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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가톨릭문화원 원문보기 글쓴이: 익명회원 입니다
축일 1월12일
필립보 라띠니라는 어느 청년은 꼬를레오네에서 신기료 장수를 하던 사람인데, 그 후에는 시실리 최고의 검객이 되었다고 한다. 그는 어떤 정치적인 분쟁에 뛰어들었다가 쫓기는 몸이 되자, 성당의 성소로 은신하여 목숨을 건졌다.그러나 밖으로 나갈 입장이 못되어서 성당에 머물다가 이런 생활을 계속하면 자기 영혼을 잃어버릴 것으로 단정하고, 1631년애 27세의 나이로 까푸친회에 입회하고, 베르나르도라고 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훌륭한 검객답게 수도 생활에서도 그 능력을 발휘하여 빠른 속도로 성장하였다. 그의 단식과 세상을 가볍게 여기는 자세는 특히 뛰어났으나, 가끔 난폭한 검객의 기질 때문에 큰 고생을 하였다고 한다. 그는 차츰차츰 탈혼에 빠졌고, 공중에 들어 올려지는 체험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날, 그는 병든 동물을 치유했는데, 이때부터 동물들을 지극히 사랑하였으며,가끔 동물들을 위하여 주의 기도를 함께 하였다. 그분만큼 동물 애호가는 없을 것이라고 한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그때부터 그는 훌륭한 검객답게 수도생활에서도 그 능력을 발휘하여 빠른 속도로 성장하였다. 그는 단식과 세상을 가볍게 여기는 자세에서 특별히 뛰어났으나, 가끔 난폭한 검객의 기질 때문에 큰 고생을 하였다고 한다. 그는 차츰차츰 탈혼에 빠졌고, 공중에 떠오르는 체험을 하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병든 동물을 치유했는데, 그때부터 동물들을 지극히 사랑하였으며 가끔 동물들을 위하여 주님의 기도를 함께 하기도 하였다. 성 베르나르두스 만큼 동물애호가는 없을 것이라고 한다. 팔레르모(Palermo)에서 사망한 그는 1768년 교황 클레멘스 13세(Clemens XIII)에 의해 시복되었고, 2001년 6월 10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꼴레오네의 성 베르나르도 필립 라티니(Philip Latini)는 1605년 2월 6일에 이태리의 시칠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신발을 만드는 사람이었고 그의 아들에게는 장사를 가르쳤다. 그의 마을과 그의 섬의 전설(전통)에 순수했던 그 젊은이는 격정적이며 공격적이었다. 가톨릭 신앙과 그안의 좋은 교육위에서 양육되었슴에도 불구하고 그는 군인이 되는 것과 검술연마에 온 시간을 보내는 것과 시칠리에서 최고의 검투사로서 명성을 얻는일에 더 흥미있어 했다. 그는 강한 체격이었고 겨루기 위해서는 누구에게나 기꺼이 도전했다. 하지만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불의에 무방비한 노인들을 보호하기위해 애썼고, 존경심을 보였고 심지어 돌봐주기까지 했다. 그는 성 프란치스꼬에게 기도했고 기도하기위해 성당(성인의 유골/유물이 모셔진 성당)을 방문하곤 했다. 하루는 한 어리석은 사나이가 칼로 승부를 겨루기위해 도전을 해왔다. 그 사나이는 심사숙고도, 충분한 수련도 없었기에 필립으로부터 손이 잘리는 심한 상처를 입었다. 그를 죽일뻔 했었다고(죽였었다고) 생각한 그는 성역인 카푸친 수도원으로 피하였다. 그가 저지른 일들의 반동(반작용)으로 그는 큰 후회를 하였고 인생 행로를 바꾸기로 결심했다. 1632년 12월 13일에 그는 카푸친 수련소에 받아들여졌고 베르나르도라는 이름을 받게되었다. 그는 그의 죄많음을 알고 그의 공격성을 거꾸로 돌렸다. 그는 거의 영구히 빵과 물만으로 수도생활을 하였고, 나무토막 베개를 베고 판자위에서 3시간만 잤으며, 하루에 7시간씩 피를 흘릴 때 까지 자신을 채찍질(편태)하였다. 만약 그에게 그 어떤 달콤하고 맛있는 음식이 주어지더라도 그는 먹지 않고 조금만 맛만 보곤 옆으로 떨어져서 그 안락함을 멀리하였다. 그는 그 어떤 새 의복도 입지 않으려 했고(않곤 했고) 그의 방에 그 어떤 새 가구도 들여놓지 않으려 했다(않곤 했다). 오랜시간 동안 그는 병을 돌봤으며(병자들을 돌봤으며), 시간의 흐름과 함께 그는 온화하고 친절해졌다. 하느님께선 기도안에서 그에게 기적들이라는 은총과 4개월 앞서 임종날짜를 알려주시는 선물을 포함한 큰 은총들을 베푸셨다. 그는 1667년 1월 12일에 시칠리의 팔레르모에서 임종했고, 1768년 5월 15일에 교황 클레멘스 13세에 의해 시복(諡福)되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2001년 6월 10일에 그를 시성(諡聖)하였다. *출처 : THE BULLETIN-NEWSMAGAZINE OF THE IRISH CAPUCHIN PROVINCE p.16-17, 2001년 3월호 필립보가 살던 그 당시에도 코를레오네는 여전히 부패와 폭력의 온상이었다. 비록 필립보 자신은 부패한 사람이 아니었지만 자라온 환경으로 인해 폭력의 맛을 몸으로 잘 알고 있었다. 아버지로부터 제화의 기술을 배우며 자라면서, 자기방어의 차원에서 스스로 검술을 익히긴 했지만 비위를 건드리면 거침없이 칼을 휘두를 다혈질 성질을 가진 그였다. 하지만 대부분의 시칠리아인들이 그렇듯이 필립보는 또한 경건하고 너그러운 면이 많은 청년이었다. 자주 거룩한 십자가의 성지에 가서 기도를 하곤 했고, 또한 토요일에는 성모님의 성상 앞에 등불을 봉헌하기도 했다 겨울에는 시내에서 아무 부끄러움 없이 빈곤한 죄수들을 위해 필수품을 구호하기도 했는데, 이러한 점은 그의 너그러움을 잘 드러내 주었다. 성 프란치스코에 대한 깊은 신심을 품었던 필립보였기에 차후에 그가 가지게 될 카푸친 프란치스코회 성소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 보고 있지만, 정작 필립보가 성 프란치스코를 따르기로 결심하게 했던 결정적인 동기는 그가 가진 경건함이나 너그러움이 아니라 그의 손에 쥐어진 피 묻은 칼날이었다.
