜)
이 두 가지가 위빳사나 지혜의 초석입니다. ‘냐따빠린냐’란 알아야 할 것을 알도록 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이 두 가지 지혜를 포함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두 가지 기초 지혜를 얻은 후에야 뒤이어서 ‘띠라나빠린냐’라는 위빳사나 지혜 단계에 이릅니다. 각각의 고유한 성품(사바와락카나)을 넘어 모든 것의 공통적인 특성(사만냐락카나)인 ‘무상(아닛짜), 고(둑카), 무아(아낫따)’를 알게 됩니다. 이렇게 항상하지 않는 성품들을 지혜의 눈으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항상하다고 믿던 것들이 항상하지 않다고 확신하는 ‘띠라나빠린냐’를 얻는 겁니다. 지혜가 더 익으면 일어남과 사라짐을 보는 ‘우다얍바야냐나’라는 지혜 단계에 이릅니다. 더 발전하면 계속되는 소멸을 보는 ‘방가냐나’라는 지혜단계에 이르게 됩니다. 이 단계에서는 항상함이라는 표식이 사라집니다. 행복하다는 관념이 사라집니다. 이렇게 ‘냐따빠린냐’, ‘띠라나빠린냐’, ‘우다얍바야냐나’, ‘방가냐나’라고 하는 지혜들이 점점 무르익어서 ‘도의 지혜’, ‘과의 지혜’까지 결실을 맺는 것입니다.
가장 핵심은 위빳사나의 기초가 되는 두 가지(나마루빠빠릿체다냐나: 몸과 마음을 구분해서 아는 지혜, 빳짜야빠릭가하냐나: 원인과 결과를 아는 지혜)가 자신의 의식 안에 튼튼한 초석으로 자리 잡히도록 최선을 다해 노력해야 한다는 겁니다. 위빳사나의 대상인 ‘신, 수, 심, 법’을 확고히 사띠 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노력해야 합니다. ‘청정도론’이라는 주석서를 쓰신 ‘붇다고사’ 사야도께서는 이 두 가지 지혜를 알게 되면 불법 안에서 둥지를 틀었다고 했습니다. 심지어 어린 수다원(쭐라소따빤나)이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이 기초단계의 지혜만으로 진짜 수다원이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수다원이 될 기반이 다져졌다고 하는 것입니다. 위빳사나 수행을 통해서만 이 지혜 두 가지(냐따빠린냐)가 확립된다고 이해하고 쉼 없이 열렬히 정진하기를 바랍니다.
사두 사두 사두
첫댓글 고맙습니다
사두 사두 사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