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4144
2월24일[연중 제7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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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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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gc-_cPeTPC8
[꼰솔라따 선교수도회 김명호 요셉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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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남은 인생 여정, 좀 더 지혜로운 사람으로 살아가기를...>
출신 대학교 이름만 들어도 뒤돌아보게 되는 명문대 출신에다가, 그 어렵다는 통과 의례를 거쳐, 권력의 최상층 부까지 치고 올라간 사람들이 깊이를 알 수 없는 깊은 나락으로 떨어지는 모습은 인생무상을 실감케 합니다.
그렇게 머리 좋은 사람들, 그렇게 많이 배운 사람들이 어찌 그리 어리석은 판단과 행동을 할 수 있는지? 참으로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대체 그 원인이 무엇일까? 거듭 고민을 해봅니다.
한 인생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지적인 양성뿐만 아니라 인간적, 영적, 상식적인 교육도 골고루 받았어야 하는데, 지나치게 지적인 측면에만 투자한 결과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지혜가 결여된 지식의 위험성을 오늘 우리는 목격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저희 살레시오회에서는 사목자를 양성할 때 4가지 측면의 고른 양성을 강조합니다. 한 살레시오 회원이 인간적, 영적, 지적, 사목적 역량을 골고루 갖추어 균형있는 수도자로서 살아갈 수 있도록 안내합니다. 무엇보다도 성숙한 식별과 판단을 할 수 있는 지혜로움을 갖추기를 강조합니다.
오늘 우리가 첫째 독서로 봉독한 집회서에서는 참된 지혜가 어떤 것인지를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집회서는 유다교 문학의 지혜 장르를 보여주는 탁월한 본보기가 되는 성경입니다. 집회서에서 ‘소피아’로 인격화된 지혜는 자신과 하느님의 영원한 관계에 관해 설명하고, 모세의 율법과 자신을 동일시합니다.
예수님 시대에 이르러 지혜에 대한 개념은 대폭 확장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간 자칭 지혜롭고 슬기로운 존재라고 자처했던 사람들, 비본질적인 것, 가시적인 것에 집착한 나머지 가장 중요한 본질적인 것, 내면적인 것을 놓쳐버린 사람들을 부끄럽게 만드셨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지혜로움의 끝판왕이라며 자부심이 대단했지만 사실, 지혜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스스로 지혜의 최첨단을 걷고 있다고, 사실 가장 우둔하고 어리석은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지상에서 가장 똑똑한 척 했지만, 사실 가장 멍청한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이 어떤 존재인가 생각해봅니다.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다른 무엇에 앞서 하느님을 경외하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은 순식간에 지나간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영영세세 지속되는 또 다른 세상, 하느님 나라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음을 인식한 사람입니다.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나와 가장 가까운 존재들이 가장 큰 은총의 선물임을 깨달은 사람입니다. 우리 모두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그들과 함께 지상천국을 건설할 수 있음을 확신하는 사람입니다.
또한 지혜로운 사람은 나 자신의 부족함을 기꺼이 수용하는 사람입니다. 부족하고 부끄러움에도 불구하고 내 안에 하느님께서 현존하심을 굳게 믿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나 자신을 주님께서 거처하시는 거룩한 성전으로 여기고, 나 자신에 대해서도 큰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입니다.
어리석음의 반의어는 지혜로움입니다. 학식을 갖춰 다방면에 걸쳐 유식한 것, 식별력이나 판단력이 출중한 사람도 지혜롭다고 하지만, 진정한 지혜는 좀 더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갑니다.
인생에 있어서 보다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 무엇이 영원불변한 것이고, 무엇이 연기처럼 사라지는 것인지를 잘 파악하는 사람이야말로 진정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지혜로운 사람은 하느님을 경외하는 사람, 하느님께 삶의 최 우선권을 두는 사람입니다. 결국 지혜로운 사람은 재물이라는 것이 영원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는 사람, 재물을 하느님 위에 올려놓는 것보다 더 큰 실수는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여유 있는 재물을 주인이신 주님께로 돌려드리는 사람, 가난한 이웃들과 기쁘게 나눌 줄 아는 사람이야말로 진정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남은 인생 여정을 좀 더 지혜로운 사람, 그래서 하느님으로부터 칭찬과 사랑을 듬뿍 받은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해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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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g0d2AOnDga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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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이 없음을 아는 것이 믿음이다>
신앙인 대부분이 그러하시겠지만, 저도 항상 어디를 갈 때 함께 가는 이들에게 묵주기도 5단을 하자고 합니다. 그 이유는 안전한 여행을 위해 도움을 구하기 위해서입니다.그런데 그것보다도 우리가 그렇게 안전하게 잘 다녀올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여행을 즐기기 위해서입니다. 기도하면 ‘기도했으니, 지켜주시겠지!’라는 믿음이 생깁니다.
7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기 전에는 연옥에 당연히 갈 것이라 여겼지만, 하면서 연옥에 가지 않을 것이란 믿음이 점점 생기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믿는 대로 되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그 믿음은 기도를 통해증가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한 아버지가 예수님께 “저는 믿습니다. 믿음이 없는 저를 도와주십시오.”라고 간청하는 장면을 마주합니다. 어찌 보면 이 말은 모순처럼 들리지만, 사실 우리의 신앙생활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표현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 마지막에 제자들에게 “그러한 것은 기도가 아니면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나가게 할 수 없다.”(마르 9,29)라고 하심으로써, ‘믿음’이 구체적으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기도가 필수적임을 강조하십니다.
영화 ‘사인즈(Signs)’ 속 그레이엄은 성공회 사제입니다. 아내는 교통사고로 죽었고 귀여운 아들과 딸이 있습니다. 그레이엄은 하느님이 계신다면 어째서 자기 아내를 데려갔느냐며 사제복을 벗었습니다.
그런데 마을과 세계에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외계인이 침공한 것입니다. 결국 그의 아들이 외계인의 공격으로 목숨을 잃을 뻔한 순간, 그는 전혀 기도할 줄도 모른다는 걸 재인식하게 됩니다. 그래도 간절한 마음으로 아들만을 살려달라고 기도했고, 아들은 살았습니다. 아들이 어떻게 된 것이냐고 물었을 때 그레이엄은 대답합니다.
“누군가 널 도와주셨어.” 이 이야기는, 겉으로는 “사제였으니 나는 당연히 한때 신앙심이 있었다.”라고 여기지만, 실제로는 기도를 완전히 포기한 채 살아온 사람이 위기 앞에서 아무 힘도 발휘하지 못한다는 점을 보여 줍니다. 결국 그레이엄은 아내의 죽음과 아들의 위기를 통해 비로소 다시 기도를 선택하게 되었고, 이것이 그의 믿음을 새롭게 작동시킨 결정적인 계기가 됩니다.
마귀가 노리는 것은 ‘믿음 없음’이 아니라, ‘믿음이 이미 충분하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아이 아버지는 예수님께 “믿습니다. 믿음이 없는 저를 도와주십시오.”라고 계속 청합니다. 사실 이 고백 자체가 이미 믿음의 시작임을 보여 줍니다. 진정한 믿음이라면, 주님께 자기 부족함을 드러내고 도움을 요청하게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성인의 삶에서 볼 수 있는 ‘기도로 다시 불붙은’ 사례로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를 들 수 있습니다. 데레사는 젊은 시절 수도원에 들어간 뒤에도, 한동안은 기도에 전념하지 못하고 세속적 대화나 활동에 더 마음을 두었습니다. 스스로 “수도자이니 이미 충분히 경건하다.”라고 여기는 착각도 있었지요. 그러나 심한 병을 앓아 죽음 문턱까지 갔다가 가까스로 회복된 뒤, 자신이 “참으로 진지한 기도를 거의 하지 않았다.”라는 사실을 깊이 깨달았습니다.
