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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14: 8. 세례 요한의 머리 9. 헤롯이 근심하나 10. 요한을 목 베어
마 14: 8. 세례 요한의 머리를 소반에 담아 - 그가 제 어머니의 시킴을 듣고 이르되, 세례 요한의 머리를 소반에 얹어 여기서 내게 주소서. 하니 ( 그가 제 어미의 시킴을 듣고 가로되, 세례 요한의 머리를 소반에 담아 여기서 내게 주소서 하니 )
헤로디아의 딸은 자기 어머니의 시킴을 듣고 “세례 요한의 머리를 소반에 담아 여기서 내게 주소서”라고 요청했다.
헤로디아는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려 하지 않고 오히려 선지자 요한을 미워해 옥에 가두게 했을 뿐 아니라, 또한 이제 그를 죽이려 한 것이다.
1] 그가 제 어머니의 시킴을 듣고 이르되,
살로메는 육체적으로는 뭇 남성의 시선을 집중시킬 만큼 성숙했는지 모르나 정신적으로는 제 어미에게 의존해야 할 만큼 미숙한 상태였다.
이것이 악의 도구로 전락하게 된 원인이 되었다.
본문의 '시킴'에 해당하는 원어 '프로비바스데이사'(*)는 '선동하다', '권면하다'는 뜻으로 헤로디아의 집요하고도 악의에 찬 일면을 보여준다.
본문은 세례 요한의 죽음이 헤로디아의 사주(使嗾)에 의한 것임을 알 수 있게 한다. 요한의 죽음은 그녀의 간계(奸計)에 의한 것이었다.
헤로디아는 요한의 처형에 대해 끊임없이 헤롯을 졸랐을 것이다. 그러나 결심을 못 하는 헤롯의 행동을 통해서도 자신의 요구를 포기하지 않던 헤로디아는 어린 딸을 이용하여 눈엣가시와 같아 자신의 부정(不貞)을 고발하던 요한을 제거하려 하였다.
2] 세례 요한의 머리를 소반에 얹어
헤로디아의 흡혈귀적인 완악상을 드러내 준다.
크리소스톰(Chrysostom)에 의하면, 이때 헤로디아는 자신의 부정한 결혼을 고발하던 요한의 칼날 같은 혀가 침묵하고 있는 모습을 보기 원했기 때문에, 그리고 그러한 요한을 마음껏 저주하고 조롱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참수(斬首)당한 요한의 머리를 요구했다고 한다.
한편 여기 언급된 '소반'은 타원형으로 된 얇고 큰 접시를 가리킨다.
3] 여기서 내게 주소서
'여기서'라는 말은 유대의 정치, 종교지도자와 로마시의 군관들이 모인 잔치 자리로서 연회석이자 공식적인 모임의 장소이다.
헤로디아는 헤롯이 그의 딸에 대한 맹세를 깨뜨릴 것을 염려하여 모인 사람들의 눈과 귀를 담보(擔保)로 하여 그(헤롯)를 위협하고 요한의 처형을 더 이상 지체치 말고 즉각 실행할 것을 촉구하였다.
마 14: 9. 헤롯이 근심하나 - 왕이 근심하나 자기가 맹세한 것과 그 함께 앉은 사람들 때문에 주라. 명하고 ( 왕이 근심하나 자기의 맹세한 것과 그 함께 앉은 사람들을 인하여 주라. 명하고 )
왕은 허세(虛勢)로 한 자기의 맹세에 자기가 걸려 넘어졌다.
그가 근심한 것은 군중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맹세한 것과 그 함께 앉은 사람들을 인하여 주라고 명하였다.
1] 왕이 근심하나
헤롯의 근심이 무죄한 자를 죽이는 것에 대한 양심의 가책인지 아니면 요한의 죽음으로 인해서 일어날지도 모를 민란 때문인지 확실치는 않다.
그의 근심은 '양심의 최후 투쟁'(plumptre)이었으나 의가 아니라 자신의 위치에 집착, 선택함으로써 악에게 굴복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2] 자기가 맹세한 것과
헬라어 '호르쿠스'(*)는 맹세의 뜻인 '호르코스'(*)의 복수형으로, 맹세가 여러 번 반복되었거나 아니면 그 맹세가 확정적일만큼 강력했던 것임을 의미하는 말이다.
