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많은 숫자가 매겨져 있는 인물은 이성환(국민동원총진회 이사장)·이승우(국민동원총진회 이사)·이광수(시인)로 이들은 모두 正자가 셋, 즉 15란 숫자가 매겨져 있다.
다음으로는 윤치호(연희전문 교장, 45년 12월 사망)와 주요한(시인)으로 13이라는 숫자가 매겨져 있으며, 뒤이어 김동환(시인)이 12, 고원훈(중추원 참의)· 조병상(종로경방단장·중추원 참의) 한상룡(조선총력연맹 사무총장)’등에게는 10이라는 숫자가 매겨져 있다.
박인덕(청화여숙장)·이종린(천도교 간부)·김활란(이화여전 교장) 신흥우(목사)·유진오(교육자) 등은 9, 김연수(경성방직 사장) 손영목(도지사)·모윤숙(시인)·최린(천도교 간부) 등은 8,
박흥식(조선비행기공업회사 사장)·장덕수(보성전문 교수)백철(문학평론가) 이성근(每新사장)·황신덕(교육자)은 6, 신태악(변호사) 김동원(평양상공회의소 회주)·박상준(귀족원 의원)·허하백(여성계 인사) 정인섭(교육자) 등은 5의 숫자가 매겨져 있다.
5 이상의 비교적 높은 숫자가 매겨진 인물들은 대부분 잘 알려진 친일파들이다. 그러나 민족 학살을 도모한 박춘금(대의당 당수)에게 2라는 비교적 낮은 숫자가 매겨지고, 1개군(郡)에서 비행기 1대씩 헌납하자고 주장했던 유명한 문명기(조선신문 사장)에게 1의 낮은 숫자가 매겨진 것은 이름 밑의 숫자가 친일 강도에 대한 절대적 분류는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준다.
이름 앞에 ‘가(假)’자가 부기된 두 인물이 있다. 이들은 박정형·정방오로, 반민특위가 구성될 무렵 애국지사로 자처하면서 상당한 세도를 부리던 인물이었다. 즉, 친일파이면서 애국자인 척하는 인물에게 ‘가’자를 붙인 것이다.
반민특위의 활동과 좌절.
‘반민족행위처벌법’은 제1장에 죄, 제2장에 특별조사위원회, 제3장에 특별재판부의 구성과 절차 그리고 부칙 등 전문 32조로 되어 있다.
이 법의 제1장 1조의 ‘죄’는 ‘일본정부와 통모하여 한일합병에 적극 협력한 자, 한국의 주권을 침해하는 조약 또는 문서에 조인한 자 및 모의한 자는 사형 또는 무기징역에 처하고, 그 재산과 유산의 전부 혹은 2분지 1 이상을 몰수한다’고 되어있다.
반민특위는 1949년 1월5일 중앙청 205호실에 사무실을 차리고 1월8일 제1호로 화신재벌 총수 박흥식을 화신백화점 4층 집무실에서 검거한 것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활동을 전개했다.
특위는 두번째로 해방후 자신 소유의 “대동신문”을 앞세워 반민법 제정 반대를 주장한 일본 헌병의 앞잡이 이종형을 구속하고, 3·1운동 당시 33인의 한 사람이었던 최린과 친일 변호사 이승우, 평안북도 경찰고등과장 등을 지낸 이성근을 구속하는 등 온국민의 열화와 같은 지지 속에 활발하게 활동했다.
그러나 특위 활동에 대한 이승만 정부의 방해는 집요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1949년 1월10일 “우리가 우리의 힘으로 주권을 회복했다면 이완용·송병준 등 반역 원괴를 다 처벌하고 공분을 씻어 민심을 안정케 하였을 것인데, 그렇지 못한 관계로 또 국제정세로 인하여 실시를 연기하여 왔으나 국권을 찾고 건국하는 오늘에 있어서는 공분도 다소 풀리고 형편도 많이 달라졌고...”라면서 친일파 숙청을 반대하는 내용의 담화를 발표해 반민특위의 반발을 샀다.