이후 그녀는 철저히 기도 생활을 쇄신합니다. 매일 묵상과 침묵 속에서 “주님, 저는 부족합니다. 저에게 힘을 주소서.”라고 청하며, 순수한 열정으로 가득 찬 기도를 다시 회복해 갔습니다. 이 과정을 통해 그녀는 깊은 관상과 신비체험을 하게 되고, 가르멜 수도회를 개혁하는 등 교회에 큰 족적을 남겼습니다. 바로 그 과정이 영적으로 메말랐던 자신을 회개시킨 ‘기도의 힘’이었습니다.
데레사는 여러 저술을 통해 기도의 중요성을 직접 역설하는데, 특히 《완덕의 길(The Way of Perfection)》에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기도란 결코 다름 아닌, 친구 사이의 친밀한 대화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 주님을 찾기 위해 날개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 안에 현존하심을 바라보기만 하면 됩니다.”
이처럼 성녀는 우리가 스스로 영적으로 뛰어나다고 착각하지 않고, 날마다 ‘내가 부족하다’라는 걸 인정하며 기도로 나아갈 때 비로소 하느님 은총이 크게 드러난다고 거듭 강조합니다.
이에 따라 “믿음이 없음을 아는 것이 믿음이다.”라는 주제는 단순한 수사가 아닙니다. 오히려 스스로를 완전하다고 여기지 않고, “주님, 저는 부족합니다. 저를 도와주십시오.” 하고 청하는 순간, 비로소 믿음이 기도를 작동시키기 시작합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 이미 받은 줄로 믿어라. 그러면 너희가 그대로 받게 될 것이다.”(마르 11,24)라는 가르침과도 맥을 같이합니다. 즉, 우리의 믿음이 움직일 때 기도가 진정한 힘을 발휘한다는 것이지요.
마귀가 노리는 것은 우리가 ‘믿음이 없다’고 좌절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믿음이 충분하다고 착각’하여 기도를 소홀히 하도록 만드는 함정입니다. 마음 한구석의 불신, 혹은 잘못된 자기만족을 부추김으로써 영적 방심을 유도합니다. C.S. 루이스의 ‘스크루테이프의 편지(The Screwtape Letters)’에서 노련한 악마 스크루테이프가 조카 악마 웜우드에게 전하는 직접적인 충고를 인용하며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인간이 ‘원수(하느님)’ 그 자체께 시선을 두면 우리는 패배를 면치 못한다. 그러나 그들의 시선을 하느님에게서 돌려 자기 자신만 바라보게 만들면, 쉽게 기도에서 멀어지도록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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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좋은 글은 마음을 따뜻하게 합니다. 오늘은 제가 읽은 글을 나누고 싶습니다. 정채봉 선생님은 인생에 있어서 사람들 만남의 종류를 5가지로 들고 있습니다. 생선과 같은 만남, 꽃송이와 같은 만남, 건전지와 같은 만남, 지우개와 같은 만남, 손수건과 같은 만남이 있답니다. 가장 잘못된 만남은 생선과 같은 만남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만날수록 비린내가 묻어오니까 말입니다. 가장 조심해야 할, 만남은 꽃송이 같은 만남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피어있을 때는 환호하다가 시들면 버리니까 말입니다. 가장 비참한 만남은 건전지와 같은 만남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힘이 있을 때는 간수하고 힘이 다 닳았을 때는 던져버리니까 말입니다. 가장 시간이 아까운 만남은 지우개 같은 만남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금방의 만남이 순식간에 지워져 버리니까 말입니다. 선생님이 말하는 가장 아름다운 만남은 손수건과 같은 만남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힘이 들 때는 땀을 닦아 주고 슬플 때는 눈물을 닦아주니까 말입니다. 선생님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지금 어떤 만남을 가지고 있습니까?
강석준 신부님은 사랑의 종류를 3가지로 들고 있습니다. 진흙과 같은 사랑, 물과 같은 사랑, 공기와 같은 사랑이라고 합니다. 사랑은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포용하는 겁니다. 진흙 같은 사랑은 상대방을 포용하지만 이내 굳어 버려서 나의 ‘틀’에 맞추려고 한다고 합니다. 서로가 좋아서 사랑했지만, 이런 사랑을 추구하면 답답해지고, 한쪽이 숨이 막히기 마련이라고 합니다. 예전에 가부장적인 배우자는 이런 사랑이 진정한 사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랑은 나의 뜻대로 상대방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물과 같은 사랑은 상대방을 포용하면서 이내 굳지는 않지만, 시간이 지나면 상대방의 몸에 변화를 일으킵니다. 물속에 오래 있으면 손과 발이 부풀어 오르듯이, 결국은 상대방을 변화시키려는 사랑입니다. 공기와 같은 사랑은 상대방을 포용하면서도 상대방을 변화시키지 않는다고 합니다. 오히려 상대방에게 활력을 준다고 합니다. 이것이 영적인 사랑이라고 합니다. 지금 나의 가슴을 뜨겁게 하는 사랑이 어떤 사랑인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오늘 제1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주님의 사랑은 영광스러운 지혜이며 그분께서는 당신을 보여 주실 이들에게 지혜를 베푸시어 당신을 알아보게 하신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시는 지혜는 무엇일까요? 미래를 예측하는 예언의 능력일까요? 과거의 일에서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추론의 능력일까요? 아직 풀지 못했던 수학의 문제를 풀어내는 지능의 능력일까요? 솔로몬처럼 옳고 그른 일을 합리적으로 판단하는 지혜의 능력일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생각과는 다른 지혜를 말씀하십니다. 믿음과 기도가 참된 지혜라고 말씀하십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보증이며 보이지 않는 실체들의 확증입니다. 사실 옛사람들은 믿음으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믿음으로써,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관하여 지시를 받고 경건한 마음으로 방주를 마련하여 자기 집안을 구하였습니다. 그는 믿음으로 세상을 단죄하고, 믿음에 따라 받는 의로움을 상속받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늘 믿음을 강조하셨습니다. 믿음은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지혜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아무도 다른 이에게 악을 악으로 갚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서로에게 좋고 또 모든 사람에게 좋은 것을 늘 추구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직접 기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거룩함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는 기도입니다. 유혹에 빠지지 않고, 악에서 구해지기를 청하는 기도입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우리가 아는 것을 삶으로 실천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몸도 마음도 온전하게 하느님과 함께 할 수 있습니다. 주님과 온전히 함께 할 때, 우리는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예전에 읽은 글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때 하느님의 능력을 믿으십시오. 당신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지 않으면 하느님께서 당신의 능력을 믿으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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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삼의딸들수녀회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님]
황홀하고 경이로운 체험을 하고 타볼산에서 막 내려온 예수님과 세 제자가 마주한 현실은 일상의 고통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인간 삶의 전형적인 그늘입니다. 믿음이 없는 세대를 향한 예수님의 탄식은 그분의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토록 믿음을 가르쳐도 딱히 달라지지 않는 사람들이 답답하실 법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벙어리, 귀머거리 영을 쫓아내심으로써 더러운 영에 붙들려 자신을 잃어버렸던 아이를 본연의 자기로 돌아오게 하십니다. 사실 예수님 앞에서 발악하는 것은 아이가 아니고 그 아이의 몸속에 있는 더러운 영입니다.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된 인간은 살아가면서 죄와 악으로 그 모습이 더럽혀질 위협을 당합니다. 믿음과 기도, 이 두 가지가 더러운 영의 공격 앞에서 우리 안의 하느님 모습을 지켜 낼 수 있게 하는 길입니다.