헤롯이 세례 요한을 처단하도록 허락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1) 고대 근동에서의 맹세는 율법에 명시되어 있는 바와 같이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것으로 인식되어 있었다.
성경적인 맹세는 하나님 앞에서 거짓 없음과 약속이행의 의지를 엄숙하게 맹세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위반할 경우 하나님으로부터 어떠한 처벌을 받더라도 이의(異意)가 없는 것을 의미한다.
* 민 30: 1-8 – 1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 지파의 수령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여호와의 명령이 이러하니라. 2 사람이 여호와께 서원하였거나 결심하고 서약하였으면 깨뜨리지 말고 그가 입으로 말한 대로 다 이행할 것이니라. 3 또 여자가 만일 어려서 그 아버지 집에 있을 때에 여호와께 서원한 일이나 스스로 결심하려고 한 일이 있다고 하자. 4 그의 아버지가 그의 서원이나 그가 결심한 서약을 듣고도 그에게 아무 말이 없으면 그의 모든 서원을 행할 것이요, 그가 결심한 서약을 지킬 것이니라. 5 그러나 그의 아버지가 그것을 듣는 날에 허락하지 아니하면 그의 서원과 결심한 서약을 이루지 못할 것이니 그의 아버지가 허락하지 아니하였은즉 여호와께서 사하시리라. 6 또 혹시 남편을 맞을 때에 서원이나 결심한 서약을 경솔하게 그의 입술로 말하였으면 7 그의 남편이 그것을 듣고 그 듣는 날에 그에게 아무 말이 없으면 그 서원을 이행할 것이요 그가 결심한 서약을 지킬 것이니라. 8 그러나 그의 남편이 그것을 듣는 날에 허락하지 아니하면 그 서원과 결심하려고 경솔하게 입술로 말한 서약은 무효가 될 것이니 여호와께서 그 여자를 사하시리라.
신약 시대에 이르러 맹세는 하나님 대신에 신의 인격, 예배에 관련된 물체, 우주만물, 성전 등을 가리켜 맹세가 행해졌다.
그러나 맹세의 남용(남용)으로 인해서 예수께서는 일체(일체)의 맹세를 반대하시기도 하였다.
* 마 5: 34-37 – 3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35 땅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36 네 머리로도 하지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 37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
구약의 인물 중에서도 경솔한 맹세로 인해서 절망적인 상태에 빠지게 된 사람으로 입다, 사울 등이 있다.
* 삿 11: 31-40 – 31 내가 암몬 자손에게서 평안히 돌아올 때에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 내가 그를 번제물로 드리겠나이다. 하니라. 32 이에 입다가 암몬 자손에게 이르러 그들과 싸우더니 여호와께서 그들을 그의 손에 넘겨 주시매 33 아로엘에서부터 민닛에 이르기까지 이십 성읍을 치고, 또 아벨 그라밈까지 매우 크게 무찌르니 이에 암몬 자손이 이스라엘 자손 앞에 항복하였더라. 34 입다가 미스바에 있는 자기 집에 이를 때에 보라. 그의 딸이 소고를 잡고 춤추며 나와서 영접하니 이는 그의 무남독녀라. 35 입다가 이를 보고 자기 옷을 찢으며 이르되, 어찌할꼬? 내 딸이여. 너는 나를 참담하게 하는 자요, 너는 나를 괴롭게 하는 자 중의 하나로다. 내가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열었으니 능히 돌이키지 못하리로다. 하니 36 딸이 그에게 이르되, 나의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여셨으니 아버지의 입에서 낸 말씀대로 내게 행하소서. 이는 여호와께서 아버지를 위하여 아버지의 대적 암몬 자손에게 원수를 갚으셨음이니이다. 하니라. 37 또 그의 아버지에게 이르되, 이 일만 내게 허락하사 나를 두 달만 버려두소서. 내가 내 여자 친구들과 산에 가서 나의 처녀로 죽음을 인하여 애곡하겠나이다. 하니 38 그가 이르되, 가라. 하고 두 달을 기한하고 그를 보내니 그가 그 여자 친구들과 가서 산 위에서 처녀로 죽음을 인하여 애곡하고 39 두 달 만에 그의 아버지에게로 돌아온지라. 그는 자기가 서원한 대로 딸에게 행하니 딸이 남자를 알지 못하였더라. 이것이 이스라엘에 관습이 되어 40 이스라엘의 딸들이 해마다 가서 길르앗 사람 입다의 딸을 위하여 나흘씩 애곡하더라.
