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배우수업일지_2회차_2023.2.7.
사투리여, 그대 무죄일지라!
수업 시작 전, 선생님께서는 1회차 수업 후 동료가 올린 수업일지의 한 대목을 언급하셨다. “계획에 없던 사투리가 나오고 발음도 꼬였다. 상대 분의 당황한 기색이 역력해 순간 흠칫했지만...” 선생님께서는 그럴 때 “... 어쩌면 살아있는 날생선 같은 연기가 나올 수도 있겠죠”라는 댓글로 격려해 주셨더랬다. 우리 모두에게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주셨다: “괜찮아, 얼마든지 그럴 수 있어.” 선생님의 다정한 인내심. 감정의 이완이 시작됐다.
장본인이 아니지만, 나 역시 그 장면을 여러 번 복기하고 있었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해” 그를 “순간 흠칫”하게 만든 그 (왕초보) “상대 분”이 바로 나였기 때문. 그의 첫 대사를 못 알아 들어 제대로 반응하지 못했던 건 사실이다, 그러나 그 이유가, 그의 사투리 때문이었다고 만은 할 수 없다. (그의 수업일지를 읽기 전까지 난, 그때 그가 사투리로 말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으니까.)
그가 입장할 때 난, 극 중 인물인 나와 실제의 나 사이를 헤매며 혼란 상태에 빠져있었다. 그의 입장은, 그 혼란을 벗고, 새로운 나를 입으라는 명령 같았다.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채, 나는 또 다른 나를 창조해야 한다. 이번엔 누구를? 그가 뭐라고 말하는 것 같은데, 그의 말이 들리지 않는다. “못 알아 듣겠어요. 뭐라고 하셨어요?” 나는 날것 그대로의 순간적 반응을 나의 첫 대사로 체택한다. 그러나, 상대방에게는 이 질문이, 극의 일부가 아닌, 못 알아 들었으니 다시 말해 달라는 요청으로 들린 것 같다. 그를 “흠칫”하게 만들었던 모양이다. 당황이 또 다른 당황을 낳으며 우리의 장면은 시작되었다.
삐꺽했던 시작이었지만, 상대는 마치 준비된 대본이 있었기라도 한 듯 장면을 능숙하게 이끌어 갔다. 자신의 비밀을 공유했던 이모가 그 비밀을 삼촌에게 발설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인물. 그의 실망과 분노가 그의 표정과 미세하게 떨리는 손을 통해 잘 표현되었고, 나에게 전달되었다. 반면, 나는 그의 상대로서 그의 역량만큼 반응하지 못하고 있음을 느꼈다. 나의 우왕좌왕을 눈치 챈 누군가의 스톱! 휴 ~~ 안도만큼이나 큰 아쉬움과 미안함도 나를 따라와 자리에 앉았다.
그와 2인극을 꼭 다시 한 번 해보고 싶다, 열심히 연습해서 이왕이면 그때는 맛깔나는 통영 사투리로!
1. Sensory Exercise (오감 훈련)
오늘 수업은 오감훈련이다. 오감훈련의 목적은, 내가 필요로 하는 정서와 감정을 불러일으키기 위함이다. 오감을 십분 활용해 민감하게 느끼고, 반응할 때, 주어진 상황을 개인화할 수 있다. 오감훈련을 (다음 수업인) 정서적 기억 훈련 전에 하는 이유는, 전자가 후자보다 감정의 생성과 변화에 더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오늘 오감 훈련의 대상은 커피가 담긴 종이컵 (혹은 종이컵에 담긴 커피). 내 몸에 이미 배어 익숙해진 습관적 행동을 통해 감각하려 하지 말고, 이 세상 아닌, 딴 세상의 텐션으로, 극히 이례적으로, 천천히 세심하게 관찰하고(시각), 듣고(청각), 맡고(후각), 만지고(촉각), 맛보라(미각)!
1) 시각
검은 액체. 검은 바다 같다. 심연의 바다. 해저의 끝. bottomless pit. 끝없는 심해로 한없이 추락한 적이 있었지. 나는 그곳으로부터 탈출했나, 여전히 탈출 중인가. 하얀 테두리 속, 표면이 반짝이는 검은 액체가 마치 눈동자 같다. 그 눈동자는 나를, 정확히 말해, 내 눈동자를 담고 있다. 마주 보고 서있는 두 개의 거울 속으로 펼쳐지는 무한 거울의 행렬처럼 수 만 개의 눈동자가 서로를 주시하고 있는 중.