그런데 아이의 아버지에게는 믿음이, 제자들에게는 기도가 부족하였습니다. 사실 이 두 가지는 서로 연관되어 있습니다. 믿음이 없으면 기도할 수 없고 기도하지 않으면 믿음이 자라지 않습니다. 결국 아이의 아버지와 제자들에게는 두 가지가 다 부족하였던 것입니다. 그 아버지는 겸손한 기도로 믿음을 얻고 해방된 아이를 되찾습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우리는 믿기 위하여 기도하고 기도하기 위하여 믿는다고 말하면서, 기도하기 위하여 믿고 기도하게 하는 믿음이 약해지지 않도록 기도하자고 초대합니다. “믿음은 기도를 샘솟게 하고 샘솟는 기도는 믿음을 튼튼하게 해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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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9,14-29: 왜 저희는 악령을 쫓아내지 못하였습니까?
“어째서 저희는 그 영을 쫓아내지 못하였습니까?”(28절)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그러한 것은 기도가 아니면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나가게 할 수 없다.”(29절) 마귀 들린 아이의 아버지는 제자들이 마귀를 쫓아내지 못하자 예수님을 만났을 때, “이제 하실 수 있으면 저희를 가엾이 여겨 도와주십시오.”(22절)라고 청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실 수 있으면’이 무슨 말이냐? 믿는 이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23절) 하시며 믿음을 불러일으켜 주셨다. 그 아버지는 “주님, 저는 믿습니다. 믿음이 없는 저를 도와주십시오.”(24절) 예수님은 아들을 고쳐주셨다. 우리는 많은 경우에 인간에게 실망할 수 있지만, 항상 하느님께, 예수님께 희망을 품고 살아야 한다. 오늘 복음의 아버지가 제자들에게 희망을 걸었다가 실망했듯이 오늘날의 우리 신자들도 교회에서 일하는 성직자나 수도자들에게 기대를 걸었다가 그들의 약점을 보고 믿음에까지 실망을 하는 것을 자주 볼 수 있다. 이럴 때도 그 아이의 아버지처럼 교회의 성직자들이나 수도자들을 넘어 그리스도 자신을 찾아 그리스도께로 가지 않으면 안 된다. 예수님 안에 언제나 희망을 품고 그분께 매달릴 때, 그분은 우리를 실망하게 하지 않으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믿기 위해 기도하고 기도하기 위해 믿는다.”라고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말한다. 그리고 “기도 없이는 어떤 신앙도 보존되지 않는다.”라고 히에로니모 성인은 말하였다. 믿음은 기도를 샘솟게 하고, 샘솟는 기도는 믿음을 튼튼하게 해준다. 우리도 때로는 신앙의 길을 가면서 의심이 들 때도 있고 주님 앞에 나아가기를 게을리하는 때도 오늘 복음의 그 아버지처럼, “주님, 나에게 믿음을 주십시오!” 하고 기도하며 나아가야 한다. 주님께 대한 희망과 믿음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우리는 어떤 어려움에서도 이겨나갈 수 있을 것이다. 하느님 안에 사는 것이 바로 하느님의 자녀의 삶이며 구원받은 삶이라고 할 수 있다. 하느님의 자녀는 이 세상에 살면서도 이미 하늘나라의 삶을 이 세상에서 미리 끌어당겨 사는 사람들이다. 세상에서 누리는 구원의 삶은 자연스럽게 영원한 구원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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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신앙인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일하는 사람입니다.>
“그들이 다른 제자들에게 가서 보니, 그 제자들이 군중에게 둘러싸여 율법학자들과 논쟁하고 있었다. 마침 군중이 모두 예수님을 보고는 몹시 놀라며 달려와 인사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저들과 무슨 논쟁을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군중 가운데 한 사람이 대답하였다. ‘스승님, 벙어리 영이 들린 제 아들을 스승님께 데리고 왔습니다. 어디에서건 그 영이 아이를 사로잡기만 하면 거꾸러뜨립니다. 그러면 아이는 거품을 흘리고 이를 갈며 몸이 뻣뻣해집니다. 그래서 스승님의 제자들에게 저 영을 쫓아내 달라고 하였지만, 그들은 쫓아내지 못하였습니다.’"(마르 9,14-18)
“그 뒤에 예수님께서 집에 들어가셨을 때에 제자들이 그분께 따로, ‘어째서 저희는 그 영을 쫓아내지 못하였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그러한 것은 기도가 아니면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나가게 할 수 없다.’"(마르 9,28-29)
1) 예수님께서는 열두 사도를 파견하실 때, 그들에게 ‘마귀들에 대한 권한’을 주셨고, 그들은 자기들이 받은 권한으로 마귀들을 쫓아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러 마을을 두루 돌아다니며 가르치셨다. 그리고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기 시작하셨다.
그리하여 제자들은 떠나가서, 회개하라고 선포하였다. 그리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부어 병을 고쳐 주었다."(마르 6,7.12-13)
예수님께서 당신의 권한을 사도들에게 주신 것은, 아주 넘겨주신 것이 아니라, ‘위임’해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사도들이 마귀들을 쫓아낸 일은, 자신들의 힘으로 한 일이 아니라, ‘예수님의 힘’으로 한 일입니다.
2) 그런데 사도들은 ‘예수님의 힘’으로 마귀들을 쫓아냈다는 것을 잊어버렸는지, 아니면 자신들의 힘으로 쫓아냈다고 착각했는지, 어떻든 마귀들을 쫓아냈다는 사실만 기억하면서 ‘교만’에 빠졌습니다.
“그러한 것은 기도가 아니면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나가게 할 수 없다.”라는 예수님 말씀은, 사도들이 ‘기도하지 않고’ 자신들의 힘만으로 마귀를 쫓아내려고 시도했다가 실패했음을 나타냅니다. 기도하지 않았다는 것은 주님께 도움을 청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마귀들은, 하느님과 예수님께만 복종하는 존재입니다. 처음에 사도들이 마귀들을 쫓아낼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또 ‘예수님께서 주신 권한’으로 명령했기 때문입니다.
마귀들은 사도들의 명령에 복종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명령에 복종했습니다. 그것을 잊어버리거나 착각하면, 누구라도 어리석은 교만에 빠지게 되고, 주님께서 주신 힘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3)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려면 우선 먼저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믿지 않으면, 예수님의 이름을 사용해도 아무런 힘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모독하는 죄를 짓게 됩니다. 믿음도 없이 예수님의 이름을 사용하다가 마귀들에게 호되게 당한 자들의 이야기가 사도행전에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바오로를 통하여 비범한 기적들을 일으키셨다. 그의 살갗에 닿았던 수건이나 앞치마를 병자들에게 대기만 해도, 그들에게서 질병이 사라지고 악령들이 물러갔다. 그러자 구마자로 돌아다니는 몇몇 유다인까지도 ‘바오로가 선포하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너희에게 명령한다.’ 하면서, 악령 들린 사람들에게 주 예수님의 이름을 이용해 보려고 시도하였다.
