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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는 어떤 나라?
우리가 쿠바하면 떠오르는 것이 뭐가 있까? 흔히 생각할때 사탕수수 카브리해의 섬나라 그리고 체게바라와 카스트로, 북한과 더불어 지구상에 마지막 남은 공산 국가라는 것 정도 아닐까. 그리고 우리같은 야구 매니아에게는 제일 먼저 붉은 유니폼의 '레드 머신' 쿠바 야구팀이 떠오를 것이다. 우선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쿠바라는 나라에 대해서 잠깐 살펴보자. 대충 어떤 나라라는 걸 알아야 뒤에 이어지는 글도 쉽게 이해가 될것이다. 쿠바는 중앙 아메리카 카리브해상 서부에 위치한 섬나라로 인구는 1114만 3000명 1인당 국민총생산은 1,190달러 정도이고 정식명칭은 쿠바 공화국(Republic of Cuba)이다. 수도는 아바나이고 공용어는 에스파냐어를 사용하고 있다. 연평균기온 25.5℃의 열대성 기후로 사탕수수와 커피등의 작물을 주로 재배한다.사회주의 국가로는 드물게 종교를 허용해 국민의 대부분은 카톨릭을 믿고 있다. 전체 주민의 약 60%가 물라토 약 25%가 에스파냐계 백인 약 15%가 흑인이며 그 밖에 소수의 메스티소가 있다. 공용어는 에스파냐어를 사용하나 도시에서는 영어도 통용된다. 19세기까지 스페인의 오랜 지배를 받다가 독립하였으나 이후 미국의 내정 간섭으로 경제와 정권이 미국의 자본과 영향력 아래에 놀아나게 된다. 정치적으로는 미국을 등에 업은 꼭두각시 수뇌들의 독재와 부패로 얼룩진다. 이에 카스트로는 체 게바라와 함께 마에스트라산맥을 중심으로 게릴라 활동을 벌인 끝에 1959년 1월 정권을 장악하는 데 성공하였다. 총리로 취임한 카스트로는 그 해 5월 농지개혁법을 발표하고 대지주의 토지와 미국계 기업의 대농원을 몰수하였다. 1959년의 석유법, 1960년의 대기업 국유화법으로 미국계의 사탕·석유회사를 접수하는 등 개혁을 단행하여 미국과 대립하다가 1961년 1월에는 국교를 단절하였다. 그래서 현재까지 쿠바와 미국간의 관계가 악화되게 된 것이다.
미스테리하기 까지한 쿠바 야구
나는 예전에 이 세상의 가장 큰 미스테리가 쿠바 야구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보통 어느 분야든지 1인자들은 2인자에 비해 반걸음 정도 앞서가거나 많아야 한수정도 앞서는 것이 보통이다. 브라질 축구가 아무리 세계 최강이라고해도 매일 이길수는 없는 것이고 2인자 그룹인 독일,이탈리아등과도 큰 차이는 보이지 않는다.우리 나라나 일본 같은 2,3수 뒤지는 국가들도 많아야 석점 차이로 이기는 것이 보통이다.그런데 쿠바는 예외였다. 그들은 아마 야구의 2인자 그룹인 미국,일본,한국들도 여지없이 큰 점수 차이로 박살 내버리는 무시무시한 팀이었다. 그것도 단 한번도 지지않고! 1980년대 부터 쿠바 야구는 국제 대회에서 무려 151연승을 달렸다. 한팀이 15년동안이나 단 한번도 패하는 경기없이 계속이기기만 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다고 당시 미국이나 일본,한국등의 실력이 별볼일 없던 건 아니었다. 