대통령 이승만의 이런 태도에 힘입어 반민특위에 가장 적대적으로 나온 세력은 당시 친일세력의 온상이었던 경찰과 친일인사 원용덕이 사령관으로 있던 헌병사령부였다.
친일경찰과 헌병사령부는 친일파는 남이 아니라는 듯 반민특위에 쫓기는 친일경찰들이 헌병사령부로 찾아가면 원용덕은 이들을 영관급으로 임용해 보호하기도 했다.
반민특위가 경찰청 수도청 부청장 최연, 김제경찰서장 이성엽, 전북도경 사찰과장 이안순, 경주경찰서장 서영출 등 30여명의 친일경찰을 구속하자 친일경찰들은 반민특위 요원을 암살하려 하였다.
수배중이던 유명한 악질 친일경찰 노덕술은 시경 수사과장 최난수, 사찰과 차석 홍택희 등과 함께 테러리스트 백민태를 사주해 김병로·권승렬·김상덕·김상돈 등을 암살하다 백민태의 자수로 폭로되기도 하였다.
악질 친일경찰 최연과 노덕술이 체포되자 이승만 대통령은 내무장관 신성모와 법무장관 이인을 불러 “반민특위에서 사람들을 마구 잡아들이고 고문한다”며 대책을 수립할 것을 지시하는 등 반민특위에 적대적인 모습을 드러냈으나 반민특위는 이에 굴하지 않고 일제시대 1,000여건의 사상범을 검거한 평북 고등과 사찰주임 김덕기에게 사형을 선고하는 등 친일파 숙청작업을 계속했다.
특위 활동에 불만을 품은 이승만 정부는 국회에 대한 직접 공격으로 나섰다.
반민특위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던 1949년 5월 제1차 국회 프락치사건이 발생해 국회의원 이문원·최태규 등 4명이 구속되고, 이어 6월에는 제2차 국회 프락치사건이 발생해 특위 위원 노일환과 서용길 등 13명의 의원이 구속됐다.
아직도 논란이 계속되고 있지만 국회 프락치사건은 국회를 현저하게 약화시켰다.
행정부의 이런 자세에 힘입은 경찰은 관제 군중을 동원해 특위를 직접 공격하기도 했다. 1949년 6월3일에는 관제 시위대가 특위 사무실을 포위하고 난입하려 했는데, 조사 결과 시경 사찰과장 최운하의 사주로 밝혀져 그를 구속하자 사찰경찰 150여명이 사표를 내는 소동을 벌이기도 했다.
드디어 친일경찰들은 직접 행동에 나섰다.
“웃어른께서도 말씀이 계셨으니 안심하고 특위 특경대를 무장해제시키라”는 내무차관 장경근의 지시에 따라 경찰은 그해 중부서장 윤기병 등의 지휘로 특위 특경대를 무장해제 시킨것이다.
친일경찰들의 특위 습격사건을 놓고 국회에서는 격론이 벌어졌다. 국회 내무치안위원장 라용균은 경무대에서 이승만을 만난 사실을 보고하면서 “특경대 무장해제는 국무회의를 거치지 않고 대통령이 친히 명령한 것”이라는 대통령의 전언을 공개해 이 사건의 배후에 이승만 대통령이 있음을 시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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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자료. ※
※ 정계. 관계. 실업계 인물. ※
이성환,이수우,윤치호,김연수,고원훈,신태악,조병상,여운홍, 인정식,박희도,이각종,김한경,김시권,박인덕,이정섭,김사연, 문명기,한상룡,정교원,차재정,이성근,박흥식,박춘금,안인식, 한규복,이종린,최린,최남선,박윤진,이돈화,장덕수,방응모,김석원, 김동원,가명 박정형, 가명 정방오, 김신석,손영목,고일청,차재명, 문덕상, 박상준,김오성 참고;김연수(인촌 김성수 동생), 여운홍(여운형 동생) 43명.