그런데 스케우아스라는 유다인 대사제의 일곱 아들이 그렇게 하자, 악령이 그들에게 ‘나는 예수도 알고 바오로도 아는데 너희는 누구냐?’ 하였다. 그때에 악령 들린 사람이 그들에게 달려들어 그들을 모조리 억누르고 짓누르는 바람에, 그들은 옷이 벗겨지고 상처를 입어 그 집에서 달아났다."(사도 19,11-16)
4) 마르코복음의 “그러한 것은 기도가 아니면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나가게 할 수 없다.”라는 말씀이, 마태오복음에는 “너희의 믿음이 약한 탓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산더러 ‘여기서 저기로 옮겨 가라.’ 하더라도 그대로 옮겨 갈 것이다. 너희가 못할 일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마태 17,20)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말씀을 합해서 생각하면, 제자들이 마귀를 쫓아낼 때 기도하지 않고 자신들의 힘으로 쫓아내려고 시도한 것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버린 것과 같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 약했거나 부족했던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가지고 있던 믿음을 그냥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에 관한 말씀은 “믿기만 하면, 누구나 기적을 일으킬 수 있다.”는 뜻이 아니라, “불가능한 일이 없으신 주님을 믿어라.” 라는 가르침입니다. 기적은 주님께서 일으키시고, 우리가(신앙인들이) 할 일은 주님을 믿는 일입니다. 주님을 믿는다고 주장하면서 ‘믿음으로’ 기적을 일으키겠다고 덤벼드는 모습은 교만이고, 반대로, 기적을 일으키지 못했다고 낙담하는 모습은 어리석음입니다.
사도들의 이야기나 성인 성녀들의 전기에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적을 일으킨 이야기가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일들은 주님께서 특별히 예외적으로 허락하신 일들이고, 사실은 주님께서 하신 일들입니다. <아무나 자기 마음대로 해도 되는 일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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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내가 되어 주게나>
마르코 9,14-29 (어떤 아이에게서 더러운 영을 내쫓으시다)
그때에 예수님과 제자들이 산에서 내려와 다른 제자들에게 가서 보니, 그 제자들이 군중에게 둘러싸여 율법 학자들과 논쟁하고 있었다. 마침 군중이 모두 예수님을 보고는 몹시 놀라며 달려와 인사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저들과 무슨 논쟁을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군중 가운데 한 사람이 대답하였다. “스승님, 벙어리 영이 들린 제 아들을 스승님께 데리고 왔습니다. 어디에서건 그 영이 아이를 사로잡기만 하면 거꾸러뜨립니다. 그러면 아이는 거품을 흘리고 이를 갈며 몸이 뻣뻣하여집니다. 그래서 스승님의 제자들에게 저 영을 쫓아내 달라고 하였지만, 그들은 쫓아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아, 믿음이 없는 세대야! 내가 언제까지 너희 곁에 있어야 하느냐? 내가 언제까지 너희를 참아 주어야 한다는 말이냐? 아이를 내게 데려오너라.” 하고 그들에게 이르셨다. 그래서 사람들이 아이를 예수님께 데려왔다. 그 영은 예수님을 보자 곧바로 아이를 뒤흔들어 댔다. 아이는 땅에 쓰러져 거품을 흘리며 뒹굴었다.
예수님께서 그 아버지에게, “아이가 이렇게 된 지 얼마나 되었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가 대답하였다. “어릴 적부터입니다. 저 영이 자주 아이를 죽이려고 불 속으로도, 물속으로도 내던졌습니다. 이제 하실 수 있으면 저희를 가엾이 여겨 도와주십니다.” 예수님께서 “‘하실 수 있으면’이 무슨 말이냐? 믿는 이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하고 말씀하시자, 아이 아버지가 곧바로, “저는 믿습니다. 믿음이 없는 저를 도와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이 떼를 지어 달려드는 것을 보시고 더러운 영을 꾸짖으며 말씀하셨다. “벙어리, 귀머거리 영아, 내가 너에게 명령한다. 그 아이에게서 나가라. 그리고 다시는 그에게 들어가지 마라.” 그러자 그 영이 소리를 지르며 아이를 마구 뒤흔들어 놓고 나가니, 아이는 죽은 것처럼 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모두 “아이가 죽었구나.” 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아이의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아이가 일어났다.
그 뒤에 예수님께서 집에 들어가셨을 때에 제자들이 그분께 따로, “어째서 저희는 그 영을 쫓아내지 못하였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그러한 것은 기도가 아니면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나가게 할 수 없다.”
<내가 되어 주게나>
“아, 믿음이 없는 세대야! 내가 언제까지 너희 곁에 있어야 하느냐? 내가 언제까지 너희를 참아 주어야 한다는 말이냐? 아이를 내게 데려오너라.”(마르 9,19)
사랑하는 나의 사람아
내가 되어 주게나
나 그대 사랑하기에
내가 먼저 그대가 되었으니
그대 나 사랑한다면
그대 이제 내가 될 수 있는 것
사랑하는 나의 사람아
내가 되어 주게나
그대가 내가 되면
언제나 어디서나
그대는 나와 함께 있는 것이니
나를 품고픈 깨끗한 사랑으로
나에게 바친 아낌없는 믿음으로
나와 함께하고픈 간절한 바람으로
사랑하는 나의 사람아
내가 되어 주게나
언젠가 나는 떠나야하고
나를 애타게 그리워하는
벗들은 어디에나 있으리니
나의 빈자리가
너무 아프게 느껴질
벗들의 곁에서
사랑하는 나의 사람아
내가 되어 주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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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열매를 맺는 기도>
어느 날, “신부님은 기도를 많이 하십니까?” 하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얼른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실은 기도를 소홀히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남에게는 기도하라고 하면서도 정작 본인은 기도를 소홀히 하였으니 속을 보인 것 같아 부끄러웠습니다. 실은 누가 기도를 부탁하면 “예, 기도해 드리죠.” 대답하고는 잊어버린 때도 있었습니다. 오늘은 죄송한 마음으로 그 잊었던 이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기도를 합니다. 그러나 기왕 기도할 바에야 효과 있는 기도, 응답받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그저 입으로 하는 기도가 아니라 ‘되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기도하며 청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이미 받은 줄로 믿어라. 그러면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마르11,24).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응답받지 못하였다는 것은 믿음으로 기도하지 않았다는 말이 됩니다. 하느님의 능력을 확신하지 못하고 그저 반신반의하는 태도로는 기도의 결실을 얻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그분에 대하여 가지는 확신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이든지 그분의 뜻에 따라 청하면 그분께서 우리의 청을 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분께서 들어주신다는 것을 알면, 우리가 그분께 청한 것을 받는다는 것도 압니다”(1요한5,15). 그러므로 “기도할 때 온 마음을 기울여 기도에 집중하고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기도의 대상인 하느님 외에는 아무것에도 기웃거리거나 마음을 빼앗겨서는 안 됩니다”(성 치쁘리아노). 따라서 기도 하려거든 믿음으로 해야 합니다. 믿고 바라고, 믿고 감사하고, 믿고 기뻐하고, 믿고 사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더러운 영을 쫓아내시고 집에 들어가셨을 때 제자들이 그분께 “어째서 저희는 그 영을 쫓아내지 못하였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것은 기도가 아니면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나가게 할 수 없다”(마르9,28-29) 대답하셨습니다. 더러운 영을 쫓아내는 가장 효과적인 힘은 바로 기도에서 나오는데 기도란 무엇보다도 모든 것을 가능케 하시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합니다. 더러운 영을 쫓아내는 능력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느님의 뜻을 찾는 것이기도 하지만 하느님께 의탁하는 것이고 내어 맡기는 것입니다. 우리들 마음 안에 파고드는 더러운 영의 세력, 즉 누군가를 향한 시기, 질투, 분노, 미움, 증오, 적개심, 탐욕, 교만 등이 느껴질 때 더욱 기도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믿음은 복음에 바탕을 둔 믿음이 아니라 기복적인 믿음, 또는 신심 위주, 활동 중심의 믿음에 끌려다니는 경우가 많습니다. 성경 말씀을 믿고 받아들이고 실천하는 믿음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하여 하느님과의 관계를 맺고 그 관계 안에서 하느님의 힘과 능력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기도를 소홀히 하기 시작하면 하느님을 멀리하게 되고, 그분의 도움을 필요하지 않게 되며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게 되고 내 멋대로 살아가게 됩니다. 결국, 하느님의 힘을 받을 수 없게 됩니다. 기도는 하느님의 능력이 우리에게 이르는 통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기도해야 합니다. “비록 잘못에 떨어졌다 할지라도 기도하기를 그쳐서는 절대 안 됩니다. 그 잘못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는 유일한 힘은 꾸준히 계속되는 기도를 통해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예수의 성녀 데레사).
