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의 예식 다음 목요일>
<불행의 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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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나에게만 이런 일이 닥칩니까?”
경남 하동에 사는 1급 지체장애인 성태근씨의 삼남매는 모두가 지체 장애인들입니다. 6살 무렵부터 이들 모두는 휠체어가 아니면 움직일 수도 없는 장애인이 되어 교육은커녕 제대로 된 치료도 받지 못한 채 서른 살 가깝도록 집에만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맏이인 태근씨가 라디오에서 소리를 듣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내가 행복해야 세상이 행복해진다!”는 짧은 멘트였습니다. 그 때 태근씨는 결심하지요.
‘글을 배워야겠다. 행복하기 위해서 공부를 해야겠다.’
서른이 넘은 동생들을 설득해 초등학교에 진학하기로 마음을 모읍니다. 그렇게 2001년부터 초등학교에 입학해 6년 동안 주간에 3일 방문수업을 통해 졸업했고 2009년에는 중학교를, 그리고 주위의 도움으로 올해 2013년에는 삼남매가 같은 날 ‘하동고등학교’ 졸업식에 참석하기에 이릅니다. 태근씨가 마흔 다섯, 둘째가 마흔 둘, 막내가 마흔의 나이였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더 행복해지기 위해 다시 결심합니다. 도예와 전자기기와 장애인 복지를 위해 진주 혜광학교에 진학하여 왕복 2시간 거리의 학교생활을 도전할 생각이랍니다.
우리들은 인생에게 이런 질문을 간혹 던지곤 합니다. “왜 나에게만 이런 일이 닥쳐요?”
내가 무슨 잘못을 했길래 이런 고통을 겪고, 남들 다 잘 사는데 왜 나만 이렇게 살아야 하냐고 부르짖습니다. 하지만 솔직히 말씀드린다면 왜 유독 당신만 그런 고통을 겪고, 왜 유독 당신만 그런 병고를 겪으며, 왜 유독 당신만 그런 불행 속에 떨어져 있어야 하는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말씀드려야 합니다. 그것마저도 <삶>이라는 사실입니다. 태근씨 3남매는 20년 동안 “왜 나에게만 이런 일이 닥쳐요?”만 물었을 것입니다. 원망할 수 있고 절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바뀌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상태는, 현실은, 세상의 시선은 하나도 바뀌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세월이 지나 그들은 한 가지를 바꾸기로 합니다. 상태는 바꿀 수 없더라도 태도를 바꾸기로 했고, 현실은 바꿀 수 없더라도 꿈은 바꾸기로 했으며, 세상의 시선은 바꿀 수 없더라도 세상의 도움은 구하기로 했습니다. 그런 변화가 10년이 흘렀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할 수 없는 것 때문에 불행한 것이 아니라 할 수 있는 것 때문에 행복한 줄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모든 삶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규칙입니다. <할 수 있는 것을 찾는 것이고,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상황에서라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불행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모든 상황에서, 할 수 없는 것만을 먼저 찾는 것이 ‘불행의 순서’입니다.
아파서 못합니다. 늙어서 못합니다. 힘들어서 못합니다. 왜 못하는 것만 찾습니까? 할 수 있는 것을 찾으십시오. 아파도 할 수 있는 것이 있고 늙어도 할 수 있는 것이 있으며 힘 없어도 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빌어먹을 힘만 있어도 은총’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 사순시기 때면 꼭 듣게 되는 이 말씀을 우리는 대단히 장엄하고 엄숙한 명령으로 장식하지만, 사실 날마다 져야만 한다는 자기 십자가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병이고 고통이고 눈물이고 상처고 욕망이고 좌절이고... 다 좋습니다. 죄다 ‘십자가’라고 칩시다. 그런 십자가를 진다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바로 그런 것 속에서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감당하는 일 아니겠습니까?
병들고 고통 받고 눈물 흘리고 상처 입었다고 그저 이게 나의 십자가요, 왜 나에게만 이런 십자가 주십니까? 질질 울고 앉아 있는 것이 십자가 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심은 이 십자가를 통해서도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을 끝내 찾으셨기 때문이고 그것을 끝내 이루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어짜피 생명과 죽음, 축복과 저주는 인간 앞에 놓인 ‘운명’입니다. 이것은 인간에게 ‘주어진’ 것이면서 동시에 인간이 ‘성취’하는 것입니다. 살 길을 찾는 자가 있는가 하면 죽을 길만 가는 자도 있습니다. 어쩜 그렇게 축복받을 일만 하는 자가 있는가 하면, 자꾸만 스스로(“왜 나만!”)를 저주로 몰아넣는 자도 있습니다.
불행도 그 자체로 저주는 아닙니다.
어렵지만 불행도 축복으로 바꾸는 이들이 있으니까 말입니다.
병고도 그 자체로 저주가 아닙니다.
병고마저 축복으로 바꾸는 이들이 아주 많이 있으니까 말입니다.
상처도 그 자체로 저주가 아닙니다.
그것마저 더 큰 치유로 바꾸는 이들이 분명히 있으니까 말입니다.
또 있습니다. 죽음, 그것마저 생명으로 바꾸신 분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이 모든 이들의 공통점은 한 가지입니다. 십자가 아래서도 그들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것을 찾았고 그것을 끝까지 실행하였다는 점입니다. 단지 이 이유 때문에 그들은 모두 저주마저 축복으로 바꿀 수 있었습니다.
이제 나의 십자가가 무엇인지 묻지 않겠습니다.
다만 그것에도 불구하고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이것이 묻고 싶어졌습니다. 아멘.
첫댓글 이것은 모든 삶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규칙입니다. <할 수 있는 것을 찾는 것이고,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상황에서라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불행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모든 상황에서, 할 수 없는 것만을 먼저 찾는 것이 ‘불행의 순서’입니다.
아파서 못합니다. 늙어서 못합니다. 힘들어서 못합니다. 왜 못하는 것만 찾습니까? 할 수 있는 것을 찾으십시오. 아파도 할 수 있는 것이 있고 늙어도 할 수 있는 것이 있으며 힘 없어도 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빌어먹을 힘만 있어도 은총’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