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4143
2월23일[연중 제7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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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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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GTcm5TQUGZg
[서울대교구 이상향 사도 요한(용마산성당 주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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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힘겹지만, 다시 한번 원수 사랑이라는 그 힘겨운 과제를!>
우리가 생활 중에 가끔 겪는 일입니다. 환대와 친절이 아니라 냉대와 불친절로 인한 모욕감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특히 요즘 호칭부터 주의해야 할 것 같습니다. ‘고객님’ 아니면 ‘선생님’ 하면 될 것을 가지고 ‘아버님’ ‘어르신’ ‘할아버지’ 이쪽으로 오세요, 라고 하니, 마음속으로부터 불길이 솟아오릅니다. ‘지가 나를 언제 봤다고 아버님이야?’ ‘내가 아직 이렇게 팔팔한데 어르신이라니’, 하는 마음에 분노가 치밀어오르기도 합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서비스 빵점에 맛도 별로인 음식점에 들어갈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반응하나요? ‘쯧쯧쯧쯧, 음식 맛이라고는...보아하니 곧 문 닫겠군.’ 힘든 존재로 인한 괴로움도 만만치 않습니다. 나를 지속적으로 힘들게 하는 존재를 향해 어떤 사람들은 이런 마음까지 먹습니다. ‘저 사람이 팍 꼬꾸라졌으면’ 더 나아가서 이런 악담까지 서슴지 않습니다. ‘귀신은 뭐하나 저 사람 빨리 안 데려가고.’
그런데 이런 우리를 향해 주님께서는 그래서는 안 된다고 간곡히 타이르십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 주고,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에 축복하며, 너희를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네 뺨을 때리는 자에게 다른 뺨을 내밀고, 네 겉옷을 가져가는 자는 속옷도 가져가게 내버려 두어라.”(루카 6.27-29)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노라니, 제 가슴이 철렁 내려앉습니다. 그간 얼마나 자주, 누군가를 향해 미워했는지 모릅니다. 그간 셀 수도 없이 마음속으로 누군가를 향해 저주하였는지 모릅니다. 이거 어떡하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새 포도주로 오신 예수님께서는 기존의 관행이나 사고방식을 완전히 뒤집어놓으셨습니다. 그간의 유다 관습에 따르면 살인자는 사형에 처해져야 했습니다. 짐승의 목숨을 해친 사람은 살아있는 짐승으로 되갚아야 했습니다. 동족의 팔을 부러트린 사람은 자신의 팔도 부러트리게 해야 했습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동태복수법이 자연스럽게 적용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게 무슨 소리냐며, 사랑의 율법을 선포하십니다. 죽음에는 죽음, 행위에 상응하는 보상과 처벌의 균형은 더 이상 예수님 앞에 유지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안하신 사랑의 율법에 따르면 마음속에 있는 미워하는 마음 자체가 이미 처벌과 심판의 대상입니다. 남을 혐오하고 경시하며 배척하는 마음, 그것은 이미 살인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누구나 다 살인자입니다.
미움과 분노, 대립과 불목이 있는 공동체는 하느님께 예배를 드리는 데 합당치 않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드리는 전례는 공허하고 무의미한 것으로 전락합니다. 힘겹지만, 다시 한번 원수 사랑이라는 그 힘겨운 과제를 새롭게 시작해야겠습니다.
또 다른 순교라고 할수 있는 원수 사랑은 그냥 맨정신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지속적인 기도 속에는 원수 사랑이라는 기적이 가능합니다. 매일 매 순간 우리 손에 십자가와 묵주를 쥐고, 예수님과 성모님의 일생을 정성껏 묵상할 때, 우리는 하루 온종일을 주님 현존 속에 머물게 되고, 그때 또 다른 순교인 원수 사랑이 가능할 것입니다. 우리가 수시로 주님께 쏘아 올리는 화살기도 역시 주님 현존을 우리 매일의 삶 속으로 하느님의 현존을 불러와 원수까지 사랑하게 하는 힘입니다.
위대한 우리의 순교자들은 혹독한 고통과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끊임없이 묵주를 돌리면서, 수시로 화살기도를 쏘아 올리면서, 주님께서 자신들의 삶 속에 굳건히 현존하심을 기억했습니다. 그 결과가 자신의 목을 내리치는 휘광이들까지도 사랑할 수 있게 되었으며, 그 결실은 영예로운 순교로 이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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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xjMfjendkV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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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어떻게 하느님 자녀의 자격일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해야만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그 원수도 하느님의 자녀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생명을 살리는 일이라면, 미움은 생명을 죽이는 일입니다. 형제가 형제의 생명을 죽이는데, 어떻게 하느님께서 그 아이를 자녀라고 계속 인정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한창 윤석열 대통령의 탄핵 심판 절차가 진행 중입니다. 핵심은 무엇일까요? 헌법에 따르면 모든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옵니다. 그러니까 국민이 아버지라 할 수 있습니다. 윤석열 측이 주장하는 바 대로라면 이 계엄은 ‘계몽’을 위한 목적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계몽을 위해 형제의 목에 칼을 들이댄 것에 대해 국민들이 ‘아, 이것은 형제의 잘못을 알리기 위한 것이었으니 이해할 수 있다!’라고 해야 당연할까요? 그것을 당하는 측은 생명의 위협을 느꼈습니다.
이는 옳고 그름보다 더 중요한 인간 존엄을 무시한 행위이기 때문에 그 생명을 주신 이에게 심판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자비’는 아버지에게 합당한 자녀로 인정받는 가장 중요한 요소임은 틀림없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카인의 예에서 발견할 수 있듯이, 하느님은 형제의 생명에 위협을 가한 자녀를 계속 자녀로 인정할 수는 없습니다.
영화 ‘핵소 고지(Hacksaw Ridge)’는 2차 세계대전 당시 75명을 구한 실제 인물인 데스몬드 도스(Desmond Doss)의 삶을 바탕으로 제작되었습니다. 데스몬드 도스는 종교적·도덕적 신념 때문에 총을 들지 않는, 이른바 ‘양심적 병역 거부자’임에도 불구하고 전쟁터에서 수많은 전우의 생명을 구해냈습니다.
데스몬드와 어떻게 생명에 대해 소중함을 알 수 있었을까요? 그는 형제에게 치명상을 입힐 뻔했던 사건과 아버지에게 총을 들이댄 일을 통해 “어떠한 경우에도 다른 이의 생명을 위협해서는 안 된다.”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옳고 그름도 생명을 위협하는 일을 합리화 할 수는 없습니다.
데스몬드 도스의 아버지는 1차 세계대전 참전 용사로, 전쟁 후유증과 알코올 의존으로 인해 폭력적으로 변한 인물로 그려집니다. 가족에게 거친 언행을 일삼았고, 때때로 총기를 꺼내 위협하기도 했습니다.
어느 날, 아버지가 심하게 술에 취해 어머니에게 폭력을 가하려 들자, 이를 본 도스가 아버지의 총을 빼앗아 아버지를 향해 총구를 겨누는 충격적인 상황이 벌어집니다. 그 순간 도스는 “내가 사랑하는 가족을 지키려다가, 오히려 아버지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지 않은가?”라는 사실에 전율을 느낍니다. 그는 어린 시절 형에게 가한 폭력의 기억까지 겹치면서, “가족 간에조차, 아니 누구에게라도 총을 겨누는 순간 인간의 자격을 잃게 된다.”라는 걸 절감하게 됩니다.
용서는 결국 용서받는 대상은 물론이요 더 많은 이의 생명을 구하는 길입니다. 저희 어머니도 고아로 자라면서 당신을 학대하는 어른들에게 지쳐 그들도 죽이고 당신도 죽어야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물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께서 나병 환자촌으로 들어가시며 “저들도 사는데, 넌 왜 못 사니?”라고 하시는 것을 듣고는 당신 생각을 접습니다.
만약 그 생각을 접지 않았다면 저도 태어날 수 없었을 것이고 많은 이가 죽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어머니가 하느님께 가셨을 때는 하느님께 용서받은 자로서의 자격이 없음을 깨닫고 스스로 지옥을 선택했을 것입니다.
용서는 용서받았으니 가능합니다. 만약 아이가 걸음마를 할 때마다 못했다고 때린다고 하면 아이는 온전한 인간이 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부모는 자기 부모에게 사랑받았으면서 그렇게 했기 때문에 부모의 자녀라고 할 자격도 없습니다.