* 삼상 14: 38-44 – 38 사울이 이르되, 너희 군대의 지휘관들아. 다 이리로 오라. 오늘 이 죄가 누구에게 있나 알아보자. 39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아들 요나단에게 있다 할지라도 반드시 죽으리라. 하되 모든 백성 중 한 사람도 대답하지 아니하매 40 이에 그가 온 이스라엘에게 이르되, 너희는 저쪽에 있으라. 나와 내 아들 요나단은 이쪽에 있으리라. 백성이 사울에게 말하되, 왕의 생각에 좋은 대로 하소서 하니라. 41 이에 사울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 아뢰되, 원하건대 실상을 보이소서. 하였더니 요나단과 사울이 뽑히고 백성은 면한지라. 42 사울이 이르되, 나와 내 아들 요나단 사이에 뽑으라. 하였더니 요나단이 뽑히니라. 43 사울이 요나단에게 이르되, 네가 행한 것을 내게 말하라. 요나단이 말하여 이르되, 내가 다만 내 손에 가진 지팡이 끝으로 꿀을 조금 맛보았을 뿐이오나 내가 죽을 수밖에 없나이다. 44 사울이 이르되, 요나단아.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이 내게 벌을 내리시고 또 내리시기를 원하노라. 하니.
(2) 헤롯은 그의 왕으로서의 권위 때문에 맹세를 깨뜨릴 수 없었을 것이다.
고대 사회에서 왕의 말은 곧, 국법이었다. 그 예로 다니엘을 사자 굴에 집어넣었던 메대 나라의 다리오 왕의 금령을 들 수 있다.
* 단 6: 14-16 – 14 왕이 이 말을 듣고 그로 말미암아 심히 근심하여 다니엘을 구원하려고 마음을 쓰며 그를 건져내려고 힘을 다하다가 해가 질 때에 이르렀더라. 15 그 무리들이 또 모여 왕에게로 나아와서 왕께 말하되, 왕이여. 메대와 바사의 규례를 아시거니와 왕께서 세우신 금령과 법도는 고치지 못할 것이니이다. 하니 16 이에 왕이 명령하매 다니엘을 끌어다가 사자 굴에 던져 넣는지라. 왕이 다니엘에게 이르되, 네가 항상 섬기는 너의 하나님이 너를 구원하시리라. 하니라.
헤롯은 공의의 판단과 처리보다 자기의 명예와 체면을 더 중시했다. 그래서 그는 자기 권력을 남용하여 하나님의 사람 요한을 죽이도록 명령했다.
3] 그 함께 앉은 사람들 때문에 주라 명하고
막 6: 12에 의하면 이곳에 초대된 사람들은 대신들과 천부장들과 갈릴리의 귀인들이다. 이 사람들은 왕의 잘못을 제지하는 엘리야김의 방백들과는 달리 헤롯의 불의를 조장하고 촉구하는 자들이었을 것이다.
* 렘 36: 25 – 엘라단과 들라야와 그마랴가 왕께 두루마리를 불사르지 말도록 아뢰어도 왕이 듣지 아니하였으며
'같은 깃털을 가진 새들이 함께 모이듯' 헤롯의 주위에 모여드는 사람들은 모두 헤로디아와 같이 부정하고 사악 한 자들로서 왕의 잘못을 지적하는 대신에 그의 비위를 맞추고 아첨함으로써 세례 요한의 참수를 결단하게 하는 결정적 요소로 작용하였다.
그들이 어리석은 헤롯의 맹세의 증인이 되었고 사악한 헤로디아의 살인에 동조자(同調者)가 되었다.
마 14: 10. 요한을 목 베어 - 사람을 보내어 옥에서 요한의 목을 베어 ( 사람을 보내어 요한을 옥에서 목 베어 )
사람을 보내어 요한을 옥에서 목베어 그 머리를 소반에 담아다가 그 소녀에게 주었다.
