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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 마가복음 12:18-27
오늘말씀에는 예수님의 말씀을 책잡기 위해 당시 종교 지도자인 사두개인들이 등장합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궁지에 몰아넣고자 묘한 질문을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지혜로 그들을 물리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대답을 하시면서 그들에게 심오한 영적 비밀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대로 지혜와 총명의 신, 모략과 재능의 신이 충만하신 분이십니다 (사11:2).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어떤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지를 잘 배우심으로 살아있는 믿음이 되어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사두개인들은 유대인들의 교파중에 하나로서 군소 교단이였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제사장 집안 출신이였고 정치권력과 결탁하여 이땅의 부귀와 영화를 누리는 귀족계급이었습니다. 그들은 세상 정치세력과 야합하여 그들의 소망은 정치적이고 현세적이었습니다. 이들은 성경도 모세 오경(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만을 성경으로 인정했습니다. 이들은 부활도 믿지않았고 천사도 없고 영도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행23:8). 그들은 영생이나 장차 올 심판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왜 부활을 믿지 않았을까요? 이는 부활을 믿으면 심판도 믿어야 되고 그러면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며 자유롭게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세계가 전부인 줄로 생각하는 현실주의자들이었습니다. 오늘날 신앙인들중에도 사두개인들처럼 부활을 믿지 않고 심판도 무서워하지 않고 눈에 보이는 세계가 전부라고 믿으며 이 땅에서 잘 사는 것만을 위하여 사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기 위하여 어떤 해괴한 질문을 하였습니까? 19절을 보면 “선생님이여 모세가 우리에게 써 주기를 어떤 사람의 형이 자식이 없이 아내를 두고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를 취하여 형을 위하여 상속자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이 말씀은 신명기 25:5-10절에 근거하여 한 질문입니다. 형이 자식이 없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를 취하여 대가 끊어지지 않도록 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근거로 사두개인들은 해괴한 이야기를 꾸며 냈습니다. 어떤 가정에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가 아내를 취하였다가 자식을 못 낳고 죽고, 둘째도 형수를 취하였다가 자식을 못 낳고 죽고, 셋째도 그렇게 하여 일곱이 다 상속자가 없이 죽었습니다. 그래서 이 여자는 아들하나도 못 낳고 기구한 팔자로 살다가 죽었습니다. 그 집안은 비극으로 끝났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부활 시에 있었습니다. 일곱 사람이 모두 동일한 한 아내를 취하였으므로 부활 시에는 누구의 아내가 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부활시에 형제끼리 아내 쟁탈전을 벌이는 비극이 발생하게 되지는 않을까요? 사실 이 이야기는 실제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들이 이런 이야기를 만들어 질문을 하는 것은 만일 부활이 있다면 더 큰 비극이 발생할 것이므로 부활은 있을 수 없고 또 있어서도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해괴한 질문으로 부활의 진리를 파괴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부활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부활을 파괴하게 되면 기초가 무너져서 모든 것이 무너지게 됩니다 (고전5:12-19).
예수님은 먼저 그들이 해괴한 질문을 하게 된 근본적인 오류가 무엇인가를 지적해 주셨습니다. 24절을 보면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오해함이 아니냐?"
1) 그들은 성경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모세 오경에 부활에 관한 교훈이 없다고 해서 부활의 진리를 부인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출애굽기 말씀 가운데서 부활의 진리를 말씀하였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지식적으로는 잘 알고 있었지만 그 속에 숨어 있는 깊은 진리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성경은 깊은 바다와 같아서 겉으로 볼 때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지만 조금만 깊이 들어가 보면 무궁무진한 영적 보화로 가득차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기 때문에 이성적으로는 숨은 비밀을 깨달아 알 수 없고 성령의 도우심을 받을 때만이 깨달아 알 수 있습니다. (딤후3:16, 벧후1:21)
2)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부활을 이 세상의 연장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부활 시에는 차원이 달라집니다. 부활하게 되면 우리는 천사와 같이 불멸의 영적 존재가 되어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을 하지 않게 됩니다. 이 세상은 죽음이 지배하기 때문에 종족을 보존하기 위해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이 필요하지만 부활하게 되면 죽음이 정복되므로 그런 일이 필요가 없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부활하게 되면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기 때문에 더 이상 죄의 소욕에 시달리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은 무에서 아름다운 세상을 창조하신 전능하신 분이시요, 생명의 주인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죽은 자 가운데서 능히 살리실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몸은 썩고 욕되고 추하고 연약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썩을 몸을 썩지 아니하고 신령하고 영광스럽고 강한 몸으로 부활시키사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토록 살 수 있게 하십니다 (고전15:42-44). 하나님은 능력이 무한하시기 때문에 능히 그렇게 하실 수 있습니다.