용서해도 그 사람이 변하지 않으면 어떻게 하느냐고 물을 수도 있습니다. 장 발장과 자비르 경감의 예처럼 장 발장은 용서받아 용서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고 자비르 경감은 그 용서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계속 용서하지 않는 자로 남아있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살을 선택합니다. 심판은 주님의 몫입니다. 우리는 용서받은 자로서 용서하는 자녀의 모습만 보이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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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토핑 경제’라는 말이 있습니다. 피자에 소비자가 원하는 재료를 선택해서 올려놓는데 그렇게 올려놓는 재료를 ‘토핑’이라고 합니다. 상품에는 ‘포디즘(Fordism)’이 경쟁력이 있었습니다. 포드 자동차는 세계 최초로 자동차를 조립형 라인으로 생산했습니다. 조립형 라인으로 자동차의 생산이 증가했고, 소비자는 더 싼 값에 자동차를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생산 방식은 전 산업에 확대되었습니다. 소비자는 맞춤형보다는 기성품에 만족하였습니다.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소비자는 선택한 제품에 자기만의 ‘토핑’을 더하면서 자기만의 개성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아이스크림에도 여러 토핑을 첨가해서 자신만의 아이스크림을 찾아내고, 옷에도 여러 토핑을 첨가해서 자신만의 옷을 입으려 합니다. 이는 신발, 스마트 폰, 가방, 가구에도 적용되고 있습니다. 인공지능 AI가 등장하면서 여성들이 바르는 파운데이션에도 새로운 모델이 등장한다고 합니다. 사람의 피부 색조와 어울리는 파운데이션을 AI가 만들어 준다고 합니다. 전에는 색조가 3개였는데, 파운데이션의 색조가 30,000개가 넘는다고 합니다.
있는 물건의 기능도 잘 모르는 저와 같은 세대는 ‘토핑’이라는 말이 생소하지만, 저도 토핑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2005년입니다. 저는 당시 토론토에서 지냈습니다. 거리의 핫도그 가게에서 핫도그를 먹으면서 다양한 토핑을 보았습니다. 저는 제가 좋아하는 토핑을 골라서 핫도그에 넣어 먹었습니다. 요즘도 이런 토핑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제가 자주 가는 샤부샤부 집이 있습니다. 그곳에는 5가지 정도의 국물이 있어서 입맛에 맞는 국물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고기를 찍어 먹을 양념장도 여러 가지 양념을 배합해서 만들 수 있습니다. 어묵, 조개, 계, 라면, 떡, 채소를 골고루 선택해서 국물에 넣어 맛을 낼 수 있습니다. 고기의 종류도 여러 가지여서 취향에 따라서 고기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토핑은 획일적인 삶에 다양성을 제공하며 활력을 줍니다. 토핑은 나만의 개성을 드러낼 수 있도록 해 줍니다. 토핑이 케이크의 크림처럼 돋보이려면 기본적으로 케이크의 빵이 맛있어야 합니다. 빵이 맛이 없다면, 기본이 충실하지 않다면 토핑이 많아도 소비자는 외면하기 마련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토핑’이 있습니다. 여러 신심 단체가 있습니다. 레지오, 성가대, 헌화회, 제대회, 독서단, 해설단, 반주단, 복사단이 있습니다. 구역 모임이 있습니다. 한국학교가 있습니다. 주일마다 미사 후에 친교가 있습니다. 사목회를 중심으로 여러 행사가 있습니다. 사순 피정, 부활절, 세례식, 견진성사, 성모의 밤, 청소년 음악회, 유소년그룹 피정, 본당의 날, 성령 찬양의 밤, 걷기 대회, 자선 음악회, 대림 피정, 성탄절, 송년 미사가 있습니다. 재정이 허락하면 더 많은 토핑을 만들 수 있습니다. 시니어 아카데미도 만들고, 학생들을 대상으로 취미 교실을 만들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많은 토핑이 있지만 신앙생활의 중심은 ‘미사’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남겨주신 마지막 유산은 ‘미사’이기 때문입니다. 미사는 말씀의 전례와 성찬의 전례로 이루어집니다. 미사에 온전히 참례하기 위해서는 말씀을 가까이해야 합니다. 미사에 온전히 참례하기 위해서는 주님의 성체를 온전히 모셔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나의 몸을 ‘감실’로 만들어야 합니다. 고백성사로 몸과 마음을 정결하게 해야 합니다. 겸손과 순명으로 주님을 모셔야 합니다.
오늘 제2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흙으로 된 그 사람의 모습을 지녔듯이, 하늘에 속한 그분의 모습도 지니게 될 것입니다.” 흙으로 된 사람의 모습은 ‘토핑’과 같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세상이 것들을 추구합니다. 성공, 명예, 권력, 재물, 학력, 건강, 직장은 우리들이 좋아하는 토핑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것을 얻기 위해서 땀을 흘리고, 밤을 새우고, 노력합니다. 앞에 가는 사람은 끌어 내리려 하고, 뒤에 오는 사람은 밀쳐내려고 합니다. 이것이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인은 하늘의 속한 그분의 모습을 지녀야 합니다. 그것은 나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는 겁니다. 나를 죽이려고 했던 사람까지도 용서하는 겁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다윗은 사울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사울은 시기와 질투 때문에 다윗을 죽이려고 했지만, 다윗은 사울을 용서하였습니다. 다윗은 하늘에 속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늘에 속한 사람이 가져야 할 삶의 태도를 명확하게 말씀하십니다. 첫째는 나에게 잘못한 사람까지 용서하고, 사랑하는 겁니다. 둘째는 내가 원하는 것을 상대방에게 해 주라는 겁니다. 셋째는 하느님께서 자비하시니, 우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겁니다. 이렇게 하늘의 것이 나의 삶에 자리 잡을 때, 우리는 세상의 것들을 토핑으로 더할 수 있습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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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삼의딸들수녀회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님]
“기름부음받은이”(1사무 26,9)는 축성된 이를 가리킵니다. 구약에서는 왕, 사제, 예언자가 물질적인 기름부음으로 하느님의 일을 하도록 축성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최초의 임금으로 기름부음받아 성별된 사울에 대한 다윗의 충정은 영웅적입니다. 이는 사울을 존경해서라기보다는 그를 임금으로 축성하신 하느님에 대한 경외와 충실일 것입니다.
그런데 신약에 이르면 단연 탁월하게 축성된 분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물리적인 기름이 아니라 요르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으로 기름부음받고 축성되십니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가 말하듯이 구약에서 물질적인 것으로 예표되던 것들은 이제 신약에서 영적인 것으로 실현되어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기름부음받으시고’(그리스 말로 ‘크리스토스’는 ‘기름발린 이’라는 뜻) 우주의 임금이 되십니다. 다윗이 물질적인 기름으로 축성된 사울 임금에게 보인 존경이 그러하다면 성부에게서 성령으로 기름부음받으시어 축성되신 그리스도에 대한 존경은 어떠해야 할까요!