1] 사람을 보내어 옥에서 요한의 목을 베어
재판의 판결 없이 사람을 처형하는 것과 목을 베어 죽이는 일은 종교적, 신앙 공동체에 대한 공적 범죄에 해당한다.
* 출 32: 27 -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각각 허리에 칼을 차고 진 이 문에서 저 문까지 왕래하며 각 사람이 그 형제를, 각 사람이 자기의 친구를, 각 사람이 자기의 이웃을 죽이라 하셨느니라.
* 신 13: 6-18 – 6 네 어머니의 아들. 곧 네 형제나 네 자녀나 네 품의 아내나 너와 생명을 함께 하는 친구가 가만히 너를 꾀어 이르기를 너와 네 조상들이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 7 곧 네 사방을 둘러싸고 있는 민족 혹 네게서 가깝든지 네게서 멀든지 땅 이 끝에서 저 끝까지에 있는 민족의 신들을 우리가 가서 섬기자 할지라도 8 너는 그를 따르지 말며 듣지 말며 긍휼히 여기지 말며 애석히 여기지 말며 덮어 숨기지 말고 9 너는 용서 없이 그를 죽이되, 죽일 때에 네가 먼저 그에게 손을 대고 후에 뭇 백성이 손을 대라. 10 그는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너를 인도하여 내신 네 하나님 여호와에게서 너를 꾀어 떠나게 하려 한 자이니 너는 돌로 쳐죽이라. 11 그리하면 온 이스라엘이 듣고 두려워하여 이 같은 악을 다시는 너희 중에서 행하지 못하리라. 1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어 거주하게 하시는 한 성읍에 대하여 네게 소문이 들리기를 13 너희 가운데서 어떤 불량배가 일어나서 그 성읍 주민을 유혹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우리가 가서 섬기자 한다. 하거든 14 너는 자세히 묻고 살펴 보아서 이런 가증한 일이 너희 가운데에 있다는 것이 확실한 사실로 드러나면 15 너는 마땅히 그 성읍 주민을 칼날로 죽이고 그 성읍과 그 가운데에 거주하는 모든 것과 그 가축을 칼날로 진멸하고 16 또 그 속에서 빼앗아 차지한 물건을 다 거리에 모아 놓고 그 성읍과 그 탈취물 전부를 불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 드릴지니 그 성읍은 영구히 폐허가 되어 다시는 건축되지 아니할 것이라. 17 너는 이 진멸할 물건을 조금도 네 손에 대지 말라. 그리하면 여호와께서 그의 진노를 그치시고 너를 긍휼히 여기시고 자비를 더하사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심 같이 너를 번성하게 하실 것이라. 18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목전에서 정직하게 행하면 이같이 되리라.
참수형은 그리이스나 로마의 관습을 따른 것이다.
헤롯과 그를 따르는 자들의 이러한 이방적 태도는 반율법적이고 반민족전인 것이다. 그가 아무리 유대인임을 자처한다고 하더라도 민중의 미움을 받는 이유가 되고 있다.
2] 목 베임의 의미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신자들이 얼마나 믿음이 없는가 하는 것은 단 한가지를 보면 알 수 있다. 그것은 과연 내가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해서 전적으로 동의하며 사느냐? 하는 문제이다.
믿음이란 하나님이 세상에 대해서, 나에 대해서 어떤 일을 하시든지 하나님이 하신 일이기 때문에 나는 거기에 대해서 일언반구 할 말이 없다는 것, 오직 하나님이 하신 일을 기뻐하며 찬양할 뿐이라는 것이 믿음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님이 나에게 하신 일에 대해서 기뻐하고 감사하는 경우는 하나님이 하신 일로 인해서 자신에게 세상적인 어떤 유익이 발생했을 때다. 하지만 유익이 아니라 오히려 손해와 고통으로 다가왔을 때 사람들은 대부분 ‘하나님이 나에게 왜 이렇게 하시는가’라는 불만을 토로하게 된다.