사두개인들의 문제는 하나님을 이성의 세계에 가두어 놓고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시킨 것입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그들이 성경으로 인정하는 출애굽기 3:6절 말씀을 인용하여 부활의 진리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26절을 보면 "죽은 자의 살아난다는 것을 말할진대 너희가 모세의 책 중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말씀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미디안 광야에서 40년동안 양을 치며 스스로 모든 것을 체념하고 있던 모세에게 나타나셔서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고 계시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원어로 보면 시제가 모두 현재형으로서 ➀나는 현재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현재 이삭의 하나님이요 현재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지금 아브라함 이삭 야곱 모두 살아있고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과거 아브라함이 살아있을 때 하나님이였고 가 아니라 나는 지금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은 항상 현재 살아계신 분이심을 말해 줍니다. 하나님은 영존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시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 시대나 이삭 시대나 야곱 시대나 모세 시대나 오늘날 우리 시대에도 항상 살아 계신 분이십니다. ➁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벌써 죽었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활시키사 지금 그들은 살아서 하나님을 섬기고 있음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➂ 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고 말씀하실 때 하나님은 개개인의 삶에서 역사하시는 인격적인 하나님이시요, 장구한 역사 속에서 세상 역사를 주관하고 계시는 역사의 하나님이시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맺은 언약을 기초로 역사하시는 언약의 하나님이심을 말씀해 줍니다. 하나님은 사두개인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과 같은 관념적이고 추상적이고 비인격적인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인격적이고 우리의 삶과 역사 속에서 살아서 역사하시는 역동적인 분이시요, 약속하시고 때가 되면 반드시 약속을 지키시는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요 모세의 하나님이시요 바로 오늘 나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더러운 세상에서 믿음으로 산 믿음의 조상들입니다. 그들은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며 이 땅에서는 나그네임을 자처하며 믿음으로 천막생활을 했습니다.(히11:9) 그들은 믿음으로 살다가 죽어 막벨라 굴에 장사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에게 부활의 새 생명을 주셔서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히 살게 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믿는 자에게 부활의 새 생명을 주셔서 영생을 누리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년수는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으로서 때가 되면 육신은 죽어 흙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만일 우리에게 영광스러운 부활이 없고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이 난다면 우리의 생이 얼마나 허무하고 비참하겠습니까? 인생에 아무런 소망이 없기 때문에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는 쾌락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살아 계셔서 믿음으로 사는 자에게 영광스러운 부활의 새 생명을 덧입혀 주셔서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토록 사랑하는 우리 주님과 함께 살게 하십니다. 우리에게 이러한 부활의 소망이 있기 때문에 이 땅에서 나그네의 인생을 살 수 있으며 또한 주님을 위해 기쁨으로 모든 것을 희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요한 웨슬리가 사역초기 미국 선교사로 나아갔습니다. 그는 옥스퍼드를 나와서 나름대로 많은 학식과 성경지식을 쌓았기 때문에 큰 역사를 이룰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완전히 실패하고 실의에 빠져 영국으로 배를 타고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이때 뜻밖에 풍랑이 일어 배가 뒤집힐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웨슬리는 두려움에 떨며 하나님을 원망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주여 제가 목회도 제대로 해보지도 못하고 이렇게 죽는 것 입니까?” 그런데 어디선가 힘찬 찬송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오 우리는 가네, 이 풍랑때문에 주님앞에 빨리 가네 주께서 주시는 평화의 가슴을 품은채 우리 주님께 나아가네. 그 땅에는 평화가 있네, 기쁨이 있네. 오 하나님 감사합니다” 그들은 모라비안 선교사들이었습니다. 웨슬리는 옥스퍼드를 나온 엘리트 목사였습니다. 성경지식은 누구보다 뛰어났습니다. 반면에 모라비안 선교사들은 아무 타이틀이 없었습니다. 성경지식도 웨슬리보다 뛰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부활신앙이 있었습니다. 실제적인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웨슬리에게는 부활신앙이 없었습니다. 이론적인 믿음은 있지만 실제적인 믿음이 없었던 것입니다. 때문에 똑같은 상황 앞에서도 떨고 두려워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이 체험을 통해 그가 얼마나 믿음이 없는 죽은 자와 같은가 발견하고 회개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그는 구원의 믿음을 체험하게 되었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전파하기에 힘을 썼습니다. 이로서 영국에서 감리교회가 시작되게 되었습니다.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성경지식을 많이 쌓는다고 힘을 발휘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마음에서 부터 살아계신 하나님, 산자의 하나님을 믿게 되었을 때에 능력있는 인생, 힘있는 인생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27절에서 결론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너희가 크게 오해하였도다." 죽은 자란 사두개인들과 같이 우리의 부활에 대한 믿음이 없는 자입니다. 부활의 믿음이 없는 자는 믿음이 없다보니 늘 생각이 부정적이고 운명적입니다. 이들의 말은 죽어 있고 생각도 죽어 있고 표정도 죽어 있고 행동도 죽어 있습니다. 이들은 안 된다, 힘들다, 불가능하다, 허무하다, 해도 소용없다, 무의미하다, 절망적이다, 되는게 없다 등의 부정적인 단어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리고 늘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을 의심하고 불신합니다. 이들은 살았으나 죽은 자들입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니체가 말했다 "하나님은 죽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니체가 죽었다" 하나님이 죽은 것이 아니라 죽은 사고 방법을 가진 니체가 죽은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을 만나 볼 수도 없고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반면 산 자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같이 부족하지만 우리의 부활을 믿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부활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자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 계셔서 새 생명을 주시는 생명의 주요 부활의 주이심을 믿는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은 믿음이 있다보니 하나님과 동행하며 위로부터 하나님의 생명을 덧입고 살아가기 때문에 늘 생명력이 넘칩니다. 이들의 말은 살아 있고 생각도 살아 있고 행동도 살아 있습니다. 이런 자들의 삶에는 죽음의 요소가 없습니다. 항상 믿음으로 말미암아 밝고 긍정적이고 생동감이 넘치며 희망찹니다. 이런 자들의 사전에는 불가능이란 단어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자들의 하나님이 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산 자의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우리 사랑의 교회는 사두개인들의 모습처럼 부활을 믿지못해 죽은 자로 살아가는 분이 한분도 없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같이 부활을 믿고 사심으로 은혜충만 생명충만 권세충만한 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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