오늘 복음이 요구하는 행동 방식은 인간적으로는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동기는 결국 “지극히 높으신 분”(루카 6,35) 하느님이십니다. 자신을 죽이려고 찾아다니던 사울을 살려 줌으로써 오늘 복음에서 말하는 원수 사랑의 탁월한 본보기를 보여 주는 다윗이 하느님에 대한 경외심으로 그러하였듯이 말입니다. 우리의 용서와 자비의 기준은 인간이 아니라 하느님이십니다.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6,36) 자비로울 수 있는 은총을 청합시다. 우리가 베푸는 용서와 자비는 더 높은 수준으로 돌려받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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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6,27-38: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지난 주일에 우리는 우리의 가치관이 바뀌어 진정 가난한 마음으로 축복을 가질 수 있는 혁명적인 말씀을 들었는데, 오늘도 우리를 사랑하든 미워하든, 우리에게 선을 행하든 악을 행하든 상관없이 다만 이웃이라는 이유로 다른 사람을 찾으라는 이 사랑의 선언도 혁명적이라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오늘날 이기적이고 물질적인 가치관이 중요한 이 세상에서 이와 같은 조건 없는 사랑의 증거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오늘 복음은 가르치고 있다. 이 사랑의 예가 다윗에게서 나타난다. 다윗은 그를 죽이러 온 사울 왕을(1사무 26,2) 죽일 기회를 잡았지만, 목숨을 살려줄 뿐만 아니라, 또한 그를 용서하면서 사울 왕에 대한 심판을 하느님께 맡긴다. “주님은 누구에게나 그 의로움과 진실을 되갚아 주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주님께서 임금님을 제 손에 넘겨주셨지만, 저는 주님의 기름 부음 받은 이에게 손을 대려 하지 않았습니다.”(1사무 26,23) 이것이 그의 하느님께 대한 신앙이다. 다윗은 자신의 신앙으로 부정적인 태도를 긍정적인 태도로 바꾸어 놓음으로써 사울이 어리석은 사악함을 극복하고 하느님을 만나게 한다. 이것은 오늘 복음의 예시로 보인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 전에 이미 그와 같은 삶을 다윗이 살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오늘 복음의 이 특별한 사랑에 대한 가르침은 세 대목으로 나누어진다. 첫째 대목(27-30절)은 가장 강하고 선동적이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잘해주고, 네 뺨을 때리는 자에게 다른 뺨을 내밀고, 네 겉옷을 가져가는 자는 속옷도 가져가게 내버려 두어라. 달라고 하면 누구에게나 주고, 네 것을 가져가는 이에게서 되찾으려고 하지 마라.” 원수에 대한 사랑이다. 이 사랑은 일반적인 자비의 마음이 아니라, 적개심을 능동적인 사랑의 구체적인 행위로 바꾸어 놓음으로써 그들을 축복하고 우리에게 악을 행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해 주기를 요구한다(28절). 이때 그리스도인은 인간들 사이에 새로운 사회생활을 창조해 나갈 수 있다. 오로지 새로운 인간관계를 창조할 수 있는 성실한 사랑만이 비비 꼬여있는 폭력의 형태를 부숴 버릴 수 있고 인간관계에 깊이 박혀있는 악의 뿌리를 뽑아버릴 수 있다.
LA에서 폭동이 일어났을 때였다. 한인들이 큰 피해를 보았던 사건이었다. 한 신자는 흑인이 많이 사는 곳에서 조그만 가게를 운영하고 있었다. 흑인들이 들어오면 그냥 훔쳐 가는 일이 많았다. 그것을 어떻게 해결할까 하고 생각한 끝에 그때부터 그들에게 “너를 믿어!”라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얼마가 지나자 그들은 주인 앞에 와서 돈을 치르면서, 주머니를 뒤집어 보이고 자기는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는다고 말하더라는 것이다. 이렇게 그들과의 관계가 좋아졌을 때, 흑인 폭동이 일어났다. 그때 흑인들은 한인들의 상가를 불을 지르면서 피해를 줬다. 그러나 그 상점은 피해를 보지 않았다. 거기에 오던 흑인들이 모두 지붕 위로 올라가서 “이 가게를 불 지르려면 우리도 함께 타 죽겠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그 가게는 아무 일이 없었다고 하면서, 인격적인 관계는 이 위험을 피하게 해 주었다는 말을 들은 일이 있다.
두 번째 대목(32-36절)은 우리가 원수를 사랑해야 하는 이유를 말해주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따라야 하는 하느님 사랑이 순수한 조건 없는 사랑이기 때문이다. 이 사랑이 바로 창조적 사랑이다. 우리가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한다면 그것은 상호교환에 불과하고 상업적인 행위이고 계산이 들어있는 사랑의 유사품이다. 우리가 본받아야 할 하느님의 사랑은 이해타산이 없다. 하느님은 착한 사람들과 그 은혜를 아는 이들에게 하시듯이 “은혜를 모르는 자들과 악한 자들에게도 인자하시기 때문이다.”(35절) 우리가 이 사랑을 실천하려 노력하며 그분이 보여주신 조건 없는 무한한 사랑과 자비와 용서의 능력을 재생시켜 감으로써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자녀가”(35절) 될 것이다. 하느님의 자녀라고 하는 것은 바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이신 하느님처럼 사랑할 수 있고 또 그러한 사랑으로 초대받은 사람들이다.
이렇게 할 때 우리가 실천한 사랑은 더욱 충만하게 우리에게로 되돌아올 것이다. 이에 대해 세 번째 대목(37-38절)이 말해주고 있다. 자녀들은 자기 형제들에게 베푼 사랑에 대해 하느님께로부터 갚음을 받는다는 것이다. 즉 하느님은 이 무조건적 사랑의 원인도 되시고 모델이시며 내용이 되신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또한 온전히 온 힘을 다해 사랑할 때 그 사랑은 이미 보상을 받는다. 그러한 사랑을 통해 하느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랑의 문화를 이루라고 바오로 6세 교황께서는 말씀하셨다. 사랑의 유일한 원천이신 하느님을 거부하는 곳에는 사람들이 서로 서로에게 위험한 존재로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매일 신문의 사회면의 사건들을 통해서 우리는 알 수 있다.
오늘의 코린토 서간은 육체의 부활에 관한 내용이지만, 우리 자신의 모습에 대한 말씀이기도 하다. 우리가 비록 세상에 살고 있지만,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본받고 그 사랑을 실천한다면 우리는 바로 하느님의 자녀로서 그 아들의 모습을 갖게 될 것이고 그 모습을 이루어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닮게 되고 하느님 아들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는 마땅히 이러한 삶으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어야 한다. 진정한 인격적인 관계를 통해 적개심을 품게 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로 사랑하기 시작하여 다윗과 같이 다른 사람이 하느님을 만날 수 있도록 사랑으로 대해줄 수 있는 삶을 노력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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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사랑 실천의 완성’입니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은 사랑한다. 너희가 자기에게 잘해 주는 이들에게만 잘해 준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그것은 한다. 너희가 도로 받을 가망이 있는 이들에게만 꾸어 준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고스란히 되받을 요량으로 서로 꾸어 준다. 그러나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에게 잘해 주고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어라. 그러면 너희가 받을 상이 클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자녀가 될 것이다. 그분께서는 은혜를 모르는 자들과 악한 자들에게도 인자하시기 때문이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 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루카 6,32-38)
1) 하느님 앞에서 ‘모든 사람’은 이웃이고, 형제입니다. 따라서 ‘원수’인 사람은 원래 없습니다. ‘원수’는 내가 내 마음대로 ‘원수’라고 생각하는 이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원수를 사랑하여라.”라는 예수님의 계명은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태 22,39)라는 계명에 포함되는 계명이고, ‘이웃 사랑 실천’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는 실천 지침입니다.
‘원수 같은 사람’도 사랑할 때 이웃 사랑 실천이 완성됩니다. 여기서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라는 말씀이 마태오복음에는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8)로 표현되어 있는데, 두 말씀을 합해서 생각하면, ‘하느님의 완전한 자비’를 본받는 사랑 실천을 해야만 ‘완전한 사랑’을 실천할 수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2) 사도 요한은 ‘완전한 사랑’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되었다는 것은,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분처럼 살고 있기에 우리가 심판 날에 확신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에서 드러납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냅니다. 두려움은 벌과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두려워하는 이는 아직 자기의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1요한 4,17-18)
이 말은 ‘완전한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만이 심판 때에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만일에 ‘원수 같은 사람’은 미워하고, 좋아하는 사람만 사랑한다면,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것이고, 그렇게 해서는 심판 때에 구원을 확신할 수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즉 구원받지 못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한 말을 다시 정리하면, 원수 같은 사람도 사랑해야 하는 것은, 바로 내가 구원받기 위해서입니다. 바로 나 자신의 구원을 위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원수 같은 그 사람도 나의 사랑을 받아들여서, 그와 내가 화해한다면, 두 사람이 함께 구원받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두 사람 모두에게 큰 기쁨이 되고, 주님께도 큰 기쁨을 드리는 일이 됩니다.
3) 원수 같은 사람을 사랑한 실제 예로, 스테파노 순교자와 하나니아스와 바르나바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스테파노 순교자는 순교할 때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라고 기도했습니다.(사도 7,60)
그 기도는 박해자들을 용서한다는 기도이기도 하고, 박해자들의 회개와 구원을 간청하는 기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 기도는 원수 같은 사람을 사랑한 대표적인 예가 됩니다.