하루를 기도로 시작하고 기도로 끝맺음하는 가운데 기쁨을 차지하시길 바랍니다. 기도할 때 비로소 하느님의 능력이 우리를 통해 다른 이들에게 전해질 수 있습니다. 무엇인가 성공했다 하더라도 기도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무던히 참아주시는 하느님을 생각하며 다시 그분에게로 돌아서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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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정용진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아이를 괴롭히던 악령을 쫓아낼 수 없었습니다. 악령의 힘이 그들의 능력보다 컸기 때문입니다. 악령 때문에 땅에 쓰러져 거품을 흘리며 뒹구는 아이의 모습은 마치 우리가 사는 세상의 모습과도, 우리 자신의 모습과도 같아 보입니다. 어떻게 하면 세상이, 어떻게 하면 우리가 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오늘 복음 말씀에 귀 기울여 봅시다. 예수님께서는 마귀에 대적하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그에 맞설 두 가지 좋은 수단을 가르쳐 주십니다. 믿음과 기도입니다. 사실 마르코 복음사가는 오늘 복음 이전에는 단 한 번도 제자들이 기도하였다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이것이 제자들이 아이에게서 악령을 쫓아낼 수 없었던 충분한 답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
믿음이 없음을 고백하며 예수님께 아이를 낫게 해 달라고 청하는 오늘 복음의 아이 아버지는 제자들을 위한, 곧 우리를 위한 믿음과 기도의 본보기로 제시됩니다. 아이 아버지가 바친 기도가 우리의 기도가 되어야 하고, 우리도 주님께 “저는 믿습니다. 믿음이 없는 저를 도와주십시오.”라고 끊임없이 청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복음 안으로 좀 더 들어가 예수님께서 행하신 치유 과정을 보면 우리의 기도가 무엇을 지향해야 하는지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예수님께서 악령에게 말씀하시자 악령이 떠나가며 아이가 “죽은 것처럼” 되었고, 그것을 지켜본 사람들 모두 “아이가 죽었구나.” 하고 말하였음을 전합니다. 아이의 치유가 일종의 ‘죽음’의 과정을 거쳐 이루어졌다는 뜻으로 보입니다.
아주 오래전부터 우리를 가두어 온 악령의 힘에서 벗어나려면 우리에게도 이와 같은 죽음의 과정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주님께서 우리의 ‘경련’을 낫게 하실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을 비우고 내려놓고 단념하는 ‘죽음의 과정’을 거쳐야 하지 않을까요? 올곧은 믿음과 열렬한 기도 없이는 결코 이루지 못할 이 은총을 주님께 간절히 청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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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이정호 요아킴 신부님]
<사랑하는 마음>
수도원에서도 싸움이 생깁니다. 예를 들어, 식사 중에 한 수사님이 깍두기 두 개를 집어먹습니다. 그러자 앞에 앉은 다른 수사님이 왜 절제하지 못하고 깍두기를 두 개씩이나 먹었느냐고 그 수사님에게 면박을 줍니다. 물론 이런 이유를 내세우며 싸우는 일은 없겠지만 근본적인 마음가짐은 깍두기 한 개 때문에 싸우는 것과 별반 다름이 없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에서 서로를 받아들이고 인정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데 따르는 상처를 받기 싫어서 고통을 받기 싫어서 서로를 외면하고 내 마음의 문을 닫아버립니다. 어둡고 침침한 분노와 원망 속에 나를 가둡니다. 사랑하지 않는 데서 죄가 시작됩니다.
죄는 나를 망가뜨리고 메말라가게 합니다. 죄는 스스로를 죽게 하고 이웃한 이들에게도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게 합니다. 죄에서 벗어나는 길은 단지 죄짓지 않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마음을 채우는 것입니다.
기도로 하느님을 모시고 사랑으로 그분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살아 있기 위해서라도 악의 잡초가 내 마음의 화단을 덮치지 않도록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며 기도와 성사로 가꾸어가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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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어째서 저희는 그 영을 쫓아내지 못하였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그러한 것은 기도가 아니면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나가게 할 수 없다.”(마르 9,28-29) 내 안에 있는 악습이나 죄악을 몰아내기는 참으로 어렵습니다. 다른 사람 안에 있는 것은 더더욱 어렵겠지요? 어떻게 하면 나와 다른 사람 안에 있는 악의 기운을 몰아낼 수 있을까요?
오늘 제자들이 악령에 사로잡힌 아이를 고쳐보겠다고 용을 써보지만 성공하지 못하고 더 덧나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나서셔야 해결되네요. 제자들은 예수님께 왜 우리는 악령을 쫒아내지 못하였는지 묻습니다. 예수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시네요. "기도했니?" 네. 그렇습니다.
악령과 그 영이 만드는 온갖 악습과 죄악들은 성령을 통해서만 몰아낼 수 있습니다. 그러니 내 힘과 능력으로가 아니라 기도하면서 성령의 힘과 은총으로 치유하여야 한다는 겁니다.
내 힘과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악령의 힘을 이기기란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러니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는 기도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답니다.
오늘 내 힘에 겨운 어떤 일을 해결하거나 악의 기운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를 해야 한다면 먼저 마음을 비우고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는 기도부터 바쳐보세요. 때가 되면 내 안에 계신 성령께서 든든히 악의 세력을 잠재워 주실 겁니다.
오늘도 성령으로 무장하여 승리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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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신학교 다닐 때, 테니스를 치다가 허리를 삐끗했었습니다. 사실 많은 분이 테니스 치는 저를 향해 “자세를 똑바로 해야 한다”라는 조언을 해 주셨습니다. 왜냐하면 어렸을 때부터 오랫동안 탁구를 하다 보니 몸에 탁구 자세가 그대로 배어 있던 것입니다. 이 탁구 자세로 테니스를 치니 결국 허리에 큰 부담이 되었고 몇 차례 병원 신세를 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세는 중요합니다. 그래서 모든 운동이 처음 배울 때 자세의 중요성을 이야기합니다. 자세를 갖추는 데 많은 시간을 소비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자세가 잘못되었거나 그리고 이 잘못된 자세를 전혀 고치려 들지 않는다면 좋은 성적을 얻을 수 없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자세 자체에 문제가 있어서 발전 속도가 느린 것인데, 만약 상대방 때문에, 환경 때문에 등의 실패 원인을 말한다면 어떨까요? 아마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자세부터 고쳐!”
