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해 연중 제20주일
제1독서
<내 빵을 먹고 내가 섞은 술을 마셔라.>
▥ 잠언의 말씀입니다. 9,1-6
1 지혜가 일곱 기둥을 깎아 자기 집을 지었다. 2 짐승을 잡고 술에 향료를 섞고 상을 차렸다. 3 이제 시녀들을 보내어 성읍 언덕 위에서 외치게 한다. 4 “어리석은 이는 누구나 이리로 들어와라!”
지각없는 이에게 지혜가 말한다. 5 “너희는 와서 내 빵을 먹고, 내가 섞은 술을 마셔라. 6 어리석음을 버리고 살아라. 예지의 길을 걸어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제2독서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깨달으십시오.>
▥ 사도 바오로의 에페소서 말씀입니다. 5,15-20
형제 여러분, 15 미련한 사람이 아니라 지혜로운 사람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잘 살펴보십시오. 16 시간을 잘 쓰십시오. 지금은 악한 때입니다. 17 그러니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깨달으십시오.
18 술에 취하지 마십시오. 거기에서 방탕이 나옵니다. 오히려 성령으로 충만해지십시오. 19 시편과 찬미가와 영가로 서로 화답하고, 마음으로 주님께 노래하며 그분을 찬양하십시오.
20 그러면서 모든 일에 언제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십시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51-58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52 그러자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 하며, 유다인들 사이에 말다툼이 벌어졌다.
5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
54 그러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 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57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58 이것이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너희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것과는 달리,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
혼인미사나 장례미사가 있을 때는 영성체하기 전에
미사해설 하시는 분이 ‘ 천주교 신자가 아니면 성체를 모실 수 없다.’라고 안내합니다.
그들은 당연히 성체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안 받아들이기 때문에 성체의 의미를 모르지요.
성체를 둘러싸고 종교분열 이후에 갈라져 나간 종파들은 당연히 빵과
그리스도의 몸과 분리해서 보려고 합니다.
한번은 개신교에서 개종하신 분이 이 성체에 대해서 받아들이기가 어렵다는
입니다.
너무 재미있는 것은 미사 때 사제가 빵을 축성하기 전이나 후에 그 무게를 달면
똑 같기 때문에 변화를 이해하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형제와 여러 시간을 이야기를 나누었던 적이 있습니다.
글쎄요? 그 형제는 빵의 무게와 그리스도의 살의 무게가 다르기 때문으로
서로 틀린 것이라고 본 것이겠습니다.
그런데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의 주장은 빵이라는 현상은 변하는 것이 아니고
실체인 그리스도의 몸으로 변하는 것이기 때문에 현상적으로 보이는 것에서는
변하는 것이 없다고 설명합니다.
이론적으로 거의 완벽하게 설명하는 토마스 성인도 이 성체찬미가를
이렇게 바칩니다.
○ 엎디어 절하나이다.
눈으로 보아 알 수 없는 하느님,
두 가지 형상 안에 분명히 계시오나
우러러 뵈올수록 전혀 알 길 없삽기에
제 마음은 오직 믿을 뿐이옵니다.
● 보고 맛보고 만져봐도 알 길 없고
다만 들음으로써 믿음 든든해지오니
믿나이다. 천주 성자 말씀하신 모든 것을.
주님의 말씀보다 더 참된 진리 없나이다.
○ 십자가 위에서는 신성을 감추시고
여기서는 인성마저 아니 보이시나
저는 신성, 인성을 둘 다 믿어 고백하며
뉘우치던 저 강도의 기도 올리나이다.
초대교회에서 가장 큰 어려움이 있다면 예수님의 인성을 부인하는
영지주의(Gnosis) 이단과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유대인들이었습니다.
밖으로는 유대인등과 로마인들의 대대적인 박해와 안으로는 영지주의와
개종한 유대인들의 고집스러운 주장들 때문에 교회는 혼란과 어려움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러한 외세의 박해와 교회내의 혼란에서 그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주님 사랑과 성령의 인도하신 덕분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 또는 '생명을 주는 살'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특히 정한 것과 부정한 것을 통하여 이스라엘 사람들의 삶을 성별하는 배경(레위 14장)에서
유대인들에게 사실 ‘사람의 살’을 먹고, ‘사람의 피’를 마시는 것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과제였습니다.
그래서 요한이 전해주는 오늘의 복음의 뜻을 우리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요한 6,51)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52절)이라며 논쟁을 벌입니다.
여기에서 사람들은 선택을 해야 합니다. 과거의 신앙의 배경에서 머무느냐?
아니면 예수님의 ‘영원한 생명의 빵’이냐?라는 질문 앞에 결단과 선택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53절)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조상들이 사막에서 먹고 죽은 빵’과 다른 ‘이 빵’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54절)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영원한 생명의 빵’에 대한 가르침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인간의 한계에서는 수군거리며 비판하는 것이 이해가 되기는 합니다.
그동안 교육받고 익숙해진 생활의 습관을 바꾼다는 것은 쉽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체험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가까운 예로 늘 같은 책상 위에 차 열쇄를 두는 습관이 있다고 합시다.
그런데 어느 날 급하게 나가야 하는데 그 자리에 열쇄가 없다면 당황스럽지요.
나중에 결국 열쇄를 찾기는 하겠지만 시간도 지체되고 잠시나마 혼란스러운 것은
사실입니다.
이렇게 행동의 작은 습관도 변화가 있으면 어려움을 겪는데 하물며 일생동안 교육받고
믿고 살아 온 '굳어진 삶'을 하루아침에 새로운 삶으로 바꾸기가 쉽겠어요?
믿음에는 결단이 따르는 법입니다. 밭에 보화가 묻힌 것을 발견하면
'있는 재산을 다 정리해서 그 밭은 산다는 사람의 비유의 말씀'(마태 13,44)대로
유대인들도 ‘영원한 생명의 빵’을 위해서는 가진 것을 아낌없이 포기하는 결단이 필요한 것입니다.
진실하신 주님께서는 우리에게도 중요한 말씀을 하십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56-57절)
진실하신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니 토마스 성인처럼 우리도 오직 믿을 뿐이옵니다.
세월이 지나면서 교회의 규정도 변할 때가 있습니다. 성체를 모시기 전에 공복제,
옛날에는 공심제도 변화를 하였습니다.
초세기에는 이 공심제(空心濟), 또는 공복제(空服濟)는 성체를 모시기 전에
물과 약을 제외하고는 일체 음식을 먹지 않는 규정을 말합니다.
예전에는 성체를 모시기 전에 자정부터 아무것도 먹지 않도록 규정을
하였습니다(1917년 법전), 그러나 세 교회법(1983년 법전)에는 성체를
모시기 전 1시간으로 완화하였습니다.
초세기에는 이 공복제에 대한 규정이 없었으나 3세기 테르뚤리아노 교부에 와서
'성체를 모시기 전에 일정한 시간 동안은 어떤 음식도 먹지 말아야 한다.'라는
규정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가면서 영성체하기 전에 음식을 먹지 말아야 한다는 규정과 함께
성체를 모시기 전에 몸과 마음을 깨끗이 비우고 준비하야야 한다는 의미를
새롭게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같은 성체를 모시더라도 우리가 어떤 정성을 갖고 몸과 마음을
비우느냐가 참다운 공심제의 정신인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영원한 생명을 모시기 위해서는 우리는 정성을 다해 신심을 준비해야 하겠습니다.
출처: 구름 흘러가는 원문보기 글쓴이: 말씀사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