하나니아스는 주님께서 지시하신 대로 박해자 사울에게 가서 안수를 해 주었고, 또 세례를 주었습니다.(사도 9,10-19) 주님께서 지시하셔서 한 일이지만,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했다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니아스는 진심으로 주님 말씀에 순종했을 것입니다. 그가 박해자 사울에게 안수를 해 주고, 세례를 준 일도 원수 같은 사람을 사랑한 좋은 예입니다. 바르나바는 박해자였던 사울의 회심을 믿지 못하는 당시의 교회 공동체가 그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중개 역할을 했습니다.(사도 9,26-27)
박해자 사울이 회심해서 위대한 사도 바오로가 된 것은, 예수님께서 직접 하신 일이지만, 이렇게 스테파노와 하나니아스와 바르나바가 “원수를 사랑하여라.”라는 계명을 적극적으로 실천한 것도 큰 비중을 차지합니다.
4) “원수를 사랑하여라.”라는 예수님의 계명은, ‘악’을 내버려 두라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악’을 물리치고 ‘정의와 선’을 실현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방법은 ‘복수’가 아니라 ‘사랑’이어야 한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바로 그 문제에 대해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스스로 복수할 생각을 하지 말고 하느님의 진노에 맡기십시오. 성경에서도 ‘복수는 내가 할 일, 내가 보복하리라.’ 하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오히려 ‘그대의 원수가 주리거든 먹을 것을 주고, 목말라하거든 마실 것을 주십시오. 그렇게 하는 것은 그대가 숯불을 그의 머리에 놓는 셈입니다.’ 악에 굴복당하지 말고 선으로 악을 굴복시키십시오."(로마 12,19-21)
<바오로 사도는 “원수를 사랑하여라.”라는 계명의 위대함을 자신이 직접 체험했기 때문에, 선으로 악을 굴복시킬 수 있음을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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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사랑이 자유롭게 하리라>
루카 6,27-38 (원수를 사랑하여라,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내 말을 듣고 있는 너희에게 내가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 주고,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에게 축복하며, 너희를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네 뺨을 때리는 자에게 다른 뺨을 내밀고, 네 겉옷을 가져가는 자는 속옷도 가져가게 내버려 두어라. 달라고 하면 누구에게나 주고, 네 것을 가져가는 이에게서 되찾으려고 하지 마라.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은 사랑한다. 너희가 자기에게 잘해 주는 이들에게만 잘해 준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그것은 한다. 너희가 도로 받을 가망이 있는 이들에게만 꾸어 준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고스란히 되받을 요량으로 서로 꾸어 준다. 그러나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에게 잘해 주고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어라. 그러면 너희가 받을 상이 클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자녀가 될 것이다. 그분께서는 은혜를 모르는 자들과 악한 자들에게도 인자하시기 때문이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
<사랑이 자유롭게 하리라>
사랑은
온 누리에 깃드니
사랑이 자유롭게 하리라
사랑은
모든 이를 품으니
사랑이 자유롭게 하리라
사랑은
처음과 끝이 없으니
사랑이 자유롭게 하리라
사랑은
까닭이 없으니
사랑이 자유롭게 하리라
사랑은
핑계를 모르니
사랑이 자유롭게 하리라
사랑은
바라지 않으니
사랑이 자유롭게 하리라
사랑은
가르지 않으니
사랑이 자유롭게 하리라
사랑은
멈추지 않으니
사랑이 자유롭게 하리라
사랑은
물러서지 않으니
사랑이 자유롭게 하리라
사랑은
움켜쥐지 않으니
사랑이 자유롭게 하리라
사랑은
움츠리지 않으니
사랑이 자유롭게 하리라
사랑은
얽매이지 않으니
사랑이 자유롭게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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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그리스도인의 삶의 특징>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의 허물과 잘못, 죄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배은망덕”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를 사랑해 주십니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변함없이 사랑하십니다. 그 큰 사랑을 받으면서도 우리의 마음은 왜 그리 좁은지 모르겠습니다. 우리의 마음도 커졌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특징에 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 말을 듣고 있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 주고,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에게 축복하며, 너희를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루카 6,27-28)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선택사항이 아니라 명령입니다. 만약, 이를 실천하지 않는다면 나는 그리스도인이 아닌가요? “물론 그리스도인입니다. 왜냐하면 세례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행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그리스도인답게 살고 있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세상의 이치에 따라 이방인처럼 살고 있는 것입니다.”(프란치스코 교황)
그리스도인은 십자가의 어리석음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요? 그러나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함께해 주시고, 예수님께서 우리의 한계를 뛰어넘어 가장 위대한 사랑을 할 수 있도록 변화시켜 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인간이 되신 주님 사랑 덕분에 우리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도, 우리에게 악을 행하는 사람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경계와 장벽을 초월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절정에 도달하는 사랑의 논리는 그리스도인의 특징입니다. 사랑보다 더 위대하고 더 풍요로운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실 때 “아버지, 제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루카 23,46) 하셨습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 하시며 먼저 자신에게 못을 박는 이들을 용서하시고, 아버지 하느님께 간구하셨습니다. 스테파노도 역시 그랬습니다. “주님, 주 예수님 제 영혼을 받아 주십시오!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지우지 말아주십시오.”(사도 7,60) 스테파노는 주님이 사신 그 사랑을 죽기까지 살았습니다. 주님이 용서하신 것처럼 스테파노도 용서하였습니다. 이 용서는 그리스도교의 본질적 요소입니다. 우리 모두가 반드시 얻어야 할 구원은 바로 하느님의 용서입니다. 하느님의 용서가 없으면 우리가 무슨 선행, 무슨 공로로 하느님 앞에 나설 수 있겠습니까?
참으로 용서는 사랑의 고귀한 표현입니다. 용서는 우리 사회가 인간다운 사회가 되기 위하여 꼭 필요합니다. 각박한 사회, 미움과 분열의 골이 깊어 가는 이 시대에 용서는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지역, 계층 간, 부모 자녀 간, 부부간, 형제 사이 등 상처 난 곳곳에 이해와 양보의 덕이 필요하고 그 뿌리에는 용서가 있습니다. 용서는 예수님의 마음이요,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당신의 외아들까지도 내어 주셨습니다. 아드님은 당신을 낮추시고 마침내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당신의 외아들을 내주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당신 목숨을 버리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따라서 우리도 그 사랑을 살아야 합니다. 용서하는 사랑, 내어놓는 사랑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6,36).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을 더 많이 받아들일수록 더 많이 사랑하게 됩니다.
우리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주시는’ 주 하느님의 크신 사랑을 닮아야 합니다. 상대에 따라서 달라지거나, 있다가 없다가, 한다면 그것은 주님을 닮은 사랑이 아닙니다. “국물이 뜨거울 땐 국물 속의 기름이 잘 나타나지 않듯이 사랑이 뜨거울 땐 상대편의 단점이 잘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국물이 식을 땐 국물 속의 기름이 떠오르듯이 사랑이 식을 땐 상대편의 단점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변함없는 사랑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오늘 사무엘 상권을 보면, 다윗의 위대함을 엿볼 수 있습니다. 다윗은 사울의 시기 질투로 인해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사울이 다윗을 시기하여 창을 이용하여 죽이려고 하였지만 두 번이나 몸을 피할 수 있었고, 주님께서 다윗과 함께 하셨으므로 가는 곳마다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사울은 필리스티아인들의 손을 이용하여 다윗을 죽이려고 사위로 삼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점점 더 다윗을 두려워하게 되어 평생 그와 원수가 되었습니다.
사울은 다윗을 죽이기로 작정하지만, 오히려 다윗에게 죽일 기회가 왔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분을 해쳐서는 안 된다. 누가 감히 기름부음받은이에게 손을 대고도 벌받지 않을 수 있겠느냐?”(1사무 26,9) 합니다. 그리고 고백합니다. “오늘 주님께서 임금님을 제 손에 넘겨주셨지만, 저는 주님의 기름부음받은 이에게 손을 대려하지 않았습니다.”(1사무 2623) 사울은 자기의 시기 질투, 욕심을 버리지 못하였고 다윗은 끝까지 원수를 사랑하였습니다.
