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도 구직도 안하고… 청년 50만명 “오늘도 그냥 쉽니다”
1년새 9.9% 늘어 통계작성후 최대
불황속 눈높이 맞는 일자리 못찾아
40대서도 ‘쉬었음’ 9.5% 늘어
“2년 넘어가면 실직 장기화 경향… 국가 경제 활력까지 떨어뜨려”
나모 씨(26)는 1년 넘게 입사지원서를 쓰지 않은 채 쉬고 있다. 이미 직장 3곳을 다니며 겪은 일들 때문에 일단 취업을 미뤘다. 전 직장 한 곳에선 상사가 조기 출근과 야근을 강요했고, 또 다른 곳에선 임금을 제때 주지 않았다. 외모를 비하하는 말도 들었다. 나 씨는 “현재는 지친 마음과 몸을 회복하고 있는 상황”이라며 “급하게 취직해 평생 불행하게 사느니 시간이 걸리더라도 내가 즐거운 일을 찾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일하지 않고 구직활동도 하지 않으면서 이유 없이 쉰 청년이 지난달 50만 명에 육박하며 사상 최대를 보였다. 청년을 포함해 그냥 쉬었다고 답한 사람들이 비경제활동인구에서 차지한 비중도 15%를 넘었다. 이들은 사실상 실업 상태이지만, 비경제활동인구로 분류돼 실업 통계에 잡히지 않는다. 눈에 보이지 않게 경제 활력을 떨어뜨리고 있는 것이다.
20일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달 경제활동인구조사에서 ‘쉬었다’고 응답한 15∼29세 청년은 49만7000명으로 집계됐다. 1년 전보다 9.9% 늘어난 규모로, 2003년 1월 관련 통계 작성 이후 가장 많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이전 30만 명대였던 청년 ‘쉬었음’ 인구는 2020년 2월 40만 명을 넘어섰다.
통계청 조사에서 ‘쉬었음’은 현재 일하지도 않고 구직활동도 안 하는 비경제활동인구 중에서 ‘지난 1주일 동안 주로 무엇을 했느냐’는 질문에 ‘쉬었다’고 답한 이들이다. 일할 능력이 있는데도 육아, 가사, 학업, 심신장애 등의 이유 없이 그냥 쉰 경우를 뜻한다. 여기에는 1년 내 구직활동을 한 구직단념자도 일부 포함된다. 1년 내 구직활동을 한 적조차 없는 사람은 고용시장에서 이탈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냥 쉬는 청년 인구가 느는 건 좋은 일자리를 찾기가 점점 어려워지는 현상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풀이된다. 주원 현대경제연구원 경제연구실장은 “현재 일자리 시장이 겉으로는 괜찮아 보이지만 월급이 적고 처우가 안 좋은 일자리만 늘고 있다”며 “경제 상황이 안 좋다는 방증”이라고 말했다. 청년이 기대하는 근로조건이 기업이 제시하는 조건과 격차가 큰 셈이다. 기업들의 경력직 선호가 확산되고 있는 것도 ‘쉬었음’ 청년 인구를 늘리는 요인으로 꼽힌다.
청년뿐만 아니라 모든 연령층에서 ‘쉬었음’ 인구가 늘었다. 노동시장의 허리인 40대에서 그냥 쉬었다는 이들이 전년보다 9.5% 늘며 청년층을 제외하고 가장 큰 증가 폭을 보였다. 60대 이상(7.3%), 50대(2.9%), 30대(2.0%) 등이 뒤를 이었다. 이에 따라 지난달 비경제활동인구에서 ‘쉬었음’ 인구가 차지한 비중은 전년보다 1%포인트 불어난 15.7%였다. 올해 1월(15.6%) 경신한 역대 최고치를 한 달 만에 다시 썼다. 지난달 만 15세 이상 인구에서 ‘쉬었음’ 인구가 차지한 비율은 5.8%였다.