그 당시에 우리 나라나 일본과 미국은 대학 선수들이 주축 이었는데 일본과 한국은 곧바로 1군에 진출해 뛰어난 성적을 거두었고 미국 선수들은 대부분이 트리플 A로 진출해서 날리던 선수들이고 다음해에는 메이저 리그로 진출해 신인왕을 차지하고 스타로 떠오르는 등 최고의 선수들로 구성된 팀들이었다. 이런 선수들을 상대로 보통 열점차 이상의 스코어로 콜드 게임을 기록했으니 그들의 실력이 어느 정도 였는지는 도저히 상상이 안간다. 한창 때가 지났다는 평가를 받았던 쿠바 야구팀의 33회 세계 선수권 대회의 기록을 보자. 당시 쿠바 대표팀은 실력이 예전만 같지 못하다는 평가를 받았었다. 그런데 예선에서 스페인을 2-14로 8회 콜드, 남아공화국은 1-14로 7회콜드, 대회 출전 사상 4위라는 최고의 성적을 기록했던 홈팀 이탈리아도 0-20으로 7회콜드,중국은 0-10로 7회콜드로 떡을 만들었고 8강전선 네덜란드도 1-12 7회콜드, 3위를 차지한 니카라과조차도 준결승서 2-14 7회콜드로 나가 떨어졌다. 한물 갔다고 했을때가 이 정도니 전성기때는 어느 정도였는지 상상하고 싶지 않을 정도다. 쿠바는 97년 대륙간컵에서 일본에게 패하기 전까지 국제 대회에서 151연승을 달렸고 92년 시작된 올림픽부터 96년 애틀란타 올림픽까지 석권했고 시드니에서 네델란드에 질때까지 21연승 세계선수권대회에 27차례 출전해 24번 우승했고 대륙간컵에는 11번 출전,8차례 우승컵을 거머쥐는 난공불락의 철옹성을 자랑해왔다.특히 세계선수권대회에서는 76년 콜롬비아 대회부터 98년 이탈리아 대회까지 10회 연속 정상에 올랐다. 우승하는 대회마다 상대하는 팀들을 전부 묵사발로 만들어 놓았음은 물론이다. 우리나라가 쿠바 야구를 만난것은 76년 콜롬비아에서 열린 세계선수권대회때였다. 당시 한국은 황규봉,이선희,김재박,배대웅 등 최강의 멤버를 구성했지만 쿠바에게 13-2로 대패했다.그 이후 78년 네덜란드 할렘 국제대회에서 박철순이 던져 6-3으로 한번 이긴후 국제 경기 21연패 끝에 97년에 대륙간컵에서 김선우와 김병현의 계투와 9회말 무사만루서 장교성의 끝내기 희생플라이로 6-5으로 역전승 한것등 한적이 있다. 지난 기록과 예전의 기록들을 떠올려 보면 우리 나라를 대표하는 투수들이 아마 시절에 쿠바전에 나가 엄청 두들겨 맞았다는 걸 알수있다. 한국의 최고 투수인 최동원조차 "얼마나 맞았는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며 고개를 흔들었을 정도고 그 외의 투수들은 3회 이상을 버티는 투수들이 거의 없었다. 그리고 웬만해서는 승산없는 쿠바전에는 에이스들을 투입하지 않았다. 선동렬이 아마 시절에 쿠바와 대결한 적이 없던것도 같은 이유다. 70~80년대의 우리 나라 야구는 역대 최강의 선수들로 구성된 팀이었다. 후에 메이저 리그에서 슈퍼 스타가 된 선수들과도 전혀 밀리지 않는 경기를 펼쳤었다. 그런데 쿠바만 만나면 어른과 어린 아이가 하는 것과 같았다. 당시에 크게는 23-1로 진 경기도 있었다. 하기야 미국도 1987년 이후 13년만에 팬암 대회에서 전성기가 지난 쿠바를 마이너 리그의 유망주들을 총출동 시켜서 겨우 꺽었을 정도니 더 이상 말할 필요도 없을것이다.