그러면서 자신이 하나님에 대해서 했던 것을 내세운다. ‘나는 하나님께 이만큼 했는데 하나님은 왜 나에게 그에 따른 보상은커녕 오히려 괴로움을 안겨줍니까?’라고 외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의 지금의 현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라면 결국 여러분은 지금까지 수없이 믿음을 말하고 외쳤지만 결국 믿음이 없는 채로 살아왔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지금 많은 교회가 믿음을 너무나 오해하고 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믿음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의지로 만들어 낼 수 있고, 사람의 열심으로 얼마든지 꾸밀 수 있는 것을 믿음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성경은 분명히 사람이 스스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고 말한다.
믿음은 하나님 은혜의 선물이라고 말씀한다. 그런데 사람이 믿음을 스스로 만들어 보려고 한다면 오히려 그것이 하나님의 적이 된다고 말하고 있는데 그 말씀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 산 밑에서 모세가 없을 때 한 것은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그것을 하나님이라고 섬긴 일이다. 그들은 믿음을 자기들 스스로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으로 여겼다. 그리고 그들이 만들어 낸 믿음은 자기들을 보호하고 지켜주는 믿음이었다. 바로 이것이 오늘 신자라고 하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오늘날 신자들은 누구나 믿음을 갖고 싶어 한다. 그러나 믿음은 앞서 말한 대로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해서 전적으로 동의하고, 기뻐하고 감사하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자기를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서 믿음을 사용한다면 그 믿음의 대상은 자연히 우상이 되어 버린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하나님이 나에게 어떤 일이 있게 하셔도 그 일을 기뻐하고 찬양한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독선이고 상식에 맞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 하나님은 독선적인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상식에 전혀 어긋나시는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사랑과 자비가 풍성하신 하나님 쪽으로만 생각했고, 그 사랑과 자비도 나를 세상에서 잘되도록 도우시고 지켜주시는 사랑과 자비로 생각했기 때문에 나를 해롭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시는 하나님은 전혀 상상하지도 않았다.
그러므로 자신에게 어떤 문제가 발생하면 그것을 모두 자신에게 어떤 죄가 있어서 징계를 받은 것으로 생각해 버린다. 그리고는 자신의 행위에서 잘못된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이것이 믿음이 있는 모습으로 지금까지 강조했지만, 그러나 이것은 믿음이 전혀 없는 모습이다.
결국 고통을 당한 사람은 자신의 행동에서 뭔가 하나님을 화나게 한 부분을 찾아내서 그것을 고치면 모든 문제가 사라지고 복이 올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고 우상을 믿고 있는 모습이다.
하나님은 독선의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신자는 하나님을 자기 상식에 맞추어서 생각해서는 안 되고, 내 마음에 드는 쪽으로만 생각해서도 안 된다. 하나님은 내 기대와 생각과는 전혀 상관없이 오직 하나님의 기쁨과 하나님의 안식을 위해서 일하실 뿐이다. 이것을 알고 자신이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존재가 되기에 힘쓰는 것이 곧 믿음이고 신자이다.
하나님의 기쁨은 우리가 부르는 찬송과 예배와 기도와 봉사와 전혀 상관이 없다. 단지 하나님이 지금 나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 가를 알고 그 요구에 순종하는 것이다. 심지어 내가 죽는 것이 하나님의 요구라면 죽음도 마다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독선의 하나님이다.
이러한 독선의 하나님을 사람들은 쉽게 이해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상상과 생각으로 만들어 낸 하나님이 자기 머릿속에 깊이 박혀 있기 때문이다. 그 하나님 아닌 하나님이 자기 머릿속에 있는 동안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하나님은 전혀 이해할 수 없다.
이러한 사실을 두고 볼 때 오늘날 누가 감히 하나님 앞에서 ‘나는 믿음이 있다.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라고 외칠 수 있는가. 당장 내 손에 가시만 하나 박혀도 불만이 나오고 화가 나는 우리인데 만약 하나님이 이 땅에 있는 나의 소유에 대해서 손을 대시고, 내 자식, 가족에 대해서 손을 대시고, 재산에 대해서도 손을 대실 때 그 일을 인정하실 수 있는가?
사람은 자기의 고통과 손해에 대해서는 참지를 못한다. 아무리 내가 믿는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고 할지라도 불만이 나올 수밖에 없다. 결국 세상의 모든 사람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니다. 따라서 진심으로 하나님을 알고 자신을 아는 신자라면 자신의 입으로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라는 말을 할 수 없다.