우리도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새겨듣고, 알게 모르게 상처를 주고 아프게 하였던 이들에게 용서를 청하고 또 사랑해야 하겠습니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하셨으니, 모두를 사랑할 수 있는 은총을 받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콜로 3,13) “악을 악으로 갚거나 모욕을 모욕으로 갚지 말고 오히려 축복해 주십시오. 바로 이렇게 하라고 여러분은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복을 상속받게 하려는 것입니다.”(1베드 3,9)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되받을 것이다.”(루카 6,38)
혹 나를 아프게 하고 상처를 준 사람이 있다면 더 많이 사랑해 주지 못했음을 용서 청하고 자비를 간구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용서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용서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미움과 증오, 시기 질투의 마음을 버리고 서로 사랑하고 또 사랑하고 용서하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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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이호봉 베드로 신부님]
<행복한 바보가 됩시다!>
지난 2월 16일은 고 김수환 추기경님의 기일이었습니다. 생전에 추기경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바보’라고 하시며, 그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느님의 일을 하면서 이렇게 잘 살면서도, 그 사랑을 마음 깊이 깨닫지 못하니까, 난 ‘바보’야.”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이 얼마나 컸으면, 추기경님께서는 그렇게 자신을 바보 같다고 고백하셨을까요? 어쩌면 하느님께서 더 바보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배은망덕한 우리를 내치지 않으시고, 우리의 잘못을 다 잊으시려고, 매일 매 순간 다시 시작하도록, 새로운 기회를 주시니 말입니다.
오늘의 복음은 이러한 하느님의 바보 같은 사랑을 우리도 따라 살 것을 요청합니다.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합니다.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 주고, 저주하는 자들을 축복해 주고,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해 주라고 하십니다.
뺨을 때리면 다른 뺨을 내밀고, 겉옷을 가져가면 속옷까지 내어주고, 달라고 하면 누구에나 주고, 되찾으려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인간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런 사랑은 진짜 바보가 되어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바보 같은 사랑을 하신 분이 계시죠.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인간이 되신 하느님께서 하셨습니다. 세상의 자녀가 아닌 빛의 자녀답게, 우리도 그렇게 살라고 본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한번 희망을 가져 봅니다. 비록 우리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지만, 불가능이 없으신 예수님과 함께라면, 할 수 있겠다는 희망을 가져 봅니다.
오늘도 우리는 많은 사람을 만나고, 많은 일들을 겪을 것입니다. 그 많은 만남과 일들 안에서 신비롭게 작용하는 하느님 사랑의 손길을 발견할 수 있다면,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신 복음적인 요청을 용기 있게 실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 닮은 바보들이 되어봅시다. 그냥 바보가 아니라, 진정한 하느님의 아들딸들로 변모해 가는, 참 행복한 바보들이 되어봅시다. 아멘
◾자비(오이크티르모스 οἰκτιρμος)
자비를 가리키는 그리스말 오이크티르모스는 무엇보다 ‘슬픔에 대한 공감’을 가리키는 말마디입니다. 자비로운 사람은 저보다 더 슬프고 힘든 사람을 보듬고 챙겨줍니다. 자비는 인간의 품위를 지키려는 도덕적 덕목이 아니라 아프고 고된 삶을 짊어진 이들의 애환을 함께 나누는 연민의 실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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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김진현 F. 하비에르 신부님]
<용서, 하느님을 만나는 열쇠>
자녀 교육에 대한 프로그램을 보다 보면, 사춘기에 접어든 자녀들이 방문을 닫고 스스로 고립시키는 장면을 심심찮게 보게 됩니다. 그러면 부모님들은 조심스레 방에 들어가 ‘방 꼴이 이게 뭐냐, 하루 종일 게임만 하냐, 얘기 좀 하게 좀 나와라’ 합니다. 모든 아이가 그러지는 않겠습니다만, 이러면 보통 ‘건드리지마, 짜증나’하는 대답이 돌아오죠. 그러면 ‘말버릇이 그게 뭐냐’ 하면서 실랑이가 벌어지고, 감정의 골은 더 깊어지며 대화는 갈수록 기대하기 힘들어집니다.
어디선가 읽기로, 사춘기 아이가 방문을 닫고 혼자만의 공간으로 들어가는 것은 부모에게 반항하기 위함이 아니라, 진정한 자신을 찾아나가려는 자연스러운 과정이라 합니다. 그래서 부모는 자신의 관점으로만 자녀를 바라보고 통제하려는 태도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고, 자녀도 마찬가지로 자신의 감정에만 치우치는 태도를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부모는 자신의 기대에 못 미치더라도 그런 자녀를 용서할 수 있어야하고, 자녀도 당장 자기 심기를 건드리는 부모를 용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서로 용서와 사랑의 자세로 자기중심에서 나올 때라야, 온 가족이 밥이라도 한 끼 하면서 따뜻한 얘기를 나누는, ‘하나 됨’의 기쁨을 다시금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오늘 복음 말씀에 귀 기울여 봅시다. 예수님께서는 다소 강력한 어조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 말을 듣고 있는 너희에게 내가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원수를 사랑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이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원수는 누구입니까? 나에게 원망을 품은 사람, 나를 못살게 구는 사람,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요. 나를 잘 대해주고, 나를 좋아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건 쉽습니다. 하지만 예수님 말씀처럼 죄인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을 사랑하고, 잘해 주는 이들에게는 잘해주며, 되받을 가망이 있는 사람에게 꾸어 줍니다.
물론, 죄가 있는 곳에 구원이 내린다지만, 죄에만 머물러 있다면 하느님을 오롯이 만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하고 거듭 말씀하시며 우리가 죄인보다 더 나아야 한다고,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저도 여전히 용서나 원수 사랑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경험상, 용서와 자비를 체험하거나 실천하면 할수록 하느님과 가까워지는 체험을 얻게 됩니다. 마치 용서와 자비는, 미움과 나 중심의 굳게 닫힌 방을 열고 나와, 하느님과 ‘하나 됨’을 체험하게 하는 열쇠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지금 당장은 어렵겠지만, 용서와 자비로 원수까지도 사랑하려 애쓰고, 내 안에 굳게 닫힌 온갖 마음의 문을 열고 나와, 언젠가 하느님과 ‘하나 됨’의 기쁨을 누리게 되는 신앙인이 되도록 노력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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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천상영 비오 신부님]
<참된 용서>
미움과 증오는 참으로 쉬운 일입니다. 미워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살지만, 어느 순간 내 마음에 미움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반대로 용서는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나에게 상처를 남긴 누군가를 용서하겠노라 다짐하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맙니다. 용서하지 못했다는 자책감마저 들며 마음은 더욱 아프기만 합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자신을 바라보며 마음 한편에 작은 의문이 생겨납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닐까?'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분의 삶에 매료되어, 그분과 함께 십자가의 길을 걷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길을 걷는 사랑은 말뿐이 아닌 실천으로 그분의 삶을 증거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순간 예수님께서 외치신 것은 저주가 아니라 '용서'였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성부께 당신을 못 박는 사람들을 용서해달라고 청하신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저주하고 학대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라는 말씀을 고통의 한가운데에서 완성하셨습니다.
원수를 용서해야 하는 이유는 나 또한 용서받아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어로 '용서하다.'라는 말은 '놓아주다.' '해방하다.'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용서는 자신에게 상처를 남긴 누군가를 구하는 일인 동시에 자기 자신도 구하는 일입니다.
내가 누군가를 진정으로 용서할 때 주님께서도 나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십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몸소 행하신 그 일을 우리가 바라보았기에, 그분의 길을 걷는 우리 또한 해낼 수 있습니다. 최선의 하느님께서 우리를 최선의 길로 이끌어 주십니다. 주님의 권능과 자비에 의탁하며 불가능해 보이는 원수 사랑을 행할 수 있도록 주님께 은총을 청합시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 받을 것이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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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김홍주 베드로(계성고 지도신부) 신부님]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우리 인간의 모습은 모두 다릅니다. 심지어 쌍둥이인 분들도 유전적으로 차이가 있다고 하지요. 이렇게 서로 다른 인간이 세상 안에서 함께 살아가다 보니 좋은 일들만 생길 수는 없습니다. 관계가 틀어지거나, 갈등과 다툼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서로가 달라서 생긴 문제라고 일반화하기는 했지만, 사실 그 안을 들여다보면 우리의 지성만으로 섣불리 판단할 수 없는 다양한 이유가 있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과연 갈등으로 생긴 갈라짐을 해결하기 위해 충분한 노력을 기울였는지 스스로 성찰해 보면 그렇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인간은 자기중심적이기 때문이지요.