쿠바 야구의 스타들
쿠바의 국가 대표는 모두 메이저 리그에서도 통할수 있는 뛰어난 선수들이다. 그 중에서도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선수는 쿠바의 부동의 에이스 콘트라레스(사진)와 최고 104마일의 광속구를 뿌린것으로 알려진 신예 마엘스 로드리게스 그리고 쿠바 야구의 양대 거포인 리나레스와 킨델란등이다. 쿠바의 에이스인 콘트라레스는 메이저 리그에서도 당장에 20승이 가능할 특급 투수로 손꼽힌다. 김병현이 케빈 브라운에 버금가는 구위라고도 했던 콘트라레스는 160km에 육박하는 빠른 강속구와 날카로운 슬라이더와 체인지업을 절묘하게 구사한다. 96년에 애틀란타 올림픽에서 쿠바를 우승으로 이끌었고 주요 국제 대회에서 에이스 역활을 맡았다. 볼티모어 오리올스와의 친선 경기에서 2번째 투수로 등판, 8이닝 동안 메이저리그 강타자를 상대로 8이닝동안 2피안타 10탈삼진 무실점의 쾌투로 세계 야구계를 놀라게 했다.그동안의 국제 대회에서 콘트라레스와 한국의 타자들이 맞붙은 기록을 찾아보면 거의 한점도 못뽑고 완벽하게 눌린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콘트라레스의 위력에 대한 일화 한가지.제 33회 세계 야구 선수권에서 콘트라레스를 상대한 우리 나라 타자들은 150km대의 강속구에 타석에 제대로 붙을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었는데 임재철 만은 타석에 바짝 붙으며 맞아서라도 나가겠다고 투지를 불살르다가 그만 콘트라레스의 강속구에 콧등을 맞고 기절해 곧바로 병원으로 후송되었다고 한다.
쿠바의 차세대 에이스로 떠오르고 있는 21살의 신예 마엘스 로드리게스는 최고 시속 104 마일의 빠른 강속구를 자랑한다. 변화구는 주로 슬라이더와 포크볼을 던지는데 웬만한 투수의 직구 스피드인 140㎞대를 기록한다. 시드니 올림픽 결승전에서도 162km의 빠른볼을 연속적으로 세기며 관중들의 탄성을 자아냈다.컨트롤은 다소 불안하지만 잠재력 만큼은 무궁무진하다.쿠바 국내 리그에서 퍼펙트게임과 노히트노런을 각각 한 차례씩 기록했고 작년에는 자국 리그에서 15승 6패에 1.77의 방어율을 기록했다.178이닝 동안 무려 263개의 탈삼진 잡았다. 현재 메이저 리그와 일본 프로야구의 스카우트 표적이 되고있다. 16세때 요미우리의 미야자키 스프링캠프에 참가한 경험이 있기도 한 로드리게스를 현재 요미우리 구단이 물밑에서 스카우트를 할려고 한다는 움직임이 있다고 한다.
킨델란과 리나레스는 더 이상 설명이 필요없는 쿠바 야구의 '전설'이다.3루수 리나레스는 전문가들이 아마추어 선수 가운데 최고로 꼽는 스타.자국 리그에서 0.369의 타율과 387홈런이라는 가공할 장타력을 과시해왔다.특히 애틀랜타올림픽에서 타율 0.476을 기록했고 바르셀로나에서는 홈런왕을 차지했었다.공격뿐 아니라 동물적 감각의 수비는 감탄사가 절로 나오게 한다.메이저리그로부터 4천만달러라는 거액의 입단제의를 뿌리친 것으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지난 19년 동안 쿠바 야구를 이끌며 리나레스와 쌍포를 이루었던 1루수 킨델란은 자국에서 통산 453홈런을 기록했고 애틀랜타에서는 홈런 1위 시드니 올림픽에서는 타점 1위를 차지했다. 언제든지 홈런을 날릴수 있는 일발 장타력을 가지고 있는 킨델란은 애틀란타 올림픽에서는 무려 168m짜리의 까마득한 홈런을 날리기도 했으며 시드니 올림픽 준결승전에서는 혼자 홈런을 포함해 3타점을 기록하며 쿠바를 결승으로 이끌었다. 이밖에도 킨델란 리나레스와 클린업 트리오를 형성하는 파체코와 스위치 히터 울리시아, 뉴욕 메츠의 주전 유격수 오도네즈를 쿠바 대표 시절 벤치에 머무르게 했을 만큼 뛰어난 유격수인 메사, 마무리 투수인 왼손 아예테등도 있다. 이외에도 훌륭한 선수는 많이 있다.미국의 한 스카우트는 "현재 쿠바에는 1백여명 정도의 잠재력 있는 메이저리그급 선수들이 있다."며 이들의 기량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쿠바는 지난 59년 피델 카스트로가 사회주의 혁명정부를 세우면서 미국과의 교류가 끊어졌다. 이때 까지만 해도 쿠바는 메이저리그에 토니 페레스(신시내티),토니 올리버(미네소타),루이스 티안트(보스턴),마이크 쿠에라(신시내티)등 정상급 선수들을 배출했다. 그 이후 자국 선수들의 해외 진출 원천 봉쇄로 메이저 리그에서 뛰고 있는 쿠바 선수는 그리 많지는 않지만 우리가 잘 알고있는 쿠바 출신의 야구 스타는 현역 최고의 좌타자중에 한명인 라파엘 팔메이로를 비롯 메이저 리그 최초로 40 홈런-40 도루를 달성한 호세 칸세코와 포스트 시즌마다 강세를 보이는 올랜도 에르난데스, 플로리다 마린스를 97년에 월드 시리즈 정상으로 이끌며 MVP를 차지했던 리반 에르난데스,아지 스미스 이후 최고의 수비를 보여주고 있는 오도네스등이 있다.