같이 사는 형제들이나 가난한 방문객들을 모두 다 배불리 먹이면서도 정작 자신은 거의 일 년 내내 빵과 쓰디쓴 허브가 섞인 물만 먹으며 맛있는 음식을 입에 대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베르나르도 형제는 과거의 죄에 대한 회개와 절제의 미덕을 기르기 위해 단식으로뿐만 아니라 수많은 다른 고행과 보속 행위로 제 몸을 괴롭혔다. 베르나르도의 그림을 보면 여러 개의 끈을 단 ('디시필리나 - discliplina'라는) 채찍을 손에 든 채로 그려져 있는 것이 많은데, 증인들에 의하면 그는 피가 날 때까지 채찍으로 몸을 징벌하는 것을 좀처럼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 다른 사람에 대하여 안 좋게 말한 적이 거의 없었지만, 혹시나 자신도 모르게 자기변명의 소리가 입에서 나오면 그는 즉시 화로에서 꺼낸 뜨거운 석탄 한 조각을 입술에 스치곤 했다. 밤에는 나무토막을 베게로 삼아 잠을 청했고, 딱딱한 나무판이 그의 침대였으며 그나마 3시간 이상 잠을 자는 일이 없었다. 아예 잠을 자지 않은 적도 있는데 그럴 때는 다른 형제들이 잠자는 사이에 경당 안 감실 앞에 가서 홀로 계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밤새워 기도했다. 재난이나 역병이 일어났을 때, 성체 앞에서의 그의 기도는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그의 동포들을 위해서도 하느님의 자비를 간곡히 간구하는 기도였다. 그는 이렇게 기도했다. "부드럽게, 주님! 부드럽게! 저희에게 자비심을 보여주소서. 주님, 저는 이 은혜를 받고 싶사옵니다. 이것을 받고 싶사옵니다." 베르나르도는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무척 사랑했고,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하여 하신 예수님의 충만한 희생과 사랑을 자주 묵상하곤 했다. 베르나르도 형제는 매우 아름다운 휴대용 십자고상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그의 가장 소중한 보물이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형제들에게 직접 말하곤 했다. "신심을 일으키는 아름다운 십자고상이 집에 있으면 더 이상 바랄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누군가 문맹인 베르나르도 형제에게 읽고 쓰는 법을 배우도록 권고했을 때에 성인은 "우리가 공부해야 하는 것은 우리 구원자 그리스도의 상처들 뿐" 이라는 말로 대답했다. 베르나르도 형제는 그리스도를 이렇게 사랑함으로써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더욱 더 존경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영광송을 듣기만 해도 언제나 어디서나 엎드려 바닥에 입을 맞추곤 했다. 베르나르도 형제는 그리스도의 복되신 어머니에 대해서도 다정한 사랑을 품었다. 성모님을 늘 '어머니'라고 부르고, 일을 시작하기 전에 성모송을 바침으로써 그 어머니의 강복을 항상 구하곤 했다. 자기 독방에서도, 일터인 부엌에서도 성모님께 봉헌된 제단을 세워두고 자유시간이 되면 기도하기 위해 그 제단 앞으로 다가가곤 했다. 그리고 방에 세운 제단에는 매일 신선한 꽃다발과 향초다발을 성모상 앞에 바치곤 했다. 성모님께서도 베르나르도의 지극한 그 사랑에 보답하셨는데, 여러 번 그에게 나타나 아기 예수님을 베르나르도에게 안겨 주셨다고들 한다. 또 베르나르도 자신의 말에 의하면, 성모님 당신 축일을 맞을 때에는 맛있는 우유도 직접 마련해 주시기도 하셨다고 한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자주 권고하곤 했다. "우리 모든 필요에 있어서 복되신 우리의 어머니께 기도해드립시다." 그리고 초기 카푸친들의 은둔생활에 매료된 베르나르도 형제는 기도하기 위해 자주 리미티(Rimita) 근처의 숲에 있는 작은 성모 경당으로 빠져나가곤 했다. 진정한 관상자들이 ‘영과 진리 안에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린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그는 수도자가 창조주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게 되면 "세상에 있는 모든 곳은 성당이요, 기도실이 됩니다." 라고 주장했다. 베르나르도 형제는 성 요셉과 성 미카엘 대천사, 사도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성 프란치스코에게도 자주 정성껏 기도드리곤 했다. 이리하여 코를레오네 출신의 거칠고 성급한 이 검객은 하느님과 그분의 성인들, 또 동료 형제들과 도움을 청하는 모든 사람들, 아니 가축들조차도 다정하게 사랑함으로써 나이와 더불어 점차 마음씨가 온화한 거인이 되었다.
