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짐과 만남, 일상과 환상의 경계에서 반짝이는 디즈니월드
평범하진 않지만 이상하지도 않은 가족의 크리스마스에 초대합니다
2010년 단편소설〈체이서〉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하여 장편소설 《중급 한국어》 《초급 한국어》 《비블리온》 등을 쓰고, 대학에서 글쓰기와 소설 창작을 가르치는 문지혁의 신작 《크리스마스 캐러셀》이 위즈덤하우스의 단편소설 시리즈 위픽으로 출간되었다. 제대 후 아빠의 결혼식을 마친 기념으로 미국에 사는 고모네 집을 방문한 ‘나’는 공개 입양된 사촌 동생 ‘에밀리’의 생일인 크리스마스를 맞아 디즈니월드로 향한다. 디즈니월드가 있는 올랜도까지 차로만 스물한 시간. 이주민 고모, 교포 1.7세 고모부, 입양아 에밀리, 아빠의 새 결혼으로 심란한 ‘나’ 네 사람은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 채, 비밀을 간직한 디즈니월드에 발을 내딛는다.
캐러셀(Carousel)은 회전목마 또는 컨베이어 벨트를 뜻하는 말이다. 회전목마와 컨베이어 벨트는 제자리를 맴돈다는 점에서 유사하고, 쉽게 인생과 일상의 은유로 사용되기도 한다. 조명이 켜지고 아름다운 음악이 흘러나오면 말과 마차들이 빙글빙글 돌아가고, 꿈같은 몇 분이 지난 후 우리는 다시 말에서 내려와 일상으로 돌아가야 한다. 씁쓸함을 뒤로하고 불이 꺼진 놀이공원에서 빠져나올 때처럼. 그러나 회전목마에 올라타기 전과 회전목마에서 내려온 후의 우리는 같을 수 없다. 엄마를 떠나보내고 또다시 맞이하는 ‘나’와 에밀리는 회전목마 위에서 조금씩, 분명하게 앞으로 나아간다. 헤어짐과 만남, 일상과 환상의 경계에서 반짝이는 디즈니월드. 그곳에서 두 사람은 새로운 가족과 함께 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한다.
P.8
“넘버 원. 우리 디즈니월드 간다.”
“뭐?”
“넘버 투. 크리스마스 이즈 마이 버스데이. 예이!”
에밀리는 두 팔을 번쩍 들고 이상한 감탄사를 내뱉더니 금세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그러니까, 자기 생일인 크리스마스에 맞춰 다 같이 디즈니월드에 간다는 얘기? 아니, 크리스마스는 예수님 생일인데 얘는 어쩌다 그날 태어났을까.
P.8~9
게다가 에밀리는 입양아였다. 물론 그거야 그럴 수 있지만, 고모네는 오픈 어답션이라고 해서 그걸 외부에 공개적으로 알리는 방식을 선택했다. 다섯 살 때 입양이 이뤄졌기 때문에 에밀리도 그 사실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고 했다.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잠이 덜 깨 정신이 반쯤 나간 사람한테 고모가 제일 먼저 한 얘기다.
“그럼 내가 뭐 어떻게 해야 해?”
공항에서 집으로 가는 차 안에서 내가 묻자 고모는 길게 답하지 않았다.
“그냥 알고만 있으라고.”
P.12~13
“결혼하려고?”
내가 묻자 아빠는 말했다.
“네가 허락해주면.”
사실 나는 알고 있었다. 허락 따위는 처음부터 필요 없었으며, 아빠는 그냥 자기가 결혼한다는 소식을 이런 식으로 통보했을 뿐이라는 것을. 하지만 살다 보면 다 알면서도 속아 넘어가야만 하는 순간들이 있다. 나쁘게 말하자면 그것을 일종의 연기이자 퍼포먼스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아빠는 형식적으로나마 나에게 동의를 구하고 있는 것이었다.
P.23
지금 우리와 같은 여정이었다. 멀쩡한 비행기를 놔두고 차로 뉴욕에서 플로리다까지 내려가는 이상한 여행. 엄마가 버스를 타고 디즈니월드에 갔었다니, 상상조차 못 한 일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엄마가 좋아할 만한 장소가 아니었다. 젊은 시절의 엄마는 조금 다른 사람이었던 걸까? 엄마는 왜 그런 얘기를 나에겐 해주지 않았을까?
P.36~37
“에밀리 어디 갔어. 어느 화장실이야?”
나는 주저했다. 뭐지? 상황 파악이 잘 안 됐다.
“……사실 몰라.”
“뭐?”
“아까 따로 다니자고 했어.”
“뭐라고?”
고모가 벌떡 일어섰고 나는 당황스러웠다. 그렇게 화를 낼 일인가? 다섯 살 아이도 아니고, 이제 핸드폰도 가진 열두 살인데?
P.61
나와 에밀리는 눈을 맞추며 소리 없이 웃었다. 문득 이 회전목마는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건지 제자리에 머물러 있는 건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건 따분한 생각이었다.
P.71
인생은 정말 회전목마일까?
우리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을까?
우리가 탄 것은 죽은 말에 불과할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믿는다.
이제 놀이공원을 빠져나갈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