신앙인의 자세도 있습니다. 바로 주님께 대한 믿음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자세는 전혀 생각하지 않으면서, 세상의 관점으로만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자기 자세가 잘못되었는데도 그 점을 고치려고 하지 않으면서 주님께만 문제 있는 것처럼 말합니다. 왜 제게 이런 시련을 주시느냐고, 왜 불공평하냐고….
이 믿음의 자세를 갖추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믿음은 단순히 ‘믿겠다’라고 말만 해서 갖출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계속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 안에서 참 기쁨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벙어리 영을 쫓아내 달라고 했지만, 쫓아내지 못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아, 믿음이 없는 세대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믿는 이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하시고, 기도가 아니면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하느님의 일을 할 수 없다고 가르치십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인의 바른 자세는 ‘믿음’이고, 이 믿음은 기도를 통해서만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바른 자세를 가지고 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기도가 아니면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불가능하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많은 이가 세상의 기준만을 내세우면서 다른 방법이 있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습니다.
신앙인으로서의 바른 자세를 다시금 생각하는 오늘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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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삶은 늘 우리 마음대로 혹은 우리가 계획한 대로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어쩌면 계획대로 되는 삶은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 제자들은 주님에 앞서 벙어리 영이 들린 사람을 치유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 모습이 주님 나라에 찬미와 영광도 되겠지만 자신의 업적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했던 처음에는 제자들 역시 어리둥절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이름으로 행하는 모든 일들이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앞 못 보는 사람들이 앞을 보았고 벙어리가 말을 했으며 마귀도 쫓아낼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기적을 행하던 제자들의 마음에 작은 유혹들이 시작되었을 것입니다. ‘내게 기적을 행할 능력이 있는 거야.’ ‘나는 참 훌륭한 사람이야.’ 등의 마음들 말입니다. 이런 마음들은 점점 커지고 커져서 기적의 은총을 사라지게 만듭니다. 제자들이 오늘 벙어리 영을 쫓아내지 못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자기 모습을 본 제자들은 곧바로 주님 앞에 고백합니다. “주님, 저는 믿습니다. 믿음이 없는 저를 도와주십시오.”라고….
우리에게도 이런 모습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걷고 있는 이 신앙의 길에서도 우리는 유혹을 만나기 때문입니다. 그 유혹은 우리에게 주어진 주님의 은총을 점점 말라버리게 합니다.
우리에게도 고백이 필요합니다.
주님, 저는 주님을 믿습니다. 제 믿음을 도와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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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진 유리창. 깨진 마음.
깨진 유리창 이론(Broken Windows Theory)이라는게 있습니다. 어떤 공간의 깨진 유리창을 방치해 두면 그곳을 중심으로 범죄가 확산하기 시작한다는 의미로 사소한 무질서를 방치하면 나중엔 지역 전체로 확산할 가능성이 높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빗대어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이 깨져 있고 그걸 방치한다면… 아마도 신앙심보단 분심들이 확산해 점점 주님을 멀리하게 될 것입니다.
살면서 흔들릴 때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깨진 마음을 방치하는 게 아닌 촘촘하게 이어 붙이려 부단히 노력하고 다시 주님의 품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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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전교수도회 김종오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예수님께서 집에 들어가셨을 때에 제자들이 그분께 따로, ‘어째서 저희는 그 영을 쫓아내지 못하였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그러한 것은 기도가 아니면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나가게 할 수 없다.’”(마르코.9,28-29)
그리스도인이 하는 모든 일은 기도로 시작해야 합니다. ‘기도는 모든 일의 시작입니다.’ 주님의 일은 우리가 드리는 기도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기도가 없이 이루어지는 주님의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모든 일의 시작과 끝은 기도입니다. 기도를 하는 만큼 우리는 주님과 일치하며 주님 안에서 주님과 함께 주님의 일을 하게 됩니다. 주님과 일치하여 우리가 주님의 일을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기도뿐입니다.
주님의 일은 우리가 바치는 기도 안에서 이루어지고, 더 나아가 우리의 기도와 더불어 이루어집니다. 기도를 통하여 우리는 자신의 일이 아닌 주님의 일을 하게 되고 성령께서는 기도를 통하여 우리가 주님의 일을 하도록 도와주십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때로 지혜롭게 보이지만, ‘마음속에 모진 시기와 이기심을 품고, 자만하거나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을 하게 되는데’ ‘그러한 지혜는 위에서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세속적이고 현세적이며 악마적인 것입니다.’
기도하며 주님의 일을 하는 사람은 ‘위에서 오는 지혜를 받아 순수하고, 그 다음으로 평화롭고 관대하고 유순하며, 자비와 좋은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위선이 없습니다.’ 그리고 ‘지혜에서 오는 온유한 마음을 가지고 착하게 살아, 자기의 실천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주님의 영으로 충만하여 주님의 일을 이루는 도구가 되도록 부르심을 받은 주님의 제자들입니다. 사람들에게 주님 구원의 영을 전파하려고 할때, ‘기도가 아니면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나아 갈 수 없습니다.”
"모든 지혜는 주님에게서 오고 영원히 주님과 함께 있다."(지혜서.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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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믿음의 힘, 권위 있는 말씀의 힘기도의 힘>
https://youtube.com/shorts/nCx1-XjT5oA?si=61KTWXrYQdYZBC-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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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벙어리 영이 든 아이를 치유하시는 장면입니다. 사실, 이 장면은 제자들이 망신당하는 장면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제자들이 스승을 망신시키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벙어리 영을 쫓아내지 못함으로써 스승을 욕보였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도 혹시 스승을 망신시키는 일이 없는지 살펴보아야 할 일입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안타까워하시며 말씀하십니다.
“아, 믿음이 없는 세대야! ~내가 언제까지 너희를 참아주어야 한단 말이냐?”(마르 9,19)
이는 우리가 ‘참 믿음’으로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시고 참아주시고 계신다는 사실을 말씀해주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그나마 이렇게 하느님의 자녀로 머물 수 있음은 그분께서 참아주고 기다려주시고 있기 때문이라는 말씀입니다. 당신께서는 오늘도 여전히 우리에게 희망을 걸고 계시고, 우리를 믿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당신의 그 믿음과 그 희망에 의탁하여, 벙어리 영이 들린 아이의 아버지처럼, 간청해야 할 일입니다.
“하실 수 있으면 저희를 가엾이 여겨 도와주십시오.”(마르 9,22)
여기서, “하실 수 있으면”이라는 표현은 아이의 아버지가 자신의 믿음이 아니라 ‘예수님의 믿음’에, 자신의 뜻이 아니라 ‘예수님의 뜻’에 의탁해서 도움을 청하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이의 아버지에게 믿음을 북돋우십니다. 곧 ‘믿음’을 주십니다. “믿는 이에게는 모든 일이 가능하다.”(마르 9,23). 그러자 아이의 아버지는 이렇게 간청합니다. “저는 믿습니다. 믿음이 없는 저를 도와주십시오.”(마르 9,24).