쿠바 야구의 성공비결
쿠바 야구가 경이롭다 못해 엽기적이기 까지한 실력을 보이는 것은 이유일까? 가난해서 장비도 제대로 못사는 나라에서 수백,수천억의 몸값을 받는 메이저 리거 못지 않은 실력을 갖춘 우수한 선수들을 배출하는 것에는 무슨 비결이라도 있는걸까? 그 것은 우선 자신이 혁명 직전 「로스 바르부도스」(The Bearded Ones)라는 야구팀에서 투수를 했던 이 나라의 지도자 카스트로에게서 찾을수 있다. 대부분의 공산권 국가에서는 야구를 자본주의의 마약이라며 금지 시켰었다. 하지만 카스트로는 혁명 직후인 60년 아마추어 리그를 만들며 전폭 지원했고 야구를 통해 국론을 결집시켰다고 할 정도로 야구에 대해 광적인 집착력을 보여왔다. 여타의 공산권 국가의 지도자들이 스포츠에서 승리로 자본주의보다 우월함을 선전했던 것처럼 카스트로도 야구에서의 성공으로 미국을 앞서고자 했던 것이다. 알려진바에 따르면 카스트로는 젊었을때 투수로서 트라이아웃을 통해 미네소타의 전신인 워싱턴 세니터스 입단을 타진했다고 한다. 그러나 스피드에서는 좋았지만 컨트롤이 별로여서 입단에는 실패했다고 한다.
쿠바 야구 리그의 팀들
메이저 리그만 철저한 팜 시스템으로 선수를 길러 낸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쿠바의 '팜'은 마이너 리그보다 더 철저하고 그 역사도 깊다. 쿠바에는 다른 나라의 프로팀들처럼 16개의 팀으로 이루어진 아마추어 리그가 있다. 보통 '시리에 나치오날'이라고 하는데 11월부터 5월까지 90게임을 치르며 대체로 1위팀 선수들을 중심으로 국가대표선수가 선발된다고 한다. '시리에 나치오날'에 소속된 팀에 들어가려면 전국에 퍼져있는 15개 스포츠학교에 들어가 지도를 받아야한다. 쿠바의 어린이들을 6세 때부터 철저한 계획하에 훈련받는다. 12세때쯤에 야구 재능을 테스트 받아 특A급만이 스포츠 학교에 진학하고 나머지 선수들은 유년 리그에 진학한다. 스포츠 학교에 가서도 단계별로 매년 어느정도의 수준에 도달해야 하고 이 기준에 미달되면 중도탈락 한다. 이렇게 철저하게 교육받고 걸러진 인재들만이 성인 야구팀에 들어가게 되고 그때쯤이면 이미 세계적인 선수가 되어 있게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건 야구에 대한 사랑이다.쿠바인들에게 야구는 가장 사랑받는 스포츠이다. 아마추어팀 수가 3968개에 달하고 선수만도 12만명을 웃돌 정도로 폭넓은 야구 인구를 자랑한다.쿠바 인구가 약 1100만 명이니 이 나라 국민 100명 중 한 명은 야구선수라는 얘기다.(여자를 빼면 50명 중에 한명.) 쿠바에서는 어린이들이 공과 막대기만 있으면 야구를 즐기는 모습을 어디에서든지 볼수있다. 이 어린이들은 훌륭한 야구 선구가 되어서 '조국 쿠바에게 금데달을 바치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다. 실제로 현 쿠바 국가대표팀 에이스 바예와 중심타자 리나레스,킨델란.파체코등은 메이저리그로부터 거액의 스카우트 유혹을 받고 있지만 대답은 항상 'No'다. 자신이 태어난 쿠바,자신을 영웅으로 따르고 자라나는 쿠바어린이들과 국민들을 위해 세계정상을 지키는 것은 그들의 하나같은 꿈이기 때문이다.