이처럼 갈라짐의 상황에 계속 머무르는 것은 우리에게 유익하지 않습니다. 우선 인간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더라도 누군가와 불편한 관계에 있으면 내 삶을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꾸려나갈 수 없습니다. 마음속에서 반목 중인 그 사람이나 관련된 일들이 계속 떠올라서 괴로움에 빠질테니까요.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러한 갈라짐은 우리에게 영적으 로 큰 손해가 됩니다. 분열은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가톨릭교회 교리서> 813-822항 참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 씀하십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 주고,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에게 축복하며, 너희를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루카 6,27-28)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기 위해서는, 복음환호송에서처 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새 계명을 기억해야 합니 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그분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 사랑하며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는 말씀을 말이지요.(루카 6,36; 요한 13,34 참조) 왜냐하면 주 님께서는 누구에게나 그 의로움과 진실을 되갚아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1사무 26,23 참조)
갈등과 다툼 그리고 반목이 계속되는 이 시대 안에서, 우리 신앙인들이 갈라짐이 아닌 일치를 향해 나아가며 하늘에 속한 주님의 자녀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면 좋겠습니다. (1코린 15,49 참조) 그렇게 우리 모두, 본기도의 내용처럼 “하느님의 뜻을 새기고 말과 행동으로 실천"하는 소중한 한 주간, 신앙의 일상을 보내시길 희망합니다. (서울주보 254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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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변승식 요한 보스코(안식년) 신부님]
“원수를 사랑하여라”,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독자께서는 예수님의 이 말씀들을 처음 들었던 때를 기억하십니까? 어른이 되어 신앙을 갖게 되신 분들도 아마 그보다 훨씬 전에 이 말씀들을 들으셨고, 한 번 들으셨다면 그것을 잊어버리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 내용이 너무나도 도전적이고 역설적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인들에게도 이 말씀은, 실천은커녕 그 뜻을 깊이 묵상하고 받아들이는 것조차 쉽지 않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마태오 복음과 루카 복음에 나오는데, 참된 행복의 선언과 연결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두 복음이 행복 선언과 원수 사랑을 연결하는 방식은 서로 다릅니다.
마태오 복음 5장에서는 산 위에서 참된 행복을 선언하신 후에, 제자들을 세상의 소금과 빛에 비유하시며 착한 행실로 세상 사람들을 비추라고 하십니다.(마태 5장 참조) 이어서 당신은 율법을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다음에는 “…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라는 형식으로 여섯 가지 실천 사항을 말씀하시는데, 그 마지막 두 가지가 악인에게 맞서지 말고 순종하라는 것과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원수 사랑의 계명은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8)는 말로 마무리됩니다. 즉, 참된 행복의 선언은 참된 사랑의 실천으로 이어지고 마치 산을 오르듯이 가장 완전한 사랑으로 정점을 이룹니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루카 6.37-38) 누군가를 향해 배려하는 마음은 참 주위 사람을 따뜻하게 합니다. 누군가의 사랑을 느낄 때, 세상 살 맛이 나지요. 그보다 더, 용서받는 체험을 한 이는 삶의 방향이 바뀝니다. 저희 예수회원은 스스로를 정의할 때, “죄인이면서 예수의 벗으로 부름받은 이들”이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깊이 용서를 체험한 자가 깊이 사랑을 합니다.우리는 누구나 누군가의 사랑이 필요한 이들입니다. 그래서 더욱 용서를 해야 할 이들이기도 합니다. 주어진 우리의 시간을 고귀하게 사용하시길 기도합니다. 인스타그램 @baeyounggil
루카 복음 속 예수님은 산 아래에서 참된 행복과 불행을 선언하십니다.(루카 6,20-49 참조) 두 선언은, 사람들이 너희에게 악을 행하면 너희는 행복하니 기뻐해야 하며, 반대로 친절하게 대하면 너희는 불행하다는 말로 끝납니다. 그들의 조상들이 예언자와 거짓 예언자를 그렇게 대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복음사가는 여기에 ‘그러나’라는 접속사로 원수를 사랑하라는 계명을 바로 연결합니다. “그러나 내 말을 듣고 있는 너희에게 내가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루카 6,27) 루카 복음은 행복 선언의 마지막 부분을 예수님의 수난과 연결하여, 예수님이 하셨던 대로 원수의 미움과 저주와 학대를 선의와 축복과 그들을 위한 기도로 대응하라고 말합니다. 루카 복음은 마태오 복음과 반대로, 마치 산에서 내려가듯이 원수를 사랑하라는 계명에서 시작하여 남을 심판하지 말라는 말씀, 좋은 열매를 맺으라는 말씀,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을 실행하라는 말씀으로 마무리를 짓습니다.(루카 6,37-49 참조)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아버지를 배신하고 아들을 박해한 인간에 대한 완전한 사랑이고, 인간을 사랑하시어 아들을 내어주신 아버지 하느님에 대한 가장 완전한 사랑입니다. 그런데 이를 위해서는 십자가 죽음에까지 온전한 순종이 필요했습니다.(필리 2,8 참조) 예수님께서는 무력이나 논리나 그 어떤 힘도 아닌 순종으로 세상을 이기고 죽음을 이기셨습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힘 있는 자의 양보가 아니라 가장 낮고 약한 이의 수난이고, 부조리한 폭력과 악행까지도 참고 받아들이며 끝까지 믿고 희망하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이는 바로 이런 사랑으로 그분의 사명을 완성해야 합니다. 교회는 이런 사랑으로 세상을 가르치고 돕고 성화해야 합니다. 제자인 교회의 길이 예수님보다 편한 길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우리가 사랑해야 할 배우자나 부모 형제도 제대로 사랑하지 못하는데 원수를 어떻게 사랑하느냐고 묻습니다. 하지만 사실 내가 만나는 모든 이가 나의 형제이자 원수입니다. 그들이 바로 때로는 나를 미워하고, 욕하고, 괴롭히며, 나에게 과한 것을 요구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도 역시 그들에게 그렇게 합니다. “내가 왜?” 하면서 손해 보지 않으려고 시비를 따지고 논리나 힘으로 이기려고 해서는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런 것을 묵묵히 받아들여 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부모가 자녀에게, 자녀가 부모에게, 그리고 이웃에게 이런 사랑을 베풀 때, 용서와 치유와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쉽지 않은 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사랑으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사도 바오로는 첫 인간 아담과 마지막 아담인 그리스도에 대해 말하며, 다음과 같은 말로 우리에게 희망을 줍니다. “우리가 흙으로 된 그 사람의 모습을 지녔듯이, 하늘에 속한 그분의 모습도 지니게 될 것입니다.”(1코린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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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전교수도회 김종오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루카6,37)
살면서 당한 억울함이나 상처를 나에게 준 사람들을 우리가 용서하며 산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서는 자신의 더 나은 삶과 행복을 위하여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아픈 상처를 남긴 사람이나 사건을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되지만, 용서하여야 우리가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Don't Forget but Forgive.) 화해는 두 사람이 준비되어야 할 수 있지만, 용서는 상대방이 준비가 되지 않았어도 우리가 혼자서 해줄수 있습니다.
9만 2천여명의 여성들과 아이들이 학살된 독일 라벤스브룩 집단 처형장에서 어떤 죽은 아이 옆에 포장지 종이에 휘갈겨 쓰인 이 기도문이 발견되었습니다.
“주님, 좋은 뜻을 가지고 산 사람들만 기억하지 마시고 나쁜 뜻을 가지고 살았던 사람들도 기억해 주소서. 그들이 저희에게 준 고통만을 기억하지 마시고 그 고통으로 인해 저희가 이곳에서 맺은 우정과 충성심, 겸손함, 용기, 관대함의 열매와, 그리고 이 모든 고통을 통해서 성장한 저희 마음의 위대함도 생각해 주소서. 그리하여 마지막 심판 날에 저희가 맺은 이 모든 열매가 저희에게 고통을 준 그 사람들을 위한 용서가 되게 하소서.” (상처받은 마음 치유하는 기도. 김종오.역.)
상처 입은 사람들의 마음이 얼마나 아픈가를 우리는 알기에 함부로 너무 빨리 용서하라고 그들에게 말하는 것은 늘 조심스럽습니다. 우리는 용서를 해야 한다는 것은 알지만 실제로 용서하는 것은 쉬운일이 아닙니다.
그런 어려움의 밑바탕에는 우리 안에 치유되지 않은 많은 감정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용서를 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어떤 아픔인가에 대한 정서를 인식하고, 인식한 감정을 표현하고, 그 감정을 우리가 수용하는 과정도 필요합니다.
특히 분노를 마음에 눌러 두면 억압된 분노가 우리를 우울하게 만들고 시간이 흐르면 우울은 곧 우울증이라는 질병으로 발전되기도 합니다.