그는 ‘믿음’과 동시에 ‘믿음 없음’을 고백하면서, 겸손으로 도움을 청합니다. 우리가 믿고는 있지만, ‘진정한 믿음’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겸손하게 믿음을 청해야 할 일입니다. 사실, 믿지 않는 것을 청할 수는 없는 일이기에, ‘기도할 때 우리는 이미 믿는 것’입니다. 동시에 ‘기도를 통하여 믿음이 옵니다.’ ‘믿음’(응답)은 ‘들음’(계시)에서 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고 하시지,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자신의 신념을 믿고 따르라고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더러운 영을 꾸짖으며 말씀하십니다.
“벙어리, 귀머거리 영아, 내가 너에게 명령한다. 그 아이에게서 나가라. 그리고 다시는 그에게 들어가지 마라.”(마르 9,25)
예수님께서는 그 어떤 누구의 힘을 빌린 것이 아니라, 당신 말씀의 권능으로 더러운 영을 쫓아내십니다. ‘말씀의 권능’을 깨우쳐주심과 동시에, 말씀의 권능을 지니신 ‘당신이 누구신지’를 드러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어째서 저희는 그 영을 쫓아내지 못하였습니까?”(마르 9,28) 하고 묻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러한 것은 기도가 아니면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나가게 할 수 없다.”(마르 9,29)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병든 아이를 고친 것은 믿음에서 나오는 ‘기도의 힘’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믿음이 없고 기도하지 않는다면, 곧 믿음으로 기도하지 않는다면, 우리 역시 다른 이들에게도 망신당하고 스승이신 예수님을 욕보이게 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우리에게 요청되는 것은 아이의 아버지처럼, 우리의 믿음이 아니라 그분의 믿음에 의탁하는 일일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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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기도가 아니면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나가게 할 수 없다.”(마르 9,29)
주님!
제 기도가 이루어지기를 바라기보다
당신 뜻에 합당하게 하소서.
제 기도가 제 뜻이 아니라
당신 뜻에 달려 있게 하소서.
당신이 제게 응답하기보다
제가 당신 뜻에 응답하게 하소서.
당신 이름으로 기도하오니
당신 안에서 자유로워지게 하소서. 아멘.*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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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기도와 믿음의 여정>
-“지혜로운 삶”-
오늘 옛 현자의 말씀이 마음에 와닿습니다.
“내공은 지어낸 말로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지나온 길로 드러나는 것이다.”<다산>
산대로 살고 산대로 죽습니다. 요행이나 비약, 도약은 없습니다. 하루하루 삶의 여정에, 기도와 믿음의 여정에 한결같이 충실할 때 저절로 내공입니다.
“넓게 배우되 함부로 누군가를 가르치려 들지 말라. 지식과 덕을 갈무리해 굳이 드러내려고 하지 말라.”<예기>
참으로 자기를 아는 겸손한 자의 지혜로운 삶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스승이신 예수님과 제자들의 내공의 차이가 확연히 드러납니다. 바로 오늘 복음전 장면을 주목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에서 어떤 아이에게서 더러운 영을 내쫓으시기 전 예수님의 산상에서의 변모신비체험이 있었습니다. 외딴곳에서 기도하시던 예수님처럼 바로 산상에서의 신비스러운 변모체험이 예수님께는 내적힘의 원천이 되었음을 봅니다.
언젠가 갑작스러운 내공이 아니라 기도와 믿음의 여정에 축적되는 내공임을 깨닫습니다. 제자들이 더러운 영을 쫓아내지 못하자 사람들은 예수님께 달려와 도움을 청합니다. 이들에 대한 예수님의 일성이 시공을 초월하여 그대로 오늘 세대에게 주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아, 믿음이 없는 세대야!”
믿음의 내공입니다. 한결같은 기도와 믿음의 여정과 함께 가는 내공입니다. 더러운 영에 들린자의 아버지와 예수님의 주고받은 대화가 좋은 묵상감입니다.
“이제 하실 수 있으면 저희를 가엾이 여겨 도와주십시오.”
흡사 자비송 기도처럼 들립니다만 이 또한 겸손한 믿음의 표현입니다.
“‘하실 수 있으면’이 무슨 말이냐? 믿는 이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믿음의 힘은 바로 하느님의 힘입니다. 참으로 믿을 때 하느님의 기적입니다.
“저는 믿습니다. 믿음이 없는 저를 도와주십시오.”
어디에나 현존하시는 똑같은 파스카의 예수님입니다. 바로 우리가 믿음의 한계를 느낄 때 마다 지체없이 겸손히 고백하며 바칠 기도입니다. 이어지는 예수님의 통쾌한 악령 축출의 응답에서 주님의 내공이 빛을 발합니다.
“벙어리, 귀머거리 영아. 내가 너에게 명령한다. 그 아이에게서 나가라. 그리고 다시는 그에게 들어가지마라.”
곧이어 죽은 것처럼 된 아이의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아이는 일어납니다. 그대로 부활을 상징하는 모습입니다. 넘어지는 것이 죄가 아니라 절망으로 일어나지 않는 게 죄입니다. 넘어지면 즉시 주님의 손을 잡고 일어나 새롭게 시작하는 탄력좋은 삶이 부활의 삶, 파스카의 삶입니다. 이어지는 제자들과 예수님의 대화에서 기도가 얼마나 절대적인지 깨닫습니다.
“어째서 저희는 그 영을 쫓아내지 못하였습니까?”
“그러한 것은 기도가 아니면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나가게 할 수 없다.”
기도가 답입니다. 기도의 힘은 믿음의 힘이자 하느님의 힘입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기도요, 사랑처럼 기도에는 늘 초보자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살기위해, 영혼이 살기위해 기도요 하느님을 사랑할수록 기도하게 됩니다. 기도의 수행 역시 필수 선택에 훈련이요 습관입니다. 숨쉬듯이, 밥먹듯이 한결같은 기도가 제일입니다. 평생 배워 익혀야 할 기도입니다. 이런 기도와 함께 가는 믿음입니다.
스승이자 주님이신 예수님은 하느님의 지혜입니다. 무지와 허무에 대한 궁극의 답은 하느님의 지혜이신 예수님뿐입니다. 내공의 핵심을 이루는 것은 지식이 아니라 지혜입니다. 말씀의 전개와 배치가 고맙습니다. 제1독서 창세기는 일단 끝나고 오늘부터 사순시기 전까지 집회서가 이어집니다. 오늘 집회서는 시작으로 ‘지혜의 신비’에 대해 환히 밝혀주고 있습니다.
“모든 지혜는 주님에게서 오고 영원히 주님과 함께 있다. 지혜의 근원은 하늘에 계시는 하느님의 말씀이며
지혜의 길은 영원한 계명이다. 주님께서는 지혜를 만드시고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선물로 주셨다. 주님의 사랑은 영광스러운 지혜이며, 당신을 보여주실 이들에게 지혜를 베푸시어 당신을 알아보게 하셨다.”
주님을 사랑하여 알면 알수록 은총의 선물처럼 선사되는 사랑의 지혜임을 깨닫습니다. 옛 사막의 수도자들이 스승을 찾은 것은 살아 있는 삶의 지혜를 얻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느님을 추구하는 자는 저절로 지혜를 추구하게 됩니다. 하느님의 지혜이신 예수님과 함께 할 때 저절로 성장하는 사랑의 지혜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니 기도와 믿음의 삶은 지혜로운 삶에 직결됨을 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의 믿음을 더해 주며 지혜로운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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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누가 덕을 지닐까? 누가 덕 농사를 잘 지을까?>
"모든 지혜는 주님에게서 오고 영원히 주님과 함께 있다." "저는 믿습니다. 믿음이 없는 저를 도와주십시오."