자신이 믿음이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이런 신자들은 결국 하게 되는 말은 ‘주님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라는 고백을 하게 된다. 자신이 믿음이 없었다는 것을 깨달아 가는 것이다. 이것을 믿음이라고 한다. 사람이 만들어 낼 수 없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믿음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런 신자로 만드시기 위해서 말씀을 기록하셨다. 그래서 성경에는 인간의 모든 불신앙의 모습과 그 인간을 극복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사건 하나하나를 통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신자의 삶이 무엇인가도 계시하고 있다.
성경은 4천년 전의 사건, 2천년 전의 사건이라 할지라도 시간과 환경을 뛰어넘어서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이다. 오늘 본문도 그런 내용이다. 본문은 세례 요한이 죽음을 당하는 내용이다. 그런데 그 죽음은 아주 처참한 죽음이다. 쉽게 말해서 위대한 영웅의 죽음이라고 말할 수 없는 하찮은 죽음의 모습이다.
사람이 생각하는 영웅의 죽음은 나라를 위해서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하는 죽음이나, 이웃의 생명을 구하다가 대신 죽는 그런 모습만을 연상한다. 그러나 세례 요한에게서는 그런 죽음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한 여인의 말 한마디에 의해서 목이 잘리는 죽음이다.
그러면 세례 요한의 죽음은 어떤 죽음입니까? 하나님은 세례 요한의 죽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일까? 세례 요한의 죽음의 동기는 헤롯 왕의 불법적인 행동을 지적했기 때문이다. 헤롯 왕은 헤롯 안디바라고 부르는데 그 헤롯 왕에게는 헤롯 빌립이라고 하는 이복동생이 있었다. 그리고 그 동생의 부인은 헤로디아였는데 헤롯이 그 동생의 부인인 헤로디아를 강제로 자신의 아내로 삼아버렸다.
이런 불법적인 행동을 세례 요한이 책망을 하자 헤롯을 요한을 옥에 가두었다. 그러던 어느 날 헤롯의 생일에 헤로디아의 딸인 살로메를 불러서 춤을 추게 하는데 춤을 춘 모습을 보고 헤롯이 너무 기뻐한 나머지 살로메에게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다 주겠다고 맹세를 하였다. 그러자 살로메는 자기 어머니의 시킴을 듣고 세례 요한의 목을 원하게 되고 결국 헤롯은 근심하다가 요한을 죽여서 그 머리를 소반에 담아 살로메에게 주었다.
헤롯은 요한을 죽이고 난 후 심리적으로 많은 압박을 받은 것 같다. 그래서 헤롯은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하시는 여러 가지 일을 듣고는 예수님을 세례 요한이 살아난 것으로 착각을 하게 되었다. 이런 이야기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목적이 무엇인가? 우리는 세례 요한의 죽음이나, 스데반의 죽음 등을 생각하면 의문감이 들 수밖에 없다. 그들의 죽음의 가치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우리 입장으로는 세례 요한의 죽음에 반발할 수밖에 없다. 예수님보다 일찍 세상에 와서 예수님을 위해서 복음을 증언했는데 그 결과가 이런 죽음인가라는 반발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의 이런 죽음도 결국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면 도대체 하나님은 왜 그런 죽음이 요한에게 있게 하신 것인가다. 하나님은 요한의 입장은 전혀 생각하지도 않은 것이다. 이것이 독선의 하나님의 모습이다. 우리의 입장은 전혀 생각하지도 않으시고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만 하신다. 이 하나님을 이해하는 것이 우리에게는 너무 중요하다.
하나님은 요한의 처지를 생각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장에서 일하신다. 하나님은 한사람의 개인의 유익을 위해서 일하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기쁨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우리를 도구로 쓰실 뿐이다. 결국 세례 요한의 죽음도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쓰여진 도구였다.
사람들이 일하는 목적은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다. 사람이 희생이라는 것을 싫어하는 이유도 희생에는 자기 유익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의 일의 결과는 누군가의 희생이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 우리는 꽃을 보고 아름답다고 찬사를 하고, 열매를 보고 탐스럽다고 한다. 그러나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힌 것은 땅속에 묻힌 보이지 않는 뿌리가 있기 때문이다.