김유빈 한국노동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쉬었음 상태가 1년 반에서 2년이 넘어가면 본인의 근로 의욕이 줄고 낙인 효과까지 더해져 실직 상태가 장기화되는 경향을 보인다”며 “국가 전체적으로 봤을 때 생산활동이 둔화되고 세수가 줄어드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지난달 6개월 넘게 일자리를 찾지 못한 장기 실업자는 9만6000명으로 4개월 만에 증가세로 돌아섰다.
세종=조응형 기자, 세종=박희창 기자
일하는 노인 577만 명… ‘그냥 노는’ 청년 50만 명
은퇴 후에도 쉴 수 없는 노인들 20일 서울의 한 지하철역에서 한 어르신이 지하철을 이용해 택배를 배송하고 있다. 2023.3.20./뉴스1
60세 이상 고령 근로자가 10년 새 2배로 늘었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달 60세 이상 취업자는 577만 명으로 2월 기준 역대 최대였다. 2003년부터 10년간 100만 명 가까이 늘었다가 최근 10년에는 300만 명 넘게 불어 갑절이 됐다. 저출산·고령화 추세로 60세 이상 인구가 급증한 데다 노후 생계를 위해 고용 전선에 뛰어드는 ‘일하는 노인’이 폭발적으로 늘고 있는 것이다.
이와 달리 지난달 20대 이하 청년(15∼29세) 취업자는 12만5000명 급감해 2년 만에 최악의 감소세를 보였다. 고령 취업자는 수십만 명씩 늘어나는 데 비해 청년층 취업자는 계속 줄고 있다. 반도체 등 제조업 부진이 계속되는 데다 취업을 유예해서라도 괜찮은 일자리를 찾으려는 청년들이 많아진 탓이다. 일하는 청년보다 일하는 노인 보기가 쉬운 시대가 된 셈이다.
더 큰 문제는 구직 활동도 하지 않고 ‘그냥 쉰다’는 청년층이 50만 명에 육박한다는 점이다. 사상 최대 규모다. 취업·진학 준비나 군입대 등 특별한 사유 없이 일할 능력이 있는데도 일하지 않는 청년이 이만큼 된다는 얘기다. 국가 미래를 책임질 청년들이 단기 임시직 같은 원치 않는 일자리에 내몰리다가 이마저 끊어지면서 구직 의욕을 잃고 있다는 해석이 나온다.
이 같은 고용 환경은 고령층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다. 노동시장으로 돌아오는 노인이 늘고 있지만 4명 중 1명은 고용의 질이 떨어지는 단순 노무에 종사하고 있다. 임금 수준이 열악한 단기 일자리를 감수하고서라도 노인들이 일하는 것은 노후 빈곤이 심각하다는 뜻이다. 65세를 넘겨 일하는 10가구 중 1가구는 근로소득과 연금 등을 합쳐도 월 소득 100만 원이 안 된다고 한다.
노인 일자리든 청년 일자리든 기업이 양질의 일자리를 만드는 것이 궁극적인 해법이지만 오랜 시간이 걸리는 만큼 부작용 완화를 위한 다양한 정책을 시행할 필요가 있다. 하루하루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노인들에게는 공공 일자리가 구명줄이나 다름없다. 정부는 경제적 부가가치 창출에 실질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노인 일자리를 적극적으로 개발해, ‘공공 일자리=세금 축내기’라는 부정적인 인식을 털어낼 수 있어야 한다. 청년 실업은 ‘일자리 미스매칭’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 문제다. 청년들의 실업이 길어지면 고용시장에서 영영 퇴장하는 ‘잃어버린 세대’가 될 우려가 있다. 청년들에게 외면받는 기업들의 매력도를 끌어올리고, 중소기업 근무 경험이 ‘평생의 커리어’에서 긍정적인 자산이 될 수 있도록 하는 데 정부와 산업계가 머리를 맞대야 한다.
2023. 03. 21 동아일보 사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