"수도생활은 정원과 같습니다. 그 정원에 한 종류의 나무만 있으면 아름답지도 곱지도 않습니다. 더 많은 종류가 있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수도생활은 서로 다른 수도자들이 있는데 그들 중에는 겸손에 뛰어난 이들이 있고, 애덕에 뛰어난 이들이 있으며, 순종에 있어서 뛰어난 이들도 있고, 참회에 있어서 뛰어난 이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생활의 엄격성이 당신 기대에 못 미치더라도 슬퍼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 코를레오네의 성 베르나르도
카푸친 작은 형제회(ofmcap)의 뿌리는 교회의 역사 안에서 그리스도를 가장 닮아 "제2의 그리스도" 라고 불리 우는 아씨시의 작고 가난한 성 프란치스코에게로 거슬러 올라 갑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예수님의 발자취를 철저하게 따랐으며 그의 형제적 사랑은 사람들 뿐만 아니라 모든 창조물에게까지 이르는 보편적인 것이었습니다. 1209년에 성 프란치스코는"작은 형제회" 또는 "더욱 작은 형제들"이라 불리 우는 수도회를 시작하였습니다. "카푸친 작은 형제회"는 이"작은 형제회"안의 개혁 운동으로 시작 되었는데 1528년 7월 3일 교황 클레멘스7세의 대칙서’Religionis Zelus’에 이어, 1619년 교황 오?세에 의해"작은 형제회" 세 개의 가지- OFM,OFMConv,OFMCap-중의 하나로 인가되었습니다. 카푸친 형제들은 관상기도,고행,엄격한 가난,가난한 이들에 대한 봉사에 헌신하였으며 복음에 대한 열렬한 설교자들이었습니다. 형제들은 단순한 전례 성서에 기반을 둔 설교,가난하고 소박한 생활 양식때문에 보통 사람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게 되었습니다. 카푸친이라는 이름도 긴 세모꼴 두건(capuce)이 달린 갈색 수도복을 입었던 형제들에게 대중들이 붙여준 카푸치니(capucini)라는 별명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세계 곳곳에 11.000여명의 카푸친 형제들이 그 전통에 따라 성 프란치코의 복음적 이상을 살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1986년에 아일랜드 관구에서 온 4명의 형제들에의해 그 현존이 시작되었고 현재는 한국 형제들을 포함하여 8명의 종신서원형제,4명의 유기서원 형제들이’천사들의 성마리아 효창동 형제회’와 수련소인’성 펠릭스 가평 형제회’ 그리고 인천 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는 형제들이 강화의 ’성요셉 형제회에서 형제적 삶을 살고 있습니다. *성 프란치스코의 카푸친 작은 형제회 카페에서* 새 성인 5명 탄생, 교황, 첫 레바논인 레베카 성녀에 "중동 평화 위해 기도 해주길 빌어" [바티칸=외신종합]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레바논의 첫 번째 본토 성인의 탄생을 포함해 모두 5명의 새로운 성인을 탄생시키고, 최근 격화되고 있는 중동 지역의 분쟁이 하루속히 해결될 수 있도록 노력하자고 6월 10일 시성식에서 권고했다.이날 시성식은 레바논에서 온 1만여명의 순례자들을 포함해 모두 3만명의 순례자들로 들어찬 로마 성 베드로 광장에서 거행됐다. 이날 함께 시성된 새 성인에는 에이즈 환자의 수호자로 알려져 있는 루이지 스크로소피 신부(1804~1884)도 포함돼 있다. 또 카푸친회 소속의 시칠리안 베르나르도 다 코를레오네(1605~1667)와 이탈리아의 사제로서 흠없는 동정성모회의 창설자인 아고스티노 로셀리 신부(1818~1902), 그리고 예수의 성심 수녀회 창설자인 이탈리아의 테레사 에우스토키오 베르테리(1801~1852) 등이 있다. 한편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이날 시성식으로써 재위 기간 동안 총 451명의 성인을 탄생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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