돈과 자유의 유혹
현재 쿠바 야구가 안고 있는 가장 큰 고민은 선수들의 망명이다. 쿠바 선수들은 한달에 고작 20달러 정도의 월급만을 받고 있다. 물론 자국의 노동자들에 비하면 두배 이상의 큰 금액이지만 메이저 리그에서 같은 실력의 선수들이 수백억씩 벌고 있는 걸 감안하면 성에 찰리없다. 그래서 호시탐탐 탈출하는 선수들의 행렬이 이어진다. 보트에 매달려 바다를 건너는 이 모험은 말 그대로 목숨을 건 항해다. 만약 동료의 탈출을 조금이라도 도와준 혐의라도 있다고 의심되면 그날로 선수 생활은 끝이다. 올랜도 에르난데스도 이복 동생인 리반 에르난데스의 탈출을 도와주었다는 의심을 받고 대표팀에서 쫓겨나 정신병원에서 단돈 9달러만 받고 트레이너로 일하다가 탈출했다. 오도네스는 93 버펄로 유니버시아드때 담을 넘었고 보스턴의 투수 아로효는 96년 올림픽 개막 직전에 다른 선수들과 함께 망명했다.내야수 앤디 모랄레스가 99년에 망명한데 이어 재작년 8월 세계청소년선수권 대회에선 2명이 숙소에서 탈출했다. 지난 91년부터 미국으로 건너간 선수는 50명에 이른다. 이들의 뒤에는 망명을 도와주며 처리해주는 '조 쿠바스'라는 에이전트가 있는것으로 알려진다. 최근에 미국의 스카우터들이 주목하고 있는 선수는 우완 투수 마엘스 로드리게스, 외야수 야서 고메스등 젊은 신예들이다. 쿠바의 국영 신문은 이를 두고 이렇게 보도했다. "마엘스 로드리게스가 대표팀에 뽑힐 경우 쿠바는 그를 새장에 가둬둬야 할 정도로 촉각을 곤두세워야 할 것이다." 쿠바 정부는 야구 선수들의 월급을 두배나 올려주고(그래봤쟈 40 달러) 국제 대회에 출전하면 2000달러에 달하는 파격적인 보너스를 지급하기로 결정하며 뒷문을 단속하고 있다. 그리고 국제 대회에서 신예 대신 노장들을 주축으로 선발하는 고육책까지 쓰고있다. 노장들은 스카우트 대상에서 제외되기 때문이다. 쿠바 야구가 최근 약세인 원인도 여기에 있지 않나 싶다. 그렇지만 망명은 너무나도 위험한 선택이다. 성공하면 돈과 자유가 보장되지만 실패하면 목숨도 위태롭다. 만약 성공했다 하더라도 조국과 가족을 버렸다는 죄책감과 비난으로 평생을 살아가야 할것이기 때문에 많은 선수들은 갈등하고 있다.