자신이 얼마나 많이 용서를 받았는지를 아는 만큼, 우리는 다른 사람을 용서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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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6,36)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오면서 어느 순간, 예수님의 가르침이 문뜩 무겁게, 힘겹게 다가오는 순간을 만나게 됩니다. 어쩌면 그때가 바로 ‘쉐마’ 곧 몸과 마음으로 들어야 할 주님의 말씀이 은총으로 다가오고, 영적 성장으로 초대받는 때인지 모릅니다. 우리를 불편하게 하고 부담스럽게 하는 말씀 가운데 한 가지 말씀이 바로, 오늘 우리가 들은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6,27)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생생하게 들린 까닭은 바로 지금껏 나와 무관한 가르침이라 생각하였는데 어느 순간 내 삶의 숙제로, 문제로 다가왔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파격적인 요구를 하신 의도를 파악하지 않거나 이해하지 못하면 전후 문맥을 알아들을 수도 없을뿐더러 거부하거나 저항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예수님의 메시지 방점은 바로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6,36)라는 말씀에 있습니다. 이를 더 선명하게 명료하게 알아듣도록 오늘 독서 사무엘을 통해 자비의 노래가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다윗은 무고한 자신을 죽이려고 군대를 이끌고 온 원수와 같은 사울을 죽일 수도 있었지만, 오히려 자비를 베풀면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누가 감히 주님의 기름부음받은이에게 손을 대고도 벌받지 않을 수 있겠느냐? 오늘 주님께서 임금님을 제 손에 넘겨주셨지만, 저는 주님의 기름부음받은 이에게 손을 대려 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누구에게나 그 의로움과 진실을 되갚아 주시는 분이십니다.”(1사26,9.23) 또한 사도 바오로는 코린토 1서를 통해 사람을 살리는(=생명을 주는) 영을 주시어 당신의 모습을 지니게 하신 것(15,45.49 참조) 또한 하느님의 자비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오늘 독서와 복음의 핵심 메시지는 자비에 있으며, 이를 이해할 때 예수님께서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이해할 수 있고 수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하여라!’하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는데, 원수를 사랑하기 이전에 예수님께서 말씀하는 원수가 누구인지를 먼저 이해해야 할 것 같습니다. 흔히 원수는 자신에게 물질적인 손해, 육체적인 고통, 심리적인 상처를 입힌 흉악한 어떤 존재라고 피상적으로 생각할지 모르지만, 좀 더 세밀히 상황을 직시하고 직면하다 보면 일반적으로 자기 가족이나 이웃, 동료일 경우가 훨씬 더 많습니다. 결국 우리 각자 삶의 자리에서 만나는 나의 원수는 나와 밀접하게 소통하고 친밀하게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어떤 의미에서 내 십자가이고, 내가 짊어지고 가야 하는 부채(=사랑의 빚)로 그들은 우리가 갚아야 하는 사랑의 빚쟁이입니다.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도 빚을 지지 마십시오.”(로13,8) 그러기에 제 엄마처럼 ‘아이고 원수가 따로 없어!’라고 할 때, 내 인생의 원수는 바로 가장 가까운 가족이자 이웃입니다. 그러기에 원수는 배우자이고 자식이며, 형제자매이고 친구이자 동료인 경우가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실 때, 그 원수가 누구인지 알게 되면, 그 원수를 사랑한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왜 사랑해야 하는지 알게 됩니다. 이런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할 때 필요한 것은 물질이 아니잖아요. 그가 혹 그녀가 자신이 한 일을 뉘우치도록 기도하고 기다려주며, 올바르게 살 수 있도록 이해하고 수용하고 사랑하며 용서를 베푸는 것입니다. 저도 지금까지 풀지 못한 숙제 하나가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IMF 시절 보증 문제로 갈등을 빚은 형님들이 지금까지 원수처럼 살고 있고, 그 새 중간에 놓여 있는 저 또한 원수처럼 여기고선 자신을 이해하지 않았고, 도움도 주지 않았다고 단정하고서는 저와 관계를 끊고 사는 형제가 있습니다. 형님들의 화해를 위해 기도도 하고 대화의 자리도 마련해 보려 했지만, 아직도 제 부모님이 제게 준 숙제를 풀지 못하고 있습니다. ‘웬수가 따로 없다니까요. 형제가 원수입니다. 그놈의 돈 때문에! 그놈의 자존심 때문에!’
갈릴리 언덕에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루23,34)라고 기도하실 때, 예수님 주변에 서 있던 청중은 분명히 각자의 원수를 떠올렸을 것입니다. 그렇게 각 사람이 자기의 원수들을 생각하고 있을 때, 그들은 예전에 원수를 사랑하여라, 는 예수님의 말씀이 새삼스럽게 떠오르면서 자신들의 심장을 요동치는 것을 느꼈을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발설하셨을 때, 예수님은 군중들이 예상할 수 없는 파격적인 가르침을, 단서를 덧붙이셨습니다. 그렇게 할 때 너희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자녀가 되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없다, 고 말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까닭은 아버지 하느님은 자비로우신 분이시고, 자비로우신 아버지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는 아버지처럼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까닭은 바로 여기, 바로 원수를 사랑함으로써 단지 원수를 사랑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 행위가 바로 자비하신 아버지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예수님의 이 메시지는 바로 하느님 자녀인 우리가 자비하신 아버지의 마음을 닮고, 아버지의 마음으로 형제를 용서하고 사랑하는 행위가 아버지께서 가장 기뻐하실 일이고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아버지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일은 단지 주일을 잘 지키고, 교무금 내지 주일 헌금을 잘 내는 것 그리고 계명을 잘 준수하는 것만이 아니라 아버지의 자녀답게 살아가길 바라시며, 자녀다운 실천이 바로 ‘원수를 사랑하고 용서하고 기도하는 행위’가 아버지 하느님을 믿는 자녀다움을 드러내는 지점입니다. 바로 원수를 사랑하느냐 사랑하지 않느냐는 행위는 단지 그 행위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비로우신 아버지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출발점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루카 복음이 아닌 마태오를 인용하자면, 예수님께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그 해답은 다음 말씀에 담겨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5,45.48) 해답은 바로 ‘아버지 완전하신 것처럼, 아버지 자비로우신 것처럼’, 우리 또한 그렇게 온전히 자비를 베풀 때 우리 사랑의 부채를 다 갚을 수 있으며, 그 부채를 다 갚을 때 자유로운 사람이 되고 이를 통해 참 진리를 깨닫고 생명을 충만하게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의도는 사랑의 완전함을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하늘의 아버지께서 사랑에서 완전하니 너희도 완전하게 사랑을 실천하라는. 그것이 예수님의 소망이었습니다. 그렇게 되기를 바라며 예수님은 도저히 실현할 수 없을지 모르지만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아버지처럼 완전한 사랑을 실천하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 완전함은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바, 하느님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 분이시다, 고 하신 말씀에 이미 언급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듣고자 하는 것만 들으려는 자기 안에 갇힘에서 벗어날 때,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 행간에 숨어있는 뜻을 우리는 이해할 수 있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것처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루5,38)라 는 말씀처럼 어제의 낡은 인습과 생각을 내려놓고 이미 시작된 하느님 나라의 시선에서 곧 하느님 아버지의 마음으로 자신과 형제와 이웃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면서 “남이 너희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주어라.”(6,31)하는 말씀을 실천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렇게 용서하며 사랑하려고 발버둥 치는 우리의 모습을 보시고, 주님께서는 “우리의 죄대로 다루지 않으시고, 우리의 잘못대로 갚지 않으실 것”(시103,10)입니다. 그러니 우리 또한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13,34) 하는 말씀을 실천하며 살아갑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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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하와이 군도 북쪽에 있는 ‘키우아이’라는 섬이 있습니다. 지금은 1959년 미국의 오십 번째 주로 편입되면서 살기 좋은 곳이 되었지만, 그전에는 가난과 질병에 시달리고, 주민 상당수가 범죄, 알코올 중독, 정신 장애 등으로 고통받는 곳이었습니다. 교육 수준도 낮고 청소년 비행 문제도 아주 심각했습니다.
1955년에 태어난 신생아 833명을 대상으로 종단 연구를 진행했습니다. 이들 중 빈곤 정도, 가정 파탄 수준, 부모 정신 장애 등 세 가지 조건이 심각한 201명을 고위험군으로 분류했습니다. 그렇다면 이들 모두가 잘못된 길로 빠졌을까요?