※ 언론계. 문학계. 연예계 인물. ※
김기진,박영희,정인택,이희적,이광수,주요한,김동환,김동인, 모윤숙,현영섭,백철,장혁주,이찬,김용제,최재서,이석훈,정인섭, 최승희(무용),오정민,김정의,박경조,김용환,이용설,홍해성, 유치진,김태진,박영호,이익,안석주,안종화,최인규,박기채, 방한준,서강백,홍양명,고승제,안함광,김억,이창수,이서구, 노천명,배상하,이영근,대조실신,송영,박순천 45명.
※ 교육계. ※
정남수(목사), 김활란(이대총장),장면(총리),허하백, 신흥우(목사),이헌구,이숙종,오긍선,양주삼(목사),유억겸, 유진오,송금선,황신덕,임국재,손정규,유각경,홍순원,고봉경, 김성수(동아일보사주).
19명 기타. 김정식,김선영,남기동,김용진,박영덕,이정수, 임영신(중앙대창설 초대 상공장관),노기환,김희영, 박휘언,이하영 11명.
아래는 <민족문제연구소>가 오랜 조사활동 끝에 확정지었다는 친일파 99인의 명단이다.
< 을사오적> 이완용 한일'합방'의 주역이었던 매국노의 대명사. 박제순 '을사조약' 체결에 도장 찍은 외교책임자. 권중현 친일로 한평생 걸은 대세영합론자. 이지용 나라를 판 돈으로 도박에 미친 백작. 이근택 근황주의자에서 친일매국노로의 변신.
< 일진회 관련자> 송병준 이완용과 쌍벽을 이룬 친일매국노 제1호. 이용구 친일 망동조직 일진회의 선봉장. 윤시병 만민공동회 회장에서 일진회 회장으로 변신. 윤갑병 '신일본주의'를 제창한 친일 출세주의자의 전형.
< 갑신·갑오개혁 관련자> 박영효 친일 거두가 된 개화파 영수. 김윤식 죽어서도 민족운동의 분열에 '기여'한 노회한 정객. 조중응 친일의 길이라면 물불 가리지 않았던 매국노. 장석주 이토 동상 건립추진운동의 주동자. 조희연 일본군의 조선침략에 앞장 선 군무대신. 윤치호 2대째 일본 귀족으로 입적한 '귀화한 일본인'. 정란교 박영효의 심복으로 친일 쿠데타의 돌격대. 신응희 3·1 운동의 무력진압 건의한 황해도 지사. 이규완 참정권 주장의 '선구자'.
< 을미사변 관련자> 이주회 동학농민군 진압한 명성황후 시해 주범. 이두황 이토 히로부미의 총애 받은 친일 무관. 우범선 민비시해사건의 주동자. 이진호 일제식민통치에 앞장 선 친일관료의 전형.
< 왕실·척족> 윤덕영 한일'합방'에 앞장 선 황실 외척세력의 주역. 민병석 조선인 대지주로 손꼽힌 민씨 척족의 대표. 민영휘 가렴주구로 이룬 조선 최고의 재산가. 김종한 고리대금업으로 치부한 매판자본의 선두주자.
< 관료> 박중양 3·1 운동 진압 직접 지휘한 대표적 친일파. 유성준 유만겸 유억겸 유길준의 양면성 '극복'한 유씨 일가의 친일상. 장헌식 중추원 칙임참의를 20년 간 역임한 일제의 충견. 고원훈 '일본의 수호신이 되어라'고 부르짖은 친일관료. 박상준 '불가능한 독립' 대신 '행복한 식민지' 택한 확신범. 석진형 총독부의 신임 두터웠던 절대 맹종파. 김대우 [황국신민의 서사] 입안자.