꽃도 열매도 저절로 맺힌 것에 불과하다. 그런데 사람들은 뿌리는 생각하지도 않고 단지 꽃과 열매만을 생각한다. 모든 영광과 찬사가 꽃과 뿌리에게 돌아가기 때문에 사람들은 뿌리보다는 꽃과 열매가 되기를 원한다. 신자들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그 의중에도 눈에 보이지 않는 뿌리로서 영광 돌리는 것보다는 눈에 보이는 꽃과 열매가 되어서 영광 돌리는 것을 원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세례 요한의 죽음에서는 그러한 것은 전혀 찾아 볼 수 없다. 단지 헤롯의 불법적인 행동을 책망하다가 죽게 된 것이다. 세례 요한은 죽고 사는 문제보다는 잘못된 것을 지적하고 나무라는 것이 자신의 할 일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 앞서 세상에 온 것은 주님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결국 요한의 죽음까지 주님의 길을 예비하고 있다.
12절을 보면 “요한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가져다가 장사하고 가서 예수께 고하니라”고 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이 이 땅에서 왜 죽으셔야 하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그런 죽음을 당한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일이다. 세상의 죄를 지적하고, 사람이 자기의 의와 기쁨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 곧 멸망의 도구임을 지적할 때 세상으로부터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면 세례 요한에게는 그 어떤 유익도 없는가? 세례 요한은 자신의 죽음을 통해서 예수님의 죽음을 보여줌으로 예수님의 영광에 함께 참여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결국 신자의 유익이 무엇인가? 자신의 삶을 통해서 예수님을 보여줄 때 예수님의 영광에 함께 참여하는 것이다. 이것이 신자들이 누릴 복이다.
이제 우리의 할 일은 분명하다. 세상에서의 영광과 내 이익을 위해서 움직이고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서 사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하신 일을 인정하고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는 그런 믿음이 없는 것을 도와달라는 기도 속에서 나는 보이지 않고, 사라지는 그런 역할이라 할지라도 나를 통해서 주님이 보여지는 것을 감사하는 신자로 살아갈 때 그 신자만이 주님의 영광에 함께 참여하는 자가 된다.
내 입장에서 세상을 살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의 입장에서 살려고 힘쓰기를 바란다. 그럴 때 여러분에게 어떤 문제가 발생해도 그 속에서 여러분이 해야 할 하나님의 일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알게 될 것이다.
3] 세례 요한과 순교
본문은 갈릴리 지방을 다스리는 분봉 왕 헤롯에 의해서 순교 당한 세례 요한의 죽음을 언급하고 있다. 유대인들 사는 팔레스타인 지방은 로마의 속국으로 로마 황제가 임명한 헤롯(BC 37-AD 4)에 의해 통치되고 있었다.
헤롯이 죽은 뒤 팔레스타인 지방은 세 지역으로 나뉘어져 헤롯의 세 아들이 한 지역씩 맡아 통치하게 되었다. 이 팔레스타인 전 지역의 약 4분의 1에 해당하는 갈릴리와 베뢰아 지방을 헤롯의 아들 안디바(안티파스)가 다스리고 있었으므로 이 헤롯 안디바를 분봉 왕 헤롯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 헤롯은 이복 형제인 헤롯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에 반해서 그녀를 강제로 빼앗아 결혼하였다. 이러한 비윤리적이고 비도덕적인 사실에 대하여 정의의 사도인 세례 요한은 '옳지 못한 일'이라고 비난함으로써 분봉 왕 헤롯 안디바의 미움을 받아 목이 잘려 순교 당했다. 세례 요한의 순교를 살펴보면서 신앙인이 지향해야 할 삶의 참모습을 배우기로 하겠다.
(1) 간악한 음모
헤로디아의 남편 헤롯 빌립은 본디 우유부단하고 그 성품이 유순한 사람으로 그 아내 헤로디아를 탐내는 동생 안디바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그러나 헤로디아는 그녀의 남편인 헤롯 빌립보다도 현재의 남편인 헤롯 안디바의 아내가 된 것을 더욱 만족히 여겼다.
