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민(愛民)은 말 그대로 백성을 사랑한다는 뜻이다. 왕조시대의 왕은 모든 백성을 자식으로 생각하고 부모로서 자식을 사랑하지 않은 사람이 없듯이 왕은 당연히 백성을 사랑해야 했다. 그러나 역사상 우리나라 왕들 중 제대로 애민정책을 실행한 왕은 거의 없다. 영조 정조를 꼽을 수도 있겠지만 세종대왕에 비하면 새발의 피였다. 세계 역사 속에서도 드문 일이다. 세종대왕의 애민정책은 생명존중과 사회적 약자를 보호한다는 것이 핵심이었다.
세종은 노비 노인 여성 아이 등 사회적 약자를 정책에 최우선으로 두었다. 또한 이들의 삶의 질 향상은 임금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의무로 생각했다. 세종은 지금의 시각으로 보아도 파격적인 노비 출산휴가 정책을 실시했다. 여종이 아이를 낳으면 노비 남편에게도 30일의 휴가를 주어라. ‘세종실록’1434년(세종16) 4월 26일
당시 노비 출산 휴가는 1주일이었다. 세종은 산후조리를 하는데 1주일은 충분치 않다며 노비들의 출산 휴가를 100일로 늘리도록 했다. 또한 산모 혼자 있으면 그 산모를 누가 돌보겠느냐며 산모의 남편도 30일간 각종 부역을 면제하여 돌보게 하였다. 그러자 양반이 들고 일어섰다. 노비들이 다 쉬면 집안일은 누가 하느냐며 반발하였지만 세종은 "양반들은 노비들이 쉬어도 일을 해줄 사람은 많지 않느냐" 며 나무랐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세종의 노인 공경 정책도 본받을 만하다. 나이 많은 사람을 존경해야 효도에 대한 풍속이 두터워진다. ‘세종실록’1435년(세종17) 6월 21일
세종은 90세가 된 천인에게 쌀 2석(약 288kg) 하사하고 80세 이상의 노인은 신분과 관계없이 양로연(養老宴) 참석 가능하게 했다. 고봉현(지금의 속초)에 107세의 노인이 있었는데 세종이 관리를 파견하여 양식과 옷을 하사하자 몸이 좋지 않았던 그 노인은 감동하여 왕이 있는 궁궐을 향해서 절을 하고 하사 받은 옷을 몸 위에 덮고 잠시 뒤 죽었다는 기록도 있다.
세종은 여성 건강문제에도 각별히 신경을 써 여자환자들이 남자의사의 진찰을 꺼려 병이 악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전국적으로 의녀제도를 확대하도록 지시했다. 지역별로 여성 관리를 선발해 제생원(의료기관)에서 가르친 후 부녀자를 치료하게 하라. ‘세종실록’ 1423년(세종5) 12월 4일
세종은 버려진 아이들의 입양을 자유로이 허락하고 아이를 버린 자를 찾아 고발하면 포상하게 했다. 아이들에게는 겨울철에 먹을 것을 넉넉히 주고, 제생원에서 항상 관찰하게 하라. ‘세종실록’1435년(세종17) 6월 22일
세종은 장애인들도 소홀하지 않았다. 장애인을 위한 전문 직업까지 창출하여 일시적이 아닌 원천적으로 장애인복지정책을 실행했다. 시각장애인 단체에는 노비와 쌀 등을 적극 지원토록 했다. 세종 본인도 어릴 적부터 오랫동안 너무 많은 독서를 해서 세종 후반기에는 앞을 거의 못 볼 정도의 시각장애인이 되었다.
관현악기를 다루는 시각장애인 중 천인인 자는 재주를 시험하여 채용하라. ‘세종실록’1434년(세종16)11월 24일
세종의 애민의 세심함은 결혼 지원정책에서도 보인다. 가난하여 시기를 놓쳐 혼인하지 못한 사람은 친족에게 함께 결혼에 대한 준비를 하게하고 곤궁함이 더욱 심한 자에게는 관청에서 곡식을 주도록 하라. ‘세종실록’1435년(세종17) 9월 29일
세종의 애민은 범죄자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세종은 지금으로 말하면 삼심제인 삼복제(三覆制)를 시행하여 비록 사형수라 하여도 억울한 죽음이 없게 하였다. 사형에 해당하는 죄는 세 차례에 걸쳐 정확히 조사해 아뢰게 하여라. 이는 사람 목숨을 소중히 여겨 혹시 잘못된 것이 있을까 염려하는 까닭이다. ‘세종실록’ 1421년(세종3) 12월 22일
세종 초기 계속되는 흉년으로 재정이 기울자 세종이 선택한 특단의 조치는 왕 가족의 재산 축소였다. 수양대군을 포함한 대군들의 토지를 50결씩 줄이고 대군(왕의 적자) 최대 250결 여러 군(왕의 서자) 최대 180결 자손들의 과전을 법으로 제한했다.
세종은 지금 봐도 놀라운 정책인 국민투표까지 실시했다. 세종은 토지법 제정을 앞두고 전국적으로 관리를 파견하여 약 5개월에 걸친 국민투표로 민심을 파악했다.
세종은 관리등용에도 애민정책을 실시했다. 세종 초기 10년간은 가뭄으로 인한 기근이 아주 극심했다. 당시 과학으로서는 기근에 왕이 할 수 있었던 첫 번째 일이 기우제를 자주 지내는 일 그것 밖에 없었다. 세종은 기우제만이 해결방법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천민출신이지만 과학에 뛰어난 장영실을 신하들 반대를 무릅쓰고 등용했다. 장영실은 이런 세종의 뜻에 따라서 자격루와 측우기를 만들었다. 그리고 세종은 행촌 이암이 원나라로부터 수입한 '농상집요'라는 책을 참고해서 체계적인 영농법의 연구를 바탕으로 쓴 책인 '농사직설'을 편찬하여 농업 생산에서 혁신이 일어나게 한다. 농사직설의 간행은 그 당시 농업 생산량을 대폭 증대시켜 백성들의 생활을 개선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세종은 천민이라 하더라도 하늘의 백성으로서 다 똑같다는 이야기를 자주 했다. 비록 천민이라 하더라도 인재로 쓰는 인사 정책에서 세종의 인간존중 사상을 찾아볼 수 있다. 세종의 애민정책의 결정판은 훈민정음 창제이다. 한자만을 읽고 쓰던 조선의 지배층인 양반들은 백성들이 글을 읽을 수 있게 되면 지식이 깊어지고 힘이 커질 것을 두려워해 백성들이 글을 읽을 수 있게 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하지만 세종은 백성의 입장에서 모든 백성이 글을 읽고 쓰는데 어려움이 없었으면 하는 바램으로 한글을 창제하고 반포를 하게 되어 백성들도 문자생활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이처럼 재위 32년 동안 세종이 꿈꿔온 목표는 모든 백성이 행복하게 사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세계적으로 극히 드문 애민군주의 참모습을 세종이 보여주었다...^^
첫댓글 그 옛날에
놀라운 정책들을
제도화하신 세종대왕께
경의를 표합니다.
본보기가 될 좋은 글
감사합니다ㅡ
보내주신 선비님
고맙습니다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