2) 청각
손가락 끝으로 종이컵의 표면을 아주 처-어-ㄴ-처-어-ㄴ-히-이 이제까지 한 번도 그리 해본 적이 없는 속도로 만지며 느끼라고 하셨다. 종이컵의 표면을 지나가는 손끝에서 소리가 난다. 미세하게 떨리는 소리. 바람 소리. 부드럽기도 하고, 거칠기도 한 소리. 연필심이 종이 표면을 가로지르며 내는 소리와 닮았다. 칼로 연필의 몸을 깎을 때 나는 소리도 들린다. 경건한 소리 같다. 연필을 깎는 일은 어떤 의식과도 같지. 연필심이 뾰족해질수록 신뢰감도 커져. 너는 나의 말, 정신, 기억을 기록해 주지, 기억해 주지. 아무도 할 수 없는 일, 해주지 않는 일. 그런데 연필을 사용한 지가 너무 오래 되었네. 연필이 내는 사각사각을 들은 지가 너무 오래 되었어. 내가 가지고 있는 이 많은 연필들. 얘들은 내가 죽으면 다 어떻게 되는 거지?
3) 후각
커피향이 코끝에 처음 닿는 순간부터 콧구멍 안쪽 긴 터널을 통과한 후 두뇌 안쪽 어디쯤에 이르기까지 매 순간을 느끼라고 하셨다. 커피향 향수를 만들지 않는 이유는? 이토록 근사한 향이라니. 헌책방 냄새. 고소함. 그윽함. 쌉쌀함. 흙냄새. 시큼함. 후각과 미각을 표현하는 형용사가 겹치는군. 눈 길 위를 걷는 두 사람이 맞잡은 손에서 나는 향기. 여럿이 둘러 앉아 있는 모닥불에서 나는 냄새. 군고구마 냄새. 갓 구운 빵 냄새.
사람들이 떠오른다. 커피를 마셔야 비로소 깨어난다는, 정신이 든다는, 커피 한 잔을 다 마시고 나면, 어김없이 “아, 살 것 같다!”를 외치면서도, 자기는 커피 중독은 아니라고 우기는 U. 커피를 너무 좋아한 나머지 바리스타 자격증까지 땄지만, 정작 커피를 마신 날에는 밤에 잠을 못 자는, 해서 하루에 딱 한 잔, 그것도 12시 이전에만 마실 수 있는, 죽고 못 살면서도, 감질 나는, 커피와의 관계를 유지 중인 S. 매일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마시는 첫 번째 액체가 커피가 된지 족히 20년이 넘은 H. 오늘도 그의 하루는 어김없이 커피로 시작되었겠지.
4) 촉각
손끝으로 감지하는 종이컵의 표면이 부드럽다. 더 천천히 (어루)만져본다. 이렇게 부드러워지기 위해, 하나의 면이 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일들을 겪어야 했나. 한 때 거대하고 단단했던 고체에게 가해졌을 반복적 압력과 분쇄. 그렇게 탄생한 무수한 가루들의 질서정연한 복종과 연합. 종이컵의 비애가 선사하는 편리성과 유용성.
손에 감지되는 컵 표면의 온도가 뜨겁다. 어느새 따듯해진다. 안락하다. 컵을 감싸 쥐고 있는 건 손이지만, 차가운 손을 어루만져 주는 듯하다. 시간의 경과. 체온과 가까워진다. 친근하다. 시간의 경과. 이제, 주변 공기의 온도로까지 하강할 차례. 피할 수 없다. 속도의 차이는 불가피하겠으나, 모든 것은 식는다, 차가워진다. 그리다 결국 사라진다. 식어버린 것으로 인해, 사라져버린 것으로 인해 절망하거나 자책하거나 슬퍼하지 말아야 하는 또는 그렇지 않아도 되는 이유. <어떤날>의 '너무 아쉬워 하지마'.
5) 미각
* <미각>에 대한 노트와 다음 훈련이었던 반응 연습을 위한 역할극은 이어서 쓰기로 한다.
2. 반응 연습
팀#1
팀#2
* 잊어버리지 않고, 꼭 기억하기 위해 기록해 두어야 할 장면과 사건이 많다, 선생님께서 주신 순간순간의 견해 (선생님께선 “지적”이 아니라 선생님 자신의 “견해”일 뿐이라고 강조하셨다.)와 동료로부터, 나 사진으로부터 쏟아진 여러 개의 질문들. 여러 가지 이유로 놀라움과 배움이 컸던 역할극 시간. 2회차 수업일지는 잠시 접어두고, 이어서 쓰기로 한다. 독백을 위해 작품을 선정해야 한다. 이제 이 과제에 집중!
앗, 잊지 않기 위해 남겨야 하는 것:
<특정 장면과 그 장면 속 인물 분석을 위한 질문>
1. 목표는 무엇인가?
2. 그 목표는 얼마나 중요한가?
3.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난 무엇을 해야 하는가?
4. 나의 상대방은 누구인가?
5. 목표를 이루기 위해 극복해야 할 장애물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