이러한 간악한 헤로디아는 자기의 부정을 폭로한 세례 요한을 자기의 딸 살로메의 춤을 이용하여 목베어 죽이고 말았다. 헤로디아와 세례 요한의 관계는 마치 구약의 이세벨과 엘리야의 관계처럼 서로 대적하는 관계로서, 이것은 세상 나라와 하나님 나라와의 투쟁적인 모습을 의미한다.
오늘날 돈이나 명예, 그리고 관능적인 성과 쾌락 때문에 인격과 신앙의 정조를 버리는 사람들은 모두 헤로디아와 같은 잘못된 삶을 사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세례 요한의 머리를 소만에 담아 오도록 한 헤로디아의 잔인성과 그녀의 요청을 다 허락한 왕의 어리석음은 지금도 우리의 주변에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인간관계의 연락은 언제나 비극으로 끝맺는 법이며, 그뿐 아니라 그들에게도 더 크고 무거우며 영원한 형벌이 준비되어 있음을 기억하자.
(2) 순교를 부른 타락한 춤
헤로디아는 헤롯의 손녀로(아리스토불루스의 딸) 그의 숙부되는 빌립 1세와 초혼하여 낳은 딸이 살로메다. 어린 소녀 살로메의 춤은 의인 세례 요한의 죽음을 가져오게 했다. 살로메의 춤은 그의 어미 헤로디아의 간계에 이용되었다.
그녀의 춤은 축하의 연회를 처참한 참변으로 변하게 하여 세례 요한을 죽였다. 이처럼 세상의 환락의 춤은 언제나 죄악과 죽음의 비극을 낳고 만다. 살로메의 춤은 악에 이용당하고 세상에서 죄악의 발자취를 남겼다.
또한 그도 타락해 창기가 되고 말았다. 그 당시 연회장에 나와 춤추는 여인들은 모두 창기들이었다. 그런데 왕의 딸 신분으로 뭇 남성들이 술에 취해 있는 곳에 나와 춤을 춘다는 것은 수치요 모욕이다. 그러나 살로메는 수치를 모르고 춤을 추었고 그 춤의 대가는 자신을 창기로 전락시키고 말았다.
성도가 교회에서나 사회에서나 수치를 모르고 추태를 부린다고 하면 이는 왕녀가 창기로 타락하듯이 성도가 사탄의 졸개로 타락하는 것이요 그 결과는 무서운 죄악을 낳게 된다.
(3) 순교의 의미
세상 나라의 통치자들이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미워하고 복음 전하는 자를 핍박하고 박해하는 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광야의 소리'인 세례 요한의 사명은 불의를 보고 직언하는 것이었다.
그는 이를 위해 태어난 '소리'(마 3: 3)였고 이 '소리' 때문에 죽었다. 헤롯과 그의 아내 헤로디아는 이 소리를 듣기 싫어했고 그들의 불의를 은폐하려고 했다. '그 여자를 취한 것이 옳지 않다'라고 한 세례 요한의 소리는 양심의 소리였고, 도덕의 소리였다.
이 소리를 그들은 듣지 않았다. 그리고 세례 요한을 죽였다. '행한 모든 악의 위에 더한 악'이었다.
* 눅 3: 19-20 – 19 분봉 왕 헤롯은 그의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과 또 자기가 행한 모든 악한 일로 말미암아 요한에게 책망을 받고 20 그 위에 한 가지 악을 더하여 요한을 옥에 가두니라.
목 베임을 당한 세례 요한의 죽음은 처참했지만, 그의 죽음은 헛되지 않았다. 죽음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의 죽음은 새로운 생명의 종교를 탄생시켰다.
세례 요한의 죽음은 의의 죽음이요, 순교요, 한 알의 밀알이었다. 요한의 죽음은 군중의 분노를 일으켜 그들로 하여금 더욱더 예수를 따르게 했고 5000의 무리가 예수를 따른 것은 세례 요한의 죽음 때문이었다.
결코 참은 죽일 수가 없다. 아니 참은 죽지 않는 법이다. 우리의 성도들도 복음을 전하다가 어려움에 처하는 일이 있더라도 세례 요한처럼 부단히 복음을 전하고 정의의 소리를 외치는데 최선을 다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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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설교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성령의 도우심을 받읍시다.
설교 감사합니다.
성령의 도우심을 받읍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