실제로 범죄, 정신 장애, 미혼모가 되어 있는 경우가 많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그 숫자는 약 28%에 해당했고, 나머지 72%는 큰 문제 없이 성장했고 그중에는 뛰어난 능력을 보이는 아이도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에게 영향을 끼쳤던 것은 무엇일까요?
성장 과정에서 자기를 이해하고 인정해 준 인물이 한 명이라도 있으면, 바른 성장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 한 명이 부모이기도 했고, 친척 혹은 주변 인물 중의 하나이기도 했습니다. 즉, 결정적인 영향을 주는 누군가가 있었기에 어렵고 힘든 환경 속에서도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세상이 점점 타락하고 악으로 기울어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한 사람의 역할을 내가 하고 있지 않기 때문은 아닐까요? 하느님께서 ‘선’이 가득한 세상을 위해 ‘나’를 보내셨는데, 정작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나의 욕심과 이기심을 채우는 데만 집중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이를 ‘직무 유기’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만 잘 사는 세상이 아니라, 나로부터 잘 사는 세상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강조하신 사랑의 계명이 우리에게 너무나 중요합니다. 이미 왔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느님 나라를 위해서 우리의 사랑 실천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사랑은 나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철저히 ‘남’에게 맞춰 있습니다. 나에게 잘하고 친절한 사람을 위한 사랑이 아닌,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과 같이 우리도 자비로워야 했습니다. 그래야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고 하십니다.
심판하지 말아야 심판받지 않을 것이고, 단죄하지 말아야 단죄받지 않을 것이며, 용서해야 우리도 하느님께 용서받게 됩니다. 모두가 ‘나’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그런데 남이 잘못되었다고, 환경이 어렵다고, 힘이 든다고…. 등의 이유를 들어서 사랑을 실천하는 역할을 거부합니다. 세상을 변화시키지도 못하고, 하느님 자녀가 되는 길에서 멀어집니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루카 6,38) 이 말씀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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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되어라!>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러면 너희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자녀가 될 것이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제 생각에 우리가 미워하는 것은 여러 질입니다.
주는 것 없이 미운 것도 있고, 미운 짓을 해서 밉지만 내게 아무 해가 없기에 감정적으로만 미울 수 있고, 너무 사랑하기에 그가 훌륭하기를 바라는데 그렇지 않아 미운 것도 있으며, 너무 사랑하기에 그도 나를 사랑해주길 바라는데 그렇지 않아 밉기도 하고.
그런데 이런 미움으로는 관계가 원수 관계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로 인해 내가 치명적으로 파괴되고 행복이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깨지고, 그래서 그도 파괴되고 불행해지기를 바랄 정도가 되어야 원수 관계가 되는 거지요.
그러므로 그가 원수 짓을 했어도 내가 파괴되지 않고 행복하면 그는 원수 짓을 했어도 원수가 아니고, 그의 원수 짓으로 인해 내가 파괴되고 불행해졌을지라도 지금은 불행하지 않고 오히려 내가 성장하고 행복해졌다면 역시 원수가 아닙니다.
그런데 이것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아버지처럼 자비로우면 가능합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아버지가 자비로우신 것처럼 되어라. 하느님이 우리의 아버지시고 자비로운 분이시라고, 그분이 우리 아버지시고 우리가 그분 자녀라면 자비로운 자녀가 되라고.
우리말에 ‘못난 놈’과 ‘못된 놈’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제 생각에 ‘못난 놈’은 태어나길 잘못 태어난 놈이라는 뜻이 있고, ‘못된 놈’은 되어야 할 사람이 아직 되지 못했다는 뜻이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 아비는 우리를 잘못 낳았을 수도 있겠지만, 하느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잘못 낳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자비로운데 우리가 자비롭지 못하다면 우리는 하느님을 우리를 잘못 낳은 분으로 만들거나 하느님이 잘못 낳은 놈은 아니지만 내가 못된 놈입니다.
그런데 아버지처럼 될 수 없다고요? 인간이 하느님 아버지처럼 될 수는 없는 거라고요? 하느님 아버지는 원수까지 사랑할 정도로 자비로운 분이지만 우리 인간이 원수를 사랑할 정도로 자비로운 존재가 될 수는 없다고요?
우리는 아담과 하와가 되려고 한 것처럼 능력이나 완전성에서 하느님처럼 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것에서는 하느님처럼 될 수 있다고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도전하시고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원수를 보고 원수만 보면 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을 보고 원수를 보면 될 수 있습니다.
다윗이 사울을 본 것처럼 그러니까, 하느님께 기름부음받은이로 사울을 본 것처럼 보면,
원수를 아버지의 또 다른 자녀로 우리가 보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또 프란치스코가 본 것처럼 보면 될 수 있습니다. 그는 속화된 사제를 보면서 사제의 죄를 보지 않고 그에게서 주님만 봤습니다. 그는 원수를 벗이라고 부르신 주님을 보면서 원수를 벗으로 볼 수 있었습니다.
"모든 형제들이여, 우리는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 주어라.' 하신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입시다. 우리가 발자취를 따라야 할 주님께서 당신을 넘겨준 사람을 벗이라고 부르시고 우리에게 부당하게 번민과 괴로움 당하게 하는 이들이 바로 우리의 벗들입니다. 그들이 우리에게 끼치는 그것들로 말미암아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기에 우리는 그들을 극진히 사랑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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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연중 제7주일🕯(2.23)
"원수를 사랑하여라. 남을 심판하지 마라."(루카6,27.37)
'원수는 어디에 있는가?'
오늘 복음(루카6,27-38)은 '원수를 사랑하여라.'는 말씀과 '남을 심판하지 마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참 행복을 선언하신 후에 제자들이 지켜야 할 것들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바로 '원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미워하는 자들, 저주하는 자들, 학대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남을 심판하지 않으면서 조건없는 사랑을 베푸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들이 머리로는 이해가 어렵지 않지만, 정말 실천하기 힘든 말씀으로 다가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다음 말씀들이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게 합니다.
"남이 너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주어라."(루카6,31)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에게 잘해주고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주어라. 그러면 너희가 받을 상이 크다."(루카6,35)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6,36)
참으로 지키기 힘든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려고 애쓰는 이유는 그것이 '진정으로 사는 길'이기 때문에... 그래야 우리도 심판받지 않고, 단죄받지 않고, 용서받을 수 있고, 되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1독서인 사무엘 상권의 말씀은 사울과 다윗에 관한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의 첫 번째 임금인 사울과 두 번째 임금인 다윗 사이에 긴 갈등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사울은 수천을 치시고 다윗은 수만을 치셨다네!"(1사무18,7) 라고 외치는 여인들의 노래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곧 '사울의 시기(질투)'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사울에게 다윗은 원수였고, 다윗은 그런 사울을 죽이지 않고 끝까지 사랑했습니다.
내가 사랑해야 할 원수는 멀리 있지 않습니다.
가정 안에 있고, 가까운 공동체 안에 있습니다.
성령의 힘으로 실타래처럼 풀리는 사랑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루카2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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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 36)
자비가 정말
자비다우려면
자비를 실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자비를
실천하는 사람은
생명을 살리는
사람입니다.
악에 반응하지
않으며 꾸준히
하느님의 선을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하느님과
하나되는
자비입니다.
자기를 버리지
않고서는
하느님과
하나될 수
없습니다.
시시때때로
일어나는
우리 마음 속의
미움과 분노에게
하느님의 자비를
우리가
베푸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우리 마음과
행위를 온전한
사랑으로
바꾸어줍니다.
하느님의
참다운 모습은
자비의
모습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자비라는
진실을
건네십니다.
자비라는
진실은
겸손을 낳고
미움을 정화하는
용서를 낳습니다.
인간상실을
치유하는
우리 삶에
절박하고
간절한
자비입니다.
간절한 자비는
간절한 기도로
이어집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남을 심판하거나
남을 단죄하지
않습니다.
자비가
이루어내는
수많은
역할 가운데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한가지는
우리가 미움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우리를 행복하게
만듭니다.
우리 역사와
우리 현실에
대한 이해가
자비이며
우리
존재의 변화와
관계성의
따뜻한 통찰이
자비입니다.
우리 삶에
필요한 것은
삶을 직시하는
기도와
미움이라는
현실적 문제를
해결하는
자비입니다.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만나게 되는
자비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실천으로
빼닮는 기쁜
주일 되십시오.
하느님의 자비는
겸손이기에
연민과 사랑으로
안타까워하며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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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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