변화하고 있는 쿠바 야구
현재 쿠바도 변하고 있다. 꽁꽁 닫히기만 했던 문을 서서히 열려고 하고 있다. 그 첫번째 징후가 지난 99년에 있었던 쿠바 대표팀과 볼티모어 간의 친선 경기다. 그동안의 냉냉했던 양국 관계를 회복시키기 위해 당시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쿠바 제재완화조치를 발표하면서 양국간 야구경기 교류 재개를 함께 승인했다. 이로서 쿠바 혁명 이후 40년만에 양국 간의 역사적인 경기가 열리게 되었다. 59년 LA 다저스와 신시내티 레즈이후 미 프로야구팀으로는 40년만에 처음으로 쿠바를 찾은 볼티모어와 이들과 맞붙은 쿠바 대표팀간의 경기는 3-2로 볼티모어의 신승으로 끝났다. 2차전은 미국에서 열려졌다. 카스트로 국가 평의회 의장은 1차전의 패배를 설욕하기 위해 나랏일까지 미루고 대표팀을 진두지휘하는 열성을 보였다. 훈련장에서 당일 작전은 물론 선수 용병술까지 관장했다. 최종 25명의 엔트리를 확정지을 때도 직접 '감수'하는 열정을 보여주었다. 이런 열성 덕분인지 쿠바는 2차전에서 구원 투수 베라의 호투와 킨델란등의 홈런으로 볼티모어를 12-6으로 대파한다. 그렇지만 중요한 건 경기 결과가 아니라 양국간의 차가웠던 관계가 야구로 인해 녹았다는 것 그리고 70년대 '핑퐁 외교' 이후 개방의 문을 열었던 중국처럼 쿠바도 '야구 외교'로 문을 열것인가다. 최근 쿠바는 자국의 선수들이 외국에 진출하는 것을 놓고 심각한 고민 중이라고 한다. 그리고 뉴욕 양키스의 투수 올랜도 에르난데스가 팀을 월드 시리즈 우승으로 이끈 직후 그에게 특별히 한달 동안 쿠바에 머물러 가족들과 시간을 보낼수 있게끔 허락해 주었다. 예전같으면 상상조차 할수 없는 일이다. 쿠바에도 심상치 않은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는 것은 사실인것 같다. 만약 쿠바 선수들이 메이저 리그에 진출하여 활동할수 있다면 그 파워는 대단할 것이다. 타고난 재능과 성실한 노력으로 최악의 여건에서도 최고가 된 그들이기에 메이저 리그에서 좋은 여건 속에 체계적으로 교육받고 성장한다면 엄청난 파괴력을 지니게 될 것이다.
끝마치며..
나 자신도 쿠바 야구에 대해 잘 몰라서 알아보고자 이 글을 썼다. 생각했던 것 보다 쿠바 야구가 열악하다는 것에 놀랐다. 메이저 리그와 비교하면 안되겠지만 그 정도 실력을 쌓으려면 어느 정도는 지원이 되지 않을까하는 막연한 생각만 했었다. 그런데 막상 알아보니까 우리 나라 선수들의 여건이 특급 호텔 수준이라면 쿠바 선수들은 변두리의 제일 싸구려 아주 헐어빠진 여인숙에서 묵는다고 할수있을 정도였다. 공과 글러브도 기워서 쓰고 국제 대회때마다 개최국의 보조를 받으며 나간다고 한다. 그들의 한달 월급이 20달러라는 건 충격이었다. 그 정도 돈으는 방망이 하나도 살수없는 돈이다. 단돈 20달러로 그보다 수백,수천만배나 더 받는 선수들과도 뒤지지 않는다는 건 한번 생각해 볼 문제다. 야구가 꼭 돈으로 하는 건 아닌것 같다. 예전에 이런일이 있었다고 한다. 76년 콜롬비아에서 열린 세계선수권대회때의 일이다.쿠바 대표팀의 한 선수가 한국팀 훈련모습을 지켜보다 대표팀 선수들이 고무 손잡이가 너덜너덜해진 미즈노 금색 알루미늄 배트를 버리려하자 “이왕 버릴거면 나에게 달라”며 부탁을 했다고 한다. 우리 나라 선수들은 어렵지 않게 주었는데 그 폐품 방망이를 가져간 안토니오 뮤노스라는 선수는 다음날 그 방망이로 홈런을 세개나 날렸다고 한다. 한국 야구의 여건을 탓하는 선수들이나 감독들은 깊이 반성해봐야 할것같다. 내가 이글을 쓰며 느낀건 쿠바 야구가 강한 진짜 이유는 선수들의 야구에 대한 열정과 조국을 사랑하는 마음이라는 거다. 수천만 달러의 거액을 거절하면서 조국을 위해 뛰겠다는 자세가 있기 때문이다.이런 자세야말로 지금 이 시대의 선수들이 반드시 배워야 할 덕목이 아닌가 생각된다. 돈만 보면서 뛰는 플레이와는 전혀 다를것이다. 쿠바 선수들이야 말로 진정한 프로가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