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선사 주지 초격 스님
작은 것에 만족하고 감사함 갖는다면 행복은 곁에 있습니다
현대인들은 몸 건강에 극진하면서도 정신건강은 관심 부족
몸과 정신의 균형이 맞아야 비로소 건강한 삶을 살 수 있어
이웃과 함께 살겠다는 원력 세우는 게 이 시대 불자다운 삶
우리는 언제나 행복하고자 합니다. 그런데 이 행복은 어디에서 오고, 누구에게 주어지는 것일까요. 또 행복이라는 것이 얼마나 오래 지속될 수 있을까요. 저는 행복이라는 것은 불러주는 자에게만 온다고 생각합니다. 길을 가다가 누군가가 ‘누구야’ 혹은 ‘누구씨’ 하고 부르면 돌아보게 되고, 다가가게 됩니다. 그런 것처럼 행복하고 싶다면 행복을 찾고, 불러야 합니다. 행복을 찾고 부르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일상에서 작은 것에서 만족하고 언제나 그 자체로 감사하고 고마워하면서 늘 주변에 기쁨을 주는 삶, 그것이 바로 행복을 찾고 부르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렇게 된다면 행복은 저절로 우리 곁에 다가와 있을 것입니다.
요즘 사람들은 유독 건강에 관심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물론 건강을 챙기는 것은 중요한 것이지만 몸에 대해서만 신경을 쓰는 것 같습니다. 배고프면 먹여주고, 추우면 따뜻하게 입혀주고, 더우면 시원하게 해주고. 또 어디가 아프면 금방 병원에 가서 진료받고, 약을 먹습니다. 이렇게 몸 건강은 극진히 챙깁니다. 그런데 마음 건강에는 크게 관심이 없는 것 같습니다. 몸과 더불어 정신 건강도 중요한 데 사람들은 여기에 인색합니다.
부처님은 정신 건강의 중요성에 대해 수많은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정신 건강에 대해 투자를 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고가의 명품을 사서 몸을 치장하는 데 많은 돈을 사용하고, 몸에 좋다는 것은 아낌없이 쓰면서도 정신 건강을 위해서는 돈을 쓰지 않습니다. 그러니 균형이 깨져서 아무리 좋은 것을 먹고, 치장해도 행복하지 않는 것입니다. 몸과 마음의 균형이 잡혀야 건강합니다. 어느 한쪽에만 치우치면 균형이 깨져서 결국 건강을 해치게 됩니다. 몸에 쓰는 경비의 반만이라도 정신 건강에 사용한다면 더 큰 행복감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 계시는 불자님들은 정신 건강을 위해 투자를 많이 하고 계셔서 그런지 얼굴이 맑고 건강해 보입니다.
우리가 절에서 ‘불사를 한다’ ‘기도를 한다’는 것은 다 보이지 않는 정신 건강을 위한 것입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절에서 기도를 하는 것은 사실 남는 장사입니다. 매월 초하루 때만 되면 보통 3일간 기도를 합니다. 3일간 지극정성으로 기도를 하게 되면 부처님의 가호가 있고, 화엄신중님들이 돌보셔서 적어도 한 달은 평온하게 살아갑니다. 3일 기도를 해서 30일이 평온하니, 이것만큼 남는 장사가 어디에 있습니까.
예전에 큰 인기를 끌었던 유행가 가운데 ‘산다는 건 좋은 거지, 수지맞는 장사잖소. 알몸으로 태어나서 옷 한 벌은 건졌잖소’라고 하는 노래가 있습니다. 김국환씨의 ‘타타타’라는 노래입니다. 대개 노래 제목은 가사에도 나오는 데, ‘타타타’라는 노래에는 ‘타타타’라는 가사가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타타타’가 무슨 의미일까를 늘 궁금하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그것을 알게 됐습니다. 이 노래를 지은 양인자 작사가는 불교적 심성을 가지고 있었던 분인데, 어느 날 인도로 성지순례를 가게 됐다고 합니다. 한국 사람들이 대화하면서 ‘빨리 빨리’를 많이 쓰는 것처럼 인도에 갔더니, 가는 곳마다 ‘타타타’ ‘타타타’ 하는 것입니다. 그 뜻이 궁금해서 알아봤더니 ‘타타타’는 산스크리트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있는 그대로 그러하다’라는 의미였습니다. 그게 변형이 되어서 ‘그래 그거야’라는 의미로 관용어처럼 사용되게 된 것이죠. 만나는 사람마다 대화하면서 ‘타타타’ ‘타타타’하면서 “그래, 그거야” “맞아” 이런 식으로 긍정적 의미를 부여한 것입니다. 양 작사가는 이를 착안해서 가사를 짓게 됐고, 그의 남편인 김희갑 작곡가가 곡을 붙여서 나온 노래가 ‘타타타’였습니다.