오늘 집회서의 시작은 지덕(知德)에 관해 얘기하고 오늘 복음은 신덕(信德)에 관해 얘기하기에 오늘은 어떻게 덕들을 지닐까에 관해 묵상코자 합니다
오늘 저는 덕을 '쌓을까' 대신 '지닐까' 하고 얘기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말은 덕을 쌓는다고 흡히 얘기하장습니까?
그리고 이는 한자어의 적선(積善)과도 같은 맥락입니다. 적선을 말 그대로풀이하면 선을 쌓는다는 뜻이니 말입니다.
이처럼 동양에서는 선이나 덕을 내가 쌀는 것으로, 내가 농사지어 난가리를 높이 쌓듯이 쌓는 것으로 이해했고, 그러니까 나의 수행이나 노력의 결실로 생각한 것 같습니다.
이에 비해 그리스도교는 덕과 선 모두 하느님에게서 온다고, 다시 말해서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들이라고 얘기합니다. 만선(萬善) 만덕(萬德)의 근원이신 하느님이라고 흔히 얘기합니다.
프란치스코의 잔 꽃송이'에서 그는 왜 많은 사람이 자기를 따르는지, 자기의 덕을 칭찬하는 맛세오 형제에게 이렇게 답합니다.
'하느님은 당신이 하시고자 하는 그 놀라운 일을 위해서 그 이상 더 천한 피조물을 찾지 못하셨기에 나를 택하시어 이 세상의 존귀한 자, 아름다운 자, 강한 자, 지혜로운 자를 부끄럽게 하시고, 그래서 만선만덕(萬善萬德)은 창조주 하느님께 오는 것이지 결코 피조물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며, 누구도 하느님 앞에서 자랑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렇습니다. 프란치스코가 아니더라도 하느님을 겸손하고 진실하게 믿는사람이라면 만선 만덕이 하느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믿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은 모든 것을 창조하신 분이고, 모든 것은 모든 선이신 하느님께 나온 선들이라고 믿는 것이 프란치스칸 영성일 뿐 아니라 그리스도교 믿음이니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덕과 선을 어떻게 하면 지닐 수 있겠습니까? 아주간단하고 분명합니다. 주십사고 청하면 되고 기도하면 됩니다
오늘 어떻게 하면 악령을 쫓아낼 수 있겠냐는 제자들의 물음에 "그러한 것은 기도가 아니면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나가게 할 수 없다."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그런데 청하려면 가난의 자세, 네겐 없다는 자세가 필수입니다. 오늘 아이 아버지가 믿음이 없다고 꾸짓음을 듣자 취한 태도, 믿음이없으니 믿음이 없는 저를도와달라고 한 태도 말입니다. 사실자기에게 믿음이 있다거나 지혜가 있다는 사람은 청하지 않겠지요.
그런데 없으면서도 청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지금 없지만 내 힘으로 얻을 수 있다고 자신을 믿는 교만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지혜가 없는 사람중에서도 지혜가 없는 사람이고 우리가 흔히 무지막지(無知莫知)하다고 할 때 그런 사람입니다. 받아 지녀야 하는데 받지 않아 지혜가 없고 그래서 지혜로울 수 없는 것입니다.
반대로,자기의 가난을 인정하고 청하는 겸덕(謙덕)이 있는 사람이 지혜롭고, 이런 사람에게 하느님은 지혜를 후하게 주신다고 집회서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주님께서는 지혜를 만드고 그것을 당신의 모든 피조물에게 후한 마음으로 쏟아부으셨으며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선물로 주셨다."
이것이 우리 교리에서 말하는 주부덕(注賦德)입니다. 그런데 우리 교리는 습득덕(習得德)도 얘기합니다. 하느님께서 쏟아부어 주신 덕(주부덕)을 매일같이 갈고닦아 그 덕을 내 덕으로 만드는 것이 제 생각에 바로 습득덕입니다.
하느님이 비를 주시고 했빛을 주셔도 그것을 흘려버리지 않고 농사에 잘 활용해야 곡식이 영글듯 덕(德) 농사도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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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그러한 것은 기도가 아니면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나가게 할 수 없다."(마르9,29)
<믿음과 기도!>
오늘 복음(마르9,14-29)은 '어떤 아이에게서 더러운 영을 내쫓으시는 말씀'입니다.
벙어리 영이 들린 아들을 둔 아버지가 그 영을 쫓아내 달라고 제자들에게 부탁하였지만, 그들은 그 영을 쫓아내지 못하였습니다. 이 사실을 예수님께 말씀드리자, 그들에게 이르십니다. "아, 믿음이 없는 세대야! 내가 언제까지 너희 곁에 있어야 하느냐? 내가 언제까지 너희를 참아 주어야 한다는 말이냐? 아이를 내게 데려오너라."(마르9,19)
그리고 예수님께, "이제 하실 수 있으면 저희를 가엾이 여겨 도와주십시오."(마르 9,22ㄴ)라며 도움을 청하는 아이의 아버지에게, "'하실 수 있으면'이 무슨 말이냐? 믿는 이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마르9,23)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아이 아버지가 곧바로, "저는 믿습니다. 믿음이 없는 저를 도와주십시오."(마르 9,24) 하며 간청합니다.
예수님께서 더러운 영을 꾸짖으시어, 그 영을 그 아이에게서 쫓아내십니다. 그리고 "어째서 저희는 그 영을 쫓아내지 못하였습니까?"(마르 9,28)라고 묻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그러한 것은 기도가 아니면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나가게 할 수 없다."(마르 9,29)
'믿음과 기도!'
오늘 복음은 '믿음과 기도의 관계'에 대한 말씀입니다.
'믿음과 기도는 결코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이며, '믿음이 동반된 기도의 힘'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 안에 머무는 기도,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드러난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극진한 사랑 안에 머무는 기도 그 자체'를 통해 나의 믿음이 드러납니다. 믿음은 이처럼 나의 머뭄 기도를 통해 드러나고, 믿음을 키우기 위해서 우리는 기도합니다.
'나의 기도가 믿음이 동반된 기도인지?'
'믿음을 키우기 위해서 나는 얼마나 기도하고 있는지?'
'함께 성찰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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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저는 믿습니다. 믿음이 없는 저를 도와주십시오."(마르 9, 24)
오늘 복음에서는
기도하는 부모가
되게 하십니다.
기도는
우리의
모든 생활에
활력과 생명력을
불어넣어 줍니다.
부모가
기도로 바뀌면
온 가족이
바뀝니다.
우리의 신앙도
성숙해지는
어른스러움이
있어야 합니다.
어른스러움이란
조르고 부탁하는
것에 멈추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활로
실천하고
이루어내는
겸손한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법을
다시 배우고
깨닫는
믿음의
시간입니다.
하느님과
우리가
한 몸이
될 수 있는
것은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뿐입니다.
믿음은 기도로
드러납니다.
기도는
믿음의
실천이며
믿음의
생활입니다.
우리의 삶이란
믿음을 딛고
일어서는
겸허한
삶입니다.
우리의
힘만으로는
안되는 것을
하느님께서
도와주십니다.
우리의 부족함에
필요한 것은
하느님의
도우심입니다.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우리는
어려운 일을
하나하나
극복해 내며
살아가는 힘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몸과 마음의
정화로
저마다의
가정과
공동체가
새로워지길
바라는 간절한
믿음의 기도가
이 하루를 엽니다.
기도가
믿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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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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