< 직업적 친일분자> 민원식 참정권 청원운동의 주동자. 배정자 정계의 요화(妖花)로 불렸던 고급 밀정. 선우순 내선일체론의 나팔수. 이각종 황국신민화운동의 기수. 박석윤 항일무장투쟁 파괴|분열의 선봉장. 박춘금 깡패에서 일본 국회의원까지 된 극렬 친일파. 현영섭 일본인 이상의 일본인 꿈꾼 몽상가. 이영근 황국신민화를 온몸으로 실천한 일본주의자. 이종형 독립운동가 체포로 악명 높았던 밀정.
< 경찰·군인> 김태석 강우규 의사 체포한 고등계 형사. 김덕기 항일무장투쟁 탄압의 선봉장. 전봉덕 화려한 경력으로 위장한 친일경찰의 본색. 김석원 일본 군국주의의 화신 가네야마 대좌. 정 훈 동포들을 사지로 몰아넣은 보도통제의 첨병.
< 경제> 한상룡 식민지 예속경제화의 첨병. 장직상 경북지방 최고의 친일 부호. 김갑순 역대 조선총독 열전각을 건축한 공주 갑부. 박영철 다채로운 이력의 전천후 친일파. 문명기 애국옹(愛國翁) 칭호 받은 친일 광신도. 박흥식 반민특위의 구속 1호였던 매판자본가의 전형. 김연수 민족자본가의 허상과 친일 예속자본가의 실상. 박승직 매판 상인자본가의 전형. 현준호 실력양성론자에서 친일파로 변신한 금융자본가. 문재철 암태도 소작쟁의 야기한 친일 거대지주.
< 언론> 진학문 일제 문화정치의 하수인. 장덕수 근대화 지상주의에 매몰된 재사. 서 춘 매일신보 주필로 맹활약한 친일언론의 기수.
< 학술> 정만조 친일유림의 대표자. 어윤적 유림 친일파의 앞잡이. 이능화 민족사 왜곡과 식민사학 확립의 주도자. 최남선 반민특위 법정에 선 독립선언서 기초자.
< 법조> 이승우 민족운동가 감시에 앞장 선 친일 법조인. 신태악 속물적 출세지향의 친일 변호사.
< 여성계> 김활란 친일의 길 걸은 여성 지도자의 대명사. 고황경 황도정신 선양에 앞장 선 여류 사회학자. 황신덕 제자를 정신대로 보낸 여성 교육자. 박인덕 황국신민이 된 여성 계몽운동가. more? Click here!
< 문학> 이인직 친일문학의 선구자. 이광수 민족개조 부르짖은 변절 지식인의 대명사. 김동인 예술지상주의의 파탄과 친일문학가로의 전락. 주요한 대동아공영의 꿈 읊조린 어릿광대. 김동환 각종 친일단체의 핵심으로 맹활약한 친일시인. 모윤숙 여성 교화사업의 첨병. 유치진 친일 '국민연극' 주도한 근대연극사의 거두. 최재서 서구적 지성론자에서 천황숭배론자로. 백 철 인간탐구론자에서 국민문학론자로. 김기진 황국문학의 품으로 투항한 계급문학의 전사. 박영희 카프문학의 맹장에서 친일문학의 선봉으로.
< 음악·미술> 홍난파 민족음악개량운동에서 친일음악운동으로. 현제명 일제말 친일음악계의 대부. 김은호 친일파로 전락한 어용화사(御用畵師). 김기창 스승에게 물려받은 친일화가의 길. 심형구 친일파 미술계를 주도한 선봉장. 김인승 도쿄미술학교 우등생이 친일에도 우등.
< 종교> 최린 반민특위 법정에 선 독립선언의 주역. 박희도 시류 따라 기웃거린 기회주의지의 변절 행로. 정춘수 감리교 황민화의 앞잡이. 정인과 장로교 황민화의 선봉장. 전필순 혁신교단 조직한 기독교 황민화의 앞잡이. 김길창 신사참배 앞장 선 친일 거물 목사. 이회광 불교계의 이완용. 이종욱 항일투사에서 불교 친일화의 기수로. 권상로 불교계 최고의 친일학승. 김태흡 조선 제일의 친일 포교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