가사를 보면 우리의 인생이 담겨 있습니다. 가진 것 없이 알몸으로 태어나서, 죽을 때는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고 그냥 떠나갑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나는 누구인가’를 떠올린 것이죠.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에서 왔으며, 또한 어디로 갈 것인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이런 의문이 이 노래에 함축돼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 태어날 때는 누구나 인연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그냥 오고 싶다고 오는 게 아니라 인연으로 오는 것입니다. 자기가 이 세상에서 오고 싶어서 온 것은 오직 부처님 밖에 없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이 세상에 자의로 태어나신 분입니다. 부처가 되어서 도솔천 내원궁에서 내려다보니, 중생들이 자기 눈으로 직접 보지 않는 것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래서는 안 되겠다, 내가 직접 똑같은 인간의 몸을 가지고 태어나서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겠다’고 하신 겁니다. 그럼 어디에서 태어나야 하는가를 보다가 인도 카필라국의 정반왕과 마야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것입니다. 인간으로 태어나서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그 확신을 보여주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곤 우리와 똑같은 인간의 몸으로 태어나 부처가 되셨습니다. 스님들이 출가해서 어려운 수행자의 길에 들어선 것도 부처님의 그 가르침을 믿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그 확신이 없다면 무슨 연유로 승복을 입었겠습니까. 신도님들 역시 부처님께서 직접 보여주신 그 길을 따라가면 언제가 부처가 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게 된다면 여러분들도 반드시 부처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그 시기가 빨리 오느냐, 조금 늦느냐 그 차이가 있을 뿐이지요.
부처님의 길을 따라간다는 것은 일상에서 집착을 버리고 번뇌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괴로운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나’라는 존재, ‘내 것’이라는 집착에 얽히고, 분별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나’라고 규정지을 것이 무엇인가요. 하루에도 수십 번 변하는 ‘나’라는 것에서 진짜 ‘나’라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그렇기에 ‘나’라는 것을 분별하는 것 자체가 공허한 것이지요. 분별심을 버리고 나라는 상을 버리려는 노력들이 바로 수행인 것입니다. 그런 수행을 통해 우리는 정신 건강을 지켜나가는 것입니다.
절에 오셨으니 제가 정신 건강에 도움이 되는 팁을 하나 드리겠습니다. ‘아’ 한번 소리를 내어보세요. 누가 옆에서 콕 찌르면 ‘아!’하게 되잖아요. ‘아’라는 소리는 인간이 가장 먼저 배우는 소리 가운데 하나라고 합니다. 부정적이고 방어적인 느낌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시 ‘오’ 한번 해보세요. ‘오’는 ‘오 맞아’라는 것처럼 긍정의 의미가 있습니다. 또 ‘마’를 소리내어 보면 긍정도 부정도 아닌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이 세 가지 소리가 하나로 축약되면 ‘옴’이 됩니다.
‘옴’은 산스크리트어에서 유래했는데 불교에서 가장 위대하고 신성한 소리라고 합니다. 그래서 불교의 많은 진언의 첫머리가 대부분 ‘옴’으로 시작합니다. ‘옴’ 속에는 긍정, 부정, 긍정도 부정도 아닌 의미가 모두 담겨 있습니다. 뭔가 두려움이 있거나 슬픔이 있거나, 기쁨이 있을 때도 ‘옴~’을 길게 소리를 내면 마음에 안정을 얻고 편안함을 찾을 수 있습니다. 또한 ‘옴~’에서 나오는 소리의 울림이 주변에도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깊은 단전에서 올라오는 울림의 소리 ‘옴’은 자신과 주변에 긍정적인 에너지를 전달하게 됩니다. 바쁜 일상이지만 잠시 모든 것을 접어두고 깊은 단전에서 올라오는 마음의 소리 ‘옴’을 꾸준히 하면 몸과 마음의 변화를 체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자등명 법등명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신과 법을 등불로 삼고, 삿된 것에 물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가 있기에 세상은 존재하는 것이고, 내가 있기에 지리산도, 여기 화엄사도 있는 것입니다. 내가 없으면 아무 것도 없는 것이지요. 이런 존재의 의미 속에서 과연 ‘나는 누구인가’라는 숙제를 풀고 가야 합니다. 다들 각자 살아가는 방법이 다를 수 있겠지만, ‘나는 누구인가’라는 것을 이 세상에 나왔다면 반드시 해결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그것이 곧 수행으로, 정진으로 이어지는 것이겠지요. 그렇게 나라는 것을 찾고, 수행하고 정진하는 게 불자의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모름지기 불자라면 남들보다도 더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고 봅니다. 자기만을 위한 삶이 아니라, 주변을 돌아보고 이웃과 더불어 사는 삶이 곧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삶이겠지요. 옛말에 ‘지족가락(知足可樂)이면 무탐즉우(務貪則憂)’라고 했습니다. 만족할 줄 알면 즐거움이 함께 할 것이요, 탐욕에만 관심을 가지면 근심만 쌓일 뿐이라는 의미입니다. 작은 것에서 만족하고 감사하는 삶, 나보다는 이웃을 먼저 생각하는 삶. 그것이 이 시대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삶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런 삶을 살 때 행복은 멀지 않은 곳에 있을 것입니다. 지금 생활하시는 것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 속에서 행복을 찾아가시기를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정리=신용훈 기자 boori13@beopbo.com
이 법문은 봉선사 주지 초격 스님이 7월3일 구례 화엄사 화엄원에서 열린 ‘7월 화엄법회’에서 